저는 커다란 건물을 가진 교회나 값비싼 오르간이 있는 교회, 수많은 인파가 예배당을 메운 교회를 부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가슴 저미도록 그리워하는 교회는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저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신 후로부터 이러한 소망은 갈망이 되었습니다. 서문을 쓰는 이 시간도 조국 교회의 예배현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에서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렘 2:13)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지시하신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통해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심으로 예배가 살아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거룩한 은혜와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아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얻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설교자와 예배자의 갱신이 없이 방법과 형식의 변화로 예배를 갱신해 보려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예배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다름이 없습니다.
1997. 4.
열린교회 목양실에서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차례
서문
책을 열며
1장 어느 소년의 고백 23
2장 예배견디기47
3장 이상한 제육볶음99
4장 들어야 할 목소리 115
5장 밤나무의 추억 139
6장 지갑이 회개할 때 163
7장 어느 사형수의 노래189
8장 더 값진 예물 215
9장 웃기는 심포지움 235
저자소개 김남준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한국 교인들의 정서를 관통하는 지적이고 뜨거운 메시지로 참된 부흥의 불길을 전국에 퍼뜨리고 있는 불꽃 김남준 목사는 총신대에서 목회학 석사, 신학석사, 신학박사 과정을 마쳤다. 평소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일체의 시류적인 영합을 배격하는 청교도적 설교로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대신대학과 기독교대학교 신학부에서 전임강사와 조교수를 지냈으며, 방배동에 열린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다. 영적 각성과 진정한 부흥정신의 회복을 외치는 책〈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가야 한다〉와 목회자 지망생들을 위한 종합적인 안내서〈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이상 두란노)를 펴내는 등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 담아내기에 힘쓰고 있다.
책을 열며
어떤 예배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항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요즘의 예배 세태를 반영하는 일화 한 토막이 우리를 웃기지만 이내 우울하게 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 정신을 상실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누룩처럼 번지는 형식적인 예배와 예배할 의무에 대한 태만은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영적인 침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배교에 가까운 형식주의와 냉담한 예배의 원인에 대해 각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예배는 민방위 교육?
오늘날 조국 교회가 당면한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형식화된 예배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렇게 형식화된 예배의 문제는 단지 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의식도 없이,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도 없이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은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영광스러운 회복 없이 교회가 영광스러웠던 시절을 본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라진 예배는 모든 방종한 삶의 원인이 되어왔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느낄 수 없는 형식적인 예배야말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정신을 잃은 예배
예배는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반영입니다. 한 교회는 자신의 영적 수준을 능가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고, 그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에배 이상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수준은 예배 안에 갇히고 예배의 질은 삶의 질에 묶입니다.
틀에 박힌 예배
이렇게 교회에서 쏟아져 나와 돌계단을 내려와 흩어지는 회중들의 모습 속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러 나가는 영적인 군사의 용맹스러움을 읽을 수 있습니까?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세리의 심정으로 예배당 한 구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감격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가슴 깊이 충만해진 진리로부터 험악한 세상은 이길 신령한 힘을 공급받고, 올 때는 패잔병 같았으나 교회를 떠날 때는 결의에 찬 용사가 되어 교회당을 나서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까? 그들 중 태반은 에배시간에 들은 설교의 본문조차 기억을 못하며 교회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왜 그런 곳에 나타나시겠습니까?
빗나간 예배 갱신운동
조국 교회에서 예배를 갱신해야겠다는 인식은 이미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 갱신운동들이 성경적인 가르침의 요점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지리멸렬에 가까운 예배를 답답해하면서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예배 이외의 프로그램들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틀에 맞춰서 더욱 간단한 형태로 진행하는 대신, 여러 가지 훈련 프로그램이나 행사들에 교인들을 참가시키는 것을 교회생활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시도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답답한 예배의 분위기 갱신을 위해 예배 속에 더욱 즐기는 요소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대규모 성가대를 운영하는 일에 열심을 냄으로써 예배의 변화를 주고자 하는 것이나, 많은 악기에 의존하여 현대풍 곡조의 찬양을 열렬하게 부르게 하여 예배를 전도집회 형식으로 바꾸어보는 것이나, 오케스트라 같은 것을 구성하여 에배에 참여하게 하는 것도 그런 생각의 발로입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멀티미디어 같은 첨단 영상기재들을 동원한 원격위성 예배까지 시도되고 있습니다. 위성 통신을 이용하여 흩어져 살고 있는 교인들이 본 교회가 아닌 소위 지역 성전에서 대형화면을 통해 화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강단을 공연장의 무대처럼 꾸미거나 예배를 위하여 첨단조명장비, 음향시설 같은 것들을 설비하는 움직임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필요한 영적 진단
이러한 시도들이 예배분위기의 갱신을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회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배는 어떤 식으로든지 속박일 수 없습니다. 한 시대가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각성의 필요 아래 놓여 있던 시기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느낌과 목마름
우리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함에 있어 매우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 무엇을 느끼고 있든지 그 느낌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혹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여기지 않으실까요?
오히려 우리는 느낌을 하찮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이 있었던 교회 시대의 예배에 대해 연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엄한 해후가 예배 속에서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러났으며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때 그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풍부한 사례와 증언 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교회가 어떻게 예배드리고 그 예배 안에서 그 백성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그 예배를 통해 무엇을 얻게 되는지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그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을 그리워하게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교인만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국 교회가 이 복되고 약속있는 예배를 회복하게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영광스러운 회복 없이는 교회의 회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불꽃처럼 드려져야 합니다
1. 어느 소년의 고백
예배, 신앙의 중심부
신앙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의 예배상황은 영적인 수준과 신앙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지금 같이 사는 사람도 그녀의 진짜 남편이 아닌,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주제로 이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이 우물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이제 목마르지 않는 바로 그 물을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지 않고 흡족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과 예배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성경에서 공적인 예배는 언제나 개인적인 예배와는 별도로 강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들임을 예배 속에서 입증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당신이 쓰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단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그분만을 경배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예배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공적인 예배에 함께 참여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이 말씀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공적인 예배의 모임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일들을 게을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둡고 추울수록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예배해야 할 필요를 더욱 많이 느꼈습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모이기를 즐거워했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배하며 산 성도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적인 예배에 대한 강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후 그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상실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의해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 4:4,5)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가와 하나님 앞에 어떤 판단을 받고 있었는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온 땅에 생명 있는 것들을 물로써 심판하신 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를 주신 것도 바로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온 땅을 심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모세시대에 율법을 따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공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겨레공동체에서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태만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나서 그 사건은 즉시 선명한 복음의 선포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를 갖게 되었고 그 진리가 울려 퍼지는 곳에는 예배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온갖 위협과 대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위대한 능력을 예배를 통해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경의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공적인 예배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는 세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만은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클락슨(David Clarkson) “공적인 예배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은 살아난다. 성자께서는 그곳에서 병든 영혼들을 말씀으로 고치신다. 그 예배에서 성자께서는 사단을 쫓아내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공적인 예배에서만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예배는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한 정상적인 수단이다.”
세일만도 못한 예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마치 행동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경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는 교회에 대한 것도 아니고 목회자를 향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목회자에게 인간적으로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안중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기피할 때 교회는 여러분 없이도 은혜를 사모하는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목회자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유익을 위한 특권이고 또한 하나님을 위한 의무입니다.
은혜받는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을 지키도록 제정해 놓으심으로써 육신이 쉴 수 있도록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휴식이나 안식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날이 바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편의대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사소한 일들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행해야 할 예배 참석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쓰고 애쓸지라도 영혼은 핍절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 1:5,6)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예배에 참석해야 할 시간에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는 여러분이 없어도 될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지정된 그 시간에 그곳에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예배드려야 할 그 시간에 자신의 예배의무를 버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예배시간을 아끼고 살면서 일평생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예배시간까지 바치면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까요? 여유가 생기면 그때는 예배를 잘 드리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평생 쫓기듯이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공적인 예배에 힘을 다하여 참석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어려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에 힘쓰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림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행동입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것은 의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따르는 마땅한 의무를 다하며 살겠다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공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실로 배교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마저도 없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의무감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할 마음도 없고 나아가서 예배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나쁩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막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약속 있는 은혜의 수단
이 시대의 불신앙의 풍조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늘날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아무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의 너그러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기뻐해도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기를 힘쓰십시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거나 목회자의 이해를 구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회복된 예배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할수록 여러분은 심각한 영적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릴 것이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또한 하나님 자녀로서 본분이 무엇인지도 잊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공적인 예배 참석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신앙 의무에 대해 방만한 것이며 그렇게 예배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떠난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적인 삶 속에서 이미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이 예배의 장소에서 이탈되기 전에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백성 중에 횡행하는 헛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단호한 태도를 보면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유행하던 헛된 예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마15:8,9)
마음을 다하는 예배인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이 사라질 때마다 차가운 형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영이시고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단지 차가운 형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요구나 만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것인지 혹은 진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몸은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생활들을 한 순간 예배하는 형식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의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입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다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그러한 생각이 고쳐지기 전에는 예배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굳은 마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감동하는 것도 바로 이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는 감격이 있고, 그렇게 감격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감동받으십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감격적인 예배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한 그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매일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오는 그를 마귀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성난 파도와 같고 죄악의 탁류가 홍수와 같을 지라도 그는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뵈옵는 신앙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영적 생기도 고갈되어 있을 것이며 언젠가 반드시 물러가 침륜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예배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특권
하나님의 교회가 다른 세속 기관과 다른 것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문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건지십니까?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을 부여안고 어두운 길에서 헤매며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비참한 인생들을 어떻게 건지십니까? 삶과 죽음,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에 서서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갈 길을 보여주십니까? 그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배의 최대 목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기대를 갖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의 바람으로 시작되고 그러한 바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간구하는 바가 없이 기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참여하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인 정신
우리는 예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게다가 예배를 통해 주시는 거룩한 약속들이 은혜로 나타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패 위에 무지를 더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배의 축복이 사라진 교인들이 모여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 모두 바로 그런 형식적인 예배의 공범인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원인은 갈망이 없는 예배생활입니다. 세속에 대한 열심과 열망은 영적인 예배를 향한 영혼의 열망을 감퇴시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수 많은 대화의 내용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관심거리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형식적인 예배를 통해 잃어버린 신앙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성취하지 못한 욕망과 누리지 못한 기회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음란한 마음으로 세상을 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배를 떠나 있습니다. 그들이 세속을 향한 뜨거운 열심을 간직한 채 신령한 예배를 향한 갈망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습관적인 지각, 준비 없이 드리는 헌금, 예배보다는 예배 이후의 시간을 고려한 옷차림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교회당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행동은 모두 준비되지 못한 예배의 단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일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실 것입니다. 예배가 주일의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최상의 건강과 최상의 마음, 최상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이 되기 위해서 한 주 동안 준비하십시오.
맺음말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삽니다.일주일을 살기 위하여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고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애타게 기도하십시오. 이러한 간구와 기도 없이 예배에 나와서 단지 은혜로운 설교를 듣기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습니다. 예배는 삶 안에 갇히고 삶은 예배 안에 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거룩한 만남을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예배의 거룩함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자의 가장 큰 제물이 하나님을 향한 상한 마음이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2. 예배 견디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견디고 있습니까?
요즘은 예배가 성도들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예배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그리고 그 형태도 천태만상입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보는 읽기파,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 들여다보는 시간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 있는 회의 준비하는 회의파, 성경읽기로 시간 때우는 실속파, 이런 식의 예배태도는 단지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바로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의 모습들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배 속에서 성령과 교통이 없고 인간의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어떻게 무관심한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때 그들은 성령의 증거와 말씀의 진실 앞에서 자기 자신 때문에 고뇌합니다.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영적인 역사를 동반한 예배 가운데 그들은 뜨거워지기도 하고 흔들리던 마음이 냉정을 되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일어납니다.
예배, 하나님과의 만남
소망이 없는 교회일수록 더욱 예배다운 예배가 필요합니다. 죄인들로 가득 찬 교회일수록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필요성은 증대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 백성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결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왜 똑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다른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예배를 통해 대답을 듣게 됩니다.
본질적인 두 요소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갖지 않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예배를 통해 받는 영적인 영향보다는 의식과 형식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문제는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은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in truth)’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 안에 만영되어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근거 없는 자기만족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절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지 귀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과 진리
‘신령과 진정으로’,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은 ‘영과 진리 안에서 (in spirit and truth)’라고 읽습니다. 즉 예수님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산’도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서’ 가 아니라 ‘어떻게’ 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먼저 예배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배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우선적인 사역은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그 인격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에서 ‘영’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본질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지 장소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의 예배하는 방식은 영과 진리 안에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자를 찾으심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전폭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예배로 표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득 찰 때 그가 무엇을 할까요? 마음속이 하나님을 모셔들이고 싶어하는 사모함과 경외심으로 가득 찰 때 그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예배드리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단지 정규적으로 드리는 교회의 예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는 그 모든 삶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그들의 예배는 냉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 예배의 원형
예배가 무엇일까요? 제사는 예배의 원형(proto-type)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기른 짐승을 가지고 성전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 기도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겨가고 성전에서 그 제물 되는 짐승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아주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갑니다. 그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방의 제사 개념
제사 현장에서 그렇게 죽어가는 제물들의 죽음을 통해서 제사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기대하는 바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만나주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영혼에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심령에 자유를 주셨습니다.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이방의 죄 된 문화에 둘러싸여 있던 그 시대 한가운데서 오직 진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의 동기였습니다.
예배를 위한 교회
교회는 단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변화의 매체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영혼의 교통이 있고 성령과의 사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한 영적 교통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느끼며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고통 받으며 신음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비정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하나님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도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인 것입니다.인간의 본성은 예배를 통해 바뀌어가야 합니다. 예배가 영혼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성도의 성도됨이 드러날 수 있으며 교회의 교회됨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자각
무엇보다도 오늘날 예배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배자들이 예배 가운데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하찮게 됩니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제물인 짐승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제사장의 선언을 통해 제사드리는 자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고, 이윽고 그 제물이 죽어갑니다. 제사 속에서 죽어가던 양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얀 양들이 그 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비명소리에 죽어가고 사지가 잘리며 온몸이 각떠집니다. 내장이 헤쳐지고 살과 기름이 분해되며 콩팥과 쓸개가 나누어집니다. 짐승들이 죽어가는 그 자리는 한마디로 피바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끔찍한 방법으로 제사의 규례를 정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연식 교육방식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던 모든 예배자들은 그렇게 죽어가는 짐승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동일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심각함 입니다. 죽음을 불러오는 죄, 자신을 그렇게 죽음으로 데려가야 할 죄의 값을 짐승에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이것이 제사드리는 자들이 제일 먼저 깨닫는 사실이었습니다.죽음을 당하는 것은 제물이지만 이미 그 아픔은 예배자의 심령 깊이 다가왔고 피 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죽어 마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죄 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바로 이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피 토하는 경고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실제의 세상살이가 분리됨을 느낍니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원론적인 삶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어리석음은 모두 예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친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의문에 매여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근복적으로 영적인 일에 대하여 대부분의 감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커져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를 경험하게 하심
“당신, 하나님을 보았소?”
만약 여러분이 이 같은 질문을 받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이 전도하는 모든 내용들은 설득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그것은 곧 우리가 성령을 경험하였다는 것이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두 눈으로 보는 것만 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양심의 실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합병원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 어디도 ‘양심과’라는 간판을 붙인 진료실은 없습니다.
해부학적으로는 양심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 이상의 예배
우리는 이미 참회 없이 드리는 예배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비할 데 없는 죄인들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교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예배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참회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은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재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의 어떤 사건을 동반해야 합니다. 침묵을 능가하는 신령한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교인, 교인과 예배순서 사이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임하실 때
성령이 설교자를 붙잡아주시고 말씀 선포 가운데 함께하시면 평범한 설교라도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찌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기름 부어진 한마디 말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또 능변으로 늘어놓는 수천 마디 말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을 지배하던 세속적인 욕망과 더러운 탐심을 축출하고 하늘의 거룩한 은혜로 충만해지도록 만드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예배, 그것은 마치 국경일에 거행되는 기념행사 같은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이 무겁게 깃들인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이 가득 차게 만드실 수 있으며,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을 일으키셔서 함성을 지르는 군대와 같은 교인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요소들을 살아나게 만들어주는 그 모든 힘의 원천은 오직 성령이 예배 중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신을 따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교통이 깃들인 살아 있는 예배가 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예배를 통해 가르치거나 그러한 교리에 기초하여 성령이 슬퍼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있다면 성령이 함께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죄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죄가 무감각을 가져오고 그러한 영적인 무감각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를 통해 기대하는 것이 없도록 작용합니다.따라서 살아 있는 예배를 위하여,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진 마음을 씻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격할 정도로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와 공교한 형식을 존중하며 그 안에서 제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에 찾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이었지만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종교 행위 중 하나가 예배일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정신대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단지 그 형식의 준수를 은신처 삼아 안주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사도들을 하나님은 경멸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수하고 완전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싫어하시는데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예배의 정서적 요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죄 가운데 곤고한 자들과 허물로 인하여 고통하며 상처를 인하여 영혼이 곤궁한 자들을 찾으십니다. 세상에서 낙인찍힌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가 예배를 통해 주어지는 축복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정서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신령하게 드려진 예배의 결과입니다.
초기 미국 청교도들의 예배
예배의 목표 자체가 예배자들에게 정서적인 자극을 주거나 충격을 주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배에 이런식의 목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예배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오늘날 예배 가운데 과도한 악기나 열광적인 찬양의 순서나 예배실에 지나친 실내장식이나 조명시설을 설치하는 등의 일은 예배갱신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한 요점에서 벗어나는 일들입니다.
정서를 새롭게 하심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입니다.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교인들이 거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정서’(holy emotion)를 경험하게 됩니다. (후회, 탄원, 열정, 두려움, 근심, 신비, 사랑, 아픔, 절망, 신뢰, 고난, 목마름)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에서는 예배자의 이러한 정서적 갱신(emotional renewal)이 반드시 예배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배의 이러한 효과는 바로 예배 안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배와 십자가 사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만큼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깨닫게 해주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줍니다. 따라서 예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과거의 사건으로 문을 돌리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 성령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쳐주시는 은혜, 이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배하는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중심성
한 교회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영적 깊이는 그들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식하고 느끼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교회의 예배에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는 한, 인간의 눈에 미련한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자유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두 번째 교훈은 예배에서 맛보는 자유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예배에는 분명히 정해진 순서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이런 것들을 모두 배척하는 사람들이 교회 역사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극단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예배에서 규모를 잃어버림으로 그들이 구한 자유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내가 본 빈야드 집회
지난해 여름, 빈야드 운동이 한창인 캐나다 토론토의 빈야드 에어포트 교회(Vineyard Airport Fellowship Church)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약 이천여 명의 교인들이 운집하였습니다. 티셔츠 차림의 목사가 자유스럽게 찬양도 인도하고 간증할 때 사회를 보기도 하고 축하순서를 진행하기도 하고 간단하게 은혜받은 이야기도 했습니다. 성경 본문을 읽지도 않은 채 간증 같은 이야기를 몇 사람이 계속하였습니다. 물론 대규모의 뮤직 밴드(music band)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형식이 없는 집회를 예배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집회 형태는 19세기 미국에서 흔히 유행하던 전도집회의 모습을 많이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회 형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렇게나 모여도 분위기만 은혜로우면 그것이 곧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저는 반대입니다. 전도집회고 예배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그 분위기가 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모임의 목표는 같지 않습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찬양집회 같은 것으로 예배를 대신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역사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으로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당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목회적인 유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형식을 파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성령이고 그것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역사의 결핍이지 형식 그 자체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파격이
설교를 30분 정도에 마치는 것이 예정된 예배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설교자를 붙잡았습니다. 그 설교자는 진리의 말씀을 실로 오랜만에 폭포수같이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교인들도 그 진리의 말씀에 붙잡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예정된 설교 시간을 거의 모두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설교자를 사로잡아 본문의 진리가 개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 후에 있을 식사시간과 각종회합을 위한 시간 계획을 고려하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즉시 설교를 마쳐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충분히 말씀하시도록 더 설교를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규모를 지키면서 예배드리지만 그러나 성령이 그 규모 안에서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친히 예배의 주관자가 되시고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역사하셔서 우리 자신을 바꾸어놓으실 수 있도록 파격(?)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맺음말
성령이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고 치유도 없으며 진정한 참회와 사죄의 확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습이 경견해도 결국은 형식을 숭상하는 바리새인의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배다운 예배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인은 여타의 인간적인 방법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교인들보다 더욱 성경의 기대에 가까워집니다.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성도들로 가득차게 되고 그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요한 침묵으로 드리는 무감각한 예배야말로 우리와 우리 시대 조국 교회에 진정한 신앙 부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불꽃처럼 드려지도록….”
3. 이상한 제육볶음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하)
말씀의 요리사
언젠가 식당에서 여러 가지 메뉴가 실린 차림표를 보며 망설이다가 제육볶음이라는 요리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잠시 후 제 앞에 놓인 제육볶음이라는 요리에 젓가락을 대고 아무리 뒤적거려도 양파와 파, 양배추 잎사귀 같은 것 투성이고 고깃점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교가 제육볶음이라면 그 안에 깃들인 진리는 고깃조각에 해당합니다. 교인들의 영적인 요구와 필요, 신앙과 지식의 수준에 따라 설교자는 말씀을 요리해야 합니다.아무리 좋은 고기라 할지라도 요리하지 않고는 사람들이 즐겨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기 요리를 잘한다 할지라도 정작 그 안에 고기가 들어 있지 않다거나 저질의 수입육을 사용했다면 눈속임 요리라는 악평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예배에서 설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예배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 설교가 진리를 선포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 요소:진리
예배에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예배생활이 지속될 때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심령이 더욱 굳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룩한 은혜의 감화도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실천을 강요받고 행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죽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일수록 더욱 자신들의 예배에 만족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것은 거짓된 심리적 만족입니다.
만날 때마다 말씀하심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지 감정적인 흥분이나 감격 이상의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식의 체험은 이방 종교의 엑스터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서 찾아오신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교훈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입니다.하나님 뵈옵기를 원한다는 갈망이 결국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갈망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가장 큰 체험
출판계에 종사하시는 어느 분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쓰신 책을 읽어보니까 많은 영적 체험을 하신 것 같은데 그런 풍부한 체험을 하신 가운데 가장 놀라운 체험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병도 나아보았고, 은사도 받아보았고, 능력도 받아보았지만 그러나 내게서 가장 놀라운 체험은 말씀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말씀 체험이 제 인생을 바꾸어놓았고 오늘 나의 글과 나의 말을 만들었습니다. 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빛도 필요하듯이 우리에게는 뜨거운 열정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정리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체험을 하지만 체험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받는 진리가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입니다.같은 성령을 체험하면서도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붙들리지 않고 수많은 성령의 체험들도 우리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시내산을 오르며
예배는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자신의 의복을 정결케 하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며 거룩한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거기에서 하나님을 뵙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거룩한 헌신을 맹세합니다. 그러고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산을 내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배에서 설교의 위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면서 그 예배를 통해서 성령 주시기를 기도하는 자신을 속이는 기도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인의 진정한 영적 변화는 예배를 통해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인들의 변화는 오직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풀고 해설하여 전해주는 설교가 상경과 똑같은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되게 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 아주 맑은 샘물이 있다고 합시다. 그 샘물의 순수함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 전해질 때까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떤 그릇으로 어떻게 그물을 떠서 운반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 샘물이 한없이 맑고 정결하다 할지라도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불결한 그릇에 그 물을 퍼서 담는다면 그 물은 옹달샘에 있을 때의 정결함을 상실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위하여 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은 위협받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인 어려움도 가중되었습니다.
맺음말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예배 위기는 단지 성직자의 화려한 복식이나 아름다운 실내 장식, 열정적인 찬양팀의 운영이나 전문적인 성가대의 운영이나 예배 순서의 현대적인 변화 등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회복 없이는 예배가 회복된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속에서 정직한 복음 선포와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는 설교 회복을 통해서만 예배는 비로소 예배답게 될 수 있습니다.우리는 예배 속에서 순수한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들어야 할 목소리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7:23)
못 말리는 형제
제가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을 목회할 때 일입니다. 열심을 내기로 이름난 한 형제가 예배가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이 친구의 기이한 예배 태도였습니다. 찬송을 좋아하고 악기도 다룰 줄 아는 터라, 이 형제는 자주 찬양인도자로 섰습니다. 그때마다 이 형제는 찬양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감동이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찬양하던 이 형제가 설교시간에는 언제나 졸았습니다. 잠에 취하다시피 설교시간을 지내고서는 제가 설교 후 “주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자.”고 제의하는 통성기도시간에는 제일 큰 목소리로 열렬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 희귀한 예배태도를 저는 항상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형제에게 열심은 발견되는데 견고함을 찾을 길이 없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목회자인 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든 뜨거워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머리가 혼탁한 사람의 열심은 신앙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열심히거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에 해로운 뜨거움이기 쉽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나 연단된 꿋꿋함, 성숙한 경건 같은 것을 그런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진주를 돼지우리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깨닫는 것 없는 신앙생활은 목양을 받는 교회생활이 아니라 사육받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진리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주시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과 나뉠 수 없는 예배
“너희가 나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지내는 제사에 관심이 없으니 너희나 잘 먹고 살아라.”(렘 7:21)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지 못할 때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자의 삶과 예배가 나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배자에게 문제 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예배드리기 전 일주일 동안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참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앞에서 먼저 나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와 우리가 살아온 삶의 격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영혼이 깨어지지 않고 모든 제사와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고 예배를 드릴 때 진리로 말미암는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우리의 삶이 예배정신에 합동한 삶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과 같은 나의 삶
어느 날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가 윗필드의 생애를 읽으면서 커다란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초인적인 수고 속에서 복음을 전했던 순회 설교자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 같은 격심한 수고에 자신을 바치면서도 그는 매일 밤, 열다섯 가지 항목의 점검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설교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관리의 태도를 확인하며 “나는 거의 동물처럼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 개인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하였고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탕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삶에 대해 생각하라
만약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예배하는 형식만을 되풀이함으로써 단지 예배를 값싼 은혜의 도구정도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아무 날 무슨 순서로 예배하든지 너희 맘대로 해라.”
실패한 자를 받으심
항상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열납되지 않던 시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던, 자기의 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감격이 있는 예배에는 항상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실패 가운데 더욱 주님을 찾았고 그 사모하는 마음은 예배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하나 소외받거나 고난을 받으면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은 더욱 예배를 사모하였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배신당하는 적이 없습니다.왜냐하면 결코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예배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목소리에 순종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도록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얼마나 갈망하고 계십니까?마음을 바쳐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예배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예배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신을 상실한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잡니까?
오늘날은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신성모독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너무나 피곤하면 예배 중에도 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한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반복적으로 같은 시간에 되풀이되고 있다면 이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자신을 오래도록 방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하나님이 당신께 예배드리는 우리가 그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졸음을 친구로 삼아 예배드리는 것을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t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몸은 교회당에 있으나 그의 마음은 침대에서 뒹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에 당신이 졸음을 참을 수 없다면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한다.”
기도원에서 만난 사람
언젠가 어느 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 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한 성도가 제게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남루한 옷에 털모자를 뒤집어 쓴 병색이 깊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저와 함께 오랜 세월을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하던 지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해 주시는 은혜로운 예배시간에 꽤 오랜 기간 거의 매주 졸던 사람이었습니다.저는 그 지체가 예배시간에 졸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예배하는 동안 그는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거듭되는 중요한 경고를 놓쳤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그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저는 거기서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자의 영적인 손해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핑계를 찾지 말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도들의 한 핑계 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자에 대한 인격적인 흠을 빌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훌륭한 빌미는 목회자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인격적인 흠이나 생활의 결함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이 있을 때 떠벌리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나는 그 설교자에게 너무나 실망했어. 목사가 그럴 줄이야. 여태껏 은혜 받은 것 다 헛것이었어. 나는 이제 설교는 듣지 않기로 했어.”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 되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인격이 아니라 그 설교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러한 거룩한 삶이 설교의 주석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맺음말
하나님께서 깨닫는 것을 예배에 중심이 되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해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설교를 통해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예배태도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5. 밤나무의 추억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눅 20:10)
꼬마의 청구서
어느 날 화장대 앞에 놓인 한 꼬마의 쪽지를 엄마가 보았습니다.
학교에 가면서 경대 앞에 올려놓은 하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드리는 청구서
저는 엄마에게 아래와 같이 청구하오니 속히 지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동생 돌보아준 값 600원
방청소 한 값 500원
아빠 출근하실 때 구두닦아 놓은값 300원
슈퍼에 엄마 심부름 갔다온 값 200원
산수시험 만점 받은 값 1,000원
합 계 2,600원
내일 까지 지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튿날 이 어린이가 학교에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서 친구들과 함께 먹으려고 하는 참에 도시락 가방에서 하얀 쪽지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주는 청구서 - 나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구나
너를 뱃속에 넣고 열달 동안 고생한 것 공짜
십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준 것 공짜
아팠을 때 너를 업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가 응급실에 실어다준 것 공짜
뒷집 깨뜨린 유리창을 물어준 것 공짜
앞으로 너를 양육하는 데 드는 비용 공짜
합 계 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 도시락 편지를 보며 아들도 감격하고 함께 도시락을 나누던 친구들도 감격하며 말했습니다.“야, 너희 엄마 최고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집에서 모든 것을 공짜로 준 엄마에게 종아리를 맞고 손들고 서 있는 그 어린이의 벌받는 장면이 거실 창 너머로 보였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비록 모든 것을 거저 준 엄마지만 그 엄마는 아이를 향한 계획이 있었습니다.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서 세상과 교회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어야 할텐데 그러한 부모의 소망대로 자라주지 않기 때문에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에도 계획은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은혜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계획이었습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그들을 통해 성취하고 싶으셨던 장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통해 온 땅에 구원이 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대로 의와 공평을 추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소작료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 일에 기여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는 것은 살았으나 실상은 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밖에서 인생을 사는 재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곧 한 그릇의 죽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던 에서의 뒤를 밟는 것입니다. 불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의 삶을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첫째 교훈
과실이 무르익을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이미 약정한바 대로 포도원 소출 중 얼마를 소작료로 받기 위해서 자기의 종들을 보내었습니다,먼저 이 비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을 가르쳐줍니다.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당신에게 돌아와야 할 몫의 열매를 거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눅 20:10)
남다른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남에게 없는 구원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언제나 자기들을 위한 일이었음을 기억하고 노래했습니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매우 특별히 구별된 민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를 진 백성들임을 자각하였습니다. 그런 자각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의 삶이 결코 힘겨운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거룩한 삶의 실과를 바침으로써 이 세상이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와 연장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 가운데 살며 방탕한 길을 걸어가던 여러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셨습니까? 그 목 메이는 사랑으로 저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 누가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었습니까?
불꽃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하고 새로운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한없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면서 기대하셨던 그 사랑에 비하면 지극히 작고 마땅한 본분을 다하며 의롭고 공평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시간에 설교자를 여러분에게 보내시는 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마땅히 돌려드리게 하기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호위병도 없고 자신을 보호할 무기도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며 견디고 시련이 오면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교인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불순종하며 죄의 길 걸어가기를 마치 자기의 사명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앞길을 막아 뉘우치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의롭고 공평한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의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우선적인 사명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소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둘째 교훈
두 번째로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 명의 종을 보낸 것으로 나옵니다. (눅 20:10,11)
항의하고 싶었던 본문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에서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항의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가장 오래도록 주인의 집에서 봉사하여 충성이 입증된 사람, 진심으로 주인의 가문이 번창하고 평안하기를 원하는 충성스러운 종들, 그 주인의 즐거움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평생의 보람으로 삼은 사람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기쁨이 없이 오직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 하나에 생명을 건 사람들 , 주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작료를 받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작료는 받아오지도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진정 그런 충성스러운 종들을 거느린 주인이라면 당장 군대를 이끌고 그 포도원에 가서 나쁜 농부들을 요절을 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만 다른 종들이 주인을 자랑스러워하고 그에게 새롭게 충성을 다짐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호위병도 없이 무기도 주지 않고 단지 주인의 메시지 하나만을 가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선임자의 뒤를 이어 다시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시 후 한 종이 시체기 되어 돌아왔고 그런데도 주인은 또다시 대책도 없이 다른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무수한 종들이 죽었는데도 얼마나 많은 피를 허비하려는지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내 마음 녹인 진리
깊은 고민에 싸여 있던 어느 순간에 본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제게 다가왔습니다.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습니다.그 사랑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매 맞고 능욕을 당하고 죽임 당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을 깨닫는 순간, 설교의 엄청난 소명 앞에서 감격하며 여러 시간 동안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설교자로 부름 받은 제 인생을 이 땅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너무 마음 쓰지 마옵소서. 주님 자신의 이름을 높이시는 일에 마음 쓰시옵소서. 저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음성과 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목 메이도록 사랑하시는 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고귀한 섬김
또 하나 알게 하신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들의 섬김과 고난이 너무나 거룩하고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갚아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무지한 백성들 역시 눈물로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맺음말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닫는 예배의기쁨이 없었더라면,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굳어졌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는 이예배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돌같이 굳어진 심령이 깨지고 참회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축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예배시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부름을 받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타는 설교자를 필요로 합니다.
6. 지갑이 회개할 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고후8:1)
어느 목회자의 한탄
회심하지 못한 자의 대표적인 욕망은 물질에 대한 탐심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이 집요하게 계속될 때 그것은 인격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섬기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자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헌금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요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시는 항구도시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 유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를 거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연보와 관련된 상황 속에서 이 교회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근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연보를 해서 고통 받고 있는 예루살렘교인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은혜들을 만족스럽게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헌금생활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써 나가면서 헌금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 교회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련에 달린 교회
마게도냐 교회는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는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하러 가려고 애를 썼지만 성령이 끝까지 막으셔서 가게 된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방세계에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므로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물리적인 박해는 물론이거니와 철학이 파다한 이 마게도냐 한복판에서 복음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사상적인 박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을 낙인 찍으려하고 박해하고 핍박하는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은 교회였습니다.
가난해도 부유한 교회
시련을 많이 당해도 원래 부유한 교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교회라면 풍족한 헌금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금한 교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부유한 항구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들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넘치는 헌금을 한 교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헌금의 비결, 기쁨
성경은 그 비결이 ‘기쁨’ 이었다고 말합니다. 저희에게 하나님을 인하여 넘치는 기쁨이 있었기에 이렇게 넘치도록 연보를 드리는 삶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도 컸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위로는 그것들을 초월하였습니다. 시련은 컸지만 시련보다 더 큰 사랑을 알았습니다. 환난이 있었지만 환난을 능가하는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그들을 주관하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환난도 시련도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에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주는 교훈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 살아도 기쁨이 있는 교회, 많이 배우지 못한 교인들이 모였을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그렇게 복음이 있는 교회에는 언제나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하는 본보기로서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신앙의 고백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고백
헌금 정신 중 하나는 우리가 사는 것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는 것이 물질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히 인색한 헌금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삶에서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풍성한 헌금생활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시험에 들거나 모이는 수가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설교자가 돈을 위해서 설교한다면 반드시 그런 결과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설교자가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헌금에 대해서 정직하게 설교한다면 교회는 부흥하고야 말 것입니다.
헌금 설교로 부흥한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담임목회자가 공석 중인 교회의 강단을 잠시 지켜 주도록 초빙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례적으로 육 개월 동안 헌금에 대해서만 설교를 하셨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았을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강단을 지키는 육 개월 동안에 칠십 명의 교인이 늘었습니다. 최근 저도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다른 설교에 감동받지 못하던 교인들 중 여러 사람이 헌금을 설교할 때 흐느끼며 복음의 감격을 경험하는 장면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생각 없는 헌금생활을 뉘우치고 각성하는 장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체는 지난해 설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설교로 헌금설교를 꼽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내는 헌금의 액수만이 아니라, 그 돈이 정말 깨끗한 헌금이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금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관심이 돈이 아니라 바르게 하나님 앞에 가르치고 지켜야 할 성도들의 영혼에 있을 때 그 설교가 무엇이든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오고 영혼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반드시 한 가지 욕망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무엇 이든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고 마다하여도 바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하나님 안에서 넘치는 기쁨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불꽃같은 기쁨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헌금도 불꽃처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확인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재물을 의지하거나 우리의 물질을 의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마음 중심에 담겨 있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바치는 헌금뿐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여러분의 달란트입니다. 그런 기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 될 때 그 기회를 지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넘치도록 도우십시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모릅니다.
마케도냐 교인들의 마음에 넘쳤던 기쁨, 그래서 탁월한 물질의 섬김을 가능하게 했던 그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지를 알고 그 은혜 때문에 살아왔고 또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넘치는 헌금을 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까? 물질이었습니까? 주님의 도우심이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능력이었습니까?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빚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일평생 힘닿는 대로 넘치도록 주님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
마게도냐 교회의두 번째 헌금 실천 원리는 자원의 원리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고후 8:4) 마게도냐 교인들은 선교본부에서 할당한 회비를 납부하는 마음으로 연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너무도 가난한 교회였기 때문에 구제헌금을 낼 교회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헌금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자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헌금의 한 원리입니다.
자신을 주신 주님
“...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마게도냐 교인의 헌금은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졌기 때문에 물질을 바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풍성한 연보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작고 죄송스러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드린 사람은 모든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자신을 드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헌금생활이 풍성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한 자기 헌신과 자기 부인의 부족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맺음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와 함께 넘치는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도 바로 그들이 드린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연보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을 입증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를 위하여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은 얼마나 쉬울까요? 진정한 헌금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참된 예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헌금도 불꽃처럼 드려져야 합니다.
7. 어느 사형수의 노래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출15:1)
왜 그렇게 살았는지
지난해 서울에 있는 어느 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초청한 교도소 간부는 제게 여기 예배에 모인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예배하고 찬양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라고 귀띔 해 주었습니다.
은혜로운 집회를 마치고 막 예배실을 걸어 나오는 중에 우연히 교도소 안에서 제작되어 배포되고 있는 소식지를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간증 편지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편지의 주인공은 ‘김현양’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온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불러 일으켰던 지존파 살인범이었습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형 집행 일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집사님의 끈질긴 전도를 받고 회심하였는데 그분께 보낸 편지의 사본이 그 소식지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이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은혜 받은 성도의 노래
은혜 받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영혼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야비하고 비열한 노래들을 천박하게 흥얼거리는 사람들은 그런 정서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령한 노래가 있습니다. 마음도 싣지 않은 채 뜻도 없고 생각도 없이 간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섞어 있는 말을 기도라고 할 수 없듯이, 단지 교회 안에서 불려지는 가락이라고 해서 모두 찬양일 수 없는 것입니다.
노래할 이유
찬양다운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경험을 주시시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자 그 백성 전체가 장엄한 성가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있을 때 찬양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있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변하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였고 그 감격은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통해 자신들의 무엇을 바꾸어보려는 계획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들을 위한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찬양은 부흥의 수단인가?
요즈음은 찬양을 통해서 무엇인가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과도히 동원하고 심리적인 기법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찬양은 언제나 찬양할 이유가 있는 찬양자에 의하여 불려지는 것입니다. 찬송 자체를 통해 무엇인가 사건을 만들어보려는 의도는 예배정신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스러운 찬양이 신령하게 울려 퍼지는 교회생활을 기대한다면 노래하는 일 자체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 보기를 간구해야 합니다.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우리를 위하여 이미 행하시고 앞으로도 이루실 큰 일에 대해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있고,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규모와 자유
찬양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규모와 자유의 조화입니다. 분명히 예배에는 일정한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예배에서 자유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배에서 자유가 아무리 강조되어도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몇 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격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찬양에도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참된 자유는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찬양에서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그런 파격을 경험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한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찬송의 가락이 우리의 마음에 마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 찬양을 마치고 설교를 듣고 주일오전예배를 마치니까 하늘의 별이 총총하더라는 간증이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은혜 경험을 동반하라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현재적으로 경험되지 않으면 우리의 찬양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악기와 성가대와 음향시설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 하나님이 그 임재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길 고대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찬양입니다. 찬양을 부를 때 생각이 딴 곳에 가 있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을 부를 때 가락이 아니라 가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같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 유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대장간의 추억
지금은 이미 다 사라진 광경이기는 합니다만 어릴 적 시골 장터에 가면 볼 만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장간입니다. 평범한 쇳덩어리로 낫이나 칼, 호미 같은 것을 만드는지 보신 적 있습니까? 화로에서 갓 꺼낸 시뻘건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결코 크지 않은 망치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아주 빠르게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서 불과 몇 초 만에 그 기다란 쇳덩어리가 활처럼 휘면서 낫의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몇 차례 더 화로와 모루 사이를 오가면 예리하게 날이 선 기구로 변합니다. 만약에 차가운 무쇠를 갖다놓고 망치로 두드린다면 결코 그런 기구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정서로 달아오르고 심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그분의 심정과 일치하면 고함치는 설교가 아니라 속삭이는 설교로도 사람들은 위대한 회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번개를 동반한 우레와 같은 설교를 통해서만 위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합니다. 예배에서 찬양의 이러한 기능이 중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에서 가장 우위적인 요소인 깨닫게 하시는 기능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찬양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이고, 둘째는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셋째는 구원의 은혜입니다.예배 중에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 중요한 찬양의 제목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가장 약화된 신앙 사상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이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엄,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영광과 전능하심, 그러한 주님 앞에 자신이 지극히 작고 초라한 피조물일 뿐임을 예배 속에서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인식과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배현장이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은 예배의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십자가를 노래할 이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과 함께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들임을 확인하게 되고, 이 시대를 향한 거룩한 소명을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구원의 선택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구원이 예배 중 중요한 찬양의 제목이 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배 중에 우리를 구속하신 찬송을 부르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보다 더 큰 자랑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찬송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립니다. 예배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노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구원행동
하나님을 향한 또 하나의 찬송제목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예배를 경건하게 하기 위하여 찬양순서를 계획하고 준비할지라도 진정으로 거룩하고 살아 있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먼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위대한 일들을 목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간증이 담긴 고백의 찬양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찬양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금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할 때가 아니라 참된 부흥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언젠가 반드시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옵니다.”
맺음말
우리는 예배 중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이 땅의 온 조국 교회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예배하던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감격 속에서 경배하고, 단지 노래 부르던 교인들이 영혼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현장을 그리워하면서 이 땅에 임할 거룩한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부흥을 경험할 때 노래가 찬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더 값진 예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시 51:17)
다윗의 실패
오늘날조국 교회가 직면한 모든 신앙적인 위기한가운데는 예배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예배 한가운데에는 예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예배자들의 삶이 있고 예배자들의 삶 중심에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시편51편)은 우리에게 신앙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지적해 줍니다. 다윗은 실로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에 두 번의 커다란 죄를 범합니다. 하나는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것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 자체는 지극히 행정적이고 전치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을 의뢰하며 나라를 다스려나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병사와 백성의 수를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고 거기서 다윗은 크게 회개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시편 51편의 참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사건 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사건은 그가 일찍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모든 은혜의 세계를 능가하는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겪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고통으로 보낸 나날들
범죄한 후 다윗은 아름다웠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윗에게 최대한 고통이었습니다. 이 범죄로 인하여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서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일구었던 그 탁월한 영적인 삶에서 하나님 사랑의 빛이 어두워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회복을 위하여 애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의 영적 본성입니다. 아마 다윗도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회복을 위하여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죄의 능력
죄는 우리로 하여금 범죄 할수록 속박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종 삼으려고 합니다. 다윗도 이러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순간에 저지른 범죄였지만 이제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와 맺은 관계 때문에 그는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도록 꾀를 내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여인과 관계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비록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손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악의 수렁 속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 아름다운 영적 삶의 모든 축복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그는 매일매일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 회복의 계기
선지자 나단은 그의 잘못을 지적했고 그 지적 앞에서 다윗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드러난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 하였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무너지는 것 같은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매달려 참회합니다. 잘 견디며 참회합니다.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던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애통함과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슬픔이 그의 마음속에 거룩한 정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그리고 이전에 하나님과 교통하던 자신의 영혼의 축복을 다시 회복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입니다.(시 51:10:12)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럭저럭 견디며 살아가던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영적인 축복을 생각나게 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매달리게 되었습니까?
참회케 하는 말씀
그것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이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자기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고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이 모든 일들은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을 깨닫게 하는 일 없이는 올바르게 하나님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모습을새롭게 발견하지 못하고서는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며 애통해하는 일도 불가능하고 영적인 침체로부터 회복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진정한 회개로 인도하고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라
다윗은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셨고 선지자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는 외쳤고 그 말씀은 다윗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렸고 죄악을 통회하게 되었습니다. 불현 듯 이전에 잃어버렸던, 다시 찾기 위해서 수없이 몸부림쳤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거의 포기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과 그분과의 관계에서 오는 영적인 은혜가 그리움으로 밀려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뿐이었습니다. 불결한 마음을 바꾸사 정결한 마음을 만드시고 사라져버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는 주의 성령을 거두시지 말도록 애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기에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그렇게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주리라고 생각하십니까?이제는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또 한편으로는 포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로부터 온다고 믿으십니까?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 이외에 무엇으로도 이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을 스스로 보게 하고 그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할 때에 여러분은 자신의 악한 삶을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싶어 하게 됩니다.
깨달은 진리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은 다윗으로서 변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에서 소외된 가운데 자라야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다른 형들만큼 고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형제들에게도 살붙이 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던 아내 미갈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미위한 적이 없었지만 사울은 그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렇게 다윗의 생명을 노린 그는 안타깝게도 그의 장인이었습니다. 그의 뱃속으로 낳은 아들은 왕위를 빼앗겠다고 칼을 들고 일어섰습니다.그러한 인생의 여정 한가운데서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동정이 가는 사연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범죄는 범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시련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신앙적인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낙심치 않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태평하여도 그는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그의 영혼을 곤고하게 하였습니다.다윗은 이 깊은 영적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생활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즐겨하지 않으신다고 한 다윗의 고백은 바로 그가 영적인 침체 속에서 깨닫게 된 또 다른 진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들의 신앙생활의 영적 측면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받으시는 것은 태워드리는 짐승의 연기와 뿌리는 피나 잘라드린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나와 제사 드리는 그 사람의 심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 가운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습니다.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
오늘날 우리교회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형식적인 신자들로 들끓는 시대에는 이러한 귀한 교훈이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예배당은 단지 마음이 허한 사람들의 종교적인 회합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추구를 대신하고 있고,일주일 동안의 악한 삶에 대한 교인들의 알량한 죄의식을 보상해 주기에 급급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분주한 일로 애쓰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심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께서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한 심령’. 이것은 상처 입은 심령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처입은 심령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갈망할 때 우리의 마음을 상한 마음이 되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삶이 죄된 것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상한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 같은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전에 알던 거룩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을 추구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불결하고 추악한 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커다란 구덩이가 죄인인 자신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잇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식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더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다윗으로 하여금 상한 심령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상한 심령
날마다 자신의 죄된 모습을 형식적인 교회생활 속에 감추면서 하나님과의 대면을 회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참회를 경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 위에 부어주시는 사죄의 은총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의 모든 종교생활도 결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뵈옵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없이 교회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언저리를 맴돌고 은혜에 대하여 말하게 하지만 그 은혜를 맛보게 하고 그 풍성함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상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상한 마음은 통회에 이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간절하고 열렬한 갈망이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우리의 기도와 여러 모양의 헌신과 수고와 예배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성결한 삶에서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맺음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가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형식적인 교회생활 속에 묻혀버린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회복을 위한 지름길 입니다. 그는 비록 한 순간 범죄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더욱 순결해졌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종교생활로 신앙생활을 대신하고, 영적 삶을 분주한 교회생활로 대치하려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9. 웃기는 심포지움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6)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서울에 있는 아주 보수적인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기를 원하는 교회의 성수주일파 중직자들과 이러한 생각에 쉽게 수긍하지 않고 주일을 자유롭게 보내려는 청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당회에서 정식으로 청년들이 주일 예배 후 외식을 하거나 교회 가까운 찻집에서 차와 음료를 사 마시는 일이 성경적으로 올바른가에 대한 교회의 판단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교회는 여러 모로 의논한 끝에 심포지움을 열기로 하고 교회의 중직자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청년 대표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열띤 공방과 토론 끝에 이렇게 결론이 났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뭘 사먹는 것이 옳지 않지만 굳이 외식을 해야 할 경우에는 교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라.”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갈등을 흔히 경험합니다. 나이 드신 장로님들과 경건한 교회의 중직자들은 요즘 교인들이 주일을 보내는 것이 예전에 자신들과 같지 않다고 볼멘소리로 원망 어린 푸념하는 것을 봅니다. 또 한편 젊은이들은 이제 주일성수의 개념은 케케묵은 구시대 율법주의의 유물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어야 한다는 견지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본 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의무는 구약의 율법을 통해 수없이 강조되었습니다. 분명히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 누리게 될 구속이 주는 신약의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고통이 없는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안식을 바라본 예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두 날이 구속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일과 안식일은 질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마치 옛 언약과 새 언약이 통일성은 있으나 새 언약이 옛 언약에 대하여 시기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른 언약인 것처럼 안식일에 대한 주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주일의 중심은 율법이나 제도나 인간의 편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이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지키는 것이 안식일 성수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조상의 유전을 답습하며 지키기 위한 열성 때문일 수 없습니다. 주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 사건이 아닙니까?주일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의무에 매이지 않는 사람들
오늘날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성도의 의무는 하나님의 자녀 그들에 의해 배교에 가까울 정도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편의대로 살겠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누가 그들에게 주일에 생업에 종사하거나 일신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마음 빼앗기지 말고 교회에 나오도록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현실적으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목청을 돋우며 심포지움을 열고 떠들어도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대부분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바로 교인들에게 주일을 지킬 의무만을 강조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의무감이 아니라 영적 유익을 실제로 경험하며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날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보람 있어서 그날에 다른 일,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회복과 주일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목회자와 교인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는 데 쏟는 정성과 노력을 오히려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데 바친다면 주일이 훨씬 더 거룩해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받은 바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설교의 갱신에 분투한다면 적어도 주일 낮에 모인 인파를 주일저녁 예배에 거의 다시 못 만나는 교회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 죽은 예배가 만들어 낸 죽은 주일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예배가 어떻게 손수건 없이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무덤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셨을 때 비난의 표적이 된 것은 회칠한 깨끗한 문이 아니라, 번듯이 회칠을 한 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썩은 시체와 부패한 뼈다귀들이 들어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내면의 변화를 촉구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비난의 음성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로 하여금 그 심령 속에 넘치는 시체와 같은 죄악과 뼈다귀 같은 부패들을 자기 의로 말미암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고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형식을 파괴하면 저절로 본질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회칠한 무덤의 문을 더러운 것으로 바꾸면 무덤 속의 뼈들이 살아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엉뚱한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찾아야 합니다.
어느 꼬마의 회심
18세기 미 대륙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원즈(Jonathan Edwards)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놀라운 회심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가르쳐줍니다. 그 마을에 다섯 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에드워즈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거룩한 각성의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에서 돌아온 어린이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구원받았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 어린아이의 진지한 염려를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아이는 친구들과 같이 놀이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믿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한 염려 속에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하루에 몇 차례씩 어디론지 사라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헛간에서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 어린아이의 기도소리가 들려왔습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신 것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이후로 아이에게서 뚜렷하게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골목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열심히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거의 매일 물었습니다. “엄마, 몇 밤 자면 주일이야?” 엄마가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너 왜 그렇게 주일을 기다리니?” 아이는 또렷이 대답했습니다. “그날을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날이기 때문이에요.”
죽은 예배 빛바랜 주일
결국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형식적이고 차갑고 은혜 없는 메마른 예배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예배를 통해 참회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일주일을 살다가 오니까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교회 바깥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신약의 성도들과 종교개혁기에 어둠에서 깨어난 성도들이 누렸던 은혜생활로 돌아가고, 청교도들이 드렸던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주일은 다시금 즉시 거룩하게 준수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날 가운데 그날을 가장 사모할 것이며 주일에 맛보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다시금 교회로 모여들 것입니다. 교회는 다시 사람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우리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소모적인 말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교회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했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가난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형식에 안주하고 있으며, 삶에서 얼마나 배교에 가까운 무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인 위기 가운데 형식화되고 세속적으로 편의주의화 되어 가는 빛바랜 주일과 부러진 십자가 신앙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밖에 주일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맺음말
마른 땅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 거룩하고 참된 부흥을 주셔서 사람들이 더 이상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논쟁할 필요 없이, 그날이 얼마나 거룩한 날인지를 예배를 통해 체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제 마음은 그러한 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이 참된 부흥을 통해 오리라고 기대하며 삽니다. 마치 시인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