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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 자신들의 힘으로 선민의 명예 회복을 추구하다가 끝내피의 복수자와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야곱 가정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를 죄악과 위경의 올가미로 묶어버린 야곱 가정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허물을 정확히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셨다. 태초부터 선포되고(1:3), 택한 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6:13;12:1;26:2) 창조주 하나님(엘로힘)의 말씀만이 죄악의 진흙 속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며 새 삶을 살게 하신다. 일어나( 쿰) - 큰 일을 앞에 두고 그것을 향하여 떠날 것을 촉구할 때 발(發) 하시는 하나님의 의미 심장한 분부이다(신 17: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제 일조처로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을 명하신다(12:1;출 3:10-12). 벧엘로 올라가서 -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중 (1) 가장 괴로울 때 가장 뜨겁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장소이자 (2)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가장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였던 서원의 장(場)이었다(28:10-22).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바로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명한 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했던 내용들(28:20-22)을 이제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언약 후손의 가문이 세속에 휩쓸려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은혜의 처소 벧엘로 부르셨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과 변화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거하며(웨쉐브) - '야사브'(체재하다)의 명령형으로 서원했던'단'(28:22)을 쌓기까지 그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단을 쌓으랴. 옛날 벧엘에 하나님의 전(집)을 건축키로 서원한(28:22) 야곱에게 제단 수축을 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에서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제단이기 때문이다. 제단은 회생의 피를 통해 죄악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곳이다.
===35:2절
벧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처 세 가지가 제시된다. 이를 한 마디로 영육 간의 '회개'라 할 수 있다. 먼저, 이방 신상을 버리고 - '낯선 신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다(여기의 '신상'은 단수가 아니라 '이방신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권성수). 그런데 이는 형상화된 신상(神像) 뿐 아니라(사 45:20;렘 10:5;행 17:29;롬 1:22,23) 유일신 여호와를 배척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까지(범신론, 샤머니즘, 애니미즘 둥)를 포함한다. 한편 어떻게 우상 숭배가 야곱의 집안에 행해질 수 있었던 가에 대하여서는(1) 라헬이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소유하고 있었던 점(31:19)과 (2)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은 노비(30:43) 중에 우상 숭배자가 끼여 있을 가능성 (3) 또한 세겜 성의 약탈물 중 이방신상이 섞여 있을 소지가 충분하다는 점 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고 - 몸과 마음의 동시적 정결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레 11:45) 것이다. 이것은 모세 때 결례 의식으로 표현된(출 19:14;민 19:12,13;레 14:8)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행위이다(벧전 1:22). 셋째, 의복을 바꾸라 - 출애굽 직후 모세에게도 내려진 이 명령은(출 19:10) 영적, 도덕적 정결상태를 외형적으로도 나타내라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한다(겔 36:25;히 10:22;유 1:23; 계 19:2). 사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삼의 양태를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의복을 바꾸는 것은 곧 현재의 삶과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에로의 전진을 위한 결단으로 이해된다(고후 5:17).
===35:3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이 외침은 파란 만장했던 야곱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온갖 괴로움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언약을 되새기며(신 32:7;욘:2:7) 다시 한번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과거 야곱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세월 동안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 회복 운동의 모토(Motto)가 되어왔던 의미 깊은 구호이다. 한편 벧엘은 숙곳보다(33:17) 해발 300m 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가자'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단을 쌓으려 하노라 - 하란에서 돌아온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야곱은 자신의 집안을 번창케 하는데 전력한 나머지 아직까지 벧엘 서원(28:22)을 이행치 않고 있었다. 아마 세겜 성의 비극적인 사건(34:25)의 원인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35:4절
귀에 있는 고리 - 액세서리로서의 귀고리가 아니라 신상(神像)이나 주문(呪文) 부조한 일종의 간이용 우상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부착함으로써 악귀를 몰아내고 행운을 소원했었다.
상수리나무( 하에라) - 정관사가 붙어 '그 상수리나무'(NASB;the oak)이다. 따라서 이 나무는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세겜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뵈었던 사건 현장(12:6, 7)의 그 나무로 과거의 유서 깊은 역사들을 일깨워 주는 기념수(記念樹)였을 가능성이 크다. 묻고( 타멘) - 어떤 물건을 매장함으로써 감추는 것을(출 2:12; 수 7:21,22; 왕하 7:8) 의미하는 말로. 이 행위는 (1) 우상 숭배를 완전히 청산하고 아브라함이 간직했던 순수한 신앙으로의 복귀 선언이자(13:18) (2)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는 모든 우상들이 죽은 시체와도 같음을 뜻하는 행위이다(사 2:20).
===35:5절
두려워하게 (히타트) - '부서지다'란 1차적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절대적인 공포'를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 겜성(34:25-29)으로 인해 야곱의 가정에 보복하려는 주변 세력들의 용기를 꺾으신 것은 야곱이 취한 우상과의 단절과 가정의 신앙 개혁 단행을 기뻐하신다는 증거이다. 즉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행위로써 순종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는 자에게는 단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초자연적인 보호하심이 따른다는 사실을 역력히 증거 해 준다. *원문은 '하나님의 공포가 그들 주변의 도시들 위에 있었다'로 '하나님의 공포'라는 탱탱한 의미가 있다.
===35:6절
야곱과... 함께 한 모든 사람 - 같은 신앙의 공동체로서 성지(聖地)를 향해 떠나는 야곱 족속의 기나긴 행렬이다. 여러 삼의 고비에서 때로는 고뇌하며 때로는 결단하며 언약의 후손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족장 야곱의 모습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마 1:23;28:20; 요 14:16-18). 루스 곧 벧엘 - '루스'는 '벧엘'의 옛 지명으로서. 두 지명이 동시에 언급된 것은 야곱의 지나온 경험(28:11-19)을 뚜렷이 환기시키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28:19>.
===35:7절
엘 벧엘(엘 베이트 엘) - '전능자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과 '벧엘 이 합쳐진 말로 '벧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28:10-15)를 상기하면서 그때 자신이 서원했던 내용을 온전히 이루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붙인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전능자'(엘)란 명칭이 두 번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벧엘의 하나님은 어떤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예배와 감사와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응답하시며 축복하시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나타나셨음이더라(갈라). 모든 비밀을 제거하고 스스로를 계시하기 위해(9:21; 삼상 20:12)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셨음을 의미한다(삼상 3:21).
===35: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 밧단아람에서부터 시집가는 리브가를 따라 헤브론 이삭의 집에 왔던 자이다(24-59). 그런데 그녀가 줄곧 야곱과 함께 있게 된 동기는 아마(1) 리브가가 아들과의 소식 왕래를 위하여 야곱에게 보냈거나 아니면 (2) 야곱이 모친사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왔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일개 유모에 지나지 않는 드보라의 죽음(특히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장지(葬地)에 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삶이 여호와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뻐할 만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2대를 걸쳐 언약의 가문 야곱의 집안을 섬겨 왔던 드보라는 야곱이 어려운 일과 위험에 직면할 때마다 그에게 조언과 상담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야곱 집안을 섬겨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음을 기억하신 것이다. 알론바굿(알론 바쿠트) -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알론'과'눈물 흘리다'란 뜻을 지닌 동사 '바카'에서 파생된 '바쿠트'가 합쳐진 말로 '눈물의 상수리나무' 혹은 '통곡(痛哭)의 상수리나무'란 뜻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은 야곱에게 있어서 불효자였던 자신을 평생 못 잊고 그리워하던 모친에 대한 그나마의 희미한 기억을 이어 주던 마지막 고리의 단절을 의미하며 동시에 늙은 유모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묻어 나오던 야곱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장사 지냄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야곱과 그 집안이 어찌나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던지 사람들이 그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영구히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무덤에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 같다.
===35:9절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나타나사 - 30여 년 전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떠나갈 때에도 나타나셨던(28:16) 그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 것은 그의 새로운 출발을 격려하심과 오래전 맺어진 벧엘 언약을 재확인하고 비준하기 위해서였다.
===35:10절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 브니엘에서 개명(改名)한 이름(32:28)을 벧엘에서 재확인시킨 것은 (1) 그 새 이름 속에 메시아 언약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2) 그 이름을 환기시킴으로 기만과 술수로 점철되었던 오욕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한 것이며 (3) 또한 갱신된 언약적 이름을 재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와 함께 하시고 앞날을 인도해 주실 깃을 확신케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후일 신약이 이스라엘, 즉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에게도 한번 더그 이름이 확인되었던 것과 같다(요 1:42; 마 16:17,18).
===35:11절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 -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과'전능(자)'(KJV:the Almighty)를 뜻하는 '솨다이'가 합쳐진 이중 복합어로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켜 나갈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17:1; 28:3; 43:14; 출 6:3)에 대한 명칭이다(출 3장, 하나님의 이름).
생육하며 번성하라 - 28:3의 확약으로서, 일차적으로 이 약속은 약 25년 후 야곱의 직계 자여손(子與孫) 70명이 애굽에 내려갔다가(46:26,27) 430년 만에 200만 명가량으로 불어난 뒤 출애굽함으로써 성취되었다(12:37-41). 그리고 야곱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 후손이 된 모든 성도들로 인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 야곱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이 약속은 이중적으로 성취되었다. 즉 야곱의 혈통을 통하여 (1) 역사적으로는 다윗,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왕들이 나왔고 (2) 영적으로는 만왕의 왕 되시며 구주이신 메시아가 나왔던 것이다. 여기서 '허리'( 할라차임)란 원기와 힘의 근원이자(욥 38:3), 은유적으로 생식력 및 후손을 잇게 하는 기능을 나타낸다(왕상 8:19).
===35:12절
그 땅을 주리라 - 이는 아브라함 때에(15:16) 이미 약속된 것으로 다시 야곱에게 재확인되었다. 이처럼 생명의 유한성을 지닌 인간은 죽어가지만 하나님의 약속(말씀)은 영영히 지속, 성취되어 간다(사 40:8). 한편 이 땅 소유에 관한 사상은 신약 시대에 와서 늘 천국 소유의 개념으로 발전된다(마 25:34). 따라서 땅에 관한 현세의 축복은장차 하늘나라의 기업을 예표하는 구약의 그림자이다 <12장, 가나안 땅에 대한 최초약속>.
===35:13절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 지라 - 그의 위로부터 올라갔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기보다는 하늘을 보좌 삼고 그의 위에서 말씀하신 후야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올라가셨다는 가시적인 현현(顯顯)을 의미한다.
===35:14절
돌기둥을 세우고 - 30여 년 전 벧엘 사건을 회상하며 감개 무량해진 야곱은 오랜 세월 동안 흔적도 없어진 그 옛날 돌기둥(28:18) 자리에 다시 기념주(記念柱)를 쌓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했다. 전제. 포도주나 독주로 드리는 예물로써 족장시대 때는 단독으로 드려졌지만. 모세 율법 이후 다른 제물의 보조적 역할만을 주로 했다(출 29:40 신 32:38). 한편 이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를 상징한다(빌 2:17; 딤후 4:6). 그러므로 돌기둥에 전제물을 부은 것은 그 돌을 세운 야곱의 헌신을 암시한다. 기름을 붓고 - 자신과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뜻하는 거룩한 의식으로 <28:18) 자신의 서원을 온전히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35:15절
벧엘이라 불렀더라 - 같은 장소에서 하나님과의 두 번의 만남을 경험한 야곱이 과연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깊은 확신에서 외친 신앙 고백이다.
===35:16절
길을 격한 곳(키브라트 하아레츠) - 분명치 않으나 '거리'를뜻하는 '키브라트'와 '땅'이란 '에레츠'가 합쳐진 말로'약간의 거리가(있었다)'(KJV:still some distance)란 뜻이다.
신고하더니(테카쉬) -'엄격하다', '모질다'란 뜻을 지닌 '카사'의 강의형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멍에가 씌우져서 받는 고통과 이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는 해산이 임박한 라헬이 감당할 수 없는 복통으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
===35:17절
난산할 즈음에(베하크쉬타 베리타) - '고통하다'란 뜻의'카솨'의 사역형과 '낳다'란 뜻인 '야라드'가 합쳐진 말로 '그녀의 해산이 극도의 위경에 처한때'란 뜻이다. 이러한 난산의 이유는 아마 (1) 요셉을 초산(初産)한 이후 약 16, 7년이나 지난 50세가량시 나이에 (2) 더군다나 여행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5:18절
그 혼이 떠나려 할 때 - '혼'에 해당하는 '네페쉬'는 '영혼' 또는 '생명'을 의미하므로 <2:7>, '그녀의 영혼(생명)이 떠나려 할 때'란 뜻이다. 이는 죽을 때영혼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장소로 들어가는 상태임을 암시해 준다(25:7-10;전 12:7). 베노니(벤 오니). '고통', '슬픔'을 뜻하는 '아웬'에 '아들' '벤'이 합쳐진 말로 '나의 슬픔(고통)의 아들'이란 뜻이다. 요셉 출산 이후 또 다른 아들을 갖기를 그처럼 갈망했던(30:34) 라헬이 그 꿈이 이뤄지는 기쁨의 순간을 눈앞에 둔 채 심한 산고(産苦)로 인해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여지어 준 애조(哀調) 띤 이름이다. 베냐민( 빈야민 ). '아들'을 가리키는 '벤'과 '오른손'을 뜻하는 '야민'이 합쳐진 말로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이다. 성경에서 오른손 또는 오른편은'총애'와 '탁월함'을 의미하므로 (사 41장. 오른손과 오른편의 성경적 의미> 결국이 이름은 '베노니'와는 상반된 긍정적이고 희망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25장, 이름 짓기>. 한편 이처럼 베노니의 이름을 개명(改名)한 이유는 (1)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잊기 위해서와 (2) 어미 없는 세상을 의기소침 않고 힘차게 살기를 소망하는 아비의 심정을 나타내기 위해, 또한 (3) 마침내 완전 수(數)인 12 아들이 채워짐으로써 고통을 기쁨으로 보상받았기 때문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35:19절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도 컸지만 여행 중에 있는 야곱은 어느 때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어 라헬을 그녀가 죽은 곳 근처에 묻었다. 즉 팔레스틴은 기후상 시신이 곧 부패되므로 가족의 장지인 헤브론(25:9;35:29)까지 시신을 옮기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묻었던 것이다.
===35:20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 히브리인들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과 장소를 영구히 기념키 위해 그 주변의 돌로 비석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28:18). 따라서 야곱이 라헬의 묘에 묘비를 세운 것은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지금까지'는 모세의 때 까지를 의미 하며. 라헬의 묘 위치는 사무엘 때까지 알려져 있었으나(삼상 10:2) 지금은 확실치 않다. 다만 오늘날 라헬의 무덤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작은 무덤이 베들레헴에 있다.
===35:21절
이스라엘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호칭이 갑작스럽게 변한 이유에 대해 유대 랍비들은 '기록 당시 모세가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의 와중에서도 꿋꿋이 견디어내며 다시 일어나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 야곱의 놀라운 인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고 해석했다.
에델 망대(믹달 에델) - '망루'를 뜻하는 '믹돌'과'가축 떼'를 나타내는 '에델'이 합쳐진 말로 '가축떼의 망루'란 뜻이다. 이것은 베들레헴 남방 약 2km 지점에 목자들이 가축떼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높은 망대이다(왕하 18:; 대하 26:9).
===35:22절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 이 죄는 근친결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불신앙적이고 정욕적인 패륜 행위였다(49:4 고전 5:1). 즉 이것은 근친상간죄이자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수치스러운 범죄로서 모세 율법에는 관계한 두 남녀를 모두 죽이도록 엄히 규정되어 있다(레 18:8;20:11). 바로 앞절에서 영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언급된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범죄는 비록 약속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할 수밖에 없다는 연약한 인간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삼하 11장). 한편 르우벤은 이 범죄로 인해(1) 장자권을 박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대상 5:1) (2) 그 후손이 탁월치 못하여 르우벤 지파에서는 위대한 사사나 예언자. 왕이 전혀 배출되지 않는 징계를 당하였다. 이러한 사건에서 우리는 구속계획의 실현을 위해 신적 권위를 계승한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치명타를 가하려 한 대적자 사단의 궤계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 야곱이 이 일을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믿었던 장자르우벤의 패륜행위에 대한 아비로서의 심한 수치심과 자신의 종교적 순결까지 더럽힌 행위에 대한 언약 상속자로서의 극도의 상심(傷心) 때문이다. 야곱은 이후 기나긴 침묵 기간을 보낸 후 자신의 죽음에 앞서 비로소 그때 당시의 치욕과 회복될 수 없었던 마음의 상처를 토로하며 저주의 유언을 하게 된다(49:4).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 70인역(LXX)에서는 23절에 첨가되었다. 한편 성경 기자가 갑자기 이 말과 더불어 12명 아들의 명단을 언급한 이유는 이제 야곱의 시대가 가고 12명 아들이 주역이 되는 시대가 도래 됐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35:23절
야곱 12 아들의 소개에서는 (1) 모계에 따라 분류되어 있고 (2) 서자보다 적자가 먼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 계보 서술에 따른 형태로서 특별히 상징되는 의미는 없다.
레아의 소생 - 라헬로 인해 많은 서러움을 당했지만(16:4-6;21:8-14) 계보상에는 제일 먼저 등장함으로써 엄연한 위계(位階) 질서롤 보여 준다.
===35:24절
라헬의 소생 - 자식들의 출생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닌 야곱 부인으로서의 서열에 따른 것이다.
===35:25,26절
여종 빌하... 실바의 소생 - 비록 두 여인은 종 출신이지만 그녀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은 본처의 아들들과 동등한 권리와 약속의 후손으로서의 영예를 누렸다. 이것 은신분과 인종이라는 인간의 기존 질서와 인식을 초월하여 당신의 백성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
===35:26절
밧단아람에서... 낳은 자더라 - 야곱은 대부분의 자녀를 도피 생활 때 이방 땅, 밧단아람에서 얻었다. 그 자녀들은 이방에 머물던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시켜 주며 귀향에의 의지를 계속 유지케 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 두 아들 중 베냐민만큼은 가나안에서 태어났음이 분명하다(16-18절). 한편 '태어났다'란 뜻의 율라드는 수동태 단수 동사로서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단수로 취급되었음을 나타내 주는데 이는 장차 12지파로 이루어질 단일 왕국 이스라엘을 강력히 암시한다(49:3-27).
===35:27절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 야곱은 하란에서 돌아온 이후 부친과 몇 번 접촉한 듯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그의 부친을 돌보며 남은 생을 곁에서 지켜보고자 원해서 아예 거주지를 옮겼던 것 같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 하던 헤브론 - 야곱이 당도한 헤브론은 오래전부터 그의 조상들의 발자취가 어려있는 곳(13:18;23:2;25:7-11) 야곱은 남다른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35:28절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 - 이삭이 야곱을 만날 당시의 나이를 산출해 보면 (1)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 갔고 (2) 30세에 바로 앞에 섰으며(41:46) (3) 그 후 7년간의 풍년과(41:47) 2년의 흉년(45:6)이 지났을 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였고 야곱은 130세였다(47:9). 그렇다면 39세에서 17세를 제하면 22년이므로 현재 야곱의 나이는 108세가 되며 여기에 야곱 출생 시 이삭의 나이 60세를 더하면 현 이삭의 나이는 168세로 나온다. 따라서 이삭은 이때로부터 12년을 더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을 생략함으로써 성경이 자꾸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1) 성경은 구속사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관계로 많은 생략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2) 본장의 궁극적인 초점이 모든 사람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메시아의 탄생의 장을 향해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35:29절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 아브라함의 임종을 묘사할 때와 같다 <25:7, 8 주석>. 에서와 야곱이 - 이삭의 죽음이 임박하자, 야곱은 형 에서에게 통지하여 아비 이삭의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당시에서는 급히 마므레로 올 수 있을 정도로 멀지 않은세겜에 살고 있었다(32:3).
그를 장사하였더라 - 가족 묘역인 막벨라 굴에 안장되었다(49:31). 이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리브가와 레아가 함께 묻혔고 훗날 야곱의 시신도 이곳에 안치되었다(23:17-20;50:13). 한편 히브리인들은 매장(埋葬)이나 화장(火葬)보다는 인조 또는 자연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때 대부분한 동굴을 가족 묘소로 지정해 두고 가족 중 누가 죽어갈 때마다 그곳에 보관하여 자연적으로 부패 소멸토록 했었다. 이는 죽음은 영원한 멸절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형태의 세계(스올)로 들어가는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내세관을 잘 반영해 준다.
순결을 빼앗긴 딸 디나의 애처로움과 수많은 생명을 살육한 두 아들(레위, 시므온)의 무자비함이 어우러져 야곱 생애에 최대의 암흑기를 이뤘던 것이 바로 전장(34장)이었다. 자신이 그러한 험난한 생을 맞아야만 했던 근본 이유를 깨달은 야곱은 본장에 이르러 잊었던 벧엘 서원을 기억하고 신실히 이행하는 성숙한 자리에까지 이른다. 한편 벧엘 회복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야곱의 시대가 끝나고 37장부터는 새로운 세대의 활동상이 언급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했고 반면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기도 했던 야곱은 이제 상위 종반기를 맞게 된 것이다.
본장에서는 벧엘 신앙의 회복(1-15절) 막내아들 베냐민의 출생과 장자 르우벤의 추악한 서모(庶母) 통간 사건(16-22절) 어머니의 유모 드보라, 아내 라헬, 부친 이삭 등 세 사람의 죽음과 장례(8, 19, 29절) 장면이 다뤄져 있다. 이처럼 생의 쓴맛과 단맛을 고루 체험한 그가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인생을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벧엘 언약(28:10-22)을 신실히 지켜가신 하나님의 사랑과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야곱의 순결한 신앙 때문이었다.
1. 회복된 벧엘 신앙 (35:1-15)
야곱의 생애는 벧엘에서 시작하여 벧엘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교하고 비겁했던 한 도피자가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로 부름 받은 곳이 벧엘이었고(28:13-15), 그 후 20년간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확인받은 장소도 벧엘이었다(9-12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생애가 벧엘을 중심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벧엘을 잊고 세상에 심취해 있던 야곱에게 디나 사건을 통해 각성시키고(34:1-5) 그로 하여금 벧엘에의 순례길을 떠나게 하셨던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이 벧엘은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운 때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을 체험했던 곳이며, 가장 진솔하고 헌신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었던 장소였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야곱이 경험했던 신앙의 벧엘이 있을 것이다. 세속의 파도에 휩쓸려 방황하며 피곤해할 때마다, 우리는 각자의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나누었던 첫사랑의 밀어를 나누면 다서(계 2:4, 5), 침체의 늪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 주십사고 그분께 무릎을 꿇어야 한다(엡 5:18;빌 4:19).
* 벧엘 순례를 위한 준비. 야곱은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올라가기 전 먼저 가족 전체에게 세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이방 신상을 버림 : 라헬이 지니고 왔던 드라빔을 위시한 여러 이방신들 곧 하나님 이외의 신들과 그들의 형상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 대적되는 숭배 대상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엡 5:5;딤후 3:4).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없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과 생활의 주인이 되어 주셔서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신다(요 10:10).
자신을 정결케 함 : 이방 풍속에 젖어 있던 불결한 삶을 청산하라는 의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데, 바로 이 규리가 훗날 모세 율법에서 '결계 의식'으로 정착된다(레 14:4;15:13;민 19:11, 12).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서는 회개와 순종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마 4:17;벧전 1:14, 15).
의복을 바꿈: 몸을 씻는 것이 회개의 생활을 의미한다면 의복을 바꾸는 것은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명령은 훗날 하나님께서 십계명 수여 전 모세와 백성들에게 옷을 빨고 기다리라고 하신 명령과 연결된다(출 19:10, 14). 율법 시대에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개혁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겔 36:25;히 10:22).
오늘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도 말씀에 합당치 못한 삶을 모두 떨쳐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말과 행동과 인격 전체가 변화된 참경건을 이루어야 한다(롬 13:12-14).
* 성도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품.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방황과 고통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장(34장)과 본장의 주요 테마이다.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정열을 불태우며, 그러한 역동적 삶만이 참된 안녕과 번영을 제공할 것으로 믿고 있으나,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허무와 고통만을 재공 한다(눅 15:12-16). 왜냐하면 그 같은 생은 번영과 안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제외한 것이기에 마치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비, 바람에 쉽게 무너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마 7:26, 27). 이에 비해 현실적으로는 비록 고통스럽고 좌절할 것 같은 상황이 거듭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종하며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궁극적으로 참 평안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야곱의 생애는 바로 위의 진리를 확연하게 밝혀 준다. 즉 그는 철저히 인간적이며 간교했을 때에 물질이나 세상적인 면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번영의 배후에는 항상 쫓김과 방랑과 영. 육의 고통이 따랐다. 그에 반해 가장 절망적이며 자기의 무능함을 느껴야 했던,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그는 무한한 힘과 위로와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신앙인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어떤 것을 소유하였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소유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즉 그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느냐 아니면 그분의 품을 떠나 자기가 소유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야곱의 일생은 실수와 허물로 가득 찼지만 그래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가나안 입성을 위한 기나긴 여정이었고, 메시아를 대망하는 소망의 기간일 수 있었던 이유는 끝내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의 회귀야말로 흠 많은 인간이 성도로 부름 받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2.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 출생(35:16-20)
라헬은 요셉을 출산하면서 또 다른 아들 얻기를 기원했었다(30:24). 그 같은 그녀의 소망은 죽음과 더불어 성취되었다. 본문은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의 출생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12 공동체가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상존하는 것이며,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생명에의 신비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이 생명의 신비가 절정을 이루었던 때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소생시키셨던 것이다(롬 5:18).
3. 르우벤의 근친상간(35:21-22)
르우벤은 서모(庶母)인 빌하와 통하와 통간하는 극악한 범죄를 자행했다. 모세 율법에는 근친상간을 한 자들은 남녀 모두를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18:8;20:11).
한편 이 같은 심각한 폐륜 행위 앞에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야곱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인간적 분노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결에 이 모든 상황을 맡기는 극히 자제된 신앙적 자세라 할 수 있다. 야곱은 그의 임종 시에 가서야 비로소 단호한 징계를 가했는데, 즉 그는 생명보다 귀한 장자 상속권을 르우벤에게서 박탈하는 한편, 그의 후손이 탁월치 못할 것이라는 저주까지 덧붙였다(49:3, 4). 이처럼 언약 가문의 영적 순결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역행한 자는 현세와 미래에 소망이 없다.
4. 야곱의 12 아들과 이삭의 죽음(35:23-29)
베냐민의 출생으로 야곱의 아들들은 마침내 완전수인 '12'의 성원을 이루었다. 이 열두 명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속을 위해 필요로 하셨던 숫자로서 후에 선민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은 훗날 신약의 12 사도를 예표하며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완전한 구성원을 상징한다(계 7:4;21:12-14). 한편 이곳에 야곱 아들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는 이유는 불필요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이 열 두 아들들의 아비 야곱의 생애가 이제 마감되고 곧이어 그 12명의 아들들의 생애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새 세대에의 암시를 주기 위해서이다. 더욱이 12명의 조부(祖父)인 이삭의 죽음이 병기(倂記)됨으로써, 모든 과거세대의 마감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 기사는 허무한 생의 마감이나 단지 새 세대에게 역사의 주역을 이양한다는 점만을 강조하지 않고, 비록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가나 안네가 안착하는 영광을 누렸다는 측면도 강조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생(영생)의 출발점인 것이다.
* 12 아들의 부모.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각 사람의 이름이 지닌 의미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삼상 4:21). 또한 각 개인의 이름은 그 사람의 특별한 출생 배경과 관련을 갖기도 한다. 따라서 성경에 언급된 이름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인물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편 신생아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아이에 대한 주권과 소유권이 그 명명자에게 있음을 밝히는 상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몸종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까지 레아와 라헬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들이 서자(庶子)가 아니라 적자(嫡子)로 대우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곱의 열 두 아들이 본장에 일일이 언급되는 이유는 그을 이 각기 다른 모계를 통해 태어났고, 또 많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적자 곧 언약의 후손들임을 밝히려는 데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살아가야 한다(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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