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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가나안 부족의 동맹 (여호수아 9:1,2)
이 때까지는 가나안 사람들이 방어적으로 행동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성의 공격자들이 되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나안의 왕들이 모여 이스라엘을 공격할 협의를 가진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는 군대의 행진을 억제하기 위하여 힘을 합쳐 온갖 노력을 기울일 방법을 강구한다.
1. 그런데 그들이 이 일을 보다 더 빨리 하지 않은 것이 이상스럽다. 그들은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접근을 오래도록 지켜보아 왔었다. 가나안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의 계획은 은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동 안전에 대한 지각 있는 관심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맞서서 수도를 장악하든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오기가 무섭게 뜨거운 환영을 하든가 하는 어떤 방책이 취해졌어야 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예견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이들은 여리고의 포위를 해제시키기 위해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적어도 아이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부수었을 때에도 아이 사람들과 합세하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들은 추측에 의해서건 절망해서건 간에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져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이 멀어서 자기들에게 평화를 주는 길을 모른다.
2. 그들이 지금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더욱 이상스럽다. 여리고의 정복과 이스라엘의 전략에 의한 아이성의 점령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효시적 증거를 보여준 지금에 와서는 이들이 자기들의 책략을 마땅히 포기하며 이스라엘과 싸울 것이 아니라 그들과 화친함으로써 자기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얻어낼 생각을 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였을 것이다(눅 14:32).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어두워 있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지금에 와서 마침내 이 동맹을 하도록 이들을 자극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이 일을 들었을 때" (1절). 여리고와 아이성의 점령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앞에서 읽은 에발산의 거국적 계약에 관해서 들었을 때 여호수아가 이미 스스로 자기가 이 나라의 완전한 주인이나 된 것처럼 전 백성을 모아 놓고 그들을 통치할 율법을 읽어 주고 이 율법에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굉장히 열광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자기들이 분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한 헌신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원수들을 자극시키며 분격케 한다.
(2) 그들의 결단에는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들은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등으로 비록 틀림없이 관심이 다르고 이따금 서로가 알력이 있는 다른 나라의 여러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해서 뭉치는 일에는 이의가 없었다. 참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의 이 결속을 배워 개인적인 이기심을 공공의 유익을 위해 희생시키며 그들 사이의 모든 증오심을 없애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 적을 대항해서 겸허하게 연합할 수만 있다면!
9:2 없음.
9:3
기브온 주민들의 간계 (여호수아 9:3-14)
Ⅰ. 기브온 사람들이 여리고의 파멸의 소식을 듣고 놀라서 이스라엘과 화친할 것을 원했다(3절). 다른 백성들도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울 일에 대해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화해할 길을 생각해 냈었다. 이와 같이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발견도 어떤 사람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고후 2:16). 똑같은 태양이지만 밀랍은 녹게 하고 진흙은 굳어지게 한다.
본인은 기브온 왕에 대한 것을 어디서나 읽은 기억이 없다. 만일 이들의 정치 체제가 이때에 일인(一人) 체제로 되어져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 군주의 마음이 너무 교만해져서 이스라엘에게 항복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려는 여타 왕들에게 가담했을 것이다. 그러나(17절에 언급된) 이들 4개의 연합한 성읍들은 장로들이나 혹은 평의원(11절)에 의해서 통치되었던 것같이 보인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존귀보다는 공동의 안전을 의논했었다. 기브온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잘 행동했다.
Ⅱ. 그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을 살펴보자.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주민들이 멸절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에발산의 회중 속에 몇 명의 정탐꾼을 투입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율법이 낭독될 때(신 7:1-3)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백성에 대해서 "자비를 보여서는 안 되며" 전쟁에서는 가차 없이 공격하고 (이것이 저들로 하여금 싸움을 두려워하게 했었고) 어떠한 "계약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거래를 통해서 어떤 덕을 보려고 했던 저들을 절망케 했었다) 사실들을 살펴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칼날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길은 스스로를 위장시켜 여호수아로 하여금 그들이 이스라엘이 전쟁하도록 명령받지도 않고 "화해가" 금지되지도 않은 더욱이 "화해하도록" 지정된 (민 20:10, 15)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믿게 하는 것 뿐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 방법으로 통과될 수 없다면 오직 그들에게는 한 길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도 여리고와 아이의 운명을 따르는 것 뿐이었다. 비록 인근의 제왕들도 기브온 "사람들이 모두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10:2)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기는 하지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이 편되어 주시는 이스라엘과 싸울 마음을 먹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그들이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단 한 가지 작전이었다.
1. 그들은 이 작전을 아주 기술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했다. 이보다 더 교묘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1) 그들은 먼 나라로부터 오는 사절의 모습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기쁘게 하고 먼 나라로부터 문안을 받게 되는 이 명예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히스기야 왕이 먼 나라에서 그를 찾아 온 사람들을 기뻐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사 39:3). 그들은 이렇게 문안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2) 그들은 긴 여행의 피로를 견디지 못하는 체했고 이것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변질된 물건들을 만들어 내었다. 당시에는 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그 편의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휴게소 같은 것들이 마련 되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므로 지금 우리가 긴 항해를 할 경우처럼 온갖 종류의 물품들을 준비해서 다니는 것이 통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집에서 출발할 때에 신선하고 새로 만든 식품들을 가지고 나왔는데 머뭇거리지 않고 전 속력을 다해서 왔는 데도 그것들이 지금은 변질되고 굳어지게 된 것처럼 했다. 그래서 그들의 부대와 여행 가방이 낡았고 포도주는 떨어졌으며 병들은 깨어졌고 구두와 의복은 40년 동안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보다 더 헐었고 빵은 곰팡이가 슬었노라고(4,5,12,13절) 말함으로써 그들이 먼 나라에서 온 것이 틀림없는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낡은 겉치레에 속고 사기를 당해왔다. 그러나 홀(Hall) 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고치지 못할 만큼 오래된 과오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기브온 사람들의 책략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가난과 궁핍의 휘장을 듣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사람이 있고(잠 13:7) 도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 이런 기만에 속게 될 때에 그 자선은 잘못 준 것이 되고 자선의 참된 대상자들에게 되면 받게 된다.
(3) 그들이 의심을 받고 보다 더 심하게 어디서 왔느냐고 하는 심문을 받게 되자, 그들은 일심으로 계약이 체결되기까지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숨기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기만을 생각했었다(7절). "너희가 우리 중에 거하는 듯하니 우리는 너희와 동맹을 잼을 수도 없고 맺어도 안 된다." 만일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사는" 경우에 대해서 이토록 무섭게 이의를 제기하는 걸로 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 때 기브온 사람들은 일을 더 추진시킬 수 없을 정도로 실망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발각될 경우에는 일말의 소망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용감하게 복종을 감행했다. "우리가 이렇게 속여서 약속을 체결한다는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를 살려 둘지 누가 아느냐?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고백한다면 우리는 죽을 뿐이라."
[2]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라고 질문했다. 그는 노골적인 공격과 마찬가지로 은밀한 속임수를 경계하는 데에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 악마가 울부짖는 사자만이 아니라 간교한 뱀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악마의 계교를 경계해야" 한다. 모든 관계와 우정의 체결에서 바쁘게 맺은 약속 때문에 한가할 때 후회하지 않도록 먼저 시험해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3]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다. 도리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우리는 심히 먼 지방에서 왔나이다" (9절). 그들은 여호수아가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일도 없는 그런 나라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애쓰고 있느니 만큼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못되었을 것이다.
(4)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께 대한 존경을 고백하고 나아가 여호수아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우리가 관대하게 봐준다면 그들은 이 고백을 하는데 성실했었다.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9절), 우리가 그 이름에 관해서 듣고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또한 그 이름을 사모하고 기념하며 기꺼이 그 이름의 보호를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5) 그들은 얼마 전 모세의 통치 때 있었던 일로부터 그 이전에 있었던 먼 지역에 까지 쉽사리 퍼질 수 있었던 그런 소문들, 즉 애굽에 내린 재앙들과 시혼과 옥 왕의 파멸(9,10절)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 냈다. 그러나 여리고와 아이성의 파멸(사실 이것이 진짜 유인물이 되겠지만)에 관해서는 지혜롭게도 한 마디도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래야 그들이 이러한 정복이 이루어지기 오래 전에 집을 출발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데 시간을 끌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새 것이든 낡은 것이든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6) 그들은 절대적 복종을 한다.-" 우리는 당신의 종" 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협정을 간청한다-" 우리와 약조하시이다." 그들은 조건을 고집하지 않고 어떠한 조건이든 간에 화친하기를 원한다. 또한 거짓이 탄로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늦추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즉시 계약을 체결시키기를 기뻐했을 것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과 "동맹을 맺기" 만 하면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성취된다. 그들은 이 떨어진 옷과 낡아진 구두에 대해 이의가 생겨나는 것을 막아 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2. 그들의 행동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었다.
(1) 이들의 거짓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선례를 남겨놓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악을 행할 수는 없다. 이들이 자기들의 나라를 소유한 그대로라도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소유를 이스라엘에게, 또 자기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쳤더라면 여호수아가 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또한 이러한 거짓을 저질러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우리는 심히 먼 지방에서 왔다" (6절)고 한번 말했는데 그것을 다시 말하고(9절) 자기들의 빵과 부대와 옷들에 관해서도 완전히 거짓말을(12,13절)했어야만 했던 점을 살펴보라. 한 가지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불러들이고, 그리고 또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것을 계속해서 불러들이게 된다. 죄악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다.
(2) 그러나 이들의 신앙과 지혜는 아주 칭찬할 만하다. 우리 주님도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잘 처신했기 때문에 칭찬하신 일이 있다(눅 16:8).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복종했었다. 이 일은 자기들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참된 종교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많이 들어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완전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무한하신 지혜를 깨닫고 우리 자신을 항복시키며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던져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무엇이 있는가! 이들 기브온 족속들의 항복은 더욱 칭찬할 만한 것인데
[1] 그것은 단독적이었다. 그들의 인근 나라들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들도 거기에 가담하도록 기대되었다.
[2] 신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성을 에워쌀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항복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멀리 있었을 때 그들은 평화의 조건을 원했었다. 심판을 피하는 길은 회개와 부닥치는 것이다. 우리도 기브온 사람들을 본받아 겸손과 경건한 슬픔과 회개의 깃발 아래 하나님과 화해하자. 그러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파멸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자. 그러면 우리는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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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정책 (여호수아 9:15-21)
Ⅰ. 기브온 사람들과의 조약이 곧 체결되었다(15절). 이러한 일은 굉장한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을 살려주기로 약속했으며 기브온 족속들은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반 전쟁에 있어서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되겠지만 완전히 멸절시켜야 했던 가나안 전쟁에서는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같이" (렘 45:5) 한다는 것은 가나안인들에게 있어서 굉장한 은총이었다.
2. 이 약속은 여호수아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었던 전 회중 족장들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비록 여호수아는 그 정부의 비상대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 권리를 사용할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성질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방백들의 의논과 일치가 없이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모르고 있거나 무시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모두가 그와 함께 통치에 참여자가 되도록 했다.
3. 이 일은 서약으로 인준되었다.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가나안의 어떤 신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19절). 정직하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보증에 놀라지 않고 거래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며 하나님을 불러 뜻의 성실함을 증거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4. 이 모든 일 때문에 방해되는 일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데에 경솔했었다. 그들은 "이들의 음식물 때문에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난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그 음식물들이 실제로 마르고 곰팡이가 났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집에서 출발할 때 새 것을 가지고 나왔다는 증명은 못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감각만을 사용하고 이성(理性)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그 빵의 모양과 맛을 보고 그것이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굉장히 훌륭하고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알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음식물만 보고 그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추측하게 되었고 그 나라와의 우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고, 어려운 경우에 여기에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못했을 것이고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경영을 너무 믿은 나머지 그 문제를 신탁으로 물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 일에 있어서는 여호수아도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이든 간에 우리도 멈추어 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 기도와 말씀으로 의논하지 않는다면 만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두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기" 때문에 여차 여차한 일이 잘못되고 그래서 후회하며 그 일을 되돌아 볼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모든 길에서 그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보다 안전하고 편하며 성공적이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Ⅱ. 이 거짓은 화친이 이루어지자 곧 발각되었다. "거짓의 혀는 잠깐이며," 진실응 시간의 딸이다. 삼일은 못되어 그들은 이 사절들이 협의한 도시들이 아주 가까이 있으며 길갈 진영에서 하룻밤 행군거리내에 있음을(10:9) 발견하고 너무나 놀랐다. 아마 척후병들이나 아니면 진격하다가 그 마을들을 알게 된 부대이거나 아니면 적진영에서 넘어온 도망병들이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사탄의 계교에 의해서 속아 넘어간 사람들도 곧 자기들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며, 자기들이 굉장히 멀리 있다고 상상했던 것이 바로 가까이에 심지어 문곁에 있음을 알게 된다.
Ⅲ. 이 일에 대한 회중들의 원망. 그들은 이 동맹이 강요하는 속박물에 실제로 순응했고 그래서 기브온 백성들의 성을 치지 않았으며 거기 사람들을 죽이지도 노략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이 그들의 손을 이토록 얽어매게 되는 것을 투덜대며 "적장(방백)들을 원망했다" (18절).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는 열심에서보다도, 물론 이들 중에 얼마는 이것을 고려했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이익에 대한 질투심에서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봐 두렵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의 연원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의 생각에 대해 무사려한 판단을 하면서 족장들을 규탄하고 비난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이 공공의 유익에만 목표를 두고 일하며 자기 백성의 복리를 위해서 노력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들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어야 하며, 우리 스스로가 우리 이상의 일들에 참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Ⅳ. 족장들이 불평하는 회중들을 완화시키고 이 사건을 조정하는 사려 있는 노력. 여기서 모든 족장들은 틀림없이 백성을 맡아 진정시키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의견을 같이 했다.
1.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주기로 결심했다. 자기들이 명백하게 그들을 살려주기로(15절) 맹세했었기 때문이다.
(1) 그 맹세는 합법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르게 했던 헤롯의 맹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가나안을 멸절시키도록 그들에게 지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령은 in favorem vitae-일말의 따뜻한 여유를 가지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즉 끝까지 버티기만 하고 자기들의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양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을 향해서 결코 대항하려고도 하지 않고 도리어 어떤 궁지에 이르기 전에 혹은 어떠한 적의의 행동도 시도해 보기전에 무조건 겸손해지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죽여야 할 만큼 또 명예와 인간성의 감정까지도 쓸데없앨 정도로 이들을 속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들은 확실히 보다 자비로운 왕들이었다" (왕상 20:31).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런 점에서는 보다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다. Satis est prostrasse leoni-사자는 기를 꺾어 눕혀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뿐만 아니라 율법의 뜻이 곧 법이다. 율법이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물드는 악영향을 막아주는데 있다(신 7:4). 그러나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집의 친구와 종들이 된다면 결과적으로 위험은 예방되는 것이며 율법의 뜻은 이루어진다. 따라서 특별히 이러한 성질의 사건에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도 끝난다. 죄인들의 개종은 파멸을 예방해 준다.
(2) 그 맹세가 합법적이기 때문에 족장들과 그들이 계약한 그 백성들은 서로 이 맹세에 의해서 구속(拘束)을 받으며 양심으로 구속을 받고 그들이 그 이름으로 맹세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구속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이 맹세를 깨뜨렸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나안 족속들에 의해서 모독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20절)고 주장할 때, 그들은 맹세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처럼(전 9:2)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맹세로 약속을 인준한 사람이 만일 고의로 그 약속을 깨뜨린다면 하나님의 복수를 받게 되며 자기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정의가 그에게 내릴 것을 당연히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맹세가 장난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족장들은 자기들의 말을 지키려고 했다.
[1] 그들은 이 일로 손해를 보는 줄로 알고 있었다. 시온의 "백성들은 맹세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않는다" (시 15:4). 여호수아와 그 방백들은 자기들을 이렇게 속박시킨 것은 바로 자기들의 편견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이 일에 대한 면죄를 위해서 엘르아살에게 조력을 구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가나안 이방인들과는 신앙의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극히 거룩한 의무를 고안해 내고 위서(僞書)를 거룩한 책이라고 조작하는 로마 교회의 근대적 수법은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2] 백성들이 이 일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했고 따라서 이들의 불만이 반란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으나 족장들은 기브온 족속들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는 죄짓는 문제나 양심을 거역하는 일에는 제왕 앞에서건 군중 앞에서건 벌벌 떨어야 하며 가담해서는 안 된다.
[3] 그들이 술책 때문에 이 동맹을 맺게 되었으니까 충분한 이유를 내세워 이것이 무효라고 선언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것을 지켰다. 그들이 비록 비준을 서로 나눈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그 동맹에서 의도했던 성읍들이 아니었다. 비록 그들이 어떤 성읍들을 남겨두기로 약속했지만 그 성읍들의 이름이 밝혀진 것도 아니고 또 그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주 멀리 있는 성읍들이라고 했는데 이 성읍들은 아주 가까이 있고 그러므로 그들이 계약한 성읍들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생각하는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체적으로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서 속았으니까 자기들의 약속을 그들에게 기억나게 해주는 것이 합법적이었을 거라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명성을 유지하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에 대한 존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이 약속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걸로 생각했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파기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들 위에 내려질 것으로 깨닫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이 약속에 집착하는 것이 백성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했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분명히 받으실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기브온 족속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때까지 전쟁에서 가져본 일이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그들에게 주셨고(10장)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사울왕이 기브온 족속들에게 이 약속을 파기하는 악행을 저질렀을 때 혹독하게 복수하셨다(삼하 21:1). 이 일에서 우리는 약속을 실행하고 또 계약을 성공시키는 일에 얼마나 경건해야 하며 일단 말한 것이면 어떠한 양심으로 지켜야 하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깨닫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도 많은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서 이루어진계약도 파기할 수 없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정직과 공정함으로 맺어진 계약들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타인의 속임수가 우리의 거짓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면 우리들과의 거래에서 타인의 정직은 분명 그들과의 거래에서 우리의 거짓을 한층 무겁게 하고 정죄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생명은 살려 주었지만 그들의 자유는 박탈했으며 그들에게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가 되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21절). 이러한 제안으로 해서 불만에 찼던 회중들은 진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기브온 족속들을 살렸다고 분노하던 자들이 일반께서 견해를 통해서 볼 때 이들이 죽음보다 더한 영원한 노예 신분의 정죄를 받는 것을 보고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2) 이들이 약탈당하지 않은 것을 분노하던 자들이 이들이 회중을 섬기게 되자, 이 일이 자기들이 최선을 다해 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공공의 유익이 됨을 보았을 때 만족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족속들은 기브온 사람들과의 이 화친을 통해서 명예나 유익에 있어서 조금도 손실을 보지 않았다. 이 사실을 그들도 알게 한다면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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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온 주민의 생존 (여호수아 9:22-27)
여기에서는 여호수아와 기브온 족속 사이에 사건이 타결되고 그리고 협정된 계약이 설명되고 있다. 우리 생각에는 지금 이 일에는 처음 파견되었던 사절들이 아니라 기브온과 기브온에 의존하고 있었던 성읍들의 장로들이 친히 나아와 사건을 처리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이 일은 완전히 타협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Ⅰ. 여호수아는 이들의 사기 수단을 힐책한다(22절). 그리고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변명한다(24절).
1. 여호수아는 굉장히 부드러운 태도로 이들을 꾸중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를 속였느냐?"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어떠한 악명도 씌우지 않고 거치른 자극적인 언어도 사용하지 않으며, 또 마땅히 들어야 할 명칭인 저속한 거짓말쟁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그들에게 왜 우리를 속였느냐고 질문할 뿐이다. 아무리 견딜수 없는 분노의 순간에라도 격정을 참고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의무이다. 아무리 정당한 이유라도 그것을 지키려고 분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을 가지고 더 좋은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2. 그들은 일을 이렇게 처리하게 된 것을 최선으로 변명한다(24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에게 사형 선고가 이미 내려져 있음을 발견하고(그 명령은 예외없이 이 땅의 주민들을 모두 멸절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아 이 선고의 집행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논의의 여지가 없으며 그의 정의는 급힐 수 없고 그의 능력은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직 그의 자비를 이용해 보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자기들을 바쳤는데 그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것에 대한 잘못의 용서를 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렇게 한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탄원한다. 자기 보존의 법칙의 힘을 스스로 발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이다. 더욱이 그 공포가 단순히 인간의 힘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이 자기들을 대항하는 이와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만일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힘에 대한 경우라면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로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Ⅱ. 여호수아는 그들의 거짓에 대한 형벌로 그들을 정죄하고 노예 신분으로 만드나(23절). 그리고 그들은 이 선고에 복종한다(25절). 외관적으로 보아서 양쪽은 다같이 만족한다.
1.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영원한 노예 신분을 선고한다. 그들은 거짓말로 자기들의 생명을 샀었다. 이 일은 좋게 생각해 줄 일이되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가장 천박하고 힘드는 일을 하는 계속적인 노동의 임대 조건으로 목숨을 보존하게 했다. 이와 같이 그들의 거짓말은 형벌을 받았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공정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거래를 했더라면 보다 훌륭한 조건이 주어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헤어진 송과 떨어진 구두를 가지고 자기들의 생명을 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노예의 신분을 영원히 입고 다니도록 정죄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파멸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의 생명의 보상금은 지불되고 자비를 힘입어 생명을 보존하게 됨으로 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얻어내게 되나(Servus dictur servando-종이라는 말은 구원하는 행위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빚지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봉사를 해 주어야 할 빚을 진다. 이들에게 어떤 심판이 내려졌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의 노예 신분은 저주로 내려진 것이다. "너는 종들의 종이 되라" (창 9:25). "이제 너희들은 옛날 가나안에 내린 저주를 받는다. "이들 히위 족속은 가나안의 후손들이다. 거짓된 혀가 이것 이외에 또 받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그러나 이 저주가 축복으로 변한다. 그들은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종이 될 것이다. 방백들은 그들을 "회중들을" 섬기는 종으로 만들려고 했다(21절).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런 표현 방법을 써서 원망하는 회중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브온 사람들을 위해서 형벌을 완화시킨다. 그들을 모든 사람의 노예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 혹독한 일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 가 되어야 한다면 특별히 왕도의 시민이며 "용사인" 이들에게(10:2) 이것보다 더 낙심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들 또한 없을 것이다.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의 집문지기가 되기를 원할 정도였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집과 거기에 해당되는 직책을 위한 것이라면 존귀스러운 일이 된다.
[1] 그들은 여기서도 참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는 자유와 특권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이 구분의 표시가 영원토록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남게 되었다.
[2] 그들은 "선택된 곳에서 하나님의 단을 위하여" 개인적인 시중을 드는 일을 맡아 섬기도록 고용되었다(27절). 이 일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게 하고 자기들이 개종한 이 거룩한 종교에 엄격하게 따르도록 하며 자기들의 조상의 우상숭배로 돌아가는 거역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3] 이 일은 언제나 곁에서 시중들고 또 장막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맡아 해 주는 이토록 많은, 그리고 힘센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게 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굉장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제단에 끊임없이 태우는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화목제의 고기를 삶는 등등의 일을 위해서, 또 하나님의 집의 연료를 위해서는 굉장한 양의 나무를 패야만했을 것이며 또한 율법이 명령한 여러 가지 정결을 위해서는 굉장한 물을 길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과 그 외에도 그릇을 씻고 재를 버리고 뜰을 쓸고 하는 등등의 레위인들이 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러한 힘드는 일들을 이들 기브온 족속들이 하도록 정해졌다.
[4] 그들은 여기서 또한 회중들을 섬겨야 했었다. 하나님의 예배를 돕고 거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국민을 위한 참된 봉사이다. 하나님의 제단을 잘 시중드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들의 관심사다. 그러므로 회중들은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들 중의 누군가가 맡아 하게 되었을 이 힘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절대로 자기 형제를 종으로 삼지 못하도록 율법을 제정하시었다. 만일 그들이 노예를 소유한다면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이어야만 한다(레 25:44). 이 율법과 그리고 이 율법에 의해서 존중받는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하게 하시지 않으시고 기브온 사람들로 하게 하시었다. 이들은 후에 느디님이라고 불리워졌는데, 그것은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주어진 것처럼(민 3:9).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돕도록 레위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5] 이 일은 이방인들이 복음의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예시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그들은 복종을 통해서 하급직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러나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제사장과 레위 지파로 삼으실 것을" (사 66:21) 약속하신다.
2. 그들은 이 조건에 복종한다(25절).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꾸몄던 잘못을 깨닫고 또한 구사일생으로 건진 목숨과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친절을 생각할 때 그들은 이 제안에 묵종한다. "당신 의향에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죽는 것보다는 노예 신분으로 특별히 이러한 노예 신분으로 사는 편이 훨씬 낫다. 아주 천하고 가장 비참한 상태의 사람들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 로 묘사되고 있다(신 29:11). 육체, 자유, 노동 그리고 "한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목숨을 위해서 내어 놓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부당한 거래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서 이 일은 결정되었다.
(1) 여호수아는 이들이 살육 당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중에서 건져 냈었다(절). 만일 여호수아가 자기 권위를 가지고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칼로 이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지혜로운 장군은 언제 칼을 뽑아야 하며 언제 칼을 집에 꽂아야 하는지를 잘 안다.
(2) 그는 다시 이들을 노예가 되도록 이스라엘인들의 수중으로 넘겼다(27절). 그들은 자기들의 성읍을 소유하지 못했다. 우리가 뒤에 알게 되겠지만 이 성읍들 중 셋은 벤냐민 지파의 분깃이되고 하나는 유다 지파의 것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자기 자신도 임의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패트릭(Patrick) 감독의 생각에 따른다면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있는 성읍들로 분산되었고 또한 제단을 섬기는 과정에 따라서 편리한 대로 배치되어졌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해서 이스라엘의 노예는 하나님의 자유인이 되었다. 아무리 천한 자리에서라도 그를 섬기는 일이 곧 자유이며 그가 하는 일이 곧 그 일에 대한 품삯이다. 그들은 일찍 복종함으로 이것을 얻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우리도 주 예수님께 복종하며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오직 우리의 영혼을 구해주기만 하시면 우리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그에게 맡겨버리자. 만일 그가 우리에게 그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그의 멍에를 메게 하며 그의 제단에서 봉사하도록 시키신다고 해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절대로 창피하거나 슬픈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는 아무리 천한 위치라도 "우리 일생을 하나님의 집에서 살수 있도록"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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