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6월5일. 서울운동장 야구장(현 동대문구장)에서는 인천 동산고와 인천고가 청룡기 결승전에서 숨막히는 대결을 펼쳤다.
53·54년 거푸 청룡기를 거머쥔 인천고는 대회 3연패를 노리는 고교야구의 정상팀. 그러나 초고교급 투수 신인식(전 경희대 감독)이 마운드를 지킨 동산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인천야구의 최고봉을 놓고 벌인 자존심 대결이었기에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1-1로 맞선 연장 12회말. 동산고는 인천고 투수 이기상의 폭투로 결승점을 뽑아 전국대회 첫 정상에 올랐다. 화려한 동산고의 야구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산야구의 출발
'야도'(野都) 인천을 대표하는 동산고 야구부는 광복을 맞은 해인 45년 창단됐다.
박현덕(작고)·현식(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형제를 빼놓고 동산고의 57년 야구사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광복과 함께 인천에 정착하며 '동산 야구'의 기틀을 다졌다.
형 박현덕씨는 초대 감독으로 부임해 30년이 넘도록 선수들을 지도했고, 홈런왕으로 유명한 동생 현식씨는 경남중(현 경남고)의 장태영, 광주서중(현 광주일고)의 김양중과 함께 '고교 3인방'을 이루며 모교의 이름을 드높였다.
특히 현식씨는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감독을 맡아 동문인 김진영씨(전 롯데 감독)와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로 통하고 있다.
▲동산의 전성시대
55년 청룡기를 품에 안은 동산은 우승의 주역인 신인식이 5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중앙고 타선을 노히트노런으로 막아내는 진기록을 세우며 1-0으로 승리,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57년에는 라이벌 인천고를 결승에서 3-1로 따돌리며 대망의 3연패를 달성, 청룡기를 영구 보유하게 된다. 신인식은 최우수선수에 뽑혔다.
신인식에 이어 동산고의 스타계보를 이은 선수는 최관수(97년 작고)였다. 최관수는 59년 백인천(롯데 감독) 이재환(롯데 코치) 오춘삼(전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위원) 등 고교 최강 멤버로 구성된 경동고를 청룡기 결승에서 6-3으로 잠재우며 2년 만에 모교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관수씨는 71년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해 '역전의 명수'라는 명성을 얻으며 지도자로 성공하기도 했다.
▲침체기를 벗어나
동산은 1966년 이후 20년이 넘도록 전국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나긴 우승 가뭄에 단비를 내리게 한 선수는 정민태(요미우리)와 위재영(현대). 정민태는 재학 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고교 정상급의 구위로 침체에 빠진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결실은 위재영이 맺었다.
위재영은 1학년이었던 88년 황금사자기 4경기에 모두 등판, 혼자 4승(2완봉승)을 따내며 강철어깨를 과시했다. 2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맛보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동산은 89년 봉황기에서도 위재영(6승)과 봉상철(동산 코치)의 투·타에 걸친 맹활약을 발판으로 임선동(현대)이 버틴 휘문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았다.
▲21세기 재도약을 꿈꾸며
동산은 89년 이후 전국대회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98년부터 매년 전국대회 4강에 오르는 등 안정된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입학한 고교 최고 투수 송은범(SK 입단예정)을 앞세워 2년 연속 황금사자기 결승에 오르는 등 21세기 새로운 '동산고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국무대 정상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1955년 6월5일. 서울운동장 야구장(현 동대문구장)에서는 인천 동산고와 인천고가 청룡기 결승전에서 숨막히는 대결을 펼쳤다.
53·54년 거푸 청룡기를 거머쥔 인천고는 대회 3연패를 노리는 고교야구의 정상팀. 그러나 초고교급 투수 신인식(전 경희대 감독)이 마운드를 지킨 동산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인천야구의 최고봉을 놓고 벌인 자존심 대결이었기에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1-1로 맞선 연장 12회말. 동산고는 인천고 투수 이기상의 폭투로 결승점을 뽑아 전국대회 첫 정상에 올랐다. 화려한 동산고의 야구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산야구의 출발
'야도'(野都) 인천을 대표하는 동산고 야구부는 광복을 맞은 해인 45년 창단됐다.
박현덕(작고)·현식(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 형제를 빼놓고 동산고의 57년 야구사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광복과 함께 인천에 정착하며 '동산 야구'의 기틀을 다졌다.
형 박현덕씨는 초대 감독으로 부임해 30년이 넘도록 선수들을 지도했고, 홈런왕으로 유명한 동생 현식씨는 경남중(현 경남고)의 장태영, 광주서중(현 광주일고)의 김양중과 함께 '고교 3인방'을 이루며 모교의 이름을 드높였다.
특히 현식씨는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감독을 맡아 동문인 김진영씨(전 롯데 감독)와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로 통하고 있다.
▲동산의 전성시대
55년 청룡기를 품에 안은 동산은 우승의 주역인 신인식이 5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중앙고 타선을 노히트노런으로 막아내는 진기록을 세우며 1-0으로 승리,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57년에는 라이벌 인천고를 결승에서 3-1로 따돌리며 대망의 3연패를 달성, 청룡기를 영구 보유하게 된다. 신인식은 최우수선수에 뽑혔다.
신인식에 이어 동산고의 스타계보를 이은 선수는 최관수(97년 작고)였다. 최관수는 59년 백인천(롯데 감독) 이재환(롯데 코치) 오춘삼(전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위원) 등 고교 최강 멤버로 구성된 경동고를 청룡기 결승에서 6-3으로 잠재우며 2년 만에 모교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관수씨는 71년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해 '역전의 명수'라는 명성을 얻으며 지도자로 성공하기도 했다.
▲침체기를 벗어나
동산은 1966년 이후 20년이 넘도록 전국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나긴 우승 가뭄에 단비를 내리게 한 선수는 정민태(요미우리)와 위재영(현대). 정민태는 재학 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고교 정상급의 구위로 침체에 빠진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결실은 위재영이 맺었다.
위재영은 1학년이었던 88년 황금사자기 4경기에 모두 등판, 혼자 4승(2완봉승)을 따내며 강철어깨를 과시했다. 2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맛보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동산은 89년 봉황기에서도 위재영(6승)과 봉상철(동산 코치)의 투·타에 걸친 맹활약을 발판으로 임선동(현대)이 버틴 휘문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해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았다.
▲21세기 재도약을 꿈꾸며
동산은 89년 이후 전국대회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98년부터 매년 전국대회 4강에 오르는 등 안정된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입학한 고교 최고 투수 송은범(SK 입단예정)을 앞세워 2년 연속 황금사자기 결승에 오르는 등 21세기 새로운 '동산고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국무대 정상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