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WWE 팬들의 추억 속의 영웅: 헐크 호건과 워리어 - 파트 1>
우리나라의 WWE 프로레슬링 팬들의 추억 속의 영웅으로서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프로레슬링의 종주국이 미국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팬들은 우리 나름대로의 문화에 의해서 프로레슬링을 즐기며 나름의 팬문화를 형성해왔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초등학생(국민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되짚어보며 함께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느 한 시대를 살며 그 시대의 기억과 추억을 공유한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끈끈한 동질감을 이어지게 하는 일종의 키워드가 공통분모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키워드는 특정 사물이나 단체의 이름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이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스포츠와 대중문화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들의 이름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면서 서로 추억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입니다. 1960~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대중가수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영화배우로는 신성일, 엄앵란, 최무룡, 김지미, 코미디언으로는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프로레슬러로서는 김일, 천규덕, 장영철 등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중가수로는 가왕 조용필, 야구선수로는 최고투수인 최동원과 선동열, 코미디언으로는 코미디 황제 이주일, 씨름선수로서는 천하장사 이만기의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이 글의 필자인 저는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걸쳐서 우리나라의 초등학생(국민학생)들 사이에서는 AFKN 채널과 콜로시움 비디오를 통해서 WWF 프로레슬링을 시청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인기를 얻었던 선수들은 헐크 호건과 워리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도 공통분모로 존재할 만한 키워드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어린이들이 WWF 하면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을 떠올렸던 것처럼 각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그 시절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의 기억 속에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필자 나름의 결론에 의하면 “WWF의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는 마치 “씨름의 이만기와 강호동”, “인기 개그맨인 심형래(영구)와 이창훈(맹구)”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걸쳐서 초등학생(국민학생) 시절을 보냈던 그 시절의 어린이들의 추억과 정서 속에서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떠올릴만한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과거에 대한 추억과 회상을 다루는 칼럼”을 쓸 때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너무 지나치게 추억에만 몰입해서 감상적으로 흐르는 태도입니다. 이를테면 “프로레슬링에는 오직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라는 두 명의 영웅만이 존재했다”는 식으로 비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너무 지나치게 오늘날의 매니아층의 문화에만 몰입해서 단체 경영진의 비즈니스 실적이라든지 무대 뒤에서의 가십성 루머 등에만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이를테면 “WWE의 몇분기 실적이 어떠했다더라, 헐크 호건의 사생활이 어떻다더라, 워리어가 사업에 실패했다더라”와 같은 인터넷상의 이슈에만 몰입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태도는 프로레슬링의 역사가 최소 수십년에서 최대 100년까지도 유구하게 이어져왔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특정 시기(호건과 워리어의 전성기)의 기억과 추억에만 빠져서 모든 것을 감상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반면에 후자의 태도는 아예 어느 한 종목의 팬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는 추억이나 감성 자체를 완전히 퇴색시켜버리고 무미건조하게 회사의 비즈니스 현황에 대한 논의만 한다든지, 또는 프로레슬러들이 무대 위에서 벌였던 전적과 퍼포먼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가십성 루머와 사생활 파헤치기에만 너무 치우치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글의 필자인 저로서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칼럼의 취지에 부합하게 지난 시절의 추억과 감상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 자체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WWE 프로레슬링이 종주국 미국이 아닌,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나라의 팬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서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일단은 1980년대로 떠나는 추억여행의 스타트를 민속씨름에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름이라는 종목 자체가 과거에는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국민스포츠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 존립 기반마저 위태로워질 정도로 인기가 하락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 씨름의 찬란했던 전성기 시절의 역사나 추억을 되새겨보는 데 있어서는 “씨름이라는 종목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과 “전체적인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고 특정 시기의 기억과 추억만을 공유하고 있는 일반 대중들”의 인식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괴리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씨름이나 프로레슬링은 물론이고, 스포츠, 대중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로서도 민속씨름의 인기가 최고의 정점에 올랐던 1980년대 초반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시절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의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네이버의 “나루세님”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서 민속씨름의 초창기는 물론이고, 필자가 태어나기 이전인 1970년대의 역사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분의 글을 스크랩하면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역사의 퍼즐을 맞춰보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네이버캐스트 2.0” 등을 통해서도 과거의 추억의 스포츠에 대한 정보를 일부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칼럼시리즈의 내용 전개에 필요한 부분을 위해서 그중의 일부분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민속씨름”이라 하면 1983년에 출범한 “프로씨름”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제1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혜성처럼 나타나서 기적의 우승을 차지했던 이만기의 등장은 “씨름 황금기”의 시초이자 최고의 순간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속씨름이 프로화되기 이전인 1970년대에도 아마추어의 형태로 씨름대회는 존재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만기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씨름계의 절대강자가 존재했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성률 장사였습니다. 김성률 장사는 1970~76년에 걸쳐서 그 당시에 존재했던 씨름대회의 거의 모든 장사 타이틀을 휩쓸었습니다. 라이벌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압도적인 독주체제를 구축했던 절대강자의 면모를 보여준 씨름선수는 1970년대의 김성률 장사, 1980년대의 이만기 장사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1975년에 홍현욱 장사가 김성률 장사를 꺾고 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사건은 세대교체의 신호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어서 1976년에는 이준희 장사도 김성률 장사를 꺾고 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동갑내기 라이벌인 홍현욱 장사와 이준희 장사는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에 걸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사 타이틀을 휩쓸면서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이만기 장사가 등장하기 직전까지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홍현욱 장사와 이준희 장사는 1983년 프로씨름 출범 당시에도 제1회 천하장사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3년 공식적으로 출범한 “제1회 천하장사 대회”는 파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 우승후보 1순위였던 홍현욱 선수는 준결승에서 최욱진 선수에게 일격을 당했고, 우승후보 2순위였던 이준희 선수는 준결승에서 이만기 선수에게 일격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 선수였던 이만기 선수와 최욱진 선수는 나란히 돌풍을 일으키면서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두 선수는 이미 한라장사 결승전에서도 맞붙어서 최욱진 선수가 승리한 바가 있었습니다. 천하장사 결승전에서 이만기는 최욱진과 접전을 펼친 끝에 3:2로 승리를 거두면서 생애 첫 장사 타이틀을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로 장식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이만기 장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독주시대와 함께 민속씨름의 황금시대를 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이만기 장사는 1980년대의 민속씨름을 주름잡으면서 통산 성적에서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 그 밖에 번외장사 타이틀까지 합쳐서 통산 47회의 우승을 차지하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쌓은 이만기 장사는 은퇴 후에도 교수, 해설자 등을 역임하며 씨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만기 장사의 이름은 곧 민속씨름을 상징하는 존재 그 자체이자 전설 중의 전설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만기 선수와 함께 황금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던 선수가 이준희와 이봉걸 선수였습니다.
이준희 선수는 프로씨름 출범 이전에도 이미 홍현욱 선수와 함께 최강의 선수로 군림한 데 이어서 프로씨름 출범과 함께 이만기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도 2인자 그룹에서 롱런하면서 통산 3차례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봉걸 선수는 프로씨름 출범 이전에 아마씨름 시절에도 우승경험이 있었고 홍현욱, 이준희 등과 함께 정상을 다투는 선수였지만, 프로씨름이 출범한 이후에는 이만기, 이준희 등에 비해서는 조금 늦게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봉걸은 프로씨름 데뷔 이후에도 이만기의 최대 난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통산 3차례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이만기와 이준희, 이봉걸 선수는 1980년대 민속씨름 황금기 시절의 “황금 트로이카”로 군림했습니다.
이만기의 독주시대를 마감시키고 그의 후계자로 새롭게 떠오른 선수는 강호동 선수였습니다. 강호동은 씨름선수로 활동한 기간은 1989~1991년에 걸친 3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이 기간 동안 통산 5차례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이 부문에서 이만기에 이어서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에 강호동 선수가 이만기 선수를 꺾고 천하장사에 등극한 사건은 세대교체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고, 강호동은 이만기를 상대로 통산전적에서 우위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로 등극했습니다. 이만기의 후계자로 혜성처럼 떠올랐던 강호동은 그러나 불과 3년 남짓한 짧은 프로씨름 선수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습니다. 은퇴 이후에 강호동은 개그맨으로 전향하면서 연예계에 진출했고, 약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유재석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국민MC로 떠올랐습니다.
프로씨름에서 거둔 통산성적을 분석할 때는 천하장사 이외에도 지역장사, 백두장사, 한라장사, 번외장사 등을 모두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하고, 이 경우에 강호동의 프로씨름에서의 통산성적은 이만기 시대의 2인자 그룹이었던 이준희, 이봉걸 등과 엇비슷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준희, 이봉걸 등이 프로씨름 출범 이전의 아마씨름 시절에도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던 선수들임을 감안한다면 강호동의 통산성적은 이들에 비해서는 다소 열세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호동 이후에 등장한 후배선수인 이태현, 김영현, 김정필, 신봉민, 김경수 등도 통산성적에서는 강호동과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강호동을 능가하는 타이틀 횟수를 기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강호동은 프로씨름에서 선수로 활동한 기간이 3년 안팎에 불과한데도 10년 이상 정상권에서 활약한 선수들과 엇비슷한 타이틀 횟수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천하장사 타이틀 체계가 “1년에 3회 -> 1회”로 줄어든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정상급 선수들의 평균적인 천하장사 타이틀 횟수가 2회~3회 정도의 수준인 데 비해서 강호동은 천하장사 타이틀 횟수가 통산 5회로 이 부문에서만큼은 이만기에 이어서 확실한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이틀 체계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일단 천하장사 기록은 기록 그 자체로서 어느 정도의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하장사 이외의 모든 타이틀을 포함했을 때는 강호동의 통산성적이 역대 2위와는 다소 거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3년 남짓 활동한 선수가 10년 이상 활동한 선수들과 근접한 통산성적을 냈다는 것은 매우 경이적인 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강호동이라는 씨름선수의 천재성만큼은 정말 대단했다고 평할 수 있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린 뒤 홀연히 씨름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강호동이 떠난 이후에는 새로운 최강자들이 등장하면서 팬들은 “이만기의 새로운 후계자”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강호동의 은퇴 직후에 1992~93년에 걸쳐서는 김정필이 최강자로 떠올랐고, 1993~94년에는 소년장사 백승일이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신봉민이 백승일의 독주를 견제하며 양강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이태현이 여기에 끼어들며 3각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당시까지의 씨름 최강자로서의 서열은 “백승일-신봉민- 이태현”의 순서였지만, 상대전적에서는 신봉민이 백승일에 앞서고 이태현은 백승일과 신봉민 모두에게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승일과 신봉민은 모두 공통적으로 자신의 최대의 난적으로서 이태현을 꼽고 있었습니다.
1995년 시즌이 개막되면서 이태현은 화려한 독주시대를 열었고 백승일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신봉민은 시즌 첫 대회인 설날장사 타이틀을 차지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이후부터는 천적인 이태현의 벽에 막혀서 좀처럼 타이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고, 신예인 김경수는 이태현의 새로운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이로써 1990년대 중반에는 이태현이 이만기의 뒤를 잇는 최강자로 떠올라서 독주체제를 형성한 가운데, 김경수와 신봉민이 2인자를 다투며 새로운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김경수는 이태현의 최대의 라이벌로 떠오르며 상대전적에서 이태현을 앞서는 유일한 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태현의 뒤를 이어서 새롭게 최강자로 떠오른 선수는 김영현이었습니다. 김영현은 프로씨름 데뷔 이전부터 “거인선수”로 화제를 모았지만 막상 데뷔 초창기에는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부터 김영현은 기존의 트로이카를 제치고 자신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김경수는 천적인 김영현의 벽에 여러 차례 막히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신봉민은 한때 이태현과 김경수에 밀려서 3인자로 내려앉는 듯하다가 이후 이태현과 김영현의 새로운 양강구도가 형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3강구도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황규연이 종종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시대를 완벽하게 주름잡은 절대강자의 계보는 “이만기-이태현-김영현”의 계보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만기의 퇴장 이후부터 이태현의 등장 이전까지 개별 시즌의 최강자로서는 “강호동-김정필-백승일”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신봉민과 김경수는 이태현 시대의 2인자 그룹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산성적에서는 백승일이 오랜 공백과 방황으로 인해서 오히려 신봉민과 김경수에 비해서 다소 열세를 보인 반면에 신봉민은 김정필, 백승일 등을 앞서는 통산성적을 기록하며 롱런했습니다. 김정필은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종종 신봉민과 함께 장사 타이틀을 놓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2~2003년에는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의 등장과 함께 일대 파란이 일었습니다. 최홍만은 공식적인 데뷔를 하기 이전인 2002년에도 번외대회에 참가해서 김영현을 한 차례 격파한 데 이어서 2003년에는 신인의 신분으로서 김영현을 제치고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김영현과 최홍만의 통산 상대전적에서는 김영현이 앞서기 때문에 최홍만을 김영현의 천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홍만은 데뷔하자마자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김영현의 발목을 잡으면서, 향후 김영현 체제의 씨름 판도를 뒤흔들 최대의 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가운데 김영현은 2004년에 마지막 천하장사 대회의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명예회복에 성공했고, 이때 소년장사 백승일도 오랜 부진을 털고 준우승을 하면서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도 김영현과 백승일을 비롯해서 여러 선수들이 백두장사 타이틀을 나눠가지면서 춘추전국시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에 민속씨름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혼란 상황에서 파국을 맞이했고, 결국 씨름판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빅3로 꼽히던 이태현, 김영현, 최홍만은 모두 씨름판을 떠나서 은퇴한 이후에 실전격투기 선수로 전향했습니다.
최홍만은 프로씨름 선수로 제대로 활동한 기간이 2년 안팎에 불과했기 때문에 통산성적을 분석할 경우에는 앞선 시대의 “레전드”들에 견줄 만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칠 기회 자체를 봉쇄당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기간에 신인의 신분으로 “역대 천하장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 자체가 상당히 경이적인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씨름이라는 특정 종목에서는 일찍 은퇴했지만, 이후 실전격투기 종목인 K-1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격투기 전반에 걸쳐서 시각을 확대했을 때, 최홍만이 “천부적인 신체조건과 발군의 천재성을 갖춘 격투가”로서의 면모만큼은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프로씨름에서의 통산성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역대 1위는 이만기, 2위는 이태현, 3위는 김영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계보를 “1980년대의 이만기 - 1990년대의 이태현 - 2000년대의 김영현”으로 설정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태현과 김영현의 경쟁구도의 우열관계는 역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지만, 김영현이 한창 상승세를 타던 시기에 씨름판 자체가 망하게 되면서, 결국 김영현은 통산성적에서 이태현에 거의 근접하게 추격하기는 했지만 역전에는 실패했습니다.
이태현과 김영현의 통산 상대전적에서는 이태현이 근소하게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이태현을 김영현의 천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태현의 우위는 대부분 김영현의 부진했던 데뷔 초창기 시절에 집중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점차 김영현의 우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고, 이태현은 점차 힘이 부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2003년 이후에는 김영현과 최홍만의 새로운 양강구도가 형성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씨름판 자체가 망하지 않았다면 김영현이 통산성적에서 이태현을 역전하고, 김영현과 최홍만이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하는 상황이 현실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씨름판이 모두 망하고 이태현, 김영현, 최홍만이 모두 실전격투기로 전향하면서 통산성적에서의 역전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고 “만약”이라는 가정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태현은 정작 자신이 독주시대를 구가하던 1995~97년의 전성기 시절에는 결정적 승부처였던 연말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김경수, 신봉민에게 타이틀을 내주는 불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이태현은 전성기가 지나고 주도권도 김영현에게 넘어간 2000년과 2002년에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연말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씨름판이 한 차례 망했다가 리셋팅된 2007~2009년에 걸쳐서는 윤정수 선수가 3년 연속으로 정상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태현, 김경수, 황규연이 나란히 컴백했습니다. 이태현은 2010년 시즌에 윤정수를 꺾고 설날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데 이어서 한 시즌 동안의 백두장사 타이틀을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후 2011년에 이태현은 이슬기 선수에게 패배한 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태현의 후계자로 기대를 모았던 이슬기는 이후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2011년 천하장사에 등극하며 신황태자로 등극했습니다. 기존에 활약하던 씨름 레전드들 중에서는 황규연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2010년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분전하고 있습니다.
이태현은 천하장사와 지역장사, 백두장사, 번외장사 등의 타이틀을 종합한 통산성적에서는 이만기에 이어서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백두장사 타이틀 횟수라는 특정 부문에서의 기록에서만큼은 이만기를 제치고 역대 1위에 올랐습니다. 비록 몇차례 위기는 있었지만, 오늘날 민속씨름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이태현은 이만기 이후의 최강자로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민속씨름 레전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씨름 출범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서 최고의 레전드를 꼽는다면 김성률 장사, 홍현욱 장사, 이준희 장사, 이만기 장사, 이태현 장사, 김영현 장사 이렇게 6명을 역대 최강의 씨름 레전드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다음으로는 이만기 시대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이봉걸 장사, 이만기의 천적이자 후계자인 강호동 장사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다음으로는 김정필, 신봉민, 백승일, 김경수, 황규연 등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최근의 리셋팅된 씨름계에서는 윤정수, 이슬기 등을 새로운 강자의 이름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대 씨름 레전드들 중에서도 “왕중왕”으로서는 “1970년대의 김성률 - 1980년대의 이만기 - 1990년대의 이태현”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씨름 출범 이후만을 기준으로 하면 “이만기와 이태현”의 이름을 첫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고, 프로씨름 출범 이전까지 모두 포함할 경우에는 “김성률과 이만기”를 역대 최강의 씨름 레전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왕중왕” 중에서도 굳이 단 한 명만의 이름을 거론해야 한다면, 그 이름은 당연히 “이만기”의 차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민속씨름”이라는 종목의 역사와 역대 최강자의 지위에 등극했던 레전드 장사들의 면모를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야에서든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특정 종목 또는 그 분야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역대 기록물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특별히 그 종목의 역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팬들의 특정 시기에 치우친 기억에는 커다란 괴리감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이 글의 필자인 제가 다루게 될 프로레슬링을 주제로 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민속씨름”이라는 종목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민속씨름 출범 이전의 1970년대의 일은 워낙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는 매우 드문 편입니다. 나이가 굉장히 많은 어르신들 중에는 간혹 김성률 장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씨름의 역사에 웬만큼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씨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 인터넷으로 열심히 자료를 찾는다 하더라도 자료의 검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올드팬”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는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로 대표되는 1980년대의 “황금 트로이카”의 이름을 비교적 잘 기억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역시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날에 와서는 점차 연령대가 어린 세대의 등장과 함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씨름이라는 종목의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는 대체로 “씨름” 하면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을 떠올리는 경우가 보편적입니다.
그리고 “올드팬”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씨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1990년대 이후에 이태현이 이만기에 버금가는 최강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씨름이라는 종목 자체의 인기가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점차 하락세였기 때문에 이태현은 그가 거둔 화려한 성적에 비해서는 대중적인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입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씨름만을 접한 젊은 세대들은 “씨름” 하면 우선적으로 “김영현과 최홍만”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올드팬이든 젊은 세대이든간에 씨름이라는 종목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태현의 존재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팬들에게는 이태현도 그저 “한때 잘나갔던 씨름선수”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한편 지금 현시대 또는 최근의 강자라 할 수 있는 윤정수, 이슬기, 박영배 등의 이름은 씨름이라는 종목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팬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이 글의 필자인 저는 WWE 프로레슬링의 상황도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프로레슬링의 경우도 실제로는 1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가 존재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올드팬”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1980년대의 기억과 추억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은 1990년대 또는 2000년대의 기억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의 WWF의 기억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당시에 씨름판에서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이 가장 유명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초등학생(국민학생)들에게 가장 유명한 WWF 프로레슬러의 이름은 헐크 호건과 워리어였습니다.
씨름에서도 이만기 이전의 절대강자가 존재했던 것처럼 WWF 프로레슬링에서도 헐크 호건 이전의 절대강자가 존재했는데, 그의 이름은 1960~70년대의 WWF를 주름잡았던 브루노 사마티노였습니다. 프로레슬링에서의 헐크 호건이 민속씨름에서의 이만기 장사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처럼, 프로레슬링에서의 브루노 사마티노는 민속씨름에서의 김성률 장사와도 같은 존재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헐크 호건의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의 최강자였던 밥 백런드는 마치 민속씨름판에서 이만기 시대 직전의 최강자였던 홍현욱 선수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레슬링에서의 안드레 더 자이언트는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특정한 어느 단체의 에이스라고 정의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WWF와 AWA, 일본 등을 오가면서 그 시절 최고의 인기스타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WWF에 완전히 정착해서 헐크 호건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도 헐크 호건의 강력한 라이벌로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마치 민속씨름에서 이준희 선수가 이만기 시대 이전에도 강자였고, 이만기 시대의 개막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강력한 라이벌로 건재했던 상황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WWF에서 헐크 호건의 전성기 시절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마초맨 랜디 새비지는 민속씨름에서 이만기의 전성기 시절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이봉걸 선수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WWF에서 1990년대 초반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헐크 호건을 물리친 워리어는 민속씨름에서 1990년대 초반에 이만기를 물리쳤던 강호동과도 같은 존재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WWF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헐크 호건 이후의 최강자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한 브렛 하트는 민속씨름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이만기 이후의 최강자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한 이태현과도 같은 존재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동안 이어져왔고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정말로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과거 역사자료를 꼼꼼하게 찾아서 조사하는 활동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일단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1980년대를 기준점으로 잡을 경우 양대 메이저 단체인 WWF와 NWA에서는 각각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가 최강자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는 전성기가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도 변함없이 건재하게 독보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며 미국 프로레슬링계의 양대전설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의 시대가 열리기 바로 직전의 최강자는 WWF에서는 밥 백런드, NWA에서는 할리 레이스였습니다. 그 외에도 과거 NWA나 AWA, WWA, WWF 등에서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 이전의 강자로서 전설에 반열에 오른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한다면 닉 복윙클, 페드로 모랄레스, 안드레 더 자이언트, 도리 펑크 주니어, 진 키니스키, 브루노 사마티노, 베른 가니에, 버디 로저스, 팻 오코너, 루 테즈, 고얼져스 조지, 킬러 코왈스키, 안토니오 로카, 에드워드 카펜터, 프레디 블레시, 오르빌 브라운 등등... 의 이름들을 나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헐크 호건과 릭 플레어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에 WWF에서는 마초맨 랜디 새비지가 헐크 호건과 함께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고, 헐크 호건과 마초맨의 관계는 “세기의 라이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NWA에서는 릭 플레어와 함께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한 선수는 더스티 로즈였지만, 라이벌 관계 자체에만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릭 플레어와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리키 스팀보트와의 관계가 “세기의 라이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 WWF에서는 브렛 하트가 “헐크 호건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고, NWA의 후신인 WCW에서는 스팅이 “릭 플레어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WWF에서는 브렛 하트와 함께 그의 최대 라이벌이던 숀 마이클이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고, 이들의 관계는 역시 “세기의 라이벌”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한편 WCW에서는 스팅의 활약이 정점을 이루는 가운데 “80년대 빅3”로 통하는 헐크 호건, 릭 플레어, 마초맨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며 현역 최강자인 스팅과 함께 경합을 펼쳤습니다.
일단 프로레슬링의 역사 속에서 “레전드”로 군림했던 인물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이렇게 살펴봤지만, 프로레슬링이라는 종목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팬들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특정한 시기의 기억과 추억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프로레슬링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러한 상황을 철저하게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할 경우에 우리나라의 WWF 팬들이 프로레슬링 하면 보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바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인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민속씨름에서 이만기, 강호동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와 WWF에서 헐크 호건, 워리어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거의 절묘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민속씨름에서 이만기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던 시점이 1983~1984년이었고 WWF에서 헐크 호건이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던 시점이 1983~1984년이었습니다. 민속씨름에서 강호동이 이만기의 후계자로 떠올랐던 시점과 WWF에서 워리어가 헐크 호건의 후계자로 떠올랐던 시점은 모두 1990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강호동은 1992년 무렵에 민속씨름을 홀연히 떠났고, 워리어는 1992년 무렵에 WWF를 홀연히 떠났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AFKN으로 WWF를 시청했던 우리나라의 초등학생(국민학생)들의 기억 속에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고, 이들 세대들의 기억 속에 동시대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키워드로서는 민속씨름의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종목의 전체적인 역사를 조명하는 것과는 별개로, 특정 시기의 기억과 추억이라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공통적인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고,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바로 그러한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WWF 프로레슬링에서의 브렛 하트의 존재는 민속씨름에서의 이태현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속씨름의 역사에서도 실질적인 “이만기의 후계자”를 꼽는다면 그 이름은 강호동이 아닌 이태현의 이름이 나와야 합니다. 강호동이 민속씨름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기간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던 것에 비해서 이태현은 이만기 이후의 최강자로 꾸준하게 자리잡으며 이만기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선수들 중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만기가 전성기를 누렸던 1980년대가 민속씨름의 “황금기”였던 데 비해서 이태현이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의 민속씨름은 그 인기가 비교적 하락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만기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에 비해서는 이태현은 어떤 측면에서는 “고독한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올드팬들 중에서도 씨름이라는 종목의 역사에 꾸준하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만기, 강호동, 이봉걸, 이준희의 이름과 함께 이태현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씨름의 포괄적인 역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는 그래도 씨름 하면 우선적으로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레슬링의 경우에도 헐크 호건이 전성기를 누렸던 1980년대의 WWF가 “황금기”였던 데 비해서 브렛 하트가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의 WWF는 “위기론”이 대두될 정도로 인기가 크게 하락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헐크 호건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에 비해서는 브렛 하트는 어떤 측면에서는 “고독한 최강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90년대 중반에 WWF를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 레슬링 종주국인 미국보다도 훨씬 더 안 좋은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WWF 팬들이 브렛 하트의 전성기를 온전히 시청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올드팬들 중에서도 WWF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꾸준하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헐크 호건, 워리어, 마초맨, 달러맨, 안드레 더 자이언트의 이름과 함께 브렛 하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프로레슬링의 포괄적인 역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는 그래도 WWF 프로레슬링 하면 우선적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WWF 프로레슬링에서도 실질적인 “헐크 호건의 후계자”를 꼽는다면 그의 이름은 워리어가 아닌 브렛 하트의 이름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워리어가 WWF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기간은 아주 잠시 동안이었던 것에 비해서 브렛 하트는 헐크 호건 이후의 최강자로 꾸준하게 자리잡으며 헐크 호건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선수들 중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팬들에게는 그 종목이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던 시절의 기억이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WWF에서의 브렛 하트는 마치 민속씨름에서의 이태현과 같이 “고독한 최강자”로서의 포지션에 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민속씨름에서는 대다수의 일반 대중들은 우선적으로는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을 떠올리고 거기서 약 10년 이상의 터울이 지난 젊은 세대의 팬들은 우선적으로 김영현과 최홍만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씨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태현이 이 분야에서 이만기와 함께 전설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만, 씨름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는 이태현의 이름도 그저 “한때 잘나갔던 씨름선수”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WWF 프로레슬링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대다수의 팬들이 우선적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을 떠올리고, 거기서 약 10년 이상의 터울이 지난 젊은 세대의 팬들은 우선적으로 THE ROCK과 스톤 콜드의 이름을 떠올리거나 또는 골드버그, 브락 레스너, 언더테이커 등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리고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브렛 하트가 이 분야에서 헐크 호건과 함께 전설의 반열에 올라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만,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는 브렛 하트의 이름도 그저 “한때 잘나갔던 WWF 선수”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 글의 필자인 저는 민속씨름에서의 김영현과 최홍만의 이력이 마치 WWE 프로레슬링에서의 THE ROCK과 브락 레스너를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한번 떠올려봤습니다. 민속씨름에서의 김영현의 경우 한때 이만기와 이태현을 넘어선 씨름계의 최고의 전설로 떠오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씨름계에서 한창 타이틀 획득수를 늘려가던 전성기에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타분야인 실전격투기 선수로 전향해야 했습니다.
WWE 프로레슬링에서의 THE ROCK도 한때는 앞선 시대의 레전드인 헐크 호건이나 브렛 하트 등을 뛰어넘어서 최고의 전설로 떠오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WWE에서 한창 타이틀 획득수를 늘려가던 전성기에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타분야인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로 전향해야 했습니다. 물론 김영현과 THE ROCK에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김영현이 씨름판을 떠난 것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THE ROCK이 WWE를 떠난 것은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김영현과 THE ROCK의 상황을 마치 “이만기-헐크 호건”, “강호동-워리어”, “이태현-브렛 하트”와 같은 구도로 설정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렸던 두 선수가 모두 이 분야에서 최강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시절에 타분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그렇게 중간에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룩한 성적만으로도 과거의 대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는 측면에 포커스를 맞춰서 한번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최홍만의 경우에는 그의 이력이 정말 브락 레스너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민속씨름에서 최홍만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점과 WWE 프로레슬링에서 브락 레스너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점은 2002~2004년으로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들이 자신의 분야를 떠나서 새로운 분야인 실전격투기에 발을 들여놓았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변신을 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씨름이라는 특정 종목, 또는 프로레슬링이라는 특정 종목 자체만의 역사를 놓고 볼 때는 최홍만이나 브락 레스너의 활동 기간이나 전성기는 극히 짧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들이 실전격투기 선수로 전향하면서 “격투기”라는 분야 전반에 걸쳐서 활약한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천재 격투가”로서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UFC에서 단체의 간판으로까지 떠오른 브락 레스너가 격투가로서는 좀더 성공적인 업적을 쌓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의 WWE는 JOHN CENA와 RANDY ORTON이 주축이 되어 이끌고 있으며, 이들의 전성기를 전후해서 바티스타, EDGE, CM펑크 등의 강자들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JOHN CENA는 헐크 호건 이후로 20여년만의 독주시대를 열며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WWE 프로레슬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시청하는 팬들은 현시대 최강자인 JOHN CENA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지만, 프로레슬링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 중에서는 아예 현시대 최강자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었던 WWF의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면서, 우선은 레슬링과 비교적 유사성을 띠고 있는 종목인 씨름의 이만기, 강호동의 이름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마련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분야에서 그 시절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기억과 추억을 상징하는 존재로서는 또 어떠한 키워드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필자는 한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시절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을 열광시켰던 개그맨과 그 캐릭터로서 “영구” 심형래와 “맹구” 이창훈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사진: 헐크 호건과 워리어>
(출처: 온라인 월드 오브 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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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온라인 월드 오브 레슬링)
---------- 파트2에서 계속 ----------
{출처: 프로레슬링에 관한 내용은 “wwe.com”, “최승모의 레슬링 홈페이지”,
“레슬뱅크 닷컴”, “레슬매니아 닷컴”, “야후 위키피디아” 등에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해서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했습니다.
민속씨름에 관한 내용은 “네이버 나루세님의 블로그”의 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그밖의 과거 회상에 관한 내용의 대부분은 필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을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 과거 신문기사 등을 참고해서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2년 1월 31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30153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