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신학적 이해”
나용화
(개신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서론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신학적 영향을 받은 장로교도인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의 완전 성화 교리와, 피니의 후계자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와 그의 동역자인 토레이(Reuben A. Torrey)의 성령세례 교리와 교회 운동에 영향을 받아, 중생 이후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 20세기초와1) 1950년 이후에2) 활발하게 전개되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장로교회 소속 신학자들 사이에서 성령세례에 관한 논의가 빈번해지면서3)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두고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특별히,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의 신령한 체험인가? 아니면, 중생과 회심이 성령세례인가? 성령세례는 그리스도 및 그의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필수적인 조건들이 필요한가? 성령세례를 받은 구체적인 증거들은 무엇인가? 성령세례는 단회적인가, 반복적 또는 영속적인가? 그리고, 성령세례는 구원사적 사건인가, 아니면 구원의 서정의 한 요소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구별되는가, 아니면 분리되는가? 이 둘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성령충만에는 어떤 구별되는 측면들이 있는가?4)
신오순절의 은사운동에 대해서는 생동감있는 예배,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역동적 영적 생활과 뜨거운 감성(fervent emotion), 간절한 회개(earnest repentance), 실천적 믿음, 영광스런 기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 교회에 대한 헌신, 선교의 열정, 활발한 교제 등 많은 장점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5) 성경보다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삶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며, 방언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지나치게 내세우고, 방언 못하는 신자를 열등한 신자로 멸시하는 경향 등 부정적인 요소를 들어 비판한다.6)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논쟁들을 지양하고, 오순절 운동 신학의 단점들을 성경적으로 바로 잡거나, 오순절 신학에 대한 일부 장로교도들의 오해를 해소하며, 성령의 활발한 역사가 교회 안에서 나타나 교회가 부흥하도록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성경의 용례를 모세와 예수의 경우를 배경으로 검토하고, 성령세례와 충만을 교회론적으로 접근하되, 종말론적인 측면과 구원론적인 측면에서도 살피고자 한다.
I. 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성경의 용례
토레이의 경우를 보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인치심, 성령의 선물, 또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등을 모두 같은 영적 체험으로 간주하여 구별하지 않고 성령세례라는 말로 통칭한다.7) 최갑종도 “세례 받다”(행 1:5), “오다”(행 1:8), “채워지다”(행 2:4, 4:8,31, 6:3,5, 7:55, 11:24, 13:52), “부어주다”(행 2:33), “주다”(행 15:8), “임하다”(행 10:44, 11:15), “받다”(행 10:47) 등 다양한 표현이 성령의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8) 서철원은 오순절 성령강림(행 2:1-4) 만을 성령세례로 이해하는가 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후의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해서는 성령충만으로 이해하였다.9)
그러나, 허멜(Charles, E. Hummel)은 성령세례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서 새 시대를 여는 사건으로서 성령세례와 역동적인 성령충만 그리고 상태적인 충만으로 구별하며,10) 쾌스텐베르거(Andreas J. Kostenberger)는 “충만케 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핌플레미(πιμπλημι)와 플레로오(πληροω)에 대하여 전자는 종말론적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성령세례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하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work)와 관련해서는 성령의 충만이며, 후자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점에서 성령충만으로 이해한다.11) 권성수는 성령충만을 화끈한 방식의 특별충만과 조용한 방식의 보통충만으로 구별하고,12) 안영복은 성령충만의 시작을 성령세례로 보고, 성령충만에 대해서는 생활상의 성령충만과 능력충만으로 구별한다.13) 그리고, 김현진은 로이드 존스와 대천덕과 차영배의 견해들에 근거하여14)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개로 보는가 하면 은혜상태의 칭의 단계에서 영광상태의 성화단계로 들어가는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하고, 또한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의 시작으로 보며, 성령충만의 경우 성령의 능력과 관계되는 외적 순간적 충만과 성령의 열매와 관계되는 내적 지속적 충만으로 구별한다.15)
이상에서 소개한 견해들을 참고하여 성령세례와 충만과 관련된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모세의 경우
우선 구약에서 모세와 관련된 경우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0:1-4에서 바울이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의 경험에 대하여 해석한 것을 참고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가리켜 세례라 하였고(고전 10:2), 시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신령한 양식으로, 그리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신령한 음료라 하였는가 하면, 그 물을 낸 반석을 그리스도라 하였다(고전 10:3-4). 바울이 말하는 세례는 형식상으로는 물세례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세례를 가리키고 있으며(참고, 고전 12:1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광야 교회로 세움 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사실은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에 나타나 있다. 홍해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권능으로 구원하여 영광을 나타낸 구원사건으로(출 15:1-2,6),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구속하신 백성을 자기의 성결한 처소 곧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출 15:13,17). 그 백성은 또한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백성이다(출 15:16).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가능했고, 그들이 어린양의 피를 믿었기 때문이었다(출 12:21-28). 그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요(출 2:24, 6:5),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구속 사건이었다(출 6:7, 신 7:7).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값 주고 산 바 된 까닭에(참고, 고전 5:7, 6:20, 7:23)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참고, 고전 6:19),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인침을 받아 은혜의 상태 곧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 사건을 통해서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신령한 양식인 그리스도를 먹고(참고, 출 16:13-20)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인 성령을 마시는 축복을 누렸다(참고, 출 17:1-7). 여기서 우리는 칭의(출 12장) - 성령세례(출 14장) - 성령충만(출 17장)이라고 하는 구원의 과정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는 교회를 세우는 사건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칭의의 은혜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영광상태에로 들어가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사건 곧 성령세례 사건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감격과 큰 기쁨을 누렸으며, 시와 찬미로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한편, 출애굽기 29장 1절과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양식과 제도를 말씀하고 나서(참고, 출 25-28장) 제사장 직분을 위임할 때 기름을 부으라 했다. 그리고, 성막을 지을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몇 사람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의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셨고(출 31:3, 35:30,31, 36:1,2),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는 70인의 장로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셨다(민 11:17,25). 그 때 엘닷과 메닷이라는 자들도 진에 머물러 있다가 성령 충만하였다(민 11:26). 70인의 장로들과 엘닷과 메닷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던 때에 특별히 예언을 하였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를 섬기는 직분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어 다스림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 즉, 성령의 역동적 충만을 받은 것이다.
2. 신약의 예수의 경우
이제, 우리의 구주이시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한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πνευματι ἁϒιῳ και δυναμει, 수단의 여격) 기름 붓듯 하셨다(ἐχρισεν, 부정과거)(행 10:38). 즉, 성부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으로 기름 부어 메시야의 직분을 선언하시고 능력으로 충만케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전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게 하셨다(행 10:38 하).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이 말씀을 전하던 때에 이 말씀을 듣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었다(행 10:44-47, 참고, 11:16). 이로 보건대, 나사렛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도 성령세례로 볼 수 있다.16)
사도행전 10:38을 배경으로 하여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던 때에 그는 기도하셨고, 그가 기도하고 계시던 때 성령이 그 위에 가시적으로 임하였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하였다(눅 3:21,22).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물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시던 때에 성령을 하나님이 확정적으로 부어주셨다는 점이다.17) 이로써 예수는 메시야요 교회의 머리로서 기름부음 곧 성령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 받은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눅 4:1).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 받은 후 예수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지속적으로 40일 동안 받으셨다.18) 예수는 40일간의 시험을 마친 후 성령의 권능 가운데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눅 4:14). 이는 그가 여러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치실 뿐 아니라(눅 4:15,16)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눅 4:33-36) 여러 종류의 병든 자들을 고쳐주심으로(눅 4:38-40) 하나님의 은혜의 새 시대를 열고(눅 4:18-21)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었다(눅 9:2, 참고, 마 4:17, 막 1:14,15). 사도행전 10:38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으신 것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경우도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상태적 충만 그리고 역동적 충만의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바울 서신의 용례
모세와 예수님의 경우에서 나타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염두에 두고, 바울서신들을 살펴보자.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바울의 대표적인 구절은 고린도전서 12:13이다. 이 구절은 분쟁과 분파가 심한 고린도교회에게(고전 1:11, 11:18-19, 12:25)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있으나 한 성령으로 한번에 확정적으로 세례를 받아19)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말한다.20) 그런데, 이 구절의 앞 뒤 문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령세례 받은 후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일을 예표적으로 언급하고(고전 10:1-4), 성찬예식을 통해 교회의 한 몸 됨을 강조하였으며(고전 10:16-17, 11:17-34), 또한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소개하고(고전 12:4-11), 여러 지체들이 한 몸으로써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교회가 성장하도록 교회 가운데 직분자들을 세운 것을 말하였다(고전 12:25-30). 이로 보건대, 교회를 그리스도의 한 몸 되게 한 것은 성령의 세례요,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성장케 하기 위해 은사와 직분을 주는 것은 성령의 충만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령의 은사는 직임 및 성령의 나타남과 역사(working)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점이다(고전 12:4-7).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는 교회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보편적으로 받지만, 성령의 은사는 직임과 직분과 관련해서 선별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한편, 성령을 마시는 일은 온 교회가 보편적으로 다 함께 참여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직분과 연결 지어 언급하고(롬 12:4,6) 이 은사들을 통해 섬기고 가르치며 다스리고 긍휼을 베풀어 교회가 하나되고 성장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롬 12:7-8).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덕을 세움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를 힘써 이루라고 권하였다(롬 14:17-19).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한 몸 된(롬 12:5) 것을 성령의 은사와 관련지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교회론적인 성령세례와 상태적인 성령충만을 염두에 두고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성령의 역동적 충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교회론이 잘 정립되어 있는 에베소서에도 보면 이러한 용법상의 구별이 확실하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새 사람이 되고(엡 2:13-15),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어(엡 2:18-19),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터로 삼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0-22). 그런데, 이 교회는 한 성령의 한 세례로 세워졌고(엡 4:3-5),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성장케 하기 위해서(엡 4:12-13,6) 직분을 주셨으며(엡 4:11),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엡 5:18).
4. 사도행전의 용례
이제 바울 서신들의 역사적 배경이 된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성령세례와 충만의 용례를 살펴보자.
1) 성령세례에 대한 용례
사도행전 1:5,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대로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여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행 2:1-4). 이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부어 주신 사건으로(행 2:33) 이로써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며 예배 드리기를 힘썼고(행 2:42) 날마다 교회가 부흥하였다(행 2:47). 그리고 성령의 강한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이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행 6:7).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서 많은 제자들이 유대지방과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행 8:1) 그 중에 전도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땅으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다(행 8:4-6). 그들 가운데서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유됨으로 그 성이 큰 기쁨으로 넘쳤다(행 8:7-8). 이로 보건대,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으며 예수의 이름의 권세도 목격하고 체험한 것이다.21)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기도하자 성령을 받았다(행 8:14-17). 이후로 사마리아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부흥한 것으로 보아(행 9:31) 사마리아교회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세워진 것이다.
이달랴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도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이 성령 부어주심을 받았다(행 10:44). 이 성령 사건은 사도행전 11:16의 베드로의 보고하는 말에 비추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고넬료 가정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이방인들의 가정 교회로 탄생된 것이다.
안디옥교회의 경우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인들에게 예수를 전하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왔으며, 이에 예루살렘교회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보내어 그들을 섬기게 하매 큰 무리가 주님께로 돌아왔다. 이로써 안디옥교회가 탄생하였다(행 11:20-24).22) 안디옥교회의 경우도 “주의 손이 함께 한 것”(행 11:21)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바나바가 소개된 사실(행 11:24)로 미루어 보아 그들 가운데도 성령의 세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에서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고(행 13:2) 성령이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하였다(행 13:4).
끝으로 에베소교회의 경우를 보면, 아볼로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어떤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였다(행 19:6). 이 경우도 바울이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 “내 뒤에 오시는 이”로 예수를 소개한 것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성령세례 사건임에 틀림없다(행 19:4,5).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세례는 성령충만과 구별되어 한결같이 교회의 설립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고린도전서 12:13에서 하나의 교리로 표현된 것이다.
2) 성령충만에 대한 용례
그러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어떻게 다르며, 그 성격이 어떤 것인가?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였다. 앞서 1:5에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한 말씀과 비교가 된다. 이 두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사도행전 2:1-4를 보자.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먼저 온 집에 가득하였다(2절). 여기서 “가득하다”는 헬라어로 ἐπληρωσεν인 바, 이 동사는 πληροω의 부정과거로서, 바람의 소리 같은 성령이 120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번에 결정적으로 충만하게 임하심으로 성령충만의 상태가 시작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3절). “임하다”는 헬라어로 ἐκαθισεν인 바, 이 동사도 καθιξω의 부정과거이다. 이는 120명 제자 각각이 성령으로 세례를 한 번에 받아 교회를 구성하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저희가 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4절). 여기서 “충만함을 받다”는 헬라어로 ἐπλησθησαν인 바 이 동사는 πιμπλημι의 부정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권능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하기 시작했고(행 2:4 하, 11), 그 중에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과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과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하였다(행 2:14-36). 이상에서 본 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구별되고, πληροω로 표현되는 상태적 충만과 πιμπλημι로 표현되는 역동적 충만이 있다.23)
가) 역동적 성령충만의 용례
πιμπλημι로 표현되는 성령 충만의 용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천사가 사가랴에게 들려 준 말 가운데 “저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리라”(눅1:15)에서 πλησθησεται(미래, 수동태)가 쓰였고,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 때(눅 1:41)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예언하던 때(눅 1:67)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에 대해서는 ἐπλησθη(부정과거, 수동태)가 각각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오순절날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행2:4) 과,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의 문중과 관원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때 성령으로 충만한 것(행 4:8), 베드로가 관원들에게서 풀려난 후 동료제자들에게로 돌아와 몇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열심히 합심하여 기도하던 때 그곳에 모인 자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한 경우(행 4:31),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고 나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던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경우(행 9:17) 그리고 바울이 선교사로 파송 받아 첫 번째 선교 여행하던 중 바울이 거짓선지자 바예수와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서 그들을 책망하던 때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던 경우(행 13:9) ἐπλησθησαν(부정과거, 수동태; 2:4, 4:31), πλησθεις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 4:8, 13:9), 또는 πλησθῃς(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행 9:17)등이 사용되었다. 이들의 경우 문맥을 보면 1:8의 말씀대로 공통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권세와 능력을 얻어 그리스도와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였다(참고, 2:4 하반절에서는 방언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함; 4:8 이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증거함; 4:31 하반절에서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13:10 이하에서는 권세있게 책망하여 총독을 회개시킴). 그러므로, πιμπλημι로 표현되는 성령충만은 역동적 충만 또는 능력충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역동적 충만은 그리스도와 복음 증거하는 일과 관련하여 수시로 반복된다.24)
나) 상태적 성령충만의 용례
πληροω로 표현되는 성령충만의 용례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대로,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때(눅 4:1)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의 온 집이 성령으로 충만하였는 바(행 2:2) 전자는 πληροω에서 파생된 형용사 πληρης가,25) 후자는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인 ἐπληρωσεν이 각각 사용되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성령과 지혜로 충만했고(행 6:3) 그 중에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였을 뿐만 아니라(행 6:5)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였으며(행 6:8), 순교하던 때에도 성령으로 충만했다(행 7:55). 이들의 경우 모두 πληρης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바나바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경우도 πληρης가 사용되었다(행 11:24).
한편,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은 제자들의 경우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는 바, 여기서는 미완료과거 수동태인 ἐπληρουντο가 사용되었다(행 13:52). 이는 곧 그들이 받은 기쁨과 성령이 지속적으로 충만하였음을 뜻한다. 그리고, 상태적 성령충만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인 에베소서 5:18에서는 현재 수동태 명령법인 πληρουσθε가 쓰여있는 바, 이것도 상태적 충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II. 성령세례에 대한 교회론적 이해
1. 성령세례의 교회론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고 말씀하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면서 흘린 피로 교회를 사셨고(행 20:28)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세례를 주심으로 교회를 역사적으로 세우셨다.
성령세례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오순절 날에 세우신 일에 관하여 신학자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에 의하면, 성령의 하시는 일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이루셨다.26)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좀더 확실하게 말하기를,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는 “교회”(ἐκκλησια)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아니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24회나 사용한 사실에 주목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조직된 교회로 탄생했다고 결론지었다.27) 차영배도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엡 2:20) 오순절 성령세례를 통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의 초석을 놓았다고 하였다.28)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의 말을 들어보면 더욱 확실하다.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임하셨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가 한 성령으로 한 세례를 받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29) 구약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로 통일된 몸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30)
죠지 래드(George E. Ladd)는 반복해서 경험하는 성령충만과는 달리 “성령세례는 다양한 인종적 차이점들과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영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이루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다”31)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로 탄생되었으며, 따라서 구약의 제자들은 단지 맹아적인 교회 즉 미조직 교회인 것이다. 래드가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공동체적이며 교회론적인 사건이다.32)
래드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한수도 고전 12:13에 근거하여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의 신학적 의미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통일된 그리스도의 한 몸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하였다.33) 박형용의 견해도 이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 일어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설립되고, 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및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고 그는 말한다.34) 서철원도 성령강림 곧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 가운데 내주하여 그들과 함께 거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이방인들도 성령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35)
2. 성령세례의 성격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게 주신 세례는 구원 역사적 즉 구속사적 사건인가, 아니면 구원의 서정의 한 요소인가? 그리고 성령세례는 단회적인가, 아니면 영속적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는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면, 구속사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는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단회적인 성령강림이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성령의 사역이다. 즉,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과 관련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이다.36)
서철원은 성령세례의 구속사적 성격을 아주 분명하게 강조한다. 성령세례 곧 성령강림37)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귀결이고 완성이며38) 연장이다.39)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보내신 것이다.40) 즉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전에는 성령강림이 없었고, 불가능하였다.41) 그리고, 성령강림은 승천하신 예수의 자리에 대신 오신 것이기에 예수의 오심이요,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기 위한(요 14:16) 오심이기 때문에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다.42)
서철원의 견해와 일치하여 박형용도 주장하기를, 사도행전 1:5에 근거하여 볼 때 오순절 성령사건은 구속사적인 성령세례 사건이라 하였다. 오순절 사건은 성도 개인의 구원 체험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다.43) 다시 말해서, 그에 의하면,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성취한 구속 사건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이다.44)
그런데, 박형용은 고린도전서 12:13에 비추어 성령세례를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 곧 구원서정의 한 요소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적 차원에서의 성령세례는 중생의 경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개인 성도에게 최초로 적용시키는 일이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요, 성령이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어 예수를 구주로 고백케 하시며 의롭다 함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령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45) 서철원도 이에 동의하여 이방인들의 경우 성령세례는 성령 받음이요 성령 받음이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성령세례=성령 받음=중생이다.46) 그리고 믿음과 성령받음이 불가분한 관계이므로, 믿음이 중생이고 성령받음이다. 즉, 그에 의하면, 성령이 임하자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이다.47) 권성수와 이승구 등도 성령세례를 중생으로 이해한다.48) 그러나, 박형룡의 경우는 중생을 회개와 신앙과 구별하여, 중생의 증거 곧 결과가 회개와 신앙이다.49)
성령세례를 구원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단회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경우, 성령세례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말하면서,50) 이 성령세례가 단회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120명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져 교회가 세워짐과 더불어 사도직이 소멸된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에게 주어진 은사들(방언, 예언, 지식, 신유 등)이 사도직의 소멸과 함께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51) 특히, 방언과 관련해서는 오순절파의 은사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방언이 일시적으로 많이 나타났으나 교회성장운동이 일어나면서 방언현상도 전세계적으로 크게 퇴조하여 거의 사라졌다고 말한다.52)
성령세례가 구속사적 차원에서 단회적임을 강조하는 견해에 반대하여 차영배는 성령세례를 구원의 서정 차원에서 영속적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구속사적 대사건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을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성령이 적용하시는 차원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구원의 서정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오순절 날 강림하시어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그는 동질의 교회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오셔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53) 그래서, 그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듯이, 예루살렘교회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교회와 이방인들의 교회들도 동일하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차영배는 성령세례를 구원론적 차원에서는 은혜의 상태인 칭의와 영화의 상태인 성화를 연결하는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연합으로 이해하였다.54)
한편, 능력적 은사들 곧 이적의 중지론을 주장하는 견해에 반대하여, 차영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으나 그 계시는 운동력이 있고 지금도 역사하기 때문에 이적은 여전히 계속되며, 이로써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새롭게 하고 견고케 한다고 주장한다.55) 차영배의 의견과 같은 의미로 권성수도 능력적 은사들과 방언의 은사의 계속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56)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세례의 성격을 놓고 단회성과 영속성을 주장하는 두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전자는 성령세례를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는가 하면 기적과 능력적 은사들의 종결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후자는 구원의 서정으로 보면서 넓은 의미의 중생(성화)으로 보는가 하면 기적과 능력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상반된 견해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교회 설립의 경우만 성령세례를 인정하고 이후의 교회들의 경우는 단순한 성령받음이요 교회의 확산으로 이해하였다.57) 이로써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에 근거하여 밝힌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이 여럿이요, 나무의 줄기는 하나이나 가지들은 여럿인 것과도 같다.5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지역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의 교회가 여러 지역 교회로 확산된 것도 아니며, 각 지역 교회마다 거룩한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독립된 영광스런 교회이다.59) 또한,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요 학교로써 성령의 외적 은혜의 수단이다.60)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이면서도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럿인 점을 고려하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베푼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면서도 다중적이요,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영속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성령의 은혜의 외적 수단인 점을 고려하면, 그 교회를 세우는 성령세례는 외관상 구속사적 사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을 교회를 통해서 성도에게 적용하는 구원의 서정 또는 구원의 상태와 관계된 성령의 사역이다.
3.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요(행 2:38),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선물(눅 24:49, 행 11:17, 참조, 눅 11:13)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로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적인 노력에 의하여 성령을 받으려 하는 시도는 모두 정죄되어 마땅하다(행 8:17-23). 다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61) 예루살렘교회에서 3000명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고(행 2:37-42), 사마리아교회도(행 8:6,12), 고넬료와 그의 가족도(참고, 행 10:43-44), 에베소교회도(행 19:4-6)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성령세례를 받는 다른 방법이 없다.62) 그래서 죠지 래드는 말하기를, 오순절에 임한 성령세례의 선물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했다.63)
이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성령의 은혜의 내적 방편이며, 이 믿음과 회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외형적 방편 곧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부지런히 힘써 사용해야 구원의 은혜를 효과적으로 누릴 수 있다.64)
성경에서도 보면,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연단되고(벧전 1:7),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고 더욱 힘써 절제와 인내와 사랑을 공급해야(벧후 1:5-10) 믿음이 견고해지며, 믿음을 위해서는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히 12:4).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였고(딤전 6:12), 그 자신은 선한 싸움을 통해 믿음을 지켜냈다(딤후 4:7).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입술로 죄를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회개는(고후 7:10,11) 칼빈의 설명에 의하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살고자 하는 간절함(earnestness)과 자신의 허물에 대한 분개(indignation)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fear)과 열심을 품고서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longing)과 열정(zeal)이다.65)
이 같은 견고한 믿음과 간절하고 뜨거운 회개가 있어야 성령세례가 효과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회개를 위해서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이는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성례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요, 기도는 믿음의 가장 으뜸가는 연습(exercis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가르치기를, “죄인들을 깨우치고 정죄하며 겸손케 하는 유효한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의 심령을 굳세게 하여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면, 성경을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심을 가지고 읽고, “열심을 가지고 준비된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로 주의하며 들으라”하였다.66) 성례와 관련해서는, 세례를 받을 때 거룩하고 의롭게 삶을 사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자들로서 형제 사랑을 행하는 일을 힘써야 할 것과 그리스도를 열망하고 있고 새롭게 순종하고 있는가를 살피라 하였다.67) 그리고 기도와 관련해서는, 믿음과 신실성과 열정과 사랑과 인내로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복함으로 하라 하였다.68) 그리고, 칼빈은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금식의 훈련을 적극적으로 권하였다.69) 박형룡은 E. M. 바운즈의 말을 빌려, “성도를 만드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고 하는가 하며, 성령의 힘은 기도에서 나온다 하였고, 기도하는 시간의 양에 성령의 힘이 비례한다고 하였다.70)
이로 보건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주권적 은혜를 게으르게 기다려서는 안되고, 열심히 믿고 회개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형제 사랑을 힘써 하는 가운데 성례에 참여하고, 열정과 인내로 기도에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또한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므로(참고, 빌 2:13), 성령세례도 열심이 있어야 받는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들이 다 그렇게 열심을 내어 성령세례를 받았었다. 이 거룩하고 신령한 열심과 열정과 노력은 인간적인 노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서 토레이가 사도행전 2:38에 주로 근거하여 제시한 바 성령세례 받는 방법은71) 인간적인 노력이 결코 아니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문답의 가르침과 상통한 바 있다.
III. 성령충만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오순절 날에 교회 위에 그리스도가 부어주신 성령사건은 교회론적 사건일 뿐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은 교회론적으로 보면 교회 설립을 위한 단회적인 그러면서도 다중적인 성령 세례 사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자신을 모퉁이 돌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던 것이다(엡 2:20).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흘린 자기의 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시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여 이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도록 하고자(엡 2:13-18)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고전 12:13). 이렇듯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그리스도가 베푼 성령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몸이 됨으로 교회가 설립 된 점에서, 성령세례는 교회론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때가 차면 먼저 메시아를 보내시고 뒤이어 성령을 부어 주려함이 있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을 보면, 하나님이 의의 교사를 먼저 보내고(욜 2:23) 그 후에 즉 마지막 날에 성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시는데(욜 2:28) 이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는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욜 2:31-32).
하나님의 때가 차매(갈 4:4)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고통의 멍에를 꺾고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이 땅에 오셨고,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을 덧입어 사단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실상 이루셨다. 그는 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사단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셨다. 이제 그는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대행자(agent)로 세웠다.72)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심으로 이 땅에 임하게 하신 것처럼,73)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에게 성령으로 권능을 주심으로 확장되게 하시는 것이다.
1. 성령충만의 종말론적 의미와 성격
사도 베드로가 성령충만한 가운데 요엘과 다윗을 인용하여 행한 설교(행 2:14-16)를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말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가 큰 이적과 표적을 행하게 하여 예수 자신을 증거하셨고, 다윗의 예언대로 예수가 사망을 이김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도록 그리스도가 성령을 교회 위에 부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복음증거와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하여 교회 위에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입혀 준 종말론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바. 이것이 소위 성령의 역동적 충만이다. 예컨대,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일(ἐπλησθησαν, 행 2:4),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문과 관원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때 성령이 충만한 일
(πλησθεις,행 4:8),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간절하게 합심기도한 후 성령 충만한 일
(ἐπλησθησαν, 행 4:31),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회심하고서 성령의 충만하게 된 일(πλησθῃς, 행 9:17), 그리고 1차 선교여행 중 바울이 성령충만한 일(πλησθεις, 행 13:9) 등이 역동적 성령충만의 경우들이다.
이 역동적 충만은 관련된 헬라어 동사들이 모두 부정과거(aorist) 수동태이다. 이는 곧 역동적 충만이 순간적, 확정적, 외형적, 주권적 성격의 것임을 의미한다. 이 충만은 사도행전 1:8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능력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며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일을 위해 베풀어졌다.74) 사도행전 2:4의 경우, 예수의 제자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증거하였고, 베드로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요엘과 다윗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였다. 이로써, 사람들이 크게 놀랐는가 하면(행 2:12),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 3,000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왔다(행 2:41).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제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며 천국을 누렸다(행 2:42).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행 2:43). 이로써, 교회가 부흥하여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하여졌다(행 2:47).
사도행전 4:8과 4:31의 경우도,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 얻는다고 증거하고 기도하자 제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행 4:31 하), 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고 풍성한 교제를 나누었다(행 4:32-35).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임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경우도 보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권능을 받아 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전파하되(행 9:20)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의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행 9:22). 또한, 바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권세가 있음으로 거짓 선지자 바예수와 구브로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 그 앞에서 굴복하고 말았다(행 13:11,12).
이렇듯, 이 역동적 성령충만은 교회로 하여금 능력있는 복음선포를 가능케 하였고 이로써 교회가 부흥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다(행 3:1-8, 4:22,30, 13:11, 14:3). 그런데, 이 역동적 충만은 성격상 순간적 외형적이었기 때문에 때마다 경우마다 반복적으로 주어졌다.
2. 역동적 성령 충만의 증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면 내적, 외적, 그리고 은사적인 증거들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1) 내적 증거75)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느낌이 있다. 모세가 기도하기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한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느낀다. 다윗이 그러했고(시 26:8, 27:4, 63:2) 이사야도 그러했다(사 6:1-3). 바울은 회심하던 때 하늘로서 비추는 강한 빛을 느꼈고(행 9:3),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그가 변화산에서 보았던 예수의 큰 위엄과 영광에 대한 경험으로 크게 감동되어 있었다(벧후 1:16,17).
둘째로, 큰 기쁨과 구원의 확신이 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된다(벧전 1:8). 오순절에 성령충만 받은 자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교제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행 2:46-47). 그리고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고(롬 5:5, 행 8:8) 복음으로 큰 확신을 갖게 된다(살전 1:2-6).
셋째로, 계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하자 눈이 밝아지는 체험을 했고(행 9:18), 계시의 성령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큰 능력을 알게 되었다(엡 1:17-19).
2) 외적 증거76)
첫째로, 얼굴이 영광스런 빛으로 빛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처럼(출 34:29-35)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얼굴에 영광스런 변화가 생겨난다(참고, 고후 3:18).
둘째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할 때 말에 능력과 권세가 있다. 겁쟁이였던 베드로가 성령충만 받은 후에는 복음을 전할 때 말에 큰 확신과 권세가 있었고,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났었다(행 2:14,29,37, 4:13,29-31,33).
셋째로, 말에 권세가 있을 뿐 아니라, 마음과 태도에 있어서 담력과 담대함이 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하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소리를 높여(행 2:14) 담대하게(행 2:39) 기탄 없이(행 4:13)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했다(행 4:19).
3) 은사적 증거77)
성령이 역동적으로 충만하게 임하면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은사들이 주어진다. 이로써 복음의 진리를 큰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하며(행 2:4,14) 또한 기사와 표적들을 행할 수 있게도 한다(행 2:43). 그리하여 교회가 튼튼하게 서가고(행 2:47)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진다(행 6:7).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가 세운 직분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기 때문에(골 2:19), 성령의 은사들이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주어질 수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주로 직분자들에게 주어진다(참고, 엡 4:11-13).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인 직분자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섬겨 그리스도의 몸을 튼튼하게 세우며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가 세운 직분들을 힘있게 하는 권능의 수단이요 도구인 것이다.78)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는 능력적인 성격의 것으로 방언, 병고침, 능력 행함 등이 있고, 도덕적인 것들로는 섬기는 일, 구제,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이 있으며, 기능적인 것들로는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지혜의 말씀 등이 있다(롬 12:6-8, 고전 12:28-31). 이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고 자라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뜻대로 즉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고 그 교회가 부흥하며 또 교회의 직분이 필요하는 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중지함이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3:8-12).79)
3. 역동적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시고, 또 은사를 나누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대로 받을 뿐이다(고전 12: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세례의 경우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고전 12:3) 믿으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해야 한다(고전 12:31, 14:1,12). 또한 특별히 은사를 갈망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80)
성령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지만(요 14:16)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받아야 한다.81)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방법은 기도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혜사 성령으로 중생하고 성령이 내주하여도 기도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여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큰 기도가 큰 전도를 가능케 하고,82) 교회를 튼튼하게 자라게 한다.
4. 역동적 성령충만의 목적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행 1:8)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은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이 사도행전에 보면 담대하고 권세있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행 2:4, 4:8-12, 4:31, 9:20, 13:10-11).
둘째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되게 하기 위함이다. 복음이 힘있게 증거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면, 그 결과로 교회가 부흥한다. 베드로의 증거로 3,000명(행 2:41), 5,000명(행 4:4)씩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는가 하며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행 6:7). 그리고 점점 왕성하였다(행 6:7). 나중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교회들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행 9:31). 이로써, 성령의 은사를 통해 교회가 서로 덕을 세우고 도와 사랑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다(엡 4:16).
셋째로, 천국의 확장을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 건설이었다(마 4:17).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라 하였고(마 6:33), 최고의 축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했으며(마 6:3,10), 자기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확장하도록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주신 것이다(참고, 행 28:31).
IV. 성령충만에 대한 구원론적 이해
성령세례와 충만은 교회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성령의 사역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성령세례로 교회를 세우셨고, 성령의 능력의 충만으로 은사를 주어 교회를 든든하게 하고 자라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대행자 노릇하게 하셨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을 통해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성령세례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구속사적 사건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건들인 그의 탄생, 순종의 삶,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은 구원을 성취하는 사건들이지만, 성령세례는 구원 성취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령세례는 은혜의 수단인 교회 설립의 사건이기에 구원의 적용 즉, 구원을 누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동적 성령충만의 경우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자라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기에 구속사적인 사건이 아니고 교회론적 사건이다. 또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성령의 사역이기에 종말론적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교회론적 측면에서 접근하되 구원의 적용 또는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삶의 측면에서 구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 성령충만의 구원론적 의미와 성격
“충만”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있는 구약의 성전(출 40:34,35)과,83) 은혜와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요 1:14, 골 2:9)와 관련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사서(행 20:28) 성령의 전으로 삼은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충만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참고, 요 1:16).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인 것이다(엡 1:23). 그러므로, 이 충만은 성격상 상태적이요 지속적이다.
이 상태적 성령충만은 마음에 구원의 기쁨이 넘쳐 부르는 하나님 찬미이고(행 2:47), 은혜 충만(행 6:8) 믿음 충만(행 11:24) 기쁨 충만이다(행 13:52).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환난 중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행 7:55, 롬 5:2,3). 베드로는 믿음의 시련 중에서도 영광 중에 있는 예수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넘친다고 했다(벧전 1:8).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 3:18)는 말씀을 연상케 한다.
이 성령의 상태적 충만은 순간적 단회적으로 베풀어지는 역동적 충만과는 다르게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으며(엡 5:18) 은혜, 말씀, 기쁨, 권능, 그리고 믿음이 충만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뿐 아니라 잃은 영혼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것을 가리킨다.84) 다시 말해서, 이 성령의 상태적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주의 영광을 보며 믿음과 은혜와 기쁨이 있어 하나님을 찬미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다.85) 그러므로, 이 성령의 충만은 어느 한 시점에서만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누려야 한다. 따라서, 성령을 좇아 살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하는 것이다(갈 5:16, 22-25).
2. 상태적 성령충만의 증거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아 성령으로 충만함을 누리게 되면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나타난다.
첫째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쓰고 즐거워한다. 예배가 뜨거워진다. 예루살렘교회가 성령충만하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예배를 힘써 드렸다(행 2:42). 기도가 힘있고 찬송이 뜨거웠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기도하고 크게 찬송했다(행 16:25). 에베소서 5:18 이하를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시와 찬미의 예배이다(엡 5:19-20).
둘째로, 사랑과 순종의 관계이다. 에베소서 5:21-6:9의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간에 피차 복종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회복된다.
셋째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사회적 참여가 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교제한다(행 2:44-45, 4:34-35).
넷째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갈라디아서 5:16-20에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을 좇아 행하고 육체의 정욕과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자기를 부인하게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 성령의 열매는 성격상 윤리적 도덕적 인격적인 것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이다. 이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힐 때 성령의 은사가 더욱 빛을 발하고 효과적이 되며(참고, 고전 13:1) 하나님의 성전된 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하며 더욱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참고, 갈 5:21, 벧후 1:5-11).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롬 14:17)를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이 성령충만의 증거이다.
3. 상태적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세례와 성령의 역동적 충만의 경우처럼, 성령의 상태적 충만의 경우도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회개함으로 받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은혜의 외적 수단인 하나님 말씀, 기도, 성례를 힘써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고려해 보면, 특별히 사랑, 오래 참음, 온유, 절제 등은 육체의 현저한 소욕인 자기 사랑과 분냄, 시기, 투기, 방탕함 등을 십자가에 못박아 쳐 복종시켜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을 사모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고, 믿음의 훈련인 기도를 우선 열심히 하고, 마귀를 대적하여 죄와 육신의 정욕과 더불어 싸워야 하며(히 12:4), 기도를 할 때에도 자기를 죽이는 기도를 해야 한다.86)
4. 상태적 성령충만의 목적
첫째로, 성령의 열매 중 원천적 열매인 사랑으로 교회가 넘쳐 성도의 교제가 풍성케 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이기에 사랑의 교제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 사랑의 풍성한 교제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마귀를 대적하여 항상 승리함으로(엡 6:11-17)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를 즐길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사는데 성령 충만의 목적이 있다. 이는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도 하나님의 나라요(마 6:33), 우리가 이 세상과 내세에서 받아 누려야 할 복도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마 5:3,10). 이 나라는 성령으로 거듭나고(요 3: 3,5) 성령으로 충만해야 (롬 14:17, 참조, 갈 5:21) 누릴 수가 있다.
결론
신학의 과제(task)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거소 곧 성령의 전이요 하나님 나라의 대행자인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다.87) 신학은 성경을 형식적 원리로 삼아 교회의 믿음의 도리를 체계화해야 한다. 즉, 성경을 표준이자 규범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88) 신학은 신앙을 섬기는 종이어야 한다.89) 그리고 신학은 영적 체험을 성경의 규범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되지만 영적 체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특히 신학을 미숙한 영적 체험의 수준으로 제한하거나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90)
이상의 신학적 과제를 염두에 두고 성령세례와 충만을 성경적 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 세례와 충만은 한 성령의 사역의 다양한 측면이다. 그래서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양자됨과 성화가 한 성령의 사역으로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자기의 몸된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대행자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권능과 은사를 주어 자기의 교회를 든든하게 자라게 하셨고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였으며, 또한 이와 더불어 그 교회가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에 의해 지속적으로 지배와 인도를 받고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였다.91)
이로 보건대, 오순절 성령강림과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등에 나오는 성령충만은 교회 설립 측면에서 보면 성령세례요, 교회의 부흥과 성장 측면에서 보면 성령의 역동적 충만이며, 교회의 성령의 교제 측면에서 보면 성령의 상태적 충만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성령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연합)바 되고 성령 안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화목하고 통일을 이루어 한 몸 됨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가 세워졌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서 임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역동적 충만을 통해서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교회에게 주어 교회가 성장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가 넓혀졌다. 또한, 성령의 상태적 충만을 통해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를 교회 안에서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되었다. 이 점에서, 성령세례와 충만을 교회론적으로 이해하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서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구원의 적용 측면에서는 교회가 성령의 은혜의 외적 수단이므로 또한 구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1) 찰스 파함(Charles Parham)이 세운 미국 켄사스의 벧엘성경학교(Bethel Bible School)에 1901년 1월 1일 송구영신 철야예배 중 한 여학생이 안수기도 받고 방언을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순절 신학이 수립되고, 파함에게 배운 감리교회 목사 씨모어(William Seymour)가 LA의 아주사가(Azusa Street)에 있는 성결교회(Holiness Church)에서 1906년 4월 기도회 인도 중 방언을 하면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파함이 오순절 신학의 선생이라고 하면 씨모어는 오순절 운동의 전파자였다(참고, 서철원, 「성령신학」(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5), pp. 22-23). 그리고 1914년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가 최초로 오순절파 교단으로 세워졌다.
2) 1952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국제순복음실업인협회(Full-Gospel Businessmen's Fellow-
2) 1952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국제순복음실업인협회(Full-Gospel Businessmen's Fellow-
ship International)에서 오순절 운동이 은사운동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캘리포니아의 데니스 베네트(Dennis Bennett)가 오순절 성령세례 경험과 방언을 전파함으로 신오순절 운동이 확산되었다(참고, 서철원, 「성령신학」, p. 30). 한국에서는 1907년 이후의 대부흥 운동과 1970년 이후 순복음교회의 급성장으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다.
3)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교수였던 차영배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연속성”(「신학지남」1985년 가을),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A. Kuyper의 견해와 그 문제점”(「개혁신앙」 II집, 1977년), “요한의 세례와 중생 및 성령의 세례‘(「신학지남」1980년 봄) 등을 발표하면서 신학자들 간에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참고, 최갑종, 「예수, 교회, 성령」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 12, 각주 1).
4) 참조, 최갑종, 「예수, 교회, 성령」, p. 11; 이한수, 「신약의 성령론」(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4), pp. 3-4.
5) 권성수, 「종말과 영성」(서울: 횃불, 1995), pp. 221-225.
6) 상게서, p. 107; 서철원은 오순절 운동의 신학을 유대교적 율법주의요, 성경 대신 신자의 경험을 표준으로 삼는 경험중심 신학으로 비판한다(서철원, 「성령신학」, pp. 43,59,60).
7) R. A. 토레이, 「성령론」 심재원 역, 6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6), p. 128.
8) 최갑종, 「예수, 교회, 성령」, pp. 30-31.
9) 서철원, 「성령신학」, pp. 113, 115.
10) 찰스 허멜, 「성령충만」(서울: IVP, 1989), pp. 11-12.
11) 안드레아스 쾌스텐베르거, “성경적 고찰을 통해 본 성령충만의 의미,” 「목회와 신학」(1998년 7월); 161, 163, 165-167.
12) 권성수, 「종말과 영성」, p. 114.
13) 안영복, 「성령론」(서울: 성광문화사, 1993), p. 165, 175-176.
14)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정원태 역, 6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p. 31, 135-136; 대천덕, 「산골짜기에서 외치는 소리」 (서울: 한국양서, 1985), pp. 274-275; 차영배, 「성령론」 (서울: 경향문화사, 1989), pp. 63-64, 160, 181-182.
15) 김현진, 「공동체 신학」 (서울: 예영, 1998), pp. 236-242.
16) 예수는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참고, Pache,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p. 72).
17) “세례를 받으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βαπτισθεντος가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인 것은 하늘이 열리는 일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과 단회성을 가리키며, “기도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προσευχομενου가 현재 중간태 분사인 것은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셨음을 가리키고, “성령이 강림하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καταβηναι가 부정과거 부정사(aorist infinitive)인 것은 성령강림의 확정적임과 단회성을 가리킨다.
18) “성령충만”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πληρης는 형용사로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키고, “성령에게 이끌리다”를 의미하는 ἠϓετο는 미완료과거 수동태(imperfect passive)인 바 지속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19) “세례를 받아”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ἐβαπτισθημεν이 부정과거 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의 확정적 단회성을 가리킨다.
20) “마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ἐποτισθημεν은 부정과거 수동태인 바, 성령세례와 함께 외형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 앞서 10:3,4에서 신령한 양식을 먹는 일과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 일을 표현할 때 부정과거시제인 ἐϕαϒον과 ἐπιον이 사용되었다. 그러면서도,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마신다 할 때에는 미완료과거인 ἐπινον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누려야 할 것을 덧붙여 놓았다.
21)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의 말씀을 주목한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6:14을, 그리고 귀신이 나가고 앉은뱅이와 중풍병자가 치유된 것에 대해서는 행 3:16(참고, 마 17:20)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예수를 믿었음을 알 수 있다.
22) 행 11:26에 보면, 안디옥 “교회”라는 말이 있고, 그 교회 성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
23) 퍼거슨도 πληροω 계통의 단어는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의 상태를 묘사할 때 쓰이고, πιμπλημι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특별한 권능을 주는 성령의 충만 체험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싱클레어 퍼거슨, 「성령」 김재성 역, (서울: IVP, 1999), p. 102).
24) Fritz Rienecker, A Linguistic Key to the Greek New Testament, vol. I, tr. & revised by Cleon L. Rogers, Jr. (Grand Rapids: Zondervan, 1981), p. 265; 베드로는 행 4:8과 4:31에서, 그리고 바울은 9:17과 13:9에서 각각 때에 따라 성령충만을 받았다.
25) 요한복음 1:14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하여
25) 요한복음 1:14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하여
πληρης가 쓰였고, 1:16에서는 예수의 충만함을 가리켜 πληρωμα가 쓰였다.
26) 싱클레어 퍼거슨, 「성령」, pp. 219-223. 참조,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권성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23.
27) 밀라드 J. 에릭슨, 「교회론」 이은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 57. 에릭슨에 의하면, 구약의 성도들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28) 차영배, 「성령론」p. 10.
29) 로이드 존스, 「성령 하나님」이순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pp. 55-57.
30) 구약의 교회는 유대인들 중심으로 사실상 이방인들과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라 할 수 없다(참고, 로이드 존스, 「성령 하나님」pp. 58-59).
31) G. E. 래드, 「신약신학」 신성종, 이한수 역, 초판 19쇄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2000), p. 390.
32) 상게서, p. 390.
33) 이한수, 막스 터너, 「그리스도인과 성령」 1판 2쇄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2), p. 142; 이한수, 「신약의 성령론」 1판 2쇄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4), p. 54.
34) 박형용, “구속 역사적 입장에서 본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 「성경과 신학」제16권 (서울: 횃불, 1994), p. 156.
35) 서철원, 「성령신학」, pp. 67, 116, 136-138.
36) 퍼거슨, 「성령」, pp. 100, 104-105.
37) 서철원, 「성령신학」, p. 112; 서철원은 “성령강림=성령세례=성령받음”이라는 공식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 이후의 성령강림은 성령받음이다.
38) 상게서, p. 75.
39) 상게서, p. 77.
40) 상게서, p. 68.
41) 상게서, p. 69.
42) 상게서, pp. 74-75, 77, 83, 84; 참고,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조병수 역, 2판 3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2), p. 38.
43) 박형용, “구속 역사적 입장에서 본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 「성경과 신학」 제16권; pp. 143, 148; 참고, 개핀, 「성령은사론」, p. 25.
44) 상게서, pp. 152, 154; 참고, 스파이크만, 「개혁주의 신학」 류호준, 심재승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503.
45) 상게서, p. 143, 각주 5.
46) 서철원, 「성령신학」, p. 115.
47) 상게서, p. 116.
48) 권성수, 「종말과 영성」, p. 111; 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서울: 이레서원, 2001), p. 41.
49) 박형룡, 「교의신학」(구원론) 제5권, 4판 (서울: 은성문화사, 1975), p. 187.
50) 서철원, 「성령신학」, pp. 136-137, 140-143, 197.
51) 상게서, pp. 197, 219-221; 리차드 개핀, 「성령은사론」 p. 124.
52) 상게서, p. 210.
53) 차영배, 「성령론」, pp. 8-10, 16.
54) 상게서, p. 82.
55) 상게서, pp. 209-210.
56) 권성수, 「종말과 영성」, pp. 173, 194-205.
57) 서철원, 「성령신학」, pp. 83, 112-115; 죠지 래드는 예루살렘교회의 경험 이후에 언급된 성령세례의 경우 새로운 성도들과 교회들의 경험으로 이해하여 오순절 경험의 확산으로 이해하였다. 즉, 이방인들의 교회의 경우 오순절 경험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성령세례를 경험한 것이다(「신약신학」, p. 388).
58) 칼빈, 「기독교 강요」 IV. ii. 6.
59) 스파이크만, 「개혁주의 신학」, p. 522; 에릭슨, 「교회론」, p. 29; 존 머레이, 「조직신학」I, p. 236; 「조직신학」II, p. 339.
60) 칼빈, 「기독교 강요」 IV. i. 4.; 기독교 강요 4권의 제목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61) 서철원, 「성령신학」, p. 86.
62) 퍼거슨, 「성령」, pp. 105-106.
63) 래드, 「신약신학」, p. 388.
6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 제 85-88문답.
65) 칼빈, 「기독교 강요」 III. iii. 15.
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 제 155-157문답.
67) 상게서, 제 167, 171문답.
68) 상게서, 제 185 문답.
69) 칼빈, 「기독교 강요」 IV. xii. 15.
70) 박형룡, 「교의신학」(교회론) 제6권, 3판 (서울: 은성문화사, 1975), pp. 386-387.
71) 토레이가 말하는 일곱 가지 방법(또는, 단계)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게 회개하라 ② 죄를 배척하고 끊으라 ③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라 ④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라 ⑤ 성령세례를 갈망하라 ⑥ 하나님 아버지께 성령세례를 위하여 기도하라 ⑦ 성령세례를 믿고 기다리라. (「성령론」 pp. 182-242; 참고, 황승룡, 「개혁교회와 성령」 (서울: 성광문화사, 1985), pp. 67-68; 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3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p. 108-113).
72) 에릭슨, 「교회론」 p. 45.
73) 김세윤, “성경과 하나님 나라,” 정일웅 편, 「우리 시대의 하나님 나라」(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0), p. 25.
74) 쾌스텐베르거, “성경적 고찰을 통해 본 성령충만의 의미,” 「목회와 신학」(1987년 7월): 165.
75) 참고, 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pp. 114-117.
76) 참고, 안영복, 상게서, pp. 117-120; 권성수, 「종말과 영성」, pp. 85-86.
77) 참고, 권성수, 상게서, pp. 86-87; 안영복, 상게서, pp. 89-97.
78) 조용기, 「성령론」, 초판 6쇄 (서울: 서울말씀사, 2003), p. 139.
79) 박형룡, 「교의신학」(신론) 제2권, 5판 (서울: 은성문화사, 1974), pp. 488-492. 박형룡은 계시의 종결과 함께 이적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능력적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웨인 그루뎀은 은사 중지론을 반대한다. 그루뎀, 「조직신학」하, 노진준 역 (서울: 은성, 1997), pp. 292-313.
80) 권성수, 「종말과 영성」, p. 115; 참고, 조용기, 「성령론」, pp. 127-129.
81) 서철원, 「성령신학」, p. 186.
82) 상게서, p. 187.
83) 쾌스텐베르거, 상게서, p. 166.
84) 참고, 권성수, 「종말과 영성」, p. 81.
85) 참고, 서철원, 「성령신학」, pp. 80, 148-158; 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p. 23.
86) 서철원, 상게서, p. 188.
87) 박형룡, 「교의신학」(서론) 제1권, 5판 (서울: 백합출판사, 1973), p. 21.
88) 상게서, pp. 21, 23.
89) 스탠리 J. 그랜즈, 「하나님의 비전」장경철 역 (서울: CUP, 2000), p. 18.
90)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pp. 16-19.
91) 구원의 서정(order) 가운데서, 칭의와 양자됨과 성화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칭의)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양자됨)가 거룩한 삶(성화)의 원동력이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와 충만의 경우도, 성령세례로 지체된 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고 성령의 역동적 충만으로 은사와 권능을 받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원동력이 되어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