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神誌) 선인(仙人)
신지(神誌)는 고대에 문자를 주관하였던 벼슬(관직) 이름이다(이는 교육부 장관에 해당된다). 신지의 직을 수행했던 고대의 관리들은 모두 선인(仙人)이었으며, 특히 혁덕(赫德) 신지와 발리(發理) 신지가 유명하다.
1. 배달국의 신지(神誌), 혁덕(赫德) 선인
신지 혁덕(赫德)은 약 6천 년에 활동했던 한겨레 선인으로, 배달국을 세운 1대 환웅 천왕(BC3897~3803년 재위) 때의 인물이다. 그의 출생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놀라운 지혜와 뚜어난 영감으로 최초의 고대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태백일사(太白逸史)』「신시본기(神市本紀)」 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환웅천왕은 신지 혁덕(神誌 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는 명령(命令)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하는 임무를 전담하였는데, 모든 명(命)의 출납을 육성에 의존할 뿐, 문자로 기록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혁덕은 사냥을 나갔다가 암사슴을 보고 활을 쏘려 했는데, 잠깐 사이에 놓치고 말았다. 사방을 수색하던 중 사슴 발자국을 찾게 되자, 사슴이 도망간 곳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기록으로 남기는 법은 오직 이것뿐이다.’하고 크게 깨닫고는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문자를 만들었다. 이를 태고(太古)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그 문자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기엔)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여, 후세에 오면서 다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내용은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태시기(太始記)」에도 나온다. “환웅이 신지에게 글자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 하루는 신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 사슴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又使神誌氏作書契 … 一日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踪 …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旋復猛省曰 記在之法 惟始斯而已夫 如斯而已夫).”
또한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따르면, 신지 혁덕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천부경(天符經)』도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桓雄大聖尊 天降後 命神誌赫德 以鹿圖文記之).
녹도문은 후대로 오면서 각지로 널리 전파되었다. 중원에서 쓰인 한자(漢子)나 고대인도 글자의 기원 역시 약 5900년 전 신지(神智) 혁덕(赫德)이 창제한 녹도문이다. 녹도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초기의 투박하고 복잡한 사슴 발자국 모양(아래 ‘남해 낭하리 고각’ 참조)에서 용이 비상하는 듯한 위용(배달국 황자 태호복희씨의 龍書), 비가 내리는 듯한 점과 굴곡진 선의 묘사(치우 천황의 스승 자부선사의 雨書), 그리고 꽃처럼 화사한 자태(치우천황의 花書) 등이 자형(字形)에 가미되어 세련미를 더해 갔다.
그러다가 중원의 화하(華夏)족에게 전수되어 중국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문자가 창힐 문자이다(창힐도 동이족이며 배달국 14세 치우천황의 신하로, 한족漢族에게 동방의 녹도문을 전수한 인물이다). 또한 이는 인도지역으로도 전해져서 고대인도의 범어(梵語)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고조선의 신지(神誌), 발리(發理) 선인
또한 고조선의 6세 달문(達門, BC. 2083~2047 재위) 임금 때 신지의 직책을 맡았던 발리(發理) 선인이 있었다. 그는 약 400년 전의 인물로, 그의 출생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거의 선인의 반열에 올랐던 상고시대의 중신들처럼 그 역시 젊은 시절 선도를 수련하여 큰 깨달음과 지혜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대도를 얻었음은, 그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지 발리는 유명한 『신지비사(神誌祕詞)』를 지었다. 이는 한겨레 국통의 맥과 정신 그리고 삼한관경제라는 통치제도까지 망라한 제천문이자, 삼한으로 나눈 영토를 잘 다스리고 백성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하늘에 축원하는 기도문(祈禱文)이었다. 또한 깊은 사상을 담은 철학서이자 수도문이고 예언서, 도참서이며 계도문이기도 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흥법(興法)」에 따르면, 『신지비사』는 고구려 때까지 전해졌다. 『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김위제조(金謂磾條)’에 보면, 김위제는 나라의 도읍을 정할 때 갖추어야 할 지리적 특징을 『신지비사』의 내용에 따라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요, 저울추는 오덕을 갖춘 땅이며 극기는 백아강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에 힘입어 신기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又神誌秘詞曰 ‘如稱錘·極器·稱幹·扶疎·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저울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신지비사』를 도참서의 일종으로 이해한 것이다.
『고려사』의 김위제와 관련한 내용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성호사설(星湖僿說)』 ·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도 언급되어 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16장」의 주에는 “신지는 단군 때의 사람으로 신지선인이다(神誌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천지문(天地門)」의 ‘고려비기(高麗秘記)’에도, “『신지비사』는 누가 지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우리나라 조선의 문명지치(文明之治)를 거슬러 볼 수 있으니 실로 기이하다(神誌秘詞者 不知誰某之作而亦能逆覩我聖朝文明之治者 可異也).”고 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부권하(附卷下)」의 ‘지리고(地理考)’에도 “『고려사』 ‘김위제’전에 신지 선인의 『비사』를 인용하여, … 신지는 단군 때의 사람이다(麗史金謂磾傳 引神誌仙人秘詞 … 世傳神誌 檀君時人).”라고 하면서, 권람(權擥, 1416~1465)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出權擥應制詩註).
단재 신채호는 「신지비사」를 우리 민족 최초의 정사(正史)이며, 삼신산을 근거로 한 우리 민족 고유의 풍수지리서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조선 때 태종(이방원)은 ‘충주(忠州) 사고(史庫)’에 있던 사서들 중에 「신지비사」만 따로 봉하여 올리라'고 명하고는, 그중에 ‘70개국의 조공을 받았다’는 내용이 황탄(荒誕)하다면서 이 글을 불 지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한겨레의 고대 역사와 정신은 한 줌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신지(神誌)'라는 고대 관직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그 의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신지'가 환웅과 단군 시대에 글자를 담당한 관리라면, 한문 사용 이전인 고대 한국에 일정한 형태의 고유 글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글; 무 애 (한국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