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 한국의 역대 임금들2 - 고구려 장수왕, 조선의 영조, 효령대군
-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년); 향수 98세
고구려 장수왕의 재위기간은 79년(412~491년)이며, 휘는 거련(巨連), 시호는 장수왕(長壽王) 강왕(康王)이다. 광개토태왕의 태자로 98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붙었다.
장수왕의 재위기간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국력이 충실한 시기였다. 장수왕은 선대 광개토왕이 이룩한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대외적으론 적극 외교를 추진하고 대내적으론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북으로 부여성, 남으로는 남한강 유역, 서로는 랴오허[遼河], 동으로는 훈춘[琿春]에 이르는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어 왕조 교체가 빈번한 정세에서, 장수왕은 다각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즉위 시 동진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남조의 여러 왕조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435년엔 북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파견해 수교했다. 436년 북위의 압박을 받던 연(燕)의 풍홍의 피신을 돕고, 북위의 압송요구를 거절했으며, 466년엔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독자노선을 견지하되, 대체로 북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479년엔 강력한 국력을 배경으로 유연과 함께 대흥안령의 지두우를 분할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는 입장이었는데, 이를 이용해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 분쟁에 관여, 눌지마립간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 450년 신라가 고구려 장수를 실직에서 살해한 사건 이후 신라와의 관계는 적대적 방향으로 바뀌어, 468년 말갈의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를 공격하게 했다.
481년 경 세워진 <중원고구려비>는 당시까지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475년엔 왕이 직접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다. 당시 신라는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도착 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됐다. 결국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했고 국력은 위축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427년, 평양 천도이다. 평양 천도로 인해, 기존에 통구를 중심으로 잔존한 5부 세력의 기반이 약화되고, 국왕의 권한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장수왕은 귀족에 대해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 수도가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음에 따라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장수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년); 향수 83세
조선의 영조 임금은 52년(1724년~1776년) 재위했다. 영조는 83세까지 살아서, 조선 임금 중에 수명이 가장 길었다. 아버지는 숙종,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영조는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불안한 왕권과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해, 노론과 소론을 아울러 기용함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정쟁의 논란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회변화를 받아들여 남자노비가 양인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인정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확정지었다. 또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양역(良役)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실학(實學)의 진작 및 문화 창달에 노력하는 등 근대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그는 주색을 멀리했고, 하루 5번 밥상을 받던 역대 왕과 달리 3번만, 항상 규칙적으로 소식(小食)을 했다고 한다. 또 민중의 삶을 직접 느끼고자 쌀밥 대신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 그는 균형 잡힌 식단에도 신경을 썼다. 직접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는 탕평채는 묵과 육류, 각종 채소가 적절히 섞여 건강식으로 손색이 없다.
왕은 부지런하기도 했다. 신분을 감추고 시장이나 뱃머리에 나가 민심을 챙기는 일(미행)을 재위기간에 500회 이상 실시했다고 한다.
또한 영조는 일에 대한 열정이 컸고, 어느 임금보다 정력적으로 국사에 임했다. 영조가 재위 52년 동안 정책학문 토론회인 경연(經筵)과 주간에 신하들을 만나는 소대(召對), 야간에 신하를 만나는 야대(夜對)를 실시한 횟수는 모두 3500여 회였다. 연 평균 66회 이상으로, 역대 어느 군주보다 많았다.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년~1486년), 향수 89세
효령대군은 조선 전기의 왕자이다. 이름은 이보(李補)이며,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이다. 그는 양녕대군의 동생이며, 세종 임금의 형이다. 활쏘기에 능해 항상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의 중수와 흥천사 탑전의 수리, 원각법회 개최 등 많은 불사를 주관하는 등 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또 <반야바라밀다심경>, <원각경>, <금강경>, <법화경> 등 불경의 번역, 간행에도 힘썼다.
그는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다. 많은 정변에도 불구하고 성종 때까지 왕실 어른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글; 무 애 (한국 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