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님과 함께
이덕자 헬레나
1
마흔 즈음에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예순 살쯤 되면 공소가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들어가 살아도 좋겠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 가까이에 있는 공소에 가서 경당 문을 열고 조배하고, 마당 한쪽 새 소리 가득한 늙은 느티나무 아래 낡은 의자에 앉아 짧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다가 본당 신부님이 방문하시는 날엔 육사의 노래처럼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놓고 공소 신자들과 둘러앉아 오찬도 즐기리라.』
사회생활도 활발하게 하면서 성당에서도 여러 일을 맡고 있던 때였다. 힘든 일로 휘청거리거나 고통스러울 때면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기도로 위안을 청하던 기특한 신자였던 그 시절에 가끔 꿈꾸듯, 숨 고르기 하듯 그런 상상을 해 보곤 했다. 물론 실현 가능할 것이란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날 갑자기 그 생각의 씨앗이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더구나 예순도 아닌 마흔의 끝자락에 불쑥 현실이 되었다.
함께 사시던 시부모님이 갑자기 한 해에 다 돌아가시고, 두 딸이 연이어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떠나자 복작거리던 집안이 몇 년 사이에 텅 비어버렸다.
어느 봄날 친구 따라 처음 가본 산골 비탈진 골짜기에 버려진 과수원 터가 맘에 들었다.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무조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서 어이없어 가슴을 치는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고 매달린 것은 ’최선의 하느님은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실 것이고, 간절히 청하면 길은 열린다‘는 말뿐이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남편은 고맙게도 결국 내 고집에 두 손을 들어주었다. 한 달 만에 터를 계약하고, 아파트를 팔아 일 년 만에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빠르게 진행된 탓에 미처 주변을 살펴볼 여유도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설립된 지 5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공소가 차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고, 공소 마당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은 같지 않았다. 녹녹하지도 않았다. 아침마다 공소에 가서 경배하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성체성사가 생략된 공소예절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주일마다 공소를 지나 본당으로 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애를 써도 나는 토박이 공소 신자들 사이에서 겉돌았다.
점차 공소에 가는 대신 새벽부터 호미를 들고 집 울안에서 종일 살았다. 처음 경험하는 시골살이는 몹시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컸다. 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성당 활동을 다 내려놓았는데도, 주일미사에 빠져도 불안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홀가분함에 익숙해졌고, 대부분 시간을 마당에서 강아지들과 놀면서 정원을 만들고 텃밭을 가꾸는 일로 만족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만족한 삶이라고 자부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몹시 당황스러웠고 이유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본당 신부님을 찾아가 묵히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오래오래 고백성사를 보고 나서야 공소예절에 참례하고, 공동체 활동에도 조금씩 참여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시골로 들어온 지 10년이 되던 해에 우리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드디어 신부님이 늘 계시고, 매일 미사가 있으니 원하기만 하면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실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전에 다니던 성당에서 건축위원장을 맡아 성전을 지어본 경력이 있던 터라 신부님의 권유로 다시 성전 짓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소원성취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성에 젖은 나의 게으른 신앙생활은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녀님은 안 계시고, 오랜 공소 생활에 익숙했던 봉사자들은 제대 차림이나 전례에 서툴렀고, 급조된 성가대는 10인 10색의 불협화음으로 웃음을 자아내고….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겸손하지 못한지 제대로 실감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본 것이 많다고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많다고 지혜롭거나 믿음이 깊은 것도 아니건만 나는 본당 생활을 해 본 경험을 내세우며 가타부타 의견을 내거나 급기야 어떤 일에서는 젊은 신부님을 설득하려고 막무가내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내 모습을 돌아볼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3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되어 주교님을 모시고 감동적인 봉헌식을 하였다. 다음 해에 다시 본당에 속해있던 공소의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 경당을 지어 축성식을 마치고서야 우리 부부는 비로소 분주했던 일상에서 조금 벗어나 잠시 나를 돌아볼 여유를 얻게 있었다.
처음엔 아름다운 성당이 곁에 있고, 교우들과의 우애가 돈독해지고, 신앙생활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주변이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어도 내 안으로 그 말씀이 녹아들지 않고, 하느님을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받아먹어도 배고픔은 가시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성실했고, 학습된 신앙생활은 무리 없이 이어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2
나는 여행을 좋아했다. 그러나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쉰 살이 넘어서였다. 영세동기들 모임에서 해외 성지순례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한 번 길이 트이자 놀랍게도 여행복이 연이어 터졌고 그로부터 2~ 3년에 한 번씩 15년 동안 성지순례를 다녔다.
처음엔 구약성경을 들고 이집트에서부터 기원전으로 시간 여행할 수 있었다. 그 후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이스라엘로, 사도행전을 품고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 터키 등으로 순례를 다녀왔다. 그런 다음 중세 유럽의 성당과 성지들을 찾아 여러 나라를 순례하였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고려인 권 빈첸시오 성인과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일본으로,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따라 상해와 마카오 등을 다녀올 수 있었다.
솔직히 나는 늘 발바닥 신자였다. 연년생 두 딸을 둔 엄마로 서른네 살 힘든 시절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미사 전례에 익숙해지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40주간 구약성경 공부도 해 봤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결국 먼 나라 타민족들의 처절한 전쟁 역사서가 아니던가. 그 싸움판에 하느님이 개입하고, 징벌하시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신약성경도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하고 습관처럼 ’아멘‘을 달고 살긴 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경직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 내게 성지순례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성지순례를 하는 과정에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불신과 의심병은 서서히 치유되었고 강박적이던 내 믿음은 훨씬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다.
10여 년 전부터는 국내 성지순례를 자주 하게 되었는데 순교지를 갈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에 맘이 답답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너무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 기꺼이 죽음을 갈망한 순교자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성경이나 중세유럽 교회사에 등장하는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지당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조선말 여러 번에 걸친 박해로 순교한 무수한 교우들과 사제들을 생각하면 그 모진 마음들이 너무도 두렵고 무서웠다. 자신과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그 힘은 무엇일까? 죽음만이 정답이었을까? 성인품에 오르는 조건에 순교가 무조건 1순위인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원주교구에서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최양업 사제 선종 150주년을 맞아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은데 그 각본을 써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최양업 사제에 대해서는 이미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어 쓰는 데는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문제는 순교나 성인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고심하고 있던 어느 날 갈매못 성지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미사 시작 전에 성당 안은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어 우리 일행은 성당 문밖 야트막한 언덕배기 솔밭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활짝 열린 성당 문 안으로 제대가 잘 보였다. 마치 산상설교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대 뒷벽이 병풍을 걷듯이 스르르 열리면서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님을 비롯한 세 분 신부님들과 황석두 루카 성인이 순교한 바닷가 기슭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고, 나는 갑자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미사를 겨우 마쳤다. 의심하던 내 어리석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갈매못 성지를 다녀온 후 나는 칸타타 각본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국내외 순교 성인들을 비롯해 제1대 조선 교구장 브르기에르 주교,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등 10년 동안 10여 분의 각본과 노랫말을 지었고, 거기에 레오 신부님이 곡을 얹어 작품을 완성하여 살렘코러스 합창단과 함께 매년 창작 칸타타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준비했던 감곡성당과 가밀로 신부님에 대한 칸타타는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코로나 사태로 취소되었다.
사실 내게는 호기심이나 추진력은 있으나 조금 익숙해지면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습관이 있어서 무엇이든 끈기 있게 지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타타는 내 뜻대로만 하는 일이 아니어서 10년 동안 계속해 왔지만 솔직하게 기진맥진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1년을 준비한 작품이 무위로 끝났어도 아쉬움이나 미련이 크게 남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자연스럽게 끝맺음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다 우리를 최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뜻이라 믿어 새삼 감사했다.
이제 3년이라는 코로나의 긴 터널도 다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또 새로운 일에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 나는 지금 막연하던 일상에 구체적인 생활의 틀을 새롭게 짜는 중이다. 새삼 낯선 희망을 품고 시작하는 새로운 생활과 오랜 인연들과의 관계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소중하게, 더없이 즐겁게 이어지기를 이 아침, 간절히 소망해 본다.
첫댓글 헤레나 부회장님!
작품을 마음에 담다보는 아침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제게 그대로 이루어주소서."
기도하신 그대로 이루어가시는 삶이 그림처럼 그려지네요.
주님을 찾아 떠난 그 발길에서 주님은 많은 은총을 주셨네요.
갈등과 갈등을 다독거리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나를 생각하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