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중자릉은 창랑보를 주고 떠나고 소삼중은 삼선유서를 주고
보내다.
1
여영영 일행이 말하던 문제의 그 ‘늙은이’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온천에 도착했다. 반 시진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 진자앙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게 되어 좋았다.
진자앙은 온천 옆 바위에 앉아 있었다. 늙은이는 그 앞에 나타났다.
문자 그대로 갑자기 거기 한 사람이 서 있게 된 것처럼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으로 보건대 가휘섭이 말한 대로 스스로를 강호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늙은이일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빠른 경공술을 가진 늙은이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머리의 약점을 경공술로 극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진자앙은 생각했다.
늙은이, 늙은이 하지만 이 늙은이는 정말 늙은이였다. 바짝 쪼그라든 체구에 주름 가득한 얼굴은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만든 지가 그의 나이만큼이나 되었을 법한 누더기를 입었는데, 자세히 보니 유삼이었다. 아니, 한때는 유삼이라고 불렸을 법한 옷이었다. 머리에도 너무 낡아서 정체가 불명확한 건(巾)을 썼는데, 옷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유생건(儒生巾)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유생건을 흔들면서 늙은이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자넨 누군가?”
“목욕하러 왔던 사람입니다.”
“그래? 목욕은 했나?”
“예.”
“목욕했으면 가지, 왜 안 가고 거기 있나?”
진자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빨리 그들 일행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야 대답을 해주고 내려갈 것인데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애매했다.
“음…… 누가 올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
“누구? 가령…… 나 말인가?”
“어르신네일 수도 있겠지요.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고! 할 일 없는 늙은이가 한 가지 묻겠네 만…… 여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가? 평소에도 말일세.
진자앙이 보기엔 이 유생건의 노인은 이미 그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을 안 해도 될 것이다.
“거의 안 다닙니다.”
“그런데 오늘은 누가 올 것 같아서 여기 앉아 있었다, 이건가? 평소에도 그렇게 누굴 기다리곤 하나?”
“처음입니다.”
“호오…… 그거 이상하군. 다른 날은 누굴 기다리지도 않았고,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오늘만 유독 누가 올 것 같고, 그래서 누굴 기다렸단 말인가? 자네 신통력이라도 있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단 말이지. 그것 참, 묘한 일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참이나 말을 빙빙 돌리던 노인이 불쑥 물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진자앙도 더 이상 이러니저러니 하기 싫어 짧게 대답했다.
“저쪽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자앙이 가리킨 곳과는 다른 곳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진자앙이 놀라 그를 불렀다.
“어르신네!”
“뭔가?”
진자앙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노인은 그런 그를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냥 둘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제가 그들이 이쪽으로 갔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그쪽으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자넨 내가 바본 줄 아나?”
“예? 제가 왜 어르신네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나보고 자네에게 속으라고 하는 건가?”
“제가 언제……?”
“이것 보게. 내 원래 자네가 날 속이려고 한 걸 생각하면 적지 아니 화를 내야겠지만 그냥 용서해 주지. 그리고 사실을 알아 낸 연유도 설명해 줄 테니 들어 보게나.”
노인은 진자앙이 가리킨 길과 자기가 가려고 한 길, 즉 사실 가휘섭 일행이 가지 않은 길을 번갈아 가리켜 가며 설명했다.
“자네가 어째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자 넨 아마 이 길로 그들이 갔다고 말하도록 부탁을 받았을 거야. 그들이 생각할 때는 자네 연기력으로는 분명 내가 자네 말을 의심할 거라고 본 거겠지. 물론 의심하지. 이 깊은 산중에 한 사람이 있어서 ‘당신이 찾는 사람들은 저리로 갔습니다.’그러면 누군들 의심을 않겠나? 그럼 그들은 그 다음엔 이렇게 생각했을 거냐. ‘자넬 의심할 테니까 자네가 가리킨 길로는 아니 가고 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하고.”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와는 반대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보지. 바보나 그렇게 결정하는 거야. 나 정도의 인물을 상대로 하면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그는 분명 여기까지 추측하고 오히려 제 길을 찾아 쫓아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반대로 가야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추측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므로!’이렇게 말일세.”
노인은 진자앙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것이 이른바 계략을 써도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쓴다는 것이지.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한 단계 더 생각했어야 했던 거야. 이것까지 짐작해 낼 줄은 몰랐을 거란 말일세. 이게 결정적인 실수지! 어떤가, 내 추측이?”
진자앙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고개만 젓고 있었다. 추리의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국 노인은 틀렸다.
노인이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거짓말은 했지만 심성까지 나쁜 것 같진 않아서 용서해 줬건만 전혀 뉘우치지 않는군!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면 못 쓰네! 상대방이 이렇게 확연히 알아차렸으면 그만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고얀!”
진자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예,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꾸벅 절을 하고 돌아섰다.
“이봐!”
진자앙의 ‘그럼, 맘대로 하라’는 식의 행동이 그의 추측에 일말의 불안감을 주기라도 했는지 노인이 급하게 진자앙을 불렀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도 뒤따라서 그는 그림자처럼 스르르 움직여 어느새 진자앙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진자앙은 그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물었다.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노인은 입을 헤 벌리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손목에는 맥문(脈門)이라 해서 온몸의 기가 거쳐 가는 요충지가 있다. 그곳은 보통 사람이 조금 강하게 잡기만 해도 뿌리치기가 힘든데 하물며 금나술(擒拿術)을 익힌 무림고수가 제압했으니 뿌리치기는커녕 꿈쩍하기도 곤란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뿌리치다니!
기(氣)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단지 철기둥 같은 것이 그의 손에 잡혔다가 빠져 나간 것 같은 황당한 감각을 노인은 한참이나 되씹고 있다가 진자앙이 갈 것처럼 돌아서자 다시 손목을 잡았다. 방금처럼 제압하겠다는 목적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예쁜 기녀가 손님 소맷자락 끌어당기듯이 그렇게 슬그머니 잡는 손짓이었다.
과연 진자앙은 이번에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뭐, 그렇게 급히 갈 건 없잖은가! 잠시 얘기나 더 하다 가지 뭐. 그자들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만큼이야 빠르지는 않겠지.”
말은 그렇게 느긋하게 하면서도 사실 그는 진자앙의 손목을 어루만지듯 하며 맥문을 짚어 허실을 정탐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떤 신기한 수법을 익히고 있어서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던가.
기의 흐름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거나, 너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어 그가 찾아 내지 못하는 경우 그 두 가지뿐일 것이다.
노인은 진자앙의 팔뚝이 유달리 울퉁불퉁할 뿐만 아니라 꺼칠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팔뚝 전체에 마치 굳은살이라도 박힌 것처럼, 그래서 마치 한 그루의 나뭇등걸이 거기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기괴한 일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내더니 곧 전후 사정을 짐작한 모양인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외공이라지만 이 정도로……!”
진자앙은 무뚝뚝하게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엥?”
“무슨 말을 하자는 겁니까?”
노인은 그제야 원래의 용건을 생각하곤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
“예?”
“자네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 보잔 말이지.”
“어떻게요?”
“쫓아가 보면 알 것 아닌가!”
진자앙은 다시 한 번 노인의 팔을 뿌리칠까 했다. 그가 가휘섭 일행을 쫓아갈 이유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 일에 말려든 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재수가 유달리 없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팔자에 없는 추격까지 하게 된다는 것도 그냥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는 사부와 사형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누굴 만난 적이 없으니 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했던 그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가휘섭 일행에게 그렇게 어이없이 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노인의 입장에서도 굳이 진자앙을 데려가 진실을 말했는지 거짓을 말했는지 확인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진자앙을 데려가려는 데에는 그저 이 무식한 외공을 익힌 청년에게 흥미를 느껴서일 뿐이었다.
가다가 기회가 있으면 온갖 고생을 해가며 외공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를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하여 진자앙은 노인을 따라 가휘섭 일행을 쫓아가게 되었다. 물론 노인의 고집 때문에 가휘섭 일행이 간 방향이 아니라 산봉우리로 넘어가는 길을 가야 했다.
2
‘가휘섭의 일행 중에는 이 산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진자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그런 생각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은 가휘섭이 간 길, 즉 산등성이로 돌아가는 길보다 몇 배로 험했다.
이 노인의 신법이 얼마나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길을 허덕거리고 가다 보면 아닌 줄 알아차리고 돌아가더라도 가휘섭 일행을 다시 따라잡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알려 주려다가 아무 말 없이 앞서가고 있는 노인의 등을 보고는 생각을 돌려 버렸다.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
다시 한참이 지났다. 저만치 앞서가던 노인이 갑자기 돌아서서 짜증을 냈다.
“자네, 빨리 좀 못 뛰나?”
진자앙의 느린 신법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의 신법도 그리 느린 편은 아니었다. 경공이랄 것은 없지만 매일같이 비모각을, 그것도 바로 이 봉우리에서 연습한 그였다. 산을 타는 것을 연습하지 않은 일반 무림인보다도 오히려 빠를 수도 있는 것이 지금 그의 신법이다. 그런데도 느리다고 타박을 하는 것은 경신술에 뛰어난 노인의 눈으로 볼 때 느리다는 것일 게다.
아니면 마음이 그만큼 조급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진자앙은 눈을 끔벅거렸다. 뭐라고 대답하기 애매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제가 느리다고 생각되신다면…… 먼저 가십시오.”
어떻게 만난 사람이건 연장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불손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답답하면 먼저 가라.’
이게 정답 아닌가.
노인은 혀를 차며 그의 옆으로 바짝 붙어 뛰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만한 바위 틈들을 비집고, 건너 뛰어가며 달리는 중이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나란히 뛸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조금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기는 했지만 아무 불편 없이 그에게 지껄여댔다.
“그렇게 뛰면서도 숨이 거칠지 않은 걸 보니 내공수련을 아주 안 한 건 아니군. 그렇지?”
했다고 해야 하나, 안 했다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되는 참인데 노인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 왜 경공술을 발휘하지 않는가? 아무리 소질이 없어도 뜀박질은 누구나 하지. 크게 보면 경공술이란 것도 뜀박질과 마찬가지야. 같은 걸 배워도 더 빠르고 덜 빠른 차이는 있겠지만 근육의 힘만으로 뛰는 것보단 훨씬 빠르단 말일세. 자, 내가 시키는 대로 진기를 운용해 봐.”
그쯤 되어서는 말을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진기를 운용하는지 모르는데요.”
운기조식을 하면서 그냥 움직이는 대로 뒀을 뿐 의식적으로 진기를 운용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공수련을 했다고도, 안 했 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배운 것 같은데 진기 운용법도 모른다고? 허허……! 그래서 뭐 하날 배워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니까!”
“그만두십시오!”
진자앙이 갑자기 멈춰 섰다. 노인은 그가 그렇게 갑자기 설 줄은 몰랐기 때문에 한참 앞까지 달려갔다가 발끝으로 바위를 밟고 다시 그의 앞으로 튕기듯 날아왔다.
진자앙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사부님께 모욕이 되는 말씀은 삼가해 주십시오!”
노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말이야 내 말이 맞는 말인데, 그걸 가지고 화를 내나?”
진자앙은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뒤돌아서서 산 아래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이 그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이보게, 내 말 좀 들어 보게!”
진자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봐! 이봐, 청년! 내 말 좀 들어 보라니까……! 야 이 자식아, 어른이 말하는데 안 들어?”
그래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상대해 봐야 귀찮은 일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 노인은 대단히 주책스런 노인임이 틀림없었다. 온갖 일에 참견을 다 해가며 무슨 추격을 한단 말인가. 이건 여유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진자앙이 상대도 않자 이번에는 어조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여보게, 청년. 내가 말을 실수했네. 자네 사부를 모욕할 뜻은 없었으니 용서하게나. 이렇게 사과하지.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보게.”
이렇게까지 말하니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도 사실은 바쁜 사람입니다, 어르신네.”
그는 하늘을 보았다. 벌써 해가 중천을 넘어섰다. 어쩌면 사부가 벌써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진자앙은 말을 해놓고 보니 더욱 초조해졌다.
“얼른 가서 사부님 진지도 준비해 드려야 하는데……!”
“좋아, 좋아! 효성이 지극한 청년이군. 그런 사람을 이렇게 잡고 있으니 보상을 않을 수가 없지. 내가 간단히 가르쳐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하게. 금방 몇 배로 빨라진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게야.”
“어르신네,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 그거 배우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하실 말씀이 그런 거라면 전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아니, 아니, 이 친구야! 정말 쉽다니까? 시간도 얼마 안 걸려. 배우면 바로 응용할 수 있지. 이거 밖에서는 제발 가르쳐 달라고 줄 서서 기다리는 걸세! 자랑은 아니지만 내 창랑보(滄浪步)로 말하자면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구절을 보고 문득 떠오른 한 생각이 있어 만든 것으로, 이름은 보법이지만 사실 신법, 은신법, 보법, 그 어느 것으로든 쓸 수 있는 것일세. 당금 무림에서는 쾌여풍의 일진풍신법(一塵風身法)을 제외하고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뿐더러……!”
“공(功)이 없으면 녹(祿)도 없는 법이라는데 그런 귀한 재주라니 저는 더욱 배울 수가 없군요. 그럼 그만……!”
노인은 진자앙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려 하자 다시 팔을 잡고 매달렸다.
“이봐!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한가? 내가 창랑보를 다 가르쳐 주려는 것도 아니고, 다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또 가르쳐 주는 것도 그냥이 아니라 당연히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네. 생각해 보게! 혹시 내가 맞고 자네가 틀리면 자네 그 느린 다리로 언제 쫓아가서 확인하겠나? 또 그럴 리는 없지만 자네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하면 언제 산 넘어가서 확인하고 다시 쫓아와서 그 길로 쫓아가겠나? 다소라도 배워서 속도가 나아지면 훨씬 그러기가 쉽지 않겠나? 난 엉뚱한 데 시간 뺏기지 않고 그들을 추격할 수 있으니 좋고, 자넨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자네 사부 밥해 주러 갈 수 있어서 좋고, 그 김에 하나 배워 가니 인생에 보탬도 되고…… 이렇게 다 좋은 일을 왜 않겠다는 거야?”
진자앙은, 애초에 엉뚱한 데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노인이 자초한 일이고, 그는 원래 이 일에 말려들 처지도 아닌데 말려들었으니 쫓아갈 이유도 없을 뿐더러,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제 그에게 경신술을 가르쳐서 데려가느니보다는 그냥 혼자 쫓아갔다가 혼자 돌아와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 깨우쳐 주느니 그냥 두는 편이 훨씬 시간이 절약될 것이다.
“그럼 배우기로 하지요.”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노인은 횡재라도 한 것처럼 손뼉을 쳐가며 좋아하더니 어딘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속는 기분일세……?”
하나 그는 다시 손뼉을 쳤다.
“하여튼 이제 시작하세! 아주 쉬워. 창랑보의 제일 원칙은 힘으로 뛰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뛴다는 것이지. 제이 원칙은 공간을 뚫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흘러간다는 것이고, 마지막 제삼 원칙은 가고자 하는 그곳에 나는 이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 어때, 쉽지?”
“아……!”
진자앙은 벌렸던 입을 겨우 다물었다. 이렇게 어려운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게 답니까?”
“물론 실용구결(實用口訣)은 따로 있네. 하지만 일단 이 원칙들을 머리에 새겨 뒀다가 그 의미를 항상 생각해야 하네. 그러지 않고는 절대 일정 수준 이상은 올라갈 수가 없네.”
“그건 가능할 것 같군요.”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외워 두는 것이야 못 할 것도 없었다. 이해하게 되리라고는 기대도 않았지만 어차피 경공의 고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기를 움직이는 방법도 아직 모른다고 했지? 그것도 아주 쉽네. 일단 단전(丹田)에 뭔가 있다고 생각해 보게. 느낄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뭔가 뜨거운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 봐. 그 다음엔 그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세. 그냥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네가 보내고자 한 그곳으로 움직인다고 말일세. 창랑보의 원칙을 이 경우에 적용시키면 이렇게 되겠지. 기氣)를 보내고자 한 그곳에 이미 기는 가 있다. 어때?”
말을 하며 진자앙을 보던 노인은 깜짝 놀랐다. 진자앙의 얼굴이 삽시간에 불그스레하게 변한 것이 마치 한참이나 운기조식을 해서 진기를 끌어 모은 상태 같지 않은가.
진자앙이 말했다.
“뜨거운 건 느껴지는군요.”
“그걸 중단전(中丹田)에 보내 보게! 전중혈( 中穴)에서 옥당혈(玉堂穴) 사이가 거기일세. 일반적인 무공을 펼칠 땐 중심이 안정돼야 한다고 해서 보통 기해혈(氣海穴)을 중심으로 한 하단전(下丹田)에 기를 모으지. 그러나 경공술에 있어서는 중단전을 중심으로 기를 운용하는 것이 옳아.
진자앙은 노인의 말대로 뜨거운 기운, 기를 움직였다. 용암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배를 통과해서 가슴팍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노인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진자앙의 상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특별한 기공, 소위 강기( 氣)로 불리는 기공을 연마한 사람들에게서 저런 현상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청년은 기를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던 사람 아닌가.
‘무슨 연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진자앙의 얼굴은 점점 붉어져서 목과 옷깃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까지 홍조를 띠어 가고 있었다.
‘에구! 잘못하다간 주화입마가 되겠군!’
노인은 얼른 그 다음에 기가 움직여야 할 곳을 일러주었다.
“겨드랑이에 있는 대포혈(大包穴)로 움직여 보게! 거긴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이 거쳐 가는 곳이지. 거기서 기가 놀면 사지가 따라 움직이는 요혈이야. 대개 발과 다리에 기를 보내야 경신술을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거기를 중심으로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중단전이 중요한……, 에구!”
말을 하다 말고 노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의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진자앙이 순간적으로 덮쳐 왔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진자앙의 거대한 체구가 그를 쓸 듯이 지나쳐서 뒤로 쏘아져 갔다. 그와 같은 경공의 고수이니 피하지, 보통의 고수였다면 그대로 정면충돌을 했을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이놈이……! 기껏 가르쳐 줬더니 기습을 해?”
발끈 화가 난 노인이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진자앙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쏘아져 나가 정면의 거대한 바위에 그대로 부딪쳤다.
콰앙!
집채만 한 바위가 부르르 떨더니 돌가루를 흩날렸다. 진자앙은 바위에 찰싹 붙어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핏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보이지만 맨몸으로 그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 결코 웃을 일은 아니었다.
노인도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 일면 황당하고 또 일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진자앙에게 달려갔다.
“아이구, 이놈 죽었네!”
진자앙은 죽지 않았다. 그것이 노인에게는 더 황당한 일이 되었다.
진자앙은 천천히 바위에서 떨어지더니 목을 좌우로 몇 번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야 몸에 묻은 돌가루들을 툭툭 털어 내었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조금 강도가 강하군. 이젠 이 방법으로 수련을 할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노인에게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왜 괜찮지? 그리고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거지? 자네 지금 발 한번 땅에 안 대고 칠장이나 뛴 것을 아나?”
노인의 상식으로는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아니 스스로 저지르고도 괜찮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미치기라도 하지 않고서야 그렇게 뛰어나올 수 없었다. 설사 미쳤다고 하더라도 방금 전까지 경공의 ‘경’자도 모르던 사람이 한 순간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빨라진다는 것, 그래서 칠 장여나 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걸 모르는데 진자앙이라고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몰라?”
“정말 모르겠습니다.”
“속은 괜찮은가? 그러니까 내 말은…… 방금 뛰어나가기 전에 기의 흐름이 이상하지 않았느냐는 거야.”
“전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시키는 대로 했다.
단지 그것이 노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진자앙의 하단전에서 중단전으로, 거기에서 다시 대포혈로 옮겨간 힘은 굳이 측량해 말하자면 일 갑자(一甲子), 정통내공을 배운 무림인이 육십 년 동안 열심히 쌓아 온 내공수위를 넘는 힘이었다. 그걸 일시에 움직였던 것이다.
보통 무림인이 일 갑자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걸 한꺼번에 어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신체의 다른 부분을 통째로 비워 두고 한 부분에만 내공을 집중시키면 다른 부분은 한 순간 기의 공백 상태가 만들어진다. 물론 완벽한 공백은 아니겠지만. 그러면 이어지는 동작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자앙이 방금 한 행동은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것이었다.
진자앙은 그 내용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이젠 정말 더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근데……”
노인은 진자앙이 당한 일의 내막을 생각하는 듯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뭔가?”
“추격은 이제 안 하십니까?”
“응? 그러고 보니 그 일을 깜박하고 있었군! 어떻게 하지 ……?”
거기 생각이 미친 노인은 금세 초조해져서 소피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동동걸음을 했다.
“어떻게 하지? 응, 어떻게 해?”
그는 갑자기 멈추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가야겠군. 끝까지 데려가지 못해 미안하네만 자네 걸음이 워낙 느리니……!”
‘누가 언제 데려가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느냐’라는 말은 미처 입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노인이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의 모습을 찾았을 때는 그는 이미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엄청 빠르군!”
진자앙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3
진자앙이 한 생각은 들어맞았다.
노인은 한 시진이나 달려가도 가휘섭 일행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은 외길. 이 길로 그들이 갔다면 진자앙을 만나 늦어진 것을 감안해도 그의 경공술로는 이미 따라잡았어야 옳았을 시간이었다.
별수 없이 그는 처음 진자앙을 만났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터덜터덜, 그래도 경공의 고수답게 적지 않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그가 제자리에 멈춰 버렸다. 그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자네! 아직 거기 있었나?”
노인은 아직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 덩치 크고 이상한 구석이 많은 청년이 처음 그들이 만났던 온천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게 경공술을 배우라니까. 걸음이 그렇게 늦으니 여기밖에 못 왔지!”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걸음이 늦어 여기밖에 못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어나 노인을 맞으며 가휘섭 일행이 실제로 간 길을 가리켰다.
“제가 이 근방 지리를 좀 아는데……, 이 길로 가면 향로봉을 둘러서 흑벽(黑壁)으로 가게 됩니다.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가 오로봉(惡露峰)이라고 하는데, 그 오로봉 중턱 즈음에 있는 검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협곡의 이름이 흑벽이지요. 거기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길이 없고, 또 올라가 봐야 바늘 끝 같은 정상 외에는 달리 갈 곳도 없으니 그들은 흑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을 겁니다. 중간에 끊긴 곳도 있지만 대충 협곡 몇 개를 따라가다 보면 와호강(臥虎岡)이라는 언덕을 만나는데, 거길 넘어가면 오지산의 밖이지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잡지 못하시면 포기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진자앙은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노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 그럼 나한테 그걸 알려 주려고 여태 기다렸단 말인가?”
진자앙은 그냥 미소만 지었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움직이더니 그냥 웃었다.
“내가 일백 년 넘게 살았지만 자네 같은 친구는 처음 보는군. 내가 사람을 찾는 일만 아니었다면 자네와 함께 좀더 있으면서 창랑보를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으니 아쉽군! 후일 다시 만나면 그때 가르쳐 주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헤어지세.”
보통 사람 같으면 노인이 일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말을 듣고 놀라겠지만 진자앙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에게도 올해 백열넷이라는 어마어마한 연세를 자랑하시는 할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그보다는 이 노인이 가휘섭 일행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더 흥미로웠다.
“사람을 찾으시는 중이었습니까?”
“여자아이 하나를 예전에 그 삼선녀란 여도사에게 맡겼었는데, 어디 있냐고 물어도 통 가르쳐 주지 않고 도망만 가는군! 아니, 사실은 도관은 불태우고 어디로 이사를 가는 걸 잡아 물으렸더니 그냥 줄창 도망가는 바람에 물을 시간도 없었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하여튼 난 이만 가네! 언제 강호로 나오면 날 찾게.”
노인은 돌아서서 달려갈 차비였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세상에 언제 다시 만날 것이냐. 게다가……!
“성함도 모르는데요?”
“궁서생 중자릉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예? 저기 잠깐……!”
진자앙이 황급히 불렀지만 노인, 중자릉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경공의 고수답게 표홀한 거동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그를 다시 찾을 길은 막막해져 버렸다.
“할아버지 친구 분이셨잖아……!”
이제 알고 보니 중자릉이었다. 진자앙은 몇 번이나 혀를 찼다. “미리 알았으면 인사를 드리는 것인데……!”
어쨌든 그가 중자릉이 맞다면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지도 몰랐다.
진자앙은 그때에야 산을 내려갔다.
이상한 날, 이상한 아침에 벌어진 이상한 일이었다.
4
그날 진자앙의 이상한 일은 중자릉과 헤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소삼중의 식사를 걱정하며 부리나케 금강당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오후도 한참이나 늦은 때였는데, 놀랍게도 지난 사 년 간 자리 보전하고 누워 꼼짝도 않던 소삼중이 침상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왔느냐?”
소삼중은 햇빛을 보지 못해 파리해지기는 했지만 어제의 그것과는 달리 무언가 정비된 듯한 모습이었다. 진자앙은 그 얼굴에서 뭔지 모르는 신기(神氣)가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어, 어…… 사부님 기침하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진지를 올리……!”
“거기 앉거라!”
“예?”
“거기 바로 앉아 내 말을 들어라!”
진자앙은 주춤주춤 침상 곁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소삼중 의 병구완을 하기 위해 그가 대충 잘라 만든 투박한 통나무의자였다.
“너도 알다시피 이 사부는 한평생 금강불괴의 꿈을 안고 살아왔다.”
소삼중의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금강불괴를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젊었을 때는 나 자신이 금강불괴가 되려고, 나중에 그게 불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손으로 만들어 보려고……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열어 놓은 방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방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아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소삼중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눈도 뿌옇게 흐려졌다 는 것을 진자앙은 곁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세월이었다. 금강불괴는…… 불가능한 꿈인지도 몰라. 사조님에게도, 내게도……!”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소삼중의 말이 지닌 의미는 적지 않았다. 진자앙은 여태 그가 이렇게 스스로의 세월을 부정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금강 불괴가 불가능하다고는 더욱 말한 적이 없었다.
“사부님!”
“자앙아!”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 사부님!”
진자앙은 얼른 대답했고, 소삼중은 그냥 말을 이었다.
“네게 미안하구나……!”
그의 말은 힘겹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유달리 신기가 넘쳤던 모습이 점점 허물어들고, 작은 체구가 더욱 작아졌다.
“속인 것 같아서……!”
“그건 아닙니다!”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스스로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다시 작게 말했다.
“제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꼭 금강불괴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못난 제자를 믿고, 스스로를 믿으셔야 될 줄로 압니다, 사부님!”
소삼중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제 금강불괴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낯설게 진자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또한 내가 지은 죄의 하나이니……! 넌 옛날의 나를 무척 닮았구나. 너는 내가 널 믿어 줄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어찌하면 나와 달라질 수 있을지 그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부…… 님!”
진자앙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은 사부가 어딘지 이상했다.
그의 몸은 여기 있는데 눈은 이미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잘못한 일들이 적지 아니한데……, 그 중에도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죄가 크다.”
‘아내와…… 딸?’
진자앙으로서는 또다시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소삼중은 조용히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비구니와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전에 네 말을 듣고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아이는 궁서생이 어느 여도사에게 넘겨줬다고 들은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찾기도 어려울 테지만 사실 찾아 보려고도 않았다. 널 가르치느라고…… 그…… 금강불괴라는 허황된 꿈에 미쳐서 가족도, 아이도 모두 버렸던 것이다.”
소삼중은 기어코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평생의 고난을 보여 주듯이 파리한 안색에 꺼칠한 피부, 밭고랑처럼 깊이 파인 주름살들마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봄 가뭄에 갈라 터진 진흙 밭처럼 보이는 그 얼굴에 투명한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소삼중의 심중에 사무쳐 나오는 말을 듣고 있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 년을 누워 있는 동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떠오르는 것은 회한과 비애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면 내 지난 세월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에 절대 인정을 않으려고 했지. 정말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그건 지난 세월 쌓아 온 어리석음의 덩어리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었어. 그걸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구나. 지난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바로 보게 되니 그제야 모든 것이 용서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해가 가느냐?”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소삼중이 계속 말했다.
“언젠가 너도 이해할 때가 오겠지. 지금은 아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아니 두 개가 있다. 그래서 네게 말을 하는 것이야. 하나는 내 딸, 내 평생 단 한번 잘한 일의 결과를 끝내 찾지 못하고 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너다. 너도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참을 수가 없구나.”
진자앙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소삼중의‘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가긴 어디로 간다는 것일까?
그가 입 밖으로 이 의문을 끄집어내려 했지만 소삼중의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두 가지 한이 전부 네게 넘겨질 수밖에 없구나. 두 번째 것은 어차피 네 문제지만 내 딸을 찾는 것은 사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닌데……!”
문득 진자앙은 궁서생을 만났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가 왜 삼선녀의 일행을 쫓아다녔던가를 기억해 내었다. 일순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사부님!”
그의 소리는 놀랄 만큼 컸다. 회한과 비통에 젖어 평생 가슴에 묻어 왔던 이야기를 꺼내 놓던 소삼중조차도 놀라 말을 멈출 정도였다.
“사부님, 궁서생을 봤습니다. 바로 오늘이요. 그리고 따님도……, 아니 따님을 데려간 그 여도사도요!”
소삼중의 눈이 번뜩였다. 한 순간에 그는 다시 힘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진자앙은 자신이 오늘 중자릉과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니 그 삼선녀가 따님을 데려간 그 여도사가 분명할 것입니다. 궁서생을 찾기만 하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요. 지금이라도 제가 쫓아가서……!”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이 서두르는 진자앙을 소삼중이 잡아 세웠다.
“앉아라! 급할 것 없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이야기가 있다.”
“금방 찾아올 텐데……!”
금방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진자앙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자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생각하기도 싫은 이야기가 소삼중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다. 이제 내 얘기를 들을 날도 없을 테니 그냥 거기 앉아 들어라!”
“사부님, 그런……!”
바로 그것이었다. 진자앙이 가장 듣기 겁내면서, 결국 듣고야 말 거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 소삼중의 최후였다.
“사부님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더 열심히 간호해 드리면……!”
“사람의 수명이라는 게 그렇지. 염왕(閻王)이 삼경에 부르면 오경까지 가지도 못한다고 하지 않더냐? 슬플 것도 없고, 두려워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기색에서 어떤 절박한 빛이 풍겨져 진자앙은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 들어라. 금강불괴가 되려면……!”
그는 갑자기 허탈하게 웃었다.
“이 꼴이 되고도 아직도 금강불괴 얘기라니……! 미련인가, 미망(迷妄)인가? 하여튼 내가 몇 마디 해두마. 서른이 되기 전에 반드시 금강불괴가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 못 된다면 포기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간인 이상 체력에 한계가 있고, 평생을 젊을 것 같아도 노쇠하는 날은 누구에게나 오고야 만다.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라서 대개 열여섯에서 이십대 말까지가 체력적인 면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정점을 이루고, 서른이 넘으면서부터는 급격히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내공을 익힌 내가고수에게는 이 시간이 약간 연장되는데 그들도 대개 오십여 세 정도가 한계이고 그 후에는 불철주야 수련을 해도 그때까지 닦은 무공을 잃지 않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물며 너나 나처럼 외공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소삼중만 해도 서른이 넘어 간신히 무공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가 되는 데에는 피나는 수련을 거쳐야 했다. 그러고도 오십이 넘자 바로 시들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건 그 영리충이……!”
“영리충에게 맞은 게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 평생 맞은 매가 만 대는 안 된다고 해도 수천은 족히 될 것인데 그자의 한두 대가 무어 그리 대단하겠느냐? 단지 그의 타격은 촉발제가 되었을 뿐이다.”
그와 같이 외공을 이룬 사람은 어느 순간 내부의 균형이 깨어지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게 되어 있다. 젊은 시절 건강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 어느 날 갑자기 자리보전하고 눕고, 시들시들하다가 죽어 버리는 경우가 그런 부류의 일이었다. 젊은 시절 무리한 것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니 서른이 되기 전에 깨어지지 않을 균형을 몸 안에 이루어 놓지 않으면 너도 결국엔 나와 같은 꼴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금강당의 수련은 다른 파의 그것들보다는 낫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결국엔 평생을 안고 살아 온 금강당에 대한 자부심, 금강불괴에 대한 미련을 끊어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금종조(金鍾 )니 십삼태보횡련이니 하지만 우리 금강당의 그것을 따를 수는 없다. 그것들은 아무리 익혀도 금강불괴는 될 수가 없어. 금종조는 소림에서 익히는 거라지만 내기를 몸의 상부에만 모으는 반쪽짜리 기공이고, 십삼태보횡련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조문을 없앨 수가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제대로 수련만 하면……!”
한참 얘기하던 소삼중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는 천천히 누웠다. 잠시 열을 올렸던 탓인지 얼굴빛이 검게 흐려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그런 소삼중을 부축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소삼중의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걸로는 안 되겠다.”
소삼중은 베개 아래에 손을 넣더니 얇은 나무상자를 꺼내었다.
그 속에서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책 한 권이 나왔다. <삼선유서 >였다.
소삼중은 회한에 가득한 눈으로 그 책을 보더니 진자앙에게 내밀었다.
“이젠 네 거다.”
진자앙은 머뭇거리다가 무릎을 꿇고 받아 들었다. 사양하는 것은 소삼중을 더 괴롭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로는 안 돼.”
소삼중이 말했다.
“그걸로는 절대 금강불괴가 될 수 없어! 금강불괴가 되려면 나머지를 찾아 내야 해! 삼십 년 만에 그걸 알았다. 삼십 년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일생을 그것 때문에 망쳤으면서 겨우 그게 내가 알아 낸 전부라니……! 우습지 않으냐?”
대답은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네게 그걸 넘겨주는 것은 이제부터 네가 금강당의 당주라는 의미다. 난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니 마음이 편하구나. 그만 내려가거라, 자앙아!”
“예?”
소삼중이 침상에 누운 채 손을 들어 힘없이 저었다.
“지금 바로 짐을 싸서 집에 가거라!”
“사부님!”
진자앙이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제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차라리 꾸짖어 주십시오. 나가라는 말씀만은……!”
“그게 아니고……!”
소삼중이 힘없이 말했다.
“죽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일 뿐이다. 그만 가거라! 이게 마지막 명령이라 생각하고……!
진자앙이 한참을 더 빌었지만 소삼중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자앙이 일어나 나오려 할 때에야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다.
“내 딸을…… 찾아서…… 아니다. 이제 와서 찾아서 어쩌겠다고……!”
진자앙은 무릎 꿇어 절하고는 눈물을 훔쳤다.
“제자가 꼭 찾아 내어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사부님!”
소삼중은 다시 대답하지 않더니 진자앙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밖으로 나올 때에 한마디를 했다.
“자앙아……, 부디 잘 살아라!”
그날 진자앙은 산을 내려갔다.
오지산에 올라와 소삼중의 제자가 된지 구 년이 되는 해, 초가을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