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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천국의 도래 과정에 대한 7가지의 비유 및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 배척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이제 공생애를 개시하신지 대략 1년 반에서 2년이 경과한 A.D. 28년 말엽에 주신 비유의 교훈들을 함께 모아 수록한 것이다. 이런 비유들은 주께서 성취한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천국의 도래 과정의 각 측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52절은 예수께서 천국의 도래 과정에 대하여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을 함께 모아 제시하고 있다. 다음 후반부 53-58절은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기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천국의 도래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각각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제시한 전반부는, 천국은 다름 아니라 구속사(救贖史)가 지향하는 목적지임을 감안할 때 결국 구속사 전개의 각 단계에 대한 비유요, 가르침일 수 있다.
천국(天國)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즉 그 옛날 창조 당시 가졌던 본래의 의와 행복을 상실한 죄인 중 태초 에덴동산에서부터 세워진 예수 구속의 법에 따라 택함 받고 회개한 성도들에게 다시금 영원한 생명과 의와 행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평안히 거하게 하시려고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의 영역이다. 이 천국은 택한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법적 근거가 되는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다만 여러 예표(豫表)들에 의하여 상징적으로만 주어졌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후에는 천국이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있다. 예수의 초림으로 천국이 임했으나 그것은 영적 차원에서만 임한 것이며 그 육적 실현은 이 세상 끝날 새로워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비로소 이루어져 그때에야 영육 간에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오고 올 세대의 많은 택한 자들 모두에게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예수의 초림 당시 십자가 수난으로 성취된 구속(救贖)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여 구원 얻을 충분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를 두고 천국은 이미(already) 임하였으나 아직(yet)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라고 표현한다.
본장 전반부의 소위 7대 천국 도래에 대한 비유는 바로 이러한 예수의 초림으로 개시되었으나 예수의 재림으로만 최종 실현될 천국의 도래 과정 각 단계에 일어날 여러 상황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먼저 1-23절은 예수와 그 제자들은 동일한 천국 복음을 전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자의 자세에 의하여 각각 다른 상이한 결과를 가져올 것에 대한 비유인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및 이 비유의 해석이다. 다음 24-30절은 예수에 의하여 구속사역이 성취되고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후에 사탄의 방해에 의하여 불신과 사악의 씨도 함께 뿌려져서 넓게는 이 세상에 그리고 좁게는 교회 안에도 택한 자와 불택자(不擇者)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이다. 그리고 31-33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한번 도래한 천국과 그에 대한 복음은 점점 더 확장되어 마침내 완전히 실천될 것을 보여주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이다. 이에 뒤이어지는 34-43절은 다시 한 번 비유로 천국의 도래 과정을 설명하게 된 배경의 설명 및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해석이다. 44-46절은 천국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 절대의 가치를 가진 것임을 보여 주는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이다. 한편 가장 마지막인 47-50절의 그물의 비유는 세상 끝날 있을 천국과 지옥의 심판에 대한 비유이다. 그리고 51-52절은 이상의 일련의 비유 기사의 결론으로서 이러한 천국 도래의 과정을 깨달은 자는 새 것과 옛 것 곧 서로 연결된 하나의 진리인 구약과 신약의 진리를 힘써 전파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상 천국 도래의 과정에 대한 7대 비유와 그 비유의 말씀대로 천국의 도래가 2000년간 진행된 시대에 사는 현대의 우리는 먼저 그 비유들 그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천국 도래의 과정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 온 것을 확인한다. 이처럼 천국의 도래는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처럼 예언적으로 그 도래 과정을 미리 정확히 밝히셨고 지금도 그대로 성취되어온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그분의 작정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도래하고 있는 천국에서 낙오하지 말기 위하여 천국 제일주의로 이를 예비하는 바른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한편 본장 후반부인 53-58절의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배척은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또 하나의 양상과 거기에 담긴 교훈을 강력히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본래 제 2위 성자이셨으나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로서 세상에 오사, 우리의 죄를 구속할 자를 보내 주시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던 구약 곧 옛 언약을 일단 성취하시고 다시금 구속 사역이 최종 실현될 천국을 중심으로 하는 새 언약 곧 신약을 주셨다. 그리고 구약 계시의 핵심인 율법이 계승 발전된 신약 복음을 주셨다. 그러나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을 온전히 깨달아 신약의 계시와 그 구약의 실체로서 된 주님과 그분이 새로 주신 약속을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각각 몇 가지 관점에서 배척했다. 먼저 구약이 신약으로 발전 확장됨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아 구약의 일부 내용을 이스라엘 민족주의적 또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편협하게 해석하여 예수를 배척한 자들이 있었다. 즉 종교적 관점에서 배척한 자들이 있었다. 또한 예수가 가르치는 복음의 정의와 진리가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대치되자 자신들의 정치 종교적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예수를 배척한 자들도 있었다. 한편 본 단락에서 보듯이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참 본성을 바로 보지 않고 그의 외모와 자신들과의 혈연적 관계에 의한 편견 또는 단순한 시기에 사로잡혀 예수를 무조건 배척한 자들이 있었다(막 6:1-6; 눅 4:16-30). 어쨌든 그 이유는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예수와 그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고 그를 배척함으로써 구원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또한 이는 정의나 진리보다 이해타산과 편견에 더 사로잡히기 쉬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한 사탄이 획책한 결과이기도 하였다(눅 7:31-34). 한편 이런 당시 유대인들의 배척의 원인은 그 당시로 끝나지 않고 지금 이 시간도 별다른 생각 없이 예수를 그저 한 뛰어난 종교 사상가로 치부하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예수를 안다고 하면서도 인본주의적 교만에 사로잡혀 신성(神性)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여기서 이 시간 우리도 방심하지 말고 혹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나도 나의 이해타산과 편견에 사로잡혀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또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외울 말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비유의 목적과 진리를 깨닫는 자의 복
10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해석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24 ○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겨자씨의 비유
31 ○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누룩의 비유
33 ○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언의 성취로 된 비유의 말씀들
34 ○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가라지 비유의 해석
36 ○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감추인 보화의 비유
44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좋은 진주의 비유
45 ○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그물의 비유
47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
51 ○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 배척
53 ○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13:1-52 숫자 '7'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사역들
1. 주님 생애의 일곱 단계(빌2:6-9)
2. 주님의 천국에 대한 일곱 비유(마 13:1-55)
3. 누가복음의 일곱 가지 기도(눅 3,5,6,9,11,12장)
4. 요란복음의 일곱 가지 이적(요 2,4,5,6,9,11장)
5. 주님의 기도의 일곱 간구(눅 11:2-4)
6. 십자가의 일곱 말씀(마 27:46; 눅 23:46)
7. 보좌로부터의 일곱 축복(계 1,14,16,19,27,22장)
보감-13:3-9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해
천국에 관한 일곱 비유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이 비유는 천국 복음의 전파에 따른 천국 확장의 과정 및 확장의 요인에 대해 보여 준다.
이 비유에서 '씨'는 그리스도의 말씀, 곧 천국 복음이다. 그리고 씨 뿌리는 자는 그리스도' 네 종류의 밭은 천국복음을 받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천국 복음은 네 종류의 밭 가운데 좋은 밭의 소유자에 의해서만 크게 결실되며 그를 통해서만 천국이 확장됨을 보여 주고 있어 천국복음을 듣는 오늘날 성도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의 미 | 결 과 | |
길가 밭 | ․ 말씀을 깨닫지 못함 ․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음 ․ 완고하여 말씀을 안받아들임 | ․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감 . 천국의 기쁨을 맛볼 기회를 완전히 상실함 |
돌 밭 | ․ 천국 복음의 새로움을 인식함 ․ 말씀을 진실되게 받지 않음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함 | ․ 환난이나 핍박 시 천국 복음을 의심케 됨 ․ 곧 넘어져 말씀을 떠남 |
가시떨기 밭 | ․ 천국과 세상의 쾌락을 동시에 얻으려 함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김 |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성장 못함 ․ 천국 복음의 기쁨이 없음 |
좋은 밭 | ․ 말씀을 듣고 잘 깨달음 ․ 말씀을 지켜서 결실을 맺음 | ․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음 ․ 이런 자들에 의해서만 천국이 확장됨 |
도표-13:1-17 성경의 10대 비밀들
성경의 10대 비밀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 또는 축복, 은총 그리고 구원의 역사 전개 등을 비밀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비밀을 인간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모두 다 깨달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만이 오래전 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성도가 묵상하면 할수록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나 완전히는 다 알 수 없는 성경의 비밀들을 살펴보자.
1 | 천국(마 13:11) |
2 | 재림의 날과 그 때(마 24:36) |
3 | 구원 섭리(롬 11:25-27) |
4 | 복음(롬 16:25,26) |
5 | 하나님의 지혜(고전 2:7) |
6 | 하나님의 뜻(엡 1:9,10) |
7 | 교회(엡 5:22-7) |
8 | 그리스도(골 1:27) |
9 | 사탄의 불법(살후 2:7) |
10 | 믿음과 경건(딤전 3:9,16) |
보감-13:10-17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중 목적
막 4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3: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맺을 영적 열매
1 |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 |
2 |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43) |
3 | 영생의 열매 (요 4:36) |
4 | 전도의 열매(롬 1:13) |
5 |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롬 6:22) |
6 | 그리스도의 은총의 열매(고후 6:6) |
7 | 성령의 열매(갈 5:22) |
8 | 빛의 열매(엡 5:9) |
9 | 의의 열매(빌 1:11; 히 12:1) |
10 | 긍휼과 선한 열매(약 3:17) |
보감-13:10-50 일곱 가지 천국 비유
예수님은 천국을 여러 비유의 말씀으로 설명하셨다. 그 이유는 천국은 본질상 신적 비밀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관해 부분적으로나마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본장에는 일곱 천국 비유가 수록되어 있다. 이 비유들은 천국의 기본적 속성과 각각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외래성, 내적 측면에서의 천국의 확장 과정 등을 보여 주고 있는 바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의 미 | |
씨 뿌리는 자 | ․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줌 ․ 천국 확장 요인을 보여줌 ․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실천하는 자에 의해 천국이 확장됨 |
곡식과 가라지 | ․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보여줌 ․ 현재적인 영적 천국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음 ․ 종말에는 가라지가 뽑혀 불에 태워질 것임 |
겨자씨 | ․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줌 ․ 천국의 외적 확장 과정을 보여줌 ․ 복음이 땅 끝까지 전과될 것임 |
누룩 | ․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줌 ․ 천국의 내적 확장 과정을 보여줌 ․ 복음이 인간의 심성, 곧 인격의 변화를 통해 전파됨을 강조 |
감추인 보화 | ․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줌 ․ 천국의 비밀한 속성과 절대적 가치를 보여줌 ․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을 발견케 된 자의 전적 헌신 요구 |
값진 진주 | ․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줌 ․ 천국의 비밀한 속성과 절대적 가치를 보여줌 ․ 천국은 전심을 다해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임 |
그물 | ․ 천국의 미래성을 보여줌 ․ 현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천국 복음이 전파되나 종말에는 악인과 의인을 가르는 심판이 반드시 있음 |
주요 주제-13:1-52 예수의 비유의 이해
본장 연구자료 참조
원어연구-13:25, 원수
여기에 쓰인 헬라어 '엑크드로스'( )는 '증오하다'라는 뜻의 동사 '엑크도'( )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엑크드로스'는 수동적으로는 '미움받는', '밉살스러운'이라는 뜻이고 능동적으로는 '증오하는', '적의 있는'이라는 뜻이 된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용어는 인간이나 비인격적인 원수 또는 전쟁이나 일상생활에서 맞서는 적들을 나타낸다. 70인역본(LXX)에서도 이 용어는 이런 용례들에 따라 '군사 분쟁에서의 적'을 의미하며 어떤 나라와 전쟁상태에 있는 상대국들을 가리킨다(삼상 29:8; 나 3:11,13). 한편 위경 중에서 이것은 '사탄'을 지칭한다. 그것은 아마 사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탄'( )이 대적자 '원수'라는 의미를 가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신약에서도 '엑크드로스'가 직접적으로 마귀를 지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39절). 마귀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증히 여김을 받는 존재 즉 '밉살스러운 존재'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나라와 싸우는 원수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번성하는 것을 시기하여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훼방하는 훼방꾼으로 본문에 묘사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이 원수들은 반드시 멸망을 받을 것이다(고전 15:25; 계 11:5).
삽화-13:25, 가라지
보감-13:24-30,36-43 가라지 비유를 통한 영적 교훈
1 | 원수 사탄은 성도의 영적 나태를 틈타 활동함(마 13:25) |
2 |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가 섞여 공존해 삶(마 13:26) |
3 | 교회 안에도 사탄의 자녀인 거짓 형제가 있을 수 있음(마 13:27) |
4 | 성도는 사탄의 자녀들을 늘 경계해야 함(롬 8:18) |
5 | 성도가 이 세상에서 거짓 형제들을 심판하려 해서는 안됨(마 13:28) |
6 |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이 분명히 드러날 것임(마 13:30) |
7 |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에 사탄의 자녀들을 심판하실 것임(마 13:30) |
주요 주제-13:18-50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자료 참조
보감-13:24-50 본서에만 나오는 비유와 핵심 주제
마 25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3:25, 가라지
1. 가라지의 특성
본문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가라지'는 팔레스틴 어디를 가든지 많이 볼 수 있는 독초(毒草)이다. 이 가라지는 '다르넬(darnel)' 즉 '독보리'라고도 하는 데, 농부들에게 보통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이는 밀처럼 보이기 때문에 한참 성장기에는 농부조차도 밀과 가라지를 구별 못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 가라지 낟알의 맛은 매우 쓰기 때문에 어쩌다
밀가루와 섞여 먹게 되면 현기증을 일으키고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일으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들은 가라지가 밀에 섞여 수확되지 않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추수 때가 되기 전에는 밀 가운데서 가라지를 구별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이 때에는 가라지를 뽑는다는 것이 밀을 뽑게 되는 경우도 쉽게 생긴다. 혹 가라지를 옳게 구별했다 해도 그 뿌리가 매우 길어서 곡식의 뿌리와 엉켜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을 경우 곡식도 같이 뽑혀지게 된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밀과 가라지의 구분이 확연해진다. 곧 추수 때가 되면 밀은 이삭이 주렁주렁 달리게 되어 점점 고개를 숙이게 되나, 가라지는 줄기의 상부에만 낟알이 조금 달리기 때문에 매우 곧게 서있게 된다. 그러므로 농부는 추수 때까지 그냥 가라지가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때에 꽂꽂하게 서있는 가라지의 윗부분을 먼저 잘라서 한 곳에 쌓아둔다. 그리고는 추수가 다 끝난 후 그 가라지 더미를 불태워 버리고, 곡식만을 곳간에 저장하게 된다.
2. 교훈
이상과 같은 가라지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신실한 믿음의 자세로 추수 때를 대비해야함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가라지가 뽑혀져 불태워지는 추수 때가 반드시 있듯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시기도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 때에 가라지같이 뽑혀져 불태워지는 거짓된 신앙이 아니라 곡식처럼 거두어지 는 신실한 신앙을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삽화-13:55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 목수의 작업
도표-13:41 성경에서 '인자'가 언급된 8가지 경우
마 26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3;55,56 예수의 육적(肉的) 가족들
이 름 | 관계 기 사 | |
부 모 | 요셉 | 다윗의 자손(마 1:20) |
의롭고 순종적인 자(마 1:19,24,25) | ||
마리아 | 유다 지파, 다윗 가문(눅 1:32) | |
예수의 최후까지 함께함(요 19:25) | ||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됨(행 1:14) | ||
형 제 들 | 야고보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회심(고전 15:7) |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갈 1:19) | ||
야고보서의 저자(약 1:1) | ||
요 셉 | 그리스도의 생존 시에는 예수를 영접지 않음(요 7:5) | |
시 몬 | 그리스도의 생존 시에는 예수를 영접지 않음(요 7:5) | |
유 다 | 유다서의 저자(유 1) | |
초대교회의 지도자(고전 9:5) | ||
누이들 | 나사렛에서 결혼하고 거주함(마 13:56) |
도표-13:34,35 신 ․ 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
본권 신약 총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13:41 예수의 메시야직을 나타내는 호칭 '인자'
마 24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13:54-58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13:1-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본장은 마태복음의 5대 강화 중에서 세 번째 강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천국에 관한 7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서론 특별자료, '마태복음의 주제별 구성 원칙'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러한 천국 비유들은 예수의 초림으로 개시된 천국이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되어 가는 천국의 도래 과정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일곱 가지 천국 비유'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주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듣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신앙에 빠져 회개할 줄 모르는 당시의 사람들 때문이었다(마 11:16,17,20-24; 12:39). 즉,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천국에 관해 설명하심으로써, 영적인 안목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다 쉽게 깨닫도록 만드심과 아울러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완악한 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문은 천국에 관한 7개의 비유 가운데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일명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이는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에서 행하여지던 농사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4종류의 사람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주고 있는데 결국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도리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자와 구원받지 못하는 자로 양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해당하는 주석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일깨워 준다. 즉 ① 성경에 나타난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성도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만 풀이하여,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깊고 오묘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와 반대로 비유를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풀이하여 결국 알레고리(Allegory)에 빠지고 하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도 않은 내용을 감히 인간이 억지로 유추해 내는 오류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벧후 1:20,21; 3:16).
② 성도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시 42:1; 119:131). 만약 그렇지 않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무감각한 심령을 지니게 된다면, 결국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 삼킬 자를 찾는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4,19절; 벧전 5:8).
③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자신의 신앙을 깊이 뿌리내려야만 한다(고전 3:10-15). 만약 그렇지 못하여 복음을 받되 피상적으로 받는다면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되어, 환난과 시련이 닥칠 때 금방 믿음을 포기하고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다(6,21절; 딤전 5:12; 계 2:4).
④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자가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없다(엡 4:13-15).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위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7,22절; 엡 4:22; 히 12:1).
⑤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전인격적인 변화를 체험한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의지하며, 또한 힘써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자신의 삶속에서 맺어야만 한다(8,23절; 눅 8:15; 요 15:8). 바로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수 있다(5:16; 빌 1:11).
13:1 그 날에. - '그 날'(테 헤메라 에케이네)은 어느 특정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의 '그 날'은 마 12장의 끝부분에서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온 바로 그 날을 가리킨다(마 12:46-50).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는 자기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오자 그들과 함께 잠시 집에 들어가셨다가 잠시 후에 다시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바닷가로 나가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연대기적 기술을 무시했던 마태는 어떤 사건을 전개함에 있어 사건의 도입부에 어떤 막연한 시기나 시간을 가리키는 '그 때'(토테)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마 11:25; 12: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굳이 '그 날'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예수께서 육신의 부모 형제를 위해 수고하기보다는 영적인 가족이 될 자들을 위해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
바닷가에 앉으시매. - 여기서 '앉으시매'(에카데토)란 '앉으시고', '앉으시려'(카데스다이)란 말과 의미가 같은 것으로서 미완료 시상 동사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바닷가로 나가시자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이에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고자 그들 앞에 앉으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 준다. 한편 본절의 바닷가는 갈릴리 해변을 가리킨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막 4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3:2 무리. - 헬라어에는 대중을 지칭하는 말로서 '라오스'( )와 '오클로스'( )가 있는데 전자는 흔히 '하나님의 백성' 또는 '이스라엘의 백성'이라고 할 때 쓰는 말로 한 유기적인 집단에 종속된 다수를 가리키는데 현재 의미로 '국민'에 해당한다. 70인역에도 이른 바 백성을 거의 '라오스'라는 말로 쓰고 있다. 이에 반해 '오클로스'는 성경에서 본절과 같이 주로 '무리'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고 천한 지위에 있는 노예들, 용병, 강제 징용자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라오스'가 13번, '오클로스'가 40여 번, 마가복음에는 '라오스'가 2번, '오클로스'가 대부분, 누가복음에서는 '라오스'가 35번, '오클로스'가 40여 번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음을 시사해 준다(마 9:13; 막 2:17).
13:3 비유. - '비유'(파라볼레)란 '옆 자리에', '곁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파라'( )와 '던지다'의 동사 '발로'(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한 사물과 다른 한 사물을 비교하기 쉽도록 나란히 배열한다는 뜻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사상, 감정 또는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이와 유사성이 있는 어떤 상황이나 사물 등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를 참조하라. 씨를 뿌리는 자. -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들의 가장 전형적인 비유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란 농부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자'란 ① 하나님(렘 31:27), ② 예수 자신(37절), ③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갖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시 126:5)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본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이 '씨 뿌리는 자'나 '씨 뿌리는 방법'이 아니라 씨가 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 상태는 '길가', '돌 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 등 네 가지로 비유되어 있다. 이런 비유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13:4 길가에 떨어지매. - '길가'(파라 텐 호돈)는 '길을 따라'란 뜻으로서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길은 사람들의 잦은 왕래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때문에 이곳에는 비록 씨앗이 뿌려진다 해도 결코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길 가'란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아예 처음부터 배격하고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팔레스틴에는 약 300여 종의 새들이 있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새가 어느 특정한 새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혹자는 이 새가 레 11:16에서 부정한 새로 언급된 '새매'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서 '새'는 마음을 굳게 하여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자들에게서 말씀을 빼앗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공중권세 잡는 자'(엡 2:2), 곧 사단을 상징한다. 한편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복음을 거부한 자의 결과이다. 즉 복음을 거부한 자는 결국 사단의 먹이가 되어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3:5 흙이 얇은 돌밭. - 팔레스틴은 대부분 암석으로 된 고지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밭을 일굴 경우 흙 밑의 바위가 표면 가까이 나와 흙의 두께가 얇은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씨앗이 뿌려진 바위의 온기로 인해 싹은 빨리 나지만 뿌리가 성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해가 나면 곧 시들고 만다. 따라서 돌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은 복음을 단순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특별히 '흙이 얇은 돌밭'은 겉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부드러우나 속은 아직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마음 상태의 심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심성을 가진 자들은 복음을 받을 경우 일시적으로 기뻐하며 주를 위해 헌신할 것처럼 하다가도 조그마한 시련과 역경만 닥쳐도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을 버리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흙이 얇다'는 것은 위와 같은 자들의 신앙 인격과 경박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데, 성경에서 바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후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데마(골 4:14; 딤후 4:10; 몬 1:24)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근심하면서 돌아간 부자 청년이(마 19:16-22) 이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13:6 해가 돋은 후에…말랐고. - 해는 식물이 토양에서 뿌리를 통해 받아들이는 자양분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해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식물에게 있어서 해는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해의 열이 뿌리를 말려 결국 식물을 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해는 환난과 핍박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돌밭과 같은 심성을 가진 자는 복음을 받고 신앙인으로 생활을 시작하게 되지만 시련이 닥치면 결국 신앙을 버리고 말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뿌리가 깊은 식물의 경우 태양열은 비록 처음에는 괴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식물이 자라는데 결정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와 같이 거짓 신앙은 핍박과 환난 앞에서 그 위선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나 참 신앙은 오히려 환난과 역경 속에서 정금같이 순수해지고 더욱 굳건해지며 그로 인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조건이라 하겠다(욥 23:10; 시 66:10; 사 48:10; 히 12:11; 벧전 1:7).
13:7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 '가시떨기'(아칸다)는 팔레스틴에서 사계절 볼 수 있는 잡초의 하나로 주로 개간된 밭 주변에서 자란다. 그런데 농부가 씨를 뿌릴 때면 그 일부가 이러한 가시떨기가 자라는 곳으로 떨어져 가시떨기와 함께 자란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서 자란 식물은 밭에 뿌려진 식물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자라기는 하나 결국에는 가시떨기의 그늘과 부족한 양분으로 인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씨가 가시떨기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복음을 받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신앙생활을 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악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6)로 자주 상징되는 바 가시떨기는 신앙적 장애 요소로서 복음의 기운을 꺾어버리게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적 장애 요소로,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눅 8:14)을 말씀하셨다. 아무튼 '길 가'와 '돌밭'이 밭의 내부 곧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심성 상태와 관련된 문제였다면 '가시밭'은 밭 외부 곧 신앙의 장애 요소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운을 막았고. - 문자적으로 숨을 막아 질식시키다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기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 )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절은 믿는 자가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해 성령께서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막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13:8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좋은'(칼로스)이란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비유에서 '좋은 땅'이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하도록 잘 개간되어 돌과 잡초가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수분과 햇볕이 제공되는 옥토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해석하신 바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눅 8:15)를 상징한다. 특별히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길가와는 달리 진리에 대한 흡수력이 강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며 '지키고'란 돌밭과는 달리 진리에 대한 파수력(把守力)이 강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인내로 결실한다'는 말은 가시떨기 밭과는 달리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본절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뿌려진 씨앗의 손해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라는 말은 한 개의 곡식이 맺을 수 있는 최고와 중간치와 최소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로 모든 결실이 항상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 본절은 신앙의 결실을 맺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실을 하였느니라. - '결실'(에디두)은 미완료 시제로서 결실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결실이 맺어짐을 의미한다. 즉 복음으로 인한 신앙의 영적 성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나타내는 말로 성경에서 종종 사용된다(렘 6:10). 따라서 본절에서 '귀 있는 자'란 천국의 복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과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갖춘 자를 가리킨다. 한편 본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 11:15 주석을 보다 참조하다.
13:10 제자들이. - 여기서의 제자들은 열두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본절의 병행구인 막 4:10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 나아와.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이때는 군중집회가 끝난 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 이 질문은 이중적 질문이다. 그것은 첫째는 예수께서 왜 이 비유를 사용하셨으며, 둘째는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제자들은 비유의 사용 목적과 의미를 동시에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비유로 가르치신 목적에 대해서는 막 4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 '가라사대'(호티)는 단순히 설화조로서 후렴구일 뿐이다. 한편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변하지 않으시고, 단지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을 취급하시는 방법만을 이야기 하신다.
천국의 비밀. - 여기서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 )은 '닫다', '덮어두다'의 뜻인 '귀에오'( )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 )의 반영이기도 한데 이 '소드'는 '하늘의 회의'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을 가리키는 말로, '천국의 비밀'이란 결국, 천국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 스스로는 천국에 대해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감춘 것을 보이실 때만 알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이라는 말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엡 3:3,4,9; 골 1:26), 유대인의 회심(롬 11:25),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엡 5:32), 일반적인 부활(고전 15:51) 등과 같은 드러난 비밀에 대하여 쓰고 있다.
너희에게… 저희에게. - 여기서 '너희'는 10절의 제자와 함께 예수께 질문을 한 자들이며, '저희'는 비유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되는 은혜 밖의 인물들을 의미한다. 한편 '저희'에 해당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희'에 해당하는 부류는 ① 예수의 말씀에 적대적인 유대교권주의자와 ② 예수의 기적만을 바라고 모여드는 대다수의 군중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3:12 무릇. - 이 말은 앞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이유로서 다음의 원리에 근거되어 있는 말이다.
있는 자. -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를 의미한다.
없는 자. -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우매하고 완악한 자를 가리킨다. 한편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들은 것'과 예수의 행한 것에 대해 '본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 자'는 이것을 통해 예수가 메시야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반면, '없는 자'는 그러한 깨달음이 없었다는 차이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있는 자'에게는 영생을, '없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13:13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앞절 전부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방금 말한 이유로' 또는 '지금 말한 이유로'를 의미한다. 즉 '그들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저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용하여 '없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사 6:9). 그런데 본절의 분사 '보는 것'(seeing)과 '듣는 것'(hearing)은 히브리의 부정사 용법, 즉 관계를 맺고 있는 한정된 동사의 개념에 계속의 의미를 부과하는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르다. 따라서 본절은 '비록 그들이 볼 수 있는 능력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이 능력을 사용하여 보거나 들으려고 하지 아니 한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결국 본절은 죄를 지은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를 가리킨다(사 59:10; 렘 6:10; 겔 12:2; 슥 7:11; 막 4:12; 요 12:40; 행 28:26; 롬 11:25).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 여기서 '이루었으니'(아나플레루타이)라는 말은 현재 진행 시제이다. 따라서 본절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사야의 예언(사 6:9)은 당시 완고했던 유다 사람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완고했다는 점에서 이사야 시대의 유다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이나 예수 때의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취급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즉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메시야가 그들 가운데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척함으로써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13:15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완악하여'(파퀴노)는 살이 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여기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살찌운 자가 되어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듣기에 둔하고. - 여기서 '둔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오스'( )는 '눌러 내리다', '가리우다'의 뜻이다. 결국 본절은 귀가 어두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들의 귀를 막았음을 의미한다.
눈은 감았으니. - '감다'(캄뮈오)는 '내리감다'의 의미로 억지로 눈을 감게 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진리에 대해 그것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돌이켜. - '돌이키다'(에피스트렙소신)는 말은 복음적 의미의 개심, 회심(conversion)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회심은 먼저 죄의 자각(눅 15:17)이 수반되며 이러한 죄의 자각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시는 것은 그들을 멸하시고자 작정하신 까닭이다(롬 1:28-32).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사 6:9에는 두려워한 당사자가 '하나님'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 인용구에는 두려워한 당사자가 '백성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두 기록은 모순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두 기록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즉 이사야의 기록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인 반면 본절은 백성들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다. 하여간 본절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의미로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를 접하고도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한 어리석음을 지적한 말이다.
13:16 너희 눈은 봄으로…복이 있도라. - 15절의 세상의 완고함에 대조되는 제자들의 영적 감수성과 그 축복에 대한 말씀이다. 실로 그들을 천국의 비밀을 눈으로 보고 들었다. 따라서 그들의 귀와 눈은 복 있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복 있는 것은 그것을 깨닫는 그들의 마음이었다. 이 깨닫는 마음 없이 천국의 비밀을 보고 들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화가 미칠 것이다.
13:17 진실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멘'( )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하다는 것과 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대상 16:36)로 기도문이나 송영 끝에 붙여 사용한 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그의 교훈 초두에 사용하심으로써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미리 확증하고 계시다. 마 5:18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못하였느니라. - 여기서 많은 선지자들이란 천국의 비밀에 관한 부분적인 계시를 하나님께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의인이란 선지자들에 의해 그들에게 전달된 계시를 받아들이고 믿었던 옛 언약의 시대에 살았던 참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수 많은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와 모형만을 가져야 했으며 그들은 보다 나은 것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를 소유했다. 즉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된 것이다(벧전 1:10-12). 그러한 의미에서 제자들은 실로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오늘날 제자들이 전해 준 복음을 소유한 우리들 또한 특별한 복의 소유자이다.
13:18 그런즉…들으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원문에는 '너희'(휘메이스)란 말이 있어 듣는 자가 매우 강조된 구절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했으나 갖지 못했고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는 나타났으나 배척된 진리가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받아 넉넉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3:19 아무나. - 이 말은 본절의 '듣고'와 '깨닫지 못하는'이란 말과 합하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이라는 의미가 된다.
천국 말씀. - '씨'(3절)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막 4:14와 눅 8:11에 의하면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기록된 구약의 율법이 아닌,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을 가리킨다.
악한 자. - '새'(4절)에 대한 해석으로 마가는 이를 '사단'으로(막 4:15), 누가는 '마귀'(눅 8:12)로 표시했다. 하여튼 이러한 사단이나 마귀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한편 사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 '귀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길가에 뿌리운 자. - 여기서 '타락한 천사'를 참조하라.
길가에 뿌리운 자. - 여기서 '뿌리운 자'(호돈 스파레이스)는 3절의 '씨 뿌리는 자'(호 스페이론)과 대구를 이룬다. 후자는 씨를 뿌리고 전자는 씨를 받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전하는 예수,제자, 전도자 등을 가리킨다. 한편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즉 씨가 길가에 뿌리워진 것과 같은 사람은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은 청중들로서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단으로 비유된 새에 의해 즉시 말씀을 빼앗김으로 말씀의 결실을 맺을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여기서 '돌밭'이 마음의 심지가 굳지 못하고 감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5,6절). 이들은 '길가'와 같은 사람과는 달리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심지가 굳지 못하고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신앙생활 가운데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시련이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신앙을 버리고 만다.
즉시 기쁨으로. - 돌밭과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는 순간 재빠르게 또는 곧바로 그들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며 그 복음은 그들에게 잠시 동안 평안, 용서, 구원 그리고 경건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참된 용서에 따르는 영속적인 기쁨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유혹과 시련이 닥쳐오면 그들의 기쁨은 곧 사라져버리고 경건의 모든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13:21 잠시 견디다가. - '잠시'(프로스카이로스)란 '순간적', '일시적'이란 뜻이다. 한편 누가는 '잠깐 믿다가'(프로스 카이론 피스튜우신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눅 8:13) 복음의 수용뿐만 아니라 인격적 확신에 대한 지속적인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즉 돌밭과 같은 사람은 비록 그 마음에 복음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기는 하지만 복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까닭에 잠시 동안은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곧 시련이 닥치면 신앙을 버리고 마는 것이다.
환난이나 핍박. - '환난'(들리프시스)은 '누르다', '밀어대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들리보'( )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핍박'(디오그모스)은 추격한다는 의미의 '디오코'( )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환난과 핍박은 신앙생활로 인하여 삶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의 시련을 가리킨다.
넘어지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제타이'( )는 함정, 올가미, 덫을 의미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에서 유래한 말로, 죄에 빠지는 것이나 배교하는 것을 가리킨다.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 이 말은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의의 환경과 여건 등 외부적인 문제에 의해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 즉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토지가 제대로 개간되지 않아 한 밭에서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남으로 곡식이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과 같이 좋은 심성을 가져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신앙생활 가운데 재물로 세상적 욕심 등으로 인하여 영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함으로, 결국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여기서 '세상'은 내세(來世)와 반대의 개념으로, 결국 세상의 염려란 현세의 목숨을 위한 생각(눅 12:22) 때문에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메림나)라는 말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의 뜻으로 생각과 판단이 흐려진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는 생각은 신앙의 영적 성숙을 생각하나 몸과 마음은 세상일로 인해 혼란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 '제리'(플루토스)란 '풍성하다', '많다'의 뜻으로 재물의 부요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보다는 필요 이상의 재물을 구하는 욕심을 의미한다.
말씀이 막혀. - '막혀'(쉼프니게이)는 '질식시키다', '숨 막히게 하다'의 뜻으로, 이는 신앙인의 마음에서 살아 역사해야 할 말씀이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이 갖고 있는 파괴적인 영향력으로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결실치 못하는 자. - 농부가 씨를 뿌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실을 거두고자 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음 전도자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결국 복음의 열매를 얻고자 함이다. 따라서 그 신앙생활 과정이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하다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아무 쓸모가 없고 아궁이에 던지울 풀과 같이 되고 만다(30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 이는 은혜로 말미암아 말씀을 정직하게 받아 그것이 충분히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은혜의 햇빛과 비를 받아 무르익은 들판의 곡식처럼 그 마음 가운데 깊이 뿌리박은 복음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 오직 이러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 겸손하게 말씀을 받아들여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옛 좋은 땅에서 생산량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본절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과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했더라도 그 자체는 좋은 땅으로서 인정을 받는 데에 우리는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13:24-43 가라지와 겨자씨 및 누룩의 비유
본장에서 언급된 천국에 관한 7개의 비유 가운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1-23절)에 이어 본문은 세 가지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일명 '가라지의 비유'라 불리는 것이다(24-30,36-43절). 이 비유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천국의 성장 단계의 모습인 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적 천국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완성될 천국에서의 참 신자와 거짓 신자의 영원한 분리에 대해서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라지 비유는 47-50절에 언급된 그물 비유와 그 성격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소개되는 비유는 일명 '겨자씨와 누룩 비유'라 불리는 것이다(31-33절). 이 두 비유는 다같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관련된 비유이다. 즉 이 두 비유는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확장되어 마침내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참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가운데 겨자씨 비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미미하게 시작된 천국이 외적으로 크게 성장할 것을 보여 준다면, 누룩 비유는 천국의 내적 성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천국 복음이 온 사회 전반에 투입되어 그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복음의 역동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이 보여 주는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상 교회 안에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권징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자칫 잘못하면 참된 신자를 실족케 할 수가 있으므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과 영적 상태를 판단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과 영적 상태를 성찰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마 7:1-5; 롬 2:1; 고전 4:5).
둘째, 성도들은 영적 추수 곧 심판의 날을 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결코 영원히 존속되지는 않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때가 되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며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태도가 성도들에게 요구된다(벧후 3:10-13).
셋째,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복음 사역에 더욱 매진하며 헌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이후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국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마 24:14).
넷째, 성도들은 죄악된 세상 가운데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3:24 본절에서 30절까지는 일명 '가라지 비유'로 불리는 부분으로 본서에만 있는 비유이다. 한편, '씨뿌리는 자의 비유'(1-8절)가 복음 전파 단계를 말하고 있는 반면, 본 비유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도래한 천국의 성장 단계의 모습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적 천국에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게 되는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천국은…같으니. - 본절에 사용된 '… 같으니'라는 표현은 천국이 바로 '제 밭에…사람'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황 또는 경우'와 같다는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경우와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좋은 씨. - 이것은 천국의 아들들(38절), 곧 선택받은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되었다.
제 밭에 뿌린 사람. - 여기서 '밭'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창 1:1)을 가리킨다(38절). 그런데 예수께서는 37절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인자'임을 밝히고 계시다. 따라서 '제 밭'이라는 본절의 표현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밭'은 단지 '교회'뿐만 아니라 복음이 확산되어 가는 영역으로서의 세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Barbieri).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 여기서 '잘 때'란 농부의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는 한 밤중을 가리키는 말로, 악한 자가 악행을 저지르기에 적합한 시기를 가리킨다. 사실 당시에는 자기와 감정이 있는 사람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를 뿌리는 일이 상당히 많았고 로마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었다(Trench). 아무튼 본절은 악한 자들은 주로 사람이 일하지 않고 편히 쉬며 안식을 누리는 때에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와 같이 마귀들도 주로 성도들이 평안할 때 성도들을 공격한다.
가라지. - 팔레스틴 지방에 서식하는 식물인 '가라지'(지자니온)는 보리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일명 '독(毒)보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가라지는 보리와 매우 흡사하여 보리밭에 기생해서 함께 자랄 경우 이삭이 필 때까지는 거의 보리와 구분이 안 되며 추수 때가 되어서야만 구별이 가능해진다. 또한 가라지 씨앗은 보리나 밀알보다는 훨씬 작으며 그 속에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먹으면 심한 메스꺼움과 경련과 설사를 일으키며 때로는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가라지로 비유된 자는 악한 자의 아들로서(38절), 사람들을 신앙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
덧뿌리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페이로'( )는 곧 '위에'를 뜻하는 '에피'( )와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이로'( )의 합성어로서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뿌리다'란 뜻이다. 그런데 레 19:19과 신 22:9를 보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상징적 교훈이다. 따라서 농부가 곡식을 뿌린 밭 위에 원수가 다시 가라지를 뿌렸다는 사실은 마귀가 성도들의 순수 신앙을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13:26 결실할 때. - 어떤 곡식이든지 결실기에 이르면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가라지 역시 어느 정도의 생장기까지는 자기의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결실기에 이르면 필연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결실기는 영적으로 최후의 심판 때인 추수 때(30절)이전 시기로 선악이 확연히 구분되며 이 세상에서 악의 관영함이 최절정에 달한 때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이때가 천국의 아들들(38절)에게는 최고의 고난의 때요, 시련의 때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 때를 잘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마 10:22).
13:27 집 주인의 종들.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으나 씨 뿌리는 자의 대행자로 일컬어지는 이상 복음 전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여. - 여기서 '주'(퀴리오스)는 집 주인에 대해 종들이 존경의 표시로 부르는 호칭이다. 그러나 좋은 씨를 뿌리는 자가 '인자'를 상징한다는 점(37절)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주'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서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할 것이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집 주인의 종들은 좋은 씨를 뿌린 곳에 왜 가라지가 생겨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어떻게 죄가 생겨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원수에 의해 자행된 일이며, 죄의 열매들은 마지막 추수(심판) 때에 곡식과 구별되어 불사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주인되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알 뿐이다(28-30절; 롬 16:20; 계 20:2,10).
13:28 원수. - 집 주인의 원수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원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게 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도록 핍박자들을 뒤에서 조종하며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마귀를 상징한다(39절).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밭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은 농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곡식이 어느 정도 자라 결실기에 이르면 제초 작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잡초를 제거하다 보면 오히려 많은 곡식이 상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절의 집 주인의 종들은 곡식으로부터 가라지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그것들을 뽑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을 생각치 않고 있다. 그와 같이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정결을 위한 열망을 가진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을 자칫 죄의 기만성과 인간의 판단의 과오 때문에 큰 위험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말은 교회에서의 권징의 유해성을 말함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권징에는 항상 큰 위험이 동반하므로 심사 숙고하다는 말이다.
13:29 가만 두어라. - 이 말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가리지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주인의 뜻은 간절하지만 정해진 때를 기다리자는 말이다. 사실 가라지는 곡식보다 뿌리가 강하여 그것을 뽑으면 주위의 곡식도 함께 뽑히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의 불의를 제거하려는 활동들이 선한 신자들에게까지 악영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집 주인은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가라지도 추수 때까지 그냥 놔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악의 활동을 허락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더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의 훼방을 인내로 견디며 최후의 승리의 날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
13:30 추수 때. - 성경에서 '추수'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의미 외에 완성, 성취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지만, 이때에 의인들은 추수를 마친 하나님의 집에서 평화와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 끝없는 고통 속에 처해질 것이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잘 드러내 주는 말씀으로,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완성을 향해 남아가는 하나님 나라 안에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먼저…단으로 묶고. -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완연하게 구별이 된다. 그러므로 추수꾼은 쉽게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추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먼저 곡식을 거두어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나중에 모아 불에 태우는 것이 일상적인 추수 방법이다. 그런데 집 주인은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단으로 묶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재림하신 예수께서 먼저 마귀부터 영원한 멸망의 불에 넣기 위해 결박하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로 죄악의 완전한 멸망으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또한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는 것은 가라지가 많을 것을 암시한다.
곳간. - 이는 곡식을 거두어 보관하는 창고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장차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의인들을 인도하여 들이실 하늘 처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13:31 본절과 32절을 겨자씨 비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 비유의 핵심 내용은 천국의 성장이 처음엔, 미약하게 시작할 것이지만 나중에는 놀랍게 확장될 것을 보여준다. 겨자씨. - 배추과의 1,2년생 식물로 그 씨는 맵고 향기로와 양념과 약재로 쓰고,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보다 작은 것'(31절)으로 묘사될 만큼 아주 작은 것이 특징인 반면, 나무는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까지 자라 마치 나무와 같아 보일 정도로 크고 무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에 비유된 것은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했으나 점차 급속도로 확장될 것을 암시한다. 사실 그리스도에 의해 뿌려진 천국 복음은 처음에는 미미하게 전파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온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널리 전파되었다.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 여기서 '갖다'(라본)는 씨가 우연히 뿌려졌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즉 씨는 밭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우연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랫동안 계획한 목적의 결과인 셈이다(딛 1:3; 벧전 1:20). 한편 겨자씨는 천국의 도래 또는 시작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요 12:24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일 수가 없다. 즉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요 3:16,17).
13:32 모든 씨보다 작은 것. - '모든 씨'는 당시에 팔레스틴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뿌려졌던 씨들이다. 그리고 본절의 '보다 작은'(미크로테론)이란 말은 '작은'의 최상급' 즉, '가장 작다'가 아니고 비교급의 '더 작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겨자씨가 가장 작은 것을 표현하는 격언으로 사용된 것처럼 그 크기는 무척 작다.
자란 후에는…커서. - '자란 후에'란 천국의 성장이 완성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또 '나물보다 커서'란 말은 영적으로 기타 다른 종교의 성장과 함께 천국을 대조시킨 말이다. 결국 본절은 다른 어떤 종교도 완성된 천국과 견줄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겔 17:22-24).
공중의 새들. - 이 말은 나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부 사람들이 이 나무의 보호 아래 나아오기를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좀 더 확대 해석한다면 '새들'이란 세계 도처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참고로 겔 31:6; 단 4:12에서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군소 나라들을 '공중에 나는 새'로 묘사하고 있다.
깃들이느니라. - 이 말은 '장막을 세우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한다는 뜻이다. 즉 겨자나무 자체가 천국을 상징하므로, 본절은 천국에 속하는 모든 것은 천국의 일부로서 영속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민 14:30; 신 33:12; 시 16:9).
13:33 본절은 누룩 비유에 해당되는 구절로, 본 비유는 천국 복음의 은밀한 영향력과 천국의 내적 발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천국. - 여기서의 천국은 앞에 나온 겨자씨 비유의 천국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다 은밀하고 숨겨진 특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영혼의 모든 기능과 온 세상을 사로잡는 천국 복음의 영향력이 강조되고 있다.
여자. - 이 여자는 이 비유의 중심인물로, 31절의 '사람'과 대구를 이룬다. 따라서 본절의 여자는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실로 하나님의 복음은 교회에 위탁되어 있으며, 복음은 교회를 통해 사회 각 전반에 침투하여 그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루 서 말. - 이것은 한 번에 반죽하기에 알맞은 양으로 한 에바이다. 여기서 '말'( 사타)은 에바의 1/3에 해당되는 '스아'와 같은 단어이다. 따라서 '서말'은 '1에바'에 해당한다. 한편 '1에바'는 약 22ℓ로, '가루 서말'이란 10인 가족의 하루 식량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 1인에게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양으로 1오멜(약 2.2ℓ)을 주셨기 때문이다(출 16:33,36). 이에 대해서는 성경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를 참조하라.
전부 부풀게. - 문자적으로 '그것이 전체 발효되기까지'이다. 이것은 천국 복음의 영향력이 점점 퍼져서 결국에는 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추론하여 이 세상 전체가 주님 오실 때까지 점점 계속적으로 개선되어질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세상에서의 조용하고 자애로운 복음의 영향력을 서술하고 있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침내 개심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룩. - 이것은 빵을 만들 때 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거나 술을 만들 때 알콜 성분을 발생케 하는 발효소를 가리킨다. 따라서 누룩의 비유적 의미는 부풀게 하거나 점진적인 내적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성경에서는 이 누룩이 보통 교만이나, 욕망, 부패하고 썩게 하는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막 8:15; 눅 12:1; 고전 5:6). 그러나 여기서 천국을 묘사할 때의 누룩은 위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낳게 하는 놀라운 변화력과 정복력에 초점을 맞춘다. 즉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리듯이 천국 복음은 은밀히 세상을 파고들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변화의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13:34 비유가 아니면…아니하셨으니. - '말씀하지 않다'(엘랄레센)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는 비유로서 모든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말씀은 일상적인 말을 가리키지 않고 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신 비유를 가리킨다.
13:35 선지자로. - 시내 사본과 몇몇의 사본에서는 본절에 선지자라는 말과 함께 이사야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혹자는 이 선지자가 이사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뒤이은 인용문은 시 78:2에서 취한 것으로 시 78편은 아삽이 지은 시이다. 따라서 본절의 선지자는 아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더불어 다윗 시대의 3대 악사였다(대상 25장). 아삽에 대해서는 대상 6:3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창세로부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볼레스'( )는 '시작', '기초'를 나타내는 헬라어 '카타볼레'( )의 소유격으로 세상이 시작되던 때를 의미한다. 즉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은 이미 세상이 창조될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다.
감추인 것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륌메나'( )는 '비밀', '수수께끼'란 의미로 여기서는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로운 구역 사역의 계획이 나타나지 않고 숨기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천국 비유를 통해 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그의 제자들에게 드러내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을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셨다.
드러내리라. - 이는 '외치다', '선포하다'의 뜻으로 '큰소리를 내다'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밝히 드러내 보이셨음을 의미한다.
13:36 무리를 떠나사. - '떠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이스'( )는 '떠나다', '보내버리다'의 뜻으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내고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음을 나타낸다.
제자들이 나아와. - 여기서 '제자들'은 10절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께서 구별하여 세운 '12제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오는 세 가지의 비유(44-50절)는 일반 청중이 아닌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여 주소서. - 25절 비유에서와는 달리 '밭'이라는 말이 첨가된 것은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 이 비유의 요점 즉 가라지가 아무 곳에서나 우연히 자란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산물과 함께 뿌려져 같이 자랐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설명하여 주소서'란 '그것을 철저하게 밝혀 주소서'의 의미로 비유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제자들의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13:37 인자. - 복음 전파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인자'에 대해서는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의 이해'를 참조하라.
13:38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씨가 천국 복음에 비유된 반면 가라지 비유에서는 참 신자에 비유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들을 '천국 회원들' 또는 '신민(臣民)'이라 하지 않고 '아들들'(휘오이)이란 말을 쓰셨다. 이는 참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법적 신분의 소유자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참 신자들은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악한 자의 아들들. - 이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는 자들로 멸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려받을 나라의 속성과 같이 악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13:39 원수는 마귀요. - 여기서 '원수'(에크드로스)는 '적의', '분리'를 뜻하는 헬라어 '에크드라'( )에서 유래한 말로 '대적하는 자' 혹은 '분리되어 나온 자'를 뜻한다. 그리고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 모략하는 자', '비방하는 자' 등의 의미이다. 결국 '원수'라는 말이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사단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면 '마귀'라는 말은 사단의 행동 특징을 보여준다 하겠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다 쫓겨난 사단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시켜 불화케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비방하는 것을 특징적 행동으로 갖고 있다.
세상 끝이요. - 여기서 '세상'은 '시간적인 현세', '끝'은 '완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결국 '세상 끝'이란 현 세대가 종결되고 완성될 다른 세대가 시작될 때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추수군은 천사들이니. - 종말에 있을 천사들의 사역을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즉 천사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인자를 도와 심판을 수행하여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며 '의인을 영생의 처소로' 악인을 멸망의 처소로 인도하는 사역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교리의 '천사론' 부분을 참조하라.
13:40 불에 사르는 것 같이. - 악인들이 영원한 멸망의 불에 처해질 때의 심판 장면을 묘사한 표현이다(계 20:12-15).
13:41 보내리니. -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텔로'( )는 '앞(아포)과 '준비하다'(스텔로)가 합성된 말로 '사명을 주어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천사들로 하여금 심판을 수행하도록 지시할 것을 가리킨다.
그 나라에서. -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의 뜻이다. 이는 예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시작된 종말의 나라로 그의 뜻과 의지가 실현되고 통치되는 이 세상을 가리킨다.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을 자들에 대한 언급으로 여기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성도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것과 그것을 통해 악을 행하게 하는 사악한 무리를 가리킨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무법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리는 모든 불신자를 가리킨다.
13:42 풀무 불. - 이 말은 성경에서 이곳과 50절에만 나타나는 마태의 독특한 표현으로 다른 곳에서는 불못(계 19:20; 21:8), 영원한 불(말 4:1; 마 25:41; 눅 16:24)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불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의 형용사적 표현이다. 울며…있으리라. - '울며'(클라우드 모스)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이며(마 2:18; 막 5:38), '이를 갈다'(브뤼그모스)는 굶주림에 지친 짐승의 으르렁대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이다. 결국 본절은 영원한 멸망의 불에 처해진 자들이 그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울부짖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 여기서 '그 때'란 의인과 악인의 최종적인 분리가 있을 때를 의미하며, '의인들'이란 30절의 알곡으로 상징화된 참 신자들을 가리킨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 - '빛나리라'(크람프수신)는 '~로부터'의 '에크'( )와 '등불'을 의미하는 '람파스'( )가 합쳐져서 된 말이다.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결국 의인들이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과 같이 영광의 광채를 발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13:44-52 보화와 진주와 그물의 비유
앞단락에 이어서 본문 역시 천국에 관한 3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되는 3개의 비유 중에서, 보화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는 천국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와 아울러 그러한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44-46절).
이에 비해서, 그물의 비유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강조하는 가라지 비유와 유사한 것으로, 천국 복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축복의 수단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초래하는 저주의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47-50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본장에 수록된 천국에 관한 7개의 비유 기사의 결론으로 제자된 자들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상기시키고 계신다(51,52절). 즉 이상에서 언급한 천국 복음의 비밀을 깨닫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담긴 율법과 복음을 소유하고 그것을 혼자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힘써 전파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하고 희생해도 좋을 만큼 충분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영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웃을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세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2:14,15).
②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성도들은 주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책망과 함께 영원히 버림을 받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된다(마 7:22,23; 25:41-46).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요일 2:28; 3:14,20; 4:17,18).
③ 천국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유한 성도들은 그것을 힘써 전해야 한다. 특별히 성도들은 천국 복음의 비밀을 모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사명을 지닌 천국의 서기관 된 자들이다(52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맡은바 사명을 다하여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13:44 앞의 네 비유가 천국이 어떻게 전파되고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본절의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와 다음절의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는 개인적으로 천국을 소유한 자의 기쁨과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자기들에게 계시되기까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천국을 하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로 '천국 소유의 기쁨'에 비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면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는 인간을 위해서는 어떤 절대적 선(absolute good)이 있어야 하며 또 실제로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것을 나타낸 비유로 '천국 소유을 위한 탐구'에 비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여간 진주나 보화를 발견한 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값진 보물을 분양받게 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밭에 감추인 보화. - 고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자기 재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공공 기관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재물을 소유한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땅 속에 묻어 두곤 했다. 때문에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같이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따라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큰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 하여간 당시 랍비 문헌에 의하면 일꾼이 밭에서 일하다가 보물을 발견하면 그 보물은 당연히 그 밭 주인의 소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Derrett). 그런데 본문의 일꾼은 신중하게 그 밭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 때까지 그 보화를 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혹자는 이 일꾼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법이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보화의 가치가 어떠한 경우에도 놓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 라도 얻을 만한 것임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돌아가서… 팔아…샀느니라. - 본절의 세 동사는 모두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즉각적인 행동을 한 것을 의미한다. 즉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얻기 위해서 즉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가 치룬 희생보다 그 보화가 더 이익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므로 보화를 얻었다는 점이다. 만일 보화를 발견한 자가 그 보화를 그대로 숨겨 두었다면 주인이나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았을 것이며, 맨 처음 보화를 발견한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한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고 투자할 때 비로소 큰 영적인 축복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13:45 좋은 진주. - 당시 진주는 아주 고가품으로 부자가 아니고서는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므로 본절의 진주를 구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부요한 상인일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흔히 진주가 고결한 것을 나타내는 물건으로 상징되었는데(잠 3:15) 여기서는 '진리'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장사. - 여행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도매상인'(엠포로스)을 가리킨다. 그는 앞의 비유에 나타난 일꾼과 달리 진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좋은 진주를 구하고자 했다. 세상의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곧 구도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 - '극히 값진' 이란 좋은 것 중에서도 훨씬 고급스럽고 값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진주를 구하는 사람은 자기가 목적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참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세상에서 구도의 길을 가지만 결국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의 정열을 불태운 자에게 하나님께서 최고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여럿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크고 귀중하며 인간의 구원에 유일한 통로임을 나타내 준다.
다 팔아. - '다'라는 말이 본절의 핵심이 된다. 즉 이 부자 도매상인은 상당한 재산가 이긴 하나이 좋은 진주 하나를 위해 그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이것을 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 인생과 모든 것을 팔고라도 사야할 크고 귀중한 것이다.
13:47 본절에서부터 50절까지는 천국 비유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되는 그물 비유이다. 이 비유는 24-30절에 나타난 가라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현세에서의 선악의 공존과 최후 심판 때의 양자의 분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라지 비유는 선악의 혼잡이 부지중에 되었으며 가라지 씨를 뿌린 마귀의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그물 비유는 선악의 혼잡이 예견되었으며 악을 멸하는 최후의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다. - 예수께서 본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바다는 갈릴리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각종 물고기. - 여기서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각종 물고기'는 선악 간의 모든 종류의 인종과 민족, 사회적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로,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과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그물과 같으니. - 여기서 '그물'(사게네)은 그물에 무거운 납을 달아 바다 밑 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큰 예인 망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그물은 세상에서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교회'를 상징한다. 특별히 그물이 크고 바다 밑까지 훑을 수 있는 예인 망이라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포용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한편 그물이 쳐진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에는 선인과 악인이 함께 들어오게 될 것을 예시해 준다 하겠다.
13:48 그물에 가득하매. -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다는 것은 교회의 복음 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을 판별할 일만 남은 것이다.
물가로 끌어내고. - 여기서 '물가'란 어부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장소로, 영적으로는 종말의 심판의 장소를 가리키는데, 시간적으로 볼 때 최후 심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중간기라 할 수 있다.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내어 버리느니라. - 그물을 끌어 올린 전형적인 어부들의 작업을 묘사한 것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상징한다.
13:49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여기서 '갈라내어'(아포리우신)란 말은 '~부터 끌어내다'라는 뜻으로, 완전한 격리를 내포하는 말이다. 결국 본절은 최후 심판 날에 있을 의인과 악인의 엄정한 분리를 보여준다.
13:50 거기서 …있으리라. - 42절의 반복으로서 악한 자의 운명이 서술되었다. 이러한 본절은 악인에 대한 메시야의 힘찬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13:51 이 모든 것을 깨닫았느냐. - '모든'의 헬라어 '판타'( )는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즉 '하나님 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하나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머지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는 비유 모두를 깨달았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7가지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13:52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 - 본절의 서기관은 당시 율법 학자로서의 서기관(마 5:20; 7:29; 16:21; 막 12:28; 눅 5:21; 고전 1:20)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께서 모세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 율법에 정통해 있듯이 천국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 부른 것이다.
새 것과 옛 것을…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 여기서 '새 것'은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신 '복음'을 뜻하며, '옛 것'이란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율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곳간'이란 '사람의 마음', 곧 인격을 의미한다. 결국 본절은 천국의 제자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담긴 율법과 복음을 그 마음에 소유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세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율법에만 집착하여 복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이 무시된 복음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두 가지를 간직한 곳간처럼 그것들을 겸유하고 조화시키며, 또한 적용시켜야 한다.
13:53-58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
이미 공생애 사역 초기에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바 있는(눅 4:16-30) 예수께서는 이제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잠시 돌아가셨다(53,54절).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왕적 권능을 드러내신 일들에 관한 소문을 분명히 들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마 9:31; 11:2), 도무지 불신앙적인 태도를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고 배척했다. 아마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들과 함께 지냈던 때의 육신적 모습만 계속해서 기억하면서, 이미 공생애 사역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메시야 직분과 왕적 권능 그리고 신성(神性)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 같다(54-57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인하여 고향 나사렛에서 구태여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58절).
결국 이러한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면모만 강조하는 이성주의적 태도와 예수님의 신적인 성품만 강조하는 영지주의적 태도를 다같이 배격해야 된다(요일 4:1-4).
②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를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결국 불신앙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마 11:25-27; 16:16,17; 신 29:29; 눅 10:22).
13: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 이는 예수의 어떤 행적을 매듭짓고 새로운 사건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환용 어구이다. 여기서는 천국 비유의 종결을 나타내고, 예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사건을 묘사하기 위한 전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 예수의 '고향'(파트리스)은 그가 양육을 받았던 나사렛이다(눅 4:16). 그리고 이때는 세 차례의 갈릴리 전도 사역 중 2차 전도 사역을 마치시고 고향으로 오신 때이다.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대조표' 참조. 한편 이 때부터 예수와 당시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갈등은 표면화되어 예수에 대한 교권주의자들의 반감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여기서 '저희'라는 말은 유대교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마태는 이 말을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유대교인들을 특별히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한편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 본절의 '어디서'란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권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의 지혜와 능력, 곧 진리에 대한 가르치심과 이적을 행하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지혜에 대해 진정으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의사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의심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 '목수'(테크토노스)란 건축 기술자나 목공 기술자를 가리키는 말로, 본절은 예수께서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역시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한편 헬라 원문에는 '하나'를 나타내는 정관사 '투'( )가 '목수' 앞에 붙여 있는데, 이는 나사렛에서 요셉의 집만이 목수 일을 했음을 시사한다.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의 영원 동정녀설을 주장하여 이들이 예수의 이복형제들이거나, 사촌들일 것으로 주장하나(Hammond, Lighfoot),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난 예수의 친 동생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Fertullian, Hoggesippus). 한편 이들 가운데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저자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활동했으며(행 15:13), 그 외의 형제들은 예수 승천 후 개심하여 초대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되었던 것 같다(행 1:14). 예수의 육적 가족들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그런데 나사렛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거론한 것은 예수의 출생 기원을 알지 못했으므로 예수의 육체적인 가족들, 곧 모친 마리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를 비롯해 누이를 열거하면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입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 여기서 '우리와 함께'(프로스 헤마스)란 예수의 누이동생들이 결혼하여 그들의 남편들과 함께 나사렛에 거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파사이)는 복수로서 누이들이 적어도 두 사람 이상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 문자적으로 '예수를 인하여 실족한지라'이다. 즉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육적인 배경과 신분을 너무 잘 알았던 까닭에 그의 능력과 권위를 보고 오히려 불쾌히 여기며 예수를 영접지 아니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 이 말은 격언적인 표현으로 친밀한 사이 일수록 멸시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한편 본절은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선지자와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자격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마 21:11; 신 18:15-18; 눅 24:19; 요 19:17; 행 3:22; 7: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심지어 고향 사람들에게까지 거절을 당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결국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고 죽음에 이르는 구속 사건을 예시해 주며,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나아가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막 12장 연구자료,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을 보다 참조하라.
13:58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 이 기사에 대해 마가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막 6:5)로 기록했다. 이것은 이적을 행치 않으셨다거나, 능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적을 행해 보아야 그들의 완악하고 무지한 심중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연구자료
예수의 비유(Parable)의 이해
'비유'의 원어인 헬라어 '파라볼레'( )는 '곁에', '옆에'라는 뜻의 전치사 '파라'( )와 '던지다', '두다'라는 뜻의 동사 '발로'( )가 합성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옆에 나란히 두다'라는 뜻이 된다. 이로 볼 때 '비유'란 두개의 유사성을 가진 사물 또는 사건을 병렬시켜 대조함으로써 거기에 담긴 원리 또는 교훈을 은연중에 쉽고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화자(話者)가 말하고자 하는 추상적 교훈이나 원리 또는 정보를 일상생활의 낯익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 혹은 자연 현상들을 들어 이야기함으로써 그 뜻을 좀 더 쉽고도 인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비유이다. 요약하면 비유란 한 마디로 자신이 나타내고자하는 사상과 정보 또는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와 유사성이 있는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주로 추상적 원리나 교훈을 친근한 구상적 사물이나 이야기에 빗대어 전달하고자 비유가 사용되게 된다. 본래 비유란 매우 넓은 수사학적 개념으로서 은유, 직유, 제유, 풍유(Allegory), 의인법 등 제반 수사학적 기법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사실 비유가 없다면 인간은 풍부하고 세련된 언어생활에 결정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한편 본고에서는 성격의 모든 비유법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그중에서도 특히 설화체 형식의 예수의 비유에 집중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자주 비유의 형식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전파하셨다. 때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교훈을 쉽고도 깊이 이해하도록 또 때로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곡해하려는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진리 자체를 분명히 전달하시되 말꼬리를 잡고 곡해할 여지를 주시지 않기 위해서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심지어 이런 예수의 비유의 사용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의 성취이기도 하였었다(사 6:9,10). 특히 본장은 '비유의 장'이라고까지 불리는 장으로서 천국의 전파 과정에 대한 7가지 비유를 집중 수록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 예수의 비유에 대한 주요 사항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3대 유형
① 설화 형식의 비유-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줄거리가 뚜렷이 있는 한 토막의 이야기 형식의 비유이다. 이런 형식의 비유는 사복음서에서 약 14개 정도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부자(눅 12:1,6-21),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 '달란트'(마 25:14-30), '악한 농부'(막 12:1-9) 비유 등을 들 수 있다.
② 경구 형식의 비유-심오한 영적 교훈 즉 추상적 진리들을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친근한 사물에 빗대어 일러줌으로써 듣는 사람이 쉽고도 친근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또 이를 인상 깊게 기억하도록 돕는 짧은 격언 또는 속담 형식의 비유들이다. 예를 들면 '빛과 소금의 비유'(마 5:13), '나무와 열매'(마 7:17-19), '생베 조각과 낡은 옷'(막 2:21), '돼지에게 던진 진주'(마 7:6) 비유 등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경구 형식의 비유는 구약의 잠언이나 전도서 등의 지혜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③ 단순 직유 및 은유 형식의 비유- 이는 상호 유추적 관계에 있는 두 사물을 일대 일로 단순 비교하는 형식의 비유들이다. A는 B와 같다는 식으로 A와 B의 비유 관계를 직접 나타낸 것을 직유라 하고 서로 비유 관계에 있는 A와 B를 다만 문맥에 비추어 알도록 암시하는 것으로 그친 것을 은유라 한다. 직유 형식의 예를 들면 '외식하는 자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 23:27) 등이다. 은유 형식의 예를 들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구나'(마 23:24),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등이다.
2. 예수의 비유의 이중 목적
마 13:10-17에서는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사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반면에 마 13:55에서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두 말은 표면적으로는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비유 그 자체에 이중적인 속성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이처럼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두 목적이 비유에 의하여 동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될 것이다. 즉 비유는 앞서 말한 대로 추상적인 진리나 인생의 원리 또는 특정한 정보나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유사성을 가진 사물 또는 이야기에 빗대어 전하는 것이 그 본형이다. 따라서 이제 주님의 도래로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했으며 또 그 사역과 선포가 증명하는 대로 그가 우리의 메시야이시다 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고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유대 민족적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 교회 오류에 빠져서 무조건적이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 앞에서 어떤 말씀을 전파하실 때 주님은 진리는 진리대로 말씀하시면서도 직접적인 반발이나 말꼬리를 잡지 못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시었다. 또 반대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무지한 군중이 쉽게 진리를 알아듣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도 이런 목적에 부합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따라서 심지어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주의자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여 대적자들에게는 혼란을, 제자들에게는 더 깊은 깨달음을 주셨던 것이다.
3. 예수의 비유 해석의 주의사항
비유에 있어서는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의 줄거리 또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하여 동원된 비교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진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의 비유의 경우 단순한 직유 및 은유 형식이나 경구 형식의 비유 등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주로 본장 등의 비유와 같은 설화체 형식의 비유에 있어서 문제가 자주 발생하는바 이제 이를 중심으로 그 해석상의 주의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학적 배경과의 관련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① 역사적 및 문학적 배경과의 관련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먼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동기 또는 목적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유 내용에 나타난 당시의 팔레스틴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유가 주어진 전후 문맥, 다른 비유들과의 비교, 예수의 직접적 해석 등이 참고 자료로 활용되어야만 각 비유의 참 의도에 접근할 수 있다.
② 각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비유의 일부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품이 고결한 사람을 일컬어 '그 사람은 학과 같다'라고 비유할 수 있다. 이 때 화자와 청자 사이에는 이런 표현은 문학적 수사로서 그의 인품이 학이 주는 이미지처럼 고결하다는 것만을 말한 것이지 그 사람이 곧 학이어서 음식도 생선을 먹으며 잠도 나무 위에서 자는 것까지 말한 것은 아니다 라는 언어 관습적 공동인식이 있다.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비유의 표면적 표현에만 집착하면서 비유의 의미를 무제한 확대 적용하는 것은 비유의 오류이다. 예수님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비유한 것과 외식하는 자를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셨을 때 그 의미의 적용 범위는 그 비유의 표현과 그 표현이 지시하는 실체 사이의 관계 안에서 적절히 제한되어야 한다.
한편 예수의 설화체 비유 중 씨뿌리는 자의 비유 등과 같은 일부 경우는 비유 전체의 표면적 내용 하나 하나가 다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비유를 구성하기 위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할 뿐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구성하는 모든 내용 하나하나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신학적 주제를 굳이 찾아내려고 하면 소위 알레고리(Allegory, 풍유)적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비유는 무엇인가 더 신비한 내용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비유 내용 하나 하나에 무리한 해석을 가하는 경우가 초대 교회 일부 교부(敎父) 및 성경을 기준 없이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자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태운 나귀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는 자들은 비단 비유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사건을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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