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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바울의 인사말과 본서 기록 목적 및 이방인의 죄와 타락상
구속사적 개관
성경 전체는 본질적으로 구원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대상(對象) 인 죄인된 인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그리고 죄인의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진리에 담긴 원리(原理)의 각 측면과 이러한 원리에 따라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의 각 측면을 직 ․ 간접으로 계시 증언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 저자와 기록 배경 또한 문학 장르에 있어서 도저히 획일화시킬 수 없는 다양성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진리와 사상은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연속성과 통일성의 맥을 도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대할 때 그 각 부분 자체로도 세밀히 이해해야 하는 동시에 이상의 성경 전체의 진리와도 연결시켜 거시적 관점에서의 이해와 확인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신약 서신서는 신 ․ 구약 성경 66권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의 구속 구원의 원리와 이의 성도의 현실 생활에의 실천적 적용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로마서는 당시 로마 제국 도처에서 이방 선교 사역에 몰두하던 바울 자신이 친히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로마 성도에게 참 구원의 원리를 미리 편지로 설명하고자 기록한 것으로서 구원의 주체로서의 하나님,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고 주의 구속 사역의 공로가 성도에게 적용되기 위한 유일 절대의 전제인 성도의 믿음과 이를 통해 법적으로 의인의 신분을 얻음으로 결국 구원을 얻는 소위 기독교 구원론(救援論) 전반의 원리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들의 실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실천적 교훈들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책이다.
이러한 로마서의 전반부인 제 1-8장은 도입부와 함께 기독교 구원론 전반의 원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그 내용을 보다 상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본서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1:1-17에서는 서신서의 전형적인 머리말 양식에 따른 인사말과 본서의 핵심 주제인 이신득의 복음의 기원과 핵심 내용 및 복음의 능력과 효과를 일종의 서론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어 1:18-3:20에서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절대 필요로 하게 되는 근본 원인으로서 인간의 전적 타락(whole depravity)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그리고 스스로의 선한 행위로는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얻을 수 없다는 인간의 전적 무능(whole inability)에 대해 설파한다. 3:21-5:21에서는 이신득의의 원리와 이신득의의 진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즉 이신득의의 기초가 되는 대표와 연합의 원리, 그리고 이신득의의 결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신득의의 원리에 대해서는 롬 3장의 연구 자료를 그리고 대표와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롬 5장의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에 제 6-8장에서는 이신득의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닮아 의롭게 되는 길, 즉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해 설파하면서 죄와 싸워야 할 것, 죄의 법에서 벗어나야 할 것, 고난을 극복할 것에 대한 권면과 하나님의 양자(養子)로서 얻을 천국에서의 궁극적인 승리의 소망을 가질 것에 대해 교훈한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전반부 1-17절은 본서의 도입부로서 발신자인 그리스도의 종된 이방인의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간략한 소개 와 수신자인 로마 교인들에 대한 문안 인사말(1-7절)과 바울 자신이 수차례 로마 교회를 방문하여 전하고자 했던 바이며, 또 현재 본서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바는 곧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주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Gospel)임을 밝히고 있다(8-17절).
그리고 후반부 18-32절은 넓게는 1:18-8:39까지 이신득의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기록한 본서 본론 전반부의 개시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1:18-3:20까지 이신득의의 필요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전도 여행을 다니는 동안 직접 목격하였던 이방인들의 수많은 범죄의 실태를 기록하면서 그러한 범죄의 궁극적인 원인인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이신득의 진리가 절대 필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먼저 전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즉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인간 심판의 절대 권한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바로 인간 구원의 주체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 구원은 절대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9:16). 또한 복음의 능력이 모든 믿는 자에게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구원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이 다 거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기회를 가졌음을 보여 준다(엡 2:8,9). 이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또 그렇게 가슴 벅찬 감격으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무런 이유나 조건도 없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법을 성취하게 하시고 또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그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 얻게 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에 새삼 감격하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후반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우리는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이방 세계의 죄와 타락상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타락상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2:17-29의 내용과 함께 전 인류의 전적 타락(whole depravity)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인간이 사는 사회이면 어디서든지 예외 없이 발견되는 온갖 죄악상들은 결국 인간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原罪)로 말미암아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3:23).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범죄는 최초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된 선악과 언약의 법, 곧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행할 때는 영생의 축복을 어길 때는 영벌의 심판을 주시리라 하신 행위 언약의 법에 따라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되었다(창 2:16,17). 그러므로 전적으로 부패한 전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구원의 절대 필요성을 심각하게 인식케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이와 같이 전적 부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게 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아울러 결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형편을 깨닫고 더욱 겸비하는 신앙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외울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인사말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 교회에 대한 감사와 방문하려는 이유
8 ○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의 종교적 죄
18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방인의 도덕적 죄
26 ○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1:1-7 로마서의 집필 장소인 고린도의 위치
주요 주제-1:1-7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
고후 11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 연구-1:1 택정함을 입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리스메노스'( )는 '아포리조'의 과거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아포리조’는 ‘~로부터’라는 뜻의 접두어 '아포'( )와 '호리조'가 복합된 단어이다. 원래 ‘호리조’는 ‘제한하다’, 또는 ‘경계를 짓다’라는 뜻이다. 이 ‘수평선’에 해당하는 영어 'horizon'이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호리조'는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세우다’, 또는 ‘결정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고대 헬라어 문헌들에서는 ‘신들이 법률을 정하거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다’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포리조’는 문자적으로는 ‘~로부터 갈라내다’(마 13:49), 또는 ‘~로부터 구별하다’가 된다. 여기서 ‘선택하다’ 또는 ‘결정하다’ 등과 같은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이것의 과거 수동태 분사형인 ‘아포리스메노스’는 ‘선택함을 받은 자’가 된다. 이는 ‘어떤 일을 위하여 따로 세움 받은 자’, 또는 ‘어떤 것과 구별되어 분리된 자’란 의미를 가진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세우셨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다(행 13:2; 갈 1:15). 또한 이는 한편으로 바울이 이와 같은 투철한 소명의식(召命意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히 모든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투철한 소명 의식은 현재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도 반드시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도표-1:2, 복음의 7대 성격
1.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 계시임(롬 16:25)
2.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신적 기원을 지님(살후 2:13,14)
3.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갈 1:11,12)
4. 복음은 성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롬 1:16,17)
5. 복음은 모든 죄인에게 구원을 주는 참 진리임(갈 2:5,14)
6. 복음은 절대 불변하는 것임(갈 1:7)
7. 복음은 영원히 있는 것임(벧전 1:25)
보감-1:14 성도가 영적으로 빚진 것
1.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은 것(1:14)
2.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 받은 것(4:1-8)
3.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8:12,13)
4. 다른 성도들의 사랑을 받은 것(13:8)
5. 다른 성도들의 도움을 받은 것(15:26,27)
보감-1:14,15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할 이유
1. 주님의 지상 대명이기 때문에(마 28:19,20)
2.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천국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에(마 24:14)
3.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온 세상에 알림이 하나님 뜻이므로(엡 3:8-11)
4. 복음을 전파해야만 악인들이 심판 날 핑계치 못하므로(롬 10:15-18)
5.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 중의 하나가 복음 전파이므로(행 16:10)
6. 먼저 복음을 받은 자로서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롬 1:14,15)
7. 복음 전파가 또 자신을 복음 위에 굳게 서게 할 것이기 때문에(고전 15:1)
8. 복음을 전파하는 자에게 큰 복을 주시기 때문에(딤후 4:7,8)
9.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에(고전 9:16)
10. 심판의 날이 너무 급박하기 때문에(빌 4:5; 히 10:37)
주요 주제-1:17 이신득의 이해
롬 3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1:16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열정
1.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함(행 16:10)
2. 복음 전도 사명 수행을 위해 어떤 환난도 겁내지 않음(행 20:23,24)
3. 복음 전파를 위해 당하는 모든 고난을 유익한 것으로 여김(빌 1:12,21)
4.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결단코 부끄러워하지 않음(롬 1:16)
5.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감(롬 15:19)
6. 복음의 불모지를 우선하여 전하기에 힘씀(롬 15:20)
7.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할 때에는 서신으로도 복음을 전함(고전 4:14,15)
8.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짓는 일로 생각함(고전 9:16)
9. 복음 전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행함(고전 9:23)
10.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음(행 20:24)
도표-1:19,20 일반 계시의 가치
일반 계시는 인간 구원과 관련된 진리를 보여 주는 특별계시와 달리 자연 법칙, 인간 이성, 역사 등과 같은 일반적 방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일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천지 창조에 기초한 것으로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구원 행동을 하실 필요가 없었을 때부터 주어졌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연이나 인간 이성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느끼게 하고(행 17:28), 하나님을 탐구케 하며(행 17:27). 비록 훼손되었으나 자연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믿게 하며(19,20절), 사회의 질서를 유지케 한다는 가치를 지닌다(2:14). 이 일반 계시를 통해서도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그분의 기본적 의지를 알 수 있는 바, 성경의 진리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를 거스린 자는 일반 계시에 의해서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1. 이방세계
1)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느끼게 함(행 17:28)
2) 하나님에 대해 탐구하게 함(행 17:27)
3) 자연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게 함(롬 1:19,20)
4) 본성으로 양심의 법을 따르게 함으로 사회 질서를 지탱케 함(롬 2:14)
2. 기독교
1) 일반 계시의 이해를 통해 특별 계시의 가치를 더욱 깨달음
2) 비 기독교인에게 전도할 수 있는 영역을 얻음
3) 기독교의 교리들을 이해케 하는 매개체 역할함
보감-1:16, 복음의 7대 유익
1. 화평(행 10:36) 5. 사랑(빌 1:16)
2. 믿음(행 15:7) 6. 소망(골 1:23)
3. 생명(고전 4:15) 7. 썩지 아니할 것(딤후 1:10)
4. 구원(엡 1:13)
도표-1:18-32 타락한 인간의 10가지 죄악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 복음의 교리를 제시하기에 앞서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 죄악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므로 필연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필요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음(21절)
2. 허망한 생각을 품음(21절)
3. 미련한 마음으로 행함(21절)
4. 스스로 지혜있다 함(22절)
5.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꿈(23절)
6. 마음의 정욕대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함(24절)
7.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25절)
8. 순결한 성(性)을 그릇되이 더럽힘(26,27절)
9. 온갖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함(28-31절)
10. 합당치 않은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함(32절)
1:1-7 인사말
본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방법인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기록한 것이다. 당시 로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소수의 유대인과 그 밖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는 아마도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예루살렘에 왔던 로마 거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복음을 듣고 회심한 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행 2:10; 28:15). 그런데 이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유대인 성도 중에는 잘못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본 서신을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그의 방문에 앞서 로마 교회에 먼저 보내게 된 것이다.
한편 본 단락은 서신서의 전형적인 서두 형식으로(고전 1:1-3; 엡 1:1,2), 수신자에 대하여 송신자인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며 그들에게 문안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 그 내용에는 복음에 관한 깊이 있는 해설과 신약과 구약과의 연결점 및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신비와 더불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구원의 원리가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1절). 이는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된 자이며, 또 그의 사도권과 전하는 복음이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구원의 진리 곧 복음은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어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4절). 따라서 이 부분은 복음의 내용을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바울은 이상(以上)과 관련하여 자신이 사도 직분을 받은 것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5-7절). 즉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순종케 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 받은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는데(고전 15:10),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반열에 참예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믿으며 이를 감사해야 한다(롬 3:24; 엡 2:8,9). ②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도임을 확신하였고 또 복음 전파에 대한 헌신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빌 1:7,8).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 해 헌신하는 신실한 복음 전파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25:21; 계 2:10).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 헬라어 성경 원문에는 송신자인 '바울'이라는 이름이 맨 앞에 등장하고 이어 바울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여기서 '바울'(파울로스)이란 이름은 '작은'(little)이라는 뜻의 라틴어 'paulus'를 음역한 것으로 당시 헬라와 로마의 문화권 속에서 살던 유대인이 흔히 그렇듯이 유대 이름 외에 덧붙여진 이방 이름이었다. 즉 바울에게도 원래 '(여호와께) 구하다'란 뜻이 있는 히브리식의 '사울'이란 이름이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그리스도를 믿으며 이방인 사도로 활동하면서 이방식의 이름을 사용케 된 것이다. 행 13:9 주석 참조. 한편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의 공식적인 칭호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반영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형태로도 쓰였다. 또한 '종'(둘로스)이란 당시 헬라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노예'(slave)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인식한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① 당시의 사회적 인식과 같은 '비천함'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행 11:26)이라고 호칭했는데, 이것은 교회 구성원들이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신 자들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즉 이 호칭은 당시 노예들이 주인의 이름으로 불린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이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노예라는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이것이 교회 전반에 일반화되어 있었기에 바울도 이러한 보편적 그리스도인의 사고에 따라 자신의 신분을 소개한 듯하다(빌 1:1; 약 1:1; 벧후 1:1; 유 1:1). ② 구약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사용된 '하나님의 종'(에베드 야훼, 수 1:2; 삼하 7:5; 시 89:3; 렘 7:25; 단 9:6; 암 3:7)의 전통을 잇는 영광스러운 성격의 호칭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위임 받은 사역을 감당하는 청지기로 인식하고 이러한 신분을 자랑스럽게 본서의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던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말 자체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 단어 앞에 '부름 받은'이란 뜻을 지닌 '클레토스'(를)라는 형용사가 첨부되어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해 부르셔서 복음의 사역자로 보냄 받은 자라는 의미가 보다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란 직분이 폭넓게 사용된 예도 있지만(행 14:4,14; 고전 15:7; 갈 1:19), 여기서는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라는 전문 용어(요 20:24 주석)와 상응하는 좁은 의미의 제자임이 틀림없다(고전 15:8,9). 이에 대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참조하라. 한편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사도권이 문제가 되었던 고린도나 갈라디아 교회들(고전 1:1; 고후 1:1; 갈 1 :1) 이외에 다른 교회들에 보낸 서신에는(빌 1:1; 살전 1:1) 자신의 사도됨을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보통인데, 로마 교회에 보낸 서신에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① 로마 교회 교인들과는 직접적인 복음의 교제가 없었고, ② 그가 계속할 사도의 직분 이행(이방 선교)이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3절; 롬 15:22-24 주석 참조). 이러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는 고전 9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바울이 사도가 된 목적이 개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란 사실과 아울러 바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라는 직분의 엄정성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란 표현을 통해 복음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내용의 복음이 신적 기원을 가짐을 규명한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택정함을 입었으니'에 해당하는 '아포리스메노스'( )는 '경계를 그어 나누다'라는 뜻의 '호리조'( )와 '~으로부터'라는 뜻의 '아포'( )의 합성어인 '아포리조'(엄격하게 구별되다)의 과거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이는 바울의 사도직이 당시 다른 복음 전파자가 갖지 못한 엄격한 하나님의 선택에서 비롯됨을 보여 준다.
1:2 이 복음은. - 개역 성경에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에 나타나는 관계대명사 '호'( )는 1절의 '하나님의 복음'을 받는 것이 분명하므로, 개역 성경은 원문에는 없는 '복음'이란 말을 이 부분에 첨가시키고 있다. 이제 4절까지 바울은 이 복음에 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여기서 '성경'(그라페 하기오스), 즉 '거룩한 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표현은 구약이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 쓰여진 것은 분명하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그에 대한 기록임을 보여 준다. 그렇게 볼 때 여기서 '선지자'란 좁은 의미의 특정한 어떤 선지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폭넓게 구약 저자들 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언급할 때 옛날에 이미 예언된 것으로서 그것이 한 점의 어그러짐도 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Vincent).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구원 사역은 우연이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바울은 본서에서 중요한 논증을 함에 있어서 구약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다(롬 3,4장,9-11장).
1:3 이 아들로 말하면. - 물론 이하의 내용에서 예수께서 육신을 입은 인간임을 보여 주고 있으나 여기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전제하여 복음의 진리를 설파한다. 이에 대해서는 4절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육신으로는. - '영'(프뉴마)과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육신'(사륵스)이란 용어는 바울에게 있어서 버려야만 할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롬 8:4,5,12). 하지만 본절에서 이 표현은 '인성(人性) 자체' 즉 '신체적인 육신'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롬 9:5, Cranfield). 바울의 통상적 용법에서 벗어난 이러한 '사륵스'의 사용으로 어떤 학자들은 3-5절이 고전 15장의 복음에 관한 설명과 마찬가지로 당시 교회의 공식적인 문구를 바울이 단순히 인용하여 사용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보여 주는 표현이 초대 교회의 설교와 신앙 고백의 한 요소였던 것은 분명하지만(막 10:47,48; 12:35-37, Bruce) 그렇다고 3-5절이 바울의 사상과는 관련 없는 비 바울(non-Pauline)인 것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바울 역시 성경의 주요 교리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사실은 '나단의 신탁'(The oracle of Natan, 삼하 7:5-16)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전통적인 견해였다(막 11:10; 행 2:30). 한편 '혈통'(스페르마)이라는 표현이 통상 부계(父系)의 혈통을 의미하기에 처녀 탄생에 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바울이 여기서도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는 요셉의 직접적인 아들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가 있다(Meyer). 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그러한 사실을 말하려 함에 있지 않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적인 가계에서 탄생하시게 된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셨고'에 해당하는 '게노메누'( )는 '기노마이'( )의 부정과거 중간태 분사로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상황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요 1:14, Wuest). 즉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나 다윗의 혈통을 취하여 인간이 되심으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하나님의 인간됨이란 새로운 상태를 일으키신 것이다.
1:4 성결의 영으로는. - 3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관련하여 언급한 데 이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결의 영'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성경에서 성령을 '성결의 영', 즉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라고 표현한 다른 예가 없긴 하지만(Vincent), 3절의 '카타 사르카'( ) 즉 '육신으로는'이란 표현과 명백히 대조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성령으로는'이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Bruce, Hendriksen). 따라서 바울이 성령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기오스'( )를 사용하지 않고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관용 표현(구체적으로 표현하는)을 헬라어로 옮긴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Bruce). 한편 두 번째 견해는 '성결'이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절대적으로 거룩하며 정결한 영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것이 본문의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Johnson), 즉 바울이 그리스도의 육체를 설명한 데 이어 인간의 영보다 훨씬 월등한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묘사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Meyer, John). 바울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육과 영의 두 측면을 함에 명기하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비하(incarnation)와 승귀(exactlion)로 대표되는 그의 인성과 신성을 둘 다 명확히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Manson, Smeaton).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 그리스도의 신성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결의 영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구절의 언급과 같이 죽음을 극복했다는 점으로 거듭 증명되고 있다. 한편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죽은 자들의 부활로부터'로서, 복수형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 이외의 여타 부활 사건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미래의 부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언급된 것이며(Bruce), 또한 이 표현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한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특성을 암시하기도 한다(행 26:23). 즉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부활 속에는 모든 성도들의 미래적 부활이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Vincent).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능력으로'라는 부사구가 '인정 되셨으니'에 걸리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부사구는 오히려 앞서 언급된 '부활하여'에 붙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능력으로', 즉 '엔뒤나메이'( )를 '능력 있는'으로 이해하여 본문을 예수께서 부활과 승귀로 말미암아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Cranfield, Nygren). 하지만 '엔 뒤나메이'가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아니라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적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음을 묘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완전한 형식의 공식적 칭호로서(1절 주석 참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및 그의 사역과 결과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 즉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인성을 가진 '예수',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묘사하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역의 결과 모든 인간과 우주의 주관자가 되셨다는 의미의 칭호인 '주'를 모두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위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의 표현은 다른 사도들을 포함한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Harrison, Barmby). 그러나 지금까지 바울 사도 개인에 국한되어 문장이 전개되었고(1절) 이어지는 내용도 바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직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면 그 대상의 범위를 다른 사도에게까지 넓히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완곡어법적 표현이거나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던 무리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Wuest, Lenski, Barmby).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 본절에 나오는 '은혜'와 '사도'라는 두 명사는 접속사 '카이'( )로 연결되는데, 각각 다른 의미로 보는 것보다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두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Bruce). 왜냐하면 여기서 '카이'는 '와'란 의미보다는 '즉'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자신이 구원 받게된 은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그의 소명(calling)에 관한 독특한 견해이다. 즉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롬 15:15,16 주석 참조.
그 이름을 위하여. - 여기서 '그 이름'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이나 동양인들의 사고에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이방인 중에서. - 사도 바울의 소명의 특징은 바로 이방인들을 위함에 있었다
(행 9:15; 갈 2:8,9).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믿어 순종케 되는 것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테오스'( )가 소유격으로 쓰여졌는데 그 소유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견해가 가능하다. 즉 ①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믿음의 순종으로서'라는 뜻(Benny, Vincent), ② 목적 소유격으로 '믿음으로부터 생겨난 순종'이라는 뜻(Robertson, Calvin)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적인 요소로 그 선후(先後)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힘드나 다만 논리적으로 믿음이 순종에 앞선다고 본다면 후자가 보다 바람직한 해석이다.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 로마 교회가 이방 세계에 위치한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거의 이방인들일 것이라는 암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본서 서론 참조. 또한 이 표현은 로마 교회 교인들과 바울이 직접적 교제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바울이 사도가 되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Barmby).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이 '부르심'은 1절에 나타나는 사도나 복음 전파자의 직분으로의 부르심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구원의 초청을 뜻한다. 롬 8:28,30 주석 참조.
1:7 로마에 있어. - 6절의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를 더욱 부연하여 구체적인 지명을 들어 언급한다. 헬라 사회의 일반적인 서신의 구조상 서론 부분에서 '수신자'를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엘네리안 사본( )과 몇 소문자 사본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기에 본서가 로마라는 특정 지역이 아닌 여러 교회에 회람용으로 보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에브라임 사본), 베자사본(D) 등의 대다수 유력한 사본들에는 이 문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본서가 로마에 보내진 것이 틀림없다. 다만 로마에 보내진 본서가 후에 서기관들에 의해 복사되어 다른 교회에서 사용될 때에 이 구절이 빠뜨려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회람용 서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서론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 본래 '성도'(하기오스)란 구약 히브리어의 '카다쉬'( )에 상응하는 용어로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가리킨 것같이 신약에서도 대부분 유대인 신자들이 특징적으로 사용한 칭호(아마도 자칭호인 듯함, Bruce)로 사용되었다(신 33:3; 단 7:22,27; 롬 15:25; 엡 2:19). 하지만 바울은 이 용어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적용하였으며 베드로의 증언에서도 이 용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됨을 알 수 있다(벧전 2:9).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나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는 벵겔(Bengel)과 같이 각각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Barmby). 이 표현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증언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역시 헬라의 편지체의 '문안' 부분에 해당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헬라 편지체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카이레인'(기뻐하다)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발음의 '카리스'( ), 즉 '은혜'란 표현을 사용하여 기독교적인 것으로 채색하고 있다는 것이다(Bruce). 즉 그는 히브리인의 인사법인 '평강'(솰롬)을 첨부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공로 없이 주시는 은총으로 인사함으로써 독특한 기독교적 인사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인사는 바울 서신 전편에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딤전 1:2과 딤후 1:2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예외라면 예외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은혜와 평강의 원인으로서 성부와 성자가 거론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은 모든 진정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성도를 이러한 은혜와 평강으로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 묘사되는 점(8:15 주석 참조)과 예수의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형태로 나타나는 점(4절 주석 참조)이 특징적이다.
1:8-17 본서 집필 동기와 본서를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이신득의의 원리 제시
본 단락은 바울 자신의 소개와 인사말이 기록된 앞 단락과 더불어 로마서 전체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본 단락은 먼저 바울이 로마 교회를 직접 방문하지 못하고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며(8-15절) 또한 이어서 로마 교회에 전하려고 하는 본 서신의 근본 주제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임을 밝힌다(16,17절). 그리고 본 단락 이후에는 본 단락에서 밝힌 이신득의 원리 에 대한 보다 자세하고 체계적인 설명과(1:18-8:39) 이스라엘 역사에서 발견되는 이신득의 원리의 실례 및 이신득의 원리에 입각하여 앞으로 전개될 구속사의 전망과(9: 1-11:36) 또한 이신득의 원리를 깨달은 자가 실생활 가운데서 실천해야 할 덕목을 제시하는(12:1-15:13) 본서의 본론부가 계속된다.
이처럼 본서 도입부와 본론부를 연결하는 본문 가운데 그 전반부(8-15절)는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본 서신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복음의 씨가 떨어져 싹을 띄우며 성장 과정에 있는 로마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돈독한 교제를 가지며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위하여 기도했지만 길이 막히어 로마로 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편지로써 복음의 원리를 전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행로를 막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가 가득 담긴 로마서와 같은 위대한 서신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후대 모든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6,17절은 본서의 주제인 이신득의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데,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는 구원의 진리이다. 롬 3장 연구자료, '이신득의의 이해' 참조. 즉 이것은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희생 제물이 되신 어린 양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임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속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인 은혜로써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죄로 인해 도저히 의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다 칭함 받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본문(16,17절)은 본서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즉 이를 통해서 본서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인 믿음, 칭의, 구원 등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교리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서를 가리켜 '성경 중의 성경', 또는 '성경 속의 진주'라고 칭하고 있음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한 구성원인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곧 로마 교인들의 신앙처럼 우리의 신앙도 영적 이방인에게까지 좋은 본을 보이는 성숙함을 가져야 하며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성도 간에 서로 안위와 감사를 나누기 원해야 한다(딤전 4:12; 딛 2:7; 약 5:10).
②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먼저 듣고 그 은혜를 누린 자들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부담감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에서 담대한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마 24:14; 막 16:15).
③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귀한 구원의 진수를 얻게 된다. 이렇듯 은혜로운 구원의 방법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니 이 얼마나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인가(롬 5:15; 11:6; 딛 2:11; 3:7)!
1:8 첫째는. - 이 표현을 일의 순서를 언급하는 서수(序數)로 보아서 '둘째'는 비록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10절의 기도하는 것이라고 보거나(Godet). 바울이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둘째, 셋째를 순서대로 나열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Wuest). 하지만 이 표현은 '우선적으로' 혹은 '무엇보다도'(Zahn)라고 번역될 수 있다(현대어성경, 현대인의 성경, 새번역, 공동번역).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부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구원의 은혜가 전달되는 일에도 예수께서 중보자 이셨듯이(5절) 성도들의 감사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과정에서도 그리스도는 중보자가 되신다(엡 2:18).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7절에 묘사된 '우리 아버지'와 단순 구분된다. 아마 이러한 상이점 때문에 베자, 보엘네리안 사본 등에서는 '인하여' 대신 '위하여'(휘페르)라는 독법(讀法)을 취한 듯하다. 그러나 시내, 알렉산드리아, 바티칸 사본 등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인하여'(페리)로 나와 있다. 만약 이를 '위하여'로 본다면 '바울이 자신의 하나님께 로마인을 대신하여 감사드린다'가 되지만, 본문은 로마 교인들의 신앙이 널리 전파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과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단지 9절과 같이 개인 신앙 고백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기교일 뿐이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이다. 즉 바울은 본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아직 사도나 다른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을 직접 전해 듣지도 않은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 로마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전파되어 화제가 될 정도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예루살렘에 왔던 로마 거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변화 받고 돌아가 세웠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본서 서론 특별자료 '로마 시와 로마 교회' 참조. 한편 여기서 '온 세상'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땅을 가리키는 과장법적 표현이다.
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 원문에는 '복음'이란 말과 '심령'이란 말 앞에 '엔'( ) 전치사 두 개가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방법을 지적해 준다. 즉 그것은 먼저(원문의 순서상) 영적(spiritual)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인 말씀, 즉 '진리'(truth)에 근거하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수가 성 여인과 대화하시던 예수께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 NIV) 예배하라고 가르치신(요 4:24)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사도 바울이 승천하시기 이전의 예수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자료를 많이 접했을 것이라는 좋은 증거를 제공해 준다(행 20:35).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여건에 구애됨이 없이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 원문에서는 이 문장이 본절의 문두(文頭)에 위치해 강조되었다. 한편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스'( )는 '직접 보거나 들은 사실을 단정적으로 증거해 줄 수 있는 자'라는 뜻으로 영어의 '순교자'(martyr)가 이 단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아 생명의 희생까지도 감수하며 증언대에 서는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러한 책임 있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적용하며 의인법적(anthropomorphic) 표현을 사용하는 바울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최상의 증인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거짓이 없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아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후 떠난 교회를 위하여 수시로 기도한다는 사실을 각 서신의 초두에 늘 밝히고 있다(고전 1:4; 엡 1:16; 빌 1:3,4;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1; 몬 1:4). 하지만 본절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기도의 특출함은 로마 교회 교인들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으로 구원 얻지 않았음에도 계속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한편 '쉬지 않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알레이프토스'( )는 '중단 없이'(without ceasing), '계속해서'(constantly)라는 뜻으로 살후 1:2; 5:17에 특징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살후 5:17 주석을 참조하라. 이렇게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 관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바울은 여러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기도의 목록을 가지고(Robertson) 정해진 시간에 늘 기도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행 16:13,16).
1:10 어떠하든지 이제. - 13절의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이라는 표현과 연결해서 이 구절을 생각하면 로마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가운데는 그러한 열망은 있었지만 지금껏 가지 못한 여러 가지 사정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도 반영되어 있다(롬 15:22).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행(行)이 자신 스스로의 계획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깊은 신앙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재 그의 중요한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롬 15:32). 한편 '좋은 길 얻기를'에 해당하는 '유오도데소마이'( )는 '여행을 잘하다'라는 뜻의(Godet) '유오도오'( ) 동사의 미래형이나 여기서는 여행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일들이 잘 풀려 나간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쓰였다(요삼 1:2, Barmby). 실제로 바울이 원했던 로마로의 여행은 '좋은 길'이 아니라 오히려 '좁은 길'로서 바울에게 열렸는데, 그것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육체적으로는 매우 힘든 길이었다(행 27:1-28:15).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섭리적 행위는 반드시 인간적인 시각의 좋고 나쁨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 '심히 원한다'는 표현을 통해 로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무슨 영적인 은사를. - '무슨'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 )란 로마 교인들이 아직 모르는 미지의 그 무엇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어떤'(새성경, 새번역)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무방하다. 한편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카리스)로 인해 주어진 선물이란 뜻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① 이방인에 대해 복음을 전해 주는 은혜, 즉 구원(Harrison), ② 사도의 안수로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 은사(행 8:17,18, Bengel)라는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은혜(롬 11:29)와 더불어 초대 교회 시대 사도들을 통해 주어졌던 특별한 이적적인 은혜(고전 12:9,10)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 '나눠 주다'와 '견고케 하다' 등의 표현은 바울이 모든 것의 시행자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견고케 하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리크데나이'( )는 수동태형으로, 이것은 견고하게 하는 주체가 하나님임을 지적하는 것이다(Godot), 그리고 '나눠 주어'라는 표현도 뉘앙스가 마치 바울이 은사의 수여자(giver)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도'( )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다' (share with someone)라는 뜻이므로 역시 은사를 주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1: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 개역 성경이 '이는 곧'이라고 번역하는 문두의 '투토 데'( )는 '그러나 이것은'이 그 직역으로서 11절에서 말한 내용과 다소 상반되는 내용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이 앞절에서는 다소 권위적으로 사도적인 가르침(apostolic teaching)을 언급했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자의 참 교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한 적은 없지만 바울과 로마 교인들은 '동일한 믿음'을 가진 형제라는 사실이 강조되며 상호 간에 필요한 은혜의 나눔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피차 안위함'이란 바울의 신앙이 로마 교인들에게 신앙의 견고함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인들의 견고한 신앙이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됨을 보여 주고 있다.
1:13 형제들아. - 전절에서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믿음'에 근거해서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다. 초대 교회에서 이 호칭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자들에 대하여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독특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신 자녀들로서(롬 8:15)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성도라면 누구나 성도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 본장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10,11절; 롬 15:22-24,32) 복음 전도자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다.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 이중부정으로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일반적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는 '너희가 알기를 심히 원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형식의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롬 11:25; 고전 10:1; 살전 4:13). 이 표현 속엔 로마를 방문하려 하는 바울의 소망과 열정이 다시 한 번 잘 드러나고 있다.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 '열매'(카르포스)가 무엇인가에 따라 바울의 로마행의 구체적 목적이 드러난다. 열매란 복음의 전파를 통한 구원의 결실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적인 성숙(갈 5:22,23)을 뜻할 수도 있다. 아마도 본절에서는 양자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곳에 교회가 있었지만 바울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아울러 기존의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행 28:30,31). 한편 '맺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 )는 '소유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코'( )의 가정법으로 '열매를 모아 들인다'(gathering)는 의미를 나타낸다(hurray).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하여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기대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선교 헌금을 '열매'라고 표현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러한 추정은 지나친 감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끝인사 무렵에나 하고 있으며 본서의 주된 논지는 아니기 때문이다(롬 15:23,24).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 롬 15:19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가 수평선 너머로 보일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일루리곤에까지 갔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로마에 가지 못했던 것은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지중해 북동부 지역의 선교적 결산(롬 15:25-28)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살전 2:18을 보면 그 원인이 사탄의 방해로 나와 있는데 이는 자신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들에 사탄이 틈을 타 일으켜 놓은 산적해 있던 문제들(대표적인 예로 고린도 교회를 들 수 있으며 교회 분열과 성적 부도덕, 우상 숭배 문제 등이 있었음) 때문에 그가 로마로 갈 수 없었으며, 이제 이 문제들이 거의 해결되었기에 로마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 표면적으로는 네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실은 당시 헬라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혈통적 헬라인이나 헬라 언어를 일상용어로 구사하던 자 뿐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헬라 문화를 수납한 자들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당시 문명 세계에서 생활하는 자들은 헬라인 혹은 지혜 있는 자들이라 통칭하였다. 그리고 헬라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든 자들은 '야만인들'(바르바로이)로 취급되었으며 또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웠다. 어쨌든 바울의 이 표현은 당시의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다 내가 빚진 자라. -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는 '채무 혹은 어떤 의무에 얽매인 사람'이란 뜻으로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야 할 성격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의무를 행해야할 자를 가리킨다(Wuest).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중에도(마 6:12) '죄'를 '빚진 자'와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는 '오페일레마'( )라고 표현하는데, 그것도 바로 단번에 갚으면 끝나는 경제적 의미의 빚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청산이 불가능한 갚지 못할 부채라는 관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철저한 사명감과 더불어, 죄의 문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진 겸손함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원과 결부해 받은 사도의 사명으로 모든 이방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철저한 자기 인식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비록 바울이 로마 교회를 개척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들도 이방인들로서 바울의 전도 대상임을 지적한다. 그렇다고 하여 바울은 로마에 가서 다른 지역에서 전도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오래 거주하며 체계적으로 사역할 계획은 없었다. 바울의 계획은 잠깐 로마에 머물며 교제 하다가 서바나로 갈 생각이었다(롬 15:23,24). 따라서 바울은 본서에서 그의 여타 서신에서도 볼 수 없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관련된 긴 구원론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 로마 교인들에 대한 구원의 확인이요 오래 머물지 못할 로마 교회 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이어서 다음 절에 본서의 주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의 요약이 나타나고 계속하여 8장까지 복음, 즉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구원의 계시에 대한 긴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바울이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서신을 통해 성숙한 신앙에 이르도록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가르'( )로 본절이 시작됨으로써 앞절에서 밝힌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한편 '부끄러워하지 아니 한다'는 표현은 아마도 주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전승(막 8:38; 눅 9:26)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Barmby). 9절 주석 참조. 당시 법체계와 지중해를 호령하는 정치적 권력을 자랑하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한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변방의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 지역에서 시작된 비천한 듯한 출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Alford). 즉 지혜로운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로마인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조롱하였지만(고전 1:23) 바울은 그 복음이 가진 구원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과감히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이 문장의 서두에도 역시 '왜냐하면'의 뜻을 지닌 접속사 '가르'( )가 등장하는 것은 본구절이 앞서 나온,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본구절 속에는 복음의 본질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① 복음의 근본적 동인(動因)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② 복음은 믿음을 요구하며, ③ 복음을 믿는 결과는 구원이고, ④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로마 식민 치하 전체에 치안을 유지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고 있었는데,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인격적 힘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능력'을 의미하는 헬라어 '뒤나미스'( )는 '타고난 본질적 힘'을 뜻하며, 궁극적으로 그 힘은 인간들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로마의 현상적이며 물리적인 힘보다 월등하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능력 있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Barth).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여기서 '헬라인'이란 14절에 나오는 '야만인'과 대조되는 개념이 아니라 '유대인'과 대조되는 '모든 이방인'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바울이 복음 전파에 대한 순서를 언급하는 것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서 신약의 복음을 수혜 하는 데 있어서도 논리적인 우선순위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롬 9:4,5). 또한 이러한 우선순위는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에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사실적 측면에서나(마 10:5,6; 15:24) 승천 시 대위임 명령(Great Commission), 즉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는 교훈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함에 있어서도 유대인의 복음 거부와 이로 인한 복음의 이방인에게로의 확산, 그리고 마침내 유대인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롬 9-11장) 이러한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에로의 구속사의 확장'에 대해서는 롬 1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본절 역시 '왜냐하면'을 뜻하는 헬라어 접속사 '가르'( )로 시작되어 전절과의 관련을 나타내고 있으며 복음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 데우)라는 단어는 본서의 핵심어로서 본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오르게 데우)와 더불어 인간의 본성적인 의나 율법을 행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와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18절 주석 참조. 또한 이 '하나님의 의'란 세속 헬라어에서 쓰인 처벌할 수 있는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법정적인(forensic) 개념만으로는 불충분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란 단순히 죄와 멀어진 상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능력과 성품을 의미했다(시 35:28; 사 56:1). 신약에 와서도 이 단어는 죄의 세력을 멸하시고 인간을 의로 인도하는 구원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의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Cremer). 따라서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은 하나님 자신의 의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의로움에 근거해서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을 포함한다(Vermes). 한편 '나타나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륍테타이'( )는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다'(reveal)는 의미로 그 시제가 현재형인 것은 계속적인 계시의 상황을 표현해 준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 세상에 계속하여 드러나서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 개역 성경이 '믿음으로'라고 번역하는 '에크 피스테오스'( )는 오히려 '믿음에서부터'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에크'는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에서부터'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근원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이처럼 본절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믿음은 그리스도를 만나 고백하는 믿음이요(Augustine)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보적인 믿음(Calvin)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등장하는 '믿음에'(에이스 피스틴)라는 표현은 믿음의 방향, 즉 믿음을 가지게 된 성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믿음의 상태를 의미하므로 이 후자의 믿음은 보다 성숙한 믿음, 즉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가 한 성도의 믿음의 시작과 완성의 길을 걷는 과정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구원의 교리를 확증함에 있어 항상 구약을 인증하는데, 여기서도 '기록된바'라는 말로써 그 첫 번째 구약 인용을 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인용하는 합 2:4이 히브리 본문에서는 '그의'라는 소유대명사를 붙이지만 70인역(LⅩⅩ)에서는 이를 '나의'로 고치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은 전혀 개의하지 않고 그러한 소유대명사를 모두 배제한 채 일반적인 의미로 하박국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실상 '그의' 믿음이든 '나의' 믿음이든 모든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인간이 지향해야 되는 것이란 점에서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의 '에무나'( )가 본래 '충실성', '신실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하박국에서의 이 단어가 본래 의미한 것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적극적 신뢰였고, 바울이 지금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의도하는 바도 바로 이 점이란 것에서도 알 수 있다(Bruce). 즉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뢰만이 의와 생명을 내 것으로 받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살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세타이'( )는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된 영 생 (요 3:16)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서 영육(靈肉)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영원히 존속됨을 가리킨다.
1:18-32 이방인의 죄와 형벌
본서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함과 '이신득의'로 함축되는 구원의 방법을 언급했던(8-17절) 바울은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17절) 하박국서의 말씀(합 2:4)을 토대로 해서 자신이 이 말씀을 확신하는 이유에 대하여 롬 3:20까지에서 증거하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불가피성과 충족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복음의 절대적 필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준비된 구원 방법인 '이신득의'의 원리를 설명하던 앞절과 달리 본서의 본론 부분이 시작되는 본문에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의 상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창조 때의 온전한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죄에 빠져 있음을 강조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는 현실적인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본문에는 유대인의 죄를 논하기에(롬 2:1-3:8) 앞서 이방 세계에 범람하는 다양한 죄와 그로 인한 타락상이 기술되어 있다. 즉 이 부분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하여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셨음에도 그것을 외면하고 도리어 경배의 대상을 우상으로 바꾼 종교적 사악함(18-23절)과 도덕적 방종으로 인한 성적(性的) 타락(24-27절), 그리고 완고함으로 저지르는 모든 죄악들(28-32절)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죄 가운데 거하는 인간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된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즉 '유기'(遺棄)였다(24,28절).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저주이며 형벌인 것이다.
이처럼 죄로 뭉쳐 있는 인간 본성을 적나라하게 증거해 주는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관한 온전한 이해에 관심을 갖게 해준다. 즉 본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롬 3:23), 범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르기 마련이나(롬 6:23), 예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받으셨으니(롬 5:8)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公義)도 충족되고 인간 구원이란 목적도 달성되었음을 밝힐 도입부인 것이다(마 20:28).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곧 계시된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마 6:24; 눅 16:13; 약 4:4). ② 우리 또한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죄를 모두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하게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해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롬 3:10-19). ③ 이렇듯 죄인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요 10:9; 행 4:1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엡 1:3-14).
1:18 이제 바울은 본격적인 교리를 전개하는데, 본절부터 32절까지는 이방 세계에 만연한 죄악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설명한 사도 바울은(17절) 이제 본절에서는 불신자들의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진노'(오르게)란 일반적으로는 '분한 감정'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이 단어는 악에 대해 공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게 된다(롬 12:19, Murray).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사람들의 죄악상이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범죄로, 그리고 '불의'는 인간 상호 간에 발생하는 도덕적 범죄로서 양자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다. 이러한 죄악의 양상들에 대하여서는 19절 이하에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하늘로'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심판적 결과가 모두 하나님께 기원함을 밝히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나타나나니'(아포칼륍데타이)는 현재형이므로 이 진노가 나타나는 때를 전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최종적으로는 최후 심판에서 나타나지만 동시에 현재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Lightfoot). 24,26,28절의 '내어버려 두사' 주석 참조.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 '이는'(디오티)이라는 표현은 본절이 앞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에 대한 설명임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으나 인간은 이를 묵살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란 직역하면 '하나님의 알려진 것' 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기본적인 '신지식'(Vincent) 혹은 '종교심'(Augustine)을 말한다. 또한 '보임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론'( )이란 17,18절의 '아포칼립토'( )와 유사한 뜻으로 애매하던 것이 분명해지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창조주(Creator)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이나 자연 법칙 등 일반 계시를 통해 자신이 알려지도록 배려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 그 알려진 계시의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 가운데 머물렀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그랜드종합 교리 서론의 '일반 계시'를 참조하라.
1:20 본절은 앞절에 나오는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다. 즉 인간이 특별 계시를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창세로부터. - 직역하면 '세계의 창조 이래로'(아포 크티세오스 코스무)라는 뜻이다.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 '신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오테스'( )는 신의 인격을 의미하는 '데오테스'(골 2:9)가 아닌 신의 성품, 즉 속성을 가리킨다(Barmby). 이 속성들은 사람들이 그들 주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서(Trench)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는 구절의 헬라어 '노우메나 카도라타이'( )가 인간에게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지적 능력과 통찰력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명백하다(Bruce). 한편 이 구절은 바로 앞의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는 표현과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오히려 볼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보여지게 한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모순어법(oxymoron) 혹은 파라독스(paradox)적인 표현이다(Hendriksen).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결과이다. 즉 이는 그들이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법정적인 변호도 할 수 없으리라는 단호한 표현으로(Lightfoot), 진리를 수용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결과를 나타내 준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 원문은 '디오티'( )라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앞절과의 연결을 보여 주는데 이 접속사의 뜻 역시 '가르'( )와 같은 '왜냐하면' 정도의 뜻으로서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핑계치 못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초월자에 대한 외경심과 같은 기본적인 신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방인들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당연히 감사함과 합당한 영광을 받으셔야만('영화롭게', 에독사산) 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이것은 하나님을 합당히 예배하지 못하는 자들의 필연적 결과일 수도 있고 그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즉 생각과 마음이 바르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함으로 인해 헛된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 마음은 더욱 악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 20절에 사용된 모순어법(oxymoron)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지혜'(소피아)는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이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깨달음이 없는 세상적 지혜이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지독한 무지일 뿐이다(잠 1:7).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혜는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어 참된 신적 지혜에 대해 추구하는 마음을 감소시킴으로써 더 큰 우둔함에 빠지게 한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 '썩어지지 아니하는'은 '아프다르투'( )로서 '부패하거나 망할 가능성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쇠하고 썩는, 사람들이 만든 우상의 성격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시는 속성을 묘사한다. 한편 '하나님의 영광'이란 전절들에서 언급되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과 천사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영광을 가리킨다.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당시 헬라 세계에서 숭배되던 우상의 양상들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기본적인 특성이었으며 각종 날짐승과 육상동물의 형상들이 숭배된 증거는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소아시아, 이집트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들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또한 '버러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페톤'( )은 '기어 다니는 것'이란 뜻으로 악어, 뱀 등의 동물들이 우상화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형상'이란 '에이콘'( )으로서 '파생되어 닮은꼴'을 뜻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여러 피조물들을 숭배하기 위해 조형물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언급되며 동물들의 분류(새, 육상동물들, 기는 것)가 등장하는 것은 창 1:20-28에 나타나는 창조 기사를 연상하게 하여 이러한 우상 숭배의 죄악들이 아담의 타락과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로 하여금 상기하게 한다(Hooker). 한편 '바꾸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랄산'( )은 '이것을 저것으로 교체하다'라는 의미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과 교체시킨 인류의 과실을 잘 설명해 준다(Hodge).
1:24 그러므로. -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말하는 앞의 구절(18-23절) 전체를 받아 본절은 그 죄의 결과로써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한 양상으로서의 '유기'(遺棄)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 26,28절에도 반복되는 구절로서 '내어버려 둠'을 뜻하는 동사 '파라디도미'( )는 '다른 사람의 권세 아래에 혹은 사용을 위하여 넘겨주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피조물들의 요구를 허용하여서 그들이 바라는대로 죄의 권세 아래 있도록 방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자연히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부도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방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기를 단순하게 포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표현으로, 그들을 더욱더 빨리 죄악의 궁극적 단계인 심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Calvin, Luther, Alford). 한편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가운데 '유기' 부분을 참조하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 직역하면 '마음의 정욕(안)에서 육체적 방탕함으로'라는 뜻이다. 이처럼 각각의 명사들 앞에 사용된 '엔'( )과 '에이스'( )란 전치사가 정욕의 활동 영역과 그 궁극적 범죄의 방향을 잘 설명해 준다. 한편 본래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의미하기도 했던(Trench) '정욕'(에피뒤미아)이 심정적이요 소극적인 마음속의 범죄라면 '더러움'이라고 번역된 '아카다르시아'( )란 사회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개인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는 실제적인 성적 탈선(sexual aberration)을 가리킨다(Murray, Alford). 이렇게 성적인 충동은 실제적 범죄로 나아가는 일반적 경향 때문에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상상속의 성범죄를 경계하셨다(마 5:28).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욕되게 하셨으니'에 해당하는 '아티마제스다이'( )는 현재 수동태 부정사로서 우상 숭배와 결부된 성적인 타락의 결과가 지속적임을 지적해 준다. 당시의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공공연하게 시행된 종교적 의례로서의 매음과 일상생활 가운데 만연한 성적 타락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서(고전 6:9,10; 엡 5:3)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사회 풍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로마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공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고 또한 여행자들은 여관을 피하는 등), 성도들은 자신들의 몸이 성령의 전(殿)임을 자각하여 거룩히 구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전 3:16,17; 6:15-17).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 이방인들이 헛된 신을 경배하고 그에 따른 성적 범죄를 저지른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알레데이아 투 데우)에서 소유격은 동격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므로, 여기서 이 표현은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거짓 것'이란 참 하나님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우상을 가리킨다. 또한 '경배하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존경하다는 의미이고 '섬기다'는 것은 외적인 예배 행위를 취함을 가리킨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참 하나님(Vincent) 대신에 피조물에 불과한 거짓 것을 경배하고 있음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이는 앞에 나와 있는 조물주를 수식하는 말로서 우상에 대해 언급하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 선행되어야만 올바른 신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깨닫고 우상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부분에 '진실하다'는 뜻의 '아멘'이 등장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사실에 대한 결론임을 송영의 형식을 빌어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6 이를 인하여. - 앞절을 받아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하의 내용에서는 이방인의 도덕적인 죄를 다루나 여기서 '이를 인하여'란 표현으로써 도덕적인 죄 역시 앞에서 이미 언급한 종교적인 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 24절에서는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하였고 본절도 역시 성적인 욕망을 뜻하는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른 유기의 교리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부끄러운 욕심'이란 '파도스 아티미아'( )로서 24절에서 언급된 '정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추잡한 성적 욕구를 의미한다.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부끄러운 욕심'의 내용으로서 여성 간의 동성애를 서술한다. '여인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뤼스'( )는 여인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단어인 '귀네'( )가 아니며, 27절에서도 남자가 '안드로포스'( )가 아니라 '아네'( )로 쓰인 것은 성(性)의 구별에 주안점을 두는 문장 구조이기 때문이다(Vincent). '순리'와 '역리'라는 표현은 '사물의 법과 질서'를 뜻하는 '쥐시스'( )와 그 단어 앞에 반대를 의미하는 '파라'( ) 전치사를 붙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자연 질서를 망각한 추잡한 성생활은 당시 헬라 세계에서 널리 자행되던 것이었다.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을 불일 듯하매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 당시 헬라 세계에서 동성애(homosex)의 문제는 거의 공공연하게 시행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으나, 이 가운데 특히 더 심각한 것은 남성 간의 동성애(homosex)였던 것으로 보인다. 26절의 여성 간의 관계보다는 본절의 남성 간의 관계가 더 심각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Meyer). 이러한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반하는 심각한 죄악으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결혼 관계를 파괴한다(창 2:24). 한편 '불 일 듯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카우데산'( )은 문자적으로는 '다 타버렸다'(burn out)는 뜻으로 동사 앞에 붙은 전치사 '엑크'( )는 정욕의 격한 상황을 강조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 이 '보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① 그러한 범죄에 빠지도록 내버려진 사실 자체(Barmby, Lenski), ② 심한 죄책감과 절망감 등 정신적인 형벌(Hendriksen, Wuest), 아마도 양자 모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성병'(性病)과도 같은 방탕한 성생활로 인한 육체적인 형벌일 수도 있다.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에피그노세이'( )는 직역하면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 안에서'라는 뜻이다. 즉 '에피그노세이'는 '마음'도 뜻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다(빌 1:9; 골 1:10). 한편 '싫어하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키마산'( )은 본래 금(金)이나 은(銀) 등의 금속을 시금석으로서 '시험하다'(test)라는 뜻이다. 따라서 결국 본절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처음에 시험하고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외면해 버리는 삶을 삶으로써 피조물이 창조주를 반역하는 죄를 범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Robertson).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 24,26절에 이은 세 번째의 '내어 버려두심'으로서 '상실한 마음'(아도키모스누스)이란 위의 '싫어하매'와 동일한 어근을 지녀 시험한 후 인정치 아니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시험하여 거부한 인간들을 하나님은 그렇게 '시험 후 거부된'(rejected after a trial) 마음의 상태로 방임하신다는 것이다(Cranfield).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의 이성은 건전한 판단력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부터 빗나갔기 때문에 그에 이은 모든 일 역시 바르게 설 수 없는 것이다.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합당치 못한 일'(타 메 카데콘타)이라는 용어는 스토아 철학(the Stoic philosophy)에서 도덕적 기준에 어긋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그 용어를 빌려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일치하지 않는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제 29절부터 그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29 곧 모든 불의. - 여기서 '불의'(아디키아)는 '의'의 반대 개념으로 이하에 나타나는 죄목의 총칭적인 용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8절 주석 참조.
추악. - '추악'(포네리아)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악한 행위를 가리킨다(Hendriksen).
탐욕. - '탐욕'(플레오넥시아)은 문자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으로서 자신의 소유를 위해 남을 해치는 것도 불사하는 악행이다(Lightfoot).
악의. - 위에 언급된 추악이 외부로 드러난 악이라면 '악의'(카키아)는 내적인 악을 의미한다(Trench).
가득한 자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누스'( )는 '가득차다'를 뜻하는 '플레로오'( )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지금까지 언급된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이미 가득차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본절 하반절에도 개역 성경이 '가득한 자요'라고 번역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스투스'( )로서 '가득찬'( )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양자는 유사한 의미로 쓰였고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장 기교상의 배려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완료형이나 형용사형은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한 자들의 죄악의 영향이 현재까지 미침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시제적 의미도 잘 반영하고 있다.
시기, 살인. - '시기'(프도노스)와 '살인'(포노스)은 유사한 단어를 반복시키는 언어유희(word play)이며 또한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가 살인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적 연관성도 함축한다. 그러나 여기서 살인은 꼭 육체적인 살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증오까지 포함한다(요일 3:15).
분쟁. - '분쟁'(에리스)은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우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리킨다.
사기. - '사기'(돌로스)는 악을 이루기 위한 교활함, 속임, 배반 등을 가리킨다.
악독이 가득한 자요. - '악독'(카코에데이아)은 사람을 해치고자 악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성향을 가리킨다(Sanday and Headlam).
수군수군하는 자요. - '수군수군하는 자'(프시뒤리스테스)는 이웃에게 비밀스럽게 비방하는 행위를 통해 '독'(poison)을 붓는 행위, 즉 악평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Godet).
1:30 비방하는 자요. - '비방하는 자'(카탈랄로스)는 숨어서 남을 비방하는 '수군수군하는 자'와는 달리 공개적으로 타인을 비방하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데오스튀게스)는 수동적 의미로서 '하나님의 미워함을 받는 자'(hated of God)로 볼 수도 있고(Meyer, Alford, Barmby),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haters of God)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Godet, Gifford, Hendriksen), 인간의 죄악된 심성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악을 묘사하는 문맥이기에 후자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새번역, RSV, NASB, NRF). 능욕하는 자요. - '능욕하는 자'(휘브리스테스)는 잔인성(cruelty)과 교만(pride)이 가득차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는 것을 즐기는 파렴치한 사람을 말한다(Trench, Cranfield).
교만한 자요. - '교만한 자'(휘페레파노스)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 평가하는 자로 심지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자라는 사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Trench).
자랑하는 자요. - '자랑하는 자'(알라존)는 헛된 목표를 내세우며 의미 없는 약속과 자랑을 남발하는 자를 가리킨다(창 4:23,24; 대하 32:10-14, Hendriksen).
악을 도모하는 자요. -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도 죄악으로 인도하는 악의 전파자이며 새로운 악을 찾아내는 자(inventor of the evil)를 가리킨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효도는 구약 시대부터 계명에 규정되어 오며(출 20:12; 레 19:3; 잠 20:20) 신약에서도 강조되는 것으로서(엡 6:1,2), 자식으로서 이 효도를 다하지 않는 자가 심각한 범죄자로 처벌되는 것은 대다수의 이교에서도 동일하다. 하지만 기독교적 특징은 부모에 대한 순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다(마 8:21,22; 눅 9:59; 엡 6:1).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 '우매한 자'(아쉬네토스)와 '배약하는 자'(아쉰데토스)에 있어서도 29절의 '시기와 살인'과 같이 언어유희(word play)가 등장하고 있다. 전자의 뜻은 '이해력이 없는 자'로서 타인의 사정을 몰라주는 자를, 후자는 '약속에 충실치 않은 자'(covenant-breaker)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자를 가리킨다.
무정한 자요. - '무정한 자'(아스토르고스)는 어린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나이든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식 등과 같이(Godet) 인간의 기본적인 애정이 결여된 자를 가리킨다.
무자비한 자요. - '무자비한 자'(아넬레에몬)는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1:32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 '사형에 해당하다'의 '엑시오이 다나투'( )는 법률적인 처형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죄의 형벌 사상에 근거해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공동번역)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또한 이 죽음은 단순한 자연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영적 사망을 의미한다.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바울이 지금까지 언급한 이방인들이 용서받지 못할 이유가 다시금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그들은 옳다고 선포된(that which is declared right) 하나님의 법령(God's ordinance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신들이 범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범죄를 옹호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바울의 관점에서 이방인이 스스로의 그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본장 자료노트, '타락한 인간의 10가지 죄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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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1-17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시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요약 된 내용이 로마서 전체로 확장되어 해석되고 설명 되는 진리가 로마서이다.
1. 복음
하나님의 복음 = 출처가 하나님으로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이 복음 = 로마서 전체의 내용으로 확장하여 사용 할 수 있는 용어이다.
나의 복음 = 바울이 전하고 기록한 바울 서신의 모든 내용이라 할 수 있다.
2. 예수그리스도
1] 화목제물로 죽으시므로 죄들의 형벌에서 속량하시는 은혜이다.
2] 세례와 죽음과 부활의 연합으로 함께 죽고 부활로 해방됨이다.
3] 그리스도의 영으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주를 위하여 죽음이다.
3 믿음과 구원
1] 믿음으로 죄들의 형벌로 부터 의롭다함을 얻는 과거의 죄들에서 구원이다.
2] 믿음에 이르러 죄의 권세와 능력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현재의 구원이다.
3] 믿음으로 살므로 죄의 존재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화롭게 되는 미래의 구원이다.
1:18-32
본문은 죄들에 관환 백화점으로 말할 정도의 다양한 죄들이다.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며 반드시 심판으로 정죄하신다.
1:18-32 타락한 인간의 10가지 죄악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 복음의 교리를 제시한다.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 죄악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필연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필요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음(21절)
2. 허망한 생각을 품음(21절)
3. 미련한 마음으로 행함(21절)
4. 스스로 지혜있다 함(22절)
5.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꿈(23절)
6. 마음의 정욕대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함(24절)
7.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25절)
8. 순결한 성(性)을 그릇되이 더럽힘(26,27절)
9. 온갖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함(28-31절)
10. 합당치 않은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함(32절)
설명을 돕기 위하여 위 자료를 함축하여 다시 확인 시켜 본다.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여 정죄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