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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증언 및 예수의 등장과 공생애 개시와 갈릴리 초기 사역의 이모저모
구속사적 개관:
마가복음은 생명까지 위협받는 로마 제국의 박해(迫害)에 처해 있던 긴박한 상황의 초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쓰여진 복음서이다. 이러한 마가복음은 우리의 구속주(救讀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측면 중 특히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에 따라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일하시는 종,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토록 위대한 종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사 구속을 성취하였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강조한다. 또한 그토록 위대한 종이 고난을 받으셨으나 이를 이기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 고난을 받지만 고난의 종이 훗날 승리의 종이 되었듯이 우리도 분명히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록 배경과 주제를 가진 마가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나 평가보다는 예수님의 사역 자체를 있는 그대로 단순 명료한 문체로 제시한다. 또 주님의 사역 중에서도 주님의 말씀보다 주님의 행동(action)에 더욱 치중한다. 그리하여 마가의 복음서는 사복음서 중에서도 제 2위 성자로서 구약이 약속한 메시야요, 구속주(救贖主)이신 주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 주는 복음서가 되었다. 실로 마가복음은 놀랍고도 위대한 우리 주님의 이 구원 행동에서 저 구원 행동으로 연속되는 박진감 있는 그리고 그 배후에 단순 소박하면서도 종으로서 주님을 따라 죽음을 불사할 것을 각오한 절대적인 신앙고백(信仰告白)이 담겨 있는 복음서이다.
이러한 마가복음의 특징은 그 첫 장인 본장에서부터 십분 반영된다. 마가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 또 그보다 선행되는 예수님의 존재와 신분에 대한 설명 즉 예수는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역사를 초월하며 계셨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으며 또한 구약시대 내내 거듭하여 약속되었던 메시야(Messiah)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생략한다. 다만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을 단 한 절로 짧게 밝힌 후 예수의 선구자였던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해서도 란 몇 마디로 압축한 다음 곧바로 예수의 사역 개시에 대한 기사로 들어간다. 어쨌든 이제 마가복음의 첫 장인 본장의 내용은 개략 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신이 쓰는 복음서의 내용이 되는 예수 사역의 본질에 대하여 신앙고백적 선언을 함으로써 이 복음서의 서두에서 서론의 역할을 하는 1절 말씀이 기록된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그의 예수에 대한 증언(2-8절). 예수의 등장과 세례 받으심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심 등의 사건이 약술된다(9-13절). 그 후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실질적 시작인 초기 유대사역은 생략하고 곧바로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을 보도하기 시작하여 예수님의 복음전파 개시(14-15절), 네 제자의 소명(16-20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안식일 축사 사건(21-28절), 베드로의 장모 및 많은 병자의 치유 사건(29-34절), 주님의 겸허한 기도의 자세와 말씀전파의 열정에 대한 기록(35-39절), 문둥병자의 치유 사건(40-45절) 등등의 기사가 생동감 있게 연결된다.
이상 본장의 각 단락의 기사는 그것 자체로서 각각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각각 각 단락의 평행기사가 수록된 부분의 마태복음의 개관을 참조하기로 한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첫 장인 본장에서는 본장의 기사 전체를 통하여 마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救贖史的 意義)만 개관하기로 한다. 즉 본장에 나타난 기사에서 공생애 초기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종이되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일하시는 종인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는 그 본성상 제 2위 하나님 성자이시며 온 세상의 메시야이신 분으로서 구속의 사역을 직접 수행하여 우리가 이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의 실체요 근거를 이룩하신 유일무이 한 종이시다(1절).
② 주님은 하나님에 의하여 예비되고 예언자에 의하여 확증된 나아가 성부와 성령의 인준(認准)을 받은 참되고 유일한 종이시다(2-11절).
③ 예수는 시험을 이기고 극복하신 승리의 종이시다(12,13절).
④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종이시다(14-20절).
⑤ 주님은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으신 종이시다(21-34절).
⑥ 주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종이시다(40-45절).
⑦ 주님은 기도의 종이시다(35,36절).
⑧ 주님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곳의 모든 이를 위하여 종의 사명을 다하시는 열정의 종이시다(37-39절).
이상의 내용은 본장의 기사만으로 일하시는 종의 측면을 정리한 것이다. 이제 마가복음 전체를 보면 그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일하시는 주님의 종의 모습(빌 2:7) 이외에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 구속 수난을 당하시는 고난의 종,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復活)하셔서 구원을 이루신 구원과 승리의 종의 모습 등도 함께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역과 고난과 승리의 종의 모습을 더 깊이 분석해 보면 보다 세부적인. 주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이 갖는 여러 측면을 더욱더 풍성히 보여 준다.
전 구속사(救贖史)를 개관할 때에 구속사는 실로 절대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본장과 같은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에 대한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폭군처럼 강요하지 않으시고 피조물(被造物)을 향한 창조자의사랑으로써 오히려 우리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희생해 주시는 겸손과 사랑으로써 발휘하사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깨닫는다. 본래 제 2위 하나님이시요, 흠도 티도 없는(벧전 1:19) 유일한 인자(人子)이신 주님께서 성도를 위하여 일하시며 구속 수난을 당하시니 성도의 구원(救援)과 축복은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를 주고자 일하시니 성도는 그 얼마나 복된가! 또한 이런 주님의 구속사적 희생과 사랑을 거부하는 자는(마 22:23-33) 그 얼마나 악하며 어리석은가!
본장과 마가복음 전체의 기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향하여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일하신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역에 담긴 구원의 사랑과 확실성을 증언하고 있다.
외울 말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시작하는 말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세례 요한의 등장과 증거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
9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의 사십일 기도와 시험 승리
12 ○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갈릴리 사역 개시
14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소명을 받은 네 제자
16 ○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가버나움 회당의 설교와 축사
21 ○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의 치유
29 ○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시니라
기도하며 전파하시는 예수의 노고
35 ○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문둥병자의 치유
40 ○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1장 본문 & 자료노트
보감-1:9-11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유
세례인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는 회개의 징표로서 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익한 것인바 그 이유들을 간략히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세례인 요한을 통해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눅 3:2; 요 1:33)
2. 모든 인간들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마 3:15,16; 롬 1:17)
3.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한 위치에 두심으로 대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시기 위해(사53:12 요 1:29)
4. 후일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 위한 근거를 세우시기 위해(고전 12:12,13)
5.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 받게 하기 위해(고후 5:21 갈 3:26,27)
보감-1:1-15 세례인 요한과 예수님의 회개 선포의 의미
1. 세례 요한(1:4-5)
․ 메시아와 그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의 회개선포
․ 회개의 대상자로서의 회개선포
․ 죄 사함을 받는 준비를 위한 회개선포
․ 성령 세례를 받기 위 한 준비로서의 회개선포
․ 예수님의 회개선포와 세례로 인해 그 의미가 깊어 짐
2. 예수(1:14,15)
․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의 회개 선포
․ 대속자로서의 회개 선포
․ 이미 도래한 천국의 백성이 될 조건으로서의 회개 선포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로서의 회개 선포
주요 주제-1:2-4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
본권 신약총론 특별자료 참조.
삽화-1:7 성경시대 샌들
인물연구-1:2-8 세례 요한
본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세례의 이해
행 8장 연구 자료 참조.
지도-1:9-13 예수께서 세례와 시험 받으신 곳
보감-1:16-20 네 제자의 소명 장면을 통한 교훈
1. 생활 현장에서 일할 때 예수를 만남(16,17절)
2. 의심치 않고 즉시 예수를 믿음(17,18절)
3.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함(17,18절)
4. 예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함(18,20절)
5.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에서 떠남(18,20절)
6. 생업 수단을 버리면서까지 주를 따름(18,20절)
7. 혈육의 정도 포기하며 주를 따름(20절)
지리배경-1:9-39 갈릴리(Galilee)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인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예수의 초기사역은 본문에 언급된 대로, 갈릴리에서 행해졌다. 성경에서 '갈릴리'라 할 때, 이는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하는 말이다. 즉 당시 로마 행정구역 편성상 가이사랴 빌립보 ․ 사마리아 ․ 베니게 ․ 이두메 ․ 데가볼리 ․ 베뢰아 ․ 유대 등과 함께 한 행정 구역으로 구별된 전체 갈릴리 지방을 일컫기도 하고, 갈릴리라는 한 성읍만을, 때로는 갈릴리 바다(막 4장 자료노트 참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초기 주요 사역지들인 가버나움 ․ 고라신 ․ 벳새다 ․ 가나 ․ 나사렛 등이 포함되어 있는 갈릴리지방에 대해서만 서술하기로 하겠다.
1. 지리적 위치 및 특성
갈릴리 지방은 팔레스틴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갈릴리의 동쪽 경계는 요단강에서 갈릴리 바다 서안에 이르는 선(線)이며, 다른 경계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 할 수는 없다. 로마 시대의 갈릴리는 동과 서로 40km 북과 남으로 약 56km 정도 되었다.
또한 갈릴리는 가버나움과 프톨레마이스 사이로 뻗어있는 라마(Ramah) 평원에 의해 고지대와 저지대로, 즉 상 갈릴리 와 하 갈릴리로 나된다. 이렇게 나뉜 두 갈릴리는 고도와 기후와 식물의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상 갈릴리는 레바논 산들의 남쪽 산맥으로서 해발 약 450m로 시작해서 950m에 이르는 고지대인데, 여기에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높은 젤마르크(Jermak) 산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하 갈릴리는 해저 208m의 갈릴리 바다와 해발 약 150m 높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갈릴리는 주로 레바논 산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이슬 눈의 형태로 공급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용수가 풍부한 편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아름다운 경치와 온난한 기후로 인해 관광 재원을 취득하였고, 후에는 국제적인 교역로에서 나오는 통행세가 중요한 재원이 되기도 하였다.
2. 관련 역사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지파별 땅 분배 시에 납달리 ․ 스불른 ․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 이후 점차 이곳은 이스라엘 군주들에게 가치가 없는 곳으로 인식되어져 갔다. 심지어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 자재를 공급해준 대가로 히람 왕에게 불모의 성음인 갈릴리의 20 성읍을 주기도 했다(왕상 9:11). 더욱이 B.C. 732년경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B.C. 80년경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이래 갈릴리는 순수한 인종과 문화를 상실하였다. 그러다가 B.C. 63년 폼페이(Pompey) 장군의 로마군인들에 의해 팔레스틴 전역이 로마령이 됨으로써 갈릴리는 유대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B. C. 82년에는 헤롯가의 봉토 중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갈릴리의 이러한 어둡고 지루한 역사는 예수시대에 와서 잠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즉 갈릴리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지로서 이곳의 가나에서 예수께서 첫 번째 이적을 베푸셨고(요 2:1-12). 또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가장 먼저 부르셨다(마 4:12-25). 그리고 산상 수훈을 선포하신 곳도 바로 이 갈릴리 지방이었고(마 5-7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바다 부근(요 6:1-15)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곳도 이 갈릴리였고(마 26:32),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신(마 11:16-20) 곳도 갈릴리에 있는 한 산에서였다.
3. 의의
이상으로 예수께서 전도 사역의 주요거점으로 삼으셨던 갈릴리 지방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정치적으로나 자연 환경적으로나 타 지역에 비해 결코 나을 것이 없었던 갈릴리 지방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사역하심으로 어둡고 우울했던 땅에 큰 빛을 비추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사역의 대상이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이었다는 사실(마 11:5,6)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원어연구-1:15 민망히 여기사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 )이다. 이것은 본래 '동정을 느끼다'(feel sympathy), '연민을 가지다'(have pity)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주로 '불쌍히 여기다'(마 14:14; 눅 7:13). '측은히 여기다'(눅 15:20)는 뜻으로 번역이 된다. 이로 보건대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주로 인간의 마음 중심에서 일어나는 감정 표현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단어의 명사형인 '스플랑크논'( )은 인간의 신체내부의 한 요소인 '창자'(행 1:18)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단어가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우러나오는 처소로서 '마음'(요일 3:17; 몬 20)을 지칭하기도 한다. 본절은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깨끗케 해 주시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민망히 여겼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께서 당시 사회적으로 정상인들과 격리되어 정죄당하고, 차가운 시선의 대상이었던 문둥병자를 '마음속 깊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동정하고 불쌍히 여겼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와 같은 마음자세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그의 손으로 직접 환자의 몸을 만지시기까지 하시며 치유를 허락하셨다(41,42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비할 데 없는 사랑과 긍휼 및 자상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자상한 행위가 그의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도 예수의 마음을 닮아가도록 기도해야할 것이다.
주요 주제-1:23-28 축사의 이해
도표-1:29-34 예수님의 이적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1:39 예수의 중 사역지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 자료 참조.
1:1-8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인 요한의 사역
다른 복음서들이 서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과는 달리 본서는 1절에서만 본서의 내용을 규명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는 본서가 예수의 족보(마 1:1-17)나 장중한 서문(눅 1:1-4) 및 신학적 서론(요 1:1-5)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을 위해 일하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본권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핵심사항 일람'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서론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임을 밝힘으로써 앞으로 전개할 본서의 내용과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복음의 '시작'(아르케)이란 말은 창 1:1에 나오는 '태초'(베레쉬트)의 헬라어 역으로서(LⅩⅩ) 창세기가 이 세상의 창조를 보여 주는 반면, 그리스도의 출현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재창조' 사역의 시작임을 보여 준다. 사 43장 자료노트, '재창조' 참조.
이러한 본서 서론에 이어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나 족보를 생략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인 요한의 사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례인 요한의 사역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마 3:7-10) 그리고 세리와 군병(눅 3:12-14)에 대한 접촉의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메시지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만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본서의 기록 대상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었고, 또한 그들이 예수 사역의 준비자인 세례인 요한의 사역보다는 그들의 실제적인 구원자요 위로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눅 3장 연구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 참조). 실로 당시의 로마 성도들은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 있었기에, 마가는 세례인 요한의 사역을 통해 예수와 구약 예언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보다는 곧바로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소개함으로써,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그들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과 또 예수만이 승리케 하심을 권면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그의 사역이 소개된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치 세례인 요한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하기 위해 유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처럼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면해야 되는 것이다(행 5:42).
②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사역을 개시하시기 전에, 세례인 요한이 먼저 사역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푼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도 않은 채, 그저 주님의 은혜와 축복만 누리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태도이다(시 34:18).
③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되 모든 영광과 존귀를 오직 주님께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례인 요한은 자신을 메시야로 추종하는 자들에게 그저 자신은 메시야의 신들 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겸손히 고백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메시야에게로 유도했다(요 1:19-34). 진정 우리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도록 애쓰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전 10:31; 빌 1:20).
1:1 하나님의 아들‥‥복음의 시작이라. - 다른 복음서가 예수의 족보(마태), 복음서 기록 목적과 방법 및 세례인 요한과 예수의 수태 사실(누가), 영원 전부터 로고스로 계신 예수(요한)에 대한 기술로부터 복음서를 시작한 반면, 본서는 이러한 서론을 일체 생략하고 바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부각시킴으로써 복음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시작'(아르케)이란 단어는 창 1:1에서 천지 창조가 시작된 시점인 '태초'(베레쉬트)의 70인역(LXX)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이다. 따라서 이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예수의 출현이 또 하나의 다른 창조사역의 시작임을 암시한다 하겠다(사 43장 자료노트, '재창조' 참조).
하나님의 아들. -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구약에서는 천사(욥 1:6), 왕(삼하 7:14), 방백(시 82:6), 이스라엘 백성 전체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키기도 하나(마 5:16; 6:4), 좁은 의미에서 오직 예수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는 사람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용례들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의 이러한 표현은 본서의 주인공인 예수께서는 인간인 동시에 신적 존재로서 그의 말씀과 행위가 신적이며, 또한 그의 본질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 곳곳에서 마가가 끊임없이 하나님만이 가지신 신적 속성과 활동을 예수께 돌리면서 이 용어를 예수께 거듭 적용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막 3 :11; 5:7; 9:7; 15:39). 한편 마가가 이 용어를 본서에 사용한 것은 본서의 일차적 독자라 할 수 있는 당시의 로마 세계에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전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로마인들은 훌륭한 왕이나 영웅, 예술가 등을 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진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그들이 존경하고 경배할만한 위대한 분으로 모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용어였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표현은 본서의 저자인 마가의 사상적 지주였던 베드로가 이미 과거에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란 신앙 고백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이름인 '예수와 그가 이 세상에서 수행한 직임적인 이름인 '그리스도'가 결합된 이중적인 칭호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름인'예수'는 본래 히브리어 '요슈아'( ) 또는 '여호수아'( )의 헬라어 형태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成肉身)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기독교적 구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이 이름은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에게서 이미 사용된 것에서 보여지듯이 과거부터 이미 쓰여지던 이름이었고, 특히 예수의 성육신 100여 년 전부터 팔레스틴 지역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마카비 전쟁 때부터(B.C. 166년) 시작된 유대 민족주의가 로마 치하에서 더욱 고조되었고 그 영향으로 메시야 대망 사상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저들의 주님과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에 다른 말들을 덧붙여 사용했는데, 예를 들자면 출신지 이름을 따른 '나사렛 예수', 혈통을 반영한 '다윗의 아들 예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들은 초대 교회에서 오래가지 않았고 '예수'라는 이름에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덧붙여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①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예수를 다른 모든 사람과 즉각적으로 확연하게 구별하여 주는 칭호일 뿐 아니라 ② 초대 교회가 예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반영하는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명칭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칭호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중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 붓다'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크리오'(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히브리어 '메시야'( )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원래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7),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 사 61:1) 였으며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으로 임하실 메시야를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었으며, 후대에는 백성의 참 목자요 장차 오실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희망과 소망을 담은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가가 이 명칭을 그의 복음서 초두에 기록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영적으로 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자유와 평강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선포함으로써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이끌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음. - 이 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 '베소라'( )로 표현되었으며, 초기에는 단순히 '좋은 소식'을 가리켰다(삼하 18:20; 왕하 7:9). 그러나 후기에는 점차 신앙적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장차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시 40:7; 사 41:27). 그리고 로마 세계에서 이 말은 헬라어 '유앙겔리온'( )으로 표현되었으며, 본래 황제의 승리, 생일, 등극이나 집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히브리어 '베소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구약의 예언과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도래, 그의 사역, 십자가 사건, 부활과 승천, 재림의 약속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지닌 복음은 바울과 초대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었다(행 13:16-41).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세례인 요한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 특히 '이사야'를 인용하는 것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바이다(마 3:3; 눅 3:4-6). 그러나 본서에는 마태와 누가에 나타나지 않으며 이사야서의 직접 인용이 아닌 본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내가 내 사자를‥‥예비하리라. - 본절은 출 23:20과 말 3:1을 복합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내용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듯이 기록된 것을 혹자는 구약에 대한 마가의 이해 부족 때문으로 본다(Weiss, Meyer).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지적이 필요 없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기술하는 마가의 서술 특징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ruce). 즉 마가는 세례인 요한의 출현이 주로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모세와 말라기의 이름은 생략하고 이사야만을 언급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말 3:1과 본절을 비교하면 '내 앞'이 '네 앞'으로, '내 앞에서 길을'이 '네 길'로 변경되어 있다. 즉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여호와 앞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시는' 것으로 나오나, 본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앞에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여호와와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1권 성경교리 신론 '삼위일체' 참조). 한편 이 예언은 장차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며 그에 앞서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가 출현할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길이 좁고 험하였던 시대에 왕이 여행이나 사냥, 전쟁 등의 이유로 행차할 때에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사자들을 앞서 보내는 옛 풍습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구약 예언에 따라 세례인 요한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내 사자' 즉 하나님의 사자로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본절은 사 40:3의 예언을 70인역(Lxx)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광야'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했던 처참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포로 시대의 백성들은 우상 숭배와 이방 민족의 압제와 죄악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적, 영적인 해방과 구원이 갈급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사야는 이와 같이 황량하고 처참한 상황을 유대 지역의 메마르고 황량하여 식물이 잘 살 수 없는 불모지 '광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한 백성들에게 에스겔, 다니엘 등의 선지자들이 '외치는 자의 소리'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적 ․ 영적인 해방과 구원을 주는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였다. 또한 그들은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와 각종 죄악을 회개하도록 촉구함으로써 메시야의 출현을 예비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예언은 B.C. 538년 바벨론의 모든 유대인 포로들에게 본토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고레스 왕의 칙령과 함께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즉 고레스 왕의 칙령과 함께 메시야를 예표하는 대제사장 예수아와 스룹바벨이 등장하였다(스 2:2). 그리고 그들은 백성을 인도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여호와에 대한 예배를 회복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육체적 ․ 영적인 해방과 구원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성취가 아니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보다 완전한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마가가 이와 같이 역사적 배경이 있는 말씀을 본절에 인용한 것은 그 예언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한 해방과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외치는 자의 소리'(세례인 요한)가 이미 등장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길을‥‥평탄케 하라. - 이 말은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방해하는 영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영적 장애물은 부패하고 타락하여 죄에 물들고 강퍅해진 심령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죄를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여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첩경'은 '곧게 뻗은 대로', '마차로' 등의 뜻이 있으며, '왕의 대로'로서 손색이 없는 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주의 길을 예비하되 왕의 대로를 닦는 것처럼 잘 준비하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기록된 것과 같이. - 이 말이 원래 헬라어 성경에서는 2절의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란 말에 이어 나오나 개역 성경은 3절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2,3절에 기록된 구약의 예언과 4절 이하에 기록된 세례인 요한의 사역이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기록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라프타이'( )는 '기록하다'(그라포)의 3인칭 완료 수동형으로서 그 쓰여진 효력이 현재에도 계속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4 세례인 요한이 이르러. -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인 요한의 탄생 예언과(눅 1:5-25), 출생(눅 1:57-80)에 얽힌 사연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그의 출현이 하나님의 보내심에 의한 것임이(요 1:6)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세례인 요한의 사역의 출발부터 다루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광야에서. - 본절의 '광야'는 세례인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유대 광야이다(마 3:1). 그런데 이 광야는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서쪽으로 유대 산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광야는 석회질의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복이 심하고 암벽이 많았다. 따라서 쓸쓸하고 황량했으며 띄엄띄엄 잡목만이 눈에 띄고 독사가 우글거렸다. 한편 세례인 요한은 이러한 광야에서 성장했고(눅 1:80),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그런데 세례인 요한, 즉 선지자적 영감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명에 불타는 한 사람이 유대 광야에 갑자기 출현한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큰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출 23:20의 예언에 대한 랍비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서 새 시대를 선포하는 충성스러운 주의 사자가 광야에서 출현하리라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광야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이 아니라 예언적 의미를 지니는 특수 지역이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이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전치사 '에이스'를 목적을 나타내는 '위하여'로 번역했으나 이들 관계를 나타내는 '관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왜냐하면 세례 자체가 죄를 사하는 효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죄 사함을 상징하는 의식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회개의 세례. - 이 말은 죄를 자백하고 모든 죄에서 돌이킨 자, 즉 '회개한 사람에게 베푸는 세례'를 의미한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다는 표시로 주어졌다. 한편 이러한 세례는 후에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에 가입했다는 언약의 표시로 주어졌다(벧전 3:21). 이런 점에서 이 세례는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구약의 할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할례도 물세례와 마찬가지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다는 표시로 주어졌으며(레 26:40,41; 롬 4:11),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창 17:11-14,19). 한편 이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1:5 온 유대 지방과‥‥다 나아가. - 이 말은 세례인 요한의 활동에 대하여 백성들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는 이때 요한에게 나아온 무리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마 3:7), 세리(눅 3:12), 군인(눅 3:14), 부자와 가난한 이들(눅 3:10)과 같이 다양한 계층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이 '다 세례인 요한에게로 나온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그가 지닌 큰 영향력을 암시한다. 유대 백성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못하던 중에 세례인 요한이 출현하여 신선하고 생명력 있는 설교로서 백성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메시지가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하고 있어서 백성들 가운데 엄청난 희망과 동요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출 23:20에 예언된 주의 사자가 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아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포류에토'( )는 '나가다'(엑스포류오마이)의 미완료형으로서 나오는 동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마가는 현재 진행 중인 생동감 있는 언어로(3절 주석 참조),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봉사하는 일꾼들의 신앙적 면모를 전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요단강. - 세례인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요단강에 대해서는 신 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6 약대 털‥‥가죽띠. - 세례인 요한이 입은 약대 털옷과 이 옷을 거추장스럽지 않게 몸에 부착시키는 도구인 가죽 띠는 거칠고 볼품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질기기 때문에 광야 생활에 알맞는 옷차림이었다. 그런데 요한의 복장은 광야 생활에 알 맞는 옷차림을 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의 옷차림은 자신이 바로 '오리라 한 엘리야'이며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옷차림은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과 비슷하였다(왕하 1:8). 뿐만 아니라 과거의 선지자들이 회개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복장을 하였다(슥 13:4). 따라서 세례인 요한의 이러한 복장은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명과도 잘 조화된다고 볼 수 있다.
메뚜기와 석청. - 당시에 메뚜기는 가난한 사람이나 혹은 기근 때에 먹는 하급음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식은 절제, 가난, 참회의 표시로 먹기도 했다. 그리고 석청(石淸)은 야생벌이 나무나 바위틈에 만들어 놓은 꿀이었다. 따라서 세례인 요한의 식생활은 매우 검소하고 금욕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세례인 요한이 먹은 음식은 모두 율법적으로 정결한 것이었다(레 11:21,22). 그리고 광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로마 치하에 있으며 종교적 기득권자들의 외식적 범죄로 가득찬 마을이나 성읍에서 의식주를 해결치 않음으로써 율법적으로 부정한 삶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인 요한이 이러한 생활을 한 것은 자신에게 예언된 나실인의 삶(눅 1:15)을 율법에 따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 6장 자료노트, '나실인 제도' 참조.
1:7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 - 세례인 요한은 자신의 전파 사역 초두에서 예수님을 '나보다 능력 많으신 분이'라고 고백하였다. 세례인 요한이 이렇게 고백한 것은 자기를 그리스도로 보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눅 3:15)을 바로 잡고 예수님을 탁월한 능력과 권능을 지니신 신분으로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선포할 때에 '메시야'라는 용어를 피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서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뒤에. - 세례인 요한은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앞선 분이고, 먼저 계신 분이시지만(요 1:15), '내 뒤에' 오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묘사한 것은 탄생에 있어서나 공생애의 시작에 있어서 예수님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은 앞서 가는 선구자에 불과하고 뒤에 주인공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오시나니. - 이 말은 헬라어 '에르케타이'( )로 표현되며 원문에서는 문장의 첫 부분에 위치하여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이 말은 현재형으로 쓰여 벌써 오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며 상황의 긴급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오시나니'라는 표현은 당시에 고조되고 있는 유대인의 메시야 대망 사상을 보여 주는 전통적인 표현 방식이다. 즉 이런 표현은 시 118:26의 '주의 이름으로 오실 이', 창 49:10의 '실로가 오시기까지' 등의 구약 성경의 말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메시야 출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을 것이다.
굽혀 그의 신들 메를 풀기도. - 세례인 요한은 자신과 곧 이어 출현할 '능력 많으신 이'에 대한 차이를 당시 보편적으로 시행되던 종의 제도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이 어구는 외출하고 돌아온 주인이나 혹은 방문한 귀한 손님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신을 깨끗이 닦는 일과 발을 씻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매우 천하게 여기는 일로서 가장 겸비한 종이나 사환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례인 요한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기를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 중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종보다도 더 하찮은 존재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 나는 물로‥‥세례를 주시리라. - 앞 절에 나오는 예수와 세례인 요한 간의 신분상 구별이 본절에서는 행하는 사역에 있어서의 차이로 보다 구체화된다. 즉 본절에서 세례인 요한은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며,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런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고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요한의 물세례는 외적이고 인간적이며 예비적이고 초보적인 것으로서 성례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내적이고 신적이며 완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성령을 사람 속에 임재하게 함으로써 거듭나게 하며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게 한다. 또한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각종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로 말미암아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 한편 이 성령 세례는 물세례를 받기 이전에 주어지기도 하고(행 9:17), 물세례를 받는 동시에 주어지기도하며(행 19:5,6), 또는 그 이후에 주어지기도 한다(행 8:17).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성령 세례가 물세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단. 따라서 물세례는 상징적일 뿐이며 형식적인 예식에 불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물세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임재, 거듭남, 은사 수여 등은 물세례와 관계없이 일으키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세례를 주었거니와‥‥주시리라. - 요한의 '세례 줌'(에밥티사)은 그 시제가 부정과거인 반면, 예수님의 '세례 줌'(밥티세이)은 미래형이다. 따라서 이는 요한의 세례는 역사상 있었던 하나의 사건에 불과 하나 예수의 세례는 앞으로 계속될 영속적인 사건임을 보여 준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의 세례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요 16:7; 행 2:33).
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이와 병행 구절인 마 3:11과 눅 3:16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본절에 나오지 않는 '불'이란 말이 첨부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사본은(P) 마가복음 본문에도 '불'(퓨리)이란 말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사본이 취하는 바가 아니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여기서 불이 의미하는 바는 정화, 열심(Calvin, Bengel) 등의 뜻이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성도에게 임하는 성령과 대조되는 불신자에게 마지막 날에 임하는 심판으로 볼 수도 있다(Meyer, De Wetle), 이에 대한 자세한 견해는 마 3:11 주석을 참조하라.
1:9-13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신 예수
앞 단락에서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앞길을 예비하는 그의 사역을 소개한 바 있는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신 사건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 소개되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은 인간 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의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①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낮추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제부터 시작되는 공생애 전체가 종으로서의 철저한 겸손으로 일관될 것이며, 또한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 당하심으로써 자신의 공생애가 엄청난 고난의 연속일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계신다.
②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고 계시며, 또한 광야의 시험을 승리로 장식하심으로써 장차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탄의 권세로부터 온 인류를 해방시켜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계신다. 한편 다른 복음서들에는 아주 상세히 서술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 과정이(마 3:13-4:11; 눅 3:21-4:13) 본서에는 세례를 받으신 후 기도하신 사실이나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 및 시험의 과정이 생략된 채 지극히 간략하게 소개되는 이유도 이미 앞 단락의 강해를 통해 설명한 것처럼, 가급적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서 본서를 기록하려는 것이 마가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예수님께서 감히 자신의 신들 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세례인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일면 친히 겸손의 모범을 보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겸손의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마 18:1-4; 20:26-28; 빌 2:3-8).
② 성도들은 큰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움에 떨 것이 아니라 사탄의 시험을 능히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우리가 시험 당할 때 능히 도와주신다(히 2:18; 4:15,16). 그러므로 그 어떤 고난과 시험 속에서라도 성도들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전 15:57; 히 12:1; 요일 5:4,5).
1:9 그 때에. - 이 말은 본서에서 접속사 역할을 하는 연결구의 일종으로 자주 쓰이고 있으며, '그 날들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전개될 사건이 큰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여기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세례인 요한이 세례 주는 활동의 절정기'이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때를 의미한다. 반면에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때와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가 같으므로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갈릴리 나사렛. - 다른 복음서는 분명한 지명을 생략하고 있으나 마가만이 갈릴리라는 당시 팔레스틴의 4대 행정 구역 명칭과 나사렛이라는 고을 이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그 역사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사렛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은 무명 촌락으로서 레바논 산악지대의 남쪽 산맥을 이루는 산들 사이에 있는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120km 지점이며 에스드렐론 평원을 남으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한편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돌아와 30세가 되기까지 사신 곳이다. 갈릴리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역설적이고 놀라운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죄라고는 전혀 없으시며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인데 타락한 인간에게서 회개의 세례인 물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써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과 완전히 동일시되고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의 세례, 즉 물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한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때 세례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알고 세례 주기를 일차 거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마3:14,15).
1:10 곧. - '유뒤스'( )라는 이 말은 마태복음에 18회, 누가복음에 7회 나타난 반면, 전체 길이에 있어 보다 짧은 마가복음에서 41회 정도 기록되었다. 이처럼 이 말이 자주 사용됨에 따라 마치 사건들이 간격 없이 잇달아 일어난 듯한 인상을 주어 마가복음 전체에 긴장성을 주며 박진감이 넘치게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곧'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으며 또한 거의 동시적으로 성령의 임함과 하나님의 증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속에서 올라 오실새. - 이 말은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가 세례(浸禮)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몇몇 학자들은(Hendrmien, Lenski)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가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이 아니라 '뿌리거나 씻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본절과 더불어 병행 구절인 마 3:16에 쓰인 '~에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포'( )가 예수님께서 물 속에서 떠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를 준다는 뜻의 헬라어 '밥티조'( )는 '잠그다'의 의미도 있지만, '씻는다'는 의미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세례는 외적형식보다도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이 더 중요하므로 어떤 외적 형식을 절대시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늘이 갈라짐. - 마태와 누가가 하늘이 '열리고'(아노이고)란 보다 객관적 용어를 사용한 반면, 여기서 마가는 헬라어 '스키조'(가르다, 째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하늘이 갈라진 사건을 생동감 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어구가 하늘이 실제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쳤거나, 천둥이나 번갯불이 발생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에스겔도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고 했고(겔 1:1), 스데반도 역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고 했다(행 7:56). 따라서 이 어구는 에스겔이나 스데반의 경우처럼 실제로 하늘이 갈라진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만이 광경을 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 1:32-34과 비교해 볼 때 하늘이 갈라진 사건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세례인 요한과 기타의 사람들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발생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가는 다른 사람보다 오직 예수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이‥‥내려오심. - 혹자는 이때 임한 성령이 인간 예수를 구속 사역의 담당자인 그리스도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그 성령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시 떠난 것으로 추론함으로써 성자의 성육신(成肉身) 교리를 반대한다(Gnosticism). 그러나 이때 예수께 성령이 내려온 것은 그의 구속 사역에 권위를 더하기 위한 기름부음의 성격을 지닐 뿐이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가 취하신 인성을 강화시킴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의 입장에서 3직, 즉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기름부음이었다(행 10:38). 그러므로 세례 시에 예수님께 강림한 성령은 예수께서 자신의 3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권위와 능력의 전달자로서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순결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온유하고 평화로운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건은 시 45:7과 사 61:1의 예언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비둘기 같이. - 성경 가운데는 성령이 '물'(요 7:38,39), '바람'(행 2:2), '불'(행 2:3) 등으로 비유되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순결하고 온유한 성격을 지녔음을 강조하기 위해 비둘기(요 1:32)같이 임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 음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적 인준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경우,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은 들을 수 없고 '목소리의 올림', 즉 '메아리' 정도만 들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본절의 '소리'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출 19:3,20)과 같은 누구나 분별할 수 있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음성이었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계시의 소리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계시가 단절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 시점에 맞추어 직접적인 계시를 주심으로써 그 이후에 있을 활발해질 신적 계시를 암시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 일반적으로 이 말은 시 2:7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과 사 42:1의 '하나님이 붙드시는 나의 종'의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메시야로서 신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구속의 계획을 그대로 실천하는 존재임을 선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본절과 같은 선언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은 자연인인 예수님이 세례 때에 나타난 현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신적 본질을 지니게 되었으며 십자가에서 고난 받을 때에 신적 본질이 벗어지고 다시 자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받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신적 존재였다(요 1:1-3). 이러한 사실은 여기서 문장의 시제가 현재 직설법으로 나와 있으므로 당시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신분을 표시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한편 하늘의 음성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비준은 후에 변화 산에서 변형되신 때와(마 17:1-5) 수난주간 첫날에 있었던 예루살렘 입성 시에도 선포되었다(요 12:2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 시점과 절정기 그리고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항상 같이 계시면서 인류 구원 사역에 힘이 되셨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여기서 '기뻐하다'(유도케사)는 '인정하다', '기뻐하다'(유도케오)의 과거 직설법으로서 세례를 받으시는 시점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정했고 좋게 여기고 있었음을 확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세례 시 비로소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 인정받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1:12 예수를‥‥몰아내신지라. - 본절은 예수님이 시험받으러 광야로 가시는 모습을 생생하고 급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결과 소명 받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붙잡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로 급하게 옮겨진 것 같은 급박함을 느끼게 한다(왕상 18:12; 행 8:39). 이러한 사실은 '밖으로'( )와 '던지다'( )의 합성어인 '몰아내셨다'(에크발레이)'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이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추방하다', '내쫓다'라는 의미로 자주 쓰인 과격한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 말은 외적 강압의 수단을 사용하여 몰아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몰아내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반대로 이 말은 예수께서 성령에 충만하여 자발적으로 순응하신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말이 '재촉하다', '내어놓다'(요 10:4)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본절에서도 '곧'(유뒤스)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
광야. - 마가는 마태나 누가와 마찬가지로 시험받으신 장소를 그저 광야라고만 할 뿐 정확한 장소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실제로 금식하신 광야를 모세와 엘리야가 금식한 시내 산으로 보기도 하고 다볼 산(히브리인의 복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리고 서북쪽 콰란타니아(Quarantania) 부근으로 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장소는 세례 받으신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다고 했는데 콰란타니아 지역은 여우 ․ 이리 ․ 표범 ․ 멧돼지 ․ 뱀 등의 들짐승들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1:13 사십 일을 계셔서. -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시험받으시던 상황 즉 금식하신 것과 세 가지 시험받으신 사실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마 4:1-11; 눅 4:1-13). 그러나 마가는 이러한 내용이 없이 40일 동안 들짐승과 함께 계셨으며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만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40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수행과 깊은 관계가 있는 수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에 시내 산에서 40일 머물렀고(출 34:28). 엘리야가 호렙 산을 찾아 40일 동안 광야에서 유랑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신 40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공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며 일종의 연단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사탄. - 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 1권 성경교리, '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시험을 받으시며. - 본문의 '시험받다'(페이라조)는 '시험해 보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어 '어떤 사람을 영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하여 시험하다'란 뜻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탄에게'라는 말과 함께 쓰였으므로 '예수님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 4:1 주석 참조. 한편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사탄에게 받은 유혹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 시험은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으리라는 예언(창 3:15)을 성취하는 사건이었다(창 3장 자료노트. '원시복음'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 이 시험을 당하신 것은 사탄의 소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공적 사명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험과 고난을 친히 겪으심으로써 연약한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을 들기 위한 것이었다(히 2:18; 4:15). 한편 '시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출 1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 말은 마가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예수님이 머물고 있는 광야가 야생동물들이 많이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없으며 황량하고 쓸쓸한 장소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독과 역경의 장소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승리하셨다. 한편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은 인류가 최초로 살았던 에덴동산의 상황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상태에 있었으나 사탄에게 패배하여 인류로 하여금 멸망과 타락의 길을 걷게 하였다. 반면에 광야에서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고독과 역경의 상태에서 사탄에게 승리 하셨으며 인류를 회복하고 새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들짐승들과 함께 계시면서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사건은 인류를 사탄에게서 구원하실 메시야가 도래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마 4:11에 따르면 마귀가 예수님을 3번에 걸쳐 시험했으나 이를 이기자 마귀가 떠나고 그 이후에 비로소 천사가 등장하여 수종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천사의 수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천사의 사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시 103:20) 성도들을 도우는 일에 있다는(히 1:14) 점에서 볼 때 당시 천사 역시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의 육체적 약함을 보살핀 것으로 볼 수 있다.
1:14-20 공생애 사역의 시작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유대 중심의 전도 활동을 다루는 반면 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의 전도 활동을 다룬다. 본서 역시 본문에서부터 9장까지 갈릴리 전도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다시 전반기(1:14-5:43)와 후반기(6:1-9:50)로 나누어지는데, 전반기는 세례인 요한의 체포로부터(1:14) 시작하는 반면 후반기는 세례인 요한의 죽음으로부터(6:27) 시작된다. 또한 전반기는 또 다시 1차 갈릴리 사역과(1:14-3:12) 2차 갈릴리 사역으로(3:13-5:43) 나누어지는데,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세우시는 것을 분기점으로 한다.
한편 실제로는 갈릴리 사역 이전에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에서 먼저 사역하신바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2:13-4:42),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그것을 생략한 채 곧바로 갈릴리사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아마 비천하고 조롱 받는 땅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다룸으로써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마가의 생각이었던 듯하다. 즉 마가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던 갈릴리 지방에서 주로 사역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시기조차 하셨던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요 1:46; 빌 2:7,8). 본권 사복음서 개론 '사중 복음서의 이해'를 참조하라. 한편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는 베드로를 위시한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신 사건도 포함되는데, 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봉사할 일꾼으로 갈릴리 해변의 미천(微賤)한 어부들을 일부러 택하셨다. 그런데 제자를 부르신 사건 역시 요한복음에서는 이에 앞선 유대 사역 중 3제자를 부르신 일이 언급되어 있다(요 1:35-42). 즉 요한복음은 예수와 3제자의 첫 번째 접촉을 언급하는데 반해 본서와 마태복음(마 4 :18-22)과 누가복음(눅 5:1-11) 기자는 실제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건을 기록하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갈릴리의 미천한 어부들에게 천국을 선포하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그들을 부르신 본문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서는 단지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고 재물이 풍족하며 학식이 깊은 사람들을 택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기보다, 비록 세상적인 조건들을 구비하지는 못했어도 온전한 순종과 헌신의 자세를 지던 사람만을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신다(고전 1:26-28). 예수님께서도 그저 평범한 어부에 불과한 사람들(행 4:13)을 자신의 제자로 택하셨는데, 결국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의 자세를 보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삼상 16:7).
②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고 또한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베드로를 위시한 네 명의 제자들은 즉시 가족과 생업과 집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신 말씀 역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창 12:1).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점하여 섬길 수 없듯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을 동시에 따를 수는 없는 법이다(마 6:24).
1:14 요한이 잡힌 후. -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세례인 요한이 잡힌 사실을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세례를 기록하기(눅 3:21,22) 전에 요한이 잡힌 사실과 그 원인을 짤막하게 기록하였다(눅 3:19,20).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기록하기 전에 요한이 잡힌 사실만 언급하였고 뒷부분(마 14:3-12; 막 6:17-29)에서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요한의 투옥을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과 연결시킨 것은 이 두 사람의 사역이 독특한 관계로 연결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세례인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와서 자신의 사명을 다했고, 이제부터는 그가 소개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예수께서 활동하던 당시가 의인이 핍박을 받던 시대임을 암시하며 그리스도 역시 후에 세례인 요한처럼 고난 가운데 처해질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광야 시험 이후 초기 갈릴리 사역 사이에 있었던 가나에서의 이적이나 초기 유대사역은 요 1:35-4:42에 기록되어 있다.
갈릴리에‥‥복음을 전파하여. - '갈릴리'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방의 갈릴리'로 언급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잡다한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과거 스불론과 납달리 영토에 속하는 지역이었다(사 9:1). 그런데 이사야 당시의 다른 자료들은 갈릴리를 아셀(왕상 9:10-13)이나 잇사갈과 인접한 지역이거나 또는 납달리와 인접한 지역(왕하 15:29)에 해당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갈릴리는 공식적인 행정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종적인 혼합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이방인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을 비하시켜 부르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디글랏 빌레셀이 이 지역을 앗수르 제국에 병합하였고(B.C. 734년) 그 후 6세기 동안 바벨론, 페르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오고 나갔던 사실과 관계된다. 따라서 페르시아 시대부터 갈릴리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혼합종교와 우상 숭배가 성행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요 7:41,52). 그러나 사 9:1-7에 보면 갈릴리는 신 현현의 장소였다. 즉 이 지역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고 큰 빛이 비취게 하시며 즐거움이 넘치게 하겠다고 하신 지역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공적 사역의 초두에 갈릴리 지역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마 4:12-17).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본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유대 지역에서 세례인 요한이 체포되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새로운 사상을 전락하는 사람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요 4:1-3). 즉 예수께서는 이들의 방해를 피해 복음 전파를 하시기 위해 그들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으로 오신 것이다. 갈릴리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는 가버나움이었다(마 4:13).
하나님의 복음.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이다. 이는 예수께서 직접 전파하신 '좋은 소식'(Good News)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전파해야 할 전도의 내용이기도 하다.
1:15 본절은 14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때가 찼고. - 여기서 '때'는 헬라어 '카이로스'( )로 표현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될 '결정적인 시점을 말한다. 즉 이 말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사역을 시작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찼고'(페플레로타이)라는 동사가 강조되고 있는데, 그 동사는 완료시제로 쓰여서 꽉 찬 상태에서 대기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때가 찼고'라는 말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하나님의 왕적 지배,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통치를 의미한다. 또한 이 개념은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현재성과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가 미래에 완전하게 실현된다는 미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성장의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도래에 의해 점차 성장하고 완전해질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가까이 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 )가 신약에서는 통상적으로 '접근하다', '도착하다'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백성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믿도록 촉구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강조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다 자세한 개념은 눅 서론 특별자료,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본절의 메시지는 세례인 요한이 전파한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것이다(4절). 다만 요한이 전파한 복음이 앞으로 도래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었다면, 예수님이 전파한 복음은 이미 출현한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4절). 한편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서 완전히 돌이키고 마음과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또한 '믿는다'는 말은 회개한 사람이 지금까지 지녔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적극적인 권면이다. 이처럼 본절에 나오는 회개와 신앙은 죄악된 옛 생활을 떠나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방향 전환으로서 이 둘을 합해 '회심'(回心)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제1권 성경 교리, 구원론의 구원의 단계를 참조하라.
1:16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담수호(민물 호수)로서 성경에서 바다로 불리기도 하고 호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곳을 '비파 바다'란 뜻이 있는 '긴네렛 바다'라고 불렀다(민 34:11; 수 11:2; 19:35). 이 이름으로 불린 이유는 ①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비파 모양의 긴네렛이라는(신 3:17) 성읍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② 갈릴리 바다 모양이 비파 모양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곳을 일반적으로 그 지역 명칭을 반영하여 '갈릴리 바다'라고 불렀고 그 외에도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디베랴 바다'(요 6:1)라고 불렀다. 한편 이 바다는 길이가 약 20km, 가장 큰 폭의 넓이가 약 12km이며,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50m 정도 된다고 한다. 그리고 지형적인 영향으로 돌풍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많은 고기가 서식하고 있어서 고기잡이가 번창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바다를 중심으로 여러 성읍에서 사역하셨고 또한 해변과 들판에서 무리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갈릴리 바다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막 4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지나가시다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테오'( )는 '~을 통해서'(페리)와 '밝다'(파테오)의 합성어로서 '주위를 걷다' 혹은 '통하여 지나가다'란 의미가 있다. 따라서 혹자는 예수께서 일시적으로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를 목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당시 갈릴리 지역이 예수 전도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이곳의 방문 역시 단 회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병행구절인 눅 5:1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무리의 옹위(擁衛)를 받으며 말씀을 전파하실 때이며, 시몬의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서도 암시 받을 수 있다. 즉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많은 무리가 따라다닐 만큼 갈릴리에서 유명한 분이셨고, 안드레는 세례인 요한의 소개에 의해 이미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유대지역에서 베드로에게 소개한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요 1:35-42).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들음'이란 뜻이며 이미 예수께서 별명으로 아랍어로 '바위'란 뜻이 있는 '게바'란 이름을 주신 적이 있다(요 1:42). 한편 시몬을 부르는 보편적 이름인 '베드로'는 이러한 게바의 헬라어식 이름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베드로' 또는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자주 나타난다. 그런데 그는 성격이 급하고 활동적인 사람이었으며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간주되었으며 다른 제자들을 대신해서 행동하거나 말한 적이 많았다(마 16:16; 19:27; 막 8:29; 10:28). 베드로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안드레는 헬라식 이름으로 '남자'란 뜻이다. 그리고 안드레는 세례인 요한을 따르다가 세례인 요한의 증언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른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요 1:37,40,41). 그런데 그가 세례인 요한의 증언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른 것을 볼 때 메시야의 도래를 충심으로 기다린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드레에 대해서는 요 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 마가와 마찬가지로 마태 역시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른 상황을 그물 던지는 것으로 묘사했으나(마 4:18) 누가는 예수께서 그물을 씻는 이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배를 이용하여 무리를 가르치신 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질 것을 명령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하는 이적을 베푸신 사실이 선행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눅 5:1-11). 이는 복음서의 기록이 상호 틀리는 것이 아니라 누가가 보다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며,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말씀 전하신 일이나 고기를 잡도록 하신 사건을 생략하고 제자를 부른 사건만을 부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1:17 나를 따라오너라. - 여기서 '따라'(오퍼소)는 시간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로서 '~뒤에'(after)란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시몬과 안드레가 자기가 설정한 방향대로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이 진정 제자된 자가 취할 태도이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 앞부분이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의 의무라면 이 부분은 제자된 자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즉 예수의 부름은 공허한 부름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게 하려는 부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원문에는 복수로 나와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당시 주변에 있던 갈릴리 사람들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됨을 보여 준다. 한편 구약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 낚는 어부들을 모집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 때가 가까이 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이다(렘 16:16; 겔 29:4,5; 암 4 :2).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세상을 향한 심판이 예정대로 시작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꾼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본절은 본서 전체에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야기된 종말론적 긴급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18 곧 그물을‥‥좇으니라. - 여기서 '곧'(유뒤스)이란 말은 예수님의 부름에 대한 시몬과 안드레의 응답이 즉각적이고 신속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의 응답은 자기의 모든 과거와 생업을 포기하는 희생과 헌신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들은 어부들에게는 그물과 배가 필수적인 생존 수단인데도 과감하게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철한 것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그 나라와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어부들이 생존 수단인 그물을 즉각적으로 버렸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좇으니라'(아콜루데인)는 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 '아'(α)와 '길'을 나타내는 '켈류도스'( )의 합성어로서 직접적인 의미는 '함께 길에 있다', 즉 '동행하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의 삶을 본받은 동반자로서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1:19 조금 더 가시다가. - 예수께서 첫 번째 제자를 부르신 상황이 언급된 본절과 병행 구절인 눅 5:1-11에는 베드로를 부르신 장면 위주로 쓰여진 반면, 본절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이는 누가복음이 초대 교회의 구심점이었던 베드로에게 보다 관심을 기울인 반면, 본서는 보다 객관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한편 누가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 예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베드로로 하여금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고 이를 목격한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베대의 아들. - 16절에서는 시몬과 안드레의 부친이 소개되지 않는 반면, 본절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부친이 세베대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아마 세베대가 유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거나 초대 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배를 소유하고 고용인을 데리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지역에 어류 판매망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주요 제자였으며 그의 아내인 살로메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여인들 가운데 한사람이며 예수의 이모였다(마 27:56; 요 19:25).
야고보와‥‥요한. - 공관복음에서 요한과 함께 야고보를 언급할 경우 대부분 야고보가 먼저 나온다. 따라서 야고보가 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12제자 중에서 야고보의 순교기사가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그가 제자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A.D. 42-44)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바울의 체포를 포함한 광범위한 박해의 때였다(행 12:1-3). 야고보에 대해서는 막 10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제자로 선택된 후 야고보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의 핵심 제자로서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했다. 또한 그는 1세기 말경 A.D. 90-100년 사이에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며,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에베소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요한에 대해서는 요일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 두 사람은 과격한 성격 때문에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막 3:17). 한편 그들이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함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막 5:37; 눅 8:51),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될 때(마 17:1; 막 9:2; 눅 9:28),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마 26:37; 막 14:33)에 이 세 제자가 함께 동참하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 데. - 팔레스틴의 고기잡이 관습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저녁 시간에 고기를 잡고 낮에는 그물을 정리하는 등 출어(出漁) 준비를 하곤 한다. 따라서 혹자는 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른 시간과 그물을 깁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른 시간 사이에는 다소 시간적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성경이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출현과 무리들을 가르치심, 그리고 기적적 방법으로 고기를 잡게 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신(눅 5:1-11) 전체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의 추정은 쉽지 않다. 여하튼 본서가 강조하는 바는 생업을 위해 노력하던 중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한 그들의 헌신적 결단이다.
1:20 곧 부르시니. - 10,18절과 더불어 '곧'(유뒤스)이란 표현이 또 사용되어 마가복음 전체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쉴 틈 없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된 사역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 4:22에서는 동일한 사건의 내용 묘사를 함에 있어 '곧'이란 말을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를 좇는 동작에 관계시킴으로써 왕으로 오신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신속한 결단을 강조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여기서 '삯군'이란 말은 특별히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로서 야고보와 요한의 생활상을 알게 한다. 즉 그들은 가난한 어부들이 아니라 삯군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러한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강한 의지와 결단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가 강렬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즉각적인 순종은 종말론적 긴박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21-28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설교와 축사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적(요 2:1-11)과 갈릴리에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이적(요 4:46-54)이 기록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서는 본문에 나타난바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사건(눅 4:31-37)이 여수께서 행하신 첫 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맥락에서 볼 때 앞 단락에 언급된 공생애 사역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하여,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초자연적 이적으로서 신적 권능을 입증하신 사건이란 의미를 갖는다. 즉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저명한 랍비들의 말을 너무나 자주 인용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능력 없는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았으며, 다만 참된 권위의 원천인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셨음(막 9장 자료노트, '축사의 이해' 참조)을 보여준다. 여기서 귀신을 물아내신 예수의 사역은 자신이 영적 왕권을 지니신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야 된 신분과 그 사역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를 참조하라. 더불어 이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얼마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이적의 연속일 것인지를 미리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추상적인 신학 지식의 소유자들이 되기보다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초래하는 영적 지혜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크게 놀란 이유는 그저 공허하기 짝이 없는 말만 늘어놓는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권세 있고 생명력 넘치는 교훈을 전해 주셨기 때문이었다(27절).
②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아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가버나움 회당의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다'(24절)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그의 이러한 고백은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실로 우리의 믿음은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진정 마음에서 받아들이며, 생활 속에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들을 질책하면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는 믿음과 또 신앙고백은 전혀 무의미하다(마 7:21).
1:21 저희가. - 이제 예수께는 이미 부른 4제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복수형이 사용되고 있다.
가버나움. - 가버나움은 구약에서나 외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동네이나 예수님의 초기 전도의 주요거점이었으므로 복음서에서는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곳으로 갈릴리 바다 서 북편에 위치했었다. 가버나움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마 9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그곳에는 예수님의 집이 있었으며 마태와 베드로 등의 집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마 8:14; 9:1,9). 그리고 그곳에는 국립세관이 있어서(마 9:9; 눅 5:27) 어업세와 통관세를 받았다. 또한 그곳에는 로마군대의 파견대 막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중요한 일을 많이 행하신 곳이었다. 즉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마 8:14,15), 백부장의 종에게 이적을 행하셨고(마 8:5-13), 중풍병자를 고치셨고(마 9:1-8), 세관에서 레위(마태)를 부르셨고(마 9:9), 생명의 떡에 관한 신기한 설교를 해주신 곳이었다(요 6:59). 그러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저주를 선포하셨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예수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신앙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마 11:23).
곧 안식일에. - 이 부분 역시 '곧'이란 말로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된 모습을 보여 준다. 한편 히브리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6시경부터 토요일 오후 6시경까지 지켜지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안식일 시작 예배가 드려지는 금요일 오후 6시 이전에 이미 회당에 들어가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안식일에 대해서는 신 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회당에 들어가. -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었으나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마다 있었다. 그런데 이 회당의 주요 목적은 모세의 율법으로 교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베풀어지는 교훈은 회당장에 의하여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사람이면 누구라도 말할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특히 랍비나 권위 있는 교사가 그날 읽은 성경을 해석하도록 회당장에 의하여 초청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회당 예배는 성전 예배와는 달랐으며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의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한편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에 처음으로 수립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예루살렘 성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그들의 신앙을 교육하고 전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이러한 회당 제도는 포로 귀환하여 성전이 재건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디아스포라유대인들과 함께 로마제국 도처에 퍼졌다(에 9장 연구자료 '디아스포라의 이해' 참조). 이처럼 여러 곳에 산재하였으며 진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합법적 공간인 회당은 초창기 기독교 복음 전파의 중요한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마 4:23; 행 17:1,2).
가르치시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다스케'( )는 3인칭 단수 미완료 시제이므로 예수의 가르치는 행위가 과거부터 일상적으로 계속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로 보아 이미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잘 알려진 선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 본절의 '놀라니'(엑세플렛손토)는 '밖으로'를 의미하는 '에크'( )와 '때린다'를 의미하는 '플렛소'( )를 합성한 것으로서 강한 충격을 받아 '정신이 멍하였다', '넋을 잃고 있었다'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 커다란 충격과 놀라옴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그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기관들은 그들의 스승들의 권위에 입각하여 가르쳤으며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서기관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따라서 그들은 '~라고 말하여져 왔다'라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스승들의 교훈과 결론들을 반복할 따름이었다(마 5:31,32; 19:7-9). 반면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에 입각하여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32, 34,39,44)라는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하였으며 기존 율법을 강조하거나 재해석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청중들을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예수님과 서기관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① 예수께서는 실제적인 상황들을 비유로 하여 율법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생생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교훈은 대부분 와전한 것이었고 사변적인 것이어서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② 예수께서는 참 목자의 심정으로 진정한 사랑을 갖고 그들을 교훈하였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삯군의 심정으로 사랑보다는 명예와 재물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였다(마 23:23). ③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도록 교훈하시고 구원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청중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 주셨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에 충실하도록 가르쳤으며 따분하고 형식적인 것들에 얽매여 있어서 청중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줄 수 얼었다(마 15:2-6; 막 7:3-13). 따라서 청중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을 때 신선한 충격과 놀라움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권세.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아'( )는 '허용하다', '가능하다', '적합하다'는 뜻이 있는 '엑세스티'( )에서 유래하여 선택할 수 있는 '자유'(tribefy), '권리'(고전 7:37), '능력' 등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권리(right)와 능력이 있었던 것이 이를 듣는 사람들에 의해 입증된 것이다.
1:23 마침. - 원문에는 이 말에 직접적인 대응어가 없으나 본절의 사건이 22절에 이어 즉시 일어났음을 강조하기 위한 삽입어이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더러운 귀신들린'이란 표현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상태, 또는 귀신에게 소유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러운'(아카다르토스)은 부정(否定)을 나타내는 부정사 '아'(α)와 '정결하다'는 의미를 가진 '카다이로'(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윤리적으로 선한 요소가 다 없어진 것을 묘사하는 말로서 이 귀신이 극단적으로 부패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어떤 현대 주석가들은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신을 믿거나 계몽이 덜된 사람들이 정신 이상이나 간질병의 상태를 귀신들린 것으로 상상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본절은 귀신이 실제로 사람을 지배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그리고 예수께서도 복음서에서 여러 번 귀신의 실체를 인정하셨다(마 4:24; 8:16; 막 9:25; 눅 8:2). 또한 예수께서 파견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실제로 귀신들을 좇아내고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눅 10:17). 따라서 귀신은 단순히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귀신에 대해서는 본서 제 1권 성경교리 신론 '영적 세계의 창조'를 참조하라.
소리 질러. - 병행 구절인 눅 4:33에는 '크게 소리 질러'로 나와 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가 사탄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므로 이는 귀신이 예수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려는 목적에서 취한 행동이다.
1:24 나사렛 예수. - 예수를 소개함에 있어 본서에 4번 기록된 이러한 표현은(막 10:47; 14:67; 16:6) 출생지나 성장지를 이름 앞에 말하는 히브리인의 관용적인 습관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중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을 보다 참조하라.
우리가‥‥상관이 있나이까. - 여기서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과 귀신을 함께 지칭하는 말이라는 견해가 있다(Robertson).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께서 파괴하실 전체 귀신들, 즉 소리친 귀신과 그 동료 귀신들을 모두 언급하는 말이라고 본다(Lange, We). 그런데 귀신이 소리친 이 말은 '당신은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이어지는 절규와 관련지어 볼 때 '당신과 나는 상관이 없으니 내일에 상관하지 마시오'라는 부탁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종말론적 심판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벌써 오셨느냐고 항의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째든 이 말은 귀신들이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심판주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고 당황하고 흥분한 나머지 최후의 저항을 하면서 지르는 두려움과 공포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 여기서 '멸하다'(아폴뤼미)는 '상하다'(눅 21:18), '죽이다'(마 2:13)등의 뜻을 가진다. 즉 귀신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를 멸하러 오신 사명을(요일 3:8)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이 점차 상하여지며 결국 없어져 버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 - '거룩한 자'(하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신자들'(하기오이)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했으나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합 1:12).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께 적용되어 그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고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 성별 받고 구별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귀신이 예수님은 무죄하며 신성을 지닌 분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시인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귀신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인 행동이었다(Burkill).
1:25 예수께서 꾸짖어. - 여기서 '꾸짖다'(에피티마오)는 '경고하다'는 뜻과 더불어 '명하다'(눅 9:21), '벌하다'는 의미도 있다. 즉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경고하며 명령하는 권세를 지니셨으며 그들의 불의를 꾸짖으심으로 그들의 악행을 제어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마귀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로 이를 이겨야 한다.
잠잠하고‥‥나오라. - 본절에서 예수님이 '잠잠하라'고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①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에게서 자신의 신분을 승인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귀신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다고 볼 수 있다. ② 귀신의 방어적 발언(24절)을 무력화시키고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그 당시 사람들의 잘못된 메시야 개념, 즉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 개념을 바로잡을 때까지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26 경련을‥‥큰 소리를 지르며. - 여기서 '경련을 일으킨다'는 말은 몸부림치며 몸을 비트는 것을 뜻하며 육체적으로 상처를 당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병행구인 눅 4:35에서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고, 또한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파랏소'( )는 간질병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행동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막 9:26; 눅 9:39). 따라서 KJV의 '상하게 하고'(had torn)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며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떠날 때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신이 떠난 장면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한다. ① 더러운 귀신이 실제적으로 그 사람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② 귀신의 분노와 사악성을 잘 보여 준다. ③ 귀신은 자기가 원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에 의해서 강제로 추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본절은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탄의 왕국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으로 파괴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되기 시작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성도의 승리가 보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막 9장 자료노트, '축사의 이해' 참조.
1:27 다 놀라‥‥권세 있는 새 교훈. - '다 놀라'라는 말은 22절의 '뭇 사람이‥‥놀라니'와 비슷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22절은 다른 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한 교훈에 놀랐음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본절은 귀신까지 복종하는 신적 권위를 지닌 행동으로 인해 놀랐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22절의 놀람은 예수님의 교훈이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교훈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절은 예수님이 귀신을 좇아내는 방법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져 오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놀랐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 당시 백성들은 영적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귀신에게 압도되었고 감히 그 권세에 대항하지 못했다. 따라서 귀신을 굴복시킴으로써 다스리기보다는 주술이나 마술, 제사 등을 통하여 위로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떠나게 하였다. 또한 더 강한 귀신을 불러 약한 귀신을 내쫓기도 했다(마 12: 24).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좇아버렸다. 따라서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은 사건은 그가 귀신들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권세 있는 분이라는 것과 그를 통하여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새로운 교훈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물어 가로되. - 병행 구절인 눅 4:36에서는 '서로 말하여 가로되'로 나오나 본절의 표현은 마가복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바와 같이 보다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역동성을 지닌다. 즉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행위를 믿기 어려워 서로 이것이 사실인가 반문할 정도로 놀라움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새 교훈. - 여기서 '새'(카이노스)는 '어리다', '신선하다'는 의미를 지닌 '네오스'( )와는 달리 '지금까지 알려지거나 써본 적이 없는 낫선'(마 9:17; 행 17:19)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로 보아 예수의 교훈은 이런 사람들이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즉 최초로 접한 신적 권위를 지닌 교훈임을 알 수 있다.
1:28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본절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즉각적으로 온 갈릴리 지역에 퍼졌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온 갈릴리 사방이란 눅 4:37의 '그 근처 사방에'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지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여 '사방에'를 보충하고 설명하는 의미를 지닌다면 갈릴리 지역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본절은 회당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설교와 사역이 매우 놀랍고 새로운 것이어서 당시의 백성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일으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9-45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 예수
앞 단락에 예고된 바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참으로 권세 있는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이적의 연속이었다. 바로 본문은 그러한 맥락에서, 마가복음에서의 첫 순회전도와(39절) 여러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힘차게 증거 하심과 아울러 각종 치유의 이적들을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인간들의 육신적인 질병과 영적인 질병을 동시에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마 8장 자료노트, '치유의 상징적 의미'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내용은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고치심(29-31절),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심(32-34절), 예수님의 기도 생활과 전도(35-39절), 문둥병자를 고치심(40-45절)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 이러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의 표현은 인간들의 곡해로 인해(36,37,45절) 복음 전파 사역에 방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부분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과 정치적 기득권자들에게 배척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초기 사역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이 자신의 온갖 문제거리들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지고 와서 그 앞에 내어 놓기만 하면 틀림없이 모두 해결 받을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각종 병자들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곤고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긍휼히 여겨주실 줄로 믿고 주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마침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다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서 그 모든 짐을 그분께 맡겨 버리기만 하면, 반드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시 68:19; 마 11:25-30; 요 14:27).
② 성도들이 항상 능력 있는 삶과 믿음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기도에 있다.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서라도 성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교제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항상 기도하셨거늘, 하물며 연약하기 짝이 없는 품성을 지닌 우리 성도들이 늘 기도에 힘쓰지 않고서 능력 있는 믿음과 삶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살전 5:17). ③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뿐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문둥병자가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와 아울러 주님의 권세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정녕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온전히 순종하는 자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다(시 37:5; 사 57:15; 약 4:6).
1:29 회당에서 나와 곧. - 회당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베푸시고 귀신을 좇아내신 후 바로 뒤 이어 또 다른 이적을 행하셨음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본서는 쉴새 없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봉사하시는 예수님의 종된 사역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 이하의 이적 역시 위의 이적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다.
시몬과 안드레의 집. -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들어간 집은 마 8:14에는 '베드로의 집', 눅 4:38에는'시몬의 집'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본문에서는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가족제도가 가부장적이며 연장자 위주의 가정이었음을 참고할 때 베드로가 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아마도 그의 아버지 요한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요 1:42). 한편 마태나 누가와 달리 본절에서만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본서의 저자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로서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에 힘입어 본서를 썼음에 비추어 볼 때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낮추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0 시몬의 장모. -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이다. 그런데 시몬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부인과 함께 전도여행을 했다는 성경의 암시(고전 9:5)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 또는 페페투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초대교회 교부)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에게 자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부인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순교 당하게 되었을 때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말함으로써 격려했다고 한다.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 의사였던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걸렸음을 알 수 있다(눅 4:38). 이 열병은 헬라어로 '퓨레토스'( )인데 일반적으로 고열과 탈수 현상을 동반한 말라리아를 가리킨다. 그런데 말라리아는 고대 팔레스틴 지방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풍토병으로 높은 사망률을 지니고 있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바로 이 병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한 열병'이란 누가의 묘사와 더불어 '누웠는지라'의 헬라어 '카테케이토'( )의 시제가 과거 미완료로서 오랫동안 그 병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1:31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열병을 꾸짖고(눅 4:39)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간단한 행위로 그녀의 열병을 치유했다. 한편 병에서 놓임 받은 그녀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 여기서 수종들었다는 것은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수종드는 행위는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병이 '떠난' 것은 '아페켄'( ), 즉 '보내다'(아피에미)의 부정과거형으로 단회적으로 발생한 사건임에 반해 '수종드니라'란 표현은 '디에코네이'( )로서 '섬기다'(디아코네오)의 미완료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즉 후자의 표현은 현재도 섬기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천지 만물과 더불어 병까지도 다스릴 신적 권세가 있는 분임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가 통상적인 방법에 의한 치료가 아님을 알게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물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즉시 일어나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열이 내린 정도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였음을 알게 한다. 한편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요, 안식의 근원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고생하면서 안식일에도 그 고통에서 놓임 받지 못하고 계속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인 열병을 치유함으로써 그녀에게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예수님이 안식의 근원이요, 안식일의 주인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32 저물어 해질 때에. - 해질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온 이유는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는 짐을 운반할 수 없었고(요 5:10),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5리(약 2km)가 넘는 길을 여행하는 것은 불법이었다(요 11:18). 그리고 이 법에 제한을 받는 시간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해 토요일 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행동을 개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 마태복음이 영적 건강을 상실한 자를 염두에 두고 '귀신들린 자'만을(마 8:16), 누가복음이 육적인 병자를 염두에 두고 '각색 병으로 앓는 자'만을(눅 4:40) 언급한 반면, 마가는 이 둘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사실 당시 팔레스틴의 서민들은 로마의 폭정과 지배층의 수탈로 육적 건강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대중과는 분리된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 정책으로 사람들은 마술 등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귀신들린 자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Lightfoot).
1:33 온 동네가 문 앞에. - 여기서 '온 동네'는 가버나움을 말하며 '문 앞'은 베드로의 집 문 앞을 말한다(Bruce. Cranfield). 한편 본절은 해질 때부터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이 매우 큰 무리를 이루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마가는 마태와 누가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당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의 사역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지 현실감 있게 전하고 있다. 즉 이렇게 큰 무리가 모인 것은 그날 아침 회당에서 귀신을 내쫓은 소문을 들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그리고 그들을 운반하거나 혹은 부축하며 함께 동행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1:34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본절은 예수께 나아온 사람들의 병이 가지각색이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일일이 손을 얹어 그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눅 4:40).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병들고 귀신들린 자들을 부정하게 여셨으며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치유하심으로써 한없는 사랑과 겸손을 보여 주셨다. 한편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마태에 의하면 사 53:4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으로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메시야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마 8:17).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귀신은 쫓겨 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 라고 소리쳤다(눅 4:41). 이처럼 귀신은 영적 존재로서(계 18:2)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마 8:29) 그리스도의 능력(막 1:24)과 구원 계획(약 2:19) 및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딤전 4:1-3).
귀신이‥‥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은 예수님이 귀신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메시야 되심을 공포하시기 전에 자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 공개되며, 또한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야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절과 동일한 상황이 기록된 24,25절 주석을 참조하라.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이는 날이 막 밝아지려고 할 때쯤으로서(눅 4:42) 해가 뜨지 않아서 아직 어둠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NIV, while it was still dark).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장소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여전히 베드로의 집에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전날 많은 병자를 고치시며 밤늦게까지 사람들과 함께 베드로의 집에서 머무셨을 것이다.
한적한 곳으로‥‥기도하시더니. - 여기서 '한적한 곳' 이란 갈릴리 바다 동편 사막지대로 추측된다. 그런데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시고자 하는 목적 외에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① 사람들이 이적에만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기도하셨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각성시키는 수단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적을 체험하고 구경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적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관심을 갖도록 기도하셨을 것이다. ② 인기와 영광을 누리면서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기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메시야로 하여금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후 죄인들을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사 53:3; 요 14:31; 갈 3:13). 그런데 사탄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인기와 영광을 누리게 함으로써 고난의 길을 피하도록 계속적으로 유혹하였다(마 4:5-10). 따라서 예수님은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기도는 예수 생애 가운데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 일상적 행동 중에 하나이다(마 11:25-30; 막 6:41,46; 14:32; 눅 3:21; 6:12; 9:18,28; 22:32; 23:34; 24:30; 요 11:41,42).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서도 이 단어가 미완료형(프로슈케토)으로 나와 있어 계속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1:36 뒤를 따라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 )은 '뒤좇다'(fallow), '조사하다'(search) 등의 뜻이 있으며 적대감을 포함한 말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찾은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찾은 사실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희망과 기대가 매우 강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들이 이와 같이 무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마가는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을 선택되고 교육받았다는 의미를 지니는 '제자들'(마데타이)로 표현하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과 같은 일반인을 지칭하는 말로 묘사했을 것이다.
1:37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예수의 초창기 갈릴리 사역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열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본절에는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돌아가자고 예수님을 재촉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보기 위해 베드로의 집 앞에 모인 가버나움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올바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푸시는 이적을 체험하거나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자고 재촉하듯 예수께 말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예수께서 기대했던 것이며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데 필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 즉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신 것이다(38절). 이는 예수께서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진실로 '모든 사람'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 준다.
1:38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당시 갈릴리 상류 지방에만 하더라도 200여 마을들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많은 자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한편 여기서 '다른 가까운 마을들'은 가버나움 근방의 벳새다, 고라신, 막달라 등을 가리킨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기를 열광적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 것은 이 세상의 인기와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메시야 사역을 이루시고자하신 것을 보여 준다.
전도하리니‥‥왔노라. - 혹자는 여기서 '왔노라'(엑셀돈)란 표현이 '~에서 나오다'로 해석되므로 본문을 가버나움에 머물지 않고 나온 목적을 가리킨다고 본다(Meyer, Alford).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근본 목적이 병 고치고 귀신 좇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Bengel, Alexander, Keil). 그러나 이는 병 고치는 일과 귀신 좇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그 일들은 복음을 믿게 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가리킬 따름이다(눅 4:43).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막 14절부터 시작하여 막 3:19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의 본격적인 시작을 보여 준다. 즉 예수는 이 기간 동안 소외 받은 갈릴리의 여러 지역을 활발히 다니시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하셨던 것이다.
전도하시고‥‥내어 좇으시더라. - 본절은 예수께서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시면서 동시에 죄와 어두움의 세력, 즉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복음이 전파되고 사탄의 세력인 귀신이 쫓겨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며 세상 속에서 이미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복음이 전파되고 귀신이 쫓겨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사탄의 세력은 힘없이 파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온 갈릴리에 다니신 것은 죄와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는 승리의 행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초기 전도의 중심지는 회당이었으며 이는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행 13:15). 이런 의미에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생긴 회당은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사전 준비였다고 볼 수 있다.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1:40 본절에서 45절까지에 기록된 '문둥병자' 치유사건은 마 8:1-4와 눅 5:12-16과 동일한 사건이다. 한편 누가는 이 일이 일어난 장소를 '한 동네'로(눅 5:12) 밝히는 반면, 마태는 이일이 일어난 시점을 산상수훈(마 5:1; 7:28)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때로 묘사한다(마 8:1).
문둥병자. - 레위기 13장에 의하면 문둥병은 자연 발생적일 수 있다(레 13:2-17). 또한 부스럼이나 피부의 화상(火傷) 그리고 머리나 수염에서 발병할 수도 있다(레 13:18-44). 그리고 최초의 중상은 종기, 표피(表皮)의 딱지 및 회고 불그스름한 색점 등으로 나타나며 심해지면 환처 부위의 털이 희어지고 피하 침식(피부가 우묵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한편이 병에 걸린 사람은 혼자 진 밖에 살아야 한다. 그리고 성한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는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도록 율법에 규정되어있다(레 13:45 이하).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멀리서도 알아보고 피할 수 있도록 머리털을 밀고 찢어진 옷을 입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의 문둥병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형편 없었고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레 13장 자료노트, '문둥병 '을 보다 참조하라.
꿇어 엎드리어‥‥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본절은 문둥병자의 담대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사실 당시 문둥병자에 대한 율법과 사회적 전통으로 볼 때 문둥병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께 나아왔을 것이다. 한편 그 사람은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이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이며, 그 능력을 직접 베풀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만약 그 사람이 고침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기도의 자세이다. 한편 이 사람이 치유 행위를 '고침'이라 표현하지 않고 '깨끗해짐'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육체적 고통보다 선민 사회에서 분리되는 의식적인 결별을 더 큰 아픔으로 여겼음을 암시한다(레 13:1-3).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이 사람이 예수께 꿇어 엎드린 것은 인간 예수께 경의를 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적 존재에게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어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1 민망히 여기사. -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의 치유 행위만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배경이 되는 예수의 심정은 본서에만 나타난다. 이처럼 본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이 될 인간을 위해 봉사하시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역동적인 사역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한편 '민망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란 말은 '적극적인 동정' 혹은 '연민의 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같이 고통을 느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 고통을 없애주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문둥병자에게 이적을 베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문둥병자의 간구가 아니라 이에 반응한 예수님의 동정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의식적으로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접촉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규정보다 그 정신인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심을 보여 준다.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란 문둥병자의 신앙적 요구가(40절) 완전히 성취됨을 보여 준다.
1:42 곧‥‥깨끗하여진지라. -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와 접촉하는 즉시 부정하게 되므로 문둥병자를 만진다는 것은 부정을 자초하는 행위였다(레 13:4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수께서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가 깨끗케 되었다. 사실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되려면 레 14장에 규정된 예물들을 드려야 하며 정해진 기간 동안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문둥병을 완전히 치유하셨을 뿐만 아니라 즉시 정결하게 하셨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이 율법을 능가하고 완성하시는 분이며,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할 수 있는 신적 존재임을 알게 한다.
1:43 엄히 경계하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 )는 원래 '말처럼 거칠게 콧김을 내뿜다',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의치다'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주로 '엄히 경계하다', '나무라다', '꾸짖다'(막 14:5; 요 11:33,38) 등의 의미로 쓰였다. 한편 예수님이 엄하게 경계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사람들에게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게 되면 예수님의 본래 목적인 복음 전파와 인류구원 사역이 방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45절). ② 정한 때가 되기 전에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려고 오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적 행하는 자로 알고 열광한다면 그 때가 이르기도 전에 당시 기득권을 가진 교권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것을 막기 위하여 그 사람에게 소문내지 말도록 엄히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③ 그 사람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것을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법적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일정 기간 동안 검사를 받고 정결의식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이상이 없으면 제사장은 그 사람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레 14장).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가 깨끗함을 받은 것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야 그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할 수 있고 사회 활동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사람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사장이 선포할 때 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곧 보내시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유데오스 엑세발렌 아우톤)을 직역하면 '즉시 그를 쫓아 보냈다'이다. 이는 앞서 나온 '엄히 징계하다'란 말과 더불어 상당히 격양된 감정이 포함된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같은 조치를 취하신 까닭은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경험한 이적을 말함으로써 활발한 전도 사역에 방해를 받을 것을 신적 지혜로써 미리 아셨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45절).
1:44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치유의 이적을 베푸신 후 예수님 자신이 병 고치는 자로만 여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주 주신 교훈이다(마 9:30; 12:16; 16:20; 막 3:12; 눅 8:56). 예수에 함구령에 대해서는 눅 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 문둥병에서 깨끗하여졌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조치로서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권유한 것이다.
모세에게 명한 것. -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에 대한 '모세의 명한 것'은 레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레 14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저희, 이 말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적 행하는 자로 간주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사장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제사장에게‥‥저희에게 증거하라. - 예수님이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① 예수님은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하셨다. 사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을지라도 제사장의 공식선포가 없이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서 명한 정결 의식 절차를 발음으로써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하신 것이다. ②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즉,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이 깨끗케 된 것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것을 드리라고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과 유전은 공격하셨지만 모세의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음을 본절에서 보여 주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③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행하는 의식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나타났음을 보석 주려고 하셨다.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한 정결의식은 사람에게 형식적 결백은 제공해 주지만 실제로 사람을 깨끗하게 할 능력은 없었다.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실제로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행하는 의식을 의미 있게 하고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나타났음을 보여 주려고 하신 것이다.
1:45 많이 전파하여. - 예수께서 문둥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고침 받은 사람에게 엄히 경계하셨지만 오히려 그는 말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예수께 악의가 있었다거나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이 너무 놀랍고 기뻐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동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자신의 감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한 결과 사태는 심각하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에 강한 집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에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셔야 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은 심하게 방해받았고 위축되었다.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 - 이 말은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영원히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그 동안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 여러 동네를 계속 순회하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고침 받은 사실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적 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도저히 동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 전에는 회당에서도 전도하셨으나 그 이후에 예수님이 전도하신 장소는 다양하게 되었다. 즉 회당 외에도 집. 바닷가, 산, 들판이나 또는 길가면서 전도하셨다. 따라서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말은 갈릴리 동네를 두루 다니면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형태의 전도 여행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연구자료
세례인 요한-주의 길을 예비한 광야의 선구자
1. 인적 사항
① '요한'은 히브리명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으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
②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 엘리사벳의 아들(눅 1:5).
③ 예수의 친척으로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남(눅 1:26,39-56).
④ 유대 광야에서 거주(마 3:1; 눅 1:80).
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하여 '세례인 요한'이라 불림(마 3:6).
2. 시대적 배경
헤롯 대왕 (B.C. 37-4년)이 죽기 바로 직전인 B.C. 5년에 태어나 예수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 그가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에 유대는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때문에 백성들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크게 대망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침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분위기를 일깨우며 회개를 선포한 세례인 요한은 단번에 온 백성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3. 주요 내용
1. 회개 선포 이전
1) 탄생이 예고됨 B.C. 6-5 사 40:3-5
2) 출생 B.C. 5 눅 1:57
3) 할례 받음 B.C. 5 눅 1:59
4) ‘요한’이라 이름 지어짐 B.C. 5 눅 1:60,63
4) 광야에서 거기함 B.C. 5 눅 1:80
2. 회개 선포 이후
1)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사역 시작 A.D 26 눅 3:3-14
2) 메시야로 오해 받기도 함 A.D 26 눅 3:15
3) 오실 예수에 대해 증거함 A.D 26 눅 3:15-17
4) 예수님께 세례 베품 A.D 26 막 1:9-11
5) 헤롯 안티바의 불법 재혼을 책망 A.D 29 눅 3:19
6) 옥에 갇힘 A.D 29 눅 3:20
7) 옥중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냄 A.D 29 눅 7:18-20
8) 목 베어 죽임 당함 A.D 29 막 6:14-29
4. 성품
① 당시 물질을 탐하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강직하고 검소한 자(막 1:6).
② 진실된 회개의 촉구와 더불어 세례를 베푼 것으로 보아 자신의 소명을 직시하고 그 소명에 투철한 자(막 1:4,5).
③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 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할 만큼 겸손한 자(막 1:7).
④ 비록 상대가 왕일지라도 그의 불의한 행동에 대해 단호히 책망할 정도로 담대하고 의로운 자(막 6:18).
⑤ 헤롯이 두려워하며 그의 책망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그 생활이 의롭고 백성들의 귀감이 된 자(막 6:20).
5. 구속사적 지위
① 그 자신은 구약에 속한 최후 인물로서 예수의 선구자로 와서 신약을 여신 예수를 세상에 증언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가교가 된 자(마 11:13).
②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언된 자(사 40:3; 말 3:1).
③ 예수께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인정받은 자(마 11:11).
④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사명을 다하다가 순교를 당함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는 성도의 본을 보인 자(마 14:3-12; 계 2:10).
6. 주요 공적
① 회개를 촉구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함(마 3:2).
② 구약의 예언대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오심을 증거하고 주의 길을 여비함(막 1:2-8).
③ 그의 세례 의식이 기독교 세례의식의 출발이 됨(막 1:4,5).
④ 헤롯 안디바의 부도덕함을 지적함(막 6:18).
7. 주요 실수
① 예수님의 메시야직에 대해 한 때 잘못 생각함(마 11:2-5).
8. 평가 및 교훈
① 세례인 요한은 더없이 검소하고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였다(막 1:6). 이는 당시에 물질을 탐하던 종교 지도자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며 아울러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물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할 지를 잘 가르쳐 준다.
② 세례인 요한은 참다운 회개 없이 세례 받으러 나온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촉구하였다(눅 3:7-14). 이처럼 참다운 회개는 입술의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도 매일의 삶 속에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과 아울러 그 고백에 부합되는 변화된 삶의 열매가 나타나야하겠다.
③ 무리의 죄악을 꾸짖으며 회개할 것을 담대하게 외치던 세례인 요한은 당시의 권력자 헤롯 안디바의 파렴치한 소행도 간과하지 않고 엄히 책망하였다(막 6:17-29).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선지자적 행동은 오늘날 부패한 권력자의 잘못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닌 종교 지도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이에 성도들은 재산과 권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복음을 외쳐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④ 세례인 요한의 사역은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다(사 40:3-5). 이에 세례인 요한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평탄케 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으며, 또 그에 합당하게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눅 3:15-17).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도 이미 성경을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먼저 이 사명을 잘 인식하고, 또 그것을 충실히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세례인 요한과 같이 요긴한 도구로 쓰일 수 있어야겠다.
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세례를 베푸는 세례인 요한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이에 세례 요한은 그들의 오해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면서 자신은 그의 신들 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미약한 존재라고 말하였다. 이 같은 세례인 요한의 태도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높임 받으실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성도는 다만 겸손히 그의 구원 사역을 도와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혹 우리는 주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자리에까지 높아져서 오직 주님께서만 받으셔야할 영광을 우리가 받으려는 교만을 은근히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9. 핵심 성구
.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 ․․․․"(막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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