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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열두 제자의 파송과 헤롯의 불안, 오병이어의 이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및 첫 수난 예고, 변화산 사건과
간질병 어린이의 축사와 두 번째 수난 예고 및 제자들의 큰 자 논쟁, 사마리아인의 배척과 제자의 길에 대한 말씀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1-50절은 4:14-9:50까지 이어져온 전 3차에 걸친 예수의 갈릴리사역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후반부 51-62절은 9:51-19:27까지 계속되는 예수의 유대를 중심한 후기 사역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본장은 주께서 A.D. 27년 공생애를 개시한 이래 대략 2년 뒤의 시점에서 이제 북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남부 유대를 중심으로 사역을 개시하기 시작하신 전환기적 시점의 여러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다 하겠다. 이런 전체적 맥락 하에서 전 ․ 후반부를 막론하고 각 단락별로 그 구속사적 의좌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6절은 주께서 12제자를 특별히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전도자(evangelist)로 각처에 파송한 사건을 보도한다. 전도자로서 부여받은 권능. 전도의 내용, 전도 사역 중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할 것, 전도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전도에만 충실할 것 등에 대한 주의 간략한 교훈이 소개되고 뒤이어 이를 12제자가 나아가 각각 수행하였음이 간략히 보도된다. 이의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의 평행 기사로서 열두 사도의 선정과 그 파송에 대한 포괄적 기사를 보다 상세히 다루고 있는 마 제10장 개관을 참조하라.
7-9절은 이제 널리 퍼진 주(the Lord)의 명성을 듣고 이를 전날 자신이 죽인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인 요한과 결부시켜 두려움에 빠진 헤롯의 불안을 보도하고 있다. 이는 먼저는 문자 그대로 영적으로 볼 때 사탄(the Satan)의 사주를 받은 세상 권력의 앞잡이인 헤롯(Herod Antipas)이 정의와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 앞에서 두려워 떨었음을 보도함으로써 타락한 세상은 주의 진리(眞理)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이 장차 닥칠 주의 죽음을 예표하며 순교(殉敎)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는 본 단락의 평행 기사에서 이 두 번째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마 14:1-12; 막 6:14-29). 따라서 예수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으로서의 세례인 요한의 죽음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 평행 기사들의 개관을 보라.
10-17절은 너무도 유명한 오병이어의 이적이다. 이는 모든 주의 이적(miracle)이 전반적으로 갖는 교훈 즉 예수께서는 유일한 인자요 메시야, 곧 우리의 구속주(救續主)로서 전 우주적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동시에 이를 뜨거운 사랑으로 택한 자의 구원(salvation)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신다는 일반적 교훈과 함께 다음의 고유한 구속사적 교훈도 전해준다. 먼저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는 그 구속의 대상인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며 이를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께 요청하기 전에 먼저 채워 주시기를 원하심을 깨닫게 해준다(히14:15,16). 그리고 이릴 때 필요한 것은 구속주이신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임을 깨닫게 한다. 둘째, 주님은 영원한 생명과 우주의 창조자(Creater) 그 자체이시므로 여러 가지 축복 중부분적 축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환회 그 자체를 주심을 깨닫게 한다. 결국
이 이적에서 주님은 우리의 구속주(救贖主)로서 절대적 능력과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우리도 그분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에 구속(redemption)의 은총과 구원의 기쁨을 영원한 생명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엄숙하고도 절대적인 구속사의 한 진리를 새삼 발견한다.
18-27절은 역 사상 최초로 인자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야요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18-21절)과 그에 이어 주께서 당신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Christ)로서 구원을 주시기 위한 방법으로서 십자가 구속 수난을 당하실 것을 예고한 제 1차 수난 예고(22-27절)의 기록이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실로 구속사적 대사건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의하여, 신약 선민인 세계 모든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the Saint)들이 예수님이 승천한 후 재림하시기까지 지상에서 구속사가 진행될 동안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될 교회의 창설자로 세움 받은 12제자 중 수제자(首弟子)였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성자요.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결국 전 신약 교회의 주님에 대한 첫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예수님은 이처럼 직접 자신의 메시야직을 선포하시기보다 당신과 함께 생활한 제자들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한 고백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야직을 비로소 공개적으로 밝히셨다. 또한 그 고백이 교회 설립의 시초가 되게 하심으로써 직접 예수를 뵙지 못하나 제자들의 신앙의 전승(博承)을 따라 주님을 메시야(Messiah)로 영접하게 될 오고 올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더욱더 큰 확신을 갖게 해주고 있다. 실로 주님은 구약의 모든 성취된 예언들과 신약 성경의 모든 기록과 우리에게 전승된 믿음의 선조들의 증언이 증명하듯이 전 구속사(救贖史)에 유일한 우리의 구주이시다.
22-27절의 수난 예고는 성경에 기록된 네 차례의(16 21-28; 17:22,23; 20:17-19; 마 26:1-5) 수난 예고 중 첫 번째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것은 이제 베드로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원리요 법인 구속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과 과정에 대하여 제시하신 것이었다. 즉 당신은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로서 당신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요청되는 구속의 원리를 충족시킬 것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이 수난 당하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십자가 희생을 통한 구속사역 성취가 우연히 발생했거나 아니면 예수님 사후에 인간들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 신학적 허구가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 온 하나님의 뜻과 구속의 원리에 따라 그분의 섭리(攝理)대로 작정된 것이며, 또한 주님의 죽음을 무릅쓴 자발적 순종과 헌신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 신적(神的)사건임을 증명해 준다. 그리하여 십자가 희생이 갖고 있는 구속의 원리에 따라 우리 죄가 사해져 우리가 의인이 되어 영생(eternal life)을 얻은 것을 새삼 확신하게 한다. 또한 택한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미구(未久)에 닥칠 죽음을 인지하시면서도 묵묵히 구속의 사역을 담당하신 주님의 모습을 새삼 확인하며 그 사랑의 깊이와 무게에 새삼 가슴이 뭉클해지게 되는 것이다.
28-36절의 변화산 사건은 먼저 그 배경을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주님은 이 사건 직전 당신의 메시야직과 이미 본질상 제 2위 성자로서 영광의 주이면서도 다시금 하나님의 구속원리에 따라 희생하여 우리의 구속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시고 마침내 택함 받은 성도들을 위한 새나라 곧 천국(Kingdom of Heaven)을 도래시키기 위한 구체적 과정으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실 것임을 비로소 밝히고 예고 하셨었다. 변화산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일단은 그 당시의 제자들에게. 나아가서는 그 십자가 수난과 부활 후에 제자들과 그들의 전도를 듣고 예수를 믿을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새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발생한 신비한 사건이었다. 먼저 이는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밝힌 예수의 선포를 하나님께서도 놀라운 이적(異蹟)을 통하여 다시금 인준(認.唯)해 주신 것으로서 결국 예수만이 우리가 믿을 유일한 구주임을 증거해 준다. 둘째,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각각 대변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것은 예수의 구속사역과 메시야직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의 성취로서 구약의 인준을 받는 것이며 또한 예수로 인하여 구속사(redemptivehistory)의 시대가 신약으로 새롭게 발전된다는 구속사(救贖史)의 연속과 발전을 증거해 준다.
셋째, 예수는 본질상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그가 밝히신 대로 잠시 후에 수난을 당할것이지만 이는 그가 능력과 권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으로서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부들 승천하여 온 세상의 메시야로서 먼저 당신의 영광을 회복하시고 또한 당신을 따르는 자도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을 예표해 준다.
37-43절의 귀신들려 간질 걸린 아이의 치유 이적은 메시야이신 주님은 영계(靈界)의 귀신과 인간의 영육에 대한 주권(主權)도 갖고 계시며 주님을 따르되 절대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이런 권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해준다. 또한 불행하게도 많은 주의 제자들이 예수 당시에나 지금에나 부분적 신앙밖에 소유하지 못하여 성도에게 주어진 역동적인 권세(權勢)와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구속사적 현실의 한 단면도 발견하게 한다.
한편 전 4회에 걸친 수난 예고 중 두 번째 예고인 44,45절의 수난 예고가 다른 수난 예고들과 함께 갖는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앞 단락의 개관을 참조하라.
46-48절은 제자들이 자기들끼리 누가 큰 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변론한 것을 기회로 겸손(Humility)과 차별 없는 인간 존중에 대한 교훈을 동시에 주신 말씀의 기록이다. 주님은 겸손(謙遜)과 인간 존중을 단순히 이 세상의 도덕적 차원에서 명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바로 앞서 밝힌바 대로 구속주이신 당신이 도래시킨 천국의 가치관(價値觀) 즉 본래 죄인이었던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 구원받고 들어가는 사랑의 나라인 천국의 가치관이라는 구속사적 대전제 하에서 이를 명령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때 남과 비교하여 갖는 사소한 상대적 차이보다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갖는 죄인으로서의 절대적 결함을 인정하고 근본적으로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만인을 외적 편견 없이 그 영혼(soul)을 보고 존중하여야 한다. 나아가 다 같이 죄인인 우리들을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그런 구원을 받은 우리를 위해 세워 주신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 겸손과 사랑이 최고의 덕목임을 깨달아 더욱 더 자신을 남보다 낮추며 섬기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49-50절은 지나친 분파주의 또는 파당심을 교훈한 말씀이다. 주 안에서 근본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의 상대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여 최선의 일치된 결론을 도출(導出)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관용하여야 한다. 특히 교리(敎理)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지나친 분파주의(分派主義)의 폐해가 없지 않았던 교회사(敎會吏)를 돌아볼 때 이는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말씀이다.
51-56절은 당시 사마리아 땅에 거하던 유대인들로서 유대와 갈릴리지역에 거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던 사마리아 유대인들이 포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역감정에 빠져서 주를 무조건 배척한 사건의 보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자이시면서도 다른 그 어느 인간과도 달리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자 하여 성육신(Incarnation)하신 분으로서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이신 예수의 실체와 그분의 복음을 다만 인간적 편견에 빠져 무조건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한다(막 제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배척' 참조). 또한 이는 유독 이 당시의 사마리아인들뿐만 아니라 전 역사를 걸쳐 거듭 반복되는 많은 인간들이 사소한 편견에 빠져 예수와 그의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본 단락에서 주님을 영접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혈기를 앞세우는 제자들을 꾸짖는 주님의 오습에서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써 그리고 이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자들 모두의 영복(永福)을 위하여 세워지는 사랑의 나라이지 무력과 법을 통하여 강압적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세상 나라와 다름을 알 수 있디. 실로 우리는 구속사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본질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세상이 이를 거부하고 핍박할 때에 올바르고도 선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락인 57-62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그의 사역의 중심지를 유대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다가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우회하여 다른 길로 가시던 중 그의 전도사역의 수행 문제를 두고 그와 세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몇몇 질의응답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57-58절은 인자로 세상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머리 둘 곳 하나 없이(마 8:20) 구속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계속하셨던 예수의 절대 헌신을 보여 준다. 다음 59-62절의 두 대화는 제자들의 삶에 있어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가져오는 신앙생활이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외울 말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열두 제자의 순회 전도 파송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制取)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막 6:12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행 13:51
6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두려워 떠는 헤롯
7 ○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오병이어의 이적
10 ○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 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18 ○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첫 수난 예고
22 가라사대 인자(人子)가 많은 고난(苦難)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 24:46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딤후 2:12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행 7:55,56
변화산 사건
28 ○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시 2:7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간질병 아이의 축사 사건
37 ○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 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逆)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두 번째 수난 예고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22:54
45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겸손과 박애
46 ○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辯論)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신앙의 관용
49 ○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 배척
51 ○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요 4:4,9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요 3:17
예수를 따르는 자의 길
57 ○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葬事)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인물연구-9:7-9, 헤롯 안디바
마 14장 연구 자료 참조
지도-9:7-9 세례 요한 및 예수의 공생애 당시 분봉왕들의 통치 구역
눅 9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주제-9:18-20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축복 약속의 이해
마 16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주제-9:18-21 예수의 함구령(被口令)
본문에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최 절정기이자 공생애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베드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다. 이와 유사하게 공관 복음서는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사실을 여러 번 기록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구속주로 오신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널리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도록 하셔야 할텐데 이처럼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예수의 함구령의 목적을 비롯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함구령을 내리신 시기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시기는 대략 예수의 존재와 그의 이적 및 가르침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공생애 초기인 A.D. 27년 중반부터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 최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인 A.D. 30년 초반까지이다.
물론 이 시기 이전 공생애 시작 무렵에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기도 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용하신 적도 있다(요 1:50,51; 4:26,29). 그러나 유대인의 예수 배척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함구령이 내려지기 시작하여 공생애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과 십자가 수난을 예언하실 시점에 이르러서는 더욱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다. 이에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 바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때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생애 시기(A.D.) 함구령 시기와 대상
1. 27년 겨울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 그 귀신에게(막 1:21-25)
2. 27년 겨울 가버나움에서 각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후 그 귀신에게(막 1:34)
3. 27년 여름 한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후 여름 그 병자에게(막 8:14)
4. 28년 겨울 안식일에 손 마른 자와 각색 병자들을 치유하신 후 병자들에게(마 12:9-16)
5. 28년 여름 가버나움을 떠나던 중 두 소경을 치유하신 후 그 소경들에게(마 9:27-30)
6. 28년 가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후 그 가족들에게(눅 8:56)
7. 29년 봄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후 제자들에게(눅 9:18-21)
8. 29년 봄 갈릴리 호수 부근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후 병자에게(막 7:31-36)
9. 29년 여름 변화산 사건 후 베드로와 다른 뒤 제자에게(마 17:1-9)
2.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주(救贖主)로서 자신의 신분을 널리 알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셨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더욱이 예수께서는 많은 이적과 가르침 등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수없이 증거하셨는데도 굳이 자신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 그리고 귀신, 또 심지어 제자들에게 조차 자신의 메시야 신분과 하신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 몇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유대 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시기 위해: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서서히 전개됨에 따라 그분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점차 많아지자 이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자들은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즉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가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유대교를 혼란스럽게 할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예수를 제거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들으려는 태도는 갖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당신을 배척하는 그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시고자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② 메시야에 대한 오해를 막으시기 위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구약의 일부만 왜곡되게 자신들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하여, 메시야를 자기민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온 열방 중에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어주고 이 땅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도록 해 주는 정치적, 현세적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대인들이라 자칫 예수 사역과 복음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 나타난 이적들만을 보고 당신을 추종하기가 매우 쉬웠던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후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다(요 6:15). 특히 귀신들로 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말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은 귀신들이 예수에 대해 증거할 때 그렇지 않아도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이적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예수를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이적을 행하는 자 정도로만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마 12:24).
③ 충분한 공생애 기간의 확보를 위해:
위에서 설명한 첫 번째 이유는 궁극적으로 본 항목의 이유에 귀속되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함구령을 통해 유대지도자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사 그들의 손에 붙잡히시지 않으신 것도 결국 충분한 공생애 기간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의 구속 사역의 궁극적 목적이요 또 결과이기도 한 천국구원에 대한 복음의 본질을 선포하고 가르치셔야 했다. 그리고 특히 당신의 부활 승천 이후부터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의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본거지가 될 교회를 설립할 당신의 열두 제자를 훈련시킬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셔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고 또 유대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해 체포하려할 때 피하시기도 하셨다(요 5:13; 7:30,34).
3. 의의
이상에서 본 바,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시고, 혹은 자신을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피하신 것은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었거나 아니면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전까지 미처 당신의 메시야직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셨던 것이 아니다. 더더욱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을 이기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택한 죄인들을 구원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일 뿐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당신의 구속 계획을 빈틈없이 수행해 나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풍습-9:3, 여행자의 장비
막 6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9:31, 별세하실 것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텐 엑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엑소돈'과 '에델렌 플레룬'이다.
먼저 '텐 엑소도 아우투'에서 '텐'은 정관사이고, '아우투'는 '그의'라는 뜻의 소유격 대명사이다. '엑소돈'은 '탈출'(exodus)이나 '떠남'(히 11:22; 벧후 1:15)을 뜻하는 동사 '엑소도스'의 목적격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대부분 '죽음'(death)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 혹은 '죽음'의 얽매임을 끊고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본절에서 영광중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로 더불어 말할 때 바로 '예수의 죽으심' 의 차원에서 '엑소도스'를 말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부활 및 승천'의 차원에서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실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이다. 또한 이는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면 누구나 얽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사슬을 끊어버리실 것까지도 암시한다 하겠다.
한편 '헨 에멜렌 플레룬'에서 '헨'은 관계대명사로서 영어의 that과 같다. 그리고 '에멜렌'은 '~하려하다'(be은 about to)라는 뜻의 '멜로'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하려 하고 있었다'가 된다. 또 '플레룬'은 '채우다'(make full) 또는 '성취하다'(fulfill)는 뜻의 동사 '플레로'의 현재형 부정사로서 '성취하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따라서 '헨 에멜렌 플레룬'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성취하고 있는 것을 행하려 했던'이 된다. 따라서 본절에서 '별세하실 것'에 해당하는 원문 '텐 엑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취하고 있는 것을 행하려 했던 그의 죽음'이 된다.
이 같은 원문상의 문자적인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죽음이 갖는 중요한 구속사적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먼저 예수의 죽음은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막 10장 자료 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을 참조하라.
또한 예수의 죽음은 곧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은 인간이면 누구나 얽매일 수밖에 없는(히 9:27) 사망의 권세를 이기사 그를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더 이상 사망의 권세 앞에 무릎 끓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롬 8:2).
주요주제- 9:22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9:24, 성경의 역설들
마 16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9:27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난제해설-9:59,60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본문을 보면 한 사람이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받고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신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얼핏 이 말씀은 예수께서 너무 매정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 부친이 죽어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부친 장례도 못 치르게 한다는 것은 인륜(人倫)을 저버리는 매정한 처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의미를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1. 본문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 우리는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 한 그 사람의 진의(眞意)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부친이 현재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본문의 정황으로 봐서 그 사람의 부친은 죽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의 부친이 죽었다면 그가 지금 예수께 나아와서 한가하게 말씀을 듣고 있을 리가 없으며 더욱이 그 부친이 죽었다면 무더운 근동지방에서는 죽은 사람을 곧장 장사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그때까지 부친을 장사하지 않고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진의는 '내 부친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무르게 하여주십시오. 부친이 돌아가시면 그때 그를 장사하고 부모 봉양의 의무에서 완전 자유롭게 된 후 당신을 따르겠습니다'하는 것이다. 이에 할 수만 있으면 주님을 좇지 않기 위해 핑계하는 그 자의 마음 속을 꿰뚫어보시고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 곧 주님을 따르지 않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너의 모든 근심거리를 맡기라는 뜻으로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2. 의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예수께서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를 완전히 저버려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복음 전파의 사역이 절박한 이때에 할 수만 있으면 세상의 육적인 일로 핑계거리를 삼는 자들에게 세상의 어떤 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교훈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보감-9:46-48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한 조건
1. 겸손함(마 5:3)
2. 남보다 자기를 낮춤(마 18:3,4)
3. 용서하기를 좋아함(마 18:21,22)
4. 다른 사람을 섬김(마 25:34,35)
5. 순수한 심령을 가짐(눅 9:46-48)
6. 세상적인 것을 멀리함(눅 9:62)
7. 가난하나 의를 행함(눅 16:19-26)
8. 영적인 것을 사모함(벧전 2:2)
9. 순종을 잘 함(요일 2:17)
10. 하나님의 일에 충성함(계 2:10)
지도-9:28, 변화 산의 위치
마 17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9:37-43 축사의 이해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 9:21-27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
눅 18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9:57-62 온전히 주님을 좇지 못하는 자들의 12가지 변명
1.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 인한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음(렘 31:34)
2. 나의 소유를 잃으면서까지 주님을 좇을 수는 없음(마 6:24)
3. 아직도 주님을 좇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마 8:19-22)
4.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 주님을 좇겠음(마 9:13)
5. 세상적인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주님을 좇을 수는 없음(마 16:26)
6. 주님을 좇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음(막 8:38)
7.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인간적 도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함(눅 9:59-61)
8. 주님을 좇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음(요 14:6)
9.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좇는지를 먼저 알고 싶음(요 21:22)
10. 어떻게 주님을 좇아야할지 그 방법을 모름(행 16:30)
11. 주님을 좇겠다는 확신이 충분하지 못함 (행 24:25)
12. 나 스스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히 7:25)
신학용어-9:33, 주(Lord)
요 13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9:37-43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
요 9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9:46-48 천국에서 큰 자
마 18장 자료 노트 참조
인물연구-9:49, 요한
요일 2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9:62 천국 입성자의 자격
1. 회개하는 자(마 3:2)
2.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3.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마 5:10)
4. 의를 행하는 자(마 5:20)
5.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
6. 침노하는 자(마 11:12)
7. 어린아이 같은 자(마 18:3)
8. 가난한 자(마 19:23,24)
9.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마 25:34,35)
10. 세상의 것에 미련이 없는 자(눅 9:62)
11.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한 자(눅 13:28)
12. 거듭난 자(요 3:5)
13. 독생자 예수를 믿는 자(요 3:16)
14. 환난을 이기는 자(행 14:22)
15. 악을 멀리한 자(딤후 4:18)
16.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약 2:5)
9:1-6 열 두 제자의 파송
본장은 지금까지 살펴본 제 1차(눅 4:14-6:16), 제 2차(눅 7:1-8:56) 갈릴리 사역에 이어 제 3차 갈릴리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제 3차 갈릴리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 사역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데 이후로 예수님은 지상의 마지막 사역인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수난을 향하여 나가시게 된다. 아무튼 본문은 3차 갈릴리 사역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파송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축사(逐邪)의 능력과 병 고침의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다(1,2절). 이전의 사역에서는 예수님 혼자 복음을 전하시고 권능을 행하셨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두 제자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고 권능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 2차 갈릴리 사역까지 제자의 선택과 훈련에 관심을 두셨다. 이것은 공생애의 말기에 이르러 훈련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역을 계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으로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대로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초대 교회의 기둥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자들의 파송은 제자들의 실천적 훈련 과정의 하나로 본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복음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①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3절), ② 어느 집에 유하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떠나라(4절), ③ 누구든지 영접지 않으면 그 성읍을 떠날 때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5절)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명령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이 암시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참된 복음 전도자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전도자를 영접하여 대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셋째, 복음을 거부한 자는 필연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9:1 열두 제자를 불러. - 본절에서 6절까지는 '12제자의 파송'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도 병행되고 있다(마 10:1,7,9-11,14; 막 6:7-13). 이러한 12사도의 파송은 갈릴리 전도사역의 최종 결산에 해당한다. 즉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의 시작과(눅 4:14-44) 더불어, 12제자를 세우시고(눅 6:13), 이제 그들을 훈련시키심으로 그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갈릴리 사역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12제자에 대해서는 행, 서론 특별 자료 '12사도의 행적'을 참조하라.
능력과 권세. - 여기서 '능력'(뒤나미스)은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기능적인 힘을, 그리고 '권세' (엨수시아)는 사도직에 대한 신적 합법성으로서의 독특한 권리를 가리킨다. 즉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전도단으로 보내실 때, 그들에게 합당한 지위와 수단을 겸비케 함으로써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효과적으로 전도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적인 주제로서, 그의 사역의 첫 일성(一聲)부터도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다(마 4:17; 막 1:14,15).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었고(마 13:31,44-46; 눅 4:43; 요 18:36), 비록 외형상 다소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교훈도 실상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겠다. 이렇듯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제자들의 전도 내용에 있어서도 그대로 원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이 각자 개인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위임받은 전권대사로서 그 분의 교훈만 충실히 전파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눅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앓는 자를 고치게. - 이는 치유의 능력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병 고침과 죽은 자를 살리는 일까지도 포함이 된다(마 10:8). 그런데 이런 이적의 능력들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현시(顯示)하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9:3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을 가지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이해된다. 하나는 전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며 또 하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당시 사회 풍속이었고, 더구나 전도자의 경우 신자가 그를 대접하는 것이 의무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4,5절).
지팡이. - 이는 제자들이 전도하러 갈 때 소지해서는 안 될 여러 품목 중 첫 번째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병행 구절에는 지팡이를 불소지 품목에서 제외시키고, 오히려 소지 가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서(막 6:8) 본 구절과 약간의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있으나 가장 타당한 견해는 두 저자의 기록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갖도록 허락하신 것을 기록한 반면 누가는 제자들이 이미 한 벌 옷과 신, 그리고 지팡이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이상의 것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Carson). 한편 지팡이는 여행자들이 들짐승을 쫓고 피곤한 몸을 의지하는데 필요했던 것으로 여행자들의 필수품이었다. 여행자들의 장비에 대해서는 막 6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주머니. - 이것은 여행길에 필요한 식량과 의복을 넣는 배낭인데, 이 주머니는 양식과 의복을 지참해서는 안 된다는 조치에서 이미 휴대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 - 의·식에 관련된 것 또한 불소지 품목에 속했다. 돈은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금지 당했다.
9: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 이 집은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의 의·식·주를 위해 예비한 처소로서, 이것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성도의 가정일 것이다. 전도자를 영접하여 대접하는 것은 성도들의 자발적인 봉사의 기회이자, 전도자들의 마땅한 최소한의 권리이기도 했다.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 이 구절은 칠십인 전도대 파견 때 주신 당부의 말씀과 동일한데(눅 10:7), 이는 제자들의 체재 장소의 부문별한 이동으로 인해 있을 수 있는 잡음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처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므로써 거처를 제공했던 집 주인으로 하여금 자기 집을 제자들이 불편해 했다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한 집에 줄곧 머물러 있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9:5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 이런 상징적 행위는 원래 열심이 특출 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성을 나왔을 때 이방의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의식적 결례로서 행했던 습관의 하나였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의 먼지까지도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 지역을 여행하고 본국에 돌아올 때에 그 발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서 이방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떨어 버린다고 간주했던 것이다(Edersheim). 그러므로 본절의 행위는 상대방과의 관계 단절의 의미를 넘어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행위이며, 아울러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로 취해진 행동이었다(Alford, Carr, Plummer).
9:6 제자들이…두루 행하여. -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전도 준칙에 따라서 제자들이 성실히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처에. - 제자들의 전도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 했음을 보여준다.
9:7-9 두려움에 빠진 헤롯
앞 단락(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 소식을 들은 헤롯이 매우 당황해 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인 아내 말타스(Malthace) 사이에서 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로서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하게 된다. 이 일은 유대인들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고 세례 요한은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게 되는데 헤롯은 비록 요한을 죽이고는 싶었지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헤로디아의 간계로 인하여 세례 요한을 참수하게 된다(마 14:3-11).
한편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의 유사성으로 인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7절). 이러한 소식이 헤롯에게 전해지자 그는 매우 당황하며, 예수를 보고자 하는 열망에 빠지기에 이른 것이다(9절).
이러한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잠언 기자의 교훈(잠 28:1)을 상기하게 된다.
9:7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 여기서 분봉왕 헤롯은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아내 말타스(Malthace) 사이에서 출생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로서, 그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마 14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종종 신약에서 헤롯 왕으로 표현되는(마 14:1,9; 막 6:14,22) 그는 이복동생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결혼하게 되는데, 이 일은 당시 유대인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세례 요한은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다 결국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마 14:3-11).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의 유사성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식이 헤롯에게 전해지자 그는 매우 당황해하며 두려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심히 당황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 포레이는 '때문에', '무슨 이유로'를 의미하는 '디아'와 '빠져나갈 길이 없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의미하는 '아포레오'의 합성어 '디아포레오' 의 미완료 능동태로, 길을 잃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며 몹시 당황해 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이 말이 미완료형인 것은 그 불안 상태가 계속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헤롯 안디바가 이처럼 당황하며 두려워한 것은 그가 세례 요한을 죽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던 중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으로 불길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9:8 혹은 엘리야…혹은 옛 선지자. -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인 중평들이었다(막 6:15; 눅 9:19). 그런데 이 같은 평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상존했던 메시야 대망 사상이 예수님의 이적들과 부합됨으로써 설득력 있게 수용되었던 결과인 듯하다.
9:9 이 사람이 누군고. - 헤롯왕의 이런 호기심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믿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요한의 부활체로 여긴 것으로 나타난다(마 14:2; 막 6:14,16). 이로 미루어보건대 헤롯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처음에는 그가 세례 요한의 부활체가 아닌 것으로 여겼으나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사역의 유사성 때문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예수를 세례 요한의 부활체로 인식한 듯하다. 저를 보고자 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제테이 이데인 아우톤'은 미완료 능동태로, 이는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기 위해 찾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헤롯의 이러한 바램은 수난 주간에야 비로소 성취되는데 그는 이때 예수를 매우 희롱했었다(눅 23:8-12).
9:10-17 오병 이어의 기적
앞 단락(7-9절)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불안해 하는 헤롯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제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거둔 이적이 소개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4복음서가다같이 전하는 유일한 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절정기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마 14:13-21; 막 6:30-44; 요 6:5-14).
이러한 오병 이어의 이적은 벳새다 인근의 빈들에서 있었다. 즉 예수께서는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12제자들의 보고를 받고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또한 따로 훈련시키기 위해 한적한 벳새다의 빈들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이를 안 무리들은 그곳까지 좇아갔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10,11절). 그러한 가운데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고 수많은 무리들의 식량을 걱정하던 제자들은 예수께 무리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12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고 제자들이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다 먹이고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나 거두게 하신 것이다(13-17절).
이러한 오병 이어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① 예수께서는 참 생명의 양식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누구라도 구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②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인간의 영과 육의 결핍을 동시에 채워주실 수 있는 참된 양식이 되신다는 것이다(요 6:35).
③ 예수께서는 영육 간에 축복의 근원이 되시며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영원한 축복에 동참케 된다는 것이다(요 1:16; 빌 4:19).
④ 성도들은 이웃이 처해 있는 물질적 궁핍함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약 2:15,16).
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리는 바 부족하고 적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며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롬 12:1).
9:10 사도들이 돌아와. - 이 구절은 6절에서 시작된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마감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기간은 대체로 A.D. 28년 12월부터 A.D. 29년 4월경까지(요 6:4)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된다(Hendriksen).
벳새다. - 이 곳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후에 분봉왕 빌립에 의해서 확장, 재건되어 도시로 변모했다. 빌립(Herod Pillip II)은 이곳을 재건한 뒤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여 '벳새다 율리아스'(Bethsrida Julias)라 불렀다. 하여튼 이곳은 안드레, 베드로, 빌립의 고향으로서(요 1:44; 12:21), 예수님께서 이곳으로 오신 것은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을 쉬게 하기 위함이었다(막 6:31). 한편 이 곳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많은 권능과 이적을 행했지만, 회개치 않은 까닭에 책망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마 11:21), 벳새다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 14장 자료 노트, 지리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 기갈 상태를 잘 보여 준다 하겠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민중들의 영적 갈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명수가 되신 예수님의 도래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듯했던 그들에게 그야말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나선 것이다.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시려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쉬시려 했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막 6:32-34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9:12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님이나 무리들은 다 같이 날이 저물어 가는 것까지도 잊은 채 서로에게 몰두해 있었던 듯하다. 한편 여기서 '저물어' 가던 때는 해가 지는 오후 6시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후 3시 경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마 14:1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열두 사도가…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 이는 제자들의 합리적인 문제 제기였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무리들의 몰입으로 인해 닥칠 현실적인 문제, 즉 숙식에 대한 문제가 걱정이 되었던 듯하다. 시간적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는 늦은 오후였고, 또한 민가에서 떨어진 빈 들이라는 공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집단적인 숙·식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무리들을 서둘러 해산시켜 그들로 하여금 숙·식을 각자 해결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이는 제자들의 계산적인 의견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데, 제자들로서는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자들로서는 전혀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의견을 일시에 일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자들의 능력 밖의 일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더라도, 이는 포도주를 필요에 따라 공급하실 수 있는 분(요 2:1-11)이 필요한 떡도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까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에 대한 가벼운 책망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4:16과 막 6:3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이것은 어떤 어린 아이의 비상식량이었는데(요 6:8,9) 이것은 장정 만 5000명이 되는 숫자를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오병이어(五餠二魚)는 비록 예수님의 능력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충분한 식량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제자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상징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이 제시한 오병이어는 많은 사람의 숙식을 해결하라는 예수님의 요구의 불합리성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산술적 용례인 것이다.
할 수 없삽나이다. - 이것이 제자들의 본심이다. 만약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200 데나리온이라는 많은 돈이 필요한데(요 6:7), 이는 당장 머리 둘 곳도 마땅치 않은 예수님 일행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9:14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 이 무리의 숫자 역시 제자들의 합리적 거절의 근거가 되고 있다. 더구나 여기서 제외된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훨씬 더 증가했을 것이다.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이는 식량 배급을 질서 있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여진다. 만약 무작위로 식량을 분배했다고 한다면, 5000명이 넘는 무리들의 혼잡으로 인해 불상사가 예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질서 유지를 위해 일정 규모로 나누는 일은 출애굽 시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출 18:21).
9:15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 명령에 일언 반구하지 않고 시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이때 비로소 제자들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6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여기서 '축사'(율로게오)는 유대인의 식전 기도를 말하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의 가장이면 누구나 하는 일반적인 관습에 해당한다(삼상 9:13). 따라서 예수님의 축사는 감사 기도이며, 이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 것은 아니었다.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 본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오병 이어 기적의 진행 상황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떼어'(카테클라센)의 동사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회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주어'(에디두)의 동사 시제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 반복된 행위를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는 떡을 단 한 번에 알맞은 크기로 잘라내어서 그 조각들을 무리들에게 다 전달되기까지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주셨음을 알 수 있다.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 이 구절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이적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다 배불렀더라'(에코르타스데산)는 말은 짐승들을 살찌우기 위해 풀이나 먹이를 양껏 먹인다는 의미의 '코르타조'( )에서 파생한 말로, 이는 무리들이 겨우 한 끼 식사를 때우는 정도로 먹은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을 만큼 양껏 먹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예수야 말로 참 생명의 떡이요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열두 바구니. -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넉넉히 먹고 남은 음식의 양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넉넉한 은혜를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한편 여기서 '바구니'(코피노스)는 유대인 여행자들의 휴대용 가방으로, 음식을 넣는데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로 보아 열두 바구니는 분명 제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을 것이다.
9:18-27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첫 번째 수난 예고
예수님의 앞 단락(10-17절)에서는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인간의 영육 간의 궁핍을 채울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되심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는 장면(18-21절)과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는 모습(2227절)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행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마 16:13-28; 막 8:27-9:1), 이는 갈릴리 사역의 결산이자 제자들의 훈련에 대한 최종적인 점검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는 앞단락 (10-17절)과 본문 사이에 일어난 수면 보행의 이적, 칠병 이어의 이적 및 수로보니게 여인, 귀먹은 자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이 적들을 생략하고 있다(마 14:22-16:12; 막 6:45-8:26; 요 6:14-71). 이를 두고 누가의 대 생략(Great Omission)이라고 부른다.
하여튼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예수께서는 이제야 본문에서 비로소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계시하시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베드로로 하여금 고백하게 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메시야의 신분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메시야의 사역 내용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다. 즉 당시 예수님을 좇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메시야의 표적(눅 7:22)을 보고도 예수님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그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정도로 생각한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정확하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뛰어난 믿음과 예수의 제자 훈련의 성과를 보게 된다.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는 마 16:1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의 신분을 명확하게 인식했다고는 하나 그가 메시야의 사역의 본질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즉 베드로 역시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실 인자이심을 깨닫지 못한 채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단순히 정치적 메시야로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 예언과 고난에의 참여 권고는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22-27절). 이것은 마태가 기록한 베드로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였지만 그의 수난을 말리다가 예수님에게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은 것이다(마 16:21-23).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의 영적 교훈에 대해서는 마 16:13-20과 16:21-28 강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는 눅 18장 자료 노트, '수난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를 참조하라.
9:18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본절부터 50절까지를 흔히 예수님의 은둔 사역으로 부르는데, 이는 주로 이전의 무리들을 대상으로 하신 사역을 중단하시고, 제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교훈에만 시간을 할애한 데서 비롯된다. 예수의 이러한 은둔 사역의 시기는 대체로 A.D. 29년 4월에서 10월까지로 추정하고 있다. 하여튼 여기서 예수님의 고독한 기도는 생애의 전환점을 앞두고 행하신 습관(눅 6:12)이었는데, 이 경우 또한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를 앞둔 시점이라 더욱 주목되고 있다. 한편 전절과 본절 사이에는 마 14:22-16:12; 막 6:45-8:26; 요 6:14-71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이를 일컬어 누가의 대 생략(great omission)이라 부른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한 세평(世評)을 아시고자 하신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소문을 몰라서 하신 것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수단이었다. 즉 진정으로 주께서 알고자 하신 것은 자신의 수난 이후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담당할 제자들의 생각이셨고, 이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바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유도성 질문을 하신 것이다.
9:19 세례 요한… 엘리야…옛 선지자 중의 하나. - 예수께 대한 세평을 제자들이 말한 것이다. 이는 7,8절의 세평과 동일한데,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인식들은 대개 예수님의 능력의 이적과 권위 있는 교훈에서 얻어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평들이 부분적으로 진실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지식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평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 전도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계시를 적지 않게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이시라고 인식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거듭 질문을 하신 것은 자신에 대한 세평에 만족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 대한 세상의 이해 정도에 만족치 않은 예수께서는 그와 항상 함께 동행하며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질문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세평 이상의 고백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 베드로의 대답으로, 마태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는 마 16: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마태는 본절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예수께서 칭찬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는 생략하고 있다.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마 16:17-19 본문과 주석을 참조하라.
9:2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수납하신 예수의 함구령이다. 이런 유형의 함구령은 복음서 도처에서 발견되는데(마 12:16; 16:20; 17:9; 막 3:12; 눅 8:56), 특별히 본절에서의 함구령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제자들의 불완전한 이해력으로 인해 왜곡된 메시야 상이 전파될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신앙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등의 행적은 아직 제자들의 신앙 고백에 고려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되신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제자들의 신앙에는 그 분이 고난 받을 메시야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실제 완벽한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반대하고 나선 것(마 16:22)은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메시야를 바로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그들이 전하는 '메시야' 또한 정확하게 전파되기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그가 가르치는 천국에 대해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기까지 그가 메시야이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둘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야 사상에 대한 염려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정치적 압제와 경제적 수탈로 인해 이스라엘 민중들의 생활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이적은 그들의 시각에 현재의 도탄에서 해방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로 투영되기에 충분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중들은 오병 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다(요 6:15). 이런 차제에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전해진다면, 예상할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함구령은 일시적인 조치로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는 해제될 것이었다. 한편 '예수의 함구령'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이 구절은 예수님의 첫 번째 공식 수난 예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러한 수난 예고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직후에 하신 것은 메시야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한 자만이 예수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하여간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예수의 사역에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수난 예고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더 행해지는데(마 17:22,23; 20:17-19; 26:2), 이러한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는 눅 18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께 수난을 가져다 줄 주체들로, 이들은 다름 아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집합체인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이었다(산헤드린과 그 구성원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자신이 유대 민족에 의해 배척되고 수난 받으실 것을 밝히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의 끝이 죽음인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피하지 않은 것은 수난의 주체가 형식적으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 자신이 자청한 수난이셨음을 보여 준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화려한 영화를 얻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인간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최종 목적은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안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의 부활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만일 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도, 그를 믿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라는 커다란 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두개의 바퀴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삼 일'은 사흘째 되는 날을 의미한다.
9:23 자기를 부인하고. - 본절부터 27절까지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으로 예수의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만류를 배경으로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자신의 수난을 제자들이 바로 이해하기를 촉구하고 계시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감당하실 것처럼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도'의 첫 번째 표식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이는 세상과 자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 위에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자기 부인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 제자됨의 두 번째 표식이다. 십자가는 페르시아인들의 처형 방법이었는데, 점차 널리 보급되어 당시 로마의 보편적인 사형 집행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십자가 처형은 주로 로마 제국이 반란자를 처형할 때 사용했는데, 이는 당사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각심을 일으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더구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형벌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신 21:23),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스러움과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고전 1:17-18).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좇으라고 하신 말씀은 그 의도 생각하기에 앞서 상당한 충격이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여튼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겪어야 하는 현실적 고난과 핍박까지도 감내하는 적극적 태도를 말한다.
9:24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구원하리라. - 본절부터 26절까지는 23절의 '제자도'를 제자들이 지켜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헬라어 원문에서 본절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하고 있어서 본절에서 26절까지의 내용이 제자들이 23절의 '제자도'를 지켜야 할 근거가 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래서 본절은 전반절과 후반절이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설명을 보다 명확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특히 본절은 형식상의 대조와 내용의 역설을 동시에 담고 있는데, 여기서 내용의 역설은 현세적 생명과 영원한 생명의 관계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즉 자기 개인만을 위하며 자기 생존에만 전인격이 몰입한다면, 결국 영생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반면,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에게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에서 비록 약간의 변형이 있을지라도 여러 번 확인되고 있는 바(마 16:25; 막 8:35; 눅 17:33; 요 12:25),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이 역설적 진리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교훈하셨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9:25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 이는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여기서 '잃든지'의 경우는 고령으로 인한 죽음을 뜻하고, '빼앗기든지'의 경우는 사고로 인한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혹은 같은 한 사람의 죽음을 전자의 경우는 그 당사자 측면에서 본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지 사람이 천하를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은, 생명의 찬탈 여부가 하늘에 있다는 것에 무지하거나 무시하면서 들의 꽃과 같은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9:26 누구든지 나와 내말을 부끄러워하면. - 이 구절은 대체로 어떤 형태이든지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경우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이미 그와 그의 가르침을 듣고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이 경우는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솔깃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초라한 행색과 참혹한 죽음을 보고서 그의 제자됨을 관원이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인자도…올 때에. - 예수의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 이때에는 참 생명을 얻고 혹은 잃는 때이다. 즉 이생에서 자기 목숨만을 구한 자는 참 생명을 잃으며, 예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자는 참 생명을 얻는 때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날에 재림하셔서 심판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나누실 것이다(마 25:31-46).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 받으실 3중의 영광, 곧 승귀한 메시야로서 그 자신의 영광, 그에게 심판을 위임하신 성부의 영광, 그를 보좌하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수난의 예수님의 처지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으로써 영광의 심판주로 재림하시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날에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산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요,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세상의 일락을 좇아 산 사람들은 예수로부터 영원히 단절되어 심판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9:27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 중에 해당한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난해함을 주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라는 부분이다. 만약이 부분이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누구든지 결국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그래서 본절에 대해서는 그것이 첫째, 변화 산의 영광을 수제자들이 체험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Chrysostom, Hilary, Theophylact, Bengel, Farrar),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볼 것임을 가리킨다는 견해(Calvin, Beaz, Grotius), 셋째, 오순절 날의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넷째, 예루살렘 멸망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견해 (Wetstein, Alford, Dlarke), 다섯째, 종말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Meyer, Weiss, Allen, Gilmour) 등 다양하게 제시된다. 그런데 이상의 견해들은 나름대로 모두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지고는 있으나 반대로 취하기 어려운 난점들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을 부활이나 성령 강림 사건, 변화 산 사건 등 특수 사건과 결부시켜 해석하기보다는 예수의 부활 후에 여러 방면에서 나타날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부활 후에 복음이 이방 지역까지 급격히 확산된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16장 자료 노트, 난제 해설을 보다 참조하라.
9:28-36 예수의 영광스런 변형
앞 단락 (18-27절)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어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성(人性)의 모습을 벗고 내재되었던 본래의 신성(神性)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사건을 소개한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 (마 17:1-13 : 막 9:2-13)에 모두동일하게 기록되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확신시켜 주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 예언과 십자가 고난에의 참여 권고가 제자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을 주었다면 그에 이은 본문은 영광스런 변형과 영광의 예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대화를 나누신 사실 (30절)은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셨음을 보여 준다(마 5:17,18; 눅 24:4).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와 모세 및 엘리야와의 대화 내용이다. 즉 예수께서는 두 선지자와 더불어 장차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하는데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예수의 죽음이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변형 사건은 예수의 수난이 단순한 사건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수욕은 승귀로, 죽음은 영광스러운 부활과 재림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별히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35절)은, 예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보증으로 그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인준이라 할 것이다.
한편 변형 사건을 목도한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주와 두 선지자를 섬기겠다고 제의했는데 이러한 것은 예수의 수난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로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거부되고 말았다. 이는 십자가 없는 구속이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기독교가 개인의 영적 만족만을 위한 은둔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말씀을 전파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역동적인 종교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대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9:28 팔 일쯤 되어. - 본절부터 36절까지를 흔히 '변화 산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이 사건은 요한 복음을 제외한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마 17:1-8; 막 9:2-8), 공관 복음 이외에서는 벧후 1:17,18에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여기서 '팔 일쯤'이라고 제시된 시간적 배경은 마태와 마가에는 '엿새후'로 나타난다. 따라서 두 기록 간에는 모순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며 단지 저자들의 기록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마태나 마가는 첫 번째 수난 예고가 있었던 날과 변화 산 사건이 있었던 날을 계산에서 제외한 반면, 누가는 이 두 날을 계산에 포함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예수의 3대 제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어 예수와 함께 동반한 경우는 모두 세 번 있었다. 즉 본절의 변화 산 사건을 비롯하여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눅 8:51)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마 26:37) 예수께서는 이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함께 동행하셨던 것이다.
기도하시러. -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이유에 관해서는 누가만이 전하고 있다.
산에 올라가사. - 이 산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뉘고 있다. 대체로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첫째는 갈릴리의 다볼 산이라는 견해이고(Cyril of Jerusalem, Jerome), 둘째는 헬몬 산이라는 견해이다(Farrar, Carr,Vincent, Johnson). 대개 후자의 설이 지지를 받고 있는데, 여기에 관한 자세한 것은 마 17:1과 막 9:2주석을 참조하라.
9:29 용모가 변화되고. -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던 것으로 나타난다(마 17:2). 이는 예수께서 천상적 존재로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해'는 성경에서 보통 하나님의 영광스런 모습과 관련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 계 1:16; 10:1). 한편 예수의 이러한 변모의 모습은 출 34:29-35에 나타난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과 비교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의 얼굴과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은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빛의 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모세의 빛난 얼굴은 수건을 덮으면 그 광채가 차단되었던 반면, 예수님에게서 발되는 빛은 입고 계신 옷까지 투과하여 그 옷까지도 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빛의 강도 차이는 예수님의 광채가 참 빛되신 성자의 신성의 가시적 표현이었던 반면, 모세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 것이라는 본질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변형 사건은 앞으로 있을 육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예시한 사건(롬 12:2; 고후 3:18)으로 이는 예수께서 장차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것이나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의 심판 주되실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변형 사건은 단순히 예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수난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나더라. - 예수의 몸에서 발산되는 광채가 옷을 투과한 결과이다. 특히 의복이 더 이상 빨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희어졌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거룩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시내 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요구하는 그 상징으로서 그들의 옷의 세탁을 명령하셨는데(출 19:10,14), 이런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의복의 광채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반사하는 빛이 아니라 스스로 발휘하는 자체의 빛, 즉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해 주는 강력한 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30 모세와 엘리야라. - 이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변화 산에서 예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은 율법과 선지서의 최종적인 가르침이 예수께 집중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17:3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9:31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이것은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신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해서 일관되게 계시해 온 구약 성경의 예언으로서, 결코 예수의 죽음이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의 산물이 아님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에게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희망의 가능성을 바라본 사람들과(요 6:15) 이들과 맥을 같이 한 제자들에게 (막 10:37) 경종이 되고 있는 바, 이는 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옹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와 영광의 입성이 아닌 죽음의 관문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9:32 졸다가…깨어. - 여기서 '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바레메노이( )는 단순히 조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깊이 잠든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께서 오랫동안 기도하시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또 '아주 깨어'라는 표현은 엉겁결에 잠이 달아난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처럼 제자들이 잠을 자다 깬 것은 모세 및 엘리야와 예수께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와 예수에게서 발산되는 광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 비평적인 학자들은 본절을 근거로 제자들이 본 것은 실제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라 환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인본주의적 발상으로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 모세와 엘리야를 본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는 제자들이 졸음으로 인해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여기서 문제는 엉겁결에 깨어난 제자들이 단번에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그들이 구약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에 친숙했기 때문이라는 견해(Zigabenus)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직관의 능력을 주셔서 알았을 것이라는 견해(Alford)가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 이 부분은 누가만의 기록인데, 이것은 베드로의 '초막'에 관한 이야기 의 시점을 보여 주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즉 세 제자들이 잠에서 깨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중에(마 17:3), 본문과 같이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는 '초막'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는 마태의 해당 본문에서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과정이나 끝 시점에 했었다는 기록보다는 베드로가 이 말을 황급히 하게 된 이유를 보다 잘 보여 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위하여 하사이다. - 이것은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과정에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베드로는 그의 흡족한 감동의 계속적인 유지를 위해 3개의 초막 건축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 당시 귀한 손님을 위해 천막을 지어 대접하는 풍속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왕하 4:9,10).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에만 집착한 것으로 아직도 변형 사건 속에 암시되어 있는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다.
자기의 …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마가는 베드로가 이처럼 자신의 한 말에 대해 자기도 알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가 예수의 신성을 목격한 까닭에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막 9:6). 즉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충동적인 성격대로 행동하며 말한 것이다.
9:34 구름이 와서… 덮는지라. - 높은 산에 구름이 덮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자연 현상의 하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구름은 대개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고 있다(출 16:10; 레 16:2; 민 11:25; 왕상 8:10,11; 겔 1:4). 따라서 제자들에게 구름의 갑작스런 엄습은 단지 자연 현상으로 느껴지기에 앞서 하나님의 임재 현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 이는 제자들의 감정 상태를 보여 주는데,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자신보다 더 큰 권위를 대할 때 느끼는 것이다. 특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대하는 성도들의 전형적인 반응으로 소개되고 있다(창 3:10; 20:8; 출 3:6; 신 9:19; 눅 1:50; 2:9; 행 9:31). 따라서 이런 두려움은 경악이나 공포와 같은 신뢰가 배제된 감정이 아니라 신뢰가 깊이 깔려있는 경외하는 마음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의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이다.
9:35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 이는 하나님께서 시 2:7과 사 42:1을 종합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이러한 음성은 예수의 수세 시(마 3:17)와 수난 주간 중에도 들렸다(요 12:28). 그런데 시 2:7과 사 42:1은 본래 오실 메시야를 예언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을 친히 공포하고 증거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 말씀이 공생애 초기와 중간, 그리고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 각각 들렸다는 것은 예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보증이라 하겠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이는 신 18:15의 간접적인 인용인데, 이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출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할 것을 가리킨 말씀이다. 이런 배경의 말씀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서 반복된다는 것은 특별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할 뿐 아니라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고 순종할 것에 대한 강조의 의미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방금 전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계시하시고, 그의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만류한 사건(마 16:22) 후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본 구절의 시의 적절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이 구절은 단지 모세와 엘리야가 물러난 이후의 상태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도 초막을 짓겠다고 한 베드로의 불충분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해준다. 사실 모세와 엘리야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업적에 비할 만한 존재가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지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오실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특별히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아 있었던 사실은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되는 계시의 점진성을 보여 준다 하겠다.
제자들이 잠잠하여 … 이르지 아니하니라. -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서는 이 변화 산 광경에 대해서 예수님의 함구령이 있었다고 전하는 반면(마 17:9; 막 9:9) 본 절에서는 제자들의 자발적인 침묵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차이점은 누가는 제자들이 변화 산 체험을 통해서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사사로운 사견은 발설하지 말 것을 당부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춘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37-42 간질 들린 아이의 치유
앞 단락(28-36절)에서는 예수께서 본래 성자로서의 신성의 모습으로 변형된 사건을 통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재확인했다. 이어 본문은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는 모습이 소개된다. 변화 산 위에서 예수님의 지극한 영광이 드러나고 있을 때 산 아래서는 제자들의 연약한 신앙 상태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것은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빛난 영광이 마치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 광채를 연상시키듯이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은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했던 사건을 연상시킨다(출 32:1-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믿음을 책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지금 공생애의 말기까지 훈련시키며 자신이 메시야되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18-27절) 아직도 주님의 메시야되심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제자들의 영적 부재 상태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들도 이 치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4-21; 막 9:14-29), 모두 그 강조점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눈 앞에 둔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믿음을 소유할 때 사단과 세상을 이길 능력까지 주어지는 것이다(엡 6:16).
9:37 이튿날. - 이는 간질병 걸린 아이를 치유하신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데, 이 날은 변화 산 사건 다음 날로 여겨진다.
큰 무리가 맞을 새. - 여기서 누가는 엘리야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마 17:10-13; 막 9:10-13)을 생략하고 바로 예수님 일행과 무리들이 조우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 일행을 맞이한 큰 무리는 단지 호기심으로 운집해 있는 무리였다기보다는 서기관들과의 변론에서(막 9:14) 쩔쩔매고 있었던 제자들 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기관들의 질문에 변증도 하지 못한 채 빨리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9:38 청컨대…내 외아들이니이다. -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는 장면이다. 다른 공관 복음에는 간질에 걸린 아이를 단지 '아들'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누가는 '외아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누가는 '외아들'과 '외딸'을 강조하였다(눅 7:12; 8:42). 그런데 누가가 이처럼 외 자녀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고통당하는 자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도 컸음을 강조함으로써,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크게 임하게 되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으로 여겨진다.
9:39 귀신이 저를 잡아…상하게 하고. - 이 아이의 병명을 마태는 간질로(마 17:15), 누가와 마가는 귀신들린 것으로 각각 설명하고 있는데(막 9:17), 이것은 이 아이가 귀신들린 결과 간질 증세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병명을 간질로 기록한 마태복음 역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마 17:18).
9:40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 여기서 저희는 변화 산 사건 때 동행한 세 제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제자를 뜻한다. 이는 예수님과 세 제자가 아홉 제자가 있는 곳으로 오는 과정 동안 있었던 일이었는데, 이때 아홉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함으로 인해 서기관들에게는 멸시를, 군중들에게는 우려를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본장 1절을 보면 제자들은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실패했다. 그 이유를 마태는 적은 믿음에서(마 17:20), 마가는 기도하지 않은데서(막 9:29) 각각 찾고 있다. 물론 이 두 이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믿음의 산물이며 믿음이 없는 기도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막 9:29 주석 참조).
9:4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는 예수님의 통분의 심정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 통분에는 저주에 가까운 책망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대상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① 제자들, ②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③ 제자들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거기에 모인 모든 무리들, ④ 바리새인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무리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가운데의 견해가 비교적 합당하다. 왜냐하면 간질병을 치유하지 못한 제자들이 믿음이 적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믿음이 없다'(아피스토스)는 말은 '믿음이 적음'(올리고피스티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불신앙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17:1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 이런 예수님의 자신감은 이 아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난 후에 치유의 여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치유하시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어떠한 질병도 치유하실 만한 충분한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는 변화 산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언급처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서(35절) 연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9:42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 예수께서 영계와 물질계를 지배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임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인 '꾸짖음'은 귀신 축사에 뿐만 아니라 병 치유(눅 4:39) 그리고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할 때(눅 8:24) 사용하신 방법으로 그가 진정 온 우주와 피조계의 주인이심을 증거해 준다.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누가만의 기록인데, 이와 유사한 표현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눅 7:11-17), 이것은 이 아이의 경우로 볼 때 이전의 건강한 상태로 원상 복귀되어 세상의 보호자인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었음과 아버지의 경우로서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외아들을 귀신으로부터 찾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 주는 표현으로서, 이는 양자에게 기쁨을 준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43-45 예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앞 단락 (37-42절)에서는 예수님의 변화사건 이후 처음으로, 행하신 치유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믿음이란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모습이 소개된다. 첫 번째 수난 예고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뒤이은 것과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에 주어졌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로서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를 통치하시는 능력자인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함임을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깨우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수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변화 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런 변형을 보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본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수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능력의 메시야로서 장차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실 분으로만 안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아직 제자들에게는 비밀스러운 '숨김'의 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45절a). 한편 첫 번째 수난 예고 시 베드로가 예수의 수난을 만류했던 것(마 16:22)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도 예수의 수난을 만류하거나 그 의미에 대해 묻는 이가 없었다(45절b). 이는 베드로가 그 일을 만류하다가 책망 받았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으로 보이며, 또 예수님의 위엄이 제자들로 하여금 감히 그 일에 대해 물어볼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직 사도로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못했지만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과 승천을 체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행 2,3장).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참된 메시야 사역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를 듣고도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의 욕심을 내보이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46-50절). 예수의 수난 예고에 대해서는 눅 18장 자료 노트,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를 참조하라.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근심 속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9:43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이는 예수의 이적을 목도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여기서 '놀라니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플레쏜토'( )는 '충돌하다', '내어치다'라는 의미의 '에크플레쏘'( )의 미완료 수동태로 '넋을 잃고 놀라움에 압도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이 실패한 일을 예수께서 쉽게 이루심을 목도한 무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9:44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자신의 수난 예고를 특별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를 통해 놀라워하는 군중과 스승의 위대한 권능으로 인해 한껏 고무되었을 제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즉 이 수난 예고는 우선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이 같은 능력 행사가 인자인 자신의 수난의 길을 돌이키는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밝히신 것인 동시에 군중들의 놀라움이 곧 자신을 죽이는 환호성으로 바뀔 것임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예수의 수난 예고의 의미에 대해서는 눅 18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9:45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 본절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의 원인을 밝혀 준다. 제자들의 인식을 막는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그 해명 이전에 이 구절은 먼저 히브리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습관적인 표현임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사 6:10). 즉 이런 히브리적 표현은 무지와 잘못의 직접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책임 회피적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완악한 인간의 의지적인 무지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의지로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까닭이고, 이 상태를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기까지 방임하셨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이는 제자들의 저급한 믿음의 상태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이다. 일전에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을 만류하다 호되게 꾸중 들었던 일이 있었는데(마 16:23), 이 경험은 제자들 스스로 질문하는 것을 자제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제자들에게 스승의 십자가 죽음은 있을 필요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될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예수님께 질문을 함으로써, 스승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할까 두려워했었을 수도 있다. 즉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자신들에게 가장 불리한 국면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저급한 믿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9:46-50 겸손과 관용의 교훈
앞 단락 (43-45절)에서는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언이 소개되었다. 이제 본문에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통하여 교훈하는 모습(46-48절)과 동일한 주의 능력을 베푸는 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가르치는 장면(49,50절) 이 소개된다. 먼저 제자들의 다툼과 논쟁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두 차례에 걸쳐 말씀하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 (22-27절, 43-45절) 의미를 제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원래 창조 당시의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한 대속물로서의 수난과 죽음을 경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번 수난 예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와 교만을 깨우치기 위해 어린 아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48절). 당시 어린 아이는 유대 사회에서 인구 계수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무시당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여기서 어린아이는 바로 문자적인 어린 아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미미한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린 아이를 예수와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에 올려놓으신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자들을 그리스도를 대하는 그 사랑으로 대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48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즉 진정으로 크다는 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일지라도 존중하며 영접하여 겸손히 섬기는 것인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제자가 아니면서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자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즉, 제자들은 천국 복음의 확장보다는 자신들만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선별된 제자라는 명예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복음을 위하여 힘쓰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가르치신다.
이 사건과 교훈은 제3차 갈릴리 사역(눅 9:1-50)을 마감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제자들이 메시야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 3차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 여기에서 특히 예수님께서 주신 겸손과 관용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서 살아가야 될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봉사해야 한다. 사실 성도들 중에는 교회 안에서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크고 하는 자는 작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가 높아진다는 역설적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성도들은 편협하고 완고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언제나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9:46 누가 크냐. - 본절에서부터 48절까지는 제자들의 논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막 9:33에 의하면 이 논쟁은 변화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서 있었다. 하여튼 '누가 크냐'는 제자들이 벌인 논쟁의 초점이었다. 이것 또한 제자들의 저급한 믿음과 불순한 동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의 논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2차에 걸친 수난 예고를 이들이 직접 들었다는 점과 이 중에 세 제자는 변화 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의 말씀, 특히 그의 수난의 예고까지라도 순종하라는 내용의 언명을 들은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나 예수의 말씀 또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예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등극하게 된 이후 그때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큰가를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9:47 예수께서…아시고. -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제자들의 논쟁은 예수님의 부재시(不在時)를 이용해서 벌어진 듯하다. 이는 제자들 역시 이 같은 논쟁이 예수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저급한 성격임을 스스로 알았다는 증거가 된다.
어린 아이… 곁에 세우시고. - 어린 아이는 유대 사회의 통념에서 볼 때 여자와 같이 천시 받았던 부류에 속했는데, 이는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는 이해력이 결여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이들은 인구를 계수하는 데에서 제외되기도 했다(마 14:21). 그래서 제자들은 평소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마 19:13-15). 이런 사회적 통념에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곁에 가까이 하신 행위 그 자체는 예수님의 좌·우편을 먼저 차지할려는 제자들의 논쟁에 찬물을 끼얹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즉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받는 어린 아이를 용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논공행상에 따른 서열이나 질서가 지배할 것이라는 제자들의 세속적인 생각들을 거부하신 것이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천진무구함이나 순결함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고 부모에게 절대 의지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며 그 분만을 의지하려는 신앙과,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거나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과,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단순성의 이상형으로 제시되고 있다(Calvin, Clarke, Bengel).
9:48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더 이상 사회적 통념 가운데 멸시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할 것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여기서 '어린 아이'가 문자 그대로 어린 아이인지, 아니면 어린 아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미천하고 겸손한 자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떤 경우이든지 형제 중에 연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은 신자된 도리임에 분명하다.
나를 영접함이요. - 어린 아이에 대한 사랑 그 자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직접 연결되는데, 이런 사상은 마 25:31-46의 염소와 양의 비유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 이 구절은 어린 아이와 같이 천시 받는 자를 영접하는 것은 종국에 하나님에 대한 영접으로까지 이르게 됨을 보여 준다. 이는 곧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인데, 이 말씀은 결국 크고자 하는 관심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이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자를 돌아볼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주는 경종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 서로 큰 자로 자처하는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신 교훈이다. 이러한 교훈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4절)는 역설적 진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겸손'이 하나님 나라에서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 됨을 보여 주신 교훈이다. 한편 본절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가장 큰 자'가 아닌 큰 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 세상에서는 크고 작음의 비교 우위가 성립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큰 자인 까닭이다.
9:49 요한이 여짜오되. - 본절에서 나타난 요한의 진술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서 예수의 권능을 빌어 귀신을 축출하는 예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 이는 요한이 언급한 사람이 넓은 의미의 제자, 즉 광의의 제자였음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되어 있지만 전지 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큰 범주의 제자로 용납하셨음을 볼 때에, 그의 귀신축출 능력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 '주의 이름'을 그가 사용한 것은 마법이나 주술적인 주문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는 신앙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 이는 요한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한 사람을 반대한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즉 그 사람이 요한이 속한 좁은 의미의 제자들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의 일을 금한 것이다. 이것은 제자가 되는 것이 특권이 아닐진대, 이미 제자들 사이에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제자들은 자신들만이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라는 명예욕에 사로 잡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 자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이다. 참으로 이런 독선주의와 배타주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나라 확장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요소 중 하나로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9:50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 편협된 집단적 이기주의의 틀 속에 매몰되어 있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격언적 교훈으로, 예수님의 관용의 범주 기준을 잘 보여 준다. 즉 제자들은 자기의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반면, 예수께서는 그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으면 형제라는 광의의 범주를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님을 정점으로 자신들의 왕국의 가시적 울타리를 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이 범위에 속하지 않은 더 광범위하고 불가시적 영역의 제자들이 있음을 예수께서는 증거하신 것이다.
9:51-56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 배척
앞 단락(47-50절)에는 예수님께서 제 3차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겸손과 관용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시는 것을 소개했다. 이어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다가 배척받으신 사건이 소개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부정한 땅으로 간주하여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는 경우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까웠으나 보통 요단 동편의 베레아 길로 우회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52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것이다(51,52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인종이나 민족적 차별 없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대인과 역사적․ 혈통적․ 종교적 적대 관계로 인해 예수님까지 배척하였다(53절). 이에 야고보와 요한은 이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인간적인 미움의 감정으로 심판의 불을 내려 멸망시키기를 제안한다(54절).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은 분을 발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셨다(56,57절). 이는 예수님의 현재 사역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며, 지금은 구원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제자들의 요청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인간적인 생각에서 온 제안으로, 민족적 편견과 우월 의식에서 비롯된 교만과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명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9:51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일련의 과정까지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Bengel). 한편 이와 같은 예수님의 승천할 때에 대한 통찰은, 스스로 지상 사역의 목적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직역하면 '그의 얼굴을 예루살렘을 향하여 확고히 설정하시고'라는 뜻으로 이
는 예수께서 승천에 앞서 겪어야 할 과정인 수난과 죽음 및 부활이라는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셨음을 보여 준다.
9: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 이런 조치는 예수님을 포함한 제자들의 일행의 숙식을 준비키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사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54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에 각별하게 분개한 야고보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사마리아. - 본래는 예루살렘 북쪽 약 67krn지점에 위치한 고대 북왕국 이스라엘의 성읍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동쪽으로는 요단강, 남쪽으로는 아얄론 골짜기와 욥바, 서쪽으로는 지중해,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골짜기와 가이사랴를 경계로 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마 10 :5 주석 지도 참조). 그런데 B.C. 722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민족 혼합 정책 을 편 결과 사마리아인들은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혼혈이 되어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였음은 물론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직통로인 이곳을 피하여 베레아 지역으로 우회하여 다니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직접 통과하고자 하신 것은 그의 구속 사업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할 것이다.
9:53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아니하는지라. -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배척한 이유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사마리아인들은 예수와 그 일행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기 위해 가는 순례자들 정도로 알고 민족적 ․ 종교적 반감을 가지고 예수 일행을 배척한 것이다.
9:54 우리가 불을 명하어‥‥저희를 멸하라. -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의 극언이다. 일부 사본에는 본절에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알렉산드리아, 에브라임, 베자 사본).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가 그를 잡기 위해 아하시야왕이 보낸 오십 부장과 그 부하들을 불사른 것을 재현하고자 한 듯하다(왕하 1:9-14). 한편 본절로 미루어 볼 때 야고보와 요한은 이전 변화 산 사건 때 엘리야가 나타난 진정한 의미를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이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31절), 즉 예수님의 최후에 대해 한 말의 정확한 의미와 사역의 본질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들 이 같은 극언은 삼가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고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정치적 메시야로서만 이해하고 있었을 뿐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내어 줌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9:55 예수께서‥‥꾸짖으시고. - 전절과 같은 극단적인 제안을 한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이다. 본절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일부 사본에는 '너희는 어떤 영에 속했는지 알지 못하느냐.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도다'가 삽입되어 있다(오전시스, 모스코사본, 벌케이트역), 이는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관련하여 매우 적절한 답변이라 할 것이다.
9: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 여기서 다른 촌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예수의 일행에 대한 배척이 없는 사마리아 이외의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Farrar, Bruce, Gilmour). 마 19:1 주석 참조.
9:57-62 제자 됨의 조건
본문은 전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사마리아 땅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고자 했다가 배척받으신 후 다른 길로 우회하여 유대 땅을 향해 가시는 도중 제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조건에 대해 교훈하시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의 조건을 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하여 제시하신다. 첫째는 '어디로 가시는지 저는 좇으리이다'하며 성급하게 따르려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궁핍이나 사람들의 배척과 같은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신다(58절).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현실을 분명히 일러주심으로써 제자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인내가 요구됨을 가르치신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 따르기를 지체하는 사람에게 주신 조건으로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59,60절). 이는 부모에의 도리를 저버리고 복음을 따르라는 내용이 아니라 제자의 우선순위는 복음 사역에 있으므로 부모에 대한 도리가 복음의 의무를 미루기 위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셋째는 세상적인 일에 집착하는 자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제자가 되려면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61,62절). 이 말씀 역시 세상의 염려와 관심이 복음의 사역을 방해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해서는 때로 가족과의 관계도 초월해야 하고(눅 14:26) 자기의 모든 세상적 관심을 버리고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마 19: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합당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려면 세상의 것을 희생하고 모든 가치에 앞서 예수께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마 10:38).
9:57 길 가실 때에. - 매우 부정확한 진술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여행 방향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다만 여기서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 최종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고난의 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혹이. - 마태는 이 사람을 서기관이라고 전해 주고 있다(마 8:19).
어디로 가시든지‥‥좇으리이다. - 여기서 서기관의 결의에 찬 다짐을 엿볼 수 있다.
이것만을 미루어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자처했던 서기관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의 결의는 장차 전개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치 않은 맹목적인 열광이었다.
9:58 여우도 굴이‥‥새도 집이 있으되. - 여우나 새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으로서(삿 15:4; 느 4:3; 아 2:15; 애 5:18; 겔 13:4), 둘다 일정한 거처를 두고 활동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께서 이들 동물을 비유로 든 것은 누구에게나 일정한 거처가 있음을 시사하기 위함이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하는 처지를 여우와 새의 그것과 대조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의 길은 최소한의 생활에 대한 욕구 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행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기관이 그 뒤 예수님을 따랐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분명 예수님께 본절의 말씀을 들어야 할만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9:59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가 될 것을 권면한 경우인데, 이는 전절의 서기관과는 대조적이다. 이 차이는 전절에 제자로 자원한 서기관의 맹목적인 열정의 경우와 본절의 미온적인 태도의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차별적인 지적에서 비롯되고 있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부모님의 장례식을 엄숙히 수행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 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에서 죽은 자에 대한 장례식은 다른 어떤 사회적 관습보다도 고귀한 의무이고, 그래서 모든 일에 우선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사람의 청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핑계로 이 말을 한 듯하다. 본장 자료노트의 난제 해설을 보다 참조하라.
9:60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 여기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뜻하며, '자기의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죽은 부친의 장례식은 불신자에 속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이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를 비윤리적인 종교로 매도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 5계명이 보여 주듯이 결코 비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부모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 공경하는 것과 같이 취급하고 있다(마 15:1-6). 다만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영에 속한 자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라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우선순위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는 예수님의 제자의 최대의 소임인데, 이 소임을 지연시키는 모든 요소는 단절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미온적인 신앙에 진작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이에 대한 전파임을 확실히 함으로써, 그의 나태함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9:61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 이 경우는 비록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을 했지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상태임을 보여 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작별의 기회조차 불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의 이런 조치가 예수님께서 가족과의 작별을 일괄적으로 금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 따르기를 꺼려한 이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 이는 사람의 마음이 분리되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속담이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형식적인 작별을 금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 됨에 대한 결심이 작별 인사를 통해서 번복될 가능성이 있을 만큼 나약한 것이어서 금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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