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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오병이어 이적과 물 위를 걸으신 이적 및 생명의 떡에 관한 교훈과 베드로의 신앙 고백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종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비교적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본서 기록 의도에 적합한 사건들만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요한복음은 각 장의 기록마다 시간적 간격이 많이 있다. 본장에 기록된 사건들도 앞의 5장에 일어난 사건들과는 약 1년 간의 시간 간격이 있는 A.D. 29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때는 예수 공생애 사역의 큰 전환점을 맞던 시기로서 유대인의 예수 배척이 점차 고조되던 시기였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예수를 추종하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가 자신들이 기대하던 바와 같이 지상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며, 자신들의 현실적 문제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점차 예수를 떠나가던 시기였다(15,26,66절). 그리고 이제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받으실 십자가 수난까지 약 1년 남짓 남겨둔 때의 유월절이 가까워 온 시기로서(4절) 장차 당신이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시기까지 신약의 영적 선민인 세계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될 교회(敎會)의 창설자로 세우신 12제자들을 많은 무리들과 따로 집중적으로 교육하시기 시작하신 때였다. 이처럼 주님의 공생애 사역의 전환 시기의 사건들을 기록한 본장의 세부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5절은 요한이 제시할 제 4표적 오병이어 기적과 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당신을 억지로 왕 삼으려는 줄 아시고 예수께서 무리들을 피한 사실을 기록한다. 이러한 내용의 본 단락은 모든 주의 이적이 전반적으로 갖는 교훈 즉 예수께서 메시야, 우리의 구속주로서 절대적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동시에 이를 뜨거운 사랑으로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신다는 일반적 교훈과 함께 특히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준다. 먼저 구속주이신 예수는 구속의 대상인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며 이를 찾아가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영원한 생명과 우주의 창조자이신 성자 예수는 본장의 유대 군중들처럼 현세적이고 부분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한편 유대인들이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에 예수를 정치적인 왕을 삼으려 한 사실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이어 16-21절은 요한이 제시한 제 5표적으로서 예수께서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신 이적을 기록한다. 이 이적은 예수가 천지 만물까지도 제어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분을 받아들이고 믿는 짜들은 이 세상에서의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 참 평안과 영생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신적 절대 능력을 소유하신 분임을 증거한다.
22-51절에서는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자들이 예수를 찾아 온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약 시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겪었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35절)임을 교훈한 사실을 기록한다. 만나와 그리스도는 다같이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가지나 그 질과 효과에 있어서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의 도표를 참조하라. 이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택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구속은 그 효과가 확실하며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는 생명은 영원하고 풍성하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얻게 된다.
그리고 52-59절에서는 예수께서 장차 십자가 수난으로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사 참 생명의 떡으로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주실 것을 교훈한 사실을, 60-65절은 위의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 후 자신의 부활 ․ 승천을 보여주실 것을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택한 죄인들에게 영생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자신의 살을 참된 양식으로. 자신의 피를 참된 음료로(55절) 주시는 십자가 수난이라는 구속 사역 성취를 위한 최후의 사역을 이루시기까지 추호의 단절도 없이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계속하신 참 은혜와 사랑의 구세주임을 보여 준다. 더욱이 당신의 신적 절대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는 숱한 표적들을 보여 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셔서 당대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신약 성도들로 하여금 영생과 천국을 얻도록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세워주신 사실은 당신의 구속 사역이 어느 한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대(쳔代)에 걸친 전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끝으로 66-71절은 오병이어 사건을 계기로 주긴 예수의 생명의 떡에 관한 교훈의 결론 부분으로서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과 구속 사역 성취를 위한 과정의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반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것은 주님이 약해서나 미래를 미리 예측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미리 다 아셨으면서도 스스로 당하신 것으로서 결국 우리의 구속을 위한 희생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베드로 신앙 고백과 관련된 구속사적 의의에 관해서는 마 16장 구속사적 개관과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외울 말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 6:51)
제 4표적 오병이어 이적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제 5표적 물 위를 걸으신 이적
16 〇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22 ○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〇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예언
52 ○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예언
60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66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본문 & 자료 노트
지도- 6:1,24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주요 사역
보감-6:1-21 이적의 목적
성경에는 놀라운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적들은 그저 단순한 인간의 호기심 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위력 시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가벼우신 분이 아니시다.
이적이란 통상적인 자연 법칙을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중지시키시고 특별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이적의 목적을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모아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적의 참 목적을 깨달아 이적을 주신 하나님의 존재와 구전을 깨닫되 그저 이적을 위한 이적을 구하는 어리석은 자나 아니면 계속 표적을 위한 표적을 구한 바리새인처럼 되어서는 안 되겠다(마 16:1).
1.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인식케 하기 위해(출 7:5; 10:2)
2. 하나님을 믿고 경외케 하기 위해(출 14:31)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의 보호를 위해(단 3:28,29)
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마 11:2-5)
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마 15:31; 눅 5:26)
6. 성도의 급박한 구조를 위해(마 15:32-39)
7. 그리스도의 말씀의 확증을 위해(막 16:20)
8.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요 12:37-41)
9.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롬 15:18,19)
10. 사도권의 확증을 위해(고후 12:12)
보감 -6:1-15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의 7대 특징
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이적(요 5:36)
2.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이적(마 8:17)
3. 예수는 작은 것으로도 큰 일을 이루는 능력자임을 증거한 이적(고전 1:27)
4. 예수 자신이 곧 생명의 떡이심을 보여주는 이적(요 6:35)
5. 예수께서 양들을 먹이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여주는 이적(요 10:10)
6. 주 안에서는 성도가 어떤 일도 능히 이룰 수 있음을 증거하는 이적(빌 4:13)
7. 장차 임할 천국잔치를 예표하는 이적(마 22:2)
보감-6:1-15 오병이어 표적의 의미
사건의 경과 의 미
1. 유월절 가까운 때 예수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심(요 1:29)
2. 오병이어 예수가 생명의 떡이 되심(요 6:35)
3.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줌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음(요 14:6)
4.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 구주 예수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임(요 10:37,38)
5. 배부르게 먹고 남음 예수 안에는 생명의 풍성함이 있음(요 10:10)
도표 - 6:16-21 본장의 사건들과 출애굽 당시 사건들의 대조
본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 내용면에서나 발생한 순서에 있어서 출애굽 당시와 광야 생활 동안 일어난 몇몇 사건들과 대조시켜 생각할 수 있다.
본장의 일련의 사건 출애굽 당시의 사건들
1. 유월절이 가까운 때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함(출 12:21-36)
기적들을 행하심(4절)
2. 무리에게 광야에서 떡과 물고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먹이심(11절) 메추라기를 먹음(출 16:13-15)
3. 밤에 물 위로 걸으심(19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에 홍해 바다
한 가운데를 지나감(출 14:21,22)
4. 오병이어 기적으로 모세가 만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생명의 양식을 교훈하심(32-51절) 살 것을 교훈함(신 8:3)
지리 배경-6:17, 가버나움
마 9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6:1-15,22-51 본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예표자 모세
모 세 그리스도
1. 율법의 수여자 율법의 성취자(1:17)
2. 광야에서 뱀을 듦 십자가에 달리심(3:14)
3. 하늘에서 내린 떡으로 백성을 먹임 영생을 주는 산 떡이 되심(요 6:31,32)
4.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구원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되심(10장)
5. 죽음을 앞두고 고별 설교함(신 32,33장) 십자가 수난 전에 고별 설교하심(13-17장)
주요 주제-6:1-51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자기 선언
요한복음 2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6:26-59 본서에만 나타난 예수의 10대 설교
주 제 핵심 내용
1. 영적 중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중생을 얻음(3:1-21)
2. 예배자의 자세 신령과 진정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함(4:20-24)
3.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임(5:19-47
4. 진정한 생명의 양식 예수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 자신의 몸을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생명의 떡으로 주심
5. 예수의 교훈의 근원 예수의 교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참됨(7:14-29)
6. 세상의 빛과 진리 예수는 세상의 참빛이며 진리의 근원이심(8:12-50)
7. 불신자들의 결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 결국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음(8:21-30)
8. 영적 자유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죄와 죽음의 굴레로부터
얻는 방법 자유케 됨(8:31-59)
9. 선한 목자인 예수 선한 목자 예수는 가기 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심(10:1-18)
10. 그리스도와 성도는 포도나무인 그리스도께 붙어있어야만 열매맺을 수 있음(15:1-27)
성도의 관계
보감 -6:27 세상 일에 대한 성도의 자세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육체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다. 본문은 세상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더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상의 일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적극적인 측면
1) 세상 일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함(창 1:28)
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함(고전 10:31)
3) 믿는 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행해야 함(딤전 5:8)
4) 하나님의 의를 나타냄(시 112:5)
2. 소극적 측면
1) 세상을 위해 과도히 일해서는 안됨(사 5:8)
2) 부당하게 취해서는 안됨(살전 4:6)
3) 하나님을 불신하고 구해서는 안됨(마 6:25)
4) 재물만 의지해서는 안됨(잠 11:28)
5) 세상에 마음을 다 쏟아서는 안됨(골 3:2)
6) 영적인 것보다 더 추구하면 안됨(마 5:33)
7) 구원에 방해돼서는 안됨(마 19:23-26)
8)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감사해야 함(빌 4:19)
보감-6:31-35 만나와 그리스도의 비교
만나 그리스도
1. 하늘에서 내려옴(출 16:4) 하늘에서 오심(요 6:38)
2. 하나님이 주심(출 16:4) 하나님이 보내심(요 10:36)
3.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주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남(시 119:105)
(출 16:16,17,23,24)
4. 거두는 자마다 모자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음(요 3:16)
없었음(출 16:18)
5. 하루가 지나면 썩게 됨 구속의 효과는 영원함(요 4:14)
(출 16:21)
6. 만나를 먹은 자는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을 얻음(요 6:47)
살지 못함(출 16:35)
7. 만나가 중단됨(수 5:12) 복음은 계속 전파됨(롬 10:8)
보감-6:47 성도만 가진 것
성도에게는 불신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축복이 있다. 곧 성도는 다음과 같은 여러 절대적이고 영원한 축복을 가졌으므로 이 세상에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축복을 덜 받았다 하더라도 자족함을 알아야 한다.
1.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안(눅 24:36)
2. 하나님의 능력(눅 24:49)
3. 영생(요 6:47)
4. 진리를 알게 하시는 성령(요 14:17)
5. 그리스도(엡 2:12)
6. 하나님(엡 2:12)
7. 소망(엡 2:12; 벧전 1:3)
8. 천국 유업(약 2:5)
9. 승리(요일 5:5)
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신학용어 - 6:32 '진실로 진실로'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독특한 화법 중에 하나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 공관 복음에는 주로 '진실로'(truly)가 한 번 사용된 형태로(마 5:18,26; 6:2), 요한복음에는 두 번씩 이어서 사용된 형태로(요 1:51; 3:11; 5:19등)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로'가 두 번 사용된 형태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며 약 25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진실로 진실로'라는 강조적 어투를 사용하셨을 때 그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용어의 정의
진실로'(truly)에 해당하는 원어는 본래 구약 히브리어 '아멘'에서 유래한 것이다. 히브리어 '아멘'은 '버티다', '지지하다'. '신뢰가 되다'라는 뜻의 동사 '아만'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이 용어는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맹세, 축복, 저주, 기도, 예배 시 송영의 끝부분에 붙여서 사용하였으며 '아멘' 한 말에 대한 자신들의 동의, 혹은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일종의 맹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히브리어 아멘이 신약에서 헬라어로, '아멘', '알레도스로 번역되었고 한글 성경에서는 '진실로' 또는 '참으로'로 번역되었다.
2. 예수님의 용법
예수께서 진지하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신 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① 진리에 대한 강한 자기 확신 및 맹세의 표현: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당신의 교훈, 혹은 구약 율법에 대한 해석, 하나님의 뜻이나 미래 천국에 관한 약속 등에 있어서 그것들이 모두 진실되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자기 확신과 또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 완전히 책임을 지시겠다는 맹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눅 9:27; 12:44; 23:4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주로 예수님 자신의 신적(神的) 신분과 사역의 권위 및 진정성을 주장하는 말씀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요 1:51; 3:11; 10:1,7; 13:14,16). 그것은 아마 예수의 여러 측면 중 그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② 자신의 말씀에 대한 권위의 표현:
또한 '진실로 진실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신적 권위를 갖는 말씀임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사 52:5; 63:8; 렘 9:25 등) 흑은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시 68:22; 렘 51:62), '주의 신이‥‥내게 말씀하여 가라사대'(겔 3:24)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은 자기에게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그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5:19)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즉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메시지를 전파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신적 권위로 직접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화법(話法)을 통해서 그분이 신적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3. 의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주목할 것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은 예수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2사도나 그 이후에 초대 교회 교부들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다만 예배 시에 기도의 끝부분, 혹은 찬송의 끝부분에서 '아멘'(진실로)으로 화답할 때 사용했을 뿐이다. 이로 볼 때 12사도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진실로'로 표현된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으며, 또한 그런 표현을 주님 이외에 아무도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한편 우리들도 복음서에서 이런 표현의 말씀을 대할 때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려보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원어 연구 - 6:46, 보았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헤오라켄'이다. '헤오라켄'은 원래 주위의 사물을 '응시하다'(눅 16:23; 요 3:32)라는 뜻을 지닌 동사 '호라오'의 현재 완료형으로서, 과거에서부터 현재의 시점까지 계속해서 '웅시해온 동작'을 가리킨다.
한편 동사 '호라오'는 무엇을 바라보는 행위 외에 '삼가하다'(막 8:15; 눅 12:15), '주의하다' (마 16:6) 등의 뜻도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지적인 인식(認識) 내지는 영적인 인식을 가리키는 '알다'(마 9:30)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바 하나님께로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는 의미는 곧 예수께서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성부 하나님을 가까이서 보고 주의하여 응시했으며 나아가서 성부를 지각하고 알았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헤오라켄'이 현재 완료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지상에 온 이 후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시점까지도 즉, 계속해서 그때가지 예수는 하나님을 '보고 알았으며 지각해 왔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영원 전부터 지상에 내려온 이후,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는 한시도 빠짐없이 성부를 가까이서 뵈옵고 교제 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의 특별한 위치를 확실히 깨달아 알 수 있다.
주요 주제-6:27,53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6:53-57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
막 10장 자료 노트 참조
인물 연구-6:71, 가룟 유다
마 26장 연구 자료 참조
6:1-15 오병 이어의 표적
앞장에서 본서 저자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자기 계시를 통해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사실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서 저자는 예수의 모든 행적을 연대기 순으로 다 언급하기보다 과감한 생략과 함께 필요한 행적만을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본장에도 나타나는데 예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눅 7,8장)을 생략한 채 제 3차 갈릴리 사역 가운데서 이와 관련된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1-15절)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16-21절)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예수의 교훈(22-59절) 및 사람들의 상반된 반응(60-71절)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 본문은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소개하고 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이는 본서에 기록된 예수의 7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당신을 알리는 표적으로 행해진 것이다(요 2장 연구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 참조). 즉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신적 권능을 또다시 확연히 드러내 주며 자신이 영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암시함과 동시에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천국 잔치를 예시한다.
하여튼 이러한 오병 이어의 이적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큰 분수령으로 작용한다. 즉, 지금까지 고조되던 예수님께 대한 메시야적 기대를 예수께서 거부하심으로(15절) 이 사건 이후로 점점 수그러들고(66절), 예수님께서는 무리들로부터 본격적인 배척과 핍박을 당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64,70,71절; 요 7:1,43-49). 물론 이러한 결과가 비롯된 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 때문이었으며, 결코 예수님의 이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오히려 주님을 배척하는 편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15,2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이 지상의 한시적(限時的)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이루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회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히셨다(27,35,51,53-58절).
한편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먹이라고 명한데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다. 즉, 제자들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9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고도 음식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찰 정도로 남게 만드셨다(10-13절). 그러므로 불신앙적인 태도를 지닌 자들은 불가능성부터 계산해 보지만, 신앙적 자세를 지닌 자들은 가능성부터 먼저 계산해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예수의 표적에 대한 무리들의 잘못된 반응이다 즉, 오병 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자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당시 로마의 학정(虐政)에서 해방시켜 줄 해방자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은 예수께서 고난 받는 종(사 53:1-12)으로서의 태도를 취하자 모두 다 예수를 배척한다(66절). 그런데 오늘날에도 육신적, 물질적 축복만을 추구하여 예수를 믿으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들은 도리어 예수께로부터 내어 침을 당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24:51).
6:1 그 후에. - 얼마 간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관용어이다. 요 2:12;5:1 주석 참조. 그런데 공관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앞장과 본장 사이에는 예수의 제 2차 갈릴리 사역(마 8,9,11-13장; 막 3-5장; 눅 7,8장)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앞장과 본장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는 셈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 '디베랴'란 헤롯 안디바가 A.D. 25년경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를 기념하기 위하여 갈릴리 바다 서쪽 해변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붙인 것에서 연유해 불리워진 명칭이다. 막 4장 자료노트, '갈릴리 바다' 참조. 그런데 요한이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이러한 특별한 명칭을 '갈릴리 바다'라는 이름과 병행하여 사용한 이유는(요 21:1) 예수 시대 이후에는 아마도 이 '디베랴'라는 명칭이 특히 이방인들에게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이 명칭은 A.D. 1세기의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된다(Josephus; Sibylline Oracles).
건너편으로 가시매. - 공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건너편'은 구체적으로 벳새다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눅 9:10). 이곳은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의 고향이다(요 1:44).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 본절에 사용된 동사 세 개(따르다, 행하다, 보다)는 모두 미완료형으로서 요한은 이를 통해 그림과 같은 선명한 표현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이 미완료 시제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주고 있어서 그들이 지금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예수를 따랐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도 계속되어 왔으며 그것을 보는 일도 계속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Morris). 그런데 요한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5-13절) 사건을 기록하기에 앞서 이러한 군중의 행태(行熊)를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던 일이 진정한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적'(세메이아)의 진정한 본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오병이어의 표적 후에 그것과 관련된 교훈을 주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30,31,34,41,42,52절) 심지어 예수를 떠나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이(66절) 바로 이 점을 잘 증명해 준다. 한편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예수의 이적 중,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것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요 2:1-11)과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신 표적(요 4:46-54) 뿐인데 본절에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여러 번의 이적들을 행하셨음을 뜻하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요한이 예수의 이적을 취급하는 방법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사용한 '발췌된 이적 목록'에서 더욱더 자신이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요한은 자신의 본서 기록 목적에 따라 길게 나누어야 할 부분은 길게 다루고(예를 들면 다락방 강화를 13-16장까지 다룬 것) 간략히 처리할 것들은 극단적으로 생략하기까지 한 것이다(Brown).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 갈릴리 지방에 있는 이 '산'(토 오로스)은 사복음서에서 언제나 관사를 동반하여 중요한 신학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 대표적 경우로는 ① 산상수훈(마 5:1) ② 열두 제자의 선택(막 3:13) ③ 승천 후의 나타나심(마 28:6)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전통적인 속설(俗說)에 의하면 이 산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의 '팔복 산'(the Mount of the Beatitudes)이라고 하나 사실 여부를 알 길이 없다. 다만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이 '산'을 '기독교의 시내 산'으로 규정화하고 있는 것 같은 색채가 본서에도 나타난다. 즉 과거에 모세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듯이 예수께서도 이 산에서 군중들에게 산상 수훈을 베푸시고 그 밖의 여러 중요 사건들을 행하셨음이 은연 중에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출 34,35장).
제자들과 거기 앉으시니. - 앉아서 가르치는 관습은 랍비들에게 익숙한 교수법이었다(마 5:1; 24:3; 막 4:11; 9:35; 눅 4:20).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본절의 유월절은 요 2:13 이후에 나타나는 유월절로 본서의 기록만으로 따지면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두 번째 맞이하시는 유월절이다. 한편 유대인들의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으셨던 예수께서(요 5:1) 이번 유월절에는 그대로 계속 갈릴리에 머물러 계신 것은(요 7:1,2) 의미심장하다. 이와 관련,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와 본 오병이어의 이적적인 식사(5-13절)를 연결하려는 즉, 성만찬의 요소를 암시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비록 불트만(Bultmann)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지만 본서가 성만찬의 기사를 생략하는 대신 본 이적 속에 그 의미를 삽입했다고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Barrett Cullmann). 이러한 주장은 53-58절과 마 26:26-29을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양자는 모두 예수의 '살과 피'에 관한 가르침으로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특히 53-56절의 매절에서 4회나 강조되는 '피'에 관한 말씀은 성만찬의 식탁에는 늘 있는 '포도주'가 이번 오병 이어의 이적적 식사에는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보충적 강조라고 이해할 수 있다.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 여기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아 이들이 2절의 '큰 무리'와 같은 사람들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같은 사람들로 보는데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 '큰 무리'의 정체(Identity)에도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때가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으므로 유월절 순례객들이라면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했거나 노중(路中)에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 벳새다는 순례길(Pilgrim route)의 경유지가 아니며 또한 순례자들은 음식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본장의 배고픈 군중들은 유월절 순례객들이 아님이 분명하다(Brown). 이러한 사실로부터 한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순례의 의무가 부과된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신 16:16)에 모두 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것이다. 유대교 문헌들은 종종 명절 때의 예루살렘 순례객이 120만 혹은 270만, 심지어 1,200만 명이었다는 터무니없는 숫자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그만한 사람을 수용할 만큼 넓은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유월절에는 유월절 양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성전 내에 머물러야 하고 장막절에도 초막을 지고 일주일간 거주해야 했으므로 예루살렘 성이 그러한 천문학적 숫자를 수용하기란 불가능했다. 예레미야스(Jeremias) 같은 학자는 보다 가능한 순례객들의 수를 85,000~125,000명 정도로 보고 있는데, 실상 이러한 숫자만 해도 예루살렘 성은 포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의 규모를 고려할 때 모든 유대인들이 매 명절마다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실 예수께서도 이번 유월절에는 갈릴리에 계속 머물고 계셨다(4절 주석 참조).
빌립에게 이르시되. - 빌립은 베드로. 요한 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자로 부름 받은 자로 그 역시 벳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토의 시 흔히 대표적으로 거론되던 베드로 대신에(마 14:28; 26:33) 이번에는 빌립이 언급된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① 이곳이 빌립의 출신지라서 그가 시장 정보나 지리에 밝았으므로(Morris) ② 빌립의 연약한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서(Chrysostom)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자는 베드로와 안드레 역시 벳새다 출신이므로 문제가 있으며, 아울러 예수의 진정한 의도가 떡을 사러 보내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9-11절) 거부되는 것이 좋다. 반면에 6절의 '시험코자'라는 말로 보아 이 일이 빌립의 믿음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예수께서 그를 지목하셔서 질문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 '어디서'(포덴)라는 말은 '어디서'(where) 외에 '어떻게'(how)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한데, 7절에서 빌립이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라는 의미로 쓰인 것 같다(Hendriksen). 한편 '떡'에 해당하는 '아르투스'는 유월절 식사인 무교병(unleavened bread)을 의미하는 '아쥐마'와는 나른 단순히 납작하고 등근 떡을 가리키나 (Hendriksen) 일반적으로는 '떡'이라는 단어의 통칭적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도 최후의 만찬 묘사에서 '떡'을 '아쥐마' 대신 '아르토스'로 쓰고 있는 것이다(마 26:26; 막 14:22; 눅 22:19).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 예수의 전지(全知)하심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증거되는 예수의 신성(神性)중 하나이다(15절; 요 2:24,25; 5:6,42; 19:28; 21:15). 즉 이는 예수가 근본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주는 일례이다.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 본절의 '시험하다'(페이라존)라는 동사는 비슷한 의미의 조금 더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대개 나쁜 의도에서 시험하거나 유혹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서 빌립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약 1:13) 이미 빌립이 어떠한 대답을 할지 아시고서 테스트(test)해 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를 '속을(혹은 마음을) 떠보려고'라고 번역한 한글 역본들의 번역은 바람직한 의역이다(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 성경).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본절은 빌립이라는 제자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무리들의 수를 한 눈에 어림하고서(10절 참조) 필요한 떡의 양을 대략치나마 계산해낼 수 있었던 빌립의 성격은 계산적이고 치밀한 편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계산한 기준인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부족하리이다'한 '최소량'은 능력 있는 예수의 표적에서 '저희의 원대로'(11절)라는 '풍성한 양'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12,13절). 그러므로 앞서 풍성했던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요 2:1-11)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빌립의 이러한 생각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빌립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9절 참조). 한편 '한 데나리온'이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마 20:2)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정확히 얼마인지 환산하는 짓은 어렵다. 1권 성경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설령 제자들이 이만 한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도(요 13:29) 당장 그 주변의 마을에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구입해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빌립의 대답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불가능을 시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Morris) 그러나 예수께선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것이다.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다룬 예수의 열 두 제자 선택 기사(마 10:14; 막 3:13-19; 눅 6:12-16)를 본서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열두 사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지 규정하기 힘들다. 누가에 의하면 70명의 예수 제자들(눅 10:1)이 있었는데, 요한은 그 제자들에 대해서조차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66,67절에 보면 열두 제자보다 확대된 제자의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요한이 말하는 '제자' 개념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즉 ① 열두 제자의 선택이나 구성에 관해서는 이미 공관복음의 기록을 통해 독자들이 익숙해 있을 것이므로 요한은 그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것이다. ② 더욱이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던 시대(A.D. 90년대)에는 이미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의 '제자'라고 불리웠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요한은 '제자'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열두 사도를 가리킬 때는 다만 '열둘'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요 20:24에서는 가룟 유다가 빠진 상태에서도 '열둘'이라고 칭하고 있다). 한편 안드레는 본서가 밝히는 '뒷얘기'에 의하면 본래 세례인 요한의 제자였고(요 1:40,41).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었다(막 1:16). 전승에 의하면 훗날 그는 헬라의 한 도시인 아카이아에서 선교하다가 X형(型) 십자가에 달려 순교 당했다고 한다(Myers). 본장에 따르면 그의 성격은 빌립과는 다소 대조적으로 적극적이어서 식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곧 바로 청중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한 듯하다. 하지만 그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어떤 해결책보다는 불가능성을 시사하며 예수께 말씀드리고 있다(9절).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 '아이'에 해당하는 '파이다리온'( )은 유아(infant)를 가리키는 '파이디온'보다는 더 나이가 든 10대의 소년을 가리키는 듯하다. 70인역(LⅩⅩ)에서 10대(17세쯤)인 요셉을 그렇게 표현한다(창 37:30). 또 종종 이 단어는 파피루스에서 '종'(Servant)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Moulton & Millgan, J. Moffatt, W. Bauer). 그리고 외경 토비트(Tobit) 6:3에서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a youth)를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의 양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추측해 보아도 요한이 이 단어를 '유아'로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이 '도시락'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그러나 '한 아이'를 그 도시락의 제공자로 묘사하면서 대략적인 연령까지도 시사하고 있음은 요한이 친히 이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리떡 다섯 개와. - 보리떡은 예수 당시 가난한 서민의 주식으로서 밀로 된 빵(wheaten bread) 보다 값이 더 쌌다(왕하 4:42). 그런데 이처럼 제공된 떡이 보리떡이라는 구체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도 사복음서 기자 중에서 요한뿐이다(Morris, Bernard). 한편, 눅 11:5은 한 사람의 한 끼 식사가 떡 세 덩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떡 다섯 개는 보통의 떡보다 크기가 작은 것이거나 아니면 소년이 여분의 떡을 준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 여기서 '물고기'를 가리키는 '옵사리온'은 공관복음서의 '잌뒤스'와 차이가 나는 것으로 '생선'이라는 뜻 이외에 '반찬'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것이 소금에 절인 생선(Pickled fish)을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Moulton). 아무튼 이 단어 역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단어로 총 5회 사용되었다(9,11절; 요 21:9,10,13). 또한 이 단어가 '옵손'의 축소형(diminutive)인 것으로 보아 본절의 물고기는 크기가 작은 물고기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 조악(粗惡)하고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강조해 주는 의미가 이 안드레의 말에 담겨 있다. 한편 이처럼 안드레가 불가능을 토로한 것과 달리 예수께서 오병 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것(10-13절)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자 모세가 불가능을 토로한 데 대하여 하나님께서 메추라기 이적을 행해 보이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민 11장). 그러므로 본 사건은 정녕 예수께서 근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표적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 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오천쯤 되더라. - 본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안드로푸스)과 요한이 서술한 '사람들'(안드레스)이 각기 다른 것이 특이하다. 전자는 남녀 구분이 없는 통칭적인 '사람들'을 가키고 후자는 본서에서 드문 표현으로서(요 1:13,30; 4:16.17,18) 남자들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이고 요한은 히브리적인 사람 계수 방법에 근거해(민 1:2) 남자들만을 센 것이다(마 14:21).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요한의 상용적 문체(literal style)인 '동의어 반복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일례로 요한이 '알다'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기노스코'와 또 '오이다'(요 14:7,10)를 교차 사용한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다'에 대해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를 교차 사용한 것도 그 일례이다(요 21:7), 한편 본절의 '앉게 하라'라는 '포이에사테 아나페세인'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인 '기울여 앉는'(recline)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F. Rienecker). 다음으로 '잔디가 많은지라'로 보아 당시가 유월절 무렵 봄이었음(3-4월경)을 분명히 알 수 있다(4절 주석 참조). 그리고 이처럼 푸른 잔디밭에 큰 무리를 앉히시우고선 저들에게 하늘로부터의 양식을 내려 먹이시우는 예수의 모습(11-13절)은 참으로 저가 자기 백성들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참 목자(시 23:1,2; 요 10:1-18)이심을 시사해 준다.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 '축사하다'(유카리스테오)는 '감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영어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eucharist'와 어원적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혹자는 바로 이 단어에서부터 오병이어 사건의 성례전적 의미를 찾고 있기도 하다. 4절 주석 참조.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모든 군중들이 풍성한 식사를 했음은 공관복음서 기자들도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는 사항이다(마 14:20; 막 6:42; 눅 9:17). 그러나 요한은 그 사실에 추가해서 생명의 떡의 무궁무진한 공급자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킬 준비로(35절 참조) 풍성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6:12,13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이처럼 오병이어의 이적 결과 먹고 남은 조각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바구니에 가득 거두어 모은 데 대하여선 다양한 영적 의미의 설명이 가능하다(마 14:20; 막 6:42,43; 눅 9:17 주석들을 참조 하라). 그러나 1차적으로 요한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의 말씀(22-59절)과 연관하여 예수야말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메시야이심을 이를 통해 시사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요 10:10). 한편 '열두 바구니'에 대해 혹자들은 열두 제자가 각각 한 개의 바구니를 가져왔다고도 추측한다. 하지만 '열두 제자'에 대한 요한의 표현은 본서에서 드물고(8절 주석 참조) '열둘'이라는 구체적 표현도 67절에야 나타나니 신빙성이 없다.
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대개의 학자들은 이 구절을 신 18:15의 '모세와 같은 선지쟈'(the Prophet like Moses)와 연관하여 이해한다. 즉 당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본 청중들은 예수를 과거 광야에서 만나를 준 모세와 연관해서 생각했다는 것이다(31절). 하지만 14,15절이 청중들의 말과는 구분되는 청중의 이해에 대한 요한 자신의 평가가 가미된 것으로 본다면 '그 선지자'는 눅 7:16; 24:19; 요 9:17 등에서 묘사된 이적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생각한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마 16;13,14) 선지자(a prophet) 관념과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Brown). 즉 본장의 이적은 구약시대에 보리떡 20덩이로 일백 명을 먹인 엘리사의 이적(왕하 4:42-44)과 평행을 이룬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청중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서 비단 모세뿐 아니라 엘리사와 연관지어 예수를 그처럼 능력 있는 선지자 중 하나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 본절은 당시의 로마 압제라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유대인들 중에는 메시야 혹은 다윗 계열의 왕이 유월절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유대인들(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그 선지자'(14절)와 '메시야'는 동일시되지 않았다(요 1:21; 7:40,41). 그러기에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ity)에서도 메시야 이전에 한 선지자가 올 것으로 보았다. 하여튼 이러한 사실은 차치하고서 예수의 권능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저가 능히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권능자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저들은 예수를 유대인들의 왕으로 삼아 다시금 구약 시대의 다윗 왕국과 같은 왕국을 재건하고자 희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녕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성격을 이해치 못한 행위인 바 예수께선 저들을 피해 잠시 한적한 곳으로 은거하신 것이다.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 회중들의 중대한 오해가 발생했거나 아니면 아직 자신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때가 이르지 아니한 것과 관련, 예수께서 종종 한적한 곳으로 피하신 사실은 공관 복음서들도 밝히고 있다(막 1:5; 눅 6:12).
6:16-21 물 위를 걸으신 예수
앞 단락(1-15절)에서 소개된 대로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예수께서는 잠시 후 제자들로 하여금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의 건너편에 위치한 가버나움으로 가도록 지시하셨다(마 14:22). 그런데 도중에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하게 일어나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는 거의 파선(破船)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했다(16-10절). 이처럼 제자들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홀연히 물위를 걸어오셔서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제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자신이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되심을 보여 주고 계신다(19-21절). 이 사건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7대 표적 가운데 다섯 번째 표적이다(요 2장 연구 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자기 선언' 참조).
한편 마 14:22-33과 막 6:45-52에도 소개되어 있는 이 사건을 본서의 기록자 역시 언급하는 이유는 본장 22-5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강화에 대한 도입부로 예수님의 가버나움에서의 가르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즉, 오병 이어의 이적이 행하여진 현장에서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는 사람들이 가버나움으로 뒤따라 와서 과연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질문했을 때,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지기 위해 본문이 기록된 것이다(22-27절).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초자연적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신성을 소유한 자라는 점이다.
② 위험에 닥친 제자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듯 찾아오셔서 그들을 안심시키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신 예수께서는 오늘날 택함 받은 성도들에 대하여서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다 지켜 주실 참 목자요 생명의 구주시라는 점이다(요 10:11-15; 17:12).
6:16,17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공관 복음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께선 자신에 대하여 광적인 오해에 빠져있는 청중들(14,15절)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끔 자신의 제자들을 불러내어 먼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셨음을 알 수 있다(막 6:45). 한편 '건너‥‥가는데'라고 번역된 '에르콘토'는 미완료시제로 ① 능동형(conative) 미완료인 '건너려고 노력하여'라는 의미이거나(Blass and Debrunner) ② 계속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미완료인 '건너는 과정에 있는'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Morris). 다음으로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한 동네로 이곳 회당 부근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마 8:14). 그리고 예수의 갈릴리 선교에 있어 중심지였기도 하다(막 2:1), 마 9장 자료노트, '가버나움' 참조. 한편 불트만(Bultmann)은 '예수는 아직‥‥아니하셨더니' 부분을 후대의 편집자의 추가 부분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된다.
① 본 구절은 제자들이 승선하게 된 이유를 제시한다. 즉 제자들은 예수의 명을 받고서(막 6:45)
예수께서 오시리라고 기대하여 지체하지 않고 떠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요한 자신의 기록이다(Wikenhauser, Brown).
② 17,18절의 동사들의 시제가 정확한 사건의 추이를 반영한다. 17절의 '건너‥‥가는데'(에르콘토)와 18절의 '일어나더라'(디에게이레토)는 미완료로서 배에 탄 사람들과 바다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17절의 '어두웠고'(스코티아)와 '오시지 아니하셨더니'(우포 엘렐뤼데이)는 과거 완료로서 제자들이 건너편 해안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때의 상황을 묘사해 준다(Hendriksen). 따라서 이러한 치밀한 시제의 사용은 본절(17절)이 한 저자의 기록임을 밝혀 준다.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한글 개역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원문에 는 초두에 '게다가'(moreover)란 의미의 '테'란 강한 접속사(strong connective)가 나와 있다. 이는 요한이 잘 사용하지 않은 단어이다(Brown), 즉 누가가 9회, 바울이 20회 이상 사용한 반면 본서에서는 3회만 나타난다(W. Bauer). 이는 설상가상의 상황, 즉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운 데다가 돌풍까지 불어 위기 상황에 처한 것을 강조해 준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저녁이 되면 산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찬 공기의 유동으로 예상 찮은 돌풍(squall)이 자주 분다고 한다.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 원문에는 '25 혹은 30 스타디온'이라고 되어 있다. '스타디온'이란 약 607피이트(feet), 즉 185m이므로 25-30 스타디온이란 4.6-5.6km 정도이다. 이 거리는 오병이어의 이적이 베풀어진 장소로 추정되는 벳새다(1절 주석 참조)와 제자들의 행선지인 가버나움의(17절) 직선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갈릴리 바다의 넓이를 고려할 때(막 4장 자료노트, '갈릴리 바다' 참조), 풍랑으로 인해 표류했다면 모르되, 행선지를 향해 곧장 움직여 갔다면 지금 제자들은 거의 북서편 해안 가버나움 근처에 다다라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바다 위'(에피 테스 달렛세스)라는 표현은 '해변'을 의미하는 '에피 텐 달랏산'과 동의적으로도 쓰일 수 있기에(요 21:1) 혹자는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해변을 걸으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ernard). 하지만 본서 저자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의도하는 본 기사의 강조점(point)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견해는 터무니없다. 마가도 요한과 마찬가지로 '바다 위'라는 말을 애매하게 표현하였긴 하지만(막 6:49) 마태는 정확히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을 기술하고 있다(마 14:25).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도 있는 어의(語意)의 다양성을 근거로 복음서 저자들이 문맥(context)과 사상(thought), 분위기(nuance) 등 전체에서 강조하는 이적 묘사를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편견이다.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내니'(에고 에이미)라는 말은 본서에서 예수의 자기 계시(나는 ~이다)를 나타내는 독특한 어법으로 '진실로 나는 ~이다'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35절, 요 10:7; 11 :25). 따라서 유령을 본 줄 알고(막 6:49)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친숙한 예수의 이 말씀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음에 틀림없다.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 '기뻐서'라고 개역 성경이 번역한 헬라어는 '에델론'으로서 본래 '~하려 하다'(willing to)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영접하니'와 연결하여 '기꺼이 영접하려 하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동사는 ① 실현되지 않은 희망(요 7:44; 16:19)이나 ② 실현된 희망(요 1:43; 5:35) 양자에 다 사용될 수 있으므로 본절에서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를 영접했는지 않았는지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개역 성경은 이 동사를 의역하여 '기뻐하다'(take pleasure in)로 번역하고 있다. '에델론'이 부정사와 더불어 이런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막 12:38과 눅 20:46 뿐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의 영접을 받아 배에 올랐을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거나 공관복음의 증거를 보아도(마 14:32; 막 6:51)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동사의 본래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기꺼이 배 안으로 영접하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KJV, NASB, NIV, LB, TEV). 그러나 공동번역은 제자들이 '예수를 배 안에 모셔들이려고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승선하지 않으시고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번역하고 있다.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이것은 ① 배가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고 전제할 경우, 예수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이적적인 순항으로 볼 수 있다(Barrett, Godet, Hendriksen). 그러나 ② 배가 이미 가버나움 해안에 가까이 이르렀으므로(19절 주석 참조) 곧 닿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견해는 버나드(Bernard)가 지적하는 대로 이 사건을 이적이 배제된 자연 현상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견해이다.
6:22-59 생명의 떡이신 예수
본장 첫 단락(1-15절)에서 우리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게 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그처럼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인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한 유대 군중이 예수님을 기어코 자신들의 왕으로 삼기 위해(15절)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가버나움까지 뒤좇아 옴으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22-25절). 하지만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온 진짜 이유는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현세적, 육신적 욕구를 채우려 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썩어질 육신의 양식'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기보다 '영생의 양식'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라고 교훈하시면서(27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에 관해 가르치셨다(28-59절).
한편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이 사건 이전에 발생했던 오병이어의 사건이 사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는 요한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요한은 단순히 이적 자체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이 참 진리의 표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님을 해설하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요한은 오병이어의 이적 사건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 이적이 예수가 생명의 떡이심을 보여 줌을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교훈은 유대 군중과 예수님의 질의응답(質疑應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① 메시야의 표적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자신이 하늘에서부터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28-35절).
② 생명의 떡에로의 초대로서, 이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접하심과 마지막 날의 부활과 영생의 축복에로의 초대를 가리킨다(36-40절).
③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말씀하신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군중에게 주신 것으로, 예수께서는 앞서 언급한 교훈들을 재차 교훈하시면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인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강변하신다(41-51절).
④ 살아있는 떡인 예수의 살을 먹으라고 하심으로 인해 생긴 유대인들 간의 논쟁에 답변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기서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교제를 강조하신다(52-59절).
이처럼 본문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참 양식이라는 사실을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셨다. 즉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조상들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나, 하늘에서 내린 참 양식, 다시 말해 인류 구속을 위하여 친히 희생 제물이 될(막 10:45) 주님 자신을 영접하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48-51절). 하지만 영적인 무지에 빠져 있던 유대 군중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예수는 단지 요셉의 아들일 뿐 결코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라고 수군거리며(41,42절) 결국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제각기 흩어져 버렸다(66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예수께 대한 저들의 배척과 핍박의 정도가 점점 더 고조될 것이며 급기야는 결정적인 충돌이 불가피할 것임을 예견케 된다.
한편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비록 지엽적인 것이긴 하나 다음과 같은 교훈도 얻을 수 있다.
①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생명의 참 떡'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육신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영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님을 매일 매일 우리의 삶속에 모시지 않고서는 결코 우린의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② 세상에 속한 것들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만족만 줄 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도 참된 만족을 주신다는 사실이다(요 4:13,14). 즉,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삶에 지친 우리를 잠시나마 위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고 있는 죄악의 멍에를 완전히 풀어 주심으로써 영원한 안식 주시기 위함이다(마 11:28-30; 롬 7:24-8:2).
따라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됨을(요 3:16) 온 세상에 증거할 사명이 바로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딤후 4:2).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도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아니하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 벳새다 사람들이 예수의 행방이 묘연하자 의아해하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어제 저녁에 해변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음과 그 배로 예수의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떠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않으시고 벳새다에 남으셨음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땅히 벳새다에 계셔야 할 예수께서 하룻밤 사이에 종적을 감추시자 어리둥절해 한 것이다. 사실 저들은 예수께서 한밤중에 바다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6: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 개역 성경이 본절을 괄호 속에 넣고 있는 이유는 일부 사본에서는 본절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본절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본다. ① 예수를 '주'(퀴리오스)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에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Morris). ② '축사하다'(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은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말미암은 식사(11-13절)에 성례전적 의미를 부가하려는 의도적인 용어이다(Hendriksen). 11절 주석 참조. ③ 디베랴라는 도시(1절 주석 참조)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 언급되어 있는데, 전후 설명 없이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Bernard). ④ '주께서 축사하신 후'라는 구절이 베자 사본, 라틴 역본들, 시리아 역본들에는 빠져 있고 벌게이트(Vulgate)에는 '주' 대신에 “'무리'가 감사한 후”라고 되어 있는 것도 본절의 일관성 없는 진정성을 보여준다(Brown). 이상에서 보듯 여러 방증(傍證)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해준다. 그러나 모든 사본들이 다 본절을 생략하고 있지는 않으니 이를 후대의 삽입으로 단정하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본절은 디베랴에서도 예수를 추종하던 자들이 예수를 만나러 벳새다에 왔음을 증거해 주는 부가(附加) 구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 여기서 '배들'은 디베랴에서 온 사람들이 타고 온 배들(23절)을 가리킨다. 즉 22절에서 보듯 한척 있는 배가 떠나고 없는 상황에서 발이 묶여 있던 벳새다인들은 디베랴인들이 배를 타고 오자 함께 배에 올라 예수 일행을 찾으러 나선 것이다.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 이는 예수의 표적(요 2:23)에 큰 인상을 받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 부른 호칭으로(요 3:2) 본장에서도 표적에 놀란 무리가(14절) 이렇게 부르고 있다는 데에 재미있는 평행이 있다(Brown). '랍비'란 '율법'에 정통한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본래는 종이 주인을 부르던 존칭어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본서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호칭 '주'(퀴리오스)와 본 호칭을 번갈아 사용하였다. 그러나 예수 부활 후 '주'가 예수께 대한 일반적 칭호로서 정형화된 이후에는 '랍비'라고 부르는 경우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Hendriksen).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 '오셨나이까'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나스'는 '~에 있다 (be)' 혹은 '~이 되다(Become)'라는 뜻의 '기노마이' 동사의 완료형으로 다음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① '언제 오셨습니까?' ② '얼마나 오래 여기 계셨습니까?'(Morris) 이는 곧 무리들이 그 동안 예수를 애타게 찾았음을 강조해 준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을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셨습니까?'라는 물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Murray). 이는 배가 한 척밖에 없던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가 바다 건너편에 와 있었을까 하는 무리들의 의문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다.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요 1:51 주석 참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 군중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우회적(迂廻的)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의 대화법은 이미 본서에서도 처음대하는 것이 아니다(요 3:5; 4:12-14). 즉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배부르게 된 군중들이 그 표적의 진정한 의미인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요 20:31)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추종하려 들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배부른'에 해당하는 '에코르타조'는 본래 짐승들이 '풀'(코르토스)을 먹을 때의 모양을 묘사하는 단어로 12절의 '배부른'(엠피플레미)과는 다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중복되는 단어 사용을 꺼리는 요한의 어휘 구사법을 1차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무지한 청중들을 꾸짖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동물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단어인 '에코르타조'를 사용하는 요한의 숨겨진 의도를 읽을 수 있다.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공동 번역은 본절을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누구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됨(요 3:16)을 뜻함은 물론 예수 자신이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뜻한다(요 17:24).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 요 1:51 주석과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의 이해'를 참조하라.
인자는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 인(印)을 치는 행위는 '자신의 소유나 보증'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기본적 의미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예수에 대하여 이러한 표현을 적용한 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①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그 위에 머문 것(요 1:32-34)을 가리킨다(Bernard). ② 동정녀 탄생 시에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눅 2:13,14)을 가리킨다(Spicq). ③ 흠 없는 제물에 제사장들이 찍어 주는 도장과도 같은 하나님의 인정을 가리킨다(Westcott, Hoskyns). ④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정을 가리킨다(Brown). ⑤ 구속사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위임한 것(요 5:19-30)을 가리킨다(Murray).
그러나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하더라도 이는 '사람의 승인'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임에는 차이가 없다.
6:28 저희가 묻되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율법으로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신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이었다(29절; 갈 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으로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였고 정체성(identity) 확인이란 측면에서 율법의 문자적 준수만을 고집하였다(마 3:9; 롬 2:17-29).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 이는 곧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즉 이는 예수의 신성(神性)과 신적 권위를 나타내 준다(요 3:17; 17:3,8).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28절의 군중들의 질문에는 '일'(에르가)이 복수형으로 나타나지만 본절의 예수의 응답에선 단수(에르곤)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그것이 가장 중요함)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으로 보인다(Morris).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바울이 지적하였듯이 헬라인들이 지혜를 즐겨 구한 것과 달리 유대인들은 표적 보기를 즐겨 하였다(고전 1:22). 하지만 문제는 이미 나타난 표적을 보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도 믿지도 않는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앙이었다. 즉 저들은 예수께서 이미 여러 표적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건만(요 2:1-11; 4:46-54; 5:1-9) 도무지 그 사실을 믿지 아니한 채 보다 더 큰 표적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실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5)고 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사 6;9,10)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
6:31 기록된 바 하늘에게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함과 같이. - 요한에게 있어 구약의 인용은 정확한 자구적 인용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본절은 출 16:14,15; 시 78:24 정도의 의미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Brown).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유대인들이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표적은 그들이 모세의 이적 중 가장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만나의 공급(출 16:13-36)과 연관된 것임이 분명하다. 미드라쉬(Midrash) 등의 유대적 전통은 바로 그러한 모세의 이적(하늘로서 내려와 전 민족을 먹일 수 있는)을 계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하였다(Hoskyns). 그러나 유대인들이 본 예수의 오병이어의 이적(10-13절)은 단회적이고 그 규모도 고작 5,000명에 불과했다는 데에 그들의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Morris).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주시나니. - 유대인들의 긍지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자신들의 조상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세를 광야 사십 년 동안 자신의 조상들을 만나로써 먹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선민(選民) 관계를 구현한 국부(國父)로 숭상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운 종에 불과하였으며 그가 행한 이적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선 유대인들의 그러한 오해를 시정해 주고 계시는데 특히 본절에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①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출 16:15). ② 만나는 일시적이고 썩어질 양식이었던 반면(출 16:20,21) 하나님에서 주시는 참 떡은 영원한 것이다(35절).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내려'(카타바이논)는 인칭적(personal)인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비인칭적(impersonal)인 것이기도 하다. 혹자들은 양자를 확연히 구분해 한 가지만을 택하지만 요한은 양자를 다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Brown). 즉 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분'(He who comes down)이시며, ②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온 것'(that which comes down), 즉 '생명의 떡'(35절)인 것이다.
6: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 25절 주석 참조.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유대인들이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다만 물질적인 떡의 무한한 공급만을 예수께 요구하는 장면이다. 이는 예수께서 '영원한 생수'에 관해 말씀하시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물을 구한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요 4:14,15)와 유사하다.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선언은 본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유한 예수 자신의 선언체 형식이다. 20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하여선 다양한 해설들이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출 3:14의 하나님의 호칭 '스스로 있는 자'와 상징적으로 연결된 신적(divine) 자기 표현이다(Morgan, Morris). ② 장차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될 내용을 예수께서 자기 주장적으로 선언한 종말론적 혹은 예상적인(proleptic) 표현이다(Jeremias). ③ 세례인 요한이 자신을 '소리'(요 1:23)라고 은유한 것과 평행을 이루는 수사적 표현이다(p.Borgen). ④ 자신의 본질(essence)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이다(Brown), 즉 여기서 '생명의 떡'이란 사람들의 생명을(39절) 살리는 예수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누구든 이 떡을 먹지 않고는 영생할 수 없다는 관계성을 강조해 준다. 이상의 견해들 중 실상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견해를 종합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본절의 부정사(否定詞)는 의도적으로 이중 강조되어 '결코 ~아니라고‥‥아니하다'의 뜻을 지닌다. 이는 결국 예수와 연합된 성도의 삶이 영원히 풍요로운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 참 생명의 근원자되신 예수의 신성(神性)이 드러나는 표적을 보고도 무리들이 육신의 배를 채울 떡만을 요구함으로(26절) 참 믿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즉 저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영원한 생명은 물론 그 밖의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까지도 채움 받을 수 있음을(마 6:33) 깨닫지도 믿지도 못한 것이다.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쫓지 아니하리라. - '~자는 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판 호'로서 중성 단수인 것은 남녀를 초월한 집합적 표현이다(Bernard, Blass & Debrunner). 즉 하나님께서 성도로 부르심에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간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고전 1:26). 한편 본절에서 '주시는'(디도신)은 현재형임에 반해 39절에서는 완료형(데도켄)이다. 이에 대해 전자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후자는 '아버지의 뜻 속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로 구분하기도(Morris) 하지만 개연성은 적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 행위는 시간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사실이다(Brown). 한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 대하여 예수께서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예수의 구속 사역이 결코 독자적 행위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협동 사역임을 나타내준다(요 5:19-21). 이는 곧 예수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는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반증해 준다(40절).
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41,42,50,51,58절)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곧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다(마 26:39,42).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참 목자되신 예수의 사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 즉 예수께선 자신의 양들로 하여금 도적질 당하지 않고도 도리어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 10:10-15).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마지막 날'(에스카테 헤메라)이란 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로서(40,44,54절; 11:24; 12:48)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구원과 심판의 날인 '주의 날'에 그 뿌리를 둔다(사 13:6; 겔 13:5; 욜 3:14; 습 1:7,14). 이미 요한은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이중적 부활(double resurrection)에 대해 언급했는데(요 5:28,29) 본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성도들의 부활하는 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실 이날에 믿는 자들을 부활시킴으로써 예수의 구원 사역은 결정적인 완성의 국면에 도달할 것이다(고전 15:20-28).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신앙의 예비 단계인 대상 인식을 거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수납하는 자는 이처럼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얻게 된다(엡 2:8). 여기서 '얻는'(에케)이 미래 시제가 아닌 현재시제인 것은 최후의 부활 이전에도 이미 성도들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확실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9:11-15).
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 갈릴리 사람들을 이렇게 지칭한 것은 본서에서 처음이다. 흔히 이 표현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대적하던 무리를 가리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요 1:19) 여기서도 갈릴리인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저버린 것 (66절)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 이에 해당하는 '공귀조'는 본래 비둘기의 구구거림이나 곤충의 붕붕거림을 표현한 의성어이다. 그런데 이 동사는 70인역(LⅩⅩ)의 출 16:2,7,8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 동사가 지닌 뉘앙스는 공개적인 적대감(hostility)이라기보다는 불평과 비난하는 어수선한 모습이다(Brown).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 '이는'(후토스)이란 표현은 본절에서 경멸의 뉘앙스를 지니므로(Brown) '이 녀석'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Hendriksen). 한편 예수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공관복음은 대체로 자세히 그의 형제들까지 언급하여 다루고 있지만(마 13:55; 막 6:3; 눅 4 :22) 요한은 그저 간략히 '요셉의 아들' 정도로 밝히고 있다(요 1:45). 이는 아마도 요한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예수의 신상 관계나 행적 등이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부모를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 유대인들의 관심은 예수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는 주장에 있었다. 인간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관념이었다(Odeberg). 더욱이 이는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에로 끌어내리는 신성 모독죄 행위였으니 유대인들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요 10:30-33).
6:43,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여기서 '아버지의 이끄심'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끌려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상은 자력 구원을 반대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엡 1:3-6). 그러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사역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고백한 것이다.
6:45 선지자의 글에. - 원문에는 복수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사용하던 선지자들의 증거 모음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서들을 가리킨다(마 26:56; 롬 16:26).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 이 구절은 사 54:13의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의 자유로운 인용(free citation)이다. 예수께서 이를 인용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올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구원 사역에 있어서 이처럼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의 귀 기울임에 우선한다(Hendriksen). 즉 아무리 귀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귀를 열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주께로 나아올 수 없는 것이다(마 13:13).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외에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 1:18). 그러나 믿는 자들은 근본 하나님이신 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요 14:9).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여기서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아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서 생명의 자리에로 옮기움 받는 것을 가리킨다(요 3:15,16). 그런데 '가졌나니'(에케이)가 현재형인 까닭은 비록 이러한 영생이 성도의 최후 부활 시에 주어지는 것이긴 하나 이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확실히 보증되었기 때문이다. 40절 주석 참조.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35절 주석 참조.
6:49,50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 47절부터 51절까지는 예수께서 앞에 말씀한 사실(26-40절)들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강조하시는 것으로 비록 만나는 육신적 양식이기에(27절) 먹고도 영생할 수 없었지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으면(믿으면) 영생하게 된다는(33,35,40절)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다. 사실 구약의 희생 제물들이 계속 드려져야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유월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과 피로써 단번에(one for all) 속죄 사역을 완수하셨다(히 9:12-14). 그러므로 만나는 매일 먹어야 했지만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한 번만 먹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6:51 본절의 전반절은 50절에 언급된 말씀을 반복하되 강조적 형태로 나타나고 후반절은 53절부터 계속되는 새로운 말씀의 도입 부분이다(Bernard).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이는 곧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실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과도 연결된다. 막 14장 자료노트 '성찬의 의미'를 참조하라. 즉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그 떡과 포도주로써 십자가 상에서 인류를 위해 내어줄 자신의 살과 피를 예표하고 기념하게 하신 것이다(53-58절; 마 26:26-29).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 출애굽 기사(Exusdus narrative)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대리인인 모세에게도 불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출 17:2; 민 20:3). 이때 사용된 '리브'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바로 본절에 나타나는 '다투다'(마코마이)와 같은 것이다. 이 동사의 뜻은 개역 성경이 번역하는 대로 '말다툼하다'(약 4:2) 혹은 '언쟁하다'(딤후 2:24)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회당에서(59절)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와 지지하는 무리 간에 격렬한 말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이 사람'(후토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경멸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42절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유대인들은 그 말씀이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를 경멸한 것이다.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51절과 달리 본절에선 '인자의 피'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인자의 살'과 더불어 성만찬의 두 요소를 상기시켜 준다. 구약의 만나가 '떡'(bread) 혹은 '살'(flesh)의 배경이라면 시내 산에서의 '언약의 피'(출 24:8)는 성만찬에서의 '잔' 혹은 '피'의 배경(막 14:24)이 된다고 주장한다(A. Feuillet). 하지만 히브리 숙어(Hebrew idiom)에 있어, '살과 피'는 '전인'(全人, the whole man)을 의미한다(Brown). 그러므로 여기서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즉 그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해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는 '그리스도와의 합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겐 영생이 있을 수 없다.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이에 해당하는 동사 ‘트로고’의 시제가 현재인 것은 은혜의 계속적인 공급을 의미한다(Morris). 반면 53절에서는 '먹고', '마신다'는 동사가 다 부정과거인 것은 영생을 위한 믿음의 1회성(one for all)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이처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관하여 자주 언급되는 것(39,44, 49-51절)과 관련, 혹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즉 이는 요한 당시 예수가 실제로 몸(body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며 부활하였다고 하는 자 역시 예수가 아닌 단지 그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Wilkens, "Das Abendmahlzeugnis im vierten Evangelium" pp358,9).
6:55 내 살을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참된'에 해당하는 '알레데스'는 '실제의'(real)라는 뜻이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내 살과 피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라는 뜻, 다시 말하면 주님의 살과 피의 기능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이 사실임을 강조해 주는 서술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Barrets).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거하고'에 해당하는 '메네이'는 본서에서 요한이 매우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인격적이고 한 몸과도 같은 불가분리의 연합을 의미한다(요 15:7; 요일 2:6,27,28; 4:12). 이 동사는 구원론적인 문맥에서 늘 사용되며 성도들과 그리스도 간의 영원한 교제를 의미한다(Morris).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 이러한 표현(호 존 파테르)은 신구약 전체에 있어서 하팍스 레고메나(hapaxlegomena: 한 번만 나오는 표현)로서 의의가 있다. 물론 '살아계신 하나님'(호 데오스 존)이라는 표현은 신구약 전체에 흔히 나타난다(삼상 17:26; 왕하 19:4; 렘 10:10; 마 16:16; 26 :63; 롬 9:26; 히 3:12), 그러나 5장의 안식일 논쟁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대로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파테르)라고 부르는 유일한 분이었다(요 5:17,18). 복음서 기자들 중 요한은 특히 그 사실을 강조하여 공관복음 기자들이 기록한 용례(모두 7회) 보다 더 많은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요 11:41; 12:27,28; 17:1,5,11,21,24). 이는 곧 예수께서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권위를 가지신 분이므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인하여'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가 목적격(accusative)과 함께 사용되면 ① '~에 의하여'(by means of), '통하여'(through)라는 뜻(W.Rauer, Blass & Debrunner)과 더불어 ② '~을 위하여'(for the sake of)라는 뜻(이것이 목적격과 더불어 사용될 때 더 일반적인 의미임, Brown)이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로 본다면(개역성경,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어 성경, NIV, RSV, NASB 등) 성자가 성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로서, 요한이 강조하는 성부와 성자 간의 존재론적 동일성(essential equality)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요 14:28). 반면 후자의 경우로 본다면 이는 예수 자신이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말씀하신 대로 '성부의 뜻을 행하며'(요 4:34) 성부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Morris). 이와 관련 요일 4:9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본절에서 목적격과 더불어 '디아'가 사용된 것은 후자 '~을 위하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Brown). 어쨌든 이상의 추정을 차치하고라도 본절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들 간의 구원의 중보자(the Mediator)로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이다(G.Beasley-Murray).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본절은 49-51절의 내용을 축약, 재확인하면서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긴 대화를 마무리하시는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본절에서 '산 떡'과 '만나', 육체적 죽음과 영생이 대조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이중적인 대조를 통해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기법(記法)도 요한의 독특한 문학적 기교이다.
6: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이렇게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는 그의 공생애 사역에서 자주 나타난다(마 4:23; 9:35; 12:9; 13:54). 이러한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사도들도 회당을 복음 전파 장소로 사용했다(행 13:5; 18:19). 한편 회당(쉬나고게)은 과거 바벨론 포로기에 성전을 중심한 종교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마을 별로(유대인 남자들 10명만 넘으면) 설립하여 신앙 교육과 예배, 기도생활 등을 하던 장소이다. 바벨로 포로기 이후 성전이 재 건립된 상황에서도 이 회당은 쇠퇴하지 않았으며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디아스포라, diaspora)에 의해 유대인들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건설되었다. 14권, 신약총론, 신약의 사회 ․ 문화적 배경, '회당' 참조.
6:60-71,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상반된 반응
앞 단락에서는 오병이어 표적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유대 군중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 곧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줄 자임(마 20:28)을 증거한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다(22-59절). 그에 이은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강화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영적 무지로 인하여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60-66절)과,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노라는 태도를 보인 사람들로 나누어져 나타났다(67-71절).
그런데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여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현세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기대와는 어긋난 영생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예수가 자신들의 현세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재빨리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리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택하신 12 사도로서, 그들 역시 예수님의 강화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 준다. 즉,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지 않겠노라는 태도를 나타내었다(68,69절).
한편 본문에서 예수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한 암시를 주시는데(70,71절),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 는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첫째로, 현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결국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마음의 평안 , 물질적 축복, 건강의 축복, 건강의 회복 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면 누릴 수도 있는 부차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도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진정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발견하게 되지만, 세상적 이기심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결국 눈먼 소경이 되어 진리를 떠나게 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룟 유다의 변절 예고에서도 분명히 시사되는바 천국의 비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마 13:16).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 예수를 추종하던 일반적인 무리(2,24,25절)를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의 '열두 제자'(67절)와는 구별된다(66절). 8절 주석 참조.
이 말씀은 어렵도다. - '어렵도다'에 해당하는 '스클레로스'는 본래 '거칠다'(harsh)란 뜻의 동사 '스켈로'에서 나온 형용사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 듯한데(Brown), ① 내용 자체가 환상적이어서(fantastic)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의미와(Bernard) ② 어려워서 마음에 걸린다는 (offensive scandalized) 뜻이다(Meyer, Hendriksen). 하지만 만약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받아들였다면(벧전 2:2) 구원에 관한 명백한 계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예수의 말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강퍅한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Calvin).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듣다'(아쿠오)는 동사가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되는데, 앞에서는 단순한 '청취'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종의 의미를 동반한 청취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구약의 신명기 6장에 나타나는 '쉐마' 동사가 '들음'과 '순종'의 의미를 동반하는 히브리적 용법(신 6:4)과 유사하다(Brown).
6: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편적(공유적) 속성 중 하나인 전지성(全知性)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은 본서에서 일관된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다(요 2:24,25; 5:6,42; 19:28; 21:15). 6절 주석과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중 '하나님의 지성적 속성'을 참조하라.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 '올무가 되느냐'란 동사 '스칸달리제이'는 '걸림이 되다'(scandalize) 혹은 '죄를 짓게 하다'(마 5:29,30; 18:7-9)란 의미의 단어이다. 여기서는 보다 정확히 요 16:1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되느냐'(shake your faith, Brown)란 의미이다. 즉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아마 예수의 정신 상태가 온전한지 의문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6:62 원문상 본절은 조건절로만 이루어진 불완전한 문장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두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귀결절을 추론하고 있다. ① '만일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때에는 믿지 않겠느냐?' ② '~보면 그때에는 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 아니냐? ' 이중 전자는 61절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걸림돌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문제에 국한됨을 지적하며, 예수의 승천이 그들의 의심을 말끔히 씻어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후자는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십자가 수난 사건과 연결하여 생각하기에 더욱 걸림이 된다는 의미이다(Bultmanil). 이 가운데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의 자기 비하(卑下)로서의 십자가 수난이든, 승귀(昇貴)로서의 부활, 승천이든 이를 대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두 부류로 나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렸느냐 닫혔느냐에 따라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자들과 이성의 잣대로 재어 부인하는 자들이 생긴다는 것이다(마 13:10-16).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 - '인자의 이전 있던 곳'이란 성부께서 계시는 곳(장소)을 말함과 동시에 성부와 성자께서 함께 계셨던 영화의 시기 즉, 성자의 선재성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요 8장 자료노트, '그리스도의 선재성' 참조. 그런데 '올라가는 것'에 대하여선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요 3:13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올라간 자'를 언급하면서 과거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관련, '십자가 처형'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본절도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Meyer, Brown, Murray), ② '올라간다'는 동사는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되지 않고(Morris) 비유적인 문학적 기교로서(Bernard) 예수의 승천(요 20:17)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Westcott). 그러나 우리는 양자 중 택일하려는 시도보다는 양자의 입장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승천은 십자가와 부활사건 없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일'은 십자가 수난, 부활, 승천의 연속적 사건으로 전개되는 것이다(Morris).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 '살리는'에 해당하는 '조오포이운'은 '생명을 주다'(give life)라는 의미로 요 5:21에서는 성부와 성자에게 동시에 적용되었다. 다음으로 '영'은 '영적인 것', '육'은 '육적인 것'을 가리키는데(공동번역) 먼저 '영적인 것'은 생명의 참된 양식인 예수와 또한 그를 믿는 믿음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육적인 것'은 타락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과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불신앙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 생명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육'은 정녕 '무익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너희에게 이른 말'에 대해 혹자는 62절의 예수의 말씀에 한정시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듣고 의문을 제기한(60절) 문제는 바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하셨던(59절) 말씀 전체(26-58절)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른 말'도 당연히 '그 말씀'(26-58절)일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사용된 '영'과 '생명'은 각각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비슷한 의미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표현하는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으로 볼 수 있다(Dodd, Brown).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예수 곁을 '떠날 자들'(66절)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도 포함된다(요 13:21-30).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 '팔다'에 해당하는 '파라도손'은 신약에서는 드문 미래분사 시제로 장차 가룟 유다가 은 30에 예수를 팔아넘길 '배신행위'를 가리킨다(마 26:14-16).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 본절이 선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본절의 '처음'을 요 1:1의 '태초'부터라고 보는 것은(Morris, Barrett)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시기, 더 정확히는 제자들을 부르신 시기부터라고 보는 것이(Bernard, Meyer) 더 좋을 듯하다. 한편 혹자는 본절을 예수가 가룟 유다의 예수 배신을 예견하지 못하고서 제자로 선택함으로 신적 지식을 결여했다(Census)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봉쇄하기 위한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이성의 잣대로만 성경을 이해하려는 인본주의적 생각이니 재고의 여지가 없다.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 정확한 반복은 아니지만 37,44절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시는 경우가 본서에 자주 나타난다. ① 8:21을 인용하는 8:24, ② 8:21을 인용하는 13:33, ③ 13:16을 인용하는 15:20.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 이는 단순히 예수를 떠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는 부가적 설명을 볼 때 이는 예수를 따르기 이전의 그들 외 본래의 태도나 직업으로 '환속'(還俗) 했음을 의미한다(Godet).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다니지'에 해당하는 '페리에파툰'은 문자적으로 '함께 걷는다'(wall with)라는 의미로 히브리어의 특징인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구상적(具象的) 표현의 셈족어 용법이 남아 있는 동사이다. 본절에서 요한은 예수의 선교 사역지에서 실제로 있었던 제자들의 배신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는 또한 1세기 후반의 신자들에게 있었던 배교(apostate)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요일 2:19, Brown). 아무튼 주님의 제자의 삶은 예수와 동행하는 것이므로 예수와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은 믿음의 포기를 의미하는 변절 행위이다.
6:67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 구체적으로 '열둘'이란 숫자를 제시하며 예수의 제자들을 언급하는 것은 본서에서는 본절이 처음이다. 그렇지만 그 제자들이 어떻게 하여 선택된 자들인지에 관하여선 구체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공관복음서를 (마 10:1-4; 막 3:13-19; 눅 6:12-19) 통해 열두 제자의 선택에 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을 고려하여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열둘'이란 표현은 1세기 교회에 있어 예수와 함께한 사도들을 가리키는 관용어였다(Jeremias). 이것은 유다가 빠져 열한 명일 때에도 '열두 제자'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요 20:24), 이들 열두 사도의 행적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서론 특별 자료를 참조하라.
너희도 가려느냐. - '가려느냐'(휘파게인)는 '물러가다'(66절)에 해당하는 '아페르코마이'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질문은 떠나지 않고 그와 함께할 제자들에게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부정문의 답을 듣기를 의도한 의문문이다(Brown, Hendriksen, Morris). 그러나 단 한 사람의 경우는 예외였으니 곧 가룟 유다이다(70,71절).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 베드로의 대답에 '내가' 아닌 '우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열 두 제자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답변한 것으로 보인다(Hendriksen, Robertson). 이처럼 즉흥적이고 때로 무분별한 베드로의 '대변인' 역할은 복음서에서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마 16:16,22 ; 요 13:9; 18:10; 21:2 등).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가 야고보(행 15:13)와 더불어 다른 사도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니(행 15:7-11)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사도로
택함 받은 때부터 이미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 같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이 말은 63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베드로가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 '영생의 말씀'이란 영생을 주는 말씀 혹은 '지식'을 가리키는 바(Bernard) 말씀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편 비록 이러한 신앙 고백에도 불구하고 훗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요 13:36-38; 18:15-18,25-27). 이는 인간의 연약성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렇지만 그는 이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금 예수의 중인으로서 순교하기까지 예수의 발자취를 따랐으니 그의 신앙 고백 만큼은 진실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요 21:15-19).
6: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 예수의 본질과 신격(神格)을 적절히 표현하는 그리 흔치 않은 칭호이다(막 1:24; 눅 4:34).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적용됨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요 10:36)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Bultmann).
믿고 알았삽나이다. -'믿다'에 해당하는 '페피스튜카멘'과 '알다'에 해당하는 '에그노카멘'은 모두 완료형으로 전자는 '이미 믿음의 영역에 이르러 지속적인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이고(Morris) 후자는 '진리를 인식했고 그것을 견지(hold)한다'는 의미이다(Barrett), 이 두 단어는 요한에게 있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묘사하는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었다(요 17:8; 요일 4:16).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 혹자는 '마귀'(디아볼로스)라는 용어가 '사탄'(Satan)이라는 본래의 표현보다 후대의 전승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용어라고 주장한다(J.Jeremias) 그러나 실상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서로 혼용되었다(마 4:1-11; 16:23). 서신서에서도 이 '디아볼로스'라는 용어는 늘 단수로 나타나 사탄과 동의어로 쓰였다(딤전 3:6; 벧전 5:8). 그러나 이 두 표현과는 달리 '다이모니온'( )은 늘 복수로 나타나 사탄의 졸개들을 가리키고 있다(요 13:2,2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마 4장, 자료노트, '마귀'를 참조하라.
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 '유다'란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흔한 이름으로서 열두 제자의 무리 중에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파는 자 유다를 특별히 구분하여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마 10:4; 요 12:4; 13:2). 한편 '가룟'에 대해서는 ① 유다 지방의 '그리욧 헤스론'이나(수 15:27) '그리웃'(렘 48:24)과 연관된 지명(地名). ② 유대사가 요세푸스를 인용해 로마에 대적하는 암살단인 '시카리의 일원(one of the Sicarii)'을 의미한다는 견해(Schonfeld. Morri,i) 등의 주장이 있으나 전자가 많은 학자들로부터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왜냐하면 인명 앞에 지명을 붙여 동명이인을 구분하는 용법은 복음서 기자들에게도 친숙한 유대인들의 일상적 용례였기 때문이다(마 26:71; 눅 18:37; 요 18:5,7; 19:19-'나사렛 예수'; 마 27:56,61; 28:1; 막 15:40,47; 16:1; 눅 8:2; 요 19:25; 20:1,18-'막달라 마리아').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팔다'에 해당하는 '에멜렌'은 미완료과거 시제인데, 단순한 미래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확실성을 말해주는 예견되는 미래 사건을 뜻한다(Morris). 한편 본서가 가룟 유다에 대해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유독 더 상세하고 독설적으로 기록하고(64,70,71절; 요 12:4-7; 13:2,27) 있는 이유에 대하여선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즉 1세기 말 요한이 본서를 기록할 때 교회 내․외부에서는 가룟 유다의 행동이 구속사의 성취를 위해 불가피한 행동이었다는 동정론이 고조되었는 바 따라서 그에 대한 '교정'으로 요한이 유다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는 추정인 것이다.
연구 자료
빌립 - 친구를 전도한 신중한 제자
1. 인적 사항
① 빌립은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
② 갈릴리 벳새다 출신(요 1:44).
③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눅 6:14).
④ 베드로, 안드레, 나다나엘의 친구(요 1:44,45).
2. 시대적 배경
A.D. 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 개시 얼마 후에 제자로 부름 받아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빌립은 초대교회 확장기(A.D. 1세기 중반)에 브루기아(Phrygia)와 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3. 성품
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만큼 강한 결단력을 갖춘자(요 1:43-45).
➁ 부름 받은 즉시 친구를 주께 인도한 것으로 보아 열심 있는 신앙의 소유자(요 1:45,46).
③ 믿음을 시험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재빨리 머리로 계산하여 대답한 것으로 보아 현실적 이해타산이 빠른 자(요 6:8-13).
④ 예수님을 뵙고자 한 헬라인들의 요청을 듣고도 즉시 데려가지 않고 안드레와 의논한 것으로 보아 매사에 신중한 자(요 12:20-22).
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하나님을 직접 보여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아 영적으로 둔감하고, 이성적 사고를 지닌 자(요 14:6-8).
4. 주요 생애
예수의 제자 이전 | ||
출생 | ||
벳새다에서 성장 | 요 1:44 | |
오실 메시야를 대망 | 요 1:45 | |
예수님의 부름 받음 | A.D. 27년 | 요 1:43 |
친구 나다나엘을 전도 | 요 1:45 | |
예수의 제자 이후 | ||
사도로 세움 받음 | A.D. 28년 | 막 3:18 |
오병이어 기적 전에 예수께 믿음을 시험받음 | A.D. 29년 | 요 6:5-13 |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함 | A.D. 30년 | 요 12:20-28 |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주께 간청함 | 요 14:7-12 | |
예수 체포 시 도망감 | 마 26:56 |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 | 요 20:26 | |
예수의 승천 목격 | 눅 24:50-53 | |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함 | 행 1:13; 2:1-4 | |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짐 |
5. 구속사적 지위
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즉시 나가서 전도함으로써 복음 전파를 위한 제자의 사명을 잘 보여준 자(요 1:45).
② 초대 교회 설립자들인 12사도 중 1인.
6. 주요 업적
① 12사도 중 하나로 예수님을 섬김(막 3:18).
② 회의론자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함(요 1:45).
7. 주요 실수
① 믿음을 시험하는 예수께 자기 머리로 계산된 인간적인 대답을 함(요 6:7).
② 예수 체포 시 도망감(마 26:56).
8. 평가 및 교훈
① 빌립은 믿음을 시험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나름대로 정확히 계산된 대답을 했다(요 6:7). 그러나 이 같은 빌립의 대답이 인간적으로는 신중하고 빈틈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처럼 인간적으로는 빈틈없고 치밀하지만 도리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지연시키고 방해가 되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신중하고 진지해야 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머리로 제한하는 불신앙적인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
② 빌립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자 곧 사랑하는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참으로 지혜롭게 이 사실을 전하였다(요 1:43-46). 이와 같이 구원의 기쁨을 누린 자가 그 기쁨을 가까운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의 기쁨을 누렸으니, 이제 지체하지 말고 내 가족, 친구, 가까운 이웃에게 빌립과 같이 '와보라'며 전도하는 지혜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③ 빌립에게는 자신의 고민을 의논할 친구 안드레가 있었고, 빌립 자신 또한 나다나엘을 예수께 인도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요 1:45; 12:22). 이와 같이 성도에게는 신앙을 돈독히 세워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며, 각 성도들 자신이 다른 성도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날이 임박하여서 더욱 성도들 간에 모여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참 친구로서의 교제가 절실히 요청된다(히 10:24).
④ 빌립은 예수님을 따라간 후 오병이어의 기적 때에나,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도 아직 확고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많은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요 6:8-13; 14:7-12). 그러나 빌립은 그러한 회의 중에도 끝까지 주님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뒤따랐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할 때에 때때로 회의와 의심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놓아서는 안 되며 그 회의들을 주님을 더욱 잘 알고자 하는 복된 탐구 의욕으로 전환시켜야겠다.
9. 핵심 성구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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