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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시작하는 말과 고린도교회 분열 문제의 지적 및 분열을 불허하는 십자가의 유일성
구속사적 개관
본서는 항구도시 고린도(Corinth)에 A.D. 51년경 설립되었던 고린도교회 안에서 야기되었던 각종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설립자요 사도로서 대략 A.D. 55년 전후에 보낸 공식 서한이다. 본서는 물론 1차적으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부활 승천으로 구속사(救贖史)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이전되었고 이제 비로소 이방인들도 신약 교회를 통하여 구속사의 지평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하였던 격변기에, 이방 땅 고린도에 설립 된지 채 몇 년도 경과되지 않았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처해야 했던 삶의 상황에서 우러나온 문제와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영적으로 볼 때 20C 말의 현대도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신념 전체가 흔들리고 극도의 타락이 횡행하고 있는 대격변기이다. 따라서 본서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현실에 직면한 현대의 우리에게도 모든 인간과 그 공동체가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그 해결책에 대한 지침을 선명히 제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첫 장인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9절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특히 사도적 축도를 행함으로써 서신서의 공적 권위를 밝히는 인사말과 책망과 훈계가 주를 이루는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종의 서론으로 고린도 교회로 인한 감사와 축복을 기록하고 있다. 중반부 10-17절은 1:10-6:20까지 계속되는 고린도교회의 여러 현안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 기사 중에서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논하는 1:10-4:21절 기사의 개시 부분으로서 먼저 교회 분열의 사실과 그 실상 자체를 지적하며 책망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 18-31절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타인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움으로 야기된 교회의 분열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아예 성립할 수조차 없음을 밝힘으로써 분열의 근본적 부당성을 논증하고 있다.
전반부 1-9절의 시작하는 말은 발신자가 사도권을 가진 바울이며 수신자는 성도로서 모두 다 하나님 안에 속한 자임을 밝히고 사도권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축도함으로써 서신서의 기본적 권위와 성격을 밝히는 서신서 전반의 공식적 문안 인사인 1-3절과 이제 특별히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밝히는 머리말인 4-9절의 고린도 교회로 인한 바울의 감사와 축복의 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4-9절은 이제 주로 강력한 책망과 훈계를 주 내용으로 하는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도와 교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는 상호 신뢰와 애정의 관계임을 먼저 밝혀두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고린도전서의 서두 부분을 개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속사의 과정 속에서 성도의 정체(Identity)에 대한 극명한 정의를 추출해 낼 수 있다. 즉 성도는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2절)이며 또한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자, 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7절)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쁘신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희망할 수 있는 자(3,9절)인 것이다. 이 시간 바로 이런 모습이 나에게 있는가 한번 돌아볼 일이다.
중반부 10-17절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자체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인맥(人脈)이나 형식에 집착하여 분열이 생긴 사실과 그 실상을 일단 지적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요 사도인 자신은 이러한 분쟁의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음을 강력한 경고조로 지적함으로써 이의 부당성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편 후반부 18-31절은 먼저 성도는 믿음으로, 피조물이요 유한자인 인간의 지혜와 달리 자존자요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로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곧 예수 구속의 복음의 절대 유일성을 깨달은 자임을 강조한다. 역으로는 십자가의 구원의 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지혜에 비하면 절대 유일의 지혜임을 깨달은 자만이 성도임을 먼저 강조한다(18-25절).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성도는 이제 상대적이고 유한한 인본주의적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영원 절대한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체인 십자가의 도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논증한다(26-31절). 그리하여 중반부에서 제기된바 교회의 분열은 결국 성도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상대적인 것들에 집착하여 생긴 부당하고 또 불의한 일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 중 ․ 후반부를 구속사적으로 함께 개관할 때에 실로 인간은 교회 안에서이든 밖에서이든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된 절대유일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언제나 분열과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사(敎會史) 2000년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립하였을 때에는 일치와 부흥이 있었으나 복음 이외의 것을 더 내세울 때에는 늘 분열과 쇠퇴가 있었을 뿐임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내가 속한 지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나의 교회 공동체 내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중심으로 일치와 단결을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런 일치와 단결을 위해 먼저 해야할 일은 무엇 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다.
외울 말씀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4,25)
문안 인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감사의 말
4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한 책망
10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 도의 이중적 성격
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참된 자랑이 되는 예수
26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10 온전히 합하라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카타르티조'( )이다. 이 단어는 '아래에'라는 뜻의 '카타'( )와 '적합하다' 또는 '완전하다'라는 뜻의 '아르티오스'(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카타르티조'의 문자적인 의미는 '근본적으로 적합하게' 또는 '완전하게 하다'이다.
한편 성경적 용례를 볼 때 이 단어는 주로 어떤 물건이나 천 조각 등이 부서지거나 찢어진 것을 '고치다' 또는 '수선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마 4:21; 막 1:19). 또한 비유적으로는 어떤 일을 위하여 '미리 대비하다'(히 10:5) 또는 '완전케 하다'(고후 13:11)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온전히 합하라'는 말의 의미는 성도 간에 서로 상했던 감정을 마치 찢어진 그물을 기워 수선하듯이 위로와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치유하고 화합하라는 뜻이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여러 당파들로 나뉘어 분쟁함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간에 서로 심하게 상했던 감정들을 치유토록 하기 위한 권면의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분쟁이 있는 교회는 마치 찢어진 그물과 같다. 그물이 온전해야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같이 교회가 분쟁이 얼이 성도들 간에 온전히 화합할 때만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사업을 온전히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분쟁으로 인해 교회로서의 올바른 역할을 감당치 못하고 있는 많은 한국 교회들에게 본문과 같은 바울의 충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주요 주제: 바울의 연대기
서신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1:2 성도의 신분에 대한 묘사들
고후 3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1:8, 주의 날
눅 17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9 하나님의 미쁘심의 특징
1. 한 번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실행하심(사 55:8,9,11)
2. 말씀하신 바에서 스스로 어긋남이 없으심(롬 3:3-5)
3. 한 번 택하신 성도는 반드시 구원하심(롬 8:29,30)
4. 믿는 성도는 끝까지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심(고전 1:9)
5. 시험을 주시긴 하되 결코 아주 넘어지게 하지는 않으심(고전 10:13)
6. 당신의 종들을 끝까지 진실되게 인도하심(고후 1:18)
7. 성도를 소명하신 목적을 반드시 이루심(살전 5:24)
8. 악한 자에게서 성도를 항상 지켜 주심(살후 3:3)
9. 주를 부인치 않는 자는 주께서도 결코 그를 부인치 않으심(딤후 2:ll-13)
10. 성도의 소망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심(히 10:23)
11.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신실한 위로자가 되심(벧전 4:19)
12. 성도가 자기 죄를 자백할 때는 언제나 용서하심(요일 1:9)
보감-1:18-31 십자가의 도의 10대 능력
1. 성도의 옛 사람을 소멸케 함(롬 6:6)
2.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음(고전 1:18)
3. 성도로 하여금 자아를 부인케 함(갈 2:20)
4.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미혹을 물리치게 함(갈 3:1)
5. 성도의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없앰(갈 5:24)
6.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해 죽게 함(갈 6:14)
7.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함(엡 2:16)
8. 만물을 온전하게 회복시킴(골 1:20)
9. 성도를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케 함(골 2:14)
10. 성도로 하여금 의에 대하여 살게 함(벧전 2:24)
보감-1:1 하나님의 소명의 목적
1.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창 3:9)
2. 하나님의 법을 알게 하기 위하여(레 18:4-5)
3.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행 11:23)
4.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롬 5:1,2)
5.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하게 하기위하여(롬 8:17)
6.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기위하여 (롬 9:36)
7.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롬 10:4-8)
8.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고전 1:1)
9.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기 위하여(고전 1:9)
10. 인간들 사이의 화평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고전 7:15)
11. 하나님의 일을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기위하여(엡 4:1)
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기위하여(살전 2:12)
13.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살전 4:7)
14.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살후 2:14)
15.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딤전 6:11,12)
16.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게 하기위하여(벧전 2:9)
17. 선을 위한 고난을 인내하도록 하기 위하여 (벧전 2:20,21)
18. 성도 간에 서로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벧전 3:8-11)
19. 축복하시기 위하여(벧전 3:9)
20.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벧전 3:18)
21.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벧후 1:10)
22.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유 1:1-3)
주요주제-1:3 서신서의 인사말 '은혜와 평강'
딤후 1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1:13-17 세례의 이해
행 8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1:10-31 본서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8대 부패상
1. 교회 내에서의 분쟁과 파당 조성(1:10-17)
2. 근친상간을 비롯한 음행(5:1-2)
3. 불신자 앞에서의 성도 간의 송사(6:1-9)
4.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로 인한 분쟁(8:7-13)
5. 우상 숭배(10:7,14)
6. 성찬 시 음식 문제로 인한 분쟁(11:17-34)
7. 은사의 남용(14:16-19,26-33)
8.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 교리에 대한 의심(15:12-19,33-47)
1:1-3 문안 인사
본서는 초대 고린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들에 대해 답을 제시한 것으로 당시 교회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으며, 또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일종의 판례(判例)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본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본문은 먼저 본서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힌 뒤 사도권에 근거해 축도함으로 공식적인 문안 인사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같은 편지의 서술 형식은 그 당시 서신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히브리서와 요한일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서신서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문안 인사 가운데 자신의 사도권(使徒權)이 자신의 공로나 선택에 의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나왔음을 강조함으로써(행 9:15; 갈 1:1; 엡 1:1) 이하 전개될 자신의 편지가 당시 고린도 교회의 문제 해결에 권위 있는 근거가 됨을 미리 선언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이후 전개될 자신의 서신에 대한 신적 권위와 영감성을 확립하려는 의도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초대 고린도 교회와 같은 상황에 처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들의 문제 해결에도 본 서신서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는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있음을 강력히 보여준 것이다.
한편 당시 헬라 문명 속에 있던 고린도는 '방탕아'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우상 숭배를 비롯한 죄악이 가득했던 이방 도시였다. 따라서 그곳에 있던 고린도 교회는 죄에 쉽게 오염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본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글로에의 집 사람에 의해 전해들은 것을 토대로 한 권면(1:17-6:20)과 고린도 교회의 직접적 물음에 대한 답변(7:1-16:4)의 형식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배경, 본서의 기록 동기 등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을 보다 참조하라.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 본절부터 3절까지는 당시 편지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것으로 발신자(1절), 수신자(2절), 수신자에 대한 축복의 말(3절) 등이 담겨져 있다. 이거한 형식은 히브리서와 요한일서를 제외한 모든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한편 바울은 이러한 편지 형식 가운데서도 고후, 엡, 골, 딤후 등과 동일하게 독특한 그의 말로 본 서신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인데 이는 바울 자신의 사도로서의 자격이나 전도 행위 등이 사람이나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행 9:3-18)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이는 당시 교회들 가운데서 바울이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한 것에 대해 과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그의 행적이나 사도권 출처 의 불분명함을 들어 그의 사도권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고전 9:1-3),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라고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이처럼 그의 사도권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바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즉 다메섹에서의 그의 소명은 복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바 그의 사도권의 부정은 곧 그가 전한 복음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가 기록한 서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었던 까닭에 바울은 그의 사도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고후 11장 자료노트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 )로 '보냄을 받은 자', '대리자'라는 뜻을 지니는 데, 본래 이 말은 헬라에서 황제나 군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전권대사(ambassador)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사도란 본래 예수님의 12제 자들을 지칭하였으며(막 3:14; 행 1:21,22) 후에 가룟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가 이에 포함되었다(행 1:26). 그러나 후에는 이 12사도 이외에 바울과 바나바(행 14:4), 주의 형제 야고보(고전 15:7; 갈 1:19), 실루아노(살전 2:6)도 사도라고 칭해졌다. 하여튼 사도
직은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지도적 위치로서(고전 12:28; 엡 4:11) 사도들은 주로 말씀 전파에 전념하였다(행 6:4). 이와 관련하여 '사도'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참조하라. 한편 바울도 사도였지만 특히 '이방인의 사도'라고 자처하였다(고전 15:8,9; 갈 2:8). 그에 대해서는 롬 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형제 소스데네. - 본질의 소스데네가 행 18:17에 언급된 회당장 소스데네와 동일인인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Calvin, Robertson, Moffatt). 이 편지를 쓸 당시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주변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행 18:18,19) 바울이 굳이 소스데네만을 그와 함께 송신자로 언급한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와 친숙한 인물임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그가 본서의 대서자일 가능성을 짙게 한다(Craig). 한편 그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회개 직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한 것으로 여겨진다.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본서의 수신자에 대한 언급이다. 헬라 문명 속에 있던 고린도 교회는 '방탕아'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우상 숭배와 죄악이 가득한 이방 도시에 있는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죄악 속에 노출되어 있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곧이어 언급되는 '거룩', '성도'라는 말과 함께 성민적(聖民的)이며,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방의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함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 나아가 이는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10-12절)를 염두에 둔 말로, 교회가 어떤 개인이나 특정 파벌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에 있다'고 함으로써 고린도라는 특정한 지역에 있어 그 지역에서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지역 교회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교회'라고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냄으로써 바울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보편적 교회와 지역적 교회라는 교회의 양면성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교회'와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부분을 참조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부르심을 입은 자들. -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즉 '교회'(에클레시아)는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정결해지고 죄악된 생활에서 구별된 자들의 모임을 가리킨다(요 3:5; 롬 8:30; 갈 1:6; 히 12:10). 고린도와 같이 죄악된 지역의 성도들에게 이 말의 뜻은 더욱 분명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이에수)라는 말은 바을 신학의 기본어로 그의 서신에 무려 164회나 나타나며, 본서에도 11회나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성령 세례로 인한 그리스도와 성도 간의 신비적 결합을 뜻한다(갈 2:20). 이와 관련해서는 엡 1장 자료노트, '그리스도 안에서'를 보다 참조하라.
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 )는 히브리어 '카다쉬'( )에 해당하는 말로 하나님께 '바친 자' 또는 '구별된 자'란 의미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신약에서는 죄악된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자로서 도덕적으로도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희와 우리의 주.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 자신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각 처에 있는 성도들의 주이심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연합하여 있음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각처에서‥‥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본절의 '각처'라는 문구 때문에 본서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그외 지역에 보낸 공동서신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Theodoret, Estius), 영적인 측면에서 모든 교회에 문안한 것이라는 견해(Chrysostom, Erasmus)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라는 견해(Meyer)가 있다. 그러나 본서가 고린도 교회에만 보내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만 바울은 본서신을 고린도 교회에만 보냈으나 이 서신이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질 것을 예상해 그 정신만은 모든 교회가 본받기를 바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Lightfoot).
1:3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는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문안 인사로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롬 1:7; 갈 1:3; 엡 1:2; 빌 1:2). 한편 여기서 '은혜가 있으라'라는 말은 헬라인들의 주 인사어로(약 1:1), '은혜'(카리스)는 고전어에서 '총애', 또는 '호의'를 뜻하는 말이었다(창 18:3; 슥 12:10, LXX). 이를 바울은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총애,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또한 '평강이 있으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주 인사어로(마 10:12; 요 20:21), 여기서의 '평강'(에이레네)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평화와 안녕을 뜻한다(Craig). 그러므로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은혜와 평강의 출처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게 하신 경로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은혜와 평강은 진정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1:4-9 바울의 감사
문안 인사를 끝낸 바울은(1-3절) 본문에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감사의 말을 하고 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밝혀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이 그들의 삶 속에서 견고히 서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이후 전개될 책망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이 낙담하지 않기를 바라는 목회자적 배려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이 감사한 내용을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에 유리한 구변(口辯)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가졌음을 감사했다(4,5절). 당시 고린도 시는 헬라 철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 역시 자연히 철학적 지식과 사고와 화술에 능했다.
②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견고케 된 사실을 감사했다(6절).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이 뿌리를 내림으로 고린도 교회에는 구원의 확증이 있었던 것이다.
③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많은 은사를 받았음을 감사드렸다(7절). 고린도 교회는 구원의 은혜뿐 아니라 실제로 다방면의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전 12장).
④ 고린도 교인들이 재림 신앙을 소유한 것을 감사했다(7절). 재림 신앙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비록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 주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으나(고전 15:12,35) 대다수의 많은 교인들은 재림과 부활 신앙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⑤ 고린도 교인들이 비록 지금은 영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지막 때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실 것이므로 감사했다(8절).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지금은 비록 내부적 분열과 부패의 모습으로 가득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미래에는 책망할 것 없는 상태로 변화될 것임을 영적 통찰력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장점을 언급하는 본래 의도는 이러한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게 될 고린도 교회의 미래상을 내다보고 감사한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사실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서는 도저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 속에서 죄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지는 연약한 자신의 믿음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변화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게 된다.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감사하노니. - 문안 인사(1-3절)를 끝낸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관례적으로 감사의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은 많은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밝힘으로써 이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감사의 말을 시작함에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그의 독특하고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2절 주석 참조. 그와
같이 실로 바울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삶의 전부요(고전 2:2),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과연 우리의 삶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항상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테 유카리스테오'( )는 '언제나 쉬지 않고 감사한다'는 뜻으로, 바울은 그가 고백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복음을 전한 모든 곳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며(엡 1:16; 빌 1:3)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 고린도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는 특히 말과 지식의 은사였으며(5절), 여러 가지의 각양 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7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은혜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였을 것이다.
1:5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 - 헬라인들은 선천적으로 철학적 지식과 사고에 능했고(고전 1:18-25), 하나님은 그러한 헬라인인 고린도 성도들의 특성을 십분 살려 그들에게 전도의 구변과 복음 이해의 지식을 허락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변과 지식은 대단하였기 때문에 본문은 구변과 지식 앞에 '모든'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즉 고린도의 성도들은 '달변과 박식'이라는 훌륭한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Meyer, Hodge). 여기서 달변이란 복음을 전하거나 변론하는데 있어 막힘이 없이 말에 능하다는 뜻이며, 박식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에 대해 넓고도 깊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전자는 후자의 외적 능력이며, 후자는 전자의 내적 재능이자 기본 요소이다(Alford, Meyer) . 한편 본문에 나오는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세이'( )의 원형 '그노시스'( )는 후에 나타나는 '영지주의'를 가리키는 '그노시즘'(Gnosticism)을 파생 시켰는데, 본문의 '지식'과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지식'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즉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제적 사실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이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위로부터의 지식임에 반해,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지식'이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아래로부터의 지식인 것이다.
1:6 그리스도의 증거. -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증거'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자신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말한다. 그 다음으로는 그것을 들은 제자들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다시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바,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1절 주석 참조) 2차 전도 여행 당시 고린도에서 가르친 복음의 내용을 지칭한다(행 18:1-11, Meyer, Alford).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된 이후(행 9:15), 그 소명에 따라 목숨을 걸기까지(행 15:26) 고린도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었다.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 바울이 그토록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주신 구변과 지식의 은사로 말미암아(5절) 더욱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속에 심겨지고, 단지 심겨졌을 뿐만 아니라 심겨진 것들이 흔들리거나 뽑혀지지 않게 견고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견고케 되었다'고 하여 고린도 교회에서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아직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견고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증이 고린도 교회에 확실히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여튼 고린도 교인들의 천성적인 구변과 지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재생되고 정화되어 풍족한 은혜가 되었다.
1:7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 )는 넓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사를 지칭하며(롬 5:15; 6:23), 좁은 의미로는 성도 개개인이 받는 각각의 특수한 은사를 지칭한다(고전 12:8-11). 고전 12장
연구자료. '은사의 이해' 참조. 여기서는 양자를 다 지칭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고린도 교회에는 구원과 지식의 은사 외에도 각 방면의 은사가 주어졌었다(고전 12장).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초대 교회 신앙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롬 8:19; 고전 15:51; 빌 3:20; 골 3:4; 살전 1:9,10; 딛 2: 13; 요일 2:18; 계 22:20). 즉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마 16:28)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성실한 신앙 생활과 전도 활동,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행해졌다. 그들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믿고 전도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열매 맺기를 늦추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욱 열심을 다 하였다. 이처럼 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성도로서의 모든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도 오실 그리스도와
천국의 소망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와 관련해서는 벧후 3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8 주께서. - 이에 해당하는 인칭관계대명사 '호스'( )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는 견해(Orison, Meyer, Thomas)와 하나님을 지칭한다는 견해(Calvin, 0lshausen, De Wette, Alfold, Bengel, Hodge)가 있다. 이는 이 인칭관계대명사가 바로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다음 절(9절)의 '하나님'을 가리키느냐 중 어느쪽을 취하느냐에 따른 관점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후자의 견해가 더 지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호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면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시리라'는 의미가 되어 문맥상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또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어느쪽을 취해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 '주의 날'(고전 5:5; 살전 1:10),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그 날'(살후 1:10)과 동일한 의미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욜 2:31)에 해당한다. 다만 '주의 날'과 '여호와의 날'의 차이점이 있다면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신약의 '주의 날'이 구약의 '여호와의 날'보다 훨씬 확장되고 구체화된 개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암 5장 연구 자료, '여호와의 날'과 눅 17장 자료노트, '주의 날'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것을 필히 참조하라. 이러한 '그리스도의 날'은 현세가 끝나는 '종국의 날'이요 '심판의 날'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이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 인간이 완벽하고 흠이 없어 나무랄 데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죄 값을 받지 아니한다는 뜻이다(롬 8:30; 고전 6:11). 인간 중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롬 3:10,23). 단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이며(롬 5:9-11)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가다가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여기서 '끝까지'는 '인생의 끝까지'가 아니라 '세상 끝까지', 즉 '그리스도의 날까지'이다(Meyer). 그리고 '견고케 하시리라'는 말은 6절의 '견고케 되어'와 같은 용어이다. 즉 주님의 말씀 안에서 '견고케 되었고',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견고케 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다.
1:9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교제하게 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코이노니아) 할 수 있도록 도모하시는 주체자이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교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교통이 내포된 말이다(갈 2:20). 그런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천국 생활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천국의 주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제'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표시하는 낱말이다. 실로 기독교 신앙은 종적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며, 횡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 간의 교제인 것이다.
미쁘시도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 )는 '신실한', '믿을 만한'이란 뜻으로, 바울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는 사실을 말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롬 8:36; 고전 10:13; 빌 1:16; 살전 5:24). 실로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4절) 그 은혜 속에서 마지막 날까지 인도하여 주시는(8절)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어서(롬 3:3; 히 10:23; 벧전 4:19)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때문에 성도들은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는 것이다.
1:10-17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대한 책망
문안 인사와 고린도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들어 하나님께 감사했던 바울은(1:1-9) 이제 본문에서부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다. 본서의 본론 부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간접적으로 글로에의 집 사람으로부터 들은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책망과 권면을 다루는 전반부(1:10-6:20)와 고린도 교회의 직접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후반부(7:1-16:4)이다. 이러한 본분은 본론의 전반부 중 특히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며 조속히 중지하고 하나될 것을 촉구한 사실을 언급한 1:18-4:21 부분의 서론으로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의 양상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는데, 그 원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 특정 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었다(11,12절). 즉 고린도 교인들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바울, 철학적 지식이 풍부했던 아볼로, 사도 중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를 각각 추종하는 자들을 비롯하여, 오직 자신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나뉘어 서로 자기파를 자랑하며 상호 적대감을 유발시켜 분쟁을 일삼았던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신입 교인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자파의 세력 확장을 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3절).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적 경향 및 각 분파의 특성에 대해서는 12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래서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분파주의적 경향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의 분열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책망한다(13-17절).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세례 또한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서만 베풀어진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오직 구원의 능력은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복음은 인간의 능력이나 말의 지혜로 전파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지식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사고를 지적하고 있다(17절). 즉 바울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에서부터 분열이 생김을 지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10절).
한편 이처럼 파당을 지어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위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모두가 바울의 지적대로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앞세운 교만함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지체 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함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워 나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엡 4:1-16).
1:10 형제들아. - 인사(1-3절)와 감사의 말(4-9절)을 마친 바울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고린도 교회에 있던 분쟁 문제에 대해 권면의 말을 시작하려 함에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아픔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형제들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형제'(아델포스)라는 호칭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믿음 안에서 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성도 간에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바울은 마음의 분노와 아픔을 위엄있게 새기면서, 또 고린도의 성도들이 그 말의 뜻대로 하나되기를 원하면서 이 호칭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권하노니. - 바울의 간절한 권고의 마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말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즉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바울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간곡하게, 성도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성도들을 이끄시고 보호하시고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의 말을 하려 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 )는 '권면하다', '위로하다'라는 뜻 외에 '간청하다', '탄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은 마치 탄원을 하듯 고린도의 형제들이 하나되도록 간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바울 자신과 같이 권면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다 같은 말‥‥같은 뜻으로. - 바울은 권면의 서두에 권면의 결론부터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일치된 뜻과 마음으로 일치된 의견을 나누어 온전히 하나로 합하라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성도들이 하나로 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은 발표하는 의견을 가리키며, '마음'은 도덕적 선악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의 이성적 기능을 가리킨다. 그리고 '뜻'이란 사건에 대한 판단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가 일치될 때 성도들은 온전히 합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치를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를 바로 알고 믿는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고전 2:1-5).
분쟁.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스마'( )는 옷감 따위를 찢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마 9:16), 정신적으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갈라서는 것 또는 감정으로 인해 분열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7:43; 9:16).
온전히 합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티스메노이'( )는 성경에서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고(마 4:21; 막 1:19), 부족한 무엇을 채운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살전 3:10). 그와 같이 이 말은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분쟁을 그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성도들 간에 하나로 연합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장 자료노트 참조.
1:11 글로에의 집 편. - 바울은 고린도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여기서 '글로에'는 '연한 초목'이란 뜻으로 농사의 여신인 '데메텔'(Demeter)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 이름으로 보아 그녀는 이방신을 섬기던 집안의 딸이었으나 바울의 복음 증거로 그리스도인이 된 여인인 듯하다. 그리고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란 그녀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으나 그녀의 집 노예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Findlay). 그래서 혹자는 그녀를 고린도의 부유한 상인으로 보고 그녀가 하인들을 상용차 바울이 있는 에베소에 보냈는데 이때 바울이 그 하인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라고 하나(Hodge, Findlay) 확인할 수는 없다.
분쟁. - 본문의 '분쟁'(에리스)은 10절의 '분쟁'(스키스마)과는 다르다. 즉 10절의 분쟁은 완전히 분열한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본절의 분쟁은 이론은 분분한 상태이나 아직 완전히 갈라서지는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즉 고린도 교회는 다툼으로 갈라지기 직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다시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치라고 권면한 것이다(10절).
1:12 각각 이르되. - 본절에 나타나고 있는 각각의 소리는 네 당파의 소리였다. 이 외에 더 많은 당파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당파들이 생긴 원인은 그 지지하는 지도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분쟁은 고린도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바울에게. - 바울은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으로 당파를 만들어 좇는 자들을 꾸짖고 있다. 얄팍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름 밑에 추종자들이 모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나 하나님의 종된 바울은(롬 1:1) 오히려 자신의 이름으로 당을 짓고 추종하는 자들을 먼저 문책함으로써 파당을 일삼는 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이 바울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였으므로 바울을 존경한 나머지 파당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이 사도권을 도전받았으므로(고전 9:1-3)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바울파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주류적인 파당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헬라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학문이 많고 구약 성경에 능통했으며 웅변에도 능하였다(행 18:24-28).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요한의 세례밖에 모를 정도로 미미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는 바른 신앙을 갖게 되었다(행 18:25,26).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그는 곧 바로 고린도에 와서 사역을 했는데(행 18:27,28; 19:1), 그런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한 파당에 이름을 제공하게 된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헬라적 세련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좋아하고 이성적인 경향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가 불화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바울은 아볼로를 훌륭한 동역자로 생각했다(고전 3:4-9). 뿐만 아니라 아볼로도 이 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에베소로 와서 고린도에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고전 16:12 주석 참조. 이로 보아 바울이나 아볼로는 이번 분쟁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스스로 파당을 만들고 분쟁한 것 같다. 아볼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행 18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나는 게바에게. - 이 파가 어떻게 베드로의 이름으로 모였는지, 그것도 베드로의 아람어 표기인 게바의 이름으로 모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이 파를 형성한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유대인들이거나, 아니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사도 중 으뜸가는 베드로를 지도자로 모시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로 보여진다. 추측이지만 이 파의 구성원들은 율법주의 신앙의 형태를 띤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에 대해서는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나는 그리스도에게. - 정확히 규명하기가 까다로운 파당이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고후 10:7-11) 그러한 면에서는 바울도 그리스도파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는 그러한 보편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편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른 세 파의 사람들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그리스도파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이 자신의 말에 따라 그리스도파에 속한다면 바울도 자신이 꾸짖는 파당에 속해 있게 됨으로 자가당착(自家握着)에 빠지게 되며, 첫 번째의 바울파와도 모순되게 된다. 따라서 이 파는 분명히 대립되는 한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파는 ① 게바파와 성격이 유사한 율법주의자들의 파이거나(Baur), ② 주님의 형제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그 형제들을 추종하는 파이거나(고전 9:5, Storr, Flatt), ③ 다른 세 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그 세 파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만든 파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쨌든 이 파당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배타적인 파당을 형성해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참여한 것만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만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영적 교만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Ellicott).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 상대방에게 '아니다'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주기 위해 의도된 수사적 의문문이다. 즉 상대방의 부정적 회답을 기대하는 질문이요, 그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꾸짖는 용법의 말이다. 창조주시요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요 1:1-3)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아래에서 한 자매요 한 형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파당을 짓고 분쟁 하고 있어 사도 바울은 힐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십자가에 못박혔으며‥‥세례를 받았느뇨. - 이는 사람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마도 당시 각 파당 사람들은 자신이 지도자로 하는 사람들을 신격화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그 어떤 사람도 구주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 인도자되시고 지도자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분파주의는 언제나 보이는 것 아래 모여 그 보이는 것을 절대화시키려는 유혹에 빠지며, 그리하여 정말 중요한 대상을 제외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바울은 그러한 분파주의의 위험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이 구주되시며 주권자되심을 일깨워 줌으로 분파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은 교리면, 즉 십자가의 구속과 의식면, 즉 세례에서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주이심을 강조하여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분쟁을 종결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도록 촉구하고 있다.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13절 후반부터 17절까지에서 세례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의 분파 형성은 '세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두 사람 외에 세례를 직접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분파 형성의 구실인 세례를 주지 않음으로써 분쟁의 큰 불씨를 제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각 파당은 세례를 도구로 하여 신입 교인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던 것 같다. 세례는 본래 주께서 직접 명령하신 교회의 성례전이요(마 28:19) 구원의 상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파주의자들은 거룩한 세례예식마저 자파 세력 확장의 도구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세례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그리스보는 행 18:8에 나타나는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로 여겨진다. 그리고 가이오는 롬 16:23의 가이오일 것으로 여겨지나 당시 흔한 이름이었으므로(행 19:29; 20:4, 요삼 1:11) 단정하기는 어렵다.
1:15 아무도‥‥못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각 파당은 각 파당의 지도자의 이름 하에서 세례를 주고 파당원의 숫자를 늘렸던 것이 분명하다. 본래 세례는 예수께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요(마 28:19), 또 그것은 성령의 인침을 받은 징표로 베풀어지는 상징이었다(행 10:44-48). 그런데 저들이 세례를 파당주의의 분쟁 속에서 세력 확장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만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점을 간파하고 자신이 몇 사람 외에 세례주지 않았던 과거의 행위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의 일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했으나, 갑자기 그의 기억에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준 것이 떠올랐던 것 같다(Godet). 그래서 바울은 '내가 또한'이라는 말로 세례준 사실을 도중에 삽입시키고 있다. 혹자는 본서의 대서자가 바울에게 이 사람을 생각나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obertson, Plummer). 한편 여기서 '스데바나'는 아가야 지방에서 최초로 개종한 사람으로 신실하게 교회에서 봉사한 사람이었다(고전 16:15). 아마도 바울은 첫 신자에게는 자신이 직접 세례를 주었고 개종자가 늘면 자신의 조역자에게 세례주는 일을 맡긴 것으로 보여진다(Lange). 그리고 이 편지를 쓸 당시 스데바나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다(고전 16:17).
그 외에는‥‥알지 못하노라. - 더 이상 세례준 사람이 기억 속에 없음을 나타내며, 이 이외에는 없다는 강한 부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강한 부정의 강도 만큼이나 바울 자신은 분쟁을 싫어한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1:17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 이 말은 바울이 세례를 부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례는 주님의 명령이며(마 28:19; 막 16:16), 성령으로 거듭나는 자는 물로도 거듭나야 한다(요 3:5). 그러나 세례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받는 것이다(롬 1:17; 10:9). 세례는 구원을 얻은 자에게 땅에서 행하는 구원의 표식이다(행 2:38; 8:12; 19:5; 고전 12:13). 세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행 8장 연구 자료, '세례의 이해'를 참조하라.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되신 그리스도께서(요 3:16)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고(롬 3:25) 부활하시어(고전 15:20)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요 5:22)을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바울은 세례보다는 죄인인 인간이 회개하도록 하는 복음 전파를 강조한 것이다. 사실 사도의 제일가는 임무는 복음 증거이다(막 16:15; 행 1:8).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소피아 로구)는 '말을 철학적으로 아름답게 하는 수사학 또는 변론술'을 의미한다(Hodgo), 이러한 것은 헬라인들이 즐겨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 전도를 최대 절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바울은 그러한 헬라적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십자가의 도만 가르치는 방법을 썼다. 그 이유는 말의 지혜를 사용하면 그것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가 가리워질까봐서였다. 즉 마치 세례가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우고 분쟁을 확대시키는 방편이 된 것처럼, 철학적 수사학을 사용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우려가 있어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바울은 아덴에서 철학적 논쟁을 통해 복음을 전하려 한적이 있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린도에 와서는 오직 십자가의 도만 전하기로 작정했었다(고전 2:2). 행 17:33 주석 참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 여기서 '헛되게 한다'는 말은 '비게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형태만 남고 내용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즉 본절은 헬라적인 방법인 말의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은 그렇게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하나됨을 파괴시키고 십자가의 도를 헛되게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을 통해 바울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면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18-25 십자가의 도의 이중성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실상과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책망한 바울(10-17절)은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본장 후반부(18-31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근본 원인이 된 세상 지혜와 거기에 대응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 대조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절대적인 우월성과 세상 지혜의 한계성을 명확히 함으로써 세상 지혜에 근거한 교회 분열의 부당성을 진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의 이중성(二重性)을 설명하고 그에 따라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결여된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미련한 것으로 취급되어지는 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도는 그것을 대하는 자의 태도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18,22-24절).
사실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 이유를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두 민족의 특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유대 민족은 출애굽시대부터 예수께서 사역하실 당시까지 끊임없이 이적과 기사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는바 그들의 종교 역시 표적(表迹)을 통해 성립되었고 표적을 통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 표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많은 사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 또 헬라인들은 철학적 지혜 속에서 모든 만물의 근원을 캐고 인생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이성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배격했다. 따라서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복음(福音), 즉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의 도'밖에 없다. 따라서 표적을 구하며 복음을 배척하는 유대인이나,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하며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보는 헬라인들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신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참 지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도의 이중성이다.
이상에서 보듯 인간의 지혜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또한 알 수 없기 때문이다(17-21절). 그런데 바울은 인간이 세상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세상 지혜를 미련케 하신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본래 세상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롬 1:18-22). 따라서 바울의 말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들이 얄팍한 지혜와 교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큰 지혜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과학적인 지식이 범람하고 학문의 발전이 급증하는 요즘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식적인 차원에서 알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우리 안에서 제거해야 한다(잠 11:2; 21:4).
② 아무리 인간의 지혜가 탁월하다 해도 그것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약 1:5; 3:17).
1:18 십자가의 도. - 앞절의 '말의 지혜'와 대조되는 말이다. 헬라어로는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 )로, '십자가에 관한 말씀', 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게 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복음을 가리킨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하나님의 능력이라. - '멸망하는 자들'이란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변론을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에 빠진 자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말씀'은 어리석은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해 보이는 그 진리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성도들을 실제로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실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시므로(9절 주석 참조) 그의 약속대로 자기의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을 얻는'은 헬라어 원문에서 모두 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멸망하고 있는 자들'과 '구원 얻고 있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즉 바울은 멸망과 구원을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닌 현재 이 순간의 우리의 태도에 따라 결정되는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Godet, Findlay). 물론 구원과 멸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건이요(롬 8:24), 그것이 종국에 가서야 완전히 성취된다는 면에서 미래의 사건이다(롬 10:9). 그러나 그것이 복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현재적 사건이요 진행 과정의 사건인 것이다(고전 15:2; 엡 2:5).
1:19 기록된 바. -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할 때 쓰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본절에 인용되고 있는 말씀은 사 29:14의 말씀이다.
내가‥‥지혜를 멸하고‥‥총명을 폐하리라. - '지혜'(소피아)는 '사물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며, '총명'(쉬네시스)은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능력들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오만을 없애버리신다는 말이다. 본래 이 구절은 인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었다. 사 29:14 주석 참조.
1:20 지혜 있는 자‥‥변사가 어디 있느뇨. - 세상에는 정말로 지혜 있는 자가 없고, 선비도 없으며, 변사도 없다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기 위해 반어법을 사용하였다. 즉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없지 않느냐고 강조하는 말이다. 아주 자신에 찬 부정의 말인 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부류의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지혜 있는 자'란 보편적으로 어디에나 있는 두뇌가 우수한 자를 지칭하며, '선비'는 유대인 서기관, 그리고 '변사'는 헬라의 철학자나 변론가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Alford, Meyer, Hodge, Ellicott. Findlay).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 지혜가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보았으나(18절), 오히려 그러한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멸하시고 폐하시사(19절) 미련하게 만들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바울은 논조의 내용을 대조시키고, 그렇게 대조시킨 내용 중 자신이 하고자 하는 요지를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통쾌하게 반전시키는 역설법을 즐겨 사용하였다(롬 1:18-22; 딤전 5 6). 한편 여기서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는 '시대' 또는 본구절 앞에 나오는 '세대'라는 의미의 '아이온'( )과 동의어로, 본래는 질서의 정연함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후대에 이르러서는 비신앙적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Robertson).
1:21 하나님의 지혜에‥‥알지 못하는 고로. - 의미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Olshausen, Alford. Lightfool). 둘째,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세상에 나타내셨으나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Chrysostom, Meyer, De Wette). 이 가운데 두번째 견해가 비교적 타당하다. 왜냐하면 롬 1:21-23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세상 만물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 보이셨으나,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썩어지지 아니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결국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들로 둘러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얄팍한 지혜와 교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큰 지혜를 발견하지 못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 - '전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그마'( )는 '예고하다'는 뜻의 헬라어 '케륏소'( )에서 온 말로 '넓게 선포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하여 20절에 이어 다시 한번 역설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바울이 이처럼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18절). 둘째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으므로(창 1:27)
전도하는 자의 말을 통하지 않고도 통찰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음에도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되어(롬 3:23) 전도의 말을 통하여만 믿음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10:17).
1:22 유대인은 표적을‥‥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여기서 '표적'(세메이온)은 '초자연적인 이적'을 가리키며, '지혜'(소피아)는 '인간의 인지 능력과 이해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철학적인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두 민족의 특성을 한 마디로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 유대인들은 출애굽 시대부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적과 기사의 역사(歷史) 속에서 살아왔는 바 그들의 종교는 표적을 통해 설립되었고, 표적을 통해 확립되었기에 메시야 도래에서도 표적을 동반하리라고 생각했다(사 29:18; 35:5; 마 11:5; 요 2:18). 반면 헬라인들은 철학적 지혜 속에서 만물의 근원을 캐며,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한편 이 두 민족의 문명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데 하나는 종교 문화의 영역을, 다른 하나는 학문과 과학 문화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어느것도 인류에게 구원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게 구원을 제시하고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의 표적도 아니고 헬라인의 지혜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시키신다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1:23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하여튼 유대인의 표적도 헬라인의 지혜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한다. 18,22절 주석 참조.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에게는‥‥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바울에게는 가장 고귀한 것이요 전부였던 그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외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면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 제국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리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무능력한 패배자로만 보였으며, 철학적 지혜나 그럴듯하고 위대하게 윤색된 이방신에게서 구원을 갈망하던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상에서 처참하게 죽어 버리고만 예수는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비쳐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러한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을 것이며, 이방인들은 그 예수가 구세주된다는 사실을 미련한 말이라고 하며 일축해 버린 것이다.
1:24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지혜니라. - '부르심을 입은 자들'(클레토이스)은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자들이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다(행 13:48).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성도들이 모인 곳에 초청된 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에 참여케 되는 자들이다(롬 8:28-30, Hodge). 그가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인간들에게 드러내시고(골 1:26,27), 그 드러난 비밀, 곧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힘입어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다시 한번 역설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무능력하다고 보고 꺼리며 헬라인들이 하잘 것 없어 미련한 것이라고 보았던 그리스도가(23절 주석 참조)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지혜있고‥‥약한 것이‥‥강하니라. - 18절부터 24절까지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와 그리스도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주신 하나님의 깊고도 높은 지혜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설명한 바울은 본절에서 결론의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도 계속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높고 위대한 지식과 지혜와 힘이라도 하나님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아의 흥수 이후 인간들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키 위해 자신들의 모든 지혜를 짜내고 자신들의 모든 기술을 동원해 바벨탑을 쌓으려 했었다(창 11:1-5). 그러나 하나님은 언어를 흔잡케 하심으로 저들의 계 획을 가차 없이 무산시키셨다(창 11:6-9). 이처럼 인간들은 제 아무리 자신이 크다고 하나 그 큼이 하나님의 발등상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시 99:5).
1:27-31 참된 자랑인 예수
바울은 앞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근본인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지체임을 설명하고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여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세상 지혜를 좇은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설파했다(18-25절). 이어 본문에서는 성도들이 왜 세상적 지혜를 좇으며 세상적 지혜를 자랑해서는 안 되는지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실상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세상적 지혜와 자랑이 헛되다는 것을 세상적으로 볼 때 지혜 없고 능력 없는 자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대다수는 세상적 지혜나 문벌, 재산이 없는 비천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26절). 즉 학식이나 재산, 문벌 등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일 뿐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약하고, 천하고,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게 하신 것은 이를 통하여 세상의 지혜자, 부자, 권력자들을 부럽게 하기 위함이라고 마을은 밝히고 있다(27,28절). 그러나 지혜나 재물 등이 그 자체로서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소유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은 아니다. 지혜나 재물 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지혜자나 부자 등을 택하지 않으시고 부끄럽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나 재물을 믿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논지는 결국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오히려 교만하게 하여 멸망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세상적인 것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분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으므로, 성도들은 오로지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의 도'만을 내세우고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의 도'야말로 성도들이 자랑해야 할 참지혜인 것이다(29-31절).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들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하고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세상적인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만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고후 1:12).
② 성도들은 '나의 나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요, 교만하거나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고전 15:10).
1:26 형제들아. - 10절에 이어 다시 바울은 가슴에 자비와 권면의 마음을 품고 다정하면서도 호소의 의미가 담긴 '형제들아'라는 말로 다시금 권면의 말을 꺼내고 있다. 10절 주석 참조.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 여기서 '부르심'(텐 클레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는 그 '부르심'으로 24절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연관된다. 그리고 '보라'(블레페테)는 명령형으로(Alforrd, Meyer) 강한 권유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말은 무엇을 눈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형제들아 너회를 부르심을 보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을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신 것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그렇게 크고 위대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고린도 교회 성도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왜, 어떻게 부르겼는가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육체를 따라.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인간의 조건 그 자체만을 따라', '세상인의 관점에 따라'라는 의미이다.
지혜 있는 자. - 머리가 뛰어나고 지식이 풍부하여 사물을 총명하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헬라 문명은 지혜를 숭상했으나 참으로 지혜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지혜자는 드물었다. 역사(歷史)는 그러한 지혜자들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몇 사람만을 꼽을 뿐이다.
능한 자. - 권력의 상층부에 앉아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소수인 것이다.
문벌 좋은 자. - 훌륭한 명성과 재물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당시 사회는 폐쇄된 봉건 사회였으므로 '좋은 가문'은 극히 배타적으로 세습되었으며 따라서 좋은 문벌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배타적 세습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졌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 내에는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드물었으며 대부분은 가난하고 천한 서민이나 노예, 천대받던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Alford. Meyer, Calvin).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그러한 외적 조건에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27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 '세상의 미련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타 모라 투 코스무'( )로 직역하면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세상의 죄인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는 '세상의 죄인들을 택하사'로 해석할 수 있다. 본절 하반절의 '세상의 약한 것들'과 28절의 '세상의 천한 것들'도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죄인들을 택하셨으며, 또한 세상에서 힘없고 비천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말이다. 여기에 또하나의 역설이 나타난다. 세상이 취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행동은 미련한 자들보다 지혜 있는 자의 편에 서며, 약한 자들보다는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보다 미련한 자를,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택하신다.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이 지혜 있는 자보다 미련한 자를,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지혜 있는 자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지혜와 강함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 있고 강한 자를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시고 부끄럽게 하려 하심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자랑하며, 그것을 믿고 교만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 인간의 지혜와 힘이 하나님의 가장 미련하고 약한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25절 주석 참조) 하나님께 대적하며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며 비천한 자들을 택하심으로 그들의 교만을 꺾으사 부끄럽게 하시 려는 것이다.
1:28 하나님께서‥‥택하사. - 바울은 계속해서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시사 지혜있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하려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27절) 여기서는 그것이 더 구체적이고 강도 높게 설명되어지고 있다. 즉 27절에서의 미련하고 약한 것들이 본절에서는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로 나타난다. 이는 천민들, 손가락질받는 죄인들, 하잘 것 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실로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며'(시 8:2),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며' (약 2:5), '죄인을 부르시며'(마 9:13) 억눌리고, 천대받는 자들을 돌아보시는 분이시다.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 '있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혜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본절은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폐하시려고 없는 자들을 택하셨다고 중인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27절에서는 '부끄럽게 하려'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는 '폐 하려 '라고 하여 그 강도가 훨씬 높아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있다고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럼게만 하실 뿐 아니라 종국에는 심판을 통해 영원한 형벌에 처하실 것이다(계 20:11-15).
1:29 아무 육체. -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 즉 모든 인간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인 까닭에(롬 3:23)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힘을 자랑할 수 없다.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 이 구절은 하나님에 강조를 두면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는 의미가 되고(Meyer, Godet), 그리스도 예수에 강조를 두면 '너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Calvin, Findlay). 어느쪽이든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으나 전자쪽이 훨씬 자연스럽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되셨으니. 이를 직역하면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니,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라'는 의미로(Alford, Meyer, Godet) 지혜가 주된 강조점이며 그 뒤의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은 지혜의 내용이다. 따라서 본구절은 앞에서 언급한 세상의 지혜와 대조되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있는 것들을 폐하시고(28절), 부름받은 자들을 구원시키시는(24절)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가 되는 것이다(18절). 한편 '의로움'은 '죄가 없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거룩함'은 '죄와 구별되어 성결한 상태'를 지칭한다. 또 '구속함'은 의롭지 못하고 성결하지 못한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의롭게 만드시고(롬 3:24-28; 5:9),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성화시키시사 성결케 하시어 영화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한다(롬 8:30).
1:31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 본절은 렘 9:23,24을 자유롭게 변형시켜 간결하게 인용한 것이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분쟁 상태는 점점 심화되어 각 파당이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겨루며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제까지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책망과 권면의 말을 했던 것이며, 결론적으로 자랑을 하려거든 가장 지혜로우시고 능력자이신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지혜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며(28절)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참지혜로 영원 불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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