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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십사만사천 성도의 인침과 십사만사천 성도의 구원 및 십사만사천 성도가 받을 축복의 선포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현 우주와 역사의 결정적 종말이 최종 도래하기 직전의 말세에 있을 대환난(大患難)에 대한 묵시들, 즉 상호 점진적으로 강도를 더해가면서 연속되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 등 일련의 삼대 7중 재앙을 보도하는 제 4-18장까지의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5:1-8:5에 이어지는 일곱 인(印)의 재앙에 대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제 4-18장까지의 일련 기사에 포함된 총 7개의 삽경(播景) 중 제일 첫 번째의 삽경으로서 소위 인침을 받은 십 사만 사천 성도의 묵시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제 말세에 이르러 세상 끝날이 최종적으로 도래하기 전에 상당 기간의 범우주적 대환난이 있을 것인 바 성도도 그러한 환난을 겪을 것이나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로 그러한 환난 가운데서도 필히 보호되어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확실히 얻을 것임을 미리 보여 주는 인침 받은 십사만사천 성도의 묵시를 중간 삽입 기사로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다 세분하자면 전반부 1-8절은 대환난 전에 이미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십사만사천 성도 곧 무한한 택한 성도 모두를 따로 구분하여 인치 심으로 대환난 중에도 필히 견인되도록 조치하신 묵시를 보여 준다. 그리고 후반부 9-17절은 이제 대환난 직후 십사만사천 성도 곧 환난 중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대찬양을 올리자 하나님의 심판 보좌에 배석한 24장로 중 한 사람의 입을 빌어서 구원얻은 성도들이 얻을 영생 복락이 선포되는 묵시를 제시한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의 구속사적 의의는 한 마디로 범우주적 종말과 심판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한 번 택하신 성도의 구원을 확실하고도 온전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견인(堅忍, Perseverance)의 은혜에 대하여 새로운 확신과 기틀을 전해주는 사실로 축약할 수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말세에 이르러 대환난에 직면할 성도들을 위하여서는 성도를 세상과 구별하시고 또 끝까지 보호하시어 마침내 구원을 주시는 절대 초월자 하나님의 절대 약속이다. 그리하여 먼저는 말세를 직접 체험할 성도들에게 환난 중에도 크나 큰 위로와 용기를 갖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으로는 이는 모든 시 대 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한번 택한 성도를 그 어떠한 극한 상황 중에서도 기억하시는 사랑과 또 끝까지 지키시는 능력을 갖추신 분이심을 각성케 함으로써 성도로서 가진 구속사적 특권과 축복의 절대성에 대하여 확신하며 벅찬 감격과 환회를 갖게 해준다.
그렇다! 실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절대 구원의 회망을 가진 자들이다!
외울 말씀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하나님 백성들을 지키는 천사들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이스라엘 중의 인맞은 14만 4천명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구원받은 14만 4천 명의 찬양과 그들의 받을 축복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7:4-8 성경에 나타난 주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용례
계 14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7:4-8 인침받은 144,000인의 특성
계 14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7:15, 장막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케노스'( )이다.
이것은 주로 히브리어 '미쉬칸'( )의 역어로 유목민이나 목자 및 병사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텐트형으로 지은 주거용 '장막'이나 '천막'을 말한다(창 4:20; 25:27; 삿 8:11).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만든 '성막'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장막'은 낮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또 밤의 추위와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단어를 종종 '안전'과 '보호'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본문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흰 옷 입은 무리, 곧 구원받은 성도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해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평안히 거주할 수 있게 하신다는 뜻이 된다. 이런 내용은 본절 다음인 16, 17절에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도표 7:4-8 본서에서 숫자 12와 관련된 것들
1. 하나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12지파(7:4-8)
2. 이스라앨 12지파에서 각각 이마에 인 맞은 12,000(7:4-8)
3. 열두 별의 면류관(12:1)
4. 새 예루살렘 성의 진주로 된 12문(21:12)
5. 새 예루살램 성의 문을 지키는 12천사(21:12)
6. 새 예루살렘 성의 12 기초석(21:14)
7. 새 예루살램 성의 장, 광, 고의 길이 12,000 스타디온(21:16)
도표-7:10,12 본서에 나타난 찬양들
본 요한계시록에는 성부 하나님, 또는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모두 15번 등장한다. 이 찬양들은 모두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능성 및 영원성을 노래하는 내용들이다. 이는 우주 만물과 인류 역사의 개시와 함께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택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개시를 보여주고 있는 성결의 첫 권인 창세기와 대조적으로 그 모든 것의 종결과 구속 역사의 최종 완성을 보여주는 성경의 마지막 권인 본서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어 주는 것으로서 매우 큰 구속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실로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제 이 찬양들을 도표로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네 생물의 찬양(4:8)
2. 24장로의 찬양(4:11)
3. 24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5:9,10)
4. 많은 천사들의 찬양(5:12)
5. 모든 만물들의 찬양(5:13)
6. 흰옷 입은 큰 무리의 찬양(7:10)
7. 천사, 24장로, 네 생물의 찬양(7:12)
8. 일곱 째 천사의 찬양(11:15)
9. 24장로의 찬양(11:16-18)
10. 핍박을 이긴 자들의 찬양(15:3,4)
11. 물을 차지한 천사의 찬양(16:5,6)
12. 제단의 찬양(16:7)
13. 허다한 무리의 찬양(19:1-3)
14. 24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19:4)
15. 허다한 무리의 찬양(19:6-8)
보감-7:9-17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 15대 사역과 그 목적
딤전 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7:14 성도를 깨끗게 하는 것들
1. 하나님의 말씀(시 119:9; 엡 5:26)
2.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욥 23:10)
3. 하나님이 주신 지혜(잠 8:12,13)
4. 성령(사 4:4)
5. 절제하는 마음(단 1:8)
6. 정직한 마음(미 6:11)
7. 회개(요일 1:9)
8. 부활과 영생의 소망(요일 3:2,3)
9. 그리스도의 피(계 7:14)
10.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계 19:8)
신학용어-7:12, 아멘
대상 16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16,17 새 예루살렘에 없는 것 10가지
계 22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7:14, 주
요 13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7:17 성경에 나타난 '물'의 상징적 의미
요 7장 자료노트 참조
7:1-8 인 맞은 십사만사천 성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최종 도래할 현 우주와 역사의 대중말 직전에 이 세상에 내려질 '삼대 칠중 재앙' 중에서 첫번째 칠중 재앙인 인(印) 재앙의 처음 여섯 재앙은 제 6장에서 설명되어졌고 이제 남은 것은 일곱 번째 인 재앙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섯째 인을 끝낸 다음 바로 일곱째 인을 언급하지 않고 여섯째 인이 끝나는 6:17과 일곱째 인이 언급되는 8:1 사이, 그러니까 제 7장에 하나의 삽경(崙景)을 그려 넣고 있다. 이 삼경은 모두 일곱 개 등장하고 있는 본론 제 2부의 삽정들 중(7 :1-17; 10:1-11; 11:1-13; 12:1-17; 13:1-18; 14:1-20; 17:1-18:24) 첫번째 삽경이다. 한편 본서의 본론 제 2부 안에 삽경이 일곱 개 있다는 것은 저자가 본서의 기본수로 삼고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숫자를 맞출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기본수가 왜 '일곱'이라는 수이며, 그 '일곱'이라는 수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본서 1:4의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의 삽정으로 그려진 본장의 내용은 6:17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6:15,16에서 보여지는 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극심한 고통을 받는 자들과는 대조되게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복된 위치에 있게 될 것인가를 보여 줌으로써 본서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함축하고 있는 본장은 ① 인맞은 자 십사만 사천(1-8절)과 ② 흰 옷 입은 성도의 큰 무리(9-17절)라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맥락하에 본단락은 그 두 개의 단락 중 앞단락에 속하는 것으로서 처음 네 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구원받기까지는 땅에 환난이 너무 극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1-4절), 나머지 네 절에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가 '십사만사천'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묘사되고 있다(5-8절).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는 극심한 환난을 땅에 내리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미리 택하셨으며(롬 9:9-18). 또한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마 24:7; 요 6:39). 그리고 인맞은 자의 수가 십사만사천이라는 것온 택함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는 열두 지파의 '12'이라는 충만수를 제곱한 수 '144'에 많은 수를 상징하는 수 '1000'을 곱하여 얻은 수로서 이 수는 만수 또는 충족수를 상징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수 '십사만사천'이라는 수는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상징수이기 때문에, 십사만사천이라는 수가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택함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 '십사만사천'의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본장 4괼 주석에 자세히 언급해 놓았으니 참조하라.
한편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은 한번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치시사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요 6:39). 이를 가리켜 성도의 '견인'(堅忍)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서 1권 성경 교리 구원론 중 '성도의 견인'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만에 하나 성도된 우리가 극심한 핍박이나 재앙을 받게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는 불변하시다는 것을 명심하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닥쳐 오는 환난을 이겨 승리의 면류관을 손에 넣도록 해야 할것이다(고후 4:8-10,16; 갈 6:9; 살후 3:13; 히 12:3; 약 1:4).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일 후에 내가‥‥보니. - 이 표현은 본서에서 환상의 장면이 전환됨을 나타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계 4:1주석 참조. 본장에서는 일곱 인 중에 여섯 개의 인이 떼어진 후(6장) 일곱째 인을 떼기(8:1) 전에 잠시 구원받은 자들의 복된 모습이 삽화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앞장의 내용과 달리 본장에서는 장면이 갑자기 바뀌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두려워 떠는 세상 사람들(6:15-17)로부터 이스라엘의 인맞은 자들과 땅의 모든 지경으로부터 구원을 입은 자들에게로 관심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본장이 제 6장과 전혀 다른 내용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Alford, Moffatt, Kiddle, Rist), 사실 본장은 언뜻 보면 제 6장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 6장 마지막 절의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한 천사의 말에 대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성도들'을 언급한 것은 본장이 제 6장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숨어 죽기를 바라는 자들(6:15,16)과 하나님이 치신 장막에서 거하는 자들(15절)을 대비시킨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양자가 그 대비를 통해 어떤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Spitta, Wordsworth, Plummer). 그러므로 비록 본장이 제 6장의 여섯째 인에 연결되는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라 하더라도 본장은 제 6장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보족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통이에 선 것. - '땅의 네 모퉁이'란 말은 지구가 원형이 아니라 정사각형의 평판 모양으로 이루어진 줄로 생각했던 고대인들의 사상을 반영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네 모퉁이는 각기 지구의 끝을 가리키며 네 모퉁이 내(內)의 영역은 온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천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상의 모든 지역을 관할하도록 명령받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 마치 세차게 부는 바람을 왁 잡아 두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이 묘사는 고도의 문학적인 기법이다. 여기서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 또는 심판을 상징한다(시 83:13),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온 땅에 임할 채비가 다 갖추어져 있으나 아직 유보되고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땅‥‥바다‥‥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땅'과 '각종 나무'에 부는 '바람'은 지상에서 일으킬 피해를 나타낸다. 우리는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태풍이 불어 닥쳐 나무가 뿌리 채 뽑히거나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설익은 과실이 우수수 떨어지는 등의 피해 광경을 연상할 수 있다. 또한 바람이 불면 바다 역시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 특히 해상 통로를 빈번하게 이용하는 자들에게 바다의 광포화는 더욱 커다란 재해를 안겨다 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재난을 가져다 주는 바람을 천사들이 잡고 있는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3절). 즉 하나님에서는 당신이 영원 전부터 택정한 모든 자들이 다 구원을 얻게 되기까지 최후의 심판과 진노를 유보하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9).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1,2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어떠한 고난에 처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구주되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자.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천사. - 천사는 바람을 맡은 네 천사보다 더 존귀한 천사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가 바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네 천사에게 명령하였기 때문이다(3절). 그러므로 이 천사는 아마도 미가엘(Micael)과 같은 천사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학자들간에는 이 천사를 그리스도(Wordswoth) 또는 성령(Vitringa)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천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명을 지닌 자라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 - 하나님께 대한 이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는 생명이 없는 목석(木石)에 불과한 우상들과 달리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석서 역사하신다는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 준다. 즉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며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문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 )는 '소유권' 또는 '보증'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와 보증을 상징하는 인을 치는 행위는 구약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겔 9:4-6)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육체적 재난을 면제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도들이 비록 환난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계 3:10 주석 참조.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중천에 떠서 세상 만물에게 생명과도 같은 빛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가 해뜨는 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올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 '우리'라는 수식어가 인 맞을 자들의 동질성과 일체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주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이 '우리'라는 표현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은 사도나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또한 '이마'는 머리의 앞 부분으로 인체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부분이며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을 뜻하는 얼굴에 속한 부분이다(Lenski). 따라서 그 이마에 소유 또는 보호의 보증을 의미하는 인을 치는 것은 모든 다른 존재들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함이다. 한편 이처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을 친다는 것은 옛부터 노예나 가축에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 살갗에 화인(火印)을 쩍는 풍습에 빗대어 말한 것으로 이것은 실제로 이마에 찍는다기 보다는 이마처럼 중심되고 눈에 잘 띄는 인격이나 행동으로 그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땅이나 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 1절에서 보았듯이 세상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준비들은 완료되었다. 이미 바람이 맹렬한 기세로 땅과 바다를 삼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맹렬한 심판의 재앙을 유보시킨다. 그 유보의 목적은 오직 마지막 한 사람까지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벧후 3:9).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그 누가 환난날에 넘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롬 8:37).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 본문에서 특기 할만한 점은 인맞은 자의 숫자만 언급되어 있을 뿐 인을 치는 실제 장면이나 그 작용에 대한 묘사가 생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성 안에 남은 거룩한 자들을 구원키 위해 인을 치라고 명령을 하신 경우가 있는데(겔 9장) 거기에서도 인을 치라는 명령과 인을 쳤다는 선지자의 보고만 있을 뿐 인을 치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인을 치는 행위는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일로서 인간에게 보여질 성질의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3절 주석 참조.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십사만사천이니. - 본절은 이스라엘 자손과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문자적으로의 의미 그대로를 말하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인지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유대 민족을 지칭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참 이스라엘로 욜리고 있고(롬 2:29; 갈 6:16), 본서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 등은 항상 영적,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11:8; 20:9; 21:2,10). 때문에 일단의 학자들은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인 모든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Charles, Plummer, Vincent. Wellhausen, Rist, Barclay, De Wette, Kiddie, Reuss). 그러나 또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5-8절의 이스라엘의 구원 받은 자들 뒤에 모든 이방으로부터 구원받은 성도가 별도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은 문자 그대로의 유대인 출신신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engel, Grotius, lampe, Clarke, Holtzmann, Bousset, Walveoord, Sabatier, Düsterdic). 본문 해석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두 개의 팽팽한 견해가 모두 타당성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으나 본문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때를 배경삼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한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의미한다고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본절의 '인맞은 십사만 사천의 이스라엘 자손'과 9절의 '흰 옷을 입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표현인 셈이다(17dd). 결국 이렇게 볼 때 본절의 144,000이란 직접적으로는 마지막 대환난 직전에 환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인맞은 자를 포함하여 지칭하되 궁극적으로는 구원받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상징적 숫자이다. 한편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가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상징 한다는 해석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숫자를 3과 4를 곱한 수인 12를 다시 자승한 수에 10을 삼승하여 얻은 수인 1,000을 곱하여 얻은 수, 곧 (3×4)²X l000³=144,000로 본다.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상 3은 하나님의 수이며(삼위일체 하나님), 4는 동서남북 4방위에 근거한 땅과 우주의 수이다. 그리고 3과 4를 더한 수 7과, 3과 4를 곱한 수인 12는 완전수 또는 만수(滿數)로 상정된다. 여기서는 만수쪽에 그 의미가 더 가깝다. 따라서 12의 곱수인 144는 만수를 강조한 것으로 최상의 만수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10또한 충만수인데 이 수를 세제곱한 것이 1,000이다. 그런데 히브리인의 개념에 의하면 세 번 반복하거나 곱한 것은 그것이 최상의 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0을 세제곱한 수 1000은 많다는 것의 최고 강조수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수와 만수를 곱한 144X1,000에 의해 얻어진 수가 십사만사천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더 이상 많을 수 없는 큰 수를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십 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무수히 많은 모든 백성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가 되는 것이다(Plummer). 성경에 나타난 수의 상징적 의미는 계 14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유다 지파 중에‥‥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 '일만 이천'이란 숫자 역시 '십 사만 사천'이란 숫자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 문자적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혹자는 이 숫자를 풀이하기를 12xl0³= 12,000이라고 하였다(Lohmeyer). 그리하여 성경에서 선민(選民)을 가리키는 기본수인 12에 만수 10을 세제곱한 수를 곱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충만한 숫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한편 성경에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열거한 기록들이 종종 나오는데(창 49장; 신 33장; 겔 48장) 그러한 것들 가운데 순서와 이름들이 서로 정확하게 동일한 기록은 없다. 즉 어느 이름이 빠지거나 삽입되었지 않으면 순서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이름과 순서 역시 다른 기록들과 동일하지 않으니 그 만큼 독특성이 있는 것이다. 그 독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장자인 르우벤보다 혈통상 메시야를 배출한 지파인 유다 지파가 맨 앞에 기록되고 있다는 점(5절), 둘째, 단 지파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 셋째, 에브라임의 이름이 생략되고 그 자리에 요셉 자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8절), 넷째, 생략된 단 지파의 자리에 레위 지파가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다(7절). 본문에서 단 지파가 생략된 이유는 그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중 처음으로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거나(삿 18장),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이 지파에서 나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사상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Irenaeus, Hippolytus, Augustine, Theodore, Bede, Bousset, Holtzmann, Weiss, Charles, Alford, Walvoord, Lohmeyer). 그러나 위의 두 이유 외에 단 지파가 생략된 이유로 단 지락가 일쩍 멸절하였기 때문이라는 설(Gropius, Ebrard, Dewette)과, 본서 저자 요한이 '단'으로 표기한 원문 '단'( )이 후에 '만'( )으로 변경되어 '므낫세'(6절)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Bleek, Spitta) 둘 다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전설의 경우 설령 단 지파가 일쩍이 멸절되었다 하더라도 그 지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이 차지할 하나님의 상급과 구원 자체는 없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Hendriksen). 또 후설의 경우 후대의 필사자들이 성경을 필사하는 도중에 문자가 변경되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본문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에브라임'의 이름이 생략되고 '요셉'의 이름이 삽입되어 있는 것에 대해, 에브라임이 생략된 이유는 그 지파가 친만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왕상 12:25; 사 7:9,17; 호 5장, Wordsworth). 그러나 종종 성경에서 '요셉'과 '에브라임'이 동일한 대상을 언급한 경우가 있어(시 78:67; 겔 37:16) 그러한 맥락에서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저자는 에브라임 지파의 분깃을 빌어 요셉의 이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7:9-l7 구원받은 자들의 찬양과 그들이 받을 축복
본단락은 6:17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믿지 아니하는 자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것(6:15,16)과는 대조되게 큰 축복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고자 여섯째 인(印) 재앙이 끝나는 6:17과 일곱째 인 재앙이 시작하는 8:1 사이에 하나의 삽경(據景)으로 기록해 놓은, 두 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는 제 7장 중 두번째 단락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본단락은 앞단락이 구원받을 자들을 다 인치시기까지 극심한 재앙 내리는 것을 유보하라는 내용과 구원받은 자들의 숫자의 총 합계가 십사만사천, 곧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수라는 사실을 말한데 이어, 그처럼 맡은 숫자가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9-10절)과, 구원받은 무리와 함깨 천사와 24장로틀과 네 생물도 함께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내용(11,13절).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복된 삶을 누리리라는 축복에 대한 내용(14-17절)을 언급해 놓고 있다. 한 마디로 본문은 하늘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 모여 지극히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아갈 장면을 묘사해 놓음으로써 본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서서 그러한 복을 누리자고 결심하도록 권유하며 격려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은 하늘나라에서도 멈춰지지 않는 중요한 일상 생활(一常生活)의 일부이므로 천국의 생활을 이미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성도된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의 생활을 통해 기록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롬 12:1,2; 엡 5:19,27).
② 환난을 이기고 거쳐 나가면 그 이후로는 다시는 고통도 주림도 목마름도 없는 영원한 멱강의 삶을 보장받으므로(21:3,4) 성도는 몇 십 년에 불과한 이 땅에서의 삶의 질곡과 고통을 인내하고 승리하여 마침내 복된 삶을 쟁취하도록 해야 한다(마 11:12).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 5:9과 순서만 다를 뿐 동일한 낱말들로 열거되어 있다. 이는 곧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계 5:9 주석을 참조하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 4절의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가 무한히 맡은 수를 상징하듯(4절 주석 참조) 본문의 표현 또한 참으로 무수히 많은 수의 사람을 가리킨다. 즉 본절은 온 세상 가운데서 구원받을 자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히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흰 옷. - 이것은 곧 정결과 승리를 상징한다. 계 3:4 주석 참조.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 '종려가지'는 요 12:13에도 나온다. 요한은 요 12:13에서 이 종려가지를 유대인들의 초막절 행사와 관련시켜 사용하고 있다. 이에 일단의 학자들은 본절의 종려 가지를 성도들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간 후 안식을 취하는 것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해석한다(Trenh, Vincent, Wordswoth, Hengstenberg). 반면 종려 가지라는 개념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시합의 승리자에게 부여하던 것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Alford, Moffatt).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종려가지의 개념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일 뿐, 그것이 승리와 영광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에는 차이가 없다. 즉 종려 가지는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보좌란 하나님이 앉아 계신 위(位)이며(4:2), 어린 양은 애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5:6). 그리고 비록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구절에 의하면 성령은 보좌와 어린양 사이에 일곱 등불로 계신다(4:5). 따라서 본문은 수 많은 성도가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그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5:13).
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큰 소리로 외쳐. - '큰 소리'는 흰 옷을 입은 승리자들에게 어울리는 소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받은 자들은 하늘의 천사들처럼(4:1; 5:2; 6:1) 하나님의 심판 날에도 두려움 없이 도리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외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주신'은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수많은 성도들이 삼위 하나님 찬양하기를 쉬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구원하심이‥‥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 예수께서 초막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던 장면을 연상시켜 주는 구절이다(요 12:13). 사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니 그 구원에 대한 찬양과 존귀는 마땅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들을 최종적으로 구원의 그 날까지 돌봐주시는 성령께서만 받으실 만한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다.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 이 장면은 5:11에도 모사된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자(主宰者)답게 한 가운데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시고(4:2), 그 보좌 둘레에 네 생물이 자리잡고(4:6), 보좌 주위에 24장로들이 앉아 있는데(4:4) 다시 그 주위를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옹위하고 서 있는 것이다(5:11).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계 5:11 주석을 참조하라.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이와 같은 경배의 자세는 24장로들이 취했던 것이기도 하다(4:10; 5:14).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사역과 그 영광에 대하여 천사들도 하나님께 최상의 경배와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본분으로서 그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인 천사들에게도 요구되는 본분이므로 천사들도 그것을 위해 항상 힘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하여 하나님께 날마다 죄송함을 금할 수 없는 우리는 말할 나위도 없이 더욱더 하나님께 경배하고 무릎을 끓어야 할 것이다. 한편 '엎드려 경배하는' 것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계 4:10의 주석을 참조하라.
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지닌 '아멘'(Amen)에 대해서는 계 1:6의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세세토록 있을지로다'에 대해서는 계 5:13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 언급된 천사들의 찬미 내용은 일곱 가지로 되어 있는데 '부'가 '감사'로 바뀐 것 외에는 5:12에서 천사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미한 내용과 동일하다. 이 중 '감사'에 대해서는 계 4:9 주석을, 그외의 나머지 여섯에 대해서는 계 5:12의 주석 도표를 참조하라. 끝으로 본절의 찬송이 아멘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것은 찬미의 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며. 또 한편으로는 10절의 성도들의 찬미에 대한 화답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 본절부터 17절까지는 문답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 즐겨 사용되는 기록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5:2; 렘 1:11; 겔 37:3; 슥 4:2,4,5). 성도들의 대표인 장로(계 4:4 주석 참조)는 흰 옷 입은 성도들과 천사들의 찬미(9-12절)를 듣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본서의 저자 요한에게 흰 옷 입은 큰 무리(9절)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질의식 방법을 쓰고 있다. 즉 장로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은 것은 장로 자신이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요한에게 그들이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반어법을 사용한 것이다(Bede). 한편 장로들이 흰 옷 입은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14-17절에서 장로가 요한에게 흰 옷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 본문에서의 '주'(Lord)라는 표현은 장로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뜻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존경의 뜻으로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창 23:6; 요 12:21). 다음으로 '당신이 알리이다'(쉬 오이다스)는 매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나는 도무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알고 있다'는 의미의 표현이기 때문이다(겔 37:3; 요 21:15,16, 17).
그가 나더러 이르되. - 요한의 겸손을 통찰한 장로는 자신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 (13절) 자신이 그 답을 정확히 풀어주고 있다. 이는 장로가 자신이 몰랐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상세히 가르쳐 주기 위해 질문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13절 주석 참조.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 '큰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스 들림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이다. 이 원문이 보여 주듯이 '큰'과 '환난'에 모두 관사가 붙어 있어 본문의 '픈 환난'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소위 말세의 '대환란'을 지칭한다(Chafes, Walvoord). 따라서 본문이 지칭하고 있는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소위 말세의 '대환난을 거쳐 나온 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본문이 지칭하고 있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과 9절의 '흰 옷 입은 능히 셀 수 없는 른 무리'는 같은 대상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이 지칭하고 있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을 일방적으로 소위 말세의 대환난을 거쳐 나온 자들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문이 지칭하고 있는 자들은 단순히 소위 말세의 대환난을 거쳐 나온 성도들을 포함할 뿐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대의 모든 환난을 겪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Greiidanus, Alford). 말세의 극심한 대환난기에 있을 박해를 극복한 성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속에서 승리한 모든 성도들 또한 최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생과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15-17절).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이는 곧 애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힘입어 의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계 5:9 주석 참조. 그리고 그와 같이 의롭게 된 자들, 곧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은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는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된다. 그 까닭은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사 그들을 최종적 구원의 길로 인도하심에 있어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요 14:15,17; 16: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함을 얻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그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확신하는 일에 담대히 나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마 6:33).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그 옷이 희게 된 자들이 받을 영광의 하나는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를 믿지 아니하여 죄사함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르면 산과 바위 틈에 숨어 하나님을 피하려 드나(6:15,16) 성도는 하나님의 존전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자들이 받을 영광 중 또 하나는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래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였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일진대 그 죄인이 하나님을 친히 섬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여기서 '섬긴다'(라트류오)는 말은 '하나님을 보필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그분과 교제하는 중에 그분의 지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에서 주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본문은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새 예루살렘에는 죄인이 없으므로 죄를 사함받기 위한 곳인 성전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21:22) 본문에는 성도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은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누릴 영광을 설명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21:22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 나라에서 성전이 된다고 언급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를 속죄하는 성전은 더 이상 없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의미로서의 성전이 있다. 본절은 그러한 개념으로서의 성전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성전에서의 활동은 하늘나라에서의 활동과 동일한 개념이며, 이것은 21:22의 내용과 상치 되지도 아니한다.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장막'(tent)은 구약 시대의 '성막'(tabernacle)에 상응하는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었다(출 40:34,35).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 위에 장막을 친다는 것은 성도들과 함께 거하사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흠정역(KJV)은 본절을 '깊이 거한다'(shall dwell among them)이라고 번 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축복의 세 번째 것은 이 처럼 성도들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같이 거하며 그분의 돌보심을 입게 되는 것이다(16, 17절).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상하지 아니할지니. - 본절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 49:10을 반영한 것이다. 세상에서 큰 환난을 헤치고 나온 성도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풍요함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매우 고무적인 내용이다. 한편 이 사실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으로(요 4:14)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은 자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배고픔과 가난과 궁핍함과 멸시를 당하였을 지라도 말세의 대환난과 최종적인 대종말 뒤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고통에서 떠나 풍요와 진정한 안락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증거함으로 인해 받는 것과 같은 세상의 박해(6:9)가 하늘 나라에서는 다시 있지 않겠다는 사실을 보중해 주는 말이다. '뜨거운 기운'은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부는 열풍(熱風)인 '시록코' (sirocco) 같은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겪는 혹독한 고난을 상징한다. 만유의 왕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니 그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하나님께 대적할 자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그곳에는 풍요와 평강과 즐거움과 존재의 충만한 가치들만이 있을 뿐이다(21:4).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 -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 아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며(계 4:2 주석 참조),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계신다(5:6). 그러므로 본문은 어린양이 성도를 대표하는 장로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로서 계시는 것을 묘사한 말로 볼 수 있다. 몰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같은 하나님이시므로 어린양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다르므로 그리스도께선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고 계신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희의 목자가 되사. -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목자가 되신다는 개념은 성경에 자주 표현되고 있다(시 23:1; 28:9; 사 40:11; 요 10:11; 벧전 2:5; 5:4),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가 된다는 표현은 매우 모순되게 보이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이라고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되는 표현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가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속의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하나님의 속죄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그가 목자라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인도자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린양'이시며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어린양이자 동시에 목자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수 샘. - 이는 생명의 근원 곧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을 의미한다(요 4:10-14; 7:38). 22:1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 '눈물'은 고통과 슬픔을 상징한다.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큰 환난'으로 인해(14절)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그 같은 슬픔이나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니 성도들이 다시금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이 세상 사는 동안 겪은 노고에 대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21:1-4).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여하한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롬 5:3,4; 히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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