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에게 되게 기쁜 날입니다. 생일이냐고요? 좀 멀었어요. 아직은 코로나 이전에 수요 예배 숫자에 거의 이제 비슷하게 성도들이 오늘 오셨어요. 여러분은 뭐 이렇게 큰 생각 없이 이렇게 앉아 계시지만 저는 숫자 세는 게 되게 이렇게 빠르다 그러잖아요. 항상 저는 숫자를 세요. 어디를 가든 운동장을 가도 뭐 예를 들어 운동 경기를 봐도 tv에 어떤 화면을 봐도 저는 막 와 아름답다 멋있다 이런 것도 보긴 하지만 주로 숫자를 세요. 좀 이상하죠.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버릇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오늘은 정말 예전에 많이 오는 숫자만큼은 아니어도 어떻든 우리가 수요 예배 드릴 때 정도의 숫자의 성도들이 온 것에 대해서 참 이렇게 마음이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좋으시죠?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 10장 7절에서 18절입니다. 참고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10장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를 하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 10장의 내용들은 실은 내용이 되게 어려워요. 저도 이 본문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래서 또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도 또 이해가 잘 안 되고 심지어 어떨 때는 원어를 이렇게 펼쳐놓고 이렇게 봐도 또 이해가 안 되는 구절들이 되게 많아요.
그래서 그렇지만 잘 이해하려면 이게 사도직에 대한 변호라고 생각하고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좀 잘 되긴 합니다. 7절 전반절에 보면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이것도 사도직에 관한 이야기겠죠.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넘어갔어요. 왜 거짓 교사의 유혹에 넘어갔냐 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외모 즉 외적인 조건을 봤기 때문인 거예요. 거짓 교사들이 가진 외적인 조건들과 그리고 언변의 속아서 그들을 추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추종한다는 건 누군가를 거역한다는 것이 되겠죠. 세상을 추종하면 그리스도는 거역하게 되고 거짓 교사들을 추정한다는 것은 또 바울을 거역한 일이 되겠죠.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외모에 외형에 속아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 대해서 적대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바울은 대개 이렇게 수사학을 배운 고대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이 논리학자예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변론하고 싸워서 지기 힘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근데 바울은 그런 자기가 배운 수사학을 자기가 이렇게 논쟁이나 선포하는 일에 잘 사용하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게 정확한지는 우리가 좀 봐야 할 거지만 생각보다 바울이 언변에 좀 약한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학자들이 되게 많아요. 눈이 안 좋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실제로 이 언변의 문제 연설하는 능력이 좀 떨어진다 이렇게 보는 사람도 없잖아 있기는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기를 변론함에 있어서 수사 같은 세상적인 문학의 기법을 또 쓰지 않았냐 면 오히려 그것이 복음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복음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전하는 것을 더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자기가 배운 그런 세상적인 기법을 활용해서 변론을 하거나 말씀을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간증이 설교가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잖아요. 그래서 굳이 어떤 꾸밈이 필요 없었어요. 날것 그대로 전해도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근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 거짓 교사들이죠. 이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거짓인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많은 꾸밈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수사학적인 용어들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가르쳤던 겁니다. 여기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빠져 넘어간 거예요.
바울이 전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날것 복음에 대한 소리는 오히려 길을 막고 아름다운 마을로 꾸민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혹해서 넘어가는 일들이 벌어졌고, 그런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이제 사도바울의 사도 집까지도 걸고 넘어져 간 거예요.
안타깝게도 본질보다는 복음보다는 말씀보다는 외적인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그런 변질이 일어났어요. 복음이 뜨겁던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강력했던 교회가 본질을 벗어나자 변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질보다는 외형적인 조건을 더 중요시하고 성령에 순종하기보다는 성령을 도구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상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물질이 하나님을 앞서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이런 공간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목회를 하고 또 하나님을 믿잖아요. 정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믿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우리가 그 경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능력과 역사는 기대하면서 자기들은 정작 본질 위에 서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하는 것,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제 외적인 것으로 외형적인 것으로 자기를 지장하고 돋보이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는 교회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지 못하는 교회 안에는 온갖 문제들이 발생해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의 중심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외모만 보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희는 왜 몸만 보는 도다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 때문에 바울이 예전과 달리 좀 자기의 권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면 반드시 너를 벌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글들이 이제 빈번하게 고린도 교회와의 주고받는 서신에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왜 모여만 외형에만 집중 집착하게 되자 그들이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고, 그리고 결국 바울의 사도집까지도 이게 공격하게 된 거예요.
바울은 편지를 쓸 때는 또 음악에 썼다가 막상 맞이하면 성도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아무 말을 또 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는 바울의 모습을 이제 비난까지 하는 거예요.
니가 정말 스스로를 사도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니가 우리 앞에 자신 없지 않느냐
그럼 목사가 정말 자신이 없어서 성도들 앞에 당당하거나 떳떳하지 못할까요? 그런 경향도 있겠지만 성도잖아요. 물론 저도 부족해서 여러분을 더 힘들게 하고 어려워한 적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마음에 어떤 품었던 생각들의 말을 저도 거의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일부 친구들이나 동료들 성도들 중에도 어쩌다 한두 번 어떤 말을 할 정도이지 내가 마음에 어떤 품들을 품었던 생각들을 내가 저 권사님을 만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야지라고 하다가 등장 만나면 오해는 하지 마세요. 권사님들이 막 이쁜 거예요. 그래서 말을 못하겠어요. 혹시 또 이 말 했다가 그나마 열심히 하는 것 안 하면 어떡하지 생각이 들어서 말을 잘 못했어요.
사도바울도 똑같았어요. 소식을 들으면 막 화가 나고 내가 가면 너희를 가만두지 않겠다 막 이렇게 말을 해놓고 정작 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그렇게 자기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이걸 이제 고린도 교회가 또 트집을 잡는 거예요.
니가 사도가 아니니까 니가 너를 스스로 사도로 여기지 않으니까 니가 우리에게 대해서 이렇게 떳떳하지 못한 게 아니냐
이렇게 바울을 또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이제는 조금 더 자신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계속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좀 엄격하게 너희들에게 태도를 취하는 건 내가 너희를 겁주기 위한 게 아니다.
내가 요 겁주라는 단어를 좀 다르게 이렇게 보니까 흩어버리다 폭파하다 파괴하다 이런 의미더라고요. 내가 교회를 헐기 위해서 교회를 폭파하기 위해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라는 거죠. 내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바울이 말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양면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고린도교회는 생각했고 제가 지난주 설교 때도 그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의 태도 성도들을 좀 고쳐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좀 단호하게 그러나 겁주는 건 아니다. 내가 교회를 파괴하려거나 해친 건 아니지만 이전과 좀 다르게 내가 너희에 대해서 단호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마음을 먹었냐 하면 이 관용의 태도가 모두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던 거예요. 여러분 관용이 통용이 되면 되게 성숙한 사람들이에요. 관용하는 것 관용이 통용되는 공동체는 되게 성숙한 공동체인 거예요.
근데 이 고린도 교회가 약간 그렇지 않는 성격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바울의 관용에 대해서 관대함에 대해서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더 엄격하게 내가 너희들에게 대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게 바울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설교할 때 늘 그런 마음을 종종 하잖아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내는 제발 그 말 좀 하지 말래요. 하지 말고 그냥 좀 선포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냥 선포하면 되지 않을까요? 근데 제 마음에 사도바울과 비슷한 제가 사도바울처럼 그런 마음은 갖지 못했지만 비슷한 마음인 거예요. 그래서 행여나 누군가 잘못 들으면 믿음에서 멀어질까 행여나 기분 나쁘게 교회 왔다가 이 소리 듣고 오히려 하나님을 떠날까 물론 성령님께서 보호하시고 막으시겠지만 목회자에겐 그런 마음이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그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계속 돌보다가 이제는 조금 자세를 바꿔요.
내가 더 이상 관용의 태도로 너희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선을 넘었다. 그래서 내가 예전과 달리 좀 엄격하게 대할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너희를 이것으로 인해서 너희를 겁주려거나 협박하는 건 아니라고 알기를 바란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지도자이죠. 거짓 교사들이죠. 이 거짓 교사들과 바울 자신이 비교되는 걸 되게 불명예스럽게 여겼어요.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에 있던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을 자랑했어요. 스스로 자기 추천서를 써서 막 화려하게 써서 다니고요. 제가 예전에 어떤 명함을 받았는데 명함이 앞뒤로 꽉 찼어요. 정말 앞뒤로 꽉 찼어요. 정말 유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써놓고 이름만 줘도 감사하게 명함을 받거든요.
근데 그분은 꽉 채우는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어요.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추천서는 교회가 써주거나 스승이 써주고 이거 써주는데 자기 스스로 추천서를 써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과 바울이 비교되는 것을 바울이 대개 정말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자기가 이제 개척한 교회 성도들이 그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을 추정하는 것도 되게 불편하게 여겼어요. 바울이 좀 엄격하게 고린도 교회를 대하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를 자랑하는 또 외모를 보고 추궁하는 태도는 반드시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좀 엄격하게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것, 그들이 가르치는 걸 추앙하는 것, 수사학적으로 잘 묘사된 진리들을, 거짓 진리들을 경험하지 않는 진리들을 추앙하는 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답답했어요.
내가 이제는 좀 엄격하게 내가 너희를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모습들, 그런 거짓 교사들의 모습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오히려 십자가나 복음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처럼 자기를 자랑한 게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자랑했잖아요. 근데 자기를 자랑하는 태도와 십자가는 안 맞는 거예요.
이쁜 말로 꾸며서 진리를 포장하는 사람들과 진리를 경험하는 사람은 결이 다른 거예요. 바울이 그런 거짓 교사들을 따르는 고린도 교회와 이 거짓 교사들을 좀 엄격히 경계해야 되겠다. 그래야 복음이 훼손되지 않고 교회가 훼손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이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자기를 추천했어요.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자랑했어요. 자기가 자기를 칭찬했어요.
근데 그것이 바른 태도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말을 하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고린도교회 설립자로 지도자로 세우고 보내셨다는 것을 바울이 확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은 자기를 자기가 칭찬했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세웠어요. 하나님이 그를 칭찬했고 그를 인정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사로 설립자로 그리고 그들의 참 스승으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이전과 달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좀 밝히고 싶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자기라는 거예요.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참으로 보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근데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가 정하게 파송받아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고 믿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교만해서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외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거짓 스승들의 잘못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교회를 변호하기 위해서 자기를 지금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업적을 가로채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거짓 교사들은 다른 지역 다니면서 막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은 그곳에 갈 때마다 그 설립자들의 이전에 좋은 목회자들의 업적을 가로채는 일을 했던 거예요. 바울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처럼 또 자기를 바울처럼 여기며 그곳에 사역을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어떻든 자기와 그들이 엄격하게 분리되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이 10장 자체가 10장 11장도 다 사도지간 변호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변호하기 위해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처럼 자기의 외적인 것에 대해서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때는 관용의 태도로 대하다가 어떤 때는 좀 부드럽게 대하다가 어떤 때는 자기를 권위를 숨기다가 어떨 때는 권위를 드러내다가 어떨 때는 자기의 이 프로필들을 숨겼다가 어떨 때는 파이게 들어서 자랑하는 이 모든 것의 움직임의 중심에 뭐가 있냐? 바울은 복음과 그리고 교회와 그리고 십자가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언제든 자기의 모양을 바꾸면서 있었던 거예요.
진짜 십자가가 없으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천은 십자가가 있으니까 어떤 모양을 취할 수 있어요? 여러분 성도나 교회가 정말 십자가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에겐 이런 모양으로 저 사람에겐 저런 모양으로 저교에서는 조교의 모양으로 얼마든지 자기를 취할 수 있어요.
십자가가 없으면 어때요? 여기도 이 모양 저기도 이 모양, 저 사람에게 이 모양, 이곳에도 이 모양, 이 사람에게도 이 모양 그래서 가는 곳마다 문제가 생기고 분란이 일어나고.
근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문제가 안 생겼잖아요. 왜 그랬을까요? 십자가가 늘 중심이었어요. 그래서 자기를 어떤 모습으로 취해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늘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약해 보였지만 이제는 십자가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가 단호하기로 맹세하고 있는 것도 그가 십자가가 그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다 이렇게 볼 수 있지만 교회 중심 교회 사역의 중심에는 반드시 교회와 또 복음과 십자가가 있어야 됩니다. 성도들의 삶도 어디에 있든 동일하게 교회와 그리고 십자가 그리고 복음이 성도들의 삶 안에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 모양으로 저기서는 저 모양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길 수 있고 자기가 높아지거나 낮아짐에 대해서 아무런 요동 없이 오직 복음 일념으로 목양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참 이렇게 목회자들이 다 저부터 대우에 되게 민감하잖아요. 진짜 이렇게 복음에 가까워질수록 대우에는 좀 덜 민감해지는 것 같아요.
저도 가까워졌던 말은 아니지만 조금 경험한 것과 주변의 목사님들에게 또 선교사님들의 경험을 보면 어떻든 진리나 복음이나 이게 좀 가까이 간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그렇게 이렇게 변호하지는 않더라고요. 목회하면서 억울한 일이 없겠어요. 여러분보다 몇십 배 더 많겠죠. 그때마다 말을 하고 드러내면 그게 교회가 되겠어요? 사역자가 되며 사역이 되겠습니까? 불가능 바울이 이렇게 많은 변화무상한 그가 개척한 교회와 지역들 다 다른 특징의 성도들과 사역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심에 복음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 마음에 십자가가 있으면 때는 교회에서 섭섭한 일을 당하고 또 누가 인정해 주지 않고 또는 하나님도 나를 외면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십자가가 있으면 여러분 견뎌낼 수 있어요. 우리가 못 견디는 건 내 안에 복음의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갑작스럽게 막 성장해서 어른이 되겠습니까? 저라고 어느 날 갑자기 막 좋은 목사가 순식간에 되겠어요. 그래도 나이 먹듯이 조금 조금은 우리 교회나 여러분과 제가 좀 진리에 십자가에 가까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