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보조.기조실
23.03.18 23:04
3:10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명령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맹목적인 종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에 따르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시대 '크레도 에르고 쑴'으로부터
의심의 시대 '코기토 에르고 쑴'으로의 전환
즉 종교의 종말에 대한 선언입니다.
종교의 종말 이후의 시대는
따라서 믿음과 이성이, 신과 인간이, 종교와 학문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대분열의 시대입니다.
사람은 달라졌는데 종교가 달라지지 않으니
이렇게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교는 달라진 사람에 맞게 하느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어른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다릅니다.
그래서 모두 떠나는 것이죠.
4:04
이로부터 현실에는
다양한 무신론의 줄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 줄기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신론의 줄기들
'탈종교 (DE-Religion)'
'반종교 (ANTI-Religion)'
'무종교 (NON-Religion)'
탈종교는 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단계이고
반종교는 신을 비판하는 단계이며
무종교는 신에 관심조차 없는 단계입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17세기와 18세기 근대 계몽주의가
'탈종교'의 선언이었다면
포이어 바흐, 니체,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의
19세기와 20세기의 종교비판은 '반종교'의 선언이고
오늘날 우리의 세속적인 삶,
한 마디로 신을 잊고 살아가는 21세기
고향 상실의 시대가 바로 '무종교'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신론의 전통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유한한 이성은 신의 무한한 지혜를 이해할 수 없다는
< 신 인식불가론 >입니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종교적 타락과 무신론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 종교비판과 신앙성찰 종교의 종말 이후(2)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정진우의 철학교실] 13:21
0:11
현실 종교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부조리라면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알 수 없다는
<신 인식불가론>이며
바로
그 <신 인식불가론>으로부터 현실의 반 종교적인 종교문화들,
즉 '묻지마 믿음'이라든가 '멋대로 믿음'이 생겨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종말 이후의 상황이라면
종교의 종말 이후의 종교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0:42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180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입니다.
이미 < 신 인식불가론 >이 팽배하던 시절
그로 인해서 우리의 종교 현실처럼
실정종교와 주관종교가 팽배하던 당시의 종교 문화를 비판하면서
그러한 병든 종교 문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성찰적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 *
◆불가지론◆
한자 不可知論
라틴어 Agnosticismus
영어 Agnosticism
독일어 Agnostizismus
어원은 그리스어 'agnostos' 즉 '알려지지 않는다', '알 수 없다'에서 나온 말로서,
1870년께 헉슬리(T.H. Huxley, 1825∼1895)가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나,
그런 주장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인간의 의식에 부여된 감각적인 경험을 뛰어넘은,
그 배후에 있는 객관적인 실재는 인식할 수 없다.
즉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궁극점에 관한 지식이나 확증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바로 '불가지론'이다.
고대의 '회의론'(懷疑論)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흄(David Hume)을 거쳐
오늘의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에 이르는 극단적인 불가지론은,
실재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주장하여 왔다.
하지만, 칸트, 콩트(A. Comte), 스펜서(H. Spencer) 등의 불가지론은,
설혹 인식은 안된다 하더라도 '물자체' 같은 객관적인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 불가지론의 주장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
멸하지 않는 영혼의 존재, 우주의 기원, 사후의 생명,
인격신(人格神)의 존재와 완전성에 대한 부실함의 강조라고 지적할 수 있겠다.
신학적으로 보면, 불가지론은 모든 종교적인 지식 특히 자연적인 신 인식 및
가신성(可信性)의 동인(動因, motiva credibilitatis)의 가능성의 부정을 가리킨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당시의 회칙 (Denz. 2027)에서는 불가지론을 배척하였다.
신의 존재는 인간 이성에 태어나면서 갖추어지는 '자연의 빛'에 의하여 알려지며,
신의 본체는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한 지식을 요구하고 그 지식의 영역을 주장한다고 해서
불가지론의 주장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요,
불가지론의 주장인 이른바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늘 그대로 남게 마련이다.
개별과학의 성과로만 확실한 지식을 추구할 때
세계의 근원, 질서, 의미 등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한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 * * * *
▣ 보조교사방복음화, 전략 아닌 "삶의 변화" 필요
moowee 3.12.17 16:44
새복음화평의회 피시켈라 대주교 “복음화, 전략 아닌 ‘삶의 변화’ 필요하다” | |
“단호한 신앙의 삶 무엇보다 중요” ‘신앙의 해 폐막’ 인터뷰 통해 강조 | |
【외신종합】교황 프란치스코는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포한 '신앙의 해' 폐막미사를 봉헌했다. 이로써 보편교회는 신앙의 쇄신을 위해 기념했던 '신앙의 해'의 막을 내리고, 여전히 남는 새 복음화의 과제를 위한 순례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의장 리노 피시켈라 대주교는 11월 6일 미국 가톨릭 언론인 내셔널 가톨릭 레지스터(National Catholic Register)와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보편교회의 새 복음화 과제를 성찰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지난 한 해는 보편교회 전체에 '은총의 순간'들이었다. 특별히 교황의 사임이라는 전례없는 사건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서로 다른 두 교황, 하지만 가톨릭 신앙의 일관성을 목격했던 경험을 통해 하느님 백성 모두는 신앙의 섭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가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의 경험을 통해 신앙의 위대한 역동성과 열정을 발견했다. 특히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의 경우에는 '신앙의 해'가 가져온 변화이자 새 교황의 이른바 '프란치스코 효과'를 통해 냉담했던 신자들이 교회로 돌아와 성사생활이 활기를 띠는 것을 목격했다. 입버릇처럼 '새 복음화'를 말하지만, 우리 모두가 복음 선포의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새 복음화의 구호는 유명무실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특별한 역사적 시기를 지나며, 강력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0세기까지 복음화는 간단했다. 교회와 신앙의 적은 무신론이라는 실체가 분명한, 이론적, 철학적 체계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무신론적 태도를 직면했다. 사람들은 이교도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신들의 무신론적인 모습을 알지도 못한다. 오늘날 문제는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제 자기 삶에서 하느님의 부재를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곧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스스로와의 관계를 상실한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과제, 개종을 위한 전략이나 정책이 필요한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성서시대에 안티오키아는 뉴욕, 런던, 파리, 로마처럼 다문화 다인종이 모였던 곳이다. 안티오키아의 초기 공동체는 불과 20~30명이었지만 모두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았다. 오늘날 세계에는 12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만, 이교도처럼 살아감으로써 다른 이들이 우리를 가톨릭 신자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무엇이 우리를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만드는가? '단호한' 신앙의 삶이다. 우리는 종종 "더 이상 포도주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포도주에 물을 탄다." 세례를 받고서도 우리는 단호한 신앙을 살지 않는다. 신앙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앙을 선포하겠는가? '새 복음화'는 공허한 말이 되고 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20주년이 되던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임시총회 폐막 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는 그동안 교회의 구조에 관심을 가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을 잊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때 한 말을 되풀이 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의미있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 |
[기사원문 보기] | |
[가톨릭신문 2013.11.27] | |
[출처] 동경한인성당 - http://tokyo-koreancatholic.org/bbs/board.php?bo_table=B12&wr_id=152
* * * * * * *
★가톨릭교리서가톨릭 교회 교리서 3편 그리스도인의 삶: 소명, 십계명
moowee 16.11.30 10:08
[구역반장 월례연수] 「가톨릭 교회 교리서」 3편 그리스도인의 삶 : 소명, 십계명
예수님의 새 계명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십계명’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스도인의 삶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제1부 인간의 소명 : 성령 안의 삶
*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엄성을 지니며,
개별적으로 또 공동체로서 ‘참행복’(마태 5,3-12)을 추구한다.
* 자유 의지로 양심에 따라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는 ‘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 인간의 양심은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도록 부른다.
* 양심의 소리를 듣고 따르기 위하여 자기 성찰(양심 성찰, 의식 성찰)이 필요하다.
*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대상’(인간 행위)과 ‘목적’(행위의 지향과 방법)과 ‘정황’(환경 · 사회적 압력 · 행동)이 모두 선해야 한다.
* ‘향주덕’(믿음, 희망, 사랑)에 기초하여 ‘윤리적 덕’을 쌓아가야 한다.
- 현명 : 참된 선을 식별하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덕
- 정의 : 하느님과 이웃(권리 존중, 공평과 공동선 촉진)에게 올바르게 돌려 드리는 덕
- 용기 : 삶 안에서의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고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는 덕
- 절제 :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덕
* 성령의 열매 :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
* 죄는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치는 것
- 대죄(죽을죄)는 ‘중대한 문제(십계명 안에 구체화)를 대상으로 하고,
완전히 의식하면서, 고의(전적인 동의)로 저지른 죄’로서 은총 지위의 상실을 초래하므로
고해성사를 통한 회개의 실천이 필요함
* 악습들(죄종 -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에 유의해야 한다.
* “하느님께서는 그대 없이 그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대 없이 그대를 구원하지 않으십니다.”(성 아우구스티노)
* 인간과 사회
- 보조성의 원리 : 상위층 사회가 하위층 사회가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 공동선 : 집단이든 개인이든 자기완성의 실현을 충만히 추구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
- 사회정의는 공동선과 공권력 행사와 관계됨
- 인간의 연대성 : 서로 다른 탈렌트를 공유하고 나눔, 물적 연대성과 영적 연대성
* 새 법(복음의 법)에 따른 삶의 추구
* 은총과 의화
- ‘의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것
- 성화 은총 : 세례로써 주어짐.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동하도록 주시는 상존 은총
- 성사 은총과 카리스마(특별한 은총 또는 은사) :
하느님 구원 사업에의 참여와 교회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주시는 은총
- 직분의 은총(카리스마)은 교회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데 따르는 은총
-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의 길 - 고행과 극기를 내포)
* 교회의 다섯 가지 법규는 교회의 목자들이 제정한 의무들이다.
-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육체노동을 삼가야 한다.”
-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 “적어도 한 번 부활 시기에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한다.”
- “교회가 정한 날에 금식재(만21~60세)와 금육재(만14세부터)를 지켜야 한다.
- “교회의 필요를 지원하여야 한다.”
제2부 십계명
* 십계명은 사랑의 계명이다.
-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오늘 살아가야 하는 길
- 탈출기 20장 2-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전해짐
-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분류를 따름
-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 -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태도’
- 이어지는 일곱 계명은 ‘이웃 사랑 - 인간 사이의 태도’
- 십계명은 우리의 삶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올바르고도 자유로운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 <첫째 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깨우쳤다면 하느님의 뜻만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함
- 우상 숭배, 미신, 불경, 무신론, 불가지론 등에 빠져서는 안 됨
-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의지와 삶 전체를 하느님만을 향해 두어야 함
(이하 생략)
* * * * * * * * *
★벌거벗은지금Re:Re:Re:2부 그리스도인의 아킬레스건 - 불가지론(不可知論)
moowee 17.11.12 12:11
불가지론
agnosticism , 不可知論
목차접기
T. H.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영국의 생물학자로,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성격과 종류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쓴 사람은 T. H. 헉슬리이다. 그는 이 말을 주로 영지주의파(靈智主義派)에 반대하는 자신의 관점을 가리켜 사용했지만, 지금의 용어는 더 포괄적이다. 예컨대 W. I.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양 극단 사이에 있는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물자체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를 '불가지론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헉슬리에 따르면, 불가지론의 본질은 어떤 분야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고백이 아니다. 불가지론이란 "교의가 아니라 방법"이며, 그 본질은 이성이 이끌 수 있을 때까지 이성에 따라 최선의 지식을 얻고 그뒤에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기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헉슬리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불가지론자는 모른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논쟁가들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 구분에 따르면 불가지론이 실천적 목적에서 무신론과 똑같은 것이 된다고 비판했다. 특히 엥겔스는 헉슬리와 그 동료들을 "수줍어하는 무신론자들"로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많은 불가지론자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한편 불가지론은 회의론과 다르다. 회의론은 경험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모든 지식에 도전하고, 따라서 과학의 성과와 가능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지만, 불가지론은 양립할 수 있다.
또 종교적 불가지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모순적이지 않으려면 종교적 불가지론은 불가지론의 원리를 받아들이되 최소한 몇 가지 교리는 확실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헉슬리 자신은 종교적 불가지론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불가지론과 그리스도교 Agnosticism and Christianity〉(1889)에서 그는 불가지론과 양립할 수 없는 '과학적 신학'과 '교권주의'를 대비한다. 그가 교권주의자에게 갖는 불만은 그들이 "어떤 명제의 증거에 대한 엄격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명제를 믿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배경
세속적·무신론적 불가지론의 선구자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원천은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이다.
사상가들에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헉슬리가 인식의 한계 속에는 일반적인 긍정적 자연신학이나 특별한 계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은 흄의 비판을 받아들인 셈이다.
흄의 비판은 〈인간 오성론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초판 1748)·〈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1779)에서 이루어졌다. 흄은 경험주의의 기본 주장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실과 실재적인 존재"는 선천적으로 알 수 없으며, 특히 어떤 사물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의 원인일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원인일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설계논증(우주의 구조·질서, 구성요소는 설계와 설계자를 함축함)을 빼놓고는 고전적인 신의 존재 증명을 모두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흄에 따르면, 여기서도 경험에서 출발한 논증은 지지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결과와 원인으로 추정되는 전우주와 신은 본질적으로 유일하고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후 흄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인간이 알아낸 질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주 자체가 원인이지 어떤 외부 원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기적에 호소해서는 신의 계시에 관한 주장이 참임을 확립할 수 없다고 논증했다. 이후 유럽 역사에 비추어볼 때, 흄의 태도는 칸트처럼 이 영역에 대한 지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태도는 그저 모른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태도보다 훨씬 강한 불가지론이다.
오컴(William of Ockham), 오트르쿠르의 니콜라 등 스콜라 철학자들은 긍정적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 공격했으며, 흄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스콜라 철학). 한편 선천적 지식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흄의 주장은 오랜 전통을 지닌 부정신학과 비교할 수 있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신의 본성은 피조물의 이해를 너무 멀리 벗어나 있으므로 신은 무한하다, 비교할 수 없다는 등 대략적·간접적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가령 13세기 최고의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불가지론의 계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유적 술어원리를 통해 어떻게 유한한 피조물이 신에 관해서 긍정적인 점을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반면 12세기 철학자 모제스 마이모니데스는 창조주에 관해서는 부정문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이 자기모순은 아니지만, 종교적 관심사와 불가지론적 관심사를 조화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종교에는 형이상학적 내용이 전혀 없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쉬운 방법은 어떤 대상을 숭배하는 것과 그 대상이 지닌 속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의 결함은 스펜서가 지적했듯이, 있다는 점 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긍정하는 것은 그 어떤 존재도 긍정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의 본질 또는 내적 본성과 신과 창조의 외적 관계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신의 내적 본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보잘 것 없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지만 신과 창조의 외적 관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불가지론자가 되어야 한다.
신앙주의와 불가지론의 양립 불가능
인간인식의 한계를 근거로 전혀 증거가 없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떤 방식으로도 헉슬리의 불가지론과 양립할 수 없다. 가령 5세기에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주의가 계시만으로도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작이 재발견되자 회의주의는 신앙주의로 가는 예비과정이 되었다.
신앙주의란 종교의 진리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러한 태도는 마르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조심스런 불가지론을 반박할 때도 드러난다.
"신성한 정신의 소유자는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이렇듯 합리적인 근거를 갖지 않은 신앙으로 도피하는 데 결정적으로 반박한 사람이
17세기 영국 경험론자 존 로크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의 어떤 계시가 참인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그래야만 신앙은 동의하고 확신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원리로서, 의심하거나 망설일 여지가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 신앙이 신의 계시이고 우리가 그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광신의 방종과 잘못된 원리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인간 오성론〉 4권 16장 14) 이러한 태도는 많은 사상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불가지론 원리에 대한 반박
불가지론과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을 증거도 없이 계산적으로 믿는 태도이다.
가령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이른바 노름 논증을 통해서 건전한 노름은 단 하나,
가톨릭교에 내기를 거는 것뿐인데,
그 이유는 잃을 것은 짧은 목숨뿐이고 얻을 것은 영생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스칼에게 영감을 받은 윌리엄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에서 불가지론 원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격한다.
제임스는 증거가 없을 경우 선택은 당사자의 정서적 기질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