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厥貢・土貢・土産 항목의 검토를 중심으로-
蘇 淳 圭**
Ⅰ. 머리말 Ⅱ. 이원적인 공물 항목 구성의 의미와 내용 Ⅲ. 항목 재구성을 통해 본 조선초 공물 분정의 양상과 특성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조선의 건국 과정은 국가 기반 제도의 개혁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한 국가 제도의 개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재정 및 수취구조의 개혁이었다. 고려 말 正稅인 租・布・ 役 외에도 늘어난 常徭와 雜貢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 세력은 이러한 상요・잡공을 없애는 것 이 아니라, 이를 국가의 정식 세제인 貢物로 제도화하였다.1) 전세 및
* 이 논문은 2011년도 BK21 고려대학교 한국사학 교육연구단 연구지원비에 의 하여 연구되었음.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1) 三峰集 卷7, 「朝鮮經國典」 賦典. 한편 고려시기 수취제도와 관련된 주요 연 구성과로는 아래를 참조. 姜晉哲, 1980, 「農民의 負擔」 高麗土地制度史硏究, 고려대학교출판부 李惠玉, 1980, 「高麗時代 貢賦制의 一硏究」 韓國史硏究 31 38 韓國史硏究(161)
身貢등과 달리 과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제도 자체의 약점을 가진 공물 수취가 국가의 정식 세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상업에 대한 억제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의 정책방향에서 민간 유통을 전제 하지 않아도 원활한 재정 운영이 가능하다는 공물의 장점이 큰 영향 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건국 후 공물 수취 운영의 기본 방향은 공물의 제도적 약 점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물품의 산지와 공물 분정 지역의 일치(任土作貢), 군현 단위에서 토지와 민호의 수를 참작한 공물 분정의 권장, 생산 뿐 아니라 수송 여건과 같은 입지를 고려한 공물 분정 등이 그 세부적인 내용이었다. 물론 그러한 고민의 와중에 는 국가의 재정적 수요, 産地의 불균등성에 대한 방안 등의 현실적 문제들도 최대한 고려되었다. 따라서 당시 전국에 걸쳐 공물 분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피는 일은 그러한 고민이 구체적으로 어떻 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조선 전기의 수취 제도에 대한 연구는 그 양과 질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중 공물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는 195 0~60년대 田川孝三에 의해 이루어졌다.2) 田川孝三은 대동법 성립 이전의 공물 및 진상물 수취 제도, 공물의 대납 및 방납 문제, 공안과 횡간의 내용 등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진행하여 이 분야의 선구적
朴鍾進, 1993, 「高麗時期 貢物의 收取構造」 蔚山史學 6; 1995, 고려시기 재 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학교출판부, 1~11쪽; 2004, 「고려시기 조세제도 연구의 쟁점과 과제」 蔚山史學 11 이정희, 1992, 「고려후기 수취체제의 변화에 대한 일고찰-상요(常徭)・잡공 (雜貢)을 중심으로-」 부산사학 22 朴道植, 1995, 「朝鮮前期 貢納制 硏究」, 경희대학교박사학위논문, 8~33쪽; 2012, 「Ⅰ. 고려시대 공납제의 추이」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21~44쪽 이들 연구에서 상요・잡공의 발생 시기나 특성 등에는 각 연구자들마다 의견 차이가 있으나, 이들을 正稅 외에 부가적으로 수취되는 세제란 점에는 대체적 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1956년 이래 발표된 田川孝三의 공물 관련 논고들은 田川孝三, 1964, 李朝貢 納制の硏究, 東洋文庫에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39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공물 분정의 자의성만을 강조하고, 대납・방납 을 제도적 해이란 시각에서만 조명하여 전반적으로 조선의 공물제도 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는데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한계가 있었 다. 오히려 공물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 즉 田川孝三 본인이 지 적한 제도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15-16세기 조선에서 공물수취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을 진행하 지는 못하였다. 80년대 이후부터 이러한 田川孝三의 연구를 발전적으로 계승・수 정하고 한편으로는 문제의식 자체에 대한 비판을 동반한 연구들이 이어졌다. 우선 공물 분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물 수취의 기반이 되는 토지 및 인정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지고 난 후 이와 연동하여 공물 분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성종대 이후는 8결작공제가 도입됨으로서 공물 수취가 제도적 합리성을 갖추게 되 었다는 연구 성과가 제시되었다.3) 나아가 田川孝三이 주목하였던 不 産貢物이 본래 조선정부가 의도하였던 것이 아니며, 조선의 공안 작 성에서 任土作貢의 원리는 비교적 철저하게 지켜졌다는 견해도 제출 되었다.4) 또 16세기 일기 자료를 근거로 성주 군현 내에서 각 민호 로 공물이 어떻게 분정되었는가를 추적한 연구도 있었다.5) 한편 공 물대납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상이란 시각에서 살펴본 성과,6) 16~ 17세기 공물 수취의 개혁안을 살펴보고 이를 대동법과의 연관선상에 서 고려한 연구들도 제출되었다.7) 그 외에도 전세공물에 대한 연 구,8) 세조대 이루어졌던 공물대납 허용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연
3) 朴道植, 1995, 앞 논문; 2012, 앞 책, 혜안 4) 김동진, 2009, 「조선초기 土産물 변동과 공안 개정의 추이」 조선시대사학보 50 5) 이성임, 2009,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분정과 수취-경상도 성주를 대상으 로-」 역사와 현실 72 6) 이지원, 1990, 「16~17세기 전반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 李載 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李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7) 高錫珪, 1985, 「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 韓國史論 12 박현순, 1997, 「16~17세기 貢納制 운영의 변화」 韓國史論 38 8) 강제훈, 1998, 「조선초기의 전세공물」 역사학보 158 40 韓國史硏究(161)
구9), 별진상물의 수합과 상납과정에 대해 추적한 연구10)등, 공물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11) 이상의 연구들을 통해 조선 전기 공물 수취의 전반에 대한 윤곽은 어느 정도 선명해 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물 수취와 관련하여 가 장 기본적인 사항, 즉 어느 군현에 어떠한 공물들이 분정되었으며, 이러한 공물 분정을 전국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았을 때 도출할 수 있 는 조선시대 공물 분정의 특징은 어떠한 점인지에 대해선 아직 연구 가 미진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이 왜 공물수취를 제도 화하였는가, 분정된 공물이 해당 지역의 실제 산물인가 등의 문제와 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15세기 전국의 공물 분정이 실제 어 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물 론 이러한 접근은 당시 공물 분정의 1차적 자료인 貢案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자료적 제약이 상당히 따르는 문제이다. 이에 본고에서 는 현존하는 세종실록 지리지(이하 실지)의 물산항목을 적극 활 용하고자 한다. 이미 선행연구들도 실지의 물산 항목이 공물 수취 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독특하게 구성된 실지의 물산항목 특히 공물 관련 항목의 구성방식을 완전하게 이 해하지 못함으로서 이를 토대로 전체적인 공물 분정의 실제상을 밝 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물론 실지의 공물 관련 항목의 구성 에 대해 밝힌 선행연구들12)이 있으나, 실제 실지의 물산항목과 연
朴道植, 2004, 「朝鮮前期 田稅條貢物 硏究」 人文學硏究 8, 關東大學校 9) 강제훈, 2006, 「조선 세조대 공물대납정책」 조선시대사학보 36 10) 최주희, 2012, 「15~16세기 別進上의 상납과 운영-강원・경상지역 사례를 중 심으로-」 한국사학보 46 11) 이외에도 공물 관련 연구 성과들은 다음을 들 수 있다. 金鎭鳳, 1973, 「朝鮮初期의 貢物代納制」 史學硏究 22 허종옥, 1984, 「조선초기 집권적 봉건국가 권력의 물질적 기초에 관한 고찰 Ⅱ -조선초기 공물제를 중심으로-」 사회과학논총 3-1, 부산대학교 金鍾哲, 1987, 「朝鮮前期의 賦役制・貢納制 硏究成果와 「국사」敎科書의 敍述」 歷史敎育 42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41
구가 밝힌 항목 구성의 원칙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13), 또 실지 에서 밝히고 있는 편집원칙을 오류로 이해함으로서 자료 자체를 온 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14) 따라서 본고는 우선 실지의 공물관련 항목, 구체적으로는 도 총 론의 厥貢 항목과 각 군현의 土貢・土産 항목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근거로 조선의 전국적 공물 분정의 양상을 복원해 보 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이러한 공물 분정의 양상에서 살필 수 있는 15세기 조선 수취의 특징적 모습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이원적인 공물 항목 구성의 의미와 내용 1. 도 총론 厥貢 항목의 구성 방식 주지하다시피 실지는 세종 14년에 맹사성, 윤회가 만들어 올린 팔도지리지와 동일한 것이다.15) 세종 사후 세종실록 작성과정에 서 팔도지리지가 지리지의 형식으로 말미에 추가되었는데, 다만 함길도 6진지역의 내용은 실록 작성 당시의 정보를 첨부하여 작성하 12) 金東洙, 1991, 「세종실록 지리지의 연구-특히 物産・戶口・軍丁・墾田・姓氏項 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3, 「世宗實錄地理志 産物項 檢討」 歷史學硏究 12 이기봉, 2003, 「朝鮮時代 全國地理志의 生産物 項目에 대한 檢討」 문화역사 지리 15-3 13) 이기봉, 위 논문. 이기봉은 실지 의 물산항목의 구성 원칙을 7년 전에 편찬 되었던 경상도지리지의 원칙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실제 실지 의 물산항목을 살펴보면 그가 제시한 원칙과 맞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본문 Ⅱ장의 2절에서 상론한다. 14) 김동수, 1991, 앞 논문. 이에 대해서는 본문 Ⅱ장에서 상술하도록 하겠다. 15) 世宗實錄 권55, 14년 1월 己卯 “領春秋館事孟思誠 監館事權軫同知館事尹淮 申檣等 進新撰八道地理志 上曰 予將覽焉” 한편 세종 14년의 팔도지리지가 현존하는 실지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은 정두희가 자세히 논증한 바 있다(鄭 杜熙, 1976, 「朝鮮初期 地理志의 編纂(Ⅰ)・(Ⅱ)」 歷史學報 69‧70). 42 韓國史硏究(161) 였다. 즉 실지의 여타 지역은 세종 14년 당시 정보를, 함길도 6진 지역은 실록 편찬 기간이었던 문종 2년부터 단종 2년 당시의 내용16) 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실지에 실린 각 군현의 정보는 해당 지역의 연혁에서부터 행정・ 군사・경제와 관련되는 항목들이었다. 이것은 사회・문화 관련 항목이 압도적인 東國輿地勝覽이나 16세기의 私撰邑誌들의 내용과는 매 우 다른 것으로서17), 국초 통치체제의 확립과 안정적 운영이라는 과 제가 지리지 편찬에 큰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본고 의 주제가 되는 물산 관련 항목은 道 총론의 厥賦・厥貢・藥材・種養藥 材 항목과 郡縣 단위의 土宜・土貢・土産・藥材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 는데, 이것 역시 東國輿地勝覽 이후에는 土産 하나의 항목으로 단 일화되어 간 것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실지의 물산항목은 그 항목 명칭에서부터 ‘賦’, ‘貢’와 같은 어휘 를 사용하여 수취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선행연 구에서는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수취와 관련하여 각 항목의 특성을 심도 있게 고찰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김동수의 연구 성과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실지 도 총론의 厥賦 항목은 해당 도의 田稅수취물을 기록한 것이고, 그와 관련되는 각 군현의 土宜 항목은 해당 군현의 토질에 적합한 경작물을 기록한 것이었다. 약재 및 종양 약재는 각 도와 군현에서 수취하는 약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기소, 도기소, 어량 등과 같이 특정 물산의 명칭이 붙은 시설들은 해당 물 품의 생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18) 이러한 이해는 대체로 정확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공물수취와 16) 세종실록 부록 “景泰三年壬申三月 春秋館受命始撰 景泰五年甲戌三月畢” 17) (신증)동국여지승람 및 16세기 사찬읍지들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 참조. 李泰鎭, 1979, 「東國輿地勝覽編纂의 歷史的 性格」 震檀學報 46‧47合集 楊普景, 1983, 「16~17世紀 邑誌의 編纂背景과 그 性格」 地理學 27 徐仁源, 2002, 朝鮮初期 地理志 硏究-東國輿地勝覽을 중심으로-, 혜안 18) 김동수, 1991, 앞 논문, 54~85쪽; 1993, 앞 논문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43 관련이 있다고 보이는 도 총론의 厥貢 항목 및 각 군현의 土貢 및 土 産 항목에 대한 선행 연구의 지적은 다소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즉 김동수는 土貢 항목은 각 군현의 공물이며, 土産 항목은 해당 지 역의 土産품 중 경작 작물을 제외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厥貢 항목 은 도내의 공물을 모두 총합해 놓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 자 신이 도 총론의 厥貢 항목이 각 군현의 土貢 항목의 총합과 같지 않 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때문에 실지의 공물 관련 항목을 다소 불철 저한 기록으로 평가하였다.19) 한편 조선시대 지리지의 물산 항목만을 다룬 이기봉의 연구에서는 실지의 土貢 항목을 각 지역의 공물로, 土産 항목은 金・銀・銅・鐵・ 珠玉・鉛・錫・篠・簜・藥材・磁器・陶器 등의 물산을 기록한 것으로 보았 다.20) 이는 실지보다 약 7년 전에 작성된 경상도지리지의 서술 규식에서 착안한 것이다.21) 물론 두 지리지간의 유사성은 충분히 인 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22) 적어도 물산 항목에 관해서 살펴본다면 19) 김동수, 1991, 위 논문, 65~68쪽. 김동수는 실지 각 도 총론의 약재・厥貢 항 목 아래에 주기된 서술 규칙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이 不 産貢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설사 불산공물의 관련성 을 이해하더라도 이 두 항목의 연계성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으며, 특히 厥貢 항목에만 존재하고 土貢항목에는 존재하는 물산들이 오히려 자원 자체의 분 포가 넓은 자원들이란 점, 다시 말해 김동수가 불산공물일 것으로 언급한 물 산들이 오히려 지역과 관계없이 구하기 쉬운 물산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서 이러한 견해는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의 이하 내용에서 상술한다. 20) 이기봉, 2003, 앞 논문, 4쪽 21) 慶尙道地理志 慶州府, 安東大都護府, 尙州牧官, 晉州牧官 “依例卜定貢賦某 某物 其土所産某某物是如施行爲乎矣 土産金銀銅鐵珠玉鉛錫篠簜藥材磁器陶器 其土所宜耕種雜物 幷以詳悉施行事” 이기봉은 이 자료의 해석에 있어, 앞의 其 土所産은 土宜・土貢을 포괄하는 용어이고, 뒤의 土産은 실지의 土産 항목으 로 계승된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라 土産 항목은 金銀銅鐵珠玉鉛錫篠簜藥材 磁器陶器 등을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실제 항목을 검토해보면 필자가 언급한 물산 외에도 다양한 품목들이 土産 항 목에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 Ⅱ장 2절 참조. 22) 두 지리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鄭杜熙, 1976, 「朝鮮初期 地理志의 編纂(Ⅰ)」 44 韓國史硏究(161) ...厥貢 범가죽[虎皮], 표범가죽[豹皮], 곰가죽[熊皮], 여우가죽[狐皮], 삵괭이가죽[狸皮], 노루[獐], 사슴[鹿], 소[牛], 말[馬], 산수달피(山水獺皮), 표범꼬리[豹尾], 범꼬리[虎尾], 곰털[熊毛], 족제비털[黃毛], 돼지털[猪毛], 잡깃[雜羽], 수멧돼지[雄猪], 말린사슴고기[乾鹿], 말린노루고기[乾獐], 말린돼지고기[乾猪], 사다새[天鵝], 포육(脯肉), 쇠뿔[牛角肋], 사슴젓[鹿醢], 토끼젓[兎醢], 가뢰[班猫], 홍어(紅魚), 큰새우[大蝦], 말린숭어[乾水魚], 상어[沙魚], 어교(魚膠), 칠(漆), 먹[墨], 주토(朱土), 밤[黃栗], 마름[菱仁], 가시연밥[芡仁], 개암[榛子], 말린포도[乾葡萄], 오미자(五味子), 조피나무열매[川椒], 호도(胡桃), 배[梨], 연감[紅柿], 참가사리[細毛], 황각(黃角), 청각(靑角), 석이[石茸], 느타리[眞茸], 싸리버섯[鳥足茸], 소나무그을음[松煙], 송화(松花), 송진[松脂], 세겹줄[三股縄], 두겹줄[兩股縄], 마의(馬衣), 목화[綿花], 모시[苧], 삼[麻], 각색종이[各色紙], 유둔(油芚), 왕골자리[莞席], 돗자리[草席], 소쿠리[簞], 각색빗자루[各色尾帚], 자기(磁器), 도기(陶器), 각색나무그릇[木器], 고리[柳器], 자단향(紫檀香), 백단향(白檀香), 애끼찌[弓幹木], 나무활[木弓], 자작나무[自作木], 장작개비[燒木], 영선용큰목재[營繕大木], 서까래[椽木], 잣나무[栢木], 황양목(黃楊木), 대추나무[棗木], 피나무[椵木], 가래나무[楸木], 넓은널목재[廣板大中木], 피나무널[椵板], 잣나무널[栢板], 해죽(海竹), 잉읍박선(仍邑朴船), 숯[炭], 시우쇠[正鐵]. : 꿀[蜂蜜], 밀[黃蠟], 석이[石茸], 칠(漆), 지초[芝草], 느타리[眞茸], 주토(朱土), 돼지털[猪毛], 족제비털[黃毛], 종이[紙]...土産: 모과[木爪], 신감초(辛甘草), 송이[松茸]. <표 1> 충청도 도 총론의 厥貢 항목 및 충청도 충주목의 土貢・土産 항목 두 지리지의 차이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그가 제시 한 土産 항목의 구체적 물품들이 실제 실지 土産 항목의 내용과 맞지 않는 것이 많으며, 더 중요하게는 도 총론의 厥貢 항목과 군현 의 土貢 항목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아 자료의 성격 이해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이해의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실지의 공물 관련 항목들이 도 수준의 기록과 군현 수준의 기록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소 장황한 감이 있으나, 실제 실지에 기재된 물산 항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 1>은 각각 도 총론의 궐공 항목과 군현의 土貢・土産 항 歷史學報 69, 70~78쪽 참조.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45 목의 기재양상을 예시한 것이다. 위의 물산 항목의 예시에서도 보듯 이 실지의 각 항목은 어떠한 물산을 기록한 것인지 정확한 규식이 생략되어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한 도 내의 군현들에 기재된 土貢과 土産 물종을 모두 종합해도 도 총론의 물종 수에 비하여 턱 없이 적은 수가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도 총론의 厥貢 항목 과 각 군현의 土貢・土産 항목의 관계를 파악하기에 심각한 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위에 예시로 든 충청도의 경우, 도 총론 厥貢 항목에 총 89종의 물종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중 각 군현의 土貢・土産에 다 시 기재되어 있는 경우는 39종에 불과하다. 이처럼 중복되는 물종과 그렇지 않은 물종의 차이는 무엇이며, 또 중복되어 기재되지 않은 물 종들은 어떻게 공물로 수취된 것일까? 이에 대한 중요한 추론의 근거를 실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도 총론 厥貢 항목에 붙어있는 아래와 같은 세주내용이다. 이 세주는 선행연구에서도 주목하였던 것인데, 필자는 선행연구와는 그 해석을 달리하므로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인용한다. A- 원문: 已上雜貢及藥材 今將土産稀貴者 錄于各邑之下 其每邑所産 但 存其凡于此 不復錄云 A- 번역: 이상 雜貢 및 藥材는 지금 土産으로 희귀한 것을 가지고 각 읍의 아래에(각 군현 항목에: 필자) 기록하고 매 읍에서 생산되는 것은 다만 그 대체를 여기에 기록하고 (각 군현마다: 필자) 다시 기 록하지 않는다.23) 선행연구에서는 이 언급을 ‘이상의 잡공 및 약재는 土産稀貴者를 각 읍의 아래에 기록한다. 읍마다의 소산은 단지 이곳에 범례로만 기 록하고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24) 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에서 는 厥貢의 물산들은 읍마다의 소산으로서 범례에 해당하고, 각 군현 의 土産稀貴者는 각 군현의 土貢 및 土産 항목에 대응되게 된다. 따 23) 世宗實錄 地理志, 京畿・慶尙道・黃海道・平安道・咸吉道 總論 24) 김동수, 1991, 앞 논문, 65~66쪽 46 韓國史硏究(161) 라서 규식대로라면 도 총론과 각 군현 물산은 중복되면 안 될 것이 다. 그런데 실제로는 각 군현의 土貢 및 土産 항목 물산의 상당수가 厥貢 항목과 중복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라 선행연구에서 는 이 규식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신뢰할 수 없 는 규식이 不産貢物의 존재 때문에 생긴 것으로 파악하였다.25) 그러 나 不産貢物의 존재가 정확히 어떻게 실지의 물산 항목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논증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A의 원문을 살펴보면 문장의 주어는 ‘已上雜貢及藥材’ 로 설정되어 있다. 즉, ‘이상의 공물 및 약재들은’ 이란 주어에 따라 ‘이 러이러한 조건의 것들은 이렇게 한다’는 서술의 패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에 제시한 A-번역에서처럼 해석하게 되면, 본 래 厥貢 항목 자체가 ‘土産희귀자+매읍소산’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 한다. 따라서 厥貢 항목은 도 내의 모든 물종을 포괄하는 범위가 되 고, 각 고을마다 기재되어 있는 것은 세주에서 밝힌 ‘土産稀貴者’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각 군현과 중복되지 않는 물산은 다만 厥貢 항 목에 범례로 소개되는 ‘每邑所産’ 에 대칭되게 된다. 각 도 총론의 厥貢 물종들을 도 내 군현의 土貢 및 土産과의 중복 여부를 살펴 이를 매읍소산과 土産稀貴者로 분류해 보면 다음의 표 와 같다. 도 총론의 厥貢 물종들이 그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중 ‘每邑所産’ 이란 것이 실제로 모든 읍에서 나는 물산인가의 여부 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소위 ‘每邑所産’의 물종 특성을 살펴 보면 어떠한 물종은 세주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매 고을마다 생산이 가능한 물종이지만, 어떠한 물종은 원료 자체의 제약으로 인해 모든 고을에서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매읍소산으로 분류된 물종 중 海産物의 경우는 연해군현이 아닌 경우 자체적인 생산이 불 가능하게 되어 있다.26) 25) 김동수, 위 논문, 66쪽; 1993, 앞 논문 26) 물론, 당시 군현은 내륙고을이라 하더라도 비입지나 월경지 등의 형태로 바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47 경기 강원 충청 황해 경상 전라 평안 함경 厥貢 전체 물종 51 91 89 83 78 114 44 26 土貢・土産과 중복 되지 않는 물종 37 (73%) 47 (52%) 50 (56%) 46 (55%) 34 (43%) 48 (42%) 19 (43%) 3 (12%) 중복 되는 물종 14 (27%) 44 (48%) 39 (39%) 37 (45%) 44 (57%) 66 (58%) 25 (57%) 23 (88%) <표 2> 각 도 총론 厥貢 물종들과 군현 土貢・土産 중복율 따라서 이 세주에서 언급하는 ‘産’이란 의미는 단순히 지역에서 나 는 물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염두에 두 어야 할 것은 실지 물산 항목이 ‘貢’ 이란 용어로 쓰여 있으며, 각 항목의 물산들은 공물 수취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 매읍에서 생산되는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매읍에서 수취되는가의 여부도 ‘每邑所産’ 이란 용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 즉, 실제 도내 모든 군현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물산이라 하더 라도 그 생산과 수취에서 모든 군현이 참여하게 되는 경우에는 이들 을 ‘每邑所産’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장 큰 예로, 수취단위 가 ‘道’ 단위로 이루어지는 진상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즉, 각 군현단위까지 분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 단위에서 생산・납입 하는 물산의 경우 이념상 모든 군현에서 부담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每邑所産’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每邑所産’ 에는 어떠한 물산들이 분정되는지 그 구 체적인 예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위의 표는 충청도의 도 총론 厥貢 항목 중에서 土産稀貴者로 각 와 접해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모든 내륙고을들이 그러한 조건을 구비하 고 있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비입지 및 월경지의 형태와 그 특성을 조선 전 기 군현제의 정비 과정에서 살핀 연구로는 李樹建, 1989, 朝鮮時代 地方行政 史, 民音社 참조. 48 韓國史硏究(161) 종류 물종 동물 곰가죽[熊皮],소[牛], 말[馬],범꼬리[虎尾], 수멧돼지[雄猪], 말린사슴고기[乾鹿], 말린노루고기[乾獐], 말린돼지고기[乾猪], 사다새[天鵝], 포육(脯肉), 쇠뿔[牛角肋], 사슴젓[鹿醢], 토끼젓[兎醢], 가뢰[班猫] 해산물 청각(靑角) 농산, 임산물 마름[菱仁], 가시연밥[芡仁], 개암[榛子], 오미자(五味子),소나무그을음[松煙], 송진[松脂], 목화[綿花], 말린포도[乾葡萄] 목재류 활대나무[弓幹木], 나무활[木弓], 자작나무[自作木], 장작개비[燒木], 영선용큰목재[營繕大木], 서까래[椽木], 잣나무[栢木], 황양목(黃楊木), 대추나무[棗木], 피나무[椵木], 가래나무[楸木], 넓은널목재[廣板大中木], 피나무널[椵板], 잣나무널[栢板] 수공품 각색나무그릇[木器], 각색유기[各色柳器], 세겹줄[三股縄], 두겹줄[兩股縄], 소쿠리[簞], 빗자루[尾帚], 마의(馬衣), 잉읍박선(仍邑朴船) 기타 자단향(紫檀香), 백단향(白檀香), 숯[炭], 유둔(油芚), 해죽(海竹) <표 3> 충청도의 매읍소산물 군현에 다시 기록된 물산들을 제외한, 다시 말해 각 군현 土貢 및 土 産 항목과 중복되는 물산들을 제외하고 순수히 厥貢 항목에만 기록 된 물산들을 각 물종의 특징별로 범주화하여 제시한 것이다. 본래 충 청도 도 총론에는 모두 89종의 물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군현 의 물산과 중복되지 않는 매읍소산의 물종은 총 50종으로 약 56%의 비율이다. 위의 표에서 살펴보듯이 우선 임산물, 목재류, 수공업품 등의 물종 과 기타의 숯[炭], 유둔(油芚) 등의 물종은 앞서 살펴본 매읍소산의 본래 의미에 부합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물종이 한반도 전반에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고, 이들 물종을 가 지고 1차적인 가공을 거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소나무를 통 해 채취하는 松烟, 松脂 같은 물종이나, 재료의 구득보다는 가공이 중 요한 숯[炭], 유둔(油芚), 각색나무그릇[木器], 각색유기[各色柳器], 세겹줄[三股縄], 두겹줄[兩股縄], 소쿠리[簞], 빗자루[尾帚] 등의 물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49 종은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러한 물종들은 도내 각 군현에 광범위하게 공물로 분정되고 상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검토해 볼 것은 해산물류이다. 이들 해산물들은 물산의 소재가 바다라는 제약사항이 있기 때문에 각 군현에서 모두 생산 가 능한 물종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 물종의 생산 및 수 취관계에서 이들이 매읍소산으로 분류될 가능성을 찾아보도록 하겠 다. 아래의 기사를 참조해보자. B-1. 도관찰사 朴訔이 아뢰기를, “각도의 海道萬戶가 선군을 役使시켜 屯田하고, 藿을 따고 물고기를 잡으니, 거두는 이익은 매우 적은데 … 이를 혁파함이 진실로 편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27) B-2. 상기 兩道(경상우도와 전라좌도: 필자)의 각 포에 배정한 進上과 각 관아의 貢物 중에서 타도의 각 고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를 모두 다른 도로 옮기게 하고, 屯田과 製鹽, 捕魚 등의 일들도 각기 인근 고을에서 이 일을 하게 하며, 그 나머지 雜 役도 일체 면제하여 항상 적을 본 것 같은 태세로 의외의 사변에 대비하게 하십시오28) B-3. … 戶典에 여러 鎭・浦의 屯田과 공납하는 魚鹽의 숫자를 기재하도 록 하여 호조에서 그 많고 적은 숫자를 따져서 상을 주고 벌을 주 는데 … 29) 위의 기사들의 내용은 실지 편찬을 전후한 시기 해산물을 수급 27) 太宗實錄 권11, 6년 4월 20일 庚辰 “全羅道都觀察使朴訔啓曰 各道海道萬戶 役使船軍 屯田採藿捕魚 收利甚微 而終日勤動 至夜困睡 不能警備 多致失守 罷 之實便 從之” 28) 世宗實錄 권67, 17년 3월 12일 甲申 “兵曹啓 慶尙右道全羅左道 倭寇初面防 禦最緊之地 近年以來 昇平日久 邊警無虞 各浦徭役甚多 只定守船人 常泊空船 儻有緩急 不及應變 實爲危急 上項兩道各浦所定進上及各司貢物 他道各官不産 之物外 竝移他道 其屯田及燔鹽捉魚等事 各於旁近處爲之 其餘雜役 一皆蠲免 常如見敵以備不虞 從之” 29) 世祖實錄 권34, 10년 8월 1일 壬午 “戶典載諸鎭浦屯田魚鹽之數 戶曹第其多 寡賞罰 然不明言幾石可賞 幾石可罰 故一不擧行 殊非立法勸懲之意 自今據諸鎭 浦屯田魚鹽所出多寡 分爲三等 其上等處 幾石以上論賞 幾石以下論罰 其中下等 處 亦遞降定數 以爲賞罰” 50 韓國史硏究(161)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수군이 주둔한 鎭・浦의 역할을 언급하고 있 다. 앞의 B-1 기사는 이러한 해산물 채취가 결국 해안방어 역할을 소 홀히 하는 주된 요인이므로 이를 혁파하자는 논의인데, 이후 세조대 에도 B-3와 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시적인 혁파 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의 기사인 B-2에서도 경상 우도 및 전라좌도의 각 포에서 어염채취 및 둔전 경영이 있던 것으 로 보이며 이를 인근지역에 옮겨 배정하여 경비 임무에 전념하도록 하자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실지 편찬을 전후한 시기 조선의 해산물 수급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수군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수군들 이 주둔하는 鎭・浦는 각 군현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고 萬戶・千戶 등 이 주둔하면서 각 도의 수군절제사의 통제를 받았다.30) 다시 말하면 이들 鎭・浦에서 채취・상납하는 해산물들은 각 도 단위로 편제될 수 는 있으나 군현 단위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앞에서 확인한 도 단위 매읍소산물에 해산물들이 분정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鎭・浦에서 생산된 물종들이며, 이는 결국 매 군현마다 생산된다는 의미가 아닌, 도 단위에서 채취 상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매읍소산으로 분류되는 동물류는 위의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진 것으로 보인다. 즉 소[牛], 말[馬]와 같은 가축류는 해당 도내 어느 군현에서도 길러서 공물로 상납이 가능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곰 [熊]・호랑이[虎]・멧돼지[猪]・사슴[鹿]・노루[獐]・사다새[天鵝] 등과 같은 야생동물은 대부분 진상물로 많이 언급되는 물종들이었는데, 이들 진상물을 마련하기 위한 사냥은 본래 관찰사 및 병마절도사 등 도 단위 군사지휘관들이 휘하 병력으로 직접 사냥하거나 혹은 함정 등을 활용하여 잡도록 되어 있었다. 간혹 이들이 군현 단위로 분정되 30) 조선 초기의 수군 편제 및 수군들의 어염채취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 참조. 李載龒, 1970, 「朝鮮 前期의 水軍-軍役關係를 中心으로-」 韓國史硏究 5 方相鉉, 1983, 「朝鮮前期 水軍 軍役考」 慶熙史學 11 崔永昌, 1989, 「朝鮮初期의 水軍과 水軍役」, 高麗大學校碩士學位論文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51 어 상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럴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납입주체 는 관찰사 및 병마도절제사와 같은 도 단위의 책임자였다. C-1. 병조에서 계하기를, “각도 도절제사가 진상하는 것과 국가에서 소 용하는 돼지와 사슴을 포획할 때, 軍營에 가까운 각 고을 군관을 거느리고 간다는 법은 여러 등록을 상고하여 보아도 기록된 곳이 없사오니, 이후로는 당번인 영 소속 군관을 몰고 가게 하고, 만약 부득이한 별다른 일이 있거든 군관의 수를 참작 요량하여 아뢰어 교지를 물어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31) C-2. … 外方에서 檻穽으로써 잡아서 上納하는 것이 이미 전의 법규가 있는데, 지금 그 값을 정하면 마땅히 公家에서 그 값을 주어야 하 니, 반드시 백성들에게 聚斂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 32) C-1의 기사는 진상용 멧돼지나 사슴 등을 마련하기 위해 병영에 서 직접 사냥에 나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C-2에서는 함정 등을 통해 진상용 동물을 포획하는 것이 법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도 단위 지휘관에 의해 마련되는 동물의 경우 그 부담주체는 道로 설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한 군현에 국한되는 부담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도 총론 厥貢 항목에 기재되었으나 각 군현에는 다시 기 록되지 않은 물종들 즉 소위 ‘每邑所産’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물종들은 두 가지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첫째로는 거의 모든 군현 에서 물종 자체나 혹은 물종의 원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서 그야말로 매 읍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두 번째로는 해당 물종이 도 단위의 부담일 경우, 즉 상납책임이 도 단위 행정・군사책임자에게 있 는 물종일 때 마찬가지로 ‘每邑所産’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31) 世宗實錄 권28, 7년 4월 8일 丁未 “兵曹啓 各道都節制使進上及國用猪鹿捕獲 時 近營各官軍官率行之法 考諸謄錄 無載錄處 今後以當番營屬軍官驅逐 如有不 得已別例事 則軍官之數 酌量啓聞 取旨施行” 32)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0월 10일 庚辰 “...外方以檻穽所捕上納 已有前規 今 定其價 則當公給其價, 必有聚斂於民之弊...” 52 韓國史硏究(161) <표 4-1> 토공 항목에만 기재된 물종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야 생 동 물 류 마른사슴 乾鹿 1 마른노루 乾獐 1 해 수산 물 마른조개 乾蛤 14 광어 廣魚3 사슴포 鹿脯5 산달가죽 山獺皮 7 도음어 都音魚 1 분곽 粉藿1 곰가죽 熊皮1 삵가죽 狸皮 46 어교 魚膠6 어피 魚皮 4 호랑이가죽 虎皮 2 여우가죽 狐皮 47 오해조 吾海曹 2 전복 全鮑9 멧돼지가죽 猪皮 2 사슴가죽 鹿皮 18 점찰피 占察皮 3 청어 靑魚 2 수달가죽 水獺皮 13 노루가죽 獐皮 56 홍합 紅蛤 4 멧돼지털 猪毛 11 竹 類 마른죽순 乾竹笋 2 가는 대 篠12 과 수 귤 橘 1 비자 榧子1 굵은 대 簜28 석류 石榴6 배 梨8 임 산 물 설면자 雪綿子 1 솔방울 松子 9 대추 棗7 호도 胡桃15 지초 芝草34 칠 漆56 油蜜벌꿀 蜂蜜 53 황랍 黃蠟53 표고버섯 蔈蒿 13 홍화 紅花2 <표 4> 경상도 군현들의 土貢・土産 물종 비교 2. 각 군현 土貢・土産 항목의 구성 방식 그렇다면 각 군현에 다시 기록된, ‘土産稀貴者’라고 하는 물종들은 어떠한 특성을 갖는 것인지 살펴보자. 이때에도 자료 해석의 어려움 이 따르는데, 바로 이 土産稀貴者란 물종들이 각 군현에서는 다시 土 貢과 土産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며, 이 항목들 역시 정확히 어떠한 물종들을 기록한 것인지 정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 서 이들 土貢 및 土産 항목도 서술된 구체적인 물종들을 비교・검토 하여 그 항목의 서술 규칙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표는 경상도 지역의 土貢과 土産 항목에 기재된 물종들을 정리한 것이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53 백단향 白檀香 1 인삼 人蔘4 수공 품 방석 方席1 자리 席16 자단향 紫檀香 1 대방석 竹皮方席 3 종이 紙47 기 타 바둑돌 黑白碁子 1 <표 4-2> 토산 항목에만 기재된 물종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물종 군현 수 광 물 뇌록 磊綠1 녹반 綠礬1 연동석 鉛銅石 1 동석 銅石1 백동 白銅1 마류석 瑪瑠石1 백토白土1 사철 沙鐵12 생철 生鐵1 석철 石鐵1 수철 水鐵1 철 鐵1 수정석 水晶石 1 여석 礪石1 경석 磬石1 은석 銀石2 해수 산물 모어 牟魚1 석화 石花1 연어 年魚2 잉어 鯉魚1 조곽 早藿1 해삼 海蔘4 임산 물 산개 山芥3 신감초 辛甘草11 <표 4-3> 토공・토산 항목 모두에 기재된 물종 물종 토공 기재 군현 토산 기재 군현 물종 토공 기재 군현 토산 기재 군현 물종 토공 기재 군현 토산 기재 군현 과수 류 감 柿3 2 홍시 紅柿1 1 임산 물 작설차 雀舌茶 6 2 석이버섯 石茸14 2 송이버섯 松茸16 13 입초 笠草1 3 느타리버섯眞 茸 1 2 죽류 죽순 竹笋2 1 해수 산물 대구어 大口魚 8 4 황어 黃魚1 2 문어 文魚5 3 방어 魴魚1 1 상어 沙魚14 1 생전복 生鮑4 3 銀口魚10 25 홍어 洪魚1 2 해의 海衣6 1 우뭇가사리 牛毛 8 4 곽 藿12 5 세모 細毛7 4 청각 靑角2 3 54 韓國史硏究(161) 우선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각 물종 자체가 가진 물 질적인 고유한 성격으로 인하여 土貢과 土産 항목이 나뉘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이다. 그 예로 기재된 土貢과 土産에 모두 기록된 물종은 총 21종에 달하고 있다(<표 4-3>). 이들 물종은 어떤 고을에서는 土 貢에, 어떤 고을에서는 土産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土貢에만 기재된 물종은 총 49종, 土産에만 기재된 물종은 총 24종에 달하고 있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던 선행연구들에서 土貢과 土産에 대한 해석은 두 개로 나뉜다. 즉 ①‘土貢은 군현의 공물을 기록한 것이고, 土産은 지역의 특산물을 기록하되 모든 물종을 망라한 것은 아니었다’33) ② ‘土貢은 土産貢物의 약자로 해당 지역의 공물을 기록한 것이고, 土産 은 일반적인 공물에 해당하지 않는 金・銀・銅・鐵・珠玉・鉛・錫・篠・簜・ 藥材・磁器・陶器에 해당하는 물종만이 기록된 것34) 이다’라는 두 가 지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①과 같이 해석할 경우, 각 군현의 공물이 많아야 10종 남 짓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되어 자연스럽지 못하고,35) 더구 33) 김동수, 1991, 앞 논문, 66쪽; 1993, 앞 논문 34) 이기봉, 2003, 앞 논문, 5쪽 35) 실지 상에서 각 군현의 土貢 항목의 평균 물종 수는 가장 많은 강원도가 평 균 17종 내외이며 가장 적은 경기도의 경우는 2종에 채 못 미치는 양상을 보 이고 있다. 만일 이것을 군현의 공물로 등치시킬 경우 한 군현의 공물 물종은 약 10여종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종 자료에 노출되어 있는 한 군현의 공물 수는 이것을 훨씬 상회하는 수치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다. 우선 실지 편찬을 전후한 세종 7년의 경기 공물 기사 및 14년의 함길 도 공물 기사를 검토해 보면 土貢 항목에는 기재되지 않고 厥貢 항목에만 기 재된 물종들이 각 군현의 공물로 언급되고 있으며( 世宗實錄 권29, 7년 8월 22일 戊子; 권58, 14년 10월 16일 辛丑), 역시 세종 7년 기사에서 등장하는 강원 도 회양부의 공물을 실지 강원도 회양부 물산 항목과 비교해 보면 공물 중 일부는 土貢 항목에, 일부는 厥貢 항목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世宗 實錄 권27, 7년 2월 20일 庚申). 한편으로 시간 차이가 있으나 16세기 지역의 공물 분정 상황을 잘 알려주는 평양지, 승평지, 탐라지 등의 자료들을 살 펴보면 한 고을에 분정된 공물 물종 수는 수십 여종에 달하고 있다(田川孝三, 1964, 앞 책, 42~47쪽).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처럼 土貢 항목을 군현의 공물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55 나 도 총론의 厥貢 항목과 土貢 항목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또한 둘 다 지역의 특산물의 성격을 갖 는다면 상당히 중복될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두 항목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②역시 마찬가지로 土貢 항 목을 군현 공물과 등치시킬 경우 한 군현의 공물을 10여종 안팎으로 파악하게 되는 오류가 있고,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金・銀・銅・鐵・ 珠玉・鉛・錫・篠・簜・藥材・磁器・陶器 외에도 상당히 많은 종류의 물종 이 土産 항목에 기재되어 있어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고 보인다. 도 총론의 厥貢 항목과 土貢 항목의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①의 연 구와 마찬가지이다. 그럼 위와 같은 선행 연구들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土貢 및 土産 항목이 정확히 어떠한 항목인지 추론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土貢 항 목에만 기재된 물종들의 특성을 살펴보자. 가장 많은 군현에 기재된 물종들을 열거하자면 獐皮(56), 狐皮(47), 狸皮(46), 漆(56), 蜂蜜(53), 黃蠟(53), 紙(47), 芝草(34) 등을 들 수 있다. 土貢 항목의 성격은 바 로 이들 물종이 어떠한 공통적 특성을 가지는지를 살펴보면 추론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들이 참고된다. D-1. 각관에 벌통을 설치한 것은 공물로 바치는 꿀에 대한 부담을 덜고 자 한 것입니다.36) D-2. 제읍의 수령이 일상적으로 사냥하여 잡은 노루・사슴이 많아 그 가 죽의 양이 공물을 충당하기에 충분하니 민간에서 책출할 필요가 없습니다.37) D-3. 만약 그 紙地・全漆 ・淸蜜・芝草 따위의 물건이라면, 앞서는 수령이 거의 모두 官備하였기 때문에 폐단이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았 습니다.38) 부담으로 등치시키는 시각은 재고를 요하며, 반드시 도 총론 厥貢 항목과의 연계성을 살펴 함께 고려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36) 世宗實錄 권7, 2년 윤1월 29일 戊寅 “各官蜂桶之設 本欲蠲貢蜜也” 37) 成宗實錄 권2, 원년 정월 20일 己亥 “諸邑守令常時獵獲獐鹿必多 其皮足以充 貢物 不必責出民間” 56 韓國史硏究(161) D-4. 제읍의 楮・莞・漆은 培養하여 생산된 것으로 納貢한다.39) D-5. 元典의 조항에, ‘각 지방 관청에는 園圃를 두어 철을 따라 과일 나 무를 많이 심어서 관가의 수요에 대비할 것이며, 민가의 과일이나 대나무를 사용하고 그 값을 치르지 않고 공공연히 가져다 사용하 지 못하게 하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장물죄에 처한다’고 되어 있 으나, 지금 각 지방 관청에서 주의하여 따르지 아니하오니 실로 타 당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과일 나무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그 담당 지방의 크고 작은 데 따라 포깃 수를 정하여 재배하게 하고 會計하도록 하십시오.40) 위의 D에 기사들은 공물을 직접 민에게 부과하지 않고, 관에서 생 산시설을 마련하여 관 소속의 군사나 관노비, 또는 일반 백성들을 요 역으로 부려 직접 생산하고 납부해야 하는 물종, 즉 官備貢物에 대한 내용이다.41) D-1의 벌통은 태종대 전국적으로 설치한 이후42) 관비 공물로 규정되어 벌통의 관리와 꿀의 생산을 각 관에서 직접 하도록 하였고, D-2에서 보이는 야생동물류 역시 군의 수령이 직접 사냥하 여 마련하도록 하였다. D-3에서는 종이[紙地]・칠[全漆]・꿀[淸蜜]・지 초[芝草] 등의 물종이 관비공물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D-4와 D-5 에 보이는 법전 규정 역시 닥[楮]・왕골[莞]・칠[漆] 등의 임산물과 각종 과일, 그리고 대나무 등은 민에게 직접 분정되는 공물이 아니라 각 군현에서 재식하여 상납하는 물종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38)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0월 30일 庚子 “...若其紙地 全漆 淸蜜 芝栗(草)等物 則前此守令 率皆官備 故弊不及民...” 39) 經國大典 권2, 戶典 徭賦 “諸邑楮莞漆以培養所出納貢” 40) 世宗實錄 권31, 8년 2월 4일 戊辰 “元典一款 各官置其園圃 以時多植菓木 以 備官用 民戶菓實竹木 毋得不給其直 公然取用 違者計贓論罪 今各官守令 不能 用心遵行 實爲未便 各色菓木 令監司隨其各官大小 量定條數栽植 會計施行” 41) 관비공물은 각 군현의 관아에서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관노비나 혹은 일반민 호를 요역으로 부려 진상 및 공물을 마련하였던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최초 로 ‘官備貢物’로 개념화한 것은 田川孝三이었다. 田川孝三, 1964, 앞 책, 60~71 쪽 및 228~240쪽 참조. 42) 太宗實錄 권35, 18년 3월 24일 甲戌 “命令山郡置養蜂筒 戶曹啓 將各道貢案 付一年淸蜜黃蠟元數 準計納貢周足之數 依山各官 分定養蜂 試其可否 從之”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57 土貢 항목에 기재된 수산물・해산물들의 경우도 어량을 통한 포획어 물을 관비공물로서 납부했던 것으로 파악 가능하다.43) 이처럼 土貢 항목에 보이는 대부분의 물종이 관비공물이라는 수취 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 관비공물의 특징이 명 확한 물종들은 비단 경상도 뿐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土貢 항목에 만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土貢에 기재된 공물들은 각 군현에서 직접 마련하여 상납하는 官備貢物이었다고 볼 수 있다. 土貢 항목이 한 고을의 공물과 정확히 대응하는 항목이 아니라, 고 을의 공물 중에서도 관비공물만을 기재했다는 것은 다음의 기사들로 도 입증이 가능한데, 바로 실지 의 황해도 연안부 기사와 평안도 무창군의 기사이다. E-1. 黃海道....厥貢...蒿草【獨延安府所貢】44) E-2. 평안도 연변의 창성・삭천・벽동・이산・강계・자성・무창 등 고을은 도 적의 소굴과 가까워 방어가 아주 긴급하므로, 항상 군사들과 백성 들의 쉴 날이 적습니다. 이로 인하여 번성해질 수 없어 장래가 염 려되오니, 5개년을 한하여 貢物을 감면하기를 청하옵니다45) 위의 E-1기사에 제시된 蒿草는 각 군현에 다시 기록되지 않은 ‘每 邑所産’이다. 그런데 세주에는 이 蒿草를 황해도의 다른 군현에서는 43) 조선시대 어획은 대체로 어량・어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 어량・ 어전은 원칙적으로 私占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며, 경국대전 상에서는 이들 어량・어전을 빈민들에게 3년 단위로 나누어주어 그 이익을 누리도록 하고 있 었다( 經國大典 권2, 戶典 魚鹽 “諸道魚箭鹽盆分等成績藏於本曹本道本邑 【漏籍者 杖八十其利沒官【私占魚箭者同】魚箭給貧民 三年而遞】”). 따라서 이들 어량에서 포획된 어물들이 각 군현 공물에 충당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에 대해서는 朴平植, 2007, 「15世紀 朝鮮의 魚箭政策과 魚箭經營」 歷史敎育 101, 158~159쪽 참조 . 44) 世宗實錄 地理志 黃海道 總論 45) 世宗實錄 권99, 25년 1월 9일 乙丑 “...平安道沿邊昌城朔川碧潼理山江界慈城 茂昌等邑 密邇賊穴 防禦最緊 軍民休息之日常少 因此不得阜盛 將來可慮 請限 五年蠲減貢物...” 58 韓國史硏究(161) 공물로 납입하지 않고 오직 연안부에서만 공물로 바친다고 되어 있 다. 만일 선행연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각 군현의 土貢 항목이 해당 군현의 공물을 기재한 것이라면 蒿草는 당연히 황해도 연안부 土貢 항목에 기재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는 대로 황해도 연 안부의 蒿草는 도 총론에 기재되었고, 그것이 모든 군현의 부담이 아 니란 점을 세주로 밝히고 있으며, 연안부 土貢 항목에는 기재되지 않 았다. 이는 蒿草가 연안부의 공물이긴 하지만, 관비공물이 아니기 때 문에 위와 같이 기재되었던 것이다. E-2 기사는 평안도의 몇몇 고을에 대한 공물 감면 기사이다. 그런 데 이들 지역을 실지상에서 확인해 보면 무창군의 경우는 군현 물 산 항목에 土貢 항목이 아예 빠져있다.46) 그럼에도 위 기사에서는 평안도의 무창군에 공물이 분정되어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위의 두 내용을 종합해 보았을 때, 각 군현의 土貢 항목은 각 군현의 공물과 정확히 대응하는 항목이 아니라, 공물 중에서도 어떠한 특성 을 가진 공물들이 기재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특성이란 위에 서 추론한 대로 관비공물이란 특성이다. 위의 평안도 무창의 공물은 앞 절에서 언급한 ‘每邑所産’들로 분정 되었을 것이다.47) 만일 土貢 항목이 관비공물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함께 기재된 土産 항목에는 어떠한 물종들이 기재되었을까. 이는 앞서 厥貢 항목에 제시된 세주, 즉 ‘土産稀貴者는 군현 항목에 다시 기재한다.’ 란 내용을 상기하여 보면, 土産 항목은 말 그대로 각 지역의 土産물을 기재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즉 매읍소산으로서의 성격이 아닌, 그 러면서도 관비공물에 포함되지 않는 물종들을 土産 항목에 기재한 것 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음기사들을 통해 검토해 보 고, 아울러 이들 土産 항목의 수취관계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46) 世宗實錄 地理志 平安道 茂昌郡 47) 이렇듯 각 군현에 土貢 항목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는 경기 지역이 8개 군현, 평안도 2개 군현에 달하고 함길도의 경우 육진 지역 6곳이 모두 土貢이 누락 되어 있다(이기봉, 2003, 앞 논문, 5쪽 참조).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59 F-1. 평안도 가산군...土産...銀石이 군 북쪽 安信驛 산간에서 난다【낱낱 이 나타나 있는데, 금상(세종: 필자) 3년 신축년에 採訪副使가 각 고을의 丁夫를 징발하여 취련하였는데, 노력은 배나 들고 功効는 적었다】.48) F-2. 경상도 인동현...土産...銀石【현의 동쪽 所也洞에서 나는데, 시험해 보니 쓰기에 적당치 않다】49) F-3. 전라도 영광군; 황해도 해주목...土産...石首魚【봄과 여름 사이에 여러 지역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어망으로 잡는다. 官에서는 그 稅를 거두어 국용에 보탠다】50) F-4. 강원도 삼척도호부...土産...白石이 府의 서쪽 22리쯤 되는 古川山에 서 나는데, 옥과 같다【티가 있어서 쓰지 못한다】.51) 위의 기사들에서 살펴보면, 우선 土産 항목은 실제 해당지역에서 생산되는 물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추측한대로 土産 항목 물종의 일차적인 특징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의 성격 을 갖는다고 하겠다. 만일 이들 물종들이 각 군현의 관비공물로 편재 되어 있었다면 아마 土貢 항목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적어도 수취관계 상으로 관비공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의 기사들을 통해 土産 항목의 수취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즉 F-2 기사에 나온 인동현의 銀石이나 F-4 기사에 나온 삼척의 白石 은 산물이 실제 생산되지만 그 품질이 나빠 쓰기에 적당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비록 土産物로 인정되었지만 국가의 수 취관계에서는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F-1에 나온 가산군의 銀石 같은 경우는 실제 국가에서 채취를 시도하였으나 실익에 비하여 기회 48) 世宗實錄 地理志, 平安道 嘉山郡 “銀石産郡北安信驛山間 (箇箇現在 今上三 年辛丑 採訪副使發各官丁夫吹鍊 事倍功少)” 49) 世宗實錄 地理志, 慶尙道 仁同縣 “銀石 (産縣東所也洞, 試驗不中用)” 실지 내에서 이와 같은 기록은 다수를 확인할 수 있다. 50) 世宗實錄 地理志, 全羅道 靈光郡, 黃海道 海州牧 “春夏之交 諸處魚船皆會于 此網取之 官收其稅 以資國用” 51) 世宗實錄 地理志, 江原道 三陟都護府 “白石 産府西二十二里許古川山 似玉 【有瑕不用】” 60 韓國史硏究(161) 비용이 커서 채취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아마 국가 수취 관계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F-1의 은석 채취 시도도 군현에 공물로 배정된 것이 아니라, 채방부사가 인근 고 을의 민호를 역으로 징발하여 취련하였단 점이다. 즉, 이들은 채취 시 도 당시부터 공물로 군현에 배정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F-3에 나온 영광군과 해주목의 조기[石首魚]는 앞서와 달리 뛰어 난 품질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해주와 영광의 조기를 잡기 위하여 여러 지역의 어선들이 몰리고 있으며,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세를 부과하여 국용에 보탠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들 조기는 영 광과 해주의 공물로서 국가에 직접 수취된 것이 아니라, 그 어업 이 익을 여러 군현 소속의 어선들에게 稅를 매겨 국가에 흡수하고 있었 던 것이다. 위와 같이 土産 항목의 물산들은 수취 관계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 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국가의 수취에서 제외된 물산들도 상당 히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위와 같은 특수한 물종들 외에는 土産 항 목에 기재된 많은 물종들이 각 군현의 공물로 배정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 다만 그 경우에는 관비공물로서 배정된 것이 아니고, 각 민호 가 부담하는 형태의 공물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土産 항목에 기재된 물산들의 또 한 가지 특성은 바로 물산의 기재 형식에서 원료형태로만 기재된다는 점이다. 즉, 土貢이 나 厥貢 항목의 경우는 ‘皮’, ‘油’ 등과 같이 가공 형태가 기록되거나 아니면 물종 자체가 수공업품인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비하여 土産 항목에는 원료 자체인 동식물 및 광산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다. 또 土産 항목에는 수공업품은 한 종류도 기재되지 않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각 군현의 土貢 항목에는 군현의 관비 공물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고 土産 항목에는 관비공물을 제외한 각 지역의 특산품들이 그 수취 여부・수취 형태와는 상관없이 물종 자체 를 원료상태 그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다만 실제 지역의 특산품이면 서도 관비공물에 속하는 경우는 土貢 항목에 수록되었을 것이며, 그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61 렇지 않은 물종들만 土産 항목에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검토한 土貢・土産 항목의 성격이 실제로 그러 한 것인지를 연대기 기사와 실지의 비교검토를 통해 확인해 보도 록 하겠다. 우선 검토할 것은 바로 함길도의 6진 지역이다. 주지하다 시피 함길도의 경원・회령・종성・온성・경흥・부령 도호부는 세종 재위 중반에 북방 정책으로 조성된 지역으로 육진 혹은 오진으로 명명하 던 지역이었다. 본래 실지는 세종 14년 만들어진 팔도지리지를 전 재한 것이어서 새로 만들어진 이들 지역에 대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 사후에 팔도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육진 지 역에 대한 지리정보를 새로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는데,52) 이것이 단 종대 세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지리지에 부록되었다.53) 따라서 이들 지역의 정보는 세종 14년 시점과 단종 당시 시점의 두 정보가 중첩 되어 있는 것이다. 세종 14년 당시 이들 지역에는 모두 공물이 분정 되고 있었다. 함길 도 지역은 본래 국초에는 공물이 분정되어 있지 않다가, 태종대 이르 러서야 서북면 및 동북면에 공물이 분정 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세 종대 육진이 설치되고 얼마 후에 육진 지역에 대해서는 공물을 분정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G. … 五鎭은 본래 貢物이 없고 오직 神稅布만을 바치니, 戶曹로 하여금 移文하여 考覈하고 磨勘하게 하여서 시행하소서 … 54) 위 기사는 문종 즉위년인 1450년경의 기사이므로, 지리지 추록 작 업이 이루어진 단종대보다 약 3년 앞선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함길 52) 端宗實錄 권9, 1년 12월 21일 癸卯 “諭咸吉平安道觀察使曰 咸吉道會寧 鍾城 穩城 慶興 三水 利城 冨寧 洪原等諸邑 平安道慈城 茂昌 渭原 虞芮等諸邑創設 沿革年月 及山川地理土性土貢戶口之類 及時開具以聞” 53) 鄭杜熙, 1976, 앞 논문 54)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0월 10일 庚辰 “…五鎭本無貢物 惟納神稅布 令戶曹 移文考覈 磨勘施行…” 62 韓國史硏究(161) 경원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부령 토의 ○ ○ ○ ○ ○ ○ 土貢× × × × × × 土産○ ○ ○ ○ ○ ○ 약재 ○ ○ ○ ○ ○ ○ <표 5> 함길도 6진지역의 물산 항목 구성 세종 14년 단종 2년 土貢土産土産 표범가죽[豹皮], 곰가죽[熊皮], 사슴가죽[鹿皮], 삵괭이가죽[狸皮], 여우가죽[狐皮], 달피(獺皮) 범가죽[虎皮], 연어(年魚), 문어(文魚), 상어[沙魚], 방어(魴魚), 대구[大口語], 황어(黃魚), 송어(松魚), 석화(石花), 곽(藿), 곤포(昆布), 다시마[多絲亇] 곰[熊], 노루[獐], 사슴[鹿], 산멧돼지[山猪], 연어(年魚), 방어(魴魚), 팔초어(八梢魚)【俗號文 魚】, 청어(靑魚), 승어(僧魚) <표 6> 경원도호부의 세종 14년 당시와 단종 2년 당시의 물산 항목 대조표 도 오진 지역은 공물이 분정되어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다음의 표에서 보듯이 실지의 함길도의 육진 지역에는 실제로 土 貢 항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즉, 土貢 항목은 관비공물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공물이 분정되지 않았으면 설정되지 못하는 것이었고 반면 土産항목은 수취관계에 얽메이지 않고 지역의 특산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항목이었기 때문에 공물 분정이 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 도 서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土産 항목에 들어갈 만한 특산품이어도 만일 이것이 관비공 물의 성격이라면 土貢 항목에 기재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아래 표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6진 지역 중에서 경원도호부 는 세종 14년에도 같은 명칭의 군현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육진 설치 시에 육진의 하나로 설정되어 군현의 강역이 조정되었다. 따라서 경 원도호부는 실지상에서 두 개의 기록을 갖고 있는 군현이었다. 경원은 비록 군현의 명칭은 같았지만 육진 설치 당시 강역이 새롭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63 게 설정되어 군현의 영역은 상당한 변동이 있었다. 위의 표에서 물산 항목이 완전히 서로 맞지 않는 까닭이다. 두 기록의 시간차가 약 30 년이 되기 때문에 그에 따른 다소간의 물산 변화도 반영되었을 것이 다. 그런데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본래 관비공물로 납부하던 熊 皮, 鹿皮등은 경원이 6진에 속하면서 공물 부담에서 제외되었고, 때 문에 단종 2년 경에는 土産 항목으로 옮겨져 熊, 鹿과 같은 형태로 기재되었다. 관비공물일 때는 가공 상태를, 일반 土産물일때는 원료 상태 그대로를 기록한다는 점에서도 필자가 추론한 항목의 원칙과 부합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상에서 실지 물산항목의 구성방식을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각 도 총론의 厥貢 항목은 해당 도내 군현에서 수취하는 공물을 모 두 총괄한 항목이었다. 그 중 각 군현의 공물과 중복되는 물산은 ‘土 産稀貴者’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는 각 군현의 土貢 및 土 産 항목으로 분류되어 서술되어 있었다. 한편 도 총론의 厥貢 항목에 만 기재된 물산은 ‘每邑所産’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군 현에서 생산이 가능한 물산이거나 혹은 도 단위 행정・군사 책임자가 담당하여 상납하는 물종이었다. 각 군현의 土貢 항목은 해당 군현의 관비공물을 기록한 것이었고, 土産 항목은 해당 지역의 특산물 중에 서 관비공물로 수렴되지 않은 물종들이었다. 경우에 따라 土産 항목 의 물종들은 공물 수취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Ⅲ. 항목 재구성을 통해 본 조선초 공물 분정의 양상과 특성 1. 지역별 공물 분정의 양상과 특징 앞장에서는 실지 물산 항목 중 厥貢・土貢・土産 항목이 구체적으 64 韓國史硏究(161) 로 어떠한 물종들을 기록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이 장에서는 앞 장의 분석을 바탕으로 세종대 공물 수취의 지역적 양상을 개관해 보 고, 그것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앞의 분석을 전제로 한 군현의 공물 부담을 실지상에서 추출한다면 다 음과 같은 형식이 도출된다. 이러한 형식을 대입하는데 문제점은 바로 군현의 土産 항목 중 공 물로 포함된 것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 나 실지의 각 군현 土産 항목의 평균 물종 수는 함길도를 제외55) 하고는 약 1~3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계산의 편의를 위하 여 土産 항목 전체를 합산하는 형태로 우선 논지를 전개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土産 항목까지 모두 공물로 일단 상정하고 그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래의 표는 각 도 총 론의 매읍소산과 각 군현의 土貢・土産의 물종 수를 도 별로 통계하 여 도별로 한 군현의 평균적인 공물 물종을 상정해 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한 군현의 공물 부담을 실지의 실제 물종수를 대 입해 보면 위와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물론, 도 내의 매읍소산물로 분류된 물종이라 하더라도 몇몇 이유로 인하여 한 두 군현은 그 부담 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특 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을 살피도록 하겠다. 우선 첫 번째로 주목되는 점은 공물 분정에 있어 가장 큰 변수가 되는 것은 해당 군현이 어느 도에 소속되어 있는지의 여부란 점이다. 매읍소산이 3종에 불과한 함길도를 제외하면 여타 도의 매읍소산은 적게는 19종, 많게는 55종에 이르고 있다. 반면 각 군현에 기재된 土 55) 함길도의 경우, 새로 부록된 6진 지역을 포함하여 평균을 내면 한 군현당 약 7.7종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6진 지역은 공물 부담이 전혀 없는 지역이고, 여타 지역도 분정된 공물의 물종수가 많지 않아 土産 항목에 기재될 물산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65 每邑所産 (A) 한 군현의 土貢 평균 물종 수 (B) 한 군현의 土産 평균 물종 수 (C) 군현에 부과될 수 있는 공물 종류 (A+B+C) 경기 37(73) 1.9 1 39.9 강원 47(52) 17.5 1.3 65.8 충청 50(56) 9 1.2 60.2 황해 46(55) 7.1 1 54.2 경상 34(43) 11.4 2.2 47.6 전라 48(42) 11.6 1.1 60.7 평안 19(42) 7.2 0.6 26.8 함길 3(12) 4 7.7 14.7 *( )는 厥貢 항목 중 每邑所産의 비율 <표 7> 지역별 공물 분정 가능 물종 수 추산 貢, 土産들은 보통 12-13여종, 많은 경우 19종 정도에 이르고 있어 공물 전체 물종 수에서 매읍소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 나고 있다. 따라서 한 군현에서 부담하는 공물 물종의 70% 이상은 그 군현이 어느 도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56) 56) 논지 전개상 본문에서 상론하지는 않았으나, 소위 ‘不産貢物’의 문제를 실지 의 물산항 검토를 기반으로 판단해 보면 상당한 양의 不産貢物이 상존했던 것 으로 보인다. 우선 土貢 항목에 기재된 관비공물의 경우, 지역의 본래 산물이 아니라 국가가 인위적으로 생산시설을 갖추게 한 측면이 많았다(본문 Ⅱ장의 B 기사들 참조). 따라서 이들 공물은 실제 해당 지역에서 생산여부와 관계없 이 공물로 분정된 것으로 보인다. 土貢 항목에 분정된 不産貢物의 존재는 다 른 방식으로도 추론이 가능한데, 바로 15세기 말~16세기 초에 걸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土産 항목과 실지의 土貢・土産 항목을 비교 검토해 보면 그 중복율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 승람의 土産 항목은 실지와 달리 지역 산물을 되도록 그대로 반영하려 노 력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라도 한 지역을 예로 들어 비교검토해 본 결과 土貢 항목 물종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土産조에 다시 나타나는 경우는 약 20%에 불과하였으나, 土産 항목 물종은 약 85%가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소순규, 2010, 「조선 전기 지리지 물산 항목의 편제방식과 공물 수취 의 특성」,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59쪽). 다시 말하면 土貢 항목의 경우 국 가가 수취목적으로 각 관에 생산시설을 갖추게 한 물종이어서 해당 지역의 자 연스런 산물로 보기 어려우며, 이것이 대납・방납이 성행하고 관비공물이 점차 민의 직접 부담으로 옮겨가는 15세기 말 16세기 초의 상황이 되면 지역의 산 물로 정착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박현순, 1997, 앞 논문, 7~8쪽). 이러 66 韓國史硏究(161) 물론 공물을 실제 수합하고 각 관서에 납입하는 과정은 모두 군현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실질적인 납부책임자도 군현의 수령으로 설정되어 있었다.57)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선행연구에서도 조선 초기 공물수취의 제도적 특징으로 군현단위의 분정 및 납부를 지적하고 있었다.58) 그러나 위의 사항을 참조해 보면 공물 분정에 있어서 도 가 가진 규정성을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며, 그에 따라 도의 책임자인 관찰사 등이 공물 수취에서 가지는 권한 및 역할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고찰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59)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한 군현이 부담하는 공물 중에서 관비공 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土産 항목의 물종 수가 거의 1-3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참조해 보면, 실제 공물 부담은 도별 공통 물종+관비공물로 이루어졌음을 살필 수 있다. 즉, 한 군현에서 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보면 15세기 조선의 공물에는 不産貢物이 상당히 존 재하였다는 田川孝三의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 공물 분정 당시부터 不産貢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 견해(김동진, 2009, 앞 논 문)는 재고를 요한다고 생각한다. 57) 世宗實錄 권84, 21년 윤2월 5일 癸未 “各道京中各司所納貢物 極爲精察 而皆 以不善退之 必得京中之物 然後納於諸司 故各司典隷射利之徒 爭先代納 倍蓰其 價 請自今凡各道貢物 令守令緘封 納於各司 若實濫惡 則移牒監司 倂爲黜陟 臣 等謂請依上書 守令緘封上送 令所納司驗其封收納 如其不用之物 依續典貢物收 納之法 申明擧行” 이 기사는 공물대납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로 수령에 의한 봉인을 통해 공물을 상납하도록 하였는데, 이 내용을 통해서도 공물 납부의 책임자는 수령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후 성종대 편찬된 經國大典, 권2, 戶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58) 박도식, 2012, 앞 책, 제2장 3절 「공납제의 성격」 참조 59) 조선왕조실록 상에서 공물 부담을 일시적으로 경감하거나 삭제할 때, 많은 경우 그에 대한 행정업무를 도의 관찰사에게 지시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世宗實錄 권11, 3년 3월 9일 辛未; 권18, 4년 윤12월 17일 庚午; 권86, 9월 10일 乙卯). 그러나 현재 공물의 분정 및 상납의 주체를 군현으로 설정하는 인 식 하에서는 이러한 사무가 왜 도 단위에서 이루어지는지 명확히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공물 분정에서 도가 가지는 규정성 및 그 사이에서 관찰사의 역 할 등이 규명된다면 이러한 부분 역시 해명될 수 있다고 보이는데, 본고에서 는 그러한 구체적인 해명을 진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차후 연구과제로 삼고 자 한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67 독특하게 바치는 공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비공물의 형태로 수취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관비공물의 비중은 공물 수취 상에 서 민폐를 최소화하려는 조선 정부의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실 제로 그 노력의 결실은 크지 않았다고 보이며 15세기 말경에 이르면 관비공물 대부분이 직접 민호에 전가되는 형태로 변화하였음은 주지 의 사실이다.60) 이렇듯 수치상으로 일견할 수 있는 특성 외에, 공물 분정에서 나타 나는 각 지역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언급한 것 처럼, 공물 분정에서 가장 중요한 규정 요소로 작용한 것은 道 단위 였으므로, 이하의 내용에서도 도 단위를 분석 단위로 삼아 논의를 전 개하도록 하겠다. 단, 주지할 사실은 이하에서 말하는 공물 부담이란 용어는 공물로 납부하는 물종의 종류와 관련된 것이며, 이것이 공물 부담의 양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경기는 厥貢 항목 물종이 총 51종인데 그 중 매읍소산은 37종으로 약 73%에 해당하는데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수치의 매읍소산 비율 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각 군현의 경우 土貢은 평균 1.9종, 土産은 평균 1종으로 나타나고 있어, 군현의 물산 항목은 전국에서 가장 적 은 물종의 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경기의 공물 물 종은 도 내 군현이 거의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물의 등질성 외에 도 경기의 공물 종류는 여타의 지역에 비하여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 고 있는데, 바로 자원의 구득이 용이하고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의 투 입 여부가 가장 관건이 되는 물종들이 많았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경기도의 공물들은 民의 입장에서는 役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 고,61) 국가에서 京畿民의 부담을 언급할 때 이들 공물이 요역과 더 60) 16세기 관비공물의 해체 경향에 대해서는 박현순, 1997, 앞 논문, 7~8쪽 참조. 61) 燒木 등의 공물 납부가 종종 役으로 지칭된 사례는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太祖實錄 권15, 7년 12월 29일 辛未 “京畿左右道屬司水監燒木軍四百 人 雖當農月 不顧家産 趁日斫木 供其日役 遂致廢農逋亡 願自今計一年所支木 數 分定左右道州郡 當農隙春秋兩節 於烟戶均收 不過一駄 及時輸於司水監 以 供一年經費” 68 韓國史硏究(161) 불어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다.62) 그리고 경기민의 공물 부담양은 타 지역에 비해 매우 무거운 것으로 인식되었다.63) 이러한 물종들은 일상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인데 대표적으로 장작 [燒木]・말먹이풀[蒿草]・숯[炭]등이었다. 장작[燒木]・숯[炭] 등은 왕 실과 각 관아에 일용품이거나 手工品 생산에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 었던 것이고, ・말먹이풀[蒿草]은 여름철 司僕寺에서 기르는 말의 먹 이로 사용되었다.64) 이들은 항상적으로 수요가 높은 물산이었기 때 문에 일 년 중 여러 차례 수취되기도 하였다.65) 따라서 항시적인 조 달이 가능한 지역인 경기에 집중적으로 분정되었던 것이다. 장작・말 먹이풀・숯은 경기 민들의 무거운 부담양의 대표격으로 인식되어, 국 가는 이들 물산에서 파생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여러 차례 시행하였다.66) 이 밖에도 경기에서는 영선용목재[營繕雜木]・자작목[自作木]・살 구나무[杏木]・피나무[椵木] 등의 木材類도 부담하였다. 이들 木材類 역시 채취와 운송에 소요되는 노동력 투입과 운송거리의 단축이 관 건인 물산이었다. 手工業品 중에서는 갈소쿠리[蘆簟䕯]・참빗[省帚]・ 마끈[麻索]・새끼[藁索] 등의 물산이 수취되었다. 이들 수공업품은 62) 공물과 役은 생산 운송 과정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 경기 지 역은 특히 그러한 경향이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전기 공물과 役의 상 호관계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 참조. 尹用出, 1986, 「15・16세기의 徭役制」 釜大史學 10 姜制勳, 1995, 「朝鮮初期 徭役制에 대한 재검토-徭役의 種目區分과 役民規定 을 중심으로-」 歷史學報 145 63) 太宗實錄 권31, 16년 5월 14일 乙巳 世宗實錄 권32, 8년 4월 28일 辛卯 睿宗實錄 권6, 1년 6월 29일 辛巳 64) 太宗實錄 권30, 15년 8월 6일 庚午 “京畿百姓之弊 冬則在於炭及燒木 夏則司 僕生芻亦難” 65) 太宗實錄 권8, 4년 8월 20일 己丑 世宗實錄 권12, 3년 6월 10일 辛丑 66) 太宗實錄 권17, 9년 4월 5일 丁丑; 권17, 9년 4월 20일 壬辰 世宗實錄 권28, 7년 6월 23일 辛酉; 권54, 13년 11월 12일 癸酉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69 타도에서는 전혀 기재되지 않는 것으로서, 역시 일상에서 수요가 높 은 물산들이며 제작에 있어 원료의 구득이 어렵지 않고 복잡한 기술 을 요하지 않는 것이었다. 경기 지역의 每邑所産이 대부분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닌 물산들이 고, 그 부담도 컸기 때문에 각 관에서 마련해야 하는 관비공물이나 土産물을 납부하는 것은 많은 부분 감면되었다.67) 경기 지역의 土 貢・土産에 기재된 물산 수가 타도에 비해 매우 적은 것은 바로 이러 한 이유에서였다. 경기의 바로 외곽에 존재하는 강원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경우는 공물 수취의 양상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체 厥貢 항목의 물산 중 每邑所産이 차지하는 비율이 강원도는 52%, 충청도는 56%, 황해도는 55%로서 73%를 보인 경기도 보다는 낮지만 40% 이하를 보이는 나머지 4도에 비해서는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평 균적인 土貢의 물산 종류는 강원이 17.5종, 충청이 9종, 황해가 7.1종 에 달하고 있어 각 군현마다 납부하는 관비공물의 비중은 경기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즉 도내 군현들의 공물 물종의 등질성이란 기준 에서 보면 경기와 여타 4개 도의 중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삼도의 공통점은 부담하는 공물의 물종에서도 확인된다. 먼 저 경기도민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장작[燒木]・말먹이풀[蒿草]・탄 [炭] 등을 이들 삼도에서 일부 공물로 납부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앞서 설명한 황해도 연안부의 燒木 부담도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 수송이 관건이 되는 대표적인 물종인 木材類가 다양하게 공물로 편성되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들 지역은 정기적인 공물 로 상납하는 木材 외에도 부정기적인 영선 공사를 위한 木材상납이 많던 지역이었다.68) 목재류 상납은 이들 三道에서는 큰 부담이 되었 67) 太宗實錄 권1, 1년 1월 14일 甲戌 “京畿 王化所先宜加存恤以安民生 今馬草 柴炭 多般雜貢 倍於外方 願自今馬草柴炭 量減節用 其餘雜貢可除者及可移外方 者 下議政府擬議詳定 … 疏上 用人材 罷辨定 移京畿雜貢 代其人 罷軍器監屯 田等事 允之” 70 韓國史硏究(161) 던 것으로 보이는데69) 경기지역은 일상용품과 관련된 공물 및 雜役 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대규모의 목재조달 주로 이들 三道에서 채 취, 운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목재 운송은 대부분 水運으로 이루어졌는데,70) 이들 3도 지역은 한양으로 내륙 水運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71) 경기민들에 대한 일부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 목재 상납이 활발하 였던 것 외에도 이들 3도는 타 지역에 비하여 林産物의 수취가 활발 하게 이루어졌다. 每邑所産으로 분류된 林産物도 타 지역에 비해 많 을 뿐 아니라 각 군현의 土貢에도 가장 많은 종류의 林産物이 기재 되어 있다.72) 또한 이들 三道에만 正鐵이 土貢에 기재된 것도 특징 적이다. 土貢에 正鐵이 기재된 것은 해당 군현 내에 鐵産地가 없지 만, 인근 군현의 鐵産地에 동원되어 鐵을 생산・납부하는 관비공물로 서의 성격 때문이었다. 특히 황해도에는 鐵생산에 종사하는 정역호 인 鐵干이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고,73) 국가에서도 황해도의 鐵을 주 요한 산물로 파악하고 있었다.74) 나머지 4도 중 남쪽에 위치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우는 每邑所産 이 전체 厥貢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욱 낮아서, 경상도는 43%, 전 라도의 경우는 42%이다. 반면 土貢의 평균 물산 종류는 경상도가 11.4종, 전라도가 11.6종으로서 강원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수치 68) 太宗實錄 권11, 6년 4월 20일 庚辰; 권28, 14년 7월 21일 壬辰 69) 太宗實錄 권11, 6년 1월 28일 己未; 권29, 15년 6월 25일 庚寅 70) 世宗實錄 권82, 20년 8월 14일 丙寅 71) 황해도는 예성강 수운, 강원도는 북한강 수운, 충청도는 남한강 수운을 활용하 였다. 이들 삼도는 전세 수송에 있어서도 내륙 수운을 활용하였다. 내륙 수운 을 활용한 조운 실태에 대해서는 崔完基, 1976, 「朝鮮前期 漕運試考-그 運營 形態의 變遷過程을 중심으로-」 白山學報 20 참조. 72) 3도의 每邑所産과 土貢 항목의 林産物의 수는 강원이 17종, 충청이 12종, 황해 가 20종으로 타 지역에 비해 많은 종류가 기재되어 있다. 73) 世宗實錄 권39, 10년 3월 5일 丁亥 74) 世宗實錄 권50, 12년 12월 1일 丁卯 睿宗實錄 권6, 1년 6월 29일 辛巳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71 를 나타내고 있다. 또 土産의 경우는 경상도가 평균 2.2종, 전라도가 평균 1.1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도내 군현마다 상납하는 공물 물종이 여타 지역에 비하여 가장 다양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지역의 공물 부담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果樹類・水産物, 그리고 종이[紙]・자리[席] 같은 수공업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타 지 역에 비하여 매우 높다는 것이다. 果樹類는 전라도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류와 수를 보이고 있는데 土貢에 17종의 과수류가 기재 되었고 每邑所産 2종을 합하면 모두 19종의 과수류가 기재되어 있다. 경상도는 土貢에 8종, 每邑所産에는 4종으로 모두 12종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그 다음으로 많은 종류가 기재된 충청도의 5종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은 수치이다. 특히 전라도 지역이 압도적인 수치를 보이 는 까닭은 전라도 남쪽 해안 및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종류의 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쪽 해안 군현에 과수류의 재배를 정책적으로 장려하기도 하였다.75) 水産物은 전라도가 土貢 항목에 18종, 每邑所産이 11종으로 총 29 종의 水産物이, 경상도가 土貢 항에 24종, 每邑所産이 3종으로 총 27 종의 水産物이 기재되어 있다. 이 역시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수 치이다. 竹類의 생산지도 이 두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죽순[竹筍]・ 마른죽순[乾筍]・검은 대[烏竹]・가는 대[篠]・굵은 대[簜] 등 다양한 형태로 기재되어 있다. 충청도・강원도 지역의 한 두 군현에 竹類가 기재된 경우가 있으나, 이 당시 국가 수요에 대응하는 대부분의 竹類 는 이 兩道에서 주로 생산・수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手工業品인 종이[紙]・자리[席]의 생산 군현이 많은 것도 兩道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자리, 전라도에서는 종이가 많은 군현에서 수취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자리은 明에 進 獻하는 물품 중에 하나로서 그 품질이 매우 뛰어났다.76) 실제로 經國 75) 世宗實錄 권31, 8년 2월 4일 戊辰 “各色菓木 令監司隨其各官大小 量定條數 栽植 會計施行 其中每道不産柚子柑子 於全羅慶尙道沿邊各官 栽種條數 實不實 令損實敬差官 親審報曹 永爲恒式 從之” 72 韓國史硏究(161) 大典 工典 상에 席匠의 수를 확인해 보면 경상도에서는 군현 평균 4.1명으로 타 지역에 비해 높게 나타나, 경상도 지역이 자리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이는 전라도의 全州와 南原등이 생산의 중심지였다. 全州와 南原에서 생산된 종이가 서울의 造紙署의 종이 보다 뛰어나다고 할 만큼77) 그 품질이 탁월했다. 이와 같이 전라도 와 경상도 지역은 果樹類・水産物・竹類와 원료의존적인 手工業品 종 이[紙]・자리[席] 등이 주요한 공물로 수취되었고, 각 군현별로 납부 하는 공물의 물종수도 여타 지역에 비해 매우 다양하였다. 한편 가장 북쪽의 평안도와 함길도는 厥貢 중 每邑所産이 평안도 는 42%, 함길도는 11%로 타 지역에 비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土貢은 평안도 평균 7.2종, 함길도 평균 4종이며, 土産은 평안도 평균 0.6종, 함길도 평균 7.7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시 전라도나 경상도 와 같이 도내 군현들의 등질적인 물종이 절반이 이하이고, 나머지 절 반 이상은 각 군현별로 다양한 물종을 상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안도와 함길도는 厥貢 항목의 물종수가 여타 지역에 비해 적음 에도 불구하고 야생동물의 종류는 여타 지역과 비슷한 수치를 보이 고 있어, 공물 물종에서 야생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그 외에는 일부 임산물 및 유밀류, 수산물이 차지하고 있으며 과수류 나 수공업품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서 중요하게 공물로 수취된 물산으로는 청서피[靑鼠皮]・ 초피[貂皮] 등 高價의 피혁류와 금・오미자 같은 대명진헌용 물품이 었다. 청서피・초피의 수취는 국초에 정해진 양이 없었으나 世宗대에 이르러 收取量을 정하였다.78) 청서피・초피는 皮革 중에서도 최고급 에 속하는 것이고 때문에 왕실용품이나 進獻品으로 수요가 높은 물 산이었으나, 서식지가 兩道에 편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兩道에서 주 로 수취되었지만, 兩道 생산 물량만으로 공물을 모두 충당하기가 어 76) 世宗實錄 地理志, 慶尙道 尙州郡 77) 世宗實錄 권49, 12년 9월 11일 己酉 78) 世宗實錄 권29, 7년 8월 27일 癸巳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73 려웠다. 때문에 民間에서 여진과 사적인 매매를 통해 이들 물산을 조 달하기도 하였다.79) 오미자는 평안도에서 주로 수취되었는데 明에 진헌하는 물종 중 하 나였고,80) 조선에 파견된 明 사신들에게 선물로 증정하는 물산이기도 했다.81) 金 역시 明에 진헌하는 물산이었는데, 국초부터 그 歲貢額이 과하여 조정에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던 물산이기도 했다.82) 이처럼 평안도의 오미자나 함길도의 금은 대외관계에도 중요한 물산이었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 물산의 생산과 수취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83) 이상에서 각 도 총론의 厥貢 항과 土貢・土産 항목을 통해 한 군현 이 부담하는 공물 물종의 수를 확인하고, 이것을 전국적으로 살펴보 았을 때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 가지 특징적인 양상을 살필 수 있었는데, 바로 한양과의 거리에 따라 도 별로 공물의 등질성이 점차 희박해 진다는 사실이었다. 즉, 한양과 가장 가까운 경기의 경우는 도 내 군현이 거의 같은 물종을 공물로 납부하는 반면, 가장 먼 평안, 함길, 경상, 전라도의 경우는 군현별로 공물의 종류가 상대적으로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물로 수취하는 물종 자체도 한양과의 거리에 따라 다르게 편제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양과 인접한 경기에 는 일상적인 수요에 대응하는 물품들이 도 내 군현에 거의 비슷하게 편제되었다. 그 외곽의 충청・황해・강원 지역에는 木材와 같이 수송 에 노동력이 많이 드는 물품과 함께,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林産物 이 활발하게 수취되었다. 보다 외곽의 경상・전라・평안・함길 지역은 79) 金九鎭, 1995, 「여진과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329~367쪽 김순남, 2011, 「16세기 조선과 야인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한국사연구 152 80) 太宗實錄 권35, 18년 1월 9일 庚申 世宗實錄 권3, 1년 1월 22일 丁卯 81) 世宗實錄 권19, 5년 3월 2일 癸未 82) 박원호, 2002, 「15세기 조선과 명의 관계」 明初朝鮮關係史硏究, 一潮閣, 327쪽 83) 太宗實錄 권34, 17년 10월 22일 甲辰 世宗實錄 권83, 20년 10월 28일 己卯 74 韓國史硏究(161) 해당 지역 지역의 위치와 특징 수 송 방 식 주요공물물종 군현별 공물 물종의 다양성 A 지역 경기 ・한양 외곽 ・과전 분급 ・민에 의한 직접 납부 가능 지역 ・조운 운행 없음 ・일상용품 ・역과 상호호환 되는 물종 다수 ・군현별로 거의 비슷한 공물 분정 B 지역 황해 ・경기 외곽 ・내륙 수운 가능 ・조운 운행 지역 ・경기지역 물종 일부 공동부담 ・木材類 ・林産物 ・鐵 ・경기에 비해 다양하지만 여타 지역에 비해서는 등질적인 중간지적 특징 강원 충청 C 지역 경상 ・국토 남단 ・인구・경작지 밀집지역 ・육운 + 수운 ・해운 ・조운 운행 지역 ・果樹類 ・水産物 ・竹 ・수공품(紙・席) ・ 군현별 공물 물종이 여타 지역에 전라 비해 매우 다양함 D 지역 평안 ・국토 북단 ・군사지역으로 인한 반독립재정운영 ・인구・경작지 희소지역 ・주로 육운 ・조운 운행 없음 ・고급가죽류 (貂皮・鼠皮) ・대명진헌용물 산 (五味子・金) ・ 군현별 공물 물종이 여타 지역에 함경 비해 매우 다양함 <표 8> 지역별 공물 부담 양상의 특징 <그림 1> 도성과의 거리에 따른 공물 부담 양상 도 내 군현에서 공통적으로 납부하는 물종은 적어지는 대신 각 군현 별로 특징적 공물을 수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과수류・수공업품・수산 물・야생동물과 같이 지역적 특성이 강하게 투영된 물종이 다수 편제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75 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이 절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그림 1>과 <표 8>로 개념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 2. 조선초 공물 분정의 정책적 맥락 그렇다면 앞 절에서 확인한 15세기 공물 분정의 형태가 성립된 배 경은 무엇일까. 즉 공물의 생산과 납부 단위는 군현임에도 불구하고 공물 분정에 있어서는 도 단위가 강조된 것, 각 군현별로 상당수의 관비공물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한양과의 거리에 따라 부담하는 공 물의 종류가 다르고 또 공물의 성질이 차이가 나는 것 등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麗末鮮初 조선의 건국 세력에 의해 구상된 수취 제도 개혁의 흐름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공물은 고려 말의 雜貢을 계승한 것이었다. 본래 고려 전기 의 공물은 고려 말의 雜貢과는 달리 민에게 직접 다양한 현물을 부 과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즉 일반 군현의 民은 布를, 所에서는 해당 생산물을 군현에 납부하면 이를 바탕으로 군현에서 공물을 마련하였 던 것이다.84) 그러나 고려 후기 대내외적인 모순의 발생과 그에 따 른 재정 압박, 所와 수공업 지역의 해체와 그에 따른 현물 수급의 어 려움 등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공물 이외의 雜貢・常徭와 같은 추가적 인 현물 부세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현물 부세는 부담 양도 매우 컸으며, 특히 대납과 방납 등으로 폐해가 막심하였다.85) 조선은 수취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러한 常徭・雜貢을 租・庸・調의 정식 稅制로 편입하였다. 이미 폐단이 드러난 제도를 지속적으로 운 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즉 民의 과 도한 부담과 대납・방납의 폐단을 정비하기 위해서 부담양의 조정과 공물의 합리적 재배치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조선 초 공물 수취의 제 84) 朴鍾進, 1994, 「고려시대 수취구조와 농민생활」 한국사 5, 한길사, 393쪽 85) 고려 말 잡공 및 상요에 대한 諸說에 관해서는 朴鍾進, 2004, 앞 논문 참조. 76 韓國史硏究(161) 도 개선은 부담양의 최소화, 공물 분정의 합리화란 방향으로 진행되 었다.86) 이에 따라 공물 분정이 여러 차례 개편되었는데 이는 주로 貢案 개정 시에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공물을 합리적으로 분정한 다는 것은 지역의 생산여건과 운송여건, 그리고 국가의 수요를 동시 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취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한 행정적 제반 조건도 고려해야 했다. 먼저 운송여건을 살펴보자.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漕運 제도를 정 비하고 운영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선박수 송이 가지는 위험성 때문에 항상적으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87) 특 히 태종 13년과 14년의 조운선의 침몰 이후 漕運이 위축되고 전조가 陸運되기도 하였다. 實地 편찬 당시에는 조운 시스템이 복구되었 던 시기였지만, 위험요소들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고, 私船에 의한 조운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88) 이러한 상황에서 공물 수송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전세와 달리 공물은 한 군현에서 여러 관사에 공물을 납입해야 했으며 군현의 공 리가 각 아문에서 陳省을 발급받아야 수송의 절차가 완료되었다.89) 조운선을 활용하여 수송하더라도 중앙 각사에 납입하는 책임은 각 군현이 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평안도 및 함길도 등 조세가 중앙으 로 수송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국가의 조운이 기능하지 않아 수송 부 담이 더욱 컸다.90) 또한 조운가능지역도 생산 시기가 달라 때에 따 라 납입하는 별공물이나 진상물의 경우는 시기가 맞지 않으면 조운 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91) 즉 공물은 전세보다 국가의 일괄 86) 고려말 조선초의 공물 수취 개편에 대한 추이는 박종진, 1996, 「高麗末 朝鮮初 貢物制의 改編과 그 性格」 韓國學硏究6, 淑明女子大學校 참조. 87) 崔完基, 1976, 「朝鮮前期 漕運試考-그 運營形態의 變遷過程을 중심으로-」 白山學報 20 88) 崔完基, 위 논문, 407~408쪽 89) 朴道植, 2000, 「朝鮮前期 貢吏 硏究」 人文學硏究 3, 關東大學校, 113~117쪽 90) 文宗實錄 권4, 즉위년 11월 1일 辛丑 91) 經國大典 권2, 戶典 稅貢. 공물의 경우는 중앙각사에 수납되는 시기가 田租 와 다르며, 특히 祭享節物이나 別貢은 수시로 상납되었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77 적인 수송 시스템으로 포섭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經 國大典 상에 공물 수송에 대한 규정이 全無하다는 것에서도 확인된 다.92) 공물의 수송은 각 군현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이 田 租의 경우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생산여건의 문제가 있다. 민간유통을 전제하지 않아도 공물의 납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대한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물산들로 공물을 분정해야 했다. 공물의 폐단에 대한 대안으로 항상 언급되는 ‘任土作貢’의 원리93)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물산에 따 라서는 각 民戶마다 갖추기 어려운 생산시설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특별한 기술을 요하기도 하였다. 民의 부담을 줄이고 원활한 공물 수 급을 위해서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생산여건을 구비하고 되도 록 관의 노동력을 통해 생산하거나 民戶에게는 노동력만을 징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전기의 所처럼 특수한 생산단위를 설치하지 않고 군현 단위로 지방조직을 일원화한 조선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물론 관비공물의 확대가 不産貢物의 문제를 완 전히 해결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러한 민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제 도적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두 요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의 수요였다. 그런데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산은 지역별로 생산 여부가 다른 물 산이 있는 반면 어느 지역에서나 생산이 가능한 물산들도 혼재되어 있었다. 오히려 양으로 환산할 때 더욱 비중이 많은 것은 후자였 92) 朴道植, 2000, 앞 논문, 114쪽 93) 任土作貢의 원리는 書經 禹貢編에 제시된 유교 이념의 이상적인 수취제도 이다. 즉 지역마다 토질과 기후가 다르므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산을 부세로 수취한다는 이념이다. 조선에서는 공물 뿐 아니라 전세 수취에 있어서도 任土 作貢을 이상적인 수취 모델로 인식하고 있었다( 世宗實錄 권49, 12년 8월 10일 戊寅). 그러나 관료들 중에서는 任土作貢의 원리를 충분히 적용해야 하 지만 현실적으로 不産貢物 등을 부과할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朴道植, 1995, 앞 논문, 68~75쪽). 따라서 任土作貢은 철저하게 관철되 었던 원칙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세제 개혁의 큰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념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78 韓國史硏究(161) 다.94) 즉 어느 지역에나 분정이 가능하면서 수요가 많은 공물과, 제 한된 지역에만 분정할 수 있는 비교적 수요가 많지 않은 공물이 혼 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조건, 즉 국가의 수요와 공물의 생산 및 운송 여건을 고 려한 합리적 공물 분정노력의 결과가 바로 實地의 물산 항목에 반 영된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공물은 경기에, 목재와 같 이 상시적이지는 않으나 수송이 관건인 물산은 그 외곽 3도에 우선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의 생산여건에 좌우되는 물산의 배 치는 지역의 생산여건을 고려하되 경기 지역과 그 외곽의 3도는 상 대적으로 많지 않은 종류의 공물을 납부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각 군현별로 납부하는 공물, 즉 생산 여건에 민감한 공물들의 경우도 대 부분 관에서 생산하는 관비공물로 배치하여 민의 부담을 최소화하게 끔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물 분정 시에 주요한 단위로 설정된 것이 道였다. 麗末鮮初 지방제도의 개혁은 道制의 정착과 郡縣制 확립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95) 그에 맞물려 부세 운영상에서도 道 단위의 중요성은 이전 시기에 비해 더욱 부각되었다. 이러한 점은 田租 수취와 관련된 사항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科田 설정을 위한 경기 지역의 재편성과 그에 따른 연속적인 道 범위의 재조정,96) 道 단위를 중심 으로 田租 수납 창고의 배치,97) 踏驗 등 田租 수취 제반 사항에서의 觀察使의 역할98)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수조권 분급을 통해 재 94) 조선 후기 자료인 萬機要覽을 통해 各司에 지급되는 공가를 살펴보면 燒木・ 炭・蒿草 등의 貢價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들은 지역에 따라 생산 여건의 차이가 큰 물종들로 보기는 어렵다. 즉, 국가 운영에서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물들은 ‘지역의 특산물’ 보다는 일상 적 관아업무에 소용되는 물품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95) 李樹建, 1989, 앞 책, 10쪽; 李存熙, 1990, 조선시대지방행정제도연구, 일지 사, 18~30쪽 참조 96) 李樹建, 1989, 위 책, 37~49쪽 및 119~126쪽 참조 97) 經國大典 권2, 戶典 漕轉 및 崔完基, 1976, 앞 논문, 401~406쪽 참조. 98) 經國大典 권2, 戶典 收稅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79 정을 운영하고 300여 개 이상 군현에서 이루어지는 조세 수취를 관 리, 감독하는데 있어 道制는 매우 효율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공물의 분정에 있어서 道 단위의 중요성은 田租와 마찬가지의 이 유로 부각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공물 수취는 田租의 수취과정처 럼 통일성을 갖추기 어려웠고, 때문에 도 단위의 부세 운영 역시 상 대적으로 느슨하게 운영되었다. 즉 수취와 수송과정에서 각 군현의 독자성이 田租 수취보다는 강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99) 그럼에 도 불구하고 공물을 道 단위로 분정 함으로써 국가는 상당한 편의를 도모할 수 있었다. 재난이나 재정 운영에 따른 공물 수취량의 조 절,100) 군현 단위를 넘어서는 대규모 공물 마련의 용이함101) 등이 그 러한 예이다. 또 하나 道 단위로 공통된 물산 수취가 이루어지는 배경에서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進上制度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進上物은 각 도별로 분정되고 수납되었다. 進上物의 마련은 실제 군사지휘관 들의 예하병력을 통해 생산되기도 하였으나, 도내 각 군현에 분정되 어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 民戶에서 직접 물산을 수취 하기도 하였다. 즉 공물과 進上은 서로 다른 稅目이지만 그 수취과정 은 매우 유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진상물의 존재는 도 내 군 현들이 공통적인 물산을 부담하게 하는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 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實地 물산 항목의 분석을 통해 드러난 15세기 공물 분정 의 특성들은 합리적인 제도운영에 대한 국정담당자들의 고민이 담긴 張炳仁, 1978, 「조선초기의 관찰사」 韓國史論 4, 171~172쪽 李存熙, 앞 책, 118쪽 99) 經國大典에는 공물의 수취와 상납 과정에 있어서 관찰사의 책임이 명시되 어 있지 않다. 田租수취과정에서의 답험 및 운송에 대한 관찰사의 역할을 염 두에 두면, 공물 수납 과정은 각 군현의 수령의 책임이 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고 할 수 있다. 100) 太宗實錄 권30, 15년 9월 14일 戊申 世宗實錄 권18, 4년 12월 28일 辛亥; 권20, 5년 4월 21일 辛未 101) 世宗實錄 권50, 12년 12월 1일 丁卯 80 韓國史硏究(161) 결과였다. 각 지역의 생산 여건과 수송 여건, 그리고 그를 운영하는 행정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民의 부담을 최소화 하는 한편 으로 국가 수요에도 긴밀히 대응하는 수취체계를 구상한 것이다. 건 국 직후부터 이루어진 이 작업은 世宗代에 이르러 일차적인 제도가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조대 대납공인정책의 도입, 15세기 말 관비공물의 해체, 연산군대 신유공안의 성립 등으로 공물의 제도적 문제점이 크게 노출되기 시작하였지만, 조선에서는 8결작공의 도입 등을 통해 최대한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면서 대동법 성립 이전까 지 공물제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수취구조는 수취뿐 아니라 그에 기반한 재정 운영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동법 시행으로 공물이 표준화 된 결세로 전환된 18세기 이후에도 주무기관인 宣惠廳은 도별 分廳 體制를 유지하였다.102) 전결에 근거하여 전국적으로 비교적 비슷한 부담액을 상정한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분청체제가 유지된 정확 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앞서 지적한 공물의 수취구조에서 파생된 재정 운영상의 특성이 선혜청의 운영에 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세종실록 지리지 물산 항목의 특성과 공물 관련 항목 의 구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15세기 초반 이루어졌던 공물 분정의 실제 양상을 지역별로 개관해 보았다. 그러한 공물 분정은 제도적 약 점을 가지는 공물 수취를 가능한 합리적으로 운영하려 했던 지배층 의 다양한 고민이 담긴 결과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102) 분청체제에 기초한 선혜청의 재정 운영에 대해서는 김옥근, 1984, 조선왕조 재정사연구Ⅲ, 일조각 참조.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81 세종실록 지리지는 조선 초 국가의 제반 제도운영에 활용되기 위한 자료로 작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 물산 항목 역시 국가의 수 취제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었다. 각 항목은 각각 전세, 공 물, 약재수취 등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는데, 이는 세종실록 지 리지보다 7년 전에 완성되었던 경상도지리지의 서술 원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물산 항목 중 특히 공물 관련 항목은 도 단위와 군현 단위 로 이중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현 내에서도 土貢 및 土産 항목으 로 구분되어 있었다. 있었다. 도 단위의 항목인 厥貢에는 도 내 모든 군현에서 수취가 가능하거나 혹은 도 단위 인력을 통해 마련되는 물 산(每邑所産物)과 각 군현에서 특징적으로 수취되는 물산(土産稀貴 者)이 혼재되어 기록되었다. 각 군현에서 수취되는 물산들은 다시 관비공물과 여타의 물산으로 구분되어 각각 土貢 항목과 土産 항목 으로 기록되었다. 때문에 한 군현의 공물 분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 두 단위의 항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공물 분정의 현황을 개관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공물 분정에서 가장 고려되는 행정단위는 도라는 점, 둘째로 각 군현별로 상당한 수의 관비공물이 존재한다는 점, 셋째는 도성인 한양과의 거리에 따라 도별로 공물 분 정의 양상이 상이하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특성은 조선의 공물 분정 이 국가 수요, 운송 여건, 생산 여건을 모두 고려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었다. 또한 그 와중에서 물산의 생산 및 수취, 분 정의 과정에서 도 단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일반 군현에서는 고려 대의 소의 역할을 각 군현의 관아가 담당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종실록 지리지 물산 항목에 기재된 내용들은 당시 조 선이란 공간의 물적 근거들을 국가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조달 할 수 있는가 하는 구상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는 제도적 약점을 메울 수 있도록 하는 당국자들의 상당한 고민이 투영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의 연구에서 공물 수취는 항상 82 韓國史硏究(161) 주제어: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 공물, 관비공물, 진상, 진상물, 공 안, 횡간, 공물분정 투고일: 2013. 2. 2. 심사완료일: 2013. 6. 10. 게재확정일: 2013. 6. 21. 자의성・불합리성만이 부각되어 언급되었으며, 특히 조선 후기 대동 법으로 귀결되는 공물 수취의 제도적 변혁의 성과는 공물에 대한 부 정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조선 초기 공물 수취의 제도를 구상 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는 재정 수요와 공물 분정을 최대한 합리적 으로 접목시키려 했던 고민이 있었음은 다시금 음미해야할 사실이라 고 생각된다.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83 참고문헌 1. 자료 朝鮮王朝實錄 慶尙道地理志 慶尙道續撰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經國大典 三峰集 2. 저서 및 논문 高錫珪, 1985, 「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 韓國史論 12 이지원, 1990, 「16~17세기 전반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 李 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李載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 叢刊行委員會 金東洙, 1991, 「 세종실록 지리지의 연구-특히 物産・戶口・軍丁・墾田・ 姓氏項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박사학위논문 ___, 1993, 「世宗實錄地理志 産物項 檢討」 歷史學硏究 12 박현순, 1997, 「16~17세기 貢納制 운영의 변화」 韓國史論 38 姜制勳, 2002, 朝鮮初期 田稅制度 硏究-踏驗法에서 貢法 稅制로의 전환 -,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院 ___, 1998, 「조선초기의 전세공물」 역사학보 158 ___, 2006, 「조선 세조대 공물대납정책」 조선시대사학보 36 이기봉, 2003, 「朝鮮時代 全國地理志의 生産物 項目에 대한 檢討」 문화역 사지리 15-3 김동진, 2009, 「조선초기 土産물 변동과 공안 개정의 추이」 조선시대사학 보 50 이성임, 2009, 「16세기 지방 군현의 공물분정과 수취-경상도 성주를 대상 으로-」 역사와 현실 72 朴道植, 2012,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혜안 84 韓國史硏究(161) <ABSTRACT> The Actuality and Characteristics of the Distribution of Tribute Items During the Joseon Era as Viewed from the Geographical Appendix to the Annals of King Sejong So, Sun-kyu This study analyzes and reconstructs the local product items listed in the <Sejong sillok jiriji (世宗實錄 地理志, Geographical Appendix to the Annals of King Sejong)>in order to shed light on how such tributary items were distributed during the early 15th century in Joseon Korea. Existing studies have focused on analyzing the institutional framework of tributes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daenap (代納) or bangnap (防納), which constitutes payment by proxy, carried out in a full scale from the 16th century. This study however focuses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dividual area-based distribution of tribute items during the 15th century and the background to such characteristics. This study focuses on the local product items listed in the <Sejong sillok jiriji (世宗實錄 地理志, Geographical Appendix to the Annals of King Sejong)>. The list of local product items found in the <Sejong sillok jiriji> was compiled in a manner that was closely related to the state's collection system. However, the uncertainty surrounding the characteristics of individual items has meant that there have been limitations to the use of such materials. As there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 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 85 are a very large number of items listed and the structure of items is divided into the provincial and local (gun-hyeon) unit levels, the use of the tribute related items found in the <Sejong sillok jiriji> has in the past proven to be even more difficult. To this end, this study sought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ibute related items found in the <Sejong sillok jiriji> and based on these characteristics, recreate the actual situation surrounding the tribute items which each region was expected to produce. The provincial level constituted the main administrative unit as far as the distribution of tribute items during the 15th century was concerned. Provincial differences surfaced in the patterns of the distribution of tribute items that were based on the distance from Hanyang. Thus, while most gun-hyeon units in Gyeonggi Province produced similar basic life necessities as tribute items, Chungcheong, Gangwon and Hwanghae Provinces, from which transportation was a more important issue, were asked to produce more specific items such as wooden materials. It was from these provinces as well that the greatest variety of tribute items were demanded. The Jeolla and Gyeongsang Provinces, which were located further from the central government, exhibited the biggest variety in terms of the tribute items produced at the local gun-hyeon unit. They were expected to produce local specialties such as fruits and raw material-based handicraft works. Although the Pyeongan and Hamgyeong Provinces produced the least number of different tribute items, they were expected to deliver high-priced articles such as sable and gold. These articles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international trade. This method of distributing tribute items was rooted in reasonable considerations of various conditions such as the demands of the state, situation in production areas, and transportation conditions. 86 韓國史硏究(161) Key words: Sejong sillok jiriji (世宗實錄 地理志, Geographical Appendix to the Annals of King Sejong), Gyeongsangdo jiriji (慶尙道地理 志, Geography of Gyeongsang Province), tributes, gwanbi gongmul (官備貢物, tributes prepared by the local governments), jinsang (進上, presenting the local tributes to the king), jinsangmul (進上物, local tribute items presented to the king), gongan (貢案, the schedule of annual revenue of Joseon), hoenggan (橫看, schedule of annual expenditures of Joseon), distribution of tribute item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