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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십자가의 도
1-17절, 단합을 권면함
[1-3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헤기아스메노이스)[거룩하여졌고] 성도라[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권위가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잘 계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3:2-7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직분자로 부르시는 몇 가지의 표가 있다고 본다. 첫째, 그 직분을 위한 마음의 강한 소원이다(빌 2:13). 둘째, 그 직분을 위한 은사 확인이다(롬 12:6). 셋째, 회중들의 인정과 추천과 선택이다(행 6: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를 보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로 만드셨다(행 9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복음 전파자로 택하시고 보내셨다(롬 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였다. 신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말한다(롬 1:6, 7; 8:28; 11:29; 고전 1:2, 24, 26; 7:20; 엡 1:18; 4:1, 4; 빌 3:14; 살후 1:11; 딤후 1:9; 히 3:1; 벧후 1:10; 유 1; 계 17:14 등). 그것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성도가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보인다. 그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다(롬 1:7).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후원을 받는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다. 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심히 부패한 죄인들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게 되었다. 죄씻음과 거룩하여짐이 구원이다. 죄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었고 죄씻음 받음은 영생과 행복과 평안의 원인이다. ‘성도’라는 명칭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붙여진 매우 존귀한 이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는 우리의 의와 거룩이 되셨다(롬 10:4; 고전 1:30).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해졌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가려졌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던 성경적 복음이며(롬 3:24; 히 10:10, 14) 여기에 참 자유와 평안이 있다(갈 5:1; 롬 5: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문안하지 않고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예수님을 약 68회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하나님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고백이며 그에 대한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사람이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 얻은 표가 된다(롬 10:9).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또 평안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 얻은 결과로 누리는 복이다. 죄인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셨다(마 11:28). 평안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을 다 포함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이 있다(요 14:27).
[4-9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口辯)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께서는] 미쁘시도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다. 그는 그가 감사한 이유를 좀더 설명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증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음을 감사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즉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다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의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했다.
둘째로, 그는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고전 13:13).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행하는 것이며, 소망은 주의 재림과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요 큰 힘과 위로이다.
셋째로, 그는 주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요 6:39; 10:28; 롬 8:30).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가 우리를 불러 예수님 믿어 구원 얻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도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스키스마)[분열]이 없이 같은 마음(누스)[생각 mind]과 같은 뜻(그노메)[판단 judgment] (KJV, NASB)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한 겸손한 호칭이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형제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였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위가 있었으나 그는 권면하였다. 이것도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겸손한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했다. 말은 생각과 판단의 표현이다. 생각과 판단이 같으면 말이 같아지지만, 생각과 판단이 다르면 말도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하게 단합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의 문제이었다. 그 교회에는 바울을 따르는 자들과 아볼로를 따르는 자들과 게바 즉 베드로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또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했다. 교회가 아직 분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인들 안에는 이미 단합된 마음이 없었고 교인들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지 않았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이신데 그의 몸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바울이 죽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단합해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런 죄악이다.
[14-17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며(마 28:19)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 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 받으면 반드시 구원 얻는다든지 세례 받지 못하면 구원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것이다(막 16:16; 요 3:36).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 받은 것을 감사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거룩함을 얻었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확신한 것을 감사했고 주께서 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했다. 그것은 신자들의 성화의 확실함과 끝까지 견딤의 진리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을 믿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강림하심은 동일한 사건이다(눅 17:30; 살전 4:16; 살후 1:7, 10; 히 9:2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이다. 주의 재림과 함께 마지막 심판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합해야 한다. 우리는 다 같은 말을 하고 우리 가운데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단합해야 한다. 교회는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교리적 차이 때문에 교파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교파가 성경의 근본 교리에서 이탈한 이단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18-31절,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道)(로고스)[말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의 도(道)’ 즉 ‘십자가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의 속죄적 의미가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구원 얻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19-21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케뤼그마)[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웅변과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인 전도로 구원해야 한다.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전통사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의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지혜를 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사람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역사상 기독교의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현대신학은 칸트 철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들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을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여기에 성경적 기독교가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고(요 6:51), 또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15:3-4)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 속죄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현재의 구원의 능력인 것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또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 믿는 우리는 죄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하며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히 죄악되어서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한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들이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다(사 64:6).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가 바로 그 방법이었다.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적 말이나 수사학적 말보다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오늘도 전도와 설교의 효력을 믿는다.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 됨을 보인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 정도를 뛰어넘는 말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정치적 권력이나 재력(財力)이 있는 자, 좋은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4).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어둡게 하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입문하기가 비교적 쉽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27-2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중 다수는 과거에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좋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몸이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사람의 근원을 알게 되었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또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산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이런 지식과 삶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30-31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엑스 아우투)[그로 인하여, 그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아포 데우)[하나님께로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중생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은혜와 복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과거에 지혜가 없이 정신적 혼돈 속에 살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혜가 되셔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바른 대답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 의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을 말한다. 세상은 불의하고 죄악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없었다. 죄악된 세상은 더럽고 불결하며 거기에 사는 죄인들은 더럽고 불결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더러움과 불결을 다 씻어주셨고 또 우리의 죄를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죄와 그 형벌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의인된 것, 성도된 것, 천국 시민된 것, 영생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 속죄 신앙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의 도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나,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와 다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기적과 초자연적 은사를 추구한다. 그들은 복음 진리와 속죄신앙과 경건과 계명 순종을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적 체험, 은사 체험을 추구한다. 또다른 이들은 사람의 이성의 판단이나 경험의 잣대로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판단한다. 그들은 성경을 신화의 책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였다. 우리는 이 두 경향을 다 경계하고 성경적 정통 기독교를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
셋째로, 십자가의 도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속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부족한 자들을 그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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