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노진 시집 | 개성공단에 내리는 비 | 문학(시) | 신국판 | 130쪽 | 2015년 9월 20일 출간
[책 소개]
그리운 평화를 노래하는 삶의 기록들
〈문학의전당 시인선〉 212. 2005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백노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제목에 드러나듯 이 시집에는 “황해북도 개성시 개성공업지구 1차 9-6번지”에서 “남북이, 북남이 한마음으로/분만한 평화구두”(「평화구두」)를 만들고 있는 시인의 경험에서 비롯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이남 생활’을 하고 있는 실향민으로서의 자의식이 투영된 시편들을 통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이다.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향민으로서 또 남과 북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금단의 땅 개성공단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체험적 진실에서 발원하는 이 시적 메시지는 한국시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것이다. 이 점이 소재와 주제의 측면에서 드러나는 이 시집의 특징이라면, ‘그리움’은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정서적 특성이다. 『개성공단에 내리는 비』는 “영혼의 또 다른 나를 낳는/남은 삶을 위하여” 지난 허물을 벗으려는, 아니 새것을 드러내기 위해 찢겨나가야 하는 옛것들의 진열장과도 같다. 지워지고 사라져가는 풍경에 대한 ‘삶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개인의 차원을 깨고 나와 보편성을 획득하는 그리움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령과 남녀와 계층과 이념을 넘어 그리움을 평화의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백노진 시인의 첫 시집은 내일의 평화에 대한 예감과 함께 가슴 뭉클한 것들의 뽀얀 얼굴들이 물수제비처럼 떠오르는 수면(水面)처럼 문득 우리의 뒤를 돌아보게 한다.
[추천 글]
안개 속 안개 그 속으로 희망을 나르는 백노진 시인은 절쑥거리며 세상을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도 ‘절쑥’이며, 어긋나버린 신체의 한 부분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기울진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절쑥’이다. 시인에게 시는 실향민의 가지 못하는 고향이고 부모이고 신앙이며 바닥이다. 그 바닥엔 목숨 내건 민들레 사명이 있다. 개성공단에서 시인은 활짝 웃는 민들레 사명으로 고향을 사수하고 있다. 톱의 사명감으로 톱도 운다고 말하는 시인, 톱이 연주하는 사명은 시인의 애끓는 기도이다. 백노진 시인에게 시는 사명이요 사역이자 또다시 본향의 길로 인도하는 밝은 푯대다. 안개 속 안개 그 속에서 천상의 시를 쓰는.
—이우림(시인)
[책 속으로]
개성공단에 내리는 봄비
경칩(驚蟄)도 춘분(春分)도
삼월의 빗속에 있다
개성공단 안
이해가 되다가도 이해가 안 되어
짠하게 지낸 아주 긴 며칠
메마른 가슴 속에
봄비가 쌓인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녀성 동무들의 우산 행렬 위에서
재잘거리는 봄비
노여움을 푸시라요
찻잔을 들고 와
미안해하는
녀성 동무 마음속에도
저 봄비가 내리리라
멀리 또 가까이 보이는
민둥산에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톱이 울다
첼로만 사랑하던 활대가
날카로운 톱날 위에 흐느끼듯
온몸을 떨고 있다
말총의 격렬한 몸부림
연주자의 손목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무릎 사이
활이 뿜어대는 숨결에
톱날이 춤을 춘다
수많은 나무를 베어낸 저 사납던 톱날
악기 되어 속죄하듯 쏟아내는
등 굽은 저 소리
뼈 마디마디 부서지듯
마음속 열고 들어오는
사명이란 찬양곡
귓속이 애절하다
박수가 뜨겁다
[시인의 말]
담쟁이 되어 기어오르는 추억의 넝쿨들
발바닥을 통해 내 심장소리를 듣는다.
절쑥거리며 살아온 세상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아픔의 상처라도
닦아줄 수 있다면
영혼의 또 다른 나를 낳는
남은 삶을 위하여
[출판사 서평]
〈문학의전당 시인선〉 212. 2005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백노진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개성공단에 내리는 비』는 시인 스스로 ‘시인의 말’에 썼듯이 “영혼의 또 다른 나를 낳는/남은 삶을 위하여” 지난 허물을 벗는, 아니 새것을 드러내기 위해 찢겨나가야 하는 옛것들의 그립고 아쉬운 진열장과도 같다. 해진 수첩에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나란히 가지런히 정돈해 두었지만 정작 유리 밖은 어두운 천으로 덮어 두었던 시인의 삶과 사랑과 그리움의 정체다. 간단하게 말하면,오늘의 그를 있게 한 생의 요소(要素)들의 첫 번째 결집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첫 시집은 “영혼의 또 다른 나를 낳”을 수 있는 무언가 두텁고, 따뜻한, 가슴 뭉클한 것들의 뽀얀 얼굴들이 물수제비처럼 떠오르는 수면(水面)처럼 문득 우리의 뒤를 돌아보게 한다.
삶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되돌아보고 되찾고 싶어지는 것이 ‘고향’이다. 고향은 낯익은 것, 친숙한 것,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시에서 고향은 셀 수 없이 많은 상징을 거느린 그야말로 복잡하고 원초적인 대상이다. 백노진 시인의 고향은 ‘어머니’, 모친에서 시작된다.
서재 책장 위 종이상자에서/언제부턴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너기 좀 보라우!”/삼십여 년 손때 묻은 성경책과 돋보기/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기신 뒤에도/여전히 카랑카랑하시다//한 손에 성경책/한 손에 사탕봉지 들고/예수님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에서 살 수 있다며/시골동네 누비시던 백발의 어머니/시시때때로 들려주시던/“고럼 말씀대로 살아야디, 눈 밝을 때 널심히 성경책 보라우!”//세상 끈 다 놓으신 치매 속에서도/주기도문은 잊지 않으시고/어느 날 식사시간/“애미야! 예수님, 숟가락 하나 더 개지고 오라!”/하시던 어머니//바래고 해진 성경책 속에서/환하게 미소 지으며/금방이라도 뛰쳐나오실 것만 같다/반백이 넘은 지금에서야 열기 시작한/내 조그만 종이상자 속/어머니의 성경책
―「어머니의 유산」 전문
시에서 몇 개의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실향민’이다. 1연에 “너기 좀 보라우!”라고 주문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안도 말투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표준어를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시에 직접 인용하면서 굳이 사투리를 만드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보도 있다. 그는 이미 어머니를 여의었다. “삼십여 년 손때 묻은 성경책과 돋보기”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가 기독교인임이 드러난다. 비록 “반백이 넘은 지금에서야 열기 시작”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성경책’을 애틋한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세 가지 경우를 함축하고 있다. 백노진 시인은 ‘평북 박천’ 출신이다. 당연히 장소로서의 고향을 잃었다. 어떤 상실감은 동병상련의 마음을 더 강하게 한다. “혈혈단신 월남한 지 60여 년/손발이 갈쿠리 되도록 살아온 이남 생활,/5남매 자식 출가시킨/짝 잃은 함경도 하부래비”(「와성(蛙聲) 2」)가 등장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남생활’로 표현된 실향의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에 작은 위로가 되어준 것이 ‘개구리 울음’이다. 개구리 울음에 남과 북이 있을 리 만무하다. 종교 면에서도 실향의식은 드러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본향(本鄕)’을 찾아가는 종교다.이 말은 뒤집어보면 시인이 본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은 「능금」, 「고백」, 「신의 꽃」 등의 작품에서 기독교의 믿음에 근거한 시적 정서를 보여준다. 특히 4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기도’, ‘에덴’, ‘당신’과 같은 직접적 시어를 통해 이러한 점을 환기하고 있다.
소위 ‘이산(離散)’으로 이해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상황에서 이번 시집의 경우, ‘어머니’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과 정서의 뿌리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서 끝나고 만다면 시인은 걷잡을 수 없는 ‘고아의식’으로 이승의 삶을 마구 헝클고 뒤틀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전혀 다른 모습과 방향을 보여준다.
생전에 어머니가 쓰시던 숟가락,/자개장식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학으로 날아 앉아/찌개를 끓이고 간을 맞춘다//내 새끼 키울 때는 제대로 봐주지 못했다며/장난기 심한 손자, 눈 안에 넣고 볼을 비비시던//그 손자가 결혼하여 증손자를 낳고/벌써 제 아들 자랑이 한창인데//둘째 며느리가 좋아하는 학이 사는 반달 숟가락,/오늘도 감자껍질을 긁어내고 프라이팬 두부를 뒤집고/밥솥 누룽지 벅벅 긁는다//손때 묻은 반달 숟가락,/오늘도 가족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반달 숟가락」 전문
맨 먼저 ‘반달’은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반쯤이나 닳았다는 것인데, “생전에 어머니가 쓰시던 숟가락”은 “둘째 며느리가 좋아하는 학이 사는 반달 숟가락”이 되었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흐뭇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그의 또 다른 작품 「유월이 오면」을 보면 어머니는 결코 부재(不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잔잔한 진초록 호숫가에/활짝 피어오른 연분홍 수련만 보면/아내의 마음속에 그려진다는 시엄니 색깔/며느리 미소 속에 아이처럼 환하게/웃으시는 울 엄니가 보”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각이 아니라 사실로 이미 시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같은 색으로 끈끈하게 맺어져 있고, 색이 아니라 물질(숟가락)을 이어받은 둘째 며느리는 그 결속의 과정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백노진 시인의 첫 시집은 그리움과 화평 그리고 시작과 끝으로서 가족의 관계, 가족의 문제, 가족의 의미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진공 속의 수은 방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결국, 시인의 그리움이 개인적 특성을 깨고 나와 보편적인 정서로 바뀌는 지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이야말로 『개성공단에 내리는 비』가 연령과 성별과 계층과 이념을 넘어 정서적 울림을 성취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저자 소개]
백노진
본명 백영호.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2005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청년 시절 주문진에서 〈청해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가 늦은 나이에 첫 시집을 묶게 되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평화구두
웃음꽃
봄을 기다리는 민둥산
안개 속으로
안중대화(眼中對話)
무명초의 미소
개성공단에 내리는 봄비
교류(交流)
낙조(落照)의 꿈
와성(蛙聲) 2
어머니의 유산
분재
고백
유월이 오면
능금
제2부
민들레 선교사
용도변경
어느 시인의 수첩
주문진
접목의 삶
너의 책 한 권
질서
세상살이
톱이 울다
북〔鼓〕쟁이
콘크리트 사랑
와성(蛙聲) 1
너는 아느냐
지구의 눈물
농부
반달 숟가락
아랫목의 추억
제3부
풍란
백목련
낙엽
창밖의 풍경
가을 이야기
뒤안길
소생(蘇生)
여름의 노래
눈
과부도
어느 모자(帽子)의 일생
신의 꽃
천설화(天雪花)
애수
이슬의 노래
진실
제4부
그리운 사람들
바람의 만찬
청상목련
옛날 이발소
천일 꽃
어머니
초롱한 눈빛들에게
새 직장
독수리 지휘자
부부
단풍나무의 기도
하와의 봄
존재의 이유 1
존재의 이유 2
시(詩)의 기도
짝사랑의 노래
꽃이 된 이유
해설|디아스포라, 그리고 어느 시인의 해진 수첩 / 고영(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