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관 3기 - 3차 (2016.01.18. 월)
수필문학의 안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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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 한 톨
쌀 한 톨 콩알 낱낱 일일이 줍는 것은
내 지나온 아뜩한 길 마음에 걸려서다
가뭄에 땅볕에 타던 그 긴 날이 아파서다
살아온 길을 이어 한 숟갈 밥이 되라
즐거이 부서져서 한 방울 피가 되라
한 톨도 그냥일 수 없는 오 무거운 생이여
▪선지국밥/ 김민영
주말이면 대구로 간다.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는 수고를 해도 배우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간이 터미널에 내리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선지국밥 3천 5백 원’이라는 간판이다. 나머지 가격을 읽어보아도 대부분 5천 원을 넘지 않는다. 요즘 만 원짜리 한 장을 들지 않으면 밥을 먹기 어려운데 이 집은 가격이 싸다. 집에서 몇 술 뜨지 않고 길을 나섰기에 군침이 돌면서 배속이 쓰려 온다.
3천 5백 원의 매력적인 가격이 나를 유혹하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한다. 한두 번 이라면 먹고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일 년을 다닐 예정으로 공부를 시작했기에 주말마다 사서 먹는다면 그 돈이 얼마인가. 국밥 한 그릇이 싼 가격이라도 한 달에 4번이고 일 년을 계산하면 큰돈이 된다. ‘안 돼, 안 돼. 절대 먹을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 돈으로 아이들을 위해 소고기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면 며칠을 먹일 수있다. 잠시만 견디면 될 일을 나 혼자 배를 채우자고 돈을 쓸 수가 없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들은 내가 끓여주는 소고깃국을 좋아한다. 소고깃국이라기보다 콩나물국이 더 맞을 것이다. 맛을 내기 위해 집 간장에 조린 소고기 몇 모타리를 넣은 멀건 콩나물국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어떤 국보다 밥그릇을 빨리 비운다.
소고깃국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아이들은 선짓국은 싫어한다. 요사이 선지를 잘 팔지 않지만, 언젠가 옛 생각이 떠오르고 하여 선짓국을 끓여 준적이 있었다. 구수한 냄새에 소고깃국을 기대하던 아이들이 처음 보는 덩어리를 보고 의아스레 물었다. ‘소의 피’라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숟가락을 뗐다. “배가 불렀다.” 야단을 치면서 속이 상했다.
“먹어 봐라! 맛이 괜찮다.” 달래어 봐도 결국 외면하여 혼자서 며칠을 두고 먹은 적이 있었다. 불위에 데우고 또 데워서 나중에는 선짓죽이 된 것처럼 흐물해진 야채와 조각난 선지가 섞이어 질릴만큼 먹었다. 더는 선짓국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렇지도 않았다.
선짓국에 대한 기억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을 때도 있었다. 졸업이 다가오자 학교에서 보내준 회사에 들어갔다. 일을 하여 월급은 받았지만, 어머니와 둘이 살기가 빠듯할 만큼 적었다. 졸업하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일을 다녔다. 지병이었던 무릎 관절염 때문에 다리를 끌면서 감자와 양파 같은 농작물을 캤다. 농장 주인이 편리를 봐주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머니 병이 더 심해지면서 일을 그만두고 내가 취직하게 되자 내 월급이 유일한 생계비가 되었다.
월급날이면 어머니는 시장에 냄비를 들고 가서 선짓국을 사다 놓았다. 월급이 든 봉투를 내밀면 연탄불 위에서 뽀글뽀글 끓고 있는 선짓국을 냄비째 상에 올렸다. 습관적으로 아침은 먹지 않아 온종일 점심 한 끼로 견딘 배에 구수한 소고기 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국물을 먼저 한 숟가락 떠서 먹으면 소고기 기름이 입안이 짝짝 달라붙는 것이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 뜨거운 선지를 입안에 굴리면 부드러운 느낌이 혀를 닿고 온몸에 뜨뜻한 기운이 퍼졌다.
선짓국뿐만 아니라 나는 소고기로 만든 음식은 뭐든지 잘 먹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고기 대신 가격이 싼 선짓국을 샀다. 딸이 벌어오는 돈을 아끼기 위해 선짓국 한 그릇으로 월급봉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었다. 선지를 볼때면 애처롭게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고 내 옆에서 “고생했다. 많이 먹어라.” 하시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지금 나에게 적절한 말인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하여 몇 년간 돈을 잘 벌였다. 그때는 선짓국을 대신하여 소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었다. 장사를 정리하고 결혼을 하면서 다시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어렵게 마련한 작은 가게를 건물주에게 빼앗기고는 도돌이표처럼 선짓국을 먹던 살림살이로 돌아왔다.
봄에 시작한 공부가 가을이 되었다. 선선한 날씨로 길 나서기가 좋다고 얼마 전에 느꼈는데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간이 터미널에 도착하자 이미 어둑살이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댄다. 우리 동네 날씨를 생각하고 나설 때 옷을 얇게 입은 탓에 오들오들 떨리며 한기까지 찾아들었다. 가로수 잎사귀가 바람결에 우수수 날리자 떨어지는 낙엽처럼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보인다.
추위를 잊기 위해 한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서성거리자 저절로 식당 안으로 눈이 간다. 커다란 난로 옆에 손님을 기다리는 종업원이 서있고 손님들은 선지국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석쇠 위에 올려놓은 고기에서 연기가 내 코에 들어오듯 착각을 일으키며 환풍기로 빨려 들어간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지만, 내 눈에는 3천 5백 원짜리 간판에 그려놓은 선지국밥이 어른거린다.
■ 틈
-사인암(舍人巖)에서 /강여울
멀리 소백산 꼭대기에 흰 눈이 보이기도 했지만 들판은 아직 황금빛으로 눈부셨고, 가로수의 단풍은 설익어 버짐처럼 번지는 중이었다. 먼 길 차멀미가 있었으나 단양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절경에 취하여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건강하다고 자신하는 사이 몸은 정작 그렇지 않다고 일찍부터 균열의 조짐을 보였음에도 나는 애써 모른 척 했다. 멀미 또한 몸의 습성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돌아오는 차안에서 결국은 몸이 견디지 못하였다. 손목에 주사바늘의 흔적을 달고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남편은 염려와 잔소릴 주저리주저리 엮어 흉을 봤지만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이미 우리가 살아내는 힘은 틈에서 생기는 것임을 단양의 사인암(舍人巖)에서 더 깊이 읽었던 때문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비바람이 시나브로 다듬어 왔을 기암괴석의 조각품은 수직의 발아래 맑디맑은 남조천에 저를 씻어 왔던 양 단아했다. 아니 물이 오히려 바위에 몸을 씻어 어린 물고기들을 키워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남조천을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물에도 고기들이 다니는 길이 있듯이 깎아지른 모양을 한 돌들도 층층으로 저희들끼리 길을 튼 듯하다.
미로처럼 이어진 틈, 그 틈들은 소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나무와 풀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그것들은 천년 침묵의 바위를 믿는 듯 불평 없이 그 틈에 뿌리를 박고 푸른 생을 살아내고 있으되 바위를 넘보지 않았다. 그렇게 뿌리가 숨 쉬는 그 틈들은 돌들이 서로를 당겨 이어주는 힘이 되어 천만년 세월을 버티어 온 것이리라.
틈들이 장관의 한 몫을 연출하는 사인암을 바라보며, 틈이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파괴의 징조인 균열이 되지만, 필요한 곳에서는 예술이 되기도 하고, 더욱 견고한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틈의 힘을 믿지 않고서야 보기만 해도 아찔한 암벽 끝, 비좁은 돌 틈에서 소나무 그렇듯 늠름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사인암이 아름다운 것은 크고 작은 틈들이 적당하게 암석들을 엮고, 뿌리 또한 그 틈을 누비며 바위와 돌을 잡아주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인암 절벽아래 너럭바위에 새겨진 장기판과 바둑판 또한 상대의 틈을 노리는 게임이 아니던가. 사람의 삶이란 것도 서로의 틈을 찾아내고 그 틈을 채워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슬아슬하게 깎아지른 암벽아래 장기, 바둑을 두며 신선처럼 살아도 사람이란 그 암벽의 틈바구니에 사는 나무들보다 짧게 머물렀다 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탁 선생의 인생무상을 읊은 시는 이곳의 절경이 절로 나오게 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기판이며 바둑판은 그곳에서 허허실실 틈을 찾던 사람들을 추억하듯 틈틈이 쌓이는 세월 먼지를 셈하고 있었다.
먼지처럼 틈을 잘 찾아내는 것도 드문 것 같다. 십여 년 전 남편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었다. 건축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어 무조건 단단하고 좋은 자재만 쓰면 튼튼한 집이 되는 줄 알았다. 남편은 콘크리트며 벽돌이며 타일까지 최고의 강도를 가진 것을 선택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집 안팎으로 적지 않은 균열이 생겼는데 그 균열의 틈마다 먼지가 가득 들어찼다. 집도 숨을 쉰다더니 그 숨길 따라 먼지도 자릴 잡나 보다. 건축에 무지했던 남편은 조금의 틈이라도 있을까 하여 빈틈없이 꼼꼼하고 튼튼하게 공사해 줄 것만 강조한 것이 균열의 원인이 되었다. 큰 다리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숨구멍인 틈을 필수적으로 내야 한다고 한다. 이 틈을 건축 용어로는 ‘줄눈’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온도 변화나 건조수축, 지진과 같은 진동, 기초부동침하 등으로 균열이 심하게 생기고 이로 인한 건물의 부식이나 파괴가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이 줄눈은 도로가나 강 언덕에 높이 쳐진 콘크리트 옹벽이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나 고가도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철길에도 이 틈은 있는데 이 틈이 철길이 휘어지는 것을 방지하여 늘 기차가 똑바로 갈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이러한 틈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틈임에 틀림없다.
건축구조물이나 집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닫고 빈틈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쩐지 가까이 하기가 겁이 난다. 나는 공부는 뛰어나게 잘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엄격한 부모님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모범생이었고 친구가 없었다. 그런 내게도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의 매일 지각을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가정방문을 하신 선생님께 아버지는 “시집가서 팔자가 좋아 사람을 부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이 할 줄 알아야 남을 부리지요. 당연히 밥하고 설거지는 다 해놓고 학교에 가야합니다.”하셨다. 때문에 나는 아무리 지각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 특혜를 받았으므로 오히려 나의 틈은 친구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늦어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는데 아이들이 나를 보자 킥킥 웃는 것이었다. 메리야스가 하얀 교복 윗도리 아래로 나와 치마 위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은 창피했으나 그 후로 내게 절친한 친구 몇이 생겼다. 친구들을 통해 깔끔하고 시계바늘처럼 빈틈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로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라면 내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내 모습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적당히 틈이 있는 사람이 좋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집에는 혹시나 내 몸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신경이 쓰이고,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은 사람이 맞나 싶어 다가서기 망설여진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딪히면 튕겨져 나오는 유리벽 같은 느낌이 들어 대하기 조심스럽다. 더러 실수도 하며 남의 실수도 포용하는 사람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나는 지금 사인암을 비롯하여 단양 곳곳의 절경을 생각한다. 그들은 적당한 틈을 두고 각각 그 틈에 맞는 나무들과 바위들과 키가 크고 작은 생명들을 골고루 키워내기에 엮어지는 아름다움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수십 층의 높은 건물과 긴 다리와 고가도로가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를 견디는 것도 일정한 틈으로 숨을 쉴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구촌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는 역사,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 다른 틈을 메울 수 있는 저마다의 멋과 재주들을 지녔기에 가능한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틈이 있고, 이 틈이 서로 다른 존재의 가치를 일깨운다.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틈의 가치를 알기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쓰러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건강을 외면하고 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 타법 / 엄옥례
'탁탁!' 큐대에 맞은 공이 경쾌한 소리를 터트리며 궤적을 그린다. 득점에 성공한 선수는 다시 큐 끝을 다듬으며 눈동자를 굴린다.
카운터에 앉아 당구 경기를 바라본 지 몇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무연히 보던 풍경이었으나 기묘한 공의 움직임에 점점 매료되었다. 타법에 따라 공은 일이삼차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기도 하며, 당기고, 밀어내고, 충돌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득점할 때마다 예술 작품을 본 듯 머릿속에 잔영이 남는다. 그 세월이 삼 년 넘자 이제 눈높이는 서당개 풍월을 넘어 관조하는 안목까지 갖추었다.
당구대는 완전히 수평이다. 비탈도 돌부리도 없어 얼핏 쉽게 보이나 막상 득점을 하기란 그리 만만치 않다. 선수는 공의 거리에 따라 힘을 조절해야하고 위치에 따라 각도도 가늠해야 한다.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공을 치지만 예측 못한 충돌이 일어나거나 큐미스가 나는 바람에 득점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게 공은 앞일을 다 알지 못하는 우리네 삶처럼 당구대 위에서 인생함수의 그래프를 그린다.
오늘도 김원장, 강사장, 박사장이 모인다.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당구대 위에 빨강, 노랑, 하양, 공을 뿌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처럼 한 평 남짓한 당구대 위의 공도 알록달록하다. 색깔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이 어울려 당구를 치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큐 끝에 쵸크를 살살 바른 김원장이 공을 겨눈다. 키가 작고 몸집은 왜소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수학 학원 원장답게 정확하게 각도를 계산한 다음 공을 친다. 신중하게 공을 겨누는 동안 옆 사람들도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그의 타구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드럽고 간결하다. 난이도가 높은 공을 칠 때는 아이스 링크를 수놓는 피겨 선수의 스케이트처럼 궤적이 유려하다. 삼각함수를 잘 푸는 수학 선생답게 어려운 공도 잘 치기에 동네 당구장에서는 고수 대접을 받는다.
야채가게 강사장은 당구대에 바짝 붙어 서서 삑삑 소리를 내며 쵸크를 바른다. 잔꾀가 많은 그는 공을 모아 대량 득점을 노릴 요량으로 끌어치기를 즐긴다. 끌어치기는 힘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고 다음 공을 예측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사장은 욕심이 앞서 타법이 불안하다. 공이 멈추기도 전에 큐를 드는가 하면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 큐미스가 잦다. 그럴 때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큐 끝을 째려보다가 당구장을 휘휘 돌며 다른 큐를 골라온다. 어쩌다 멋지게 득점할 때면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그 다음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구경하던 박사장이다. 종업원이 열 명 넘는 중화요리 집 사장답게 몸집도 왕서방 스타일이다. 그저 사람 만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당구 기술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짜장면 말듯 면발만 잘 뽑으면 된다는 주의다. 당구도 일관성 있게 힘으로만 친다. 그러다 공이 깨지거나 당구대 바닥이 찢어질까 염려가 될 정도다. 마음을 비운 탓인지 행운 샷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럴 때 박사장은 그것도 기술이라며 우기다가 원성이 높아지면 입막음으로 짜장면 한 그릇씩을 돌린다.
그들의 세상살이도 당구 타법만큼이나 개성이 있다. 김원장은 공무원을 그만 두고 약학을 공부해 대형약국을 경영했다. 약국이 부도가 난 뒤, 학원을 차렸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분위기다. 다양한 재능이 오히려 탈이 되었을까. 거기에 깐깐한 성격이 난관을 자초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강사장은 잔 욕심이 많고 입이 쉴 새가 없다. 춘향전의 방자처럼 무엇을 해도 체통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잔정이 많고 붙임성이 좋아 그의 야채 가게는 점심때가 지나면 물건이 동이 난다. 매일, 은행에 들렀다 오는지 보란 듯 카운터 옆 의자에 앉아 통장을 넘긴다. 강사장에 비해 무게감이 있고 일관성이 몸에 베인 박사장은 남보다 학력이 높거나 발 빠른 면은 없다. 그래도 성격이 호탕하고 믿음직스러워 동네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다. 잡기를 모르고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긴 뚝심 덕분에 탄탄한 부를 쌓았지 싶다.
세계 최고 선수인 '브롬달'은 밀어치기, 그에 필적하는 '자네트'는 끌어치기를 구사한다. 경기에 들면 둘 다 숨이 막힐 듯 정교한 기술로 당구공을 부린다. 브롬달이 짜장면 뽑는데 고수가 아니듯, 김 원장, 강 사장, 박 사장, 이들 역시 당구에는 고수가 아니지만 모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타법으로 득점을 한다. 신이 사람마다 재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기 망정이지 모두 다 똑 같은 재능을 주었다면 사공 많은 세상은 이미 산으로 가지 않았을까.
판화 같은 당구대지만 그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역동적이다. 고수들의 진검승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김원장, 강사장. 박사장의 경기는 산만하지만 함께 즐기는 재미가 있다. 그것이 당구장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파란 당구대 위에 알록달록 공이 있어야 경기가 되듯 세상도 여러 빛깔의 사람들이 어울려 온전한 그림이 된다.
나는 살면서 어떤 기술을 구사했을까. 욕심을 내서 끌어 치기도 하고 멀리 보고 밀어치기도 해보았다. 그래도 잘 안 되면 비틀어치기도 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에 정신이 흐트러져 큐미스를 내기도 했다. 앞길이 불안해 점집 문을 두드려 화를 피하는 방법을 묻기도 했고 복권 한 장에 행운을 걸기도 했다. 귀가 얇은 탓에 훈수대로 치다가 겪은 낭패야 말하기도 쑥스럽다. 상황에 맞는 기술을 부려야 하지만 다양한 기술은커녕 주특기 하나 없으니 아무래도 나는 인생의 고수는 아닌 듯싶다.
삶에서 나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정밀한 타법을 구사하지는 못해도 큐를 손질하고 당구대를 정돈하는 기술은 제법이다. 소소한 깨달음이나 그것이 나만의 타법이다. 손님이 다 가고 당구장이 고요해지면, 오늘 득점을 셈하고 불을 끈 후, 하루의 셔터를 내린다. 세상의 한 풍경인 나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어둠속으로 종종걸음을 걷는다.
▪ 눈 /조현태
스스로는 절대로 눕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강제로 눕혀놓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어난다. 기계적으로 무게중심에 의해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은 것, 바로 오뚝이다. 무게중심은 오뚝이의 본능과 같다. 얼굴을 가만히 보면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벙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다. 실패나 좌절은 감은 눈과 같다. 오뚝이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눈을 동그랗고 크게 그려놓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착상이리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하나뿐이다. 의학적 용어로 선천성 일안실명이라고 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눈이 두 개 이상의 복수인 까닭은 거리감을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을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쪽 눈을 가린다. 주먹을 쥐고 검지만 펴서 손목을 직각으로 구부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의 검지 끝을 마주 닿게 해 보자. 서로 거리가 맞지 않아 어긋날 것이다. 이번에는 두 눈을 다 뜨고 같은 방법으로 해 보자. 맘먹은 대로 잘 맞춰질 것이다. 나는 한쪽 눈만 있으므로 좀처럼 원근감을 식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멀고 가까운 것을 대충은 감지한다. 왜냐하면 오십년이 넘도록 살면서 아직도 거리감을 감지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이 탁구를 가르쳐 주겠다면서 유료 탁구장에 데리고 갔었다. 친구가 탁구공을 정확하게 내 쪽으로 넘겨주어도 라켓에 맞지를 않고 항상 빗나가기만 했다. 얼마만큼 공이 내 가까이로 날아왔는지 감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켓을 허공에서 휘두르기만 할 뿐 공을 때리지 못해서 속이 상하다 못해 울기까지 했다. 도저히 눈으로 보고는 불가능한 상태임을 깨닫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친구가 공을 치는 ‘딱’하는 소리와 공이 탁구대에서 튀는 순간 다시 ‘딱’하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시간차를 감지하여 내 라켓을 갖다 대면 그런대로 맞아 넘어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하여 약간 익숙해지자 친구가 조금 빠른 속도로 공을 쳤다. 당연히 받아 넘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속도가 빠르면 그만큼 시간차도 짧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린 속도와 빠른 속도는 친구가 휘두르는 팔의 동작으로 가늠했었다. 시각으로 감당하지 못할 부분에서 청각적 능력이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이 둘인 보통사람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탁구를 통해 깨달은 것이다. 이토록 사물을 보기 위한 것은 눈이지만 소리를 듣기 위한 귀도 눈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더듬이나 넝쿨손 같은 촉각의 눈도 있다.
나는 그렇게 탁구를 배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더 많은 공을 들여도 터득하는 시간이 몇 배나 필요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탁구를 할 정도이지 누구와 대결할 만한 실력 향상이 되지는 않았다.
오래 전 중학교 시절에 과외 활동으로 태권도반을 지원하여 태권도 이론과 품세 등을 배웠었다. 자유대련을 마치고 난 우리들은 저마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그때 사범님이 가장 강조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어떠한 상대를 만나든지 절대로 눈을 감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빠르고 무서운 공격이 있어도 눈을 뜨고 상대의 공격을 보아야 그 공격에 대처할 수 있지 그 순간에 눈을 감으면 반드시 공격을 당한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눈을 감지 않으려면 대단한 연습과 반복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절대로 눈을 감지 말자고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막상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마련이다. 이른바 본능적 행동이다. 조물주가 부여한 방어 의지를 노력과 연습으로 극복하려니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그러나 어렵긴 해도 가능했다. 그 예로 사범님은 공격 앞에서 한 번도 눈을 감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맞춰 방어했다. 심지어 한 학급 전체가 한꺼번에 사범님을 공격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본능적 행동이라 할지라도 부단한 노력과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바꾸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어렵다는 것이 곧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능은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따로 연습하거나 훈련하지 않아도 되는 기능이다. 하지만 부족한 본능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능력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만약에 일반적인 기능에 만족하고 보다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본능을 꼭 강조할 필요는 없다. 보고, 듣고, 말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추리하는 여러 각도의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중에 어느 하나가 없더라도 나머지 기능이 없어진 능력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을 나는 잠재력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잠재력을 잘 살린다는 것은 오뚝이와 같이 모든 기능이 무게중심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어설 수 있는 다리가 없어도 무게중심에 맞추어진 다른 기능이 없어진 다리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없는 것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기능으로도 대체하는 눈을 가장 크게 뜬다면 오뚝이와 같은 완벽한 무게중심이 된다. 그러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 잃어버린 동화 / 박문하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속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나는 몹시 마음이 외로울 때나, 술을 마신 밤이면 혼자서 곧잘 이 곳을 찾아 왔었던 것이다. 밖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통금 시간이 임박해서도 이 초가 앞을 한 번 스쳐가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이 초가집 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이 초가집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의 일로서, 그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내 형제들은 3남 2녀가 되지만 모두가 그때 중국 땅에 망명을 가서 생사를 모르던 때였다.
홀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나 혼자만을 데리고 남의 집 삯바느질로 겨우 변명을 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두 달 동안을 병석에 앓아눕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자는 그야말로 기한에 주리고 떨게 되었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딱한 꼴을 보다 못해서 나를 호떡 파는 곳에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낮에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서 그래도 학교엘 나가고, 밤에는 호떡 장사를 메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호떡을 팔면 겨우 그날의 밥벌이는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호떡 상자를 어깨 위에 메고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좋은 호떡 사이소, 호떡’ 하고 외치면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길가에 있던 조그마한 초가집 들창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거무스레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호떡 5전어치만 주라.”
중년 남자는 돈을 쥔 손을 쑥 내밀었다.
어스름 램프불이 졸고 있는 좁은 방 안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두 오누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님인 듯한 중년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호떡 한 개 값은 1전이고, 5전어치를 한꺼번에 사면 덤으로 한 개씩 더 끼워서 주던 때였다.
중년 남자는 호떡 여섯 개를 받아서는 오누이에게 각각 두 개씩을 나누어 주고는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중년 부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창문이 닫히고 말았다.
창문의 닫힌 방 안에서는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네 식구들이 호떡 먹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를 맛본 일이 없었다.
일찍이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또 두 형제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애정 실조증에 걸리어 홀어머님 밑에서 살인적인 가난과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난 나에게 이날 밤 초가집의 흐뭇한 가족적 분위기는 나에게 있어서 뼈에 사무치도록 부럽고도 그리운 광경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이 초가집 풍경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상징으로서 판이 박혔고, 내 몸과 마음이 외로울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호박꽃 같은 램프불이 피어 있는 그 창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속에서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 씹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어, 내 형제들은 왜놈들 치하에서 모두가 가정을 버리고 놈들의 철장 속에서, 또는 이역 땅 망명의 길에서 숨져 갔지마는, 나 혼자마이 비겁하게도 어떻게 하여서라도 집을 지키면서 어머님을 모셔 알뜰한 가정을 한 번 가져보고 죽겠다고 오늘날까지 몸부림을 쳐 왔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탁류로 흘러가 버린 지금, 나는 초가집보다는 몇 배나 더 큰 ‘콘크리트’집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가족들을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마는, 어쩐지 아직까지도 그날 밤의 그 초가집 창가의 광경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년에 사랑하는 큰 자식놈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리고, 이따금씩 아내마저 그 거리가 무척 멀어져 가는 밤이면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곧잘 이 초가집 창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호박꽃 같은 램프의 불이 피어 있는 초가집 창가에서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제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을 씹는 소리가 그 방에서 잔잔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내 동화 속의 이 초가집도 헐려져 간 데 온 데 없어졌고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이 외로운 밤을 나는 혼자서 진정코 어디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습작품 읽기
▪ 남편의 명약/ 김치주
그 옛날 남편의 병은 신경통이라고 했다. 병원에 의사 진단을 받아도 신경통 약을 처방해서먹어도 더했다 덜했다 답답하다. 엄나무가 좋다하면 구해 와서 약 감주해서 먹이고 또한 한두 번 떠 면 상할까봐 바글바글 긇여 놓아야 한다.
셋방의 부엌은 얇은 테라스를 달아 놓은 부엌이라 여름이면 뜨겁고 땀이 줄줄 흐르고 마치 사막 같아 탄약도 제 때 제때 달여 먹여야 한다, 애기를 가져 몸은 무겁고 손발이 퉁퉁 붓고 힘 은 들지만 남편을 고쳐야 된다는 일념으로 이 곳 저 곳 명약을 찾아다닌다.
틈틈이 승마장 쪽으로 올라가 쑥을 캐서 깨끗이 씻어 쇠 절구에 콩콩 찌어 삼배 보자기에 사서 주발을 받쳐 놓고 양쪽에 막대로 반대방향 으로 돌려 꼭 짜면 검푸른 액 이 나 온 것을 밤에 장독위에 얹어 놓아 밤 이 슬 을 맞으면 쓴 맛이 조금 없어지면 아침에 먹인다.
또 다시 쑥을 캐기 위해 승마장에 올라가 엎드려 쑥을 캐는 옆에 얼룩덜룩한 능구렁이가 또래를 틀 고 있어 칼과 소쿠리를 모두 팽개치고 ‘엄마야. 하고 뛰어오다 아랫배 가 뭉치어 주저앉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애기가 잘못 되지 안 았 나 배 를 한참을 쓰다듬어 주니 애기가 쓰러 움직이기 시작하여 ‘휴. 하고 안도 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휘휘 저으며 대문 앞 에 들어 설려든 차 이웃 아주머니께서 ‘새댁. 어딜 갔다 힘없이 옵니까?
‘승마장에 쑥을 캐다가 뱀 이 또래를 틀 고 있는 것 을보고 놀라서요.
‘남편의 약을 구하겠다고. 하시자 대문 안 으 로 들어오며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눈 가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질 듯 하며 방 안 에 들어다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자 화장실 에 갔나보다 하고 약 먹던 그릇을 닦아서놓고 수출품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 이지나자 실과 바늘을 바구니에 담아두고 대문 밖으로 서성이다 저 아래쪽 에서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무언가 들고 온다.
봉지를 내 손 에 쥐어주며 얼른 약 탕기에 부어 달여라 하자 아무생각 없이 주루 룩 붓다 밖으로 흘러 꿈틀거린다 ‘아이고 엄마야. 하고 달아나자 남편은 소리를 지른다. 그것도 못하느냐고 토룡탕이 몸보신에 그렇게 좋다 고 한다.
무엇이던 먹어서 병 이 완쾌 된다면 ‘명 약 이 겠 지. 얼마 후 쑥을 캐러가야 했다. 남편이 밥을 잘 먹지 못 해서 쑥을 짜서 주면 밥을 먹기에 전 번 쑥을 캐다 뱀 에 놀랐지만 어쩔 수 없이 쑥을 캐러가니 벌써 쑥 이 많이 자라 위에 잎만 똑똑 꺽 어 소쿠리에 담아왔다.
“할머니께서는 쑥 은 예로부터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속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말씀을 들은 봐 있다. 남편은 워낙 신약 조약 많이 먹었기에 속인 덜 건강한 사람 같으랴,
그런데 오늘 밤에 잠 이오지 않아 마루에 걸 터 앉아 있으니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찌르러 찌 르 러. 벌써. 가을이 오고 있나. ‘나에게 친구가 되어 줄려고 하나.
저 하늘에는 둥근 달이 낮과 같이 밝았다. ‘달님 내 나이는 철없고 어리고 여린 여성입니다. ‘남편 의 명약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약을 먹는 대로 명 약 이 되어
치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 에 들어가 수출품 뜨개질 을 한 담 한 담 떠 다보니 날이 뿌옇게 밝아지고 있다. 병은 한가지요 약 은 백 가지도 넘고 남편은 아침을 먹은 뒤 시골 간다기에 10분 만 기다리면 약을 짜서 병 에 담아 줄 테니 가져가서 먹어라 고 헸다.
그러다 남편은 다음날 한 손 에는 포대를 들고 지팡이를 짚고 온다. 화통에 연탄불을 피우라한다 남편은 큰 돌 솓 에 참기름을 주 루 룩 붓고 포대를 거꾸로 들고 솓 에 넣자 푸 더덕 하고 떨어지는 것이 뱀 이였다. 엄마야 하고 대문 박으로 뛰어나가 큰 방 아저씨 손을 꼭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아저씨께선 “아무리 약 도 좋지만 새댁이가 몸을 풀고 난후 뱀을 꼬아먹던 토룡 탕 을 먹던 식성도 좋다.
큰 돼 병에 뱀을 넣고 뚜껑 위에 양초 물을 녹여 밀봉 하여 한 달 후에 병마개를 따서 맥주 잔 위에 망사 천을 덮고 사주를 줄줄 부어 천 위 에 비늘이 걸려 져 있다 생강 한쪽과 사주를 두 잔이나 꿀 덕 꿀 덕 마시더니 잠을 잔다고 누워 벌써 쿨쿨 소리가나기에 자리에 누웠다.
갑자가기 머리위에 “쇄. 하는 소리와 동시에 떠 끈 떠 끈 해서 벌떡일 어 나보니 내 머리부터 발 끝 까지 험 뻑 젖고 이물도 험 뻑 적셔 한 밤 중에 소변 난리가나고 쇠 주 두잔 먹었는데 남 편 의 소변으로 홍수가 되고 말았다.
홍수가 되었건 ‘명약이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찜통을 들고나가더니 무언가 무겁게 들고 들어와 연탄 불 위에 올려놓자 김 이 술술 나기에 뚜껑을 열어보니 돼지새끼가 한 마리 통 채로 찜 통 안에서 끓고 있었다. ‘결코 남편은 미개인이 되고 만다.
남편은 손에 쥐고 뚜껑을 열고 무언가 넣는다 한참 있으니 끓는 냄새가 고약한 냄새가 난다 무엇 이 냐 고 물어봤더니 부자라고하며 푹 꼬인 것 을 그릇 에 담아 두니 청포처럼 말랑말랑 한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 고 자리에 누워 “내가 못 일어 나 거 던 흔들어 깨우라고 한다.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먹어 명약이면 좋겠다.
▪ 말소리 / 서인수
말소리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인터넷 정보를 검색한다. 저명한 작가나 명사들은 온갖 말씨로 말을 쏟아낸다. 좋은 말소리는 담아갈 수 있어 기대가 된다. 재미있는 말이나 구절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열정에 가득 찬 말 한마디라도 힘이 솟아난다. 힘은 에어지로 변환되어 곳곳에 활력소로 탱탱해진다. 열정이 있을 때 정신을 반짝 차리고 정기나 기백이 가득 찬 에너지를 받고 돌아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말소리란 일상적으로 자주하는 말이라야 공감이 된다. 공감이 되면 싸이 같은 가수도 노래로 등장하여 지축을 흔들게 된다. 불쾌한 말소리는 쉽게 상처를 입기 때문에 한마디 단어라도 주의해서 말하는 습관을 붙여야 된다. 악담을 들으면 현기증을 일으키니 말다툼은 너그럽게 하도록 노력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첫말은 부모님 사랑으로 배우겠지만 유전자에 가깝도록 하나로 교육시켜준 덕분이라 본다. 감사한 마음에 오늘도 말소리를 잘하기 위해서 강의실로 달려간다.
말소리 한마디라도 부모님처럼 말하고 도와주면 얼마나 행복할까 도움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행복해진다. 요즘은 도서관마다 프로그램이 다양해 명강사가 말하는 수업시간이면 말소리가 듣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포장된 신작로를 달려보면 길이 시원해 말소리도 잘 들리지만 따듯한 말소리는 태양이 아니라도 따뜻한 사랑으로 전해져온다. 자갈길은 차를 몰고 가면 발음은 투덜거리고 창틈에는 빗물로 세어드니 말소리도 덤벙거리며 들어온다.
친구와 대화해도 말소리를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는 애로가 있어도 일일이 말하지 않고 지내간다. 드라마는 아름다운 말소리로 대사를 주고받으니 구절이 좋으면 메모하고 암송하게 된다. 저렇게 말하는 솜씨가 좋아도 귀머거리는 평소에 발음을 제대로 못 배웠으니 대화는 부서져 버리고 마는가. 말소리를 잘하고 싶어 깊게 생각하는 사고 사유 사색에 정신이 매달려 인생을 심사숙고하게 된다.
친구가 말소리를 아름답게 찬란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하니 대인관계에 대화도 재미있게 잘하면서 살아가고 싶기도 하다. 말소리에 대한 느낌은 마음에 빠르게 다가오니 자연의 정서와 정감을 배우고자하는 마음에서 수필과목도 선택하는 정서중 하나이다. 평소에 말솜씨로 스피치를 잘하는 교육자를 보면 선망의 눈으로 동경해보기도 한다. 귀머거리는 재미있는 말을 배우지 못해 제대로 하는 말솜씨가 없으니 춤을 배우면 격렬하게 춤추는 춤이라야 율동감도 생겨난다.
말에도 좋은 단어가 따로 있어 소리의 질감도 달라지지만 속도도 달라 말 잘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항상 웃으면서 신나게 이야기를 잘 하고 있다. 나는 왜 말을 잘 못할까 궁금한 물음표가 항상 따라 다녔지만 인터넷 발달로 인해 정보를 검색하고 의문점이 풀렸으니 말하게 되어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슬비가 소낙비가 되면 통쾌하듯이 말소리도 연설문이 되면 통쾌하게 이야기하게 되니 그렇다는 말이다.
대인관계에도 말소리를 잘하게 되면 인격 인품 인덕도 한 단계씩 상승시켜준다. 말소리해보면 자신감을 느끼지 않는가 모른다면 바보일 수밖에. 말을 잘 함으로서 인격을 상승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마음이 맑아지도록 수련 수양 수행하는데도 도움이 되어 인품이 밝아진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귀머거리라도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고 말하는 방법 배워 답답한 마음 해소했으니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강변에서 삶을 더불어 시작하면서 남녀가 한 가족으로 구성원을 이루어 번영 번창하면서 공생 공존해 왔다. 손과 입이 있으니까 말은 이미 배우고 소유하고 있었으니 말소리를 더 잘하도록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서와 정감에 대한 감각배양이라 앞길이 밝아져온다. 말솜씨는 말소리에 뼈가 되고 피가 되어야 챔피언처럼 무대에 신출귀몰하게 되니 귀머거리가 말소리를 잘하면 숙연해지고 만다.
말 잘하고 예의가 바르면 동료 친구도 존경하게 되니 자리를 빛내주기 마련이다.
무대나 공간이 협소하면 힘을 발휘시켜주기 위해서 애틋한 마음으로 배려해주니 귀머거리는 이끌리게 된다. 청각장애가 있는 분들은 천수천안으로 무용하는 사람들을 또다시 만나고 싶기도 하고 대화하고 싶기도 하니 감탄을 하게 된다. 말소리에 반하여 동반할 수 있게 해주니 좋은 인연을 다시 만나면 감사하게 된다.
귀머거리는 좋은 스승이나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거리를 방황하고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감수성을 일깨우는 좋은 친구나 스승을 만나면 행복한 인생으로 삶이 지속된다. 이것이 문화와 문명으로 진흥 발전하여 계속 이어지니 기계가 생각하고 말소리 하는 로봇도 등장하였다. 앞으로의 삶은 문명이기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온갖 기능과 기예가 인간의 손과 머리로 섬세하게 만들어져 디테일하게 된다.
말소리 못 알아듣고 생활할 때는 필기가 의사소통 수단이었지만 무선으로 문자가 통신되는 시대는 스마트 폰으로 문자를 확인하고 만나볼 수 있게 발전되었다. 만나지 못하면 영상으로 확인해볼 수 있으니 디지털 시스템의 위력으로 스타일까지 변화시켜볼 수 있어 기술과 기능을 잘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삶으로 인생을 새롭게 가꾸어 갈수 있어 꿈꾸던 일들이 현실화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 두 가이드 이야기 / 서해숙
‘항’이는 지난연말 하노이여행에서 만난 가이드의 이름이다. 베트남 사람치고 글레머였다. 큰 키는 물론이고 제법 살이 통통 찐 모습이 건강미 또한 넘쳤다. 그녀의 첫 인상은 눈부셨다. 대기업 비서실에 근무하는 이의 복장처럼 하이힐에 정장차림이었다. 차림보다 더 눈부신 건 그녀의 표정이었다. 붙인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곱게 칠하고 볼 터치까지 붉게 한 그녀는 ‘저는 아마추어가 아니예요’라고 외치는 듯 했다.
하노이 여행 며칠 전 오키나와에서 만난 가이드에게 크게 실망하였었다. 일행은 부부4쌍으로 퇴직한 지 2년차 1년차 올해로 퇴직한 이를 위로하기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오키나와행 가이드는 우리나라 유명여행사 소속으로 용모는 준수하였으나 흔히 패키지여행에서 가이드들이 하는 모든 절차를 생략했었다. 우리일행 중 반 이상이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티켓팅이 끝나고 최종체크라인을 통과했음에도 방송으로 이름이 세 번이나 호명되었었다. 부부싸움을 할 뻔 했다. 남편들은 면세점을 들르는 아내들을 기다리기 위해 탑승하기 가장 좋은 곳에서 기다렸다가 비행기에 올랐고 우리는 방송으로 호명되는 남편들을 찾아서 공항을 종회무진 했었다. 이미 탑승한 남편들의 전화기는 비행기 탑승모드로 바뀌어져 있었고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먼저 비행기에 가 보고서야 이 기막힌 상황을 알리고 무사히 떠날 수가 있었다. 가이드는 모습조차 들어내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이번여행이 패키니니 만큼 전체인원이 모두 24명이 되어 관리하기가 버거웠겠지 했었다. 오키나와에서 일행들이 수많은 관광버스 중에 우리가 탈 차를 찾아 허덕일 때도 가이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또 하노이의 첫날밤에 만난 남자 가이드도 배가 등에 붙을 때까지 식당을 못 찾는 실수를 했었기에 우리는 어쩌면 항이도 복장만 요란할 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해에도 수차례 베트남을 가는 남편이 제법 베트남어를 하는 줄 않았는데 우리말을 하는 가이드를 고용해야 하는 실정앞에 기가 딱 막혔다. 남편은 그래서 이번 여행의 이름을 ‘반풍수 여행’이라 명명한다며 좌중을 웃기니 항은 따라 웃으면서 손사래를 친다. 자가기 잘 안내를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말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급기야는 중간통역이 필요했다. 유명한 관광지 같아 보이는데도 항은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구글 번역기를 통해 우리끼리 설명서를 읽고 해독을 했다. 항이는 우리일행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면서 설명서를 잘 읽어보라면서 애교를 부렸다. 곳곳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면서 되려 우리더러 자신을 찍어 달라고도 한다. 음식도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고 “사장님! 사장님!”하고 부르는 소리는 똑 소리가 났다.
다음날도 항이는 저 혼자 신이 나서 하롱베이까지 가는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들을 보고 노래를 하라고 지명을 하곤 안하면 버스를 세우겠다도 으름장까지 놓았다. 자신의 정확한 소개를 하겠다면서 조용히 하라는 명령도 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대구의 유명한 나이트클럽의 이름을 대면서 대구 모공단에서 5년간 일을 했고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만난 지금의 남편과의 사이에 혼전 임신을 하는 바람에 본국에 들어와서 산다고 했다. 부부가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왔냐고 잘 사느냐고 묻자 남편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다가 깡통이 되었다면서 들고 잇는 음료의 캔을 흔들었다. 한국서 같이 일하던 할머니 집에서 김장김치을 쭈욱 찢어 먹엇던 게 생각난다면서 침을 삼키는 시늉도 한다. 우리는 그녀의 어눌하지만 유머스럽고 귀엽고 당당하기까지한 모습에 매료되어 갔다. 오키나와의 가이드는 일행 중 몇몇이 패키지여행의 기본인 제시간의 탑승을 지키지 않아도 반응이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 하물며 일행이 즐비한 관광버스를 일일이 찾아 곤역을 치루어도 자신은 수십대나 되는 관광차 거의 끄트머리에서 깃발도 늘어뜨린 채 쥐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몇 몇이가 가이드가 정류장 입구에서 우리버스의 위치를 알려 주어야지 무슨 이런 경유가 있냐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짧게 할 뿐이었다.
항이는 우리끼리 무슨얘기를 해도 귀를 쫑긋대면서 관심을 보이고 성의껏 설명을 해 주었다. 마침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때라 시내는 붐볐고 오토바이의 홍수대열에 밀려 배는 꼬르륵 댔다. 그 때마다 항은 자신의 사생활을 전부 오픈했다. 32살이지만 10살인 아들이 한 명 있고 돈이 늘 모자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옷을 갈아입고 화장도 화사하게 하고 발랄하게 움직이고 입도 잠시도 쉬지를 않는다. 무슨 가이드가 관광지에 대해선 설명도 안하고 지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모두 얼굴이 환해지고 조금만 일에도 폭소를 터뜨렸다. 오키나와에서의 가이드는 아는 것도 많고 설명도 열심히 했지만 목소리를 듣는 자체만도 짜증스럽다는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항이는 여행의 이튿날에야 고백을 했다. 실은 자신은 전문가이드가 아니라서 지역도 잘 모르고 관광지에 대한 지식도 없다 그러나 사장님들은 인터넷을 찾아 보실 수가 있을테니 자신은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단다. 우리는 기가 차기도 하고 그 당당함도 부러워서 그저 웃기만 했다. 일행들을 시장에 데려가서는 자신의 스카프 사기에 바빴다. 또한 큰 쇼핑몰을 지나다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신의 신발을 한 켤레 사서신고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 어촌에서는 젓갈을 산다. 우리를 쇼핑하게 하지 않고 지 필요한 걸 사는데 우리는 항이도 사는 게 바빠서 쇼핑할 시간이 없나보다 하고 서로 항이를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갑자기 비가 오자 일행 중의 한사람이 쓰고 있던 스카프를 거의 뺏다시피 해서는 자기의 머리에 쓰곤 헤헤 웃는 거였다. 스카프의 주인공은 비를 쫄쫄 맞으면서도 싫지 않는 표정이었다. 항이와 우리일행은 사흘을 같이 다녔는데 듬뿍 정이 들었다. 두둑하게 팁을 주자고 입을 모았고 나는 아끼던 장갑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주지 않고 온 걸 지금도 후회한다. 유쾌 발랄 상큼한 항이는 이제껏 만났던 그 어느 가이드보다 인상 깊었다.
가진 건 없어 보였지만 유쾌하게 일하는 항이와 명품을 걸쳤고 지식도 풍부했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듯한 오키나와행의 가이드를 보면서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다시 꼭 오라던 항이의 어눌한 우리말이 귓전에서 맴돈다. 항이는 프로중의 프로였고 오키나와 가이드는 그 일을 놓아야할 사람이었다.
▪ 민들레 예찬/ 김경희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지나간 사진들을 꺼내보는 것을 즐긴다. 그 중에 특히 좋아하는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피부는 검게 타있고, 하늘색 스카프에 한손에 민들레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
5년 전쯤에 이른 여름에 찍은 사진일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웃음이 자연스럽게 번지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인지 삶이 힘들고, 피곤 할 때면 사진을 꺼내본다.
바람이 부는 날 민들레 홀씨가 바람 따라 길을 떠나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도 없이 그저 바람이 부는 데로 소리 없이 하얀 미소를 띄며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길가에 민들레 홀씨가 날리던 날 할머니는 도로변에 앉아 있었다. 매일같이 산으로 가신다는 할머니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혼자서 산에 갔어, 고사리와 산나물을 채취하여 용돈도 하고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하신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28살에 먼 곳으로 떠났고, 아들 하나 있었는데 36살에 또 멀리 떠났다고 하신다. 그때 할머니 나이가 60살이었다고 하는데 손자는 하나 있는데 나이가 26살이라고 작년에 한 번 왔다가고 소식이 없다면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내가 괜한 것을 여쭈어 본 것 같아 “할머니 죄송해요. 아침부터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네요.” 했더니 할머니는 가만히 하늘을 보더니 손에 들고 계시던 민들레 꽃 한 송이를 나에게 건네주시고, 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서 산에 들어가는 것 위험하다고 이웃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하지만, 집에 있으면 자꾸 슬픈 일들이 생각이 나서 산으로, 산으로 가신다고 하셨다. 홍단풍사이로 사라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았다. 아마 난 그때부터 민들레꽃을 좋아 한 것 같다. 길가에 보잘 것 없이 피어나는 꽃 그 민들레꽃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늦가을 민들레꽃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사진을 전해 주고 싶어서 찾아 나선 것이었다. 집이 어딘지 물어 보지 않았지만, 시골이란 사는 사람이 많이 않기 때문 찾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민들레꽃 할머니는 여동생 집 마당에서 나물을 다듬고 계셨다. 인사를 하고 사진을 건네주니 그제 서야 날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동생이 할머니사진을 보시더니 더 좋아 하셨다. 두 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두분이 사진은 처음 찍어 보신다고 했다. 다음에 사진을 가지고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오는데 돌담 옆 구석에 숨은 듯이 노란민들레꽃 한 송이가 계절을 잊은 듯 피어 있었다.
앉은뱅이 작은 꽃 /땅에 바짝 엎드렸다가 /어느 날 문득 초록 잎 내 놓는다.
척박한 돌 틈/ 시멘트 블록과 블록 사이/생각지도 못한 곳 어디든 피어난다.
어린잎은 나물로/꽃은 차로/뿌리는 약으로 쓰는 귀한 꽃
손등에 생긴 사마귀도/민들레 흰 즙을 바르면 낫는다고
오래 전 할머니께서 그러셨지
짓밟히고 또 뽑혀도/낮게 엎드려 꽃 피우고/씨를 날려 자손을 번성케 하는/
끈질긴 꽃 민들레
- 민들레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