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생두 그리고 사람 이야기
취재 글 김문영 / 사진 김승범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여주인공 도쿠에는 일본 단팥빵 도리야끼에 들어가는 ‘팥의 지나온 여정’에까지 귀를 기울이며 정성껏 단팥을 쑤어 최고의 도리야끼 맛을 낸다. ‘우리는 세상에 듣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녀의 극진한 삶의 태도는 온갖 미물과 자연, 사람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가비양 양동기 대표이사와 함께하는 네 번째 커피 여행지는 ‘커피 생두와 사람 이야기’다. 커피 한잔을 마셔도 커피 한 알에 담긴 어마어마한 햇빛과 바람, 구름, 비, 흙, 벌레 그리고 농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면 어떨까?
| 콜롬비아 나부시마케 |
나부시마케 아르아코족을 찾아서 내가 갔던 콜롬비아 산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나부시마케’다. 콜롬비아 사업 파트너인 펠리페라는 친구가 나를 그 곳으로 데려갔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야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지만, 게릴라가 출몰하는 위험한 지역이라 그 지리에 빠삭한 지인의 도움 없이는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이다. 오랫동안 스페인 식민지 하에 있던 콜롬비아 원주민은 다른 중남미와 마찬가지로 백인의 잔혹한 학살과 착취로 인해 찢긴 상흔이 아직껏 남아있다. 나부시마케 아르아코족은 백인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없는 해발 1천 미터에 방어벽을 쳤고, 더 험한 산으로 올라가 집을 짓고 살았다.
우리가 간다고 문을 열어줬지만, 거기서부터 다시 2백 미터까지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4시간 더 올라갔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해발 5천 미터 아래, 저 멀리 굴뚝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손톱만한 집들이 점점이 아득하게 나타났다. 밤 하늘을 바라보면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듯 하고, 별똥별이 여기저기서 떨어진다. 세상에, 눈길 닿는 곳마다 일대 장관이었다. 아르아코족은 다른 부족과 달리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다. 마을도 잘 정비되어 깨끗하고, 재판장이나 교도소도 갖춘 것을 보면 사회 질서가 잘 유지되는 듯 했다. 화폐가 없어 물물교환으로 생활하며 전기, 전화, 수도 등 현대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좋은 사람이 길러낸 유기농커피
나는 무엇보다 ‘자연에게 받은 것은 자연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전통을 이어가며 나뭇가지 하나 함부로 자르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커피나무 원종인 ‘티피카’ 품종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이는 최고 품종으로 로스팅 후에도 깔끔한 맛을 놓치지 않고, 입안에 세련되면서도 부드러운 향미가 감돈다. 그야말로 ‘와일드 커피(Wild Coffee)’로 천연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커피 맛! 이는 반드시 사람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러니 나부시마케 촌장이 나에게 “너는 도대체 여기까지 왜 왔냐?”고 물었을 때, “커피보다 사람을 찾으러 왔다.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갈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부시마케에서 1년에 한 번 커피 생두를 들여오게 되었다. 콜롬비아 사업파트너에게 생두 값을 보내주면, 그들이 아르아코족에게 필요한 생필품, 약품, 옷, 식량 등을 구입하여 전해주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만만찮다. 그럼에도 그만한 수고가 아깝지 않은 것은 우리가 유일하게 ‘좋은 농부가 길러낸 100% 유기농커피 나부시마케’를 들여온다는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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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테하 마스터피스 |
아마존 무림의 고수, 루이스 다테하는 브라질에 있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세하더커피 산지에 해발고도 1,150~1,500미터에 위치한 6천 헥타르의 넓은 농장이다. 브라질 전 지역 ‘친환경 농법 경진대회’에서 우승한 바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이고 안정적인 기술을 보유하였다. 다테하농장은 커피 열매가 약간 검붉은 색이 되었을 때가장 좋은 맛을 얻을 수 있는데, 이런 좋은 열매를 수확하고 선별하는 방법이 놀랍다. 잘 익어 말랑한 열매는 껍질이 잘 벗겨지므로 물의 압력을 약하게 뿌리면서 선별하고, 이를 ‘스페셜티 커피’로 분류한다.
아마존 무림의 고수 같은 다테하 농장주 루이스(73세)가 작년에 전 세계에 있는 커피고수들을 자기 농장으로 불러 모았는데, 나도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환경오염으로 커피농사 짓기가 점점 어려워질 테니, 우리가 뜻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그는 일주일 동안 ‘커피나무가 생육하기 위한 땅의 조건’에 대하여 심도 있게 가르쳐주었다. 땅속에 작은 곤충과 지렁이의 세계를 조성하는 것이 관건이라 했다. 커피나무 하나에 사방 뿌리 4미터, 잔뿌리가 쭉쭉 뻗어 나가도록 좋은 거름을 주고, 거기에 약간의 스트레스를 주어 커피나무가 열매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한다.
뿌리가 건강하지 않은 나무는 물을 골고루 전달하고, 꽃을 피우는 데 열심을 내지 않으며 자기 생존에만 영양분을 쓰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키운 커피나무도 게을러져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루이스는 아무리 좋은 열매를 수확해도, 운송 과정과 기후 변화로 생두가 변질되면 소용없다고 세계최초로 ‘펜타 팩(Penta Pack) 시스템 ’을 개발하였다. 철두철미한 농장주의 철학이 깃든 생두가 우리 손에 변질 없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다테하 마스터피스’다.
3가지 질소혼합가스를 사용하여 수분과 산소, 박테리아를 제거하고, 폴리프로필렌 재질의 알루미늄백에 진공 패킹한 후 카톤 박스에 포장하여 운송하는 시스템
다테하 마스터피스의 맛 아주 좋은 과일 음료를 입안에 넣은 느낌이랄까. “이것이 진정 커피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꽃향기, 달콤한 과일향이 물씬 난다. 목 넘김은 부드럽고 여운도 좋다. ‘그냥 커피가 커피지, 뭐 그런 맛이 나겠어?’ 의심하는 분도 있겠지만, 실제 그 맛을 보면 왜 이런 표현을 아끼지 않는지 공감할 것이다. 와인의 풍부한 맛을 우리는 다테하 마스터피스를 통해서 경험한다. 거기다 카페인이 적은 라오리냐(Laurina) 품종이라 더욱 독특하다. 라오리냐 품종의 이페로사(Ipe Rosa)는 커피꽃 향과 살구향을 시작으로 잘 익은 포도와 베리, 달콤한 오렌지의 산미, 벨벳처럼 부드럽지만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무게감이 있고, 흑설탕, 꿀, 초콜릿으로 마무리가 되는 맛이다. 또 다른 라오리냐 품종의 이페브란코(Ipe Branco)는 오렌지꽃, 말린 과일, 펜넬 향과 밝은 느낌의 조합이 환상적이다. 달콤한 감귤과 파인애플의 산미와 부드러운 바디감에 피칸과 오렌지의 달콤함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이다.
가비양 블랜딩 / 블랜딩(Blending 혼합, 조합)은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할까. 각기 서로 다른 악기가 하모니를 이루는 것처럼 콘트라베이스가 묵직하게 받쳐주고, 바이올린의 고음이 경쾌하게 울릴 때, 그 중간에서 비올라가 중저음으로 꽉 채워주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는 것 같다.
콘트라베이스처럼 가장 많이 쓰는 베이스(base)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실력인데, 우리는 브라질 다테하 농장에서 나오는 커피를 기본으로 사용한다. 베이스는 한결같은 맛을 내면서 너무 튀지 않고 자기 역할을 묵직하게 해주어야 한다. 2011년 김남호 로스팅 랩장이 다테하 연구실에 가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독특한 맛의 생두 ‘사비아’를 만들어냈다. 사비아는 브라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새지만,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다워 사랑받는 이름이라 가져왔다. 사비아를 베이스로 하여 블랜딩한 ‘라이온’은 화려한 꽃과 과일 향미로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타이거’는 로스팅을 진하게 하여 깊은 쓴맛을 강조하였다. 농도가 짙어 카페라떼를 만들 때 맛의 균형을 정확하게 맞춰준다. ‘레오파드’는 강렬한 향미가 특징이고 농도는 중간 정도다. ‘재규어’는 맛이 부드럽고 농도는 중간이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 예가체프 지역은 해발 2,300미터에 땅의 힘(地力)이 남다른 곳으로 독특한 지형을 가졌다. 낮에는 33도, 새벽에는 10도까지 온도가 내려가 커피나무에 필요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줄 수 있는 기후조건이다. 커피 열매는 더울 때 단맛을 내고, 추울 때 신맛을 내는데 여기 나무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단맛 신맛을 반복하다보니 맛의 균형을 기가 막히게 이뤘다. 살벌한 스트레스를 받은 커피나무가 맛이 좋은 열매를 낸다. 예가체프 커피는 꽃의 향이 피어나고, 허브중에 다즐링티 맛이 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고구마향이 난다고도 한다. 반면 예가체프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시다모 지역은 일교차가 크지 않아 커피나무에 특색이 없고 맹한 느낌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산 사람들이 농익은 인생의 맛을 우려내기 마련이다. 막다른 길목에서 좌절하고 방황해본 사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고통을 겪어본 사람, 다시 일어서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에 독특한 향미가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그런 사람과 커피 한잔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