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兄弟間의 交流(형제간의 교류)
충지는 文凱․信凱 두 동생이 있다. 그러나 동생들과 관련된 시는 두 수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원감집(圓鑑集)에는 여러 수의 시가 있고, 연곡린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의 관직 등이 확인되고 있다.
① 舍弟 平陽新守에게 줌 (사제 평양신수에게 줌, p.26)
「舍弟平陽新守文凱 將抵治州 先到山中 是夕會有雨 相與話盡十餘年睽離之意 不竟至天明 因記蘇雪堂贈子由詩中 所引韋蘇州 何時風雨夜 復此對床眠之句 作一絶以贈之」
아우 平陽郡守 文凱(文愷)가 州(順天)를 다스리기 위해 부임하는 길에 먼저 이 산중에 찾아왔다. 이날 저녁 마침 비가 내려 서로 10여 년간 이별의 뜻을 나누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蘇雪堂이 子由에게 준 詩 가운데 인용한 위소주(韋蘇州)의 '어느 때 비바람 치는 밤에 다시 잠자리를 같이 할까' 라는 句를 기억하고 一絶을 지어 아우에게 주었다.
위응물(韋應物, 737-?)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젊어서 임협(任俠)을 좋아했고 호방한 성격이라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관계에 진출하여 저주, 강주, 소주 등지의 자사(刺史)를 지냈으므로 위강주(韋江州) 또는 위소주(韋蘇州)라 부른다.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왕맹위유’(王孟韋柳)라고도 부르며, 도연명과 함께 ‘도위’(陶韋)라고도 부른다.
백거이(白居易), 고황(顧況), 유장경(劉長卿), 교연(晈然)과 시를 주고받았다. 5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는데 시풍은 도연명, 왕유와 비슷했다. 그의 시는 산수자연을 위주로 노래한 것으로 언어가 간결하고 담백하다. 또한 당시의 정치와 민생의 괴로움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 가운데도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전해진다. 시집으로는 <위소주집(韋蘇州集)> 10권이 있다.
與君相別十三年 그대와 이별한지 13년
洛北江南雨杳然 낙북 강남으로 서로 묘연했네
那料鷄峯風雨夜 어찌 생각했으랴 계봉의 비바람 치는 밤에
白頭今復對床眠 흰머리로 이제 다시 잠자리 같이 할 줄을
② 燕京에서 舍弟에게 (연경에서 사제에게,p.120)
「近者舍弟補闕 寄示閣下在松都時所贈盛作三 其末章云 讀至于此 且驚且感 時復諷詠 想望不能己 次韻强成山語二首 因風有寄云 公時在燕京」
근래 아우 보궐(補闕)각하가 송도에 있을 때 보내 준(侍郞 韓謝奇便) 훌륭한 시 3편을 받아 보았다. 그 글귀에
鷄峯夜話未忘情 계봉(鷄峯)의 밤 이야기를 잊지 못하여
松下尋常夢裏行 언제나 꿈속에서 소나무 아래로 참아가네
爲我殷勤傳一語 나를 위해 은근히 한마디 말을 전하오
大悲恩似邇來輕 큰 자비와 은혜 근래 가벼워진 것 같네
라고 했다. 이것을 읽고 놀라고 감격하여 때때로 읊으면서 그리워함을 마지못했다. 韻을 따라 억지로 거친 말로 2首를 지어 인편에 보냈다. 충지는 1275년 원나라 세조의 초청에 따라 연경(北京)에 가서 황제 쿠빌라이를 만나 수선사의 토전을 되돌려 준데 감사의 예를 표했다.
屢通寒淑豈無情 여러 해 지났다 해서 어찌 무정하리
誰爲山僧告此行 누가 산승을 위해 이 행차 알렸는가?
莫把道交方世友 道의 사귐을 세상의 벗과 비교하지 말라
兩心相契固非輕 두 마음 서로 일치됨이 가볍지 않나니
地隔誠難寄遠情 땅이 막혀 멀리서 情 보내기 어렵고
嶺梅猶阻附人行 嶺梅조차 인편에 소식 보냄을 방해하누나
早年厮結眉毛在 일찍부터 만나 가까이 사궜는데
聚散何曾有重輕 모이고 흩어짐에 어찌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랴
영매(嶺梅, 大庾嶺에 있는 매화), 眉毛厮結(서로 만나는 것, 對面 또는 접촉)
③ 季弟 樞院堂의 詩 (계제 추원당의 시, p.27)
신개공(1230~?)에 대한 족보의 기록은 이름과 장원은 아니나 과거에 급제(及第)를 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형인 원감국사의 문집에는 추원당(樞院堂) 당후(堂後)인 막내 동생(璇, 信凱, 또는 信愷)이 당후(堂後)의 직책이 확인되고 있다. 堂後라는 벼슬은 고려 때 승지(承旨) 밑에서 필사(筆寫) 즉 사관(史官)의 임무를 담당한 정 7품의 관리를 일컫는다.
그 무렵 맏형인 원개공이 정혜사에 주석하고 있는데, 둘째 형(문개공)도 평양(순천)군수로 부임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시는 작은 형 문개공이 평양(平陽 : 順天)군수로 부임하던 날 큰형의 정혜사에서 자면서 지었다는 시를 보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던 것을 시로 표현했는데, 국사의 유고집에 남아 있어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p.27)
「季弟樞院堂後璇(信凱) 聞前詩 次韻見寄 復用其韻答之」(두 형이 계봉 즉 定慧寺에서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 동생 추원당 璇(信凱)이 앞의 시에 次韻하여 지은 詩에 답한 시이다.
世亂今年勝去年 세상 어려움 금년이 작년보다 더하니
四方何處不騷然 세상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리
陟岡謾自勞相望 메뿌리에 올라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괴롭네
盖被無因得共眠 이불 덮고 같이 잠 잘 인연도 없어라
(144-015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일차에서는 원감국사의 '官僚와의 交流(관료와의 교류)' 편이 끝나고 '형제간의 교류'편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원감국사님 행적의 종반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원감국사의 문집'에 의해, 막내 동생 신개의 공직 수행시의 직책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 주1) 두 동생과 관련된 시는 두 수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시의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앞으로 총 3일차(15~17)에서는 기가 막힌 비유법을 사용한 '비단가(臂短歌)'를 비롯하여 총 17수의 원감국사님의 혼이 깃들어 있는 선시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숨이 가쁘고 찹니다./ 무곡
(본문내용- 원감국사 관련 계속)
원감국사님 관련 연재는 17일차로 끝을 맺게 됩니다. 생각 같아서는 계속이어지기를 바랍니다만, 17일차에서 이승을 하직하고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인생사의 일부 인가 봅니다. 세월앞에는 거인도 거목도 순응할수 밖에 없는것이겠죠!/ 무곡
첫째 동생 문개할아버지를 舍弟로,
둘째 동생 신개할아버지를 季弟로 표현했네요./ 벽천
舍弟는 아우를 지칭하는 겸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