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고 싶은 꿈과 어림없는 꿈 사이
- 내 안의 힘을 발견한 여정
김성실
나의 소울 푸드는 ‘오이지’다.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고 그냥 먹거나 냉국이나 무침 등 어떻게 먹어도 입맛 살려 주는 오이지. 오이는 펄펄 끓는 소금물을 뒤집어 쓰고 무거운 돌로 눌린 채 기다려야 오이지가 된다. 인생은 오이지가 되어 가는 과정같다. 인생의 쓴맛도 노련하게 웃어 넘길 수 있는 잘 익은 오이지. 나는 오이지가 참 좋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이를 방패 삼아 뜨거운 맛을 피해 가는 요령과 미숙함이 많은 풋 내 나는 오이지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오이지를 먹어야겠다. 아작 아작 소리를 내며 스무 살 오이지가 내게 ‘참 오이지 맛’을 보여준단다. 잘 익은 오이지 씹는 소리가 난다
이루고 싶은 꿈과 어림없는 꿈 사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한국 유네스코에서 개최한 행사를 쓴 사설 ‘조국순례대행진에 부치는 글’을 배웠어. 그때 난 대학생이 되면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하겠다는 가슴 뛰는 인생 목표를 세웠지.
유네스코는 유엔의 산하 기구 가운데 하나야. 교육·과학·문화 분야의 전문기구지.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야. 머리글자를 따서 ‘유네스코’라 불렸고, 대학마다 한국유네스코학생회(KUSA)가 있었어.
KUSA는 혼자면 독서, 둘이면 대화, 셋이면 합창이라는 새 물결 운동을 펼쳤어. 가장 큰 행사는 농촌 봉사 활동과 1973년에 시작된 조국순례대행진이지. 조국순례대행진은 국토를 걷고 민족 문화의 현장을 답사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극기 정신을 기르는 최초의 대규모 국토 순례라고 할 수 있어. 나는 9박 10일 동안 조국 산천을 걸으며 행진하는 프로그램에 꼭 참여하여 삶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맛보고 싶었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유네스코 학생회 활동을 시작했어. 하지만 조국순례대행진의 참가는 처음부터 벽에 막혔지. 아버지는 “여자가 어떻게 집 밖에서 잠을 자냐, 그것도 텐트 생활을 열흘이나, 남학생이랑 같이 간다고……” 하시며 강력하게 반대하셨지. 그때 나와 아버지의 참여를 둘러싼 대립으로 집안 전체가 매우 시끄러웠어.
악어와 악어 새 같은 부녀 관계를 깨는 최초의 대립이었어. 나의 첫 반항인 그 싸움은 1년 동안 계속되었지. 그 시절에 4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살았어. 죽고 싶기도 했어. 너무 억울해서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거든. 설득과 반항에 나는 말라비틀어져 갔어. 결국 조국순례대행진을 대학 생활 내내, 그러니까 4번 모두 참가하려고 했던 나의 꿈은 날아갔고, 데모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학년 때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어.
내가 집요하고 목표 지향적인 인간이란 걸 그때 알았지.
1978년의 조국순례대행진은 ’눈으로는 세계를 가슴에는 조국을’이라는 슬로건으로 네 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진행되었어. 나는 양산 통도사에서 진주까지 걷는 4 코스 ‘천황’에 배정되었지. 양산 통도사에서 발대식을 갖고, 천황산 고사리 분교를 지나 밀양 표충사, 의령, 창녕, 진주까지 행진했어. 천황 코스에 참가한 4백여 명의 학생은 다른 세 코스의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 날인 8월 15일 진주 고등학교에 모여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 그 여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뛰어.
행진의 시작
솔직히 혼자 여행을 한 적이 없는 나는 배낭 꾸리기가 힘들었어. 온갖 것을 다 집어넣은 무거운 배낭. 8월 4일 부산 행 기차를 타러 서울역으로 떠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배낭은 기차를 놓치고 싶은 비굴한 마음과 두려움을 주었어. 그렇게 출발부터 기대와 설렘 대신 좌절과 오기의 싸움은 시작되었지.
첫날 양산 통도사에서 발대식을 했어.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엄청난 소나기를 만났어. 우산을 꺼낼 틈도, 피할 곳도 없는 시골길 한가운데서 속수무책으로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갑작스럽게 만난 소나기는 싫지 않았어.
아주 대와 청주 대 형들은 비누를 꺼내 머리에 문지르며 샤워 모드로 들어가는 장난을 쳤어. 나도 질 세라 소리 지르고 노래도 부르고 마치 ‘정신줄’을 놓은 듯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다 토해냈지. 속이 후련했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비를 맞으니 기분이 아주 좋더군. 물에 빠진 생쥐로 놀기를 30분쯤 지났을 때 소나기는 자취를 감추고 8월의 태양은 모든 것을 말려주었어.
어르고 뺨치는 날씨 덕분에 다시 뽀송뽀송 해진 속옷과 운동화와 양말은 햇볕 냄새를 풍겼고 비에 불은 발은 물집을 만들기 시작했지.
그랬구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 비는 나에게만 내리는 게 아니거든. 기분 좋게 소나기의 축복을 받았네. 그 다음은 어땠어?
야영 생활은 낭만이 아니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정리, 체조, 식사를 준비하고 종일 걷는 것은 매우 힘들었어. 배낭은 무겁고 몸이 말을 안 들었지. 게다가 첫날부터 발에 생긴 물집으로 절둑 거리며 잘 걷지 못했어. 나는 1소대 1조로 맨 앞에서 출발했지만 뜨거운 여름날 늘어진 엿가락처럼 흐느적거리며 점점 뒤로 쳐졌어.
신작로의 미루나무도 치를 떨던 한여름 햇살은 나의 고집을 꺾으려는 아버지처럼 나를 부숴버렸지. 아버지에게 체면을 구기고 자존심을 꺾이고 싶지 않은 오기와 내가 원한 조국순례대행진에 참석하고 있다는 정신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갔어.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구급차는 항상 행렬 맨 뒤에 오면서 우리를 지켜줬어. 어느 날은 구급차가 바로 내 뒤에 있는거야. 차 문이 열리고 “타세요” 라고 본부 대원이 말했지. ‘나에게 구급차는 굴욕이다’ 라는 생각에 당당하게 거절했지. 얼마나 걱정스러웠으면 쓰러지지도 않은 나를 태울 생각을 했겠어. 구급차를 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거절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 했어. 구급차 대신 대원들은 돌아가며 나의 배낭을 들어주기도 하고 뒤에서 받쳐주며 용기를 주었어. 취사가 어설픈 나에게 만든 음식을 가져다주는 등 거의 나를 키우며 돌봐주었지. 그 힘으로 나는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았어.
행진 중에는 간간이 귀한 얼음물을 준비해 우리를 기다리는 시골 어린이들과 선생님, 마중 나온 동네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었어. 그땐 너무 기쁘고 좋았어. 그들은 얼음이 다 녹도록 나타나지 않는 우리의 행렬을 기다리다 지쳐갔지. 찬 기운이 가신 물을 건네며 미안해했어. 그들의 순박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했어. 그런 경험은 낯선 곳에서 낯선 냄새나 특별한 소리(늦은 밤 소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별이 내리는 밤 개울 물 소리)와 함께 큰 힘을 주었어.
아름다운 마음을 받았네. 타인을 통한 행복감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니라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지. 서울 토박이인 네가 처음 경험하는 시골 풍경과 집을 떠난 자유로움. 대원들과 모닥불의 잔재를 뒤적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은 스무 살을 더 빛나게 했겠구나.
천황산에서 길을 잃다!
난 천황산에서 일행을 놓쳐 길을 잃었어. 천황산 ‘사자평’에 있는 고사리 분교에서 야영이 계획되어 있었지. 산행 시작부터 나와 친구 숙이는 뒤로 쳐지면서 일행과 멀어졌어.
일행을 잃어 점심은 굶게 되었고 수통의 물도 바닥났어. 둘이 갈팡질팡 길을 헤매다 주저앉아 울었어. 두려움처럼 여름 해는 길었지. 어둠 속으로 나무 그림자가 떠날 차비를 할 때 희미하게 둘 다섯의 ‘얼룩고무신’ 노래가 들려왔어. “굽이굽이 고갯길을 다 지나서, 돌다리를 쉬지 않고 다 지나서, 행여나 잠들었을 돌이 생각에 눈에 뵈는 작은 들이 멀기만한데… ”
‘오! 우리의 구세주‘. 기타를 메고 나타난 세 명의 형들. 그들도 낙오자. 낙동강 인근 유어 국민학교에서 주민의 밤 행사에 ‘싱어롱’을 담당하기로 한 대원들이었어.
밤이 되자 산길은 불 꺼진 탄광 속 같았어. 광부가 되어 갱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어둠의 공포. 하나 뿐인 랜턴에 의지하며 걷는 우리는 두 사람이 한 몸을 공유하는 ‘샴 쌍둥이’처럼 다섯 명이 한 몸처럼 움직였지. 무서워서 엄청나게 ‘얼룩고무신’을 노래했고 그날 이후로도 ‘얼룩 고무신’은 행진 내내 입에 달고 다녔어. 그리고 다섯으로 뭉치니 ‘사람이 힘이 된다는 말은 진실’이었어.
밤 9시가 넘어서 우리를 찾으러 나온 본부 팀을 만났어. ‘이젠 살았구나’ 탄성이 절로 나왔어. 겨우 고사리 분교에 도착했어. 그 이후는 기억이 안나. 긴장은 풀어졌고 그대로 쓰러졌었나봐.
다음날 사자평의 아침은 장대하고 가슴을 뛰게했어.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한 사자평은 아름다운 고원이야. 넓은 평원과 푸른 초원은 평화로운 휴식을 주었지만 어제의 고통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어. 화장실 사용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야.
전교생이 6명뿐인 고사리 분교의 화장실은 400여 명이나 되는 학생을 감당하기엔 너무 역부족이었어.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게.
밤 마실은 수영복으로?
저녁이면 대원들은 삼삼오오 개울가로 밤 마실을 자주 갔어. 한낮의 땀을 씻는 즐거움 때문에 개울가는 붐볐지. 벗은 옷가지로 랜턴을 덮어 주변을 어둡게 했어. 그렇게 하면 다른 이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거든.
개울가로 떠나기 전 수영복을 속에 입고 완벽한 준비를 했지. 나는 자신 있게 옷을 벗었고 그 순간 일행들이 모두 자빠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어두운 텐트 안에서 급히 갈아입은 수영복은 앞뒤가 바뀌어 배까지 깊이 파인 수영복을 입은 모습에 웃을 수 밖에……
웃음소리는 ‘집중’이라고 외치는 군대 명령같았어.
그날 이후 나는 개울에 가서 목욕을 절대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 사건은 개울물처럼 끊임없이 시끄럽게 흘렀어.
꼼꼼한 듯하면서 엉뚱하고 덜렁거리며 사고를 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스무 살 때도 잘 웃고 풍부한 감성에 ‘허당’인 것은 여전했구나.
젊음을 유등에 띄우다!
우리는 유어국민학교에서 이틀을 야영했어. 하루는 ‘주민의 밤’ 행사를 했어. 다음날은 충분한 휴식으로 누적된 피로를 풀었지. 일상이 된 고통은 즐거움과 넘치는 젊음의 활력에 점점 밀려났어. 우리는 남은 힘을 다해 끝까지 걸었고 온 세상을 두런두런 청춘의 목소리로 가득 채웠지. 마지막 날 밤은 진주 남강에서 소원을 적은 유등을 띄우는 행사를 했어.
남강 유등제는 1592년 10월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 고립된 김시민 장군과 병사들이 군사 신호와 통신 수단으로 풍등과 횃불을 사용했어.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우던 풍습이 기원이 되어 1949년부터 유등 놀이로 정착하게 되었어.
조국순례대행진은 내 안의 힘을 발견한 강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의 연속이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내면의 힘과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어. 내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느낀 성취감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나에게 더 큰 도전과 성장을 이루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었지.
나를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대원들. 행진 중 만난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유등을 띄웠어. 화답하듯 흔들거리
는 나의 등 속엔 빙긋이 웃으시는 아버지가 계셨어. ` 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오래도록 울게 만드셨지. 짭짤하고 달달한 맛의 눈물로 남강이 넘치도록……
멋지다, 스무 살아!
내 인생의 첫 나들이였던 조국순례대행진으로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확고해졌어. 지지와 격려로 이끌어 준 분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키워주었지. 나는 행복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거야.
그 힘든 행진의 강렬한 경험은 너를 우뚝 세우고 더욱 강한 사람으로 성장시켰구나. 그 덕에 지금까지 나는 덤으로 살아왔네. 너를 만난 오늘은 내 나이에 맞게 잘 서있는지 돌아봐야겠다. 내가 힘들 때마다 한 걸음에 달려오는 너.
‘고마워, 스무살아! 너는 내 인생의 교과서야.’
올 여름 소나기가 오면 네 옷자락을 부여잡고 춤을 추고 싶다.
김성실
일상에서 행복 찾기를 추구하고 있는 김성실은 명상을 통해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즐겨한다. 감사와 유머가 풍부하며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here and now 명상으로 마음의 안정과 자신을 직면하고 내면 치유를 돕는 안내자 역할을 잘한다. 경청을 잘하는 사전연명의향서 작성 상담사로 봉사하는 삶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글의 주제문: 스무 살의 조국순례대행진을 통한 자기 발견과 감사의 여정
첫댓글
반장님 반장님 우리 반장님의 넘치는 에너지는 이때 얻으셨나봅니다. 그 힘든 장정을 이겨내시다니..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