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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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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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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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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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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27일 ~ 2010년 07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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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자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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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수
- 배우 최명수는 1925년 목포에서 아버지 최성범과 어머니 한순복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7년 개항한 근대 도시 목포는 유달산을 사이에 두고 조선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이 극명하게 분리돼있었다. 아버지는 목포항 근처에서 건어물상을 운영하는 한편, 근처 영암에서 농사도 짓고 또한 영암과 목포 사이에 배를 이용한 운송업을 하셨다. 어머니는 구술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양동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구술자를 포함한 자녀들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성장했다. 양동교회는 개항기 선교사들이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은 목포에서도 1897년에 가장 먼저 세워진 전라남도 최초의 교회로서 호남 지역 기독교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구술자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하는 음악회나 성극 등을 보며 후에 연기자가 될 수 있는 문화적 소양을 길렀다고 회고한다. 특히 누님 두 분이 모두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설립한 정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마치고 교사로 활동하였던 문화적, 교육적 본보기가 구술자의 성장에 있어 길잡이가 되었다. 동네에서는 ‘풍금 있는 집’으로 부러움을 샀으며 목포에서 가장 먼저 피아노를 쳤다는 누님이 연주하는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가정환경이었다.
구술자는 미국 선교사가 1923년에 설립한 희성유치원을 졸업하고 영흥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6학년 재학 중이던 1937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학교가 강제 폐교되어 북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한다. 이윽고 목포상업전수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일본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상업학교로 진학하여 홀로 일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일본학생, 대만학생, 한국학생이 같이 수업을 받지만 기숙사는 각기 나뉜 건물에서 생활했다. 한국학생의 기숙사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금강료’였다. 피식민지 학생으로서의 한국학생과 대만학생의 교류는 별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배우 야마다 이스즈를 좋아하여 그녀를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근 도시를 방문하기도 한다.
구술자가 5학년 되던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제 근로동원에 의해 전교생이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숙식하며 노동을 했다. 거기서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학생들 및 조선인들을 볼 수 있었다. 전쟁 말기에 어린 학생들까지 총동원된 강제 노역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딸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정신대로 착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또한 아들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군대에 징집되기 전에 대를 잇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경우가 많았다. 구술자 역시 이런 상황에 영향 받아서 1945년 1월, 겨울방학을 맞아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 결혼했다. 그의 나이 21세, 부인은 17세였다.
이윽고 1945년 3월, 다카하시 상업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7월 말에 군대에 징집된다. 전주로 이동하기에 남방으로 수송되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종전 소식을 접하게 되고 군대는 해산된다.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그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다거나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 보다는 우선 한글 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을 통감하고 목포 북교국민학교 국어교사로 취직한다. 이후 광주 서석초등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목포여자중학교, 영흥중학교, 정명여학교 순으로 교사로 재직했으며, 당시 북교국민학교 및 목포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차범석 등과 함께 연극 활동을 하며 목포 평화극장에서 <베니스의 상인> 등을 공연하고 학생들에게 연극지도도 했다. 그는 연극이나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일본에서 출간되는 연극 및 영화 관련 잡지 및 책자들을 구해 보면서 스스로 공부했다.
정명여학교 재직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족 및 동료교사 식구들을 함께 보살피다가 좌우익 대립 및 혼란 속에서 인간성이 무너지는 비극을 체험했다. 그는 항상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을 대하고 구하고자했지만, 전쟁은 어릴 적 친구 사이도 하루아침에 적으로 만드는 불행을 초래했다. 이때의 경험은 구술자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 및 관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교감 서리로 재직하던 중 동료 교사인 이화수의 권유로 영화 <자유부인> 출연에 뜻을 두고 배우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향했다. 1955년 9월 4일,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러나 <자유부인> 제작자가 바뀌면서 영화 출연이 지연되었다. 당시 알게 된 권영순 감독이 이듬해, 영화 <옥단춘>(1956)으로 데뷔하면서 구술자에게 호방 역할과 노인 역할로 1인 2역을 맡겼다. 또한 같은 해 신진연극단체인 ‘제작극회’가 창단되고 차범석, 임희재 등과 함께 원각사 공연을 중심으로 소극장 연극 활동을 병행했다. 교사가 아닌 배우 최명수의 연기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1957년, 역시 권영순 감독의 영화 <나는 너를 싫어한다>에서 주연을 맡았고 김성민 감독의 영화 <처와 애인>에도 출연했다. 그리고 1956년 개국한 한국 최초의 TV방송국 HLKZ-TV 드라마에 출연하고 이후 동양방송(TBC), KBS, MBC, SBS 방송 등의TV 드라마 연기 활동을 지속한다.
그는 교사 출신 배우라고 소개되며 이지적인 분위기와 안정적인 연기 실력으로 주목받는다. 1958년에는 제작극회 제4회 공연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에 출연하는 한편, 영화 <영원한 내사랑>(윤봉춘), 영화 <비련의 섬>(정창화)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에서 상문 (신부) 역, 영화 <눈 나리는 밤>(하한수)에서 검사 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출연작마다 맡은 역할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로 파고들어 연기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열의가 남달랐다. 이를테면 <눈 나리는 밤>에서는 자신이 맡은 검사 역할을 연기하는 데 있어, 영화의 줄거리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검사가 자신의 친족인 어머니를 재판할 수 없다는 법조인의 지적에 대해 직접 자문을 구하고 감독에게 전달하여 영화 내용 전개상 물의가 없도록 신경 썼다. 그리고 <그대와 영원히>에서는 신부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명동성당 윤형중 신부에게 자문을 구하며 신부복을 빌리고 명동성당에서 영화 촬영까지 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한편 <그대와 영원히>를 통해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유현목 감독과는 <오발탄>(1961)의 치과의사 역, <순교자>(1965)의 인민군 소좌 역을 맡아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는 유현목 감독은 다른 감독에 비해 화면 안에서 배우를 자꾸 움직이게 하고 가능한 화면을 유동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참신한 연출을 하고자 노력했다고 회고한다.
1959년에는 영화 <애정과 반항>(오승호)의 주연을 맡았으며 같은 해, 목포연극협회가 서울의 제작극회를 초청하여 목포극장에서 공연한 <공상도시>(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에 출연했다. 단 2회 공연에 3천명의 관객을 동원할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원인은 지역 출신의 차범석 작품에다가 역시 목포 출신의 배우 최명수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기 인생 내내 연극 활동을 지속 및 병행했으며 오히려 영화나 TV 등의 타 매체보다는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기회를 몇 차례 맞이했다. 1962년에 국립극단에 입단하여 1964년까지 활동했는데, 그는 국립극단의 공연 레퍼토리가 다소 진부하고 당시 프랑스의 전위극 혹은 부조리극이 도입되던 연극 풍조에 비해 뒤쳐진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김정옥, 양광남, 이근삼 등과 함께 새로운 연극에 대한 뜻을 같이하여 1963년 1월, 극단 ‘민중극장’을 창단하고 같은 해, 5월 2일~5월 4일 동안 명동국립극장에서 창립공연 <달걀>(페리시앙 마르소 작, 김정옥 연출)의 주연(마지스 역)을 맡았다. 현대의 부조리를 경쾌한 희극풍으로 그린 <달걀>은 초만원을 이루며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구술자의 연기가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제2회 공연으로는 당시 원각사 화재 소실로 인해 마땅한 소극장이 없을 때 ‘살롱드라마’를 시도하여 반도호텔 다이너스티 룸에서 단막극 <별장팝니다>(사샤 기뜨리 작, 허규 연출)와 <대머리여가수>(이오케스코 작, 김정옥 연출)를 공연했다. 이후 국립극단에서 탈퇴하여 민중극장의 공연 <토끼와 포수>(박조열 작, 김정옥 연출, 1965년 국립극장 초연), <국물 있사옵니다>(이근삼 작, 양광남 연출, 1966년 국립극장 초연) 등에 출연했다. 극단 ‘민중극장’은 당시 해외유학파 신예들이 주축이 되어 반(反)연극이라는 첨단적인 희극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민중극장의 가장 큰 공적인 ‘연극의 재미’를 널리 보급시킨 무대 위의 주역은 바로 배우 최명수와 같은 연기자였다.
이처럼 스크린 밖에서도 활발한 연기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영화, 연극뿐만 아니라 시극의 연구 및 창작 공연을 목적으로 삼은 시극동인회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 기자, 음악가, 극작가, 화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나누었다. 또한 라디오 드라마 연기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데 특히, 1967년 8월부터 동양방송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이기붕역을 맡아 1977년 9월까지 10년간 방송되었다. 한편 초창기 방송 드라마 시절부터 출연한 구술자의 TV드라마 출연작은 셀 수 없이 많아 그 기록을 모두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1960년대에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촬영하던 작품부터 중앙정보부가 관여한 반공드라마인 KBS <실화극장>도 있었다.
그 중에서 그가 의미 있는 작품으로 기억하는 출연작으로는 MBC 드라마 <땅>(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 1991)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사회성 짙은 드라마로서 방영 첫 회부터 방송사 안팎으로부터 압력에 시달려 총 50회 방송 분량 가운데 15회로 결말 없이 조기 종영했다. 그리고 <거부실록>, <제 1공화국>, <정계야화> 등으로 한국 방송에 ‘정치드라마’라는 새 장을 개척한 김기팔 작가의 유작이 되었다.
구술자는 드라마 집필과 관련, 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회비판 정신을 잃지 않았던 김기팔 작가와 그의 콤비 고석만 연출을 높이 평가하고 응원한다. 이처럼 시대를 증언하는 의식 있는 작품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가 데뷔 초에 주로 출연했던 신파 멜로 영화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나 애착이 없고, 그보다는 연극 무대나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TV 정치드라마 등을 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구술자는 영화, 연극, 라디오, TV 등 여러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영역에서 다양한 연기 활동을 평생 동안 이어간 연기자이다. 그의 연기 일생 자체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배우 최명수는 살아있는 ‘대한민국 배우 역사서’라고 불린다.
그는 애초에 예술인으로서 연기자가 되고자 했으며 표현에만 집중하여 눈에 보이는 즐거움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반영하고 시대를 의식 하는 작가정신을 가지고 맡은 바 역할을 연기하고자 했다. 2006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에 신부 역으로 출연한 것을 끝으로 작품 활동을 쉬고 있는 그는 뜻이 맞는 좋은 작품을 만나 기회가 온다면 언제라도 거절하지 않겠다고 한다. 현재 연기 활동보다는 민주화나 남북평화를 위한 사회활동으로 매일매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연기자가 성실한 연구를 통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작품이 빛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배우 최명수의 연기를 다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고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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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적사항
성 명 최명수(崔明洙)
생년월일 1925년 9월 14일(양력)
본 적 전라남도 목포
주 소 서울 도봉구 창동
2. 수련과정
1932 희성유치원 졸업 1937 영흥학교 6학년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학교가 강제 폐교 되어 북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 1942 목포상업전수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일본 다카하시상업학교로 진학 1945 일본 다카하시상업학교 졸업 1947 광주 조선대학교 문리학부 입학 후 수학
3. 활동경력
▶일반활동
1925 (1세) 아버지 최성범과 어머니 한순복 사이의 오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목포에서 성장했다. 1932 (8세) 희성유치원 졸업, 결혼식 화동으로 자주 뽑혔다. 1937 (13세) 영흥학교 6학년 재학 중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학교가 강제 폐교되었다. 1938 (14세) 북교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 1942 (18세) 목포상업전수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일본 다카하시상업학교로 진학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 근로동원에 의해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노동 1945 1월(21세) 결혼 1945 3월 일본 다카하시상업학교 졸업 후 귀국 1945 7월 군대 징집, 8월에 종전과 함께 일본 군대 해산. 이윽고 해방 직후 한글교육이 절실한 시점에 목포 북교국민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1947 (23세) 광주 서석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광주 조선대학교 입학 후 수학했으며 이후, 목포 정명여학교, 목포여자중학교, 영흥중학교, 정명여학교 순으로 교사로 재직. 이 때 당시 북교국민학교 및 목포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차범석 등과 함께 연극활동을 하며 평화극 장에서 <베니스의 상인> 등을 공연했으며 학생들에게 연극지도도 했다. 1950 (26세) 목포 정명여학교 재직 중 한국전쟁 발발 1955 (31세)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교감 서리로 재직 중 동료 교사인 이화수의 권유로 영화 <자유부인> 출연에 뜻을 두고 배우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자유부인> 제작자가 바뀌면서 영화 출연이 지연되었다. 1956 (32세) 권영순 감독의 첫 연출작인 영화 <옥단춘>에서 호방 역할과 노인 역할로 1인 2역을 연기. 같은 해, 5월 26일 ‘제작극회’가 창단되고 차범석, 임희재 등과 함께 원각사 공연을 위주로 한 연극활동 병행. 1957 (33세) 권영순 감독의 영화 <나는 너를 싫어한다> 주연 김성민 감독의 영화 <처와 애인> 출연 HLKZ-TV 드라마 출연. 이후 동양방송, KBS, MBC, SBS TV 드라마 활동 지속 1958 (34세) 7월26일~7월28일 서울문리사대에서 ‘제작극회’ 제4회 공연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출연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상문 역으로 출연 영화 <눈 나리는 밤>(하한수) 검사 역으로 출연 영화 <영원한 내사랑>(윤봉춘) 주연 영화 <비련의 섬>(정창화) 주연 1959 (35세) 영화 <애정과 반항>(오승호) 주연 9월 2일 연극 <공상도시>(차범석 작, 김정옥 연출) 목포극장 공연 주연 1961 (37세) 영화 <오발탄>(유현목) 치과의사 역으로 출연 1962 (38세) 국립극단에 입단하여 1964년까지 활동 1963 (39세) 1월 극단 ‘민중극장’ 창단. 창립동인 최명수, 김정옥, 양광남, 이근삼 등. 5월 2일~5월 4일 극단 ‘민중극장’ 창립공연 <달걀>(페리시앙 마르소 작, 김정옥 연출)에서 주연(마지스 역) 을 맡아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 당시 작품에 대한 큰 호평과 함께 구술자의 연기가 극찬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극단 ‘민중극장’ 제2회 공연으로 ‘살롱드라마’(소극장 연극)를 시도하여 반도호텔 다이너스티 룸에서 단막극 <별장팝니다>(사샤기뜨리 작, 규 연출)와 <대머리여가수>(이오케스코 작, 김정옥 연출) 공연 영화 <상해의 밤>(엄심호) 출연 ‘시극동인회’ 활동으로 <바다가 없는 항구>(장호 작, 박용구 연출) 공연 1965 (41세) 영화 <순교자>(유현목) 인민군 소좌 역으로 출연 극단 ‘민중극장’ <토끼와 포수>(박조열 작, 김정옥 연출) 공연 1966 (42세) 5월 4일~5월 8일 극단 '민중극장' <국물 있사옵니다>(이근삼 작, 양광남 연출) 공연 1967 8월 7일부터 동양방송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이기붕 역으로 출연. 1977년 9월 30일까지 10년간 방송되었다. 1968 (44세) 영화 <그 날이 올 때까지>(이형표) 출연 1974 (50세) 영화 <조총련> 출연 1978 (54세) 영화 <율곡과 신사임당>(정진우, 1978) 출연 2006 (82세)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 2006) 신부 역으로 출연
▶작품활동
<영화> (KMDb 참고) 1956 <옥단춘>(권영순)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권영순), <처와 애인>(김성민) 1958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눈 나리는 밤>(하한수), <영원한 내사랑>(윤봉춘), <비련의 섬>(정창화) 1959 <애정과 반항>(오승호) 1961 <오발탄>(유현목) 1963 <상해의 밤>(엄심호) 1965 <순교자>(유현목) 1966 <회전의자>(이형표), <아빠와 평양댁>(문평), <심술각하>(이형표), <남북천리>(이강천) 1967 <임진강>(이한욱), <내일은 웃자>(박종호) 1968 <그 날이 올 때까지>(이형표) 1974 <조총련>(박태원) 1978 <율곡과 신사임당>(정진우) 1991 <철판을 수놓은 어머니>(안태근) 2006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
<연극> 1956 5월 26일 창단한 ‘제작극회’ 동인 1958 7월26일~7월28일 서울문리사대에서 ‘제작극회’ 제4회 공연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출연 1959 9월 2일 연극 <공상도시>(차범석 작, 김정옥 연출) 목포극장 공연 주연 1962 국립극단 입단. 제26회 공연 <젊음의 찬가>(1962년 4월 6일~4월 14일 국립극장 재개관 기념공연)부터 제37회 공연 <만선>(1964년 7월 1일~7월 7일)까지 활동 1963 1월 창단한 극단 ‘민중극장’ 창립 동인. 5월 2일~5월 4일 극단 '민중극장' 창립공연 <달걀>(페리시앙 마르소 작, 김정옥 연출) 주연. 11월, 극단 ‘민중극장’ 제2회 공연으로 ‘살롱드라마’ <별장팝니다>(사샤 기뜨리 작, 허규 연출), <대머리여가수>(이오케스코 작, 김정옥 연출) 공연 ‘시극동인회’ 활동으로 <바다가 없는 항구>(장호 작, 박용구 연출) 공연 1965 극단 ‘민중극장’ 공연 <토끼와 포수>(박조열 작, 김정옥 연출) 공연 1966 5월 4일~ 5월 8일 극단 '민중극장' <국물 있사옵니다>(이근삼 작, 양광남 연출) 공연 그 밖에 <베니스의 상인>(1976), <뿌리>(1977), <화도>(1977), <죄와 벌>(1986), <7년만의 외출>(1988) 등 수십여편의 연극 작품 출연.
<라디오> 동아방송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조선총독부>, <태평양전쟁> 등 동양방송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광복20년>(1967년 8월 7일~1977년 9월 30일) 이기붕 역
(TV드라마편람 참고) 1965 KBS 연속극 <마패>(이진섭 극본, 김연진 연출) TBC(동양방송) 드라마 바이엘극장 <정부>(이성재 극본, 최상현 연출), <행방없는 시체>(김희창 극본, 이기하 연출) 1973 KBS 무대 <심판>(김수현 극본, 김수동 연출) KBS 일일연속극 <약속>(이상현 극본, 김수동 연출) 1979 KBS 문예극장 <벙어리 삼룡이>(나도향・최경식 극본, 김충길 연출) KBS 일요사극 <구원의 모상 久遠의 母像>(곽인행 극본, 장형일 연출) 1980 KBS 주말시츄에이션 <갈등>(박성조・이은교 극본, 최상현 연출) 1981 KBS TV 문학관 3회 <청춘극장>(김래성・이철향 극본, 전세권 연출) KBS 일일연속극 <표적>(오재호 극본, 전세권 연출) 1982 KBS TV 문학관 39회 <김약국의 딸들>(박경리・박병우 극본, 김충길 연출) KBS TV문학관 54회 <도사공>(백우암・최경식 극본, 김충길 연출) KBS TV문학관 59회 <어금니한개>(박용숙・박병우 극본, 김충길 연출) MBC 드라마 <거부실록>(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 1983 KBS 청소년드라마 <고교생 일기>(이금림 극본, 운군일 연출)는 1983년 3월 30일부터 1986 10월 31일까지 방송 1984 KBS드라마 미니시리즈 <객사>(이태원・차범석 극본, 최상현 연출) 1988 KBS 특집기획드라마 <물 뿌리기>(박구홍 극본, 김재현 연출) KBS 수목드라마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조소혜 극본, 이응진 연출) KBS 수목드라마 <풍객>(김원석 극본, 이종수 연출) 1989 KBS 주간단막극 <우리동네>(이문구 원작, 박구홍 극본, 엄기백 연출) MBC 드라마 <제2공화국>(이상현 극본, 고석만 연출)은 1989년 7월 17일부터 1990 4월 9일까지 방송 1991 MBC 드라마 <땅>(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 1992 SBS 드라마 <관촌수필>(이문구 원작, 남홍식 극본, 이종환 연출) 1993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이영신 극본, 고석만 연출) 1994 KBS 인간극장 제3화 <내 가슴의 청보리밭>(이광재 원작, 윤영수 극본, 오동석 연출) 1996 KBS 드라마게임 제607화 <순만씨의 청춘>(구선경 극본, 정성효 연출) SBS 드라마 <임꺽정>(유동윤 극본, 김한영 연출) 그 밖에, (구술자 기록 참고) KBS <임진왜란>(임학송 연출), <세 자매>(최상현 연출), <진주탑>(한정희 연출) <새벽>(이진욱 연출), <소망>(최상현 연출), <전우>(최상현 연출) <사모곡>(이윤선 연출) <토지>(김충길 연출), <그날이 오면>(김충길 연출) <첫사랑>(이응진 연출), <전설의 고향>, <실화극장> 등 다수의 작품. TBC <검은 장갑>(최상현 연출), <남과 북> 외 20여 작품. MBC <대원군>, <인현왕후>, <수사반장>, <전원일기>, <베스트극장> 외 30여 작품. SBS <고독의 문>(이근용 연출) 외 10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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