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라지고 찢어지고 분열되는 시
유안진 시인의 시가 갈라지고 찢어지고 분열되고 폭발하고 있다. 1941년에 양반의 고장인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정년퇴임을 한 시인. 2008년 현재 우리 나이로 68세가 되는 시인. 1965년 <현대문학>에 〈달〉 〈별〉 〈위로〉가 추천되어 등단 한 이후 첫 시집 《달하》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13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
시인의 초기시 세계는 ‘맺히고 후비는 것이 아니라 울리고 스미며, 스며서 번지는’ 매력을 가진, 그러면서 ‘경건하고 소박하며 고백적인’(윤태수, 〈시가 갖는 친화력의 비밀〉, 《빈 가슴 채울 한마디》, 미래사, 1991) 서정시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다가 2000년 《봄비 한 주머니》(창작과비평사)에서부터 변모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해, 2004년 《다보탑을 줍다》(창비)에서 ‘자아해체’를 통해 ‘아무도 가지 않는 거기에,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거기에, 진실의 땅’을 찾아 새로운 ‘지도책(知道冊)’을 그려나가고, 2008년 《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에 이르러 ‘새로운 자아’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치열한 고투를 벌이고 있다.
이순(耳順)이 되는 시인의 경우, 대체로 그동안 견지해 온 시 세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것을 종합하고 갈무리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안진 시인은 이순의 나이, 그것도 그 끝자락의 시점에서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격렬하게 용솟음치고 부딪치는 시를 쓰고 있다.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숫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살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 더욱 몰랐지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監視者)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 내 넋인 줄 몰랐지
이럴 순 없다고 달려가자
그는 어느새 반대쪽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한 번 더 뒤 돌아섰을 때는
출구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고작이었고
잘 가라고 흔들어대는 손들 사이로
한 번 더 눈길이 마주쳤던가
나는 이미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이었다
―〈그림자를 팔다〉 전문
위 시에서 화자는 두 개의 ‘나’로 분열되어 있다. 모임에 막 참석하려는 일상의 ‘나’와, 이미 모임에 와서 웃고 떠들고 있는 또 다른 ‘나’가 그것이다. 또 다른 ‘나’는 일상의 ‘나’의 ‘그림자’이다. 여기서 ‘그림자’로서의 ‘나’는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의식의 심층에 내재해 있는 무의식으로서의 ‘나’에 해당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상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분열된 채 두 개의 ‘나’가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 본래 무의식의 ‘나’는 일상의 ‘나’와 밤낮으로 늘 함께 있어 왔다.
그러나 ‘흰머리가 돋고 주름살이 생기’는 나이가 될 때까지 일상의 ‘나’는 무의식의 ‘나’인 ‘그림자’를 외면하거나 혹은 ‘유령’에게 팔아버렸다. 곧 무의식의 욕망을 억압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모임에 가서 외면하고 팔아버린 그 ‘그림자’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흉내내며 조롱하며 따라다니던 검은 감시자’인 ‘그림자’가 ‘썩어문드러진 고통의 얼룩’이자 ‘넋’인줄을 깨닫는다. 그 순간 ‘그림자’를 그동안 잊고 살아온 일상의 ‘나’가 ‘못난 짝퉁’이자 ‘유령’이며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에 불과하다고 자책한다.
(……)
안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밖에서 찾아다녔지
홀로 있는 것을 잃어 버렸지
나는 자꾸 작아지는데
그림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
(……)
―〈어느날 문득이〉에서
그동안 그림자를 잊고 있었지만, 그 그림자는 자가 증식을 하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것이고, 그 존재를 ‘어느날 문득이’ 감지하게 된다, 그 ‘어느날’은 아마도 나이가 들어 ‘편두통이 생기고 이명도 생기고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그림자도 반쪽이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알약의 뒤를 따라서 15분쯤 갔을까, 어설픈 실루엣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 너머 비몽사몽간에 느껴지는, 내가 살았던 적이 없는 나의 집, 나의 냄새가 절어 든 안방에는 나를 기다려 수절하는 내 그림자가 있었다
추억 밖의, 지워진, 잊혀진 무의미가, 그리움 밖의 사건 속 주인공이 되어, 폭우와 폭풍과 땡볕의 여름 에너지를 충전 받아가며 나를 기다린 모양, 많이 탈색되어 있었다
내 그늘을 덧입으려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넘겨도 넘겨도 같은 페이지였다, 진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찾아 첫줄부터 읽는 사이, 내 그림자는 벌써 떠나가 버렸고, 그의 실루엣만 가뭇이 뒤따르고 있었다,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데, 든 적도 없는 잠이 눈꺼풀을 비비며 하품하고 있었다.
―〈수면제에 홀리다〉 전문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기 직전 ‘비몽사몽간에’ ‘어설픈 실루엣’을 만난다. 그것은 무의식의 욕망인 ‘그림자’이자 ‘그늘’로, ‘내가 살았던 적’이 없지만, ‘나의 집’이고 ‘나의 냄새가 절어 든 안방’이다. 나는 그를 그동안 ‘추억 밖’으로 지우고 잊고 있었고,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폭우와 폭풍과 땡볕’으로 상징되는 온갖 풍파와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를 기다리며 ‘수절’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많이 ‘탈색’되어 있다. 그것을 이제 ‘덧입으려고’ 하지만 그림자는 떠나가 버리고 ‘실루엣’만 남아 있다.
‘꿈이 자꾸 줄어드니까/ 새 꿈이 안 오니까’(〈안경, 잘 때 쓴다〉) 화자는 잘 때 안경을 쓰고서라도, 혹은 앞선 시처럼 수면제를 먹고서라도, 줄어드는 ‘꿈’, 그 무의식의 욕망으로서의 ‘그림자’를 만나고자 한다. 이처럼, 그동안 무의식의 욕망을 상실 내지 억압한 채 ‘못난 짝퉁’으로 살아왔다는 자책감, 그러면서 이제부터라도 그 욕망을 되찾고 싶다는 갈망, 그런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일상의 ‘나’와 무의식의 욕망의 ‘나’로 분열되어 찢어지고 갈라지고 있는 자아가 이번 시집 전편을 활보하고 있다.
2. ‘진실/거짓’의 이분법과 자아분열
시인의 시가 이처럼 ‘터지고 폭발하며 무너지며 타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시인의 내적 측면과 관련된 것이다.
뒤축 접힌 막신을 신으면 동네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한 번만 더 신고 버리자고 헌신을 신었더니 전에 살던 아파트에 와 있지 않던가
차를 몰고 나가면 퇴직한 직장길로 가곤 한다
김유신의 애마가 천관의 집으로 직행했다더니
18년 몰아온 내 차도 26년 근무지로 길을 잡아
차를 돌릴 때마다 새 차를 결심하곤 한다
아쉬운 대로 11번부터 샀다
미끄럼 방지 신바닥을 믿고 눈길 얼음길도 걷다보면 낯선 곳 아니던가, 긴장과 당혹스러움은, 살아본 적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 없는 방식으로 사는 흥분이 되는 듯, 잘못 든 길 잘못 찾은 곳에서, 허탈한 헛웃음도 웃어본 적 없는 새 웃음 같았고, 때로는 몇몇 세기를 성큼 끌어당겨 살려고 못 타본 노선의 차를 타고 상상 속 행성으로 가고 있거나, 낯선 일터에서 외계인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설레임과 두려움을, 처음을, 처음처럼 체험하는 기분이 되곤 했다
새 차는 힘들지만 새 신은 가끔 사 신어야 해.
―〈신이 길을 잡다〉 전문
위 시의 주조음은 ‘새로움’, ‘처음’이다. 화자는 헌신을 신고, 18년 몰던 차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그 신과 차가 26년 동안 몸담았던 근무지로, 혹은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화자를 자꾸 이끈다. 그것은 지난 세월 동안 관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살아온 삶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이순의 나이지만, 늙어감을 한탄하면서 과거의 추억이나 기억에 얽매여 그것을 반추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싫다.
그런 삶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도/ 염색약 발라가며 싸우게’(〈말싸움, 염색약 발라가며〉) 되는 삶에 불과하고, ‘주름치마 아이들이 깨금발로 뛰며 올라/ 계단마다 경쾌한 아코디언 길의 주름살/ 박자에 발맞추는 여아들의 다리’를 보고 ‘심통의 주름살만 활짝 펴지면서/ 심술만 콩죽 끓듯 끓어오른’(〈아코디언 길을 오르다〉) 삶에 불과하다. 그런 삶은 ‘못난 짝퉁’ 같은 삶이다.
이제 새롭게, 처음처럼, 이전에는 살아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다. 모든 것이 새로운 삶, 마치 ‘상상 속의 행성’으로의 여행처럼, 낯선 삶을 살면서 긴장과 당혹스러움, 설레임과 두려움을 체험해 보고 싶다. ‘새 신’을 사듯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나’를 되찾아야 한다. 자아 분열의 한 단초가 여기에 있다.
다음, 시인의 외적 측면에서, 일상 현실이 갖는 ‘진실/거짓’이라는 이분법적 분할과 차별과 관련된 것이다.
덜 핀 봉우리인데 할미꽃이라니
다 시들어가는데 애기똥풀이라고?
제 키만큼 일어섰는데도 앉은뱅이꽃이라
귀엽고 앙징스러운데도 오랑캐꽃이라네
며느리밑씻개 개부랄꽃 말똥비름 여우 오줌 쥐똥나무…등등
세상과 나 사이, 너무 멀어, 주파수가 너무 달라
세상은 진실이 거짓말하는 곳이니까
나는 거짓이 진실을 말하는 세상을 만들었지
(……)
―〈거짓 세상, 홈피〉에서
세상은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곳’이다. ‘할미꽃, 애기똥풀, 앉은뱅이꽃’ 등처럼 사물에 대한 명명어조차 진실이 아닌 거짓인 곳, 그곳이 화자가 살아온 세상이다. 그 세상은 ‘나’와 거리가 너무 멀거나, 혹은 ‘주파수’가 맞지 않은 곳이다. 그동안 화자는 세상의 진실이 거짓이라는 것을 무의식의 ‘나’를 통해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의식상의 ‘나’는 그런 세상에 억지로 주파수를 맞추고, 그리고 그 세상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살아 왔다.
나이가 들어 그 삶을 되돌아 보건대, 그 삶은 ‘나’의 진정한 삶이 아닌 ‘나’의 ‘못난 짝퉁’이자 ‘유령’이자 ‘절반너머 녹아버린 얼음조각’ 같은 삶에 불과했다.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 ‘세상의 진실’이 아닌 ‘진정한 진실’을 갈망하는 무의식의 ‘나’는 점차 탈색되고 퇴색해 가 결국에는 ‘실루엣’만 남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세상의 진실을 거짓으로 여기는 것인가? 세상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상이 ‘할미꽃’이라고 할 때, 그 언어가 왜 진실이 아니고 거짓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세상의 언어적 상징체계를 규정짓는 사회문화 규범체계에 대한 점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유안진 시인은 시적 인식의 지평을 시인이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사회문화적 규범체계로, 나아가 자본주의의 보편적 모순으로, 더 나아가 인류문명사 전체로 심화·확대시킨다.
(i)
(……)
공통적 DNA
밤은, 우리의 혈통인데
찰스다윈씨!
우린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뿔뿔이 갈라졌나요?
―〈밤의 DNA〉에서
(ii)
(……)
이브는 사과 때문에
뉴턴은 사과 덕분에
금단(禁斷)의 과일에서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물증이 되어
신학과 물리학의 고대사가 되었고
외국인의 성씨(姓氏)에다 컴퓨터 상표도 되더니
최근에는 우리나라 작가의 필명(筆名)까지 된 줄은 알았지만
(……)
―〈사과에 놀아나다〉에서
(iii)
(……)
나는 손가락질이라는 악역도 맡아
인류역사상 야만과 문명은 주로 나의 역할이었고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비밀과 비결도 나 혼자만의 역할이었지
형제들 중 가장 지성적이고 남성적인 나는
남성보다도 더 남성적이며 손(手) 이상의 손 노릇을 맡아왔지
(……)
―〈검지의 긍지〉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특징은 칸트의 선험적 이성, 뉴턴의 물리학, 다윈의 진화론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성적 존재로 세계의 주체이며(선험적 이성), 자연은 기계처럼 그 법칙이 결정되어 있고 인간이 그 법칙을 파악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재가공할 수 있다는 것(물리학), 이를 통해 물질적인 진보(진화)만이 중요하다는 것(진화론)이 자본주의의 핵심 요체이다.
곧 자본주의는 인간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인간/ 의식/ 이성/ 물질/ 육체 등이 중심부를 이루고, 자연/ 무의식/ 비이성/ 정신/ 영혼 등은 주변부로 밀려나,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의 지배와 착취라는 폭력적인 이항대립체계를 구축한다.
(i)에서, 화자는 찰스다윈의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진보관을 절대적 진실로 여기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ii)에서, 뉴턴 물리학부터 시작된 과학만능주의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사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더불어 ‘이브’로 표상되는 태초의 문명 발생 때까지로 인식을 넓혀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확장된 인식은 (iii)에서 ‘검지 손가락’을 매개로 하여 태초의 ‘야훼와 아담의 최초 접촉’까지로 나아가, ‘야만과 문명’의 인류역사 전체를 비판대상으로 삼고 있다.
정보사회, 자본주의 일반, 나아가 인류 문명사 전체까지를 아우름으로써 시인은 세상의 ‘진실’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류 문명을 지배해온 지배체제에 의해 조작되고 기획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인류의 문명사 전체를 보편적으로 관통해온 규범, 그리고 자본주의와 정보사회의 특수한 측면과 관련된 지배체제의 규범, 그런 온갖 규범에 길들여지는 것(〈독후감〉), 그리고는 그것을 진실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곧 세상은 ‘진실/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혹은 이항대립적 체계에 기초하여, 지배체제의 규범을 훌륭히 수행하고 지탱하는 것은 진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짓이라 가르치고 설파한다. 그러나 지배체제의 모순을 간파한 이에게 세상의 진실은 진정한 진실이 아닌 거짓일 뿐이다. 대학교수로서 시인은 지배체제의 규범을 진실이라고 가르치고 자신 역시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무의식으로는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다만 그것을 표출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순이 된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억압하지 않고 표출함으로써, 점점 퇴색해가는 무의식의 욕망을 되찾고자 한다. 이로 인해 자아는 분열되고 있다.
문자나 전화나 편지질보다는
혼자서 저 혼자에 최대한 몰입되어
저 혼자의 사랑에 심각해지는 날에
저 혼자만을 사랑하여
박살내지 않고는 못 견딜 날씨에
헤밍웨이는 방아쇠를 당겨서
미시마 유끼오는 배를 갈라서
버지니아 울프는 강물로 달려가서
×씨들은 한강교 난간에서 날개를 펼쳐서
직성(直星)을 풀었다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 때문에
알파보다는 오메가에 더 어울리는 이런 날씨에는
일주일치 독감약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즉각 고자리서 꽃송이로 터지기에 딱 좋은 날씨에
아뿔싸, 때 놓친 줄을 겨우 깨닫다니
너무 늦어버려 직성 풀 수 없는 날에
달아난 혼만 아지랑 아지랑
사방 팔방에서 비웃는 줄을 겨우 눈치채다니
―〈날씨가 너무 좋아〉 전문
제도적 규범에 길들여져 관습적이고 습관적으로 살아온 화자는 ‘직성(直星)’을 풀어버린 ‘헤밍웨이, 미시마 유끼오, 버지니아 울프’ 등을 생각한다. 그들과는 달리, 화자는 지금까지 ‘직성’을 풀어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물론 ‘헤밍웨이’처럼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직성’을 풀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직성’ 푸는 것을 놓칠 수는 없다.
‘사방팔방’에서 비웃는 ‘혼’을 눈치 채면서 화자는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또한 ‘실패 없는 새 마법을 깨우’(〈아라비아 공주〉)치기 위해, ‘손가락’은 물론이고 ‘발가락’마저 잘라버리면서까지(〈저질러 버리고 싶어서〉) 화자와 그 삶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것이 ‘진실된 거짓 찾기’ 혹은 ‘거짓말로 참말하기’로 구체화된다.
3. 새로운 자아가 지향하는 시원
(……)
때없이 들고나던 철조망에 할퀴어
갑자기 피 흘리는 오늘의 저녁놀
평상시가 비상시로
출입구가 비상구로
사랑이 미움으로 돌변하는 변덕도
도둑같이 온다고
알면 병(病)이 되고
모르면 약(藥)이 되는 진실된 거짓들
―〈진실, 반어적 진실〉에서
‘꽃은 떨어지기를/ 순결은 더럽혀지기를/ 기록은 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체제의 규범에 입각한 진실일 뿐이다. ‘평상시’가 ‘비상시’로, ‘출입구’가 ‘비상구’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다. ‘진실/거짓’의 구분은 지배체제의 논리일 뿐이다. ‘거짓’으로 치부되는 것에, 혹은 이항대립체계에서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혹은 제도에 길들여진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욕망 속에 ‘진실’이 있다.
속화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는 무의식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하기에 ‘병(病)’이 된다. 그 ‘병’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실된 거짓’들을 찾아가야 한다. 의식상의 언술로 씌어진 시가 아니라 무의식의 욕망의 언술로 씌어진 시를 통해 ‘진실된 거짓’을 ‘반어’와 ‘역설’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삶을 해체하고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새로운 ‘나’로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시집의 주조음이다.
(i)
(……)
초현실(超現實)에서야 제대로 나다워질 수 있어서
거기의 내일이 진정한 오늘이고
없는 거기가 절실한 현실이고
더 멋진 여기라고 미래라고 믿어온 날마다는
허공을 헤엄치거나 물속을 날아다닌 것 같아라.
―〈초현실이 더욱 현실이다〉에서
(ii)
(……)
잠결에 하는 말이 더 진담이고
코로 부르는 노래가 더욱 눈물겨운데
티눈으로 살펴봐도 넘어지고 거꾸러지는데
뜬눈으로 지켜도 잠도 꿈도 놓치는데
비정상이 정상인데, 다수의 횡포야
―〈지극히 정상적인〉에서
(i)에서 ‘초현실’이 ‘진정한 오늘’이고 ‘절실한 현실’이라는 것, (ii)에서 무의식에서 표출되는 ‘잠꼬대, 코골이’야말로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인식에 기초해서 화자는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의 욕망을 표출하면서 관습과 제도의 금기로부터 일탈을 기획한다.
그 일탈은, ‘어느 전생 내 살빛이었을 컴컴한 조명 아래/ 삶에는 바보이고 시대에는 숙맥이고 세상에는 백치인 끼리끼리/ 치명적 춤 한번 춰 보는 꿈/ 탱고’(〈탱고 탱고, 탱고를 위하여)〉로, ‘금지마다 숨기지 않는 노골적인 피(血)빛 저의(底意)/ 불(火)빛 유혹을/ 사랑의 고백처럼 반어(反語)와 역설(逆說)의 효과’로 도발하는 것(〈금지는 도발한다〉)으로, ‘떨떠름한 눈길로 삐딱하게 꼬나보며/ 옥의 티가 아니라/ 티 있는 옥들이 마땅하다 싶어져/ 시각(視覺)은 저절로 삐딱해져 버렸지’(〈사시(斜視)로 본다〉)로 세분화된다. 그러면서 그러한 일탈은 자아해체로 심화된다.
(i)
(……)
왼손 둘이서 새 얼굴을 만든다
자동개폐식 정수리 뚜껑으로 두통을 조절하고
사방에 눈 귀 하나씩 멀리 넓게 깊게 보게 하고
제 몸 냄새에 민감한 턱 밑에 코 하나
신의 방식으로 침묵하는 입도 하나에
사랑에만은 늘 넉넉하라고 커다란 하트 얼굴의
새 아담을 만든다
―〈Torso, 제 얼굴을 만든다〉에서
(ii)
잔을 비운다, 불세례를 기다리는 갈증에 불붙어
피는 불꽃 번지는 불길, 불기둥들 솟구친다
나의 감옥, 가슴 어디 깊은 유전(油田)에도 불붙어
매장량 무한정의 원유(原油), 검은 눈물 치솟아 소리치고
묶인 쇠사슬 채워진 쇠고랑도 녹아내린다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오른다
매복된 다이너마이트 뭉치들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니던 내가
터지고 폭발하며 무너지며 타오른 아수라장
잿더미엔 분명 소돔과 고모라가 재건되겠지만
한 밤중 혼자 불을 마시는 성결(聖潔)의 의식(儀式)
눈꺼풀 밀고 흐르는 소금물 한 방울의 고요를 노리며
물로 된 불의 잔, 잔을 비운다 비운다
고통이 황홀로 재탄생되는 순간의 갈증
불에 목마른 밤, 그런 밤이 있다.
―〈불을 마신다〉 전문
(i)에서는, 일상의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사랑에만은 늘 넉넉’한 ‘새 아담’과 같은 새로운 인간으로의 탄생을 갈망하고 있다. (ii)에서는, ‘소돔과 고모라’로 표상되는 타락한 일상 현실을 잿더미로 만들 ‘불’, 곧 ‘가슴 어디 깊은’ 무의식에 내재한 ‘무한정’의 욕망의 ‘불기둥’을 폭발시켜 ‘재탄생’하고자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욕망 표출을 통한 자아분열과 재탄생은 1930년대 모더니스트 이상에게서 그 전범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이 욕망의 과격한 표출을 통해 당대 근대성을 비판하고 이로 인해 심각한 자아분열을 일으키면서 난해한 시를 산출함에 반해, 유안진 시인은 욕망을 분출하여 관습화된 일상을 비판하되 그것을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으로 정체시켜 표출한다.
(……)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 올 흴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언 가지를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목청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 밖까지 몸서리치는 고독
영험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까마귀의 길〉에서
‘터럭 한 올 흴 수 없는’ 독야청정의 자존심으로, ‘섣달 그믐밤 언 가지’를 녹이는 뜨거운 열정으로, 몸서리치는 고독으로, 무의식의 ‘나’를 갈고 닦아 그것과 일체가 되어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그리고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화자는 일상의 ‘나’를 해체하고 문명 이전의 태초의 세계로 무의식의 ‘나’를 밀어 넣는다.
누구의 유전자에도 오염되지 않은
무염시태(無染始胎)의 나는
내가 잉태하기로 했다
다시 태어나야 진정한 내가 될 수 있거든
나는 자궁을 가졌거든
누구의 간섭 어떤 의무도
어떤 관습에도 감시당하지 않고
어떤 규범에도 검토당하지 않는
모든 순치(馴致)를 거부한 나를 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로서만 살게 될 새로운 나는
아무도 낳아 줄 수 없으니까
성스러운 사랑과 추악한 스캔들은 동전의 양면이니
성스럽지도 추악하지도 말거라
저 나가 되기 위해서나 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부디 이 나를 배반하거라
나의 태아기는 280일로는 태부족이리니
무한 기다리리라
태초의 아담보다 더 최초의 나이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낳는다〉 전문
무의식의 ‘나’로 새롭게 태어난 ‘나’는 ‘태초의 아담보다 더 최초의 나’이다. ‘아담과 이브’ 이후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문명을 지배하는 논리에 의해 ‘순치’되어 온 것이 인류사이다. 그리고 그 인류사의 반복되는 삶을 살아온 것이 이순이 된 시인이다. 시인은 그런 삶을 거부하고, 문명 발생 이전, ‘무염시태’의 단계로까지 무의식의 욕망의 촉수를 뻗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
풀잎 하나에도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 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봉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눈 속의 바다 건너〉 전문
새롭게 태어난 ‘나’는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라고 선언하면서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그 ‘외길’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 ‘외길’은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촉발된 ‘뜨거운 내 눈물’의 길이다. 관습화되고 제도화된 삶을 부정하고, 일상의 ‘나’를 해체하고, 무의식의 오염되지 않는 진정한 욕망을 통해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나’만이 그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지금 ‘여기’가 아닌 ‘저기’를 보는 눈, ‘멀리 보는 눈먼 큰 눈’만으로 그 길을 볼 수 있다.
‘내 안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은 안구밖에 없다.’라는 아포리즘이 근대 이성적 인간의 인식의 명증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눈먼 큰 눈’은 그런 경험적 시지각에 입각한 눈을 부정한, 제도와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는 무의식의 욕망의 눈이다. 시인은 그 눈으로 ‘신대륙’을 가고자 한다. 그 ‘신대륙’은 ‘태허의 신창세기’이자 ‘신출애굽기’이며,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에서 탈출’한 것이고, ‘무애(無碍)의 신인류’(〈파란 피〉)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 자리는 인류사의 측면에서 일종의 ‘황금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며, 개인사적 측면에서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은 세계에 해당한다. 그것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 말과 글이 탄생하기 이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물,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 모든 위대한 문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시원의 공간’, 혹은 ‘둥근 새의 집’, 혹은 ‘존재의 집’, 혹은 ‘선험적 고향’과 같은 세계이다.
(……)
풀과 꽃이 향기 뿜어 재롱떨고
나방 풀벌레 산새가 알 까고 새끼 치는 무릎정갱이를
바위로 이불 덮은 푸나무들 잘도 자라
다들 함께 어울려 사는 이 자리는
이냥 이대로가 완벽(完璧)이니라
창조의 모습이자 신의 말씀이니라
(……)
―〈손대지 마라〉에서
이순이 되어 발표된 유안진의 시는 풀과 꽃과 나방과 풀벌레와 산새와 바위와 푸나무와 인간이 완벽하게 어울려 사는 ‘시원의 공간’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다. 그 공간은 우리 시단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깊고도 넓은 영역이다. 그 영역은 아무나 도달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 인간 존재의 진정한 조건에 대한 치열한 탐색, 그로 인한 고독과의 처절한 고투, 그런 뜨거운 ‘열정’과 ‘그리움’과 ‘수난’과 ‘황홀함’을 경험한 시인만이 가능한 자리이다. 그래서 시인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 어느 한 편도 긴장감을 풀고서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밀도 있게 응집되어 있고, 깊고 넓은 시적 사유를 담고 있다.
4. 신의 목소리를 현현하는 시인
흔히 시원을 지향하는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것이 다분히 수사적 차원 내지 형식논리적 차원의 눈속임인 경우를 왕왕 목도한다. 일종의 ‘포즈’로서 자신을 위장하여 자신의 시가 마치 심오한 존재론적 사유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혹시나 유안진 시인의 시도 그런 것은 아닌지.
시끄러워 잠이 깼다
창유리에 달라붙은 반투명의 아우성
떼지어 엉키며 부풀리며 퍼져나가며
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메아리조차 자욱하다
고요가 이렇게도 소리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청이 이렇게도 깊고도 요란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소리가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다니
귀를 틀어막고 우왕좌왕하다 보니
먼데 산봉우리 하나가 모가지만 내 놓은 채 허우적거린다
세상은 거대한 안개바다
깊이 모를 대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아우성만
끼리끼리 휘돌며 메아리치고 되받아친다
한나절을 기다려 나가보니
산자락 자락마다 선혈이 낭자했다
단풍은 절정,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였다.
―〈고요의 아우성〉 전문
앞선 시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가 경험적 시지각에 입각한 눈이 아니라 무의식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 시에서도 귀는 경험적 시지각에 입각한 귀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귀이다. 시인은 내설악에 머물고 있다. 시인은 ‘고요의 아우성’을 듣고 잠을 깬다.
고요가 ‘떼지어 엉키며 부풀리며 퍼져나가며’, ‘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내설악을 통째로 삼키고 있다. 그 아우성이 얼마나 요란했으면 귀를 틀어막고 우왕좌왕 했겠는가. 한나절 뒤 밖으로 나온 시인은 그 아우성이 산자락 자락마다 선혈이 낭자한 단풍을 태동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내설악의 ‘고요의 아우성’은 화자의 내면으로 삼투된다. ‘고요의 아우성’을 듣는 순간, 시인 스스로 산봉우리가 된다. 산봉우리가 된 시인은 ‘모가지’만 내 놓은 채 거대한 안개바다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고요의 아우성’을 듣는다. 그 순간 산은 시인의 자아로, ‘고요의 아우성’은 무의식의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이 낳은 선홍빛 단풍은 새롭게 태어난 ‘나’가 도달하고자 하는 아름다우면서도 황홀한 시원의 공간으로 전이되고 중첩된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풍경의 의인화’, 혹은 ‘자연에의 감정이입’ 등을 운위하는 것은 시인이 도달한 경지를 모독하는 것이다. 세계와 일상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을 치르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그러면서 시원의 공간을 강렬하게 지향하는 시인만이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러기에 유안진 시인의 이번 시편들은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뿐 호소(呼訴) 같다’에서처럼, ‘무모한 육필(肉筆)’이자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겁난다〉) 것들이면서, ‘페로몬이라는 위장 불가능한 절대 언어로 의사소통하며 생존하는 개미’처럼 ‘절대 언어’(〈절대언어, 무너짐〉) 그 자체이다. 이러한 ‘절대 언어’의 단계는 〈나무의 지느러미〉 〈시끄러운 적막〉 등의 시편에서도 확인된다.
히말라야 오르는 길
외딴 산 마을 밖
비어 있는 마을 어귀 비어 있는 길 가운데
새끼나귀 한 마리 혼자 서 있었다
고삐 매이지 않은 채로 마냥 서 있었다
올라갈 때도 서 있더니
내려올 때 보아도 그냥 서 있었다
마알간 눈빛으로 무작정 서 있었다
한참 더 내려와 돌아다보니
도포자락 휘날리는 흰 구름이 타고 있었다
신(神)을 기다린 줄은 상상도 못했다
―〈神을 기다렸다〉 전문
히말라야 고봉에서 신을 기다리면서 흰 구름을 태우고 있는 ‘마알간 눈빛’의 새끼나귀는 다름 아닌 새롭게 태어난 시인의 자아이다. 천상과 지상의 중간, 신과 인간의 중간 자리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시인. 그 신은 새롭게 태어난 자아가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과 자연,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이 합일된 시원의 공간의 표상물이다.
그 ‘시원의 공간’, 그 ‘존재의 집’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언어)를 듣고(읽고) 그 목소리로 노래하는 시, ‘궁핍한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지상에는 부재하는, 그러나 인간이 진정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되찾아야 할 ‘존재의 언어’로 노래하는 시, ‘사제와 전령사’로서의 시, 그것이 유안진 시인이 도달한 자리이다.
그 목소리가 관습적 일상에서 보면 거짓이지만, 일상의 전복을 꾀하는 자리에 설 때 그 목소리야말로 인간 존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진실이다. 그 진실로 거짓된 세상을 정화하고,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것, 그 자리에 이번 시집이 놓여 있다.
현실에 부재하는 시원의 공간을 향해 치열한 자기반성과 고통스러운 자아 해체의 과정을 거치는 유안진의 시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상실된 요람을 떠올리게 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인간을 꿈꿀 수 있지 않은가. 또, 난해시라는 이름으로 시를 난도질하는 현재의 시단에서 유안진 시인의 시는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우쳐 주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 황폐한 비인간화의 시대에 서정시가 줄 수 있는 미학적 감응력의 최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순의 나이에, 지금, 시원의 공간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읽고 그 목소리로 노래하는 유안진 시인의 작품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은 황홀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천상과 지상이 통일’되는 ‘백색절대주의’(〈폭설, 백색의 겨울혁명〉)를 강렬히 갈망하는 시인의 다음 행보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흥술 | 1961년 경남 사천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자멸과 회생의 소설문학》 《작가와 탈근대성》 《시원의 울림》 《태평천하》 《상록수》 등이 있음. 김달진 문학평론상 수상.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