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도는 개인 소유?
오동도가 개인 소유였다고 한다. 고종 22년 1885년 조정은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침략하였는데도 거문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조정은 전라관찰사에게 거문도가 나오는 해도를 그려 올리라고 하였다. 지시를 받은 전라 관찰사는 다시 여수 좌수영 수사에게 지시를 하였다.
좌수사는 종포에서 돌산까지 나룻배를 관리하던 유선달(柳先達) (본명 柳啓濬)에게 해도를 그리라고 하였다. 당시 30세인 유선달은 학문이 해박하고 민화에 능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거문도와 남해안 해도와 관내 상황을 그려 바친 유선달의 공을 높이 사서 ‘오동도를 달라’는 소원을 들어주어 개인 소유가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토지 조사를 할 때 유선달의 아들은 화재로 증서가 불타버려 소유를 주장할 수가 없었다. 오동도 소유자가 없어서 일본인 학교조합재산으로 편입시켜버렸다.
오동도방파제 공사
조선8경으로 선정된 한려수도 시작 오동도
1934년 10월 일본의 오사카매일신문사에서 조선 통치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좋아하는 조선 경치를 투표를 하여 조선8경을 선정하였다. 3,140만표가 모아져 여수와 한산도 뱃길 한려수도가 2,225,243표를 얻어 8번째로 선정되었다.
지금도 ‘한려수도’를 자랑으로 여기지만 일제 침략의 치욕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여수에서 ‘한려수도’의 시작은 오동도라고 할 수 있다.
오동도 등대가 보이는 기암절벽
여수교육청 소유가 된 오동도
일제강점기 때는 오동도가 군사시설이라고 해서 민간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오동도가 교육청 소유일 때 육지부는 여수서초등학교 실습지로 이용되어 채소류를 심었고, 해안부는 수산학교 실습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동도는 해방이 되면서 여수교육청 소유가 되었고,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해방 후 1948년 9월 21일 오동도에서는 추석을 맞아 정부 수립을 경축하기 위해서 추석놀이가 있었다.
농악과 궁술, 씨름, 명창대회, 그네뛰기, 널뛰기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를 하였다. 이와 같은 추석놀이는 한참 후까지 계속되었다.
1966년 4월 여수시가 공사비 120만원을 들여서 일반 도로를 만들고, 1967년 4월 여수교육청에서 오동도 입장료를 받았다. 1968년 12월 3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항로표지기지창을 제외하고 모든 건축물이 철거되었다.
1930년대 신항과 오동도
여수시가 2천만원에 사들여
1969년 9월 여수시가 2,000만원에 매수를 하여 약 3,000만원을 들여서 정상에 전망대와 산책도로, 방파제 난간, 관리사무소 등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옛날 오동도에는 숲속에 무허가로 상가들이 있었다. 여수시는 여수교육청에서 오동도를 사들인 다음 입주자들에게 건축허가를 내주어 집을 짓게 하였다.
중앙의 종합 감사 결과 건축이 위법임이 밝혀져 1979년 3월 29일 시청직원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39동을 강제 철거를 하여 유혈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에 오동도에 지금과 같은 민간자본의 종합상가가 들어선 것은 1983년이다.
오동도방파제 함괴 제작
오동도는 다리가 없고 방파제
오동도가 육지와 이어진 것은 신항이 만들어지면서이다. 1923년 5월 24일 신항 일대를 매립을 한다. 남조선철도주식회사가 철도 부설을 위한 철도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5필지 7,655평을 매립을 한다.
1930년 12월 25일 여수와 광주 간 철도가 개통되고, 여수와 시모노세끼 간 연락선이 취항을 한다. 1931년 중앙동 로터리에서 여수역까지 도로를 잇는 대판통이 개통하였다. 철도 개통 이후 일본은 여수를 부산 다음 가는 조선의 제2의 항구로 만들기 위해서 신항의 항만 시설을 확충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최대의 관광지가 된 오동도를 육지와 이은 것은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항을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에 지나지 않았다.
1930년대 신항과 오동도
방파제 공사는 조선총독부 직영 공사
일제는 오동도방파제를 축조하기 위해서 조선총독부 내무국 여수토목출장소를 만들었다. 1935년 4월 오동도 입구까지 753m에 이르는 방파제를 쌓기 시작하였다.
‘부르스토랑’이라는 갯벌 파는 배로 바다밑 15m까지 갯벌을 파내고, 시멘트로 만든 15㎡ 넓이의 ‘함괴’를 집어넣고, 그 함괴 속에 굵은 바위를 집어 넣어 쌓는 방식이었다.
‘함괴’는 남산동 수산진흥원 자리에서 1주일에 하나씩 만들어 배로 오동도까지 운반을 하였다. 싣고 가는 배를 다른 배가 피하도록 시내가 떠나가도록 싸이렌 소리를 내면서 가는 것이 구경거리가 되었다.
신항매립과 오동도방파제에 필요한 흙을 파간 흙산
오동도방파제에 필요한 돌과 흙은 오동도 입구에서 채석을 하여 지금의 높은 절벽이 그 때 생긴 것이다. 함괴에 들어가는 돌은 돌산 백초와 소경도, 대경도 등 인근 산에서 가져왔다. 흙은 여수여중 뒷산인 흙산에서 오동도 현장까지 수십 가닥의 레일을 깔고 50 여 대의 수레들이 날랐다.
전국 각지에서 하루 1천 여 명의 인부들이 모여들었다. 채석이나 함괴에 돌을 넣는 어려운 기술은 북한 사람들과 중국인 꾸리들이 맡았다. 꾸리들은 노임이 쌌기 때문에 철도 부설공사나 터널을 뚫는 공사장에 많이 데려다 썼다. 꾸리들의 함바, 합숙소는 자산공원 밑과 남산동 남양조선 언덕, 고소동 등 세 군데에 있었다.
이렇게 총력을 기울려 공사를 했지만 1944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