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알고주알 난중일기, 전쟁터의 여인(女人)들!
2012년 3월21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프로풋볼(NFL) 선수인 하인즈워드(Hines E. Ward Jr, 36)가 은퇴를 선언했다. 14년 동안 활약했던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두 차례나 슈퍼볼 우승컵을 안았고, 슈퍼볼 MVP에도 오르는 등 NFL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미국의 프로풋볼선수 은퇴가 무에 그리 대단한가 하겠지만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 워드주니어와 어머니 김영희씨 사이에 태어난 서울출생 혼혈아다. 그 때문에 하인즈의 한국사랑은 특별했고, 한국인들의 하인즈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달랐다.
그런 하인즈가 한국에 왔을 때 나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이 떠올랐다. 퀴논(Quy Nhon)에서 하노이로 향하는 19번국도, 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내가 근무했던 맹호사단 기갑연대 주둔지 빈케(Binh Khe)가 나온다. 맨 처음 부대전입을 했을 때 참 의아했다. 부대주변에 영희네 슈퍼도 있고 철수네 가게도 있었다. 영희나 철수는 이른바 라이따이한, 주월 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의 이름이었다. 물론 주월 미국군의 2세인 또 다른 하인즈워드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베트남 통일 후 적국(敵國)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말할 수 없는 차별과 냉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혹시 당신도?........ no! never! 나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게 난중일기와 무슨 상관이냐? 상관이 있다. 이 글의 제목이 미주알고주알 난중일기다. 이순신의 일기에는 별 시답잖은 얘기가 다 등장한다. 그래서 혼자 읽다 혼자 웃는다. 그런 일기장을 읽던 중에 전쟁터의 여인들을 발견했고, 마침 그 대목을 보던 때에 하인즈워드의 뉴스가 나왔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라이따이한의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저런 상념 끝에 나는 키보드를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쓰는 이유다.
어쩌면 이 글로 인해 임진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선조들, 특히 우리가 사모하는 이순신의 인격에 흠결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얘기를 쓰고자 한다. 왜냐하면 난중일기! 그 기록의 진솔함을 말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순신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자는 얘기를 하려함이다. 지나치게 신격화(神格化)하거나 성웅시(聖雄視)하면 보통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성역(聖域)이 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일 때 비로소 따라 배울 수 있고, 따라 닮을 수 있는 롤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사일기(1593).05.30일. 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船載小娥)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을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쩌겠는가.
병신일기(1596).01.07일, 갑술, 맑음.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權俶)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權俶欲私故避來),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정유일기(1597).05.21일, 신해, 맑음. 과천의 좌수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公)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納馬及二十歲女奴) 풀려나 돌아갔다고 했다.
이 일기를 보면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는 한마디로 유구무언이다. 전쟁터의 여인들, 이순신은 이런 여인들의 상담역까지 해주었단 말인가? 여기서 남의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권숙이란 자는 다음 달 2월5일자 일기를 보면 “식사 후에 권숙이 와서 돌아가겠다고 고하므로 종이와 먹 2개, 패도(佩刀)를 주어 보냈다.” 하는 것을 보면 조정에서 출장 나온 관리인 듯하다. 그런데 더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일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사모하는 이순신, 그 자신에 관한 내용이다.
갑오일기(1594) 07.23, 기해, 맑음. 조카 해와 봉이 돌아갔다. 종 목년이 들어왔다.(木年入來)
병신일기(1596) 09.11, 갑진, 맑음.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 했다. 래산월(妓生)도 와서 만나고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箂山月亦來見 酒談向夜而罷)
병신일기(1596) 09.12, 을사,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저물 무렵 무장(전북 고창)에 도착했다. 여진과.(暮到茂長宿. 女眞, 계집종의 이름)
병신일기(1596) 09.14, 정미, 맑음. 하루를 더 묵었다. 여진과 함께 했다.(女眞共)
병신일기(1596) 09.15, 무신, 맑음. 현(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여진과 함께 했다.(女眞共)
병신일기(1596) 09.19, 임자,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이날 아침 광주목사(崔鐵堅)가 와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데 먼저 술을 들었기에 밥을 먹지도 못하고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한낮에 능성현감(이계령)이 들어와서 곳간을 봉했다. 광주목사는 체찰사가 파직시켰다고 한다.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崔女貴之來宿)
정유일기Ⅱ(1597) 11.21, 무신, 맑음. 이날 저녁 순생(順生)이 와서 잤다.(是夕 順生來宿)
정유일기Ⅱ(1597) 12.09, 을축, 맑음. 종 목년이 들어왔다.(奴木年入來)
병신년(1596) 9월에 여인이야기가 집중되는데 이때는 1593년 4월부터 시작된 강화협상이 4년째 소강상태로 지지부진하던 시기였다. 이순신이 영암, 나주, 무안, 영광, 고창, 장성, 광주 등을 순시하던 중이었고, 여기에 등장하는 목년, 여진, 순생은 모두 계집종, 래산월은 기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함께 잔 최귀지는 그날 파직당한 광주목사 최철견(1585년 별시문과 장원급제)의 딸이라 했다.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사실 들추어내기 민망하고 곤혹스럽다.
그런데 왜 이순신은 이런 얘기를 일기에 썼을까? 아무리 조선의 시대풍속이 사대부들의 사생활에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하더라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억의 앨범 같은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아니면 솔직해서 너무나 솔직해서? 미주알고주알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서? 감히 추측컨대 그냥 썼을 것 같다. 그게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서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있었던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 솔직함이 너무나 대범하다. 오늘날 하인즈워드, 라이따이한이 품어야할 대상이라면 그 당시 전쟁터의 여인들도 감춰야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비천한 계집종 까지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이순신의 오픈마인드, 난중일기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솔직함과 숨김없는 투명함 때문이다.
기업경영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투명경영(透明經營)을 강조한다. 투명한 기업, 투명한 기업인이라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경영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속내를 숨기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얘기만 하는 사람과는 가까워 질 수 없다. 그래서 미주알고주알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순신의 일기 속 수다가 진솔함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기에 역사의 다리를 건너 이순신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것이다. 목회자 조셉 뉴톤(Joseph Fort Newton)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외롭다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기보다는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끝-
참고문헌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완역 난중일기」(민음사, 2010).
첫댓글 출근길에 잘 읽었습니다.충무공의 여인들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난중일기에 또 어떤 숨은내용이 있을까 기대가 됩니다. 감사합니디ㅡ^^
미주알 고주알 별별 얘기가 혼자 웃기에 딱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있기 마련인것 같은데 장군은 그 날의 일들을 메모한 사실로 인해
현세의 우리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장군의 기본 모습을 들여다 보게 되네요
정말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방진님~
그ㅡㅡㅡㅡ저 솔직하다는 것 이외에 진솔함은 없을 듯합니다. 응함님^^
잘 읽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참혹해지는 건 아이들과 여자라고 합니다.
딴 얘기지만 임진왜란을 떠올리면, 가장 비참한 부분들이 왜군에 유린당한 여성들 같습니다.
여성들의 처지가 곧 전쟁의 잔인함의 정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제 치하도 마찬가지고요. 딴 얘기로 흘렀습니다...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소녀가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맞습니다, 작년에 서울갔을때 들러보았습니다. 저 들은 소녀가 할머니가되었는데도 대답이 없네요...이제는 그 할머니들도 한 분, 두 분 떠나시는데, 아마도 다 떠나시기를 기다리는것 같습니다...ㅠㅠ
하룻밤이었건 종이었건 기생이었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인정해서 일기로써 드러내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험난한 시대를 공유한 동지애로써 그들 역시 애민의 대상이었음을 인정하듯 혹은
같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듯...
공감합니다. 모두가 소중한 인격체입니다. 천지간에 인간 그 자체는 동등한 것입니다.
무어라 말하오리까! 잘보고가옵니다.
군말이 필요하겠나이까......감사하나이다.
지난 통영 남해 답사때 일심님께서 이순신 장군과 여인들에 대한 짧은 강의를 차안에서 일행 넷에게 해주셨지요. ㅎㅎ 그런 이야기는 방진님 말씀대로 일반사람과 다를 바 없구나하며 오히려 친밀하게 이순신 장군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방진님의 오늘 미주알 고주알 글을 읽고 호기심을 일으켜 난중일기가 더 잘 팔릴 것 같습니다.ㅎㅎㅎ
아 그런일이 있었군요. 별로 와 닿지 않으셨겠습니다. 하지만 똑 같은 사람이라도 이순신에겐 남다른 격이 있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남다를 수 없다." 제가 즐겨 쓰는 말입니다.ㅋㅋㅋ
ㅎㅎ 개인 일기이가태문에 사심없이 기록한것 같습니다..지금도 전쟁터에서는 여인네들이 젤로 안타깝지요..저도 요즘 같은 책을 읽고 있는데 난중일기는 두세번 읽어야 참의미를 깨닫고 이해가 될 것같네요..
불편한 진실, 그러나 그로인해 우리는 더 가까워 집니다. 왜곡된 역사보다는 훨씬 더 가치있는 사실이니까요....감사합니다.
장군님도 남자인지라.....
인간이라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두가 공통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전함에 여자를 승선 시켰다는 이유가 여자의 음성이 고음이라서 바다위 다른 전함이 있는 멀리까지 연락하기 위해서 라는 얘기가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까? 금시초문, 신호체계의 일환이었다? 그건 또 다른 excuse가 되겠는데요. 공부해봐야 겠습니다.
요즘 연일 뉴스에서 터뜨려주는 뒷담화의 기록을 보며
대상에 따라 여인을 감춰야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ㅎㅎ
우예되었든 거리낌없는 이순신의 대범한 기술이야말로 일기의 참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사대부의 풍속으로 흠잡힐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쨋든 남이하면 불륜, 자기가 하면 로맨스는 아니겠지요?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은 대우를 받았을건데 종들은 재산개념으로 양반 사대부들 남정네들이 맘만 먹으면 그냥 언제나 데리고 잘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는지요. 여인이 아니라 데리고 잘 수 있는 종으로서...하등 부끄러울 일도 꺼려 할 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었을까요???
충무공 의 성품으로봐선 인간적인 관계로 볼수 있겠지요 ?여인에 관한 인간적 언급은 없는지요?어머니께 효도한걸 보면 여인들도 가볍게 무정하게 대하진않았을것도 같구요 휴 낮에 무심코 댓글 올려서...보충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머니 사랑, 아내사랑, 딸사랑이 지독하신 기록이 많습니다. 거기다 부하사랑, 백성사랑은 또 얼마나 지극하셨습니까. 승전보고를 할 때마다 사삿집 종, 절종 등 노복들과 하잘 것 없는 신분의 대장장이들까지 포상을 신청하신 이순신입니다. 비록 지극히 사적인 관계인지라 기록은 간략하게 표현하셨지만 기록 자체가 그 여인의 인격존중이고 인간존엄이었음에 의심에 여지가 없습니다. 하룻 밤 인연이라도 만리장성의 정분을 쌓으셨으리라 생각해봅니다.
몇달 쉬고 처음으로 읽는 칼럼이...ㅋ
재밌습니다.
어찌되었건 님들은 모두 이순신 장군 가슴앓입니다.
언젠가 격군님 말처럼 이순신 장군은 500년 전의 사람이고 500년 전을 이해 해야하니 지금의 잣대로, 혹은 넘치는 사랑으로의 해석은...ㅋㅋ
그나저나 일기의 작은 토씨 하나도 이렇게 관심이 많을줄 알았다면 장군은 일기를 썼을까요, 안 썼을까요...
전 그게 더 궁금하네요 ㅋㅋ
썼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쓰는것 자체가 생활이었으니까요.
끊임없이 자신과의 소통을 추구하신 분이셨으니까요......
외로운 장수, 고독한 리더로서 아마도 쓰지 않고는 못배기셨을 겁니다.
-저만의 생각이었습니다.ㅎㅎ ^^-
ㅎㅎ 영웅호걸(영웅好girl)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하게 여인들과의 스캔들이 많습니다!! 생리학적인 관점에서는 매력적인 이성의 유전자 정보(dna)를 쟁취하려는게 본능이 아닐까요? 또 다른 시점의 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영웅好girl 와! 재미있습니다. 기발한 조합입니다. 생리학적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는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다른 세계인에 대한 동경 즉, 얼굴모양도 다르고 , 신체구조도 다르고, 사용언어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그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성을 좋아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도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사람들이 차암 웃기는 것은요. 사로 다른 것에 대한 동경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정작 헤어질때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잘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ㅎㅎ
19번 국도라 하시니 대한민국의 19번 국도가 새삼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내려오면 남해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 전북 남원을 지나고 전남구례를 지나면 하동땅 있지요. 그리고 그 길은 섬진강이 나란히 '사이 좋게 어깨동무' 삼아 내려오다 남해바다에 이르지요...그 길 한편은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이기도 하지요. 전남 구례 경남 하동의 화개나루 악양개치나루 하동현 하동읍성을 지나 하동의 옥종으로 그리고 진주 합천까지...
그렇군요. 그래서 4월5일, 19번 국도, 남원지나, 구례지나, 하동땅으로 어영담회장님을 뵈러 내려갈까 합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히말라야 트래킹을 연기했거든요.....뒤늦은 답글로....ㅎㅎ
아....그런 자료가 있군요.....감사합니다....잘봤습니다.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꼭 2년 전의 글이로군요......
제가 이런 부분이 빠진 일기를 읽은 후,
이런 부분을 만났을 때,
처음 허탈함이 몰러오고,
후에 화가 났사옵니다!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면 그리 흠도 아닌 사실을..
숭상에만 빠져있기에 이러한 부분을 누락시켜
오히려창군께 더 누가 되었고,
원균옹호론자들에게는 더 없는 호재가 되었다는 것에
화를 참을 수 없었음옵니다!
면밀히 읽고 진중과 비진중을 알았고,
시기를 따져야함을 느꼈사옵니다만...!
#이 사건들로써 장군의 일기는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바랬던 것이 아님을 더욱 공고히 하는 사건이라 여기옵니다!
읍!
이순신의 기록에 이런 진솔함이 있었기에 임진전쟁, 그 어떤 사료들 보다도 신뢰를 더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거침없이 세상 많은것을 포용할수도, 많은것을 드러낼수도 있음이 실로 대장군의 위용이 당당하십니다^^
事實은 史實이고 眞實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와서 재밌는 글을 읽습니다. 그러나 맞다. 틀리다. 양론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른 기록에는 충무공이 전쟁 중에 여색을 멀리했다는 언급도 있고, 당시 연세가 이미 50 전후인지라... 후대의 지나친 해석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남깁니다.
늦게야 답글을 보고 귀한 말씀에 감사합니다.^^
일기에 보이는 공의 표현이 지극히 피상적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요. 여색을 멀리한다는 것은 부당한 관계, 비정상적 관계를 멀리한다는 것일진대, 한낫 노비는 일천즉천 재산에 불과하던 시대였고, 또한 서얼의 지위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관기와 노비 그리고 서얼의 시대적 지위를 오늘의 양성평등에 기인한 성인지감수성으로 평가할 만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평균수명이 짧다해도 50전후의 나이에도 득남득녀는 많았으니까요. 저도 공께서 지탄받을 만한 여색을 가까이 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글은 <미주알고주알 난중일기>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일상의 솔직함과 숨김없는 투명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충무공의 여색에 관한 실체적 진실은 공이 일생 보여주신 언행과 실천에 견주어 후세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