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한 왕자들, 뇌물을 좇아 세계 시장을 누비다
-고려 충혜왕과 사우디 왕자들
“BAE(유럽 무기제조회사)의 로비 비자금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다면 막대한 국익을 해치게 됩니다. 사우디와 유로파이터 전투기 판매 계약이 파기되면 수많은 영국인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워스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진상 규명 요구에 대한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방부는 2007년 시작된 영국 정부와의 협상 결과, 신형 전투기 ‘유로파이터’ 72대를 BAE로부터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2007년 9월 17일). 90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다. 하지만 전투기에 부착하는 무기, 장기간 유지 보수 등을 감안하면 전투기 구매 비용을 포함, 400억 달러(40조 원) 규모다. 이로써 영국이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 자리에 올랐다.
BAE는 전 사우디 주미대사 반다르 빈 술탄 왕자에게 10년 동안 20억 달러의 뒷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가렛 대처 수상 시절(1985년 이후) 사우디의 반다르 왕자는 영국으로부터 토네이도 전투기 72대와 호크 전투기 30대, 공군기지 한 곳 건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770억 달러 상당의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BAE는 사우디 왕족 및 측근들에게 5성급 호텔, 전세기, 고급 리무진, 개인 경호 및 낭만적 휴가 등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또한 사우디 인사들의 도박 비용을 해결하고 매춘도 알선했다.
고객을 위한 가을 연회
거래를 놓고 뒷돈과 향응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었다. 1332년 몽골 제국 원나라의 수도 대도(북경), 원 조정의 전 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 아들의 저택이었다. 높고 푸른 북경의 가을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첩목아 아들 형제의 초대를 받은 고려의 충혜왕이 화가 나 있었다.
“이거 더러워서 못 해먹겠어!”
“폐하, 일단 한잔 받으시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술을 마신 충혜왕은 테이블 위에 있는 고깃덩어리를 잘라 끓는 국물에 담궜다.
“자네, 태보 백안 柏顔 그놈 알고 있지?”
“예.”
“놈이 나를 죽이려고 황제에게 자꾸 고자질을 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백안 그놈은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이신 연첩목아 님을 시기했습니다. 아버님은 조정의 실세였고, 더구나 당시 세자로 우리 조정에 와 계셨던 폐하를 총애하셨지요.”
“승상은 나를 친아들로 여기셨지. 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덕이었어!”
“백안 그놈은 옛날에도 폐하를 예의 있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지금은 아예 나를 공개적으로 박대하고 있어.”
“예?”
“고려에서 2년 동안 왕을 하다가 그놈의 농간으로 폐위되어 이렇게 되었지 뭔가.”
당시 원나라 황제가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을 다시 고려왕으로 임명한 상태였다.
“민망합니다.”
“이거 큰일 났네. 내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자네에게 고려산 인삼과 모시, 종이 등을 중국 시장과 중동 시장에 거의 독점 판매하도록 했는데…….”
“저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를 꼭 복위시키겠습니다.”
고려 충혜왕은 몽골 제국 내에서 큰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고려에 수없이 많은 물류 창고(의성고·덕천고·보흥고 등)를 가지고 있고, 개경 시장에 거대한 점포와 창고, 수공업 작업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건립한 궁에는 곡식과 비단으로 가득 찬 창고 100개가 있었고, 행랑에는 천을 짜는 수많은 여공女工을 두고 있었다. 연첩목아 집안은 그와 상업상 이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고려산 물건들은 북경, 남경, 상해는 물론이고 타슈켄트와 사마르칸드, 바그다드 시장에서 인가가 높았다. 충혜왕과 가까운 연첩목아의 집안에 많은 아랍 상단들이 목을 매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가혹한 군사적 공격을 받은 아랍지역의 제조업은 거의 절멸된 상태였다. 수공업 작업장은 파괴되었고, 기술자들은 모두 끌려갔다. 이 때문에 중국과 고려의 제조업 생산에 상당히 의존적이었다.(워트포드).
연첩목아의 아들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늘씬한 아랍인 여자가 나왔다. 천하의 난봉꾼 충혜왕은 얼이 빠졌다.
“이 여인은 백인이 아닌가. 실크로드의 향이 물씬 나는군!”
“폐하, 이 여인은 중앙아시아의 상단들이 특별히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합니다.”
“그래?”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폐하의 복위를 위해 지금 은밀한 로비에 들어갔습니다.”
미래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여자에 눈이 먼 충혜왕의 말이 자꾸만 짧아졌다.
“그래 알았다니까.”
모든 사람들이 물러나고 둘만 남았다. 『고려사』는 이렇게 전한다.
“충혜왕이 연첩목아의 자제들과 회골족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농을 하며 유흥하다가 그만 회골 여자 한 사람을 사랑하여 원나라 조정에 자주 결근하였다. 이로써 백안이 충혜왕을 더욱 미워하였다.”
방탕한 왕자들의 돈벌이
연첩목아의 아들들과 그 휘하의 상인들은 충혜왕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힘이 남아돌아 100명 이상의 후궁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충숙왕이 죽자 그의 여자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충혜왕에게 향응을 제공하지 않고는 어떤 일이든 성사되지 않았다.
현재 사우디의 왕자들도 충혜왕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BAE는 사우디 왕자들과 그 수행원들에게 런던의 일류 콜걸들을 불러주고 20년 이상 매번 거액의 용돈을 찔러주었다. 사우디 왕자들은 10명 이상의 부인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에는 매춘부와 놀아나기 위한 그들의 왕궁이 즐비하다.
인구 1700만 명인 나라에 왕족이 3만 명이다. 왕자들은 모두 한 달에 최하 1만9000달러에서 최고 27만 달러까지 왕족 수당을 받는다. 사치에 중독된 왕자들은 이것도 부족하다는 듯이 뇌물과 무기 거래, 커미션을 찾아 헤매고 있다. 평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비자·술·마약 거래에까지 손을 댄다(전 CIA요원 로버트 베어).
충혜왕이 자본주로서 대리인을 내세워 장사에 뛰어들었던 것도 유흥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남궁신·임희·윤장·임신 등 특허 상인이 그의 세계무역을 담당했다. 충혜왕은 고려에 장사를 하러 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도 자본을 대여해주었다(『고려사』). 세계 각국 상인들이 고려로 몰려왔다. 그들은 고려산 인삼과 모시, 종이를 매입해 중국과 아랍세계에 유통시켰고, 충혜왕은 고리의 이자를 받았다.
오일 달러의 재활용
이렇게 벌어들인 돈의 일부는 북경의 거물 정치가들에게 들어갔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계무역을 지속할 수도 없었고 왕위도 위태로웠다. 『고려사』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왕은 재산과 상업적 이익에 아주 밝은 사람이었다. 털끝만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았다. (…) 왕은 금·은을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충혜왕이 계모인 몽골 왕실 공주를 강간하고도 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라짐으로 해서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될 몽골 제국 세력가들의 변호 때문이었다. 충혜왕을 미워하던 백안이 실각한 것에도 그들의 힘이 작용했다.
사우디 왕실은 언제나 석유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상당액을 워싱턴에 송금해왔다. 큰 덩어리는 백악관의 은밀한 프로젝트로 간다. 일부는 부패와 테러범의 온상인 사우디 왕국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관료나 정치꾼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사우디 왕실은 미국의 가장 큰 돈줄이다.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이걸 ‘오일 달러의 재활용’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사우디의 왕족들이 석유에서 나오는 달러를 풀어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있다면, 충혜왕은 거대한 상업자본을 운영해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려고 했다. 양자는 비슷한 환경 속에 있었다. 충혜왕에게는 칭기즈칸이 칼로 건설한 세계 시장이 있었고, 사우디 왕실에게는 미국와 영국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만들어낸 석유 시장이 있었다.
2008년 초 매일 두려운 눈으로 그 석유 시장을 바라만 보고 있던 한국에게 오일 머니의 큰손, 아랍에미리트연합 왕세자가 찾아왔다. 한국우주항공KAI이 개발한 고등연습기 T-50 60대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25억 달러). 하지만 KAI는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KAI가 왕세자와 너무 투명하게 거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105-111)
〔출처〕 전쟁기획자들
서영교 지음, 2014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