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통 - 16
<저의 첫 마라톤>
“세상에는 오로지 두 부류의 사람들만 존재한다.
마라톤 (42.195km/26.2마일) 을 완주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
10k 대회에 몇 번 참여하고 나서 마라톤을 뛰어보자는 생각을 왜 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 되고 어른 되듯
달리는 거리가 점점 늘어
주말에 한 10 마일 정도 달릴 때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
사나이로 태어나서 마라톤 한 번 완주는 해 봐야 되지 않겠나
대개 하프 마라톤 대회 먼저 나가는데
저는 덜컥 풀 마라톤에 등록했습니다.
까이거 !
돈 내고 등록했으니,
게다가 LA 까지 비행기타고 날아가야 하니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당시 아틀란타에 살았습니다 )
마침 날짜가 2000년 3월 5일
새 밀레니엄을 힘차게 열자 !
주말마다 길게 달려 18 마일까지는 달려보고 참여한 것입니다. 마지막 10 k 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 뭐 죽기야 하겠나. 기어서라도 완주는 하겠지.
경기 전날 LA 레이커스 구장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마침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체크인을 해서 무료로 주는 기념품들 떨이로 다 담아 왔습니다. 각종 티셔츠, 타올…식구들 친구들 줄 것 까지 가득 챙겼습니다. 캬! 인심 좋고! 오길 잘했다.
장인, 장모가 출타하신 처가댁에서 혼자 자는데
아, 글쎄 비가 오는 거예요. 남가주에는 귀한 비가 하필
이 중요한 날에!
빗소리를 들으며 뒤척이면서 이거 내일 뛰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비 오는 시나리오는 없었는데.
대회가 열리기는 하는 건가. 잘 됐다 그냥 집에 가? 사실 훈련도 제대로 안 됐잖아. 하늘의 뜻인가보다. 그래도 어떻게 시작도 안하고 포기하냐. 쪽팔리게. 비가 그칠까. 그쳐야 하는데. 아님 폭우가 쏟아져 경기가 취소되든지. 이거 뭐야. 어찌이리 딱 헷갈릴 만큼 오는 것이냐.
좀 잠들었다가 눈 뜨면 또 빗소리
그렇게 잠을 설치고 일어났는데
가라고 가랑비인지 , 있으라고 이슬비인지
확실히 비는 잦아들어
애고 경기는 열리겠구나
출발지로 갔습니다.
마침 인터넷으로 알게 된 현지 달리기 모임 Easy Runners 이 단체로 참가한다 해서 만나서 같이 달리기로 선이 닿아 있었습니다.
약속 장소를 찾아 갔더니 남녀 회원 20 여명이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이메일 주고 받은 김장로라는 분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를 아래위로 훑어 보시더니
이런 셔츠는 안 돼요.
제가 입고 있던 소데나시 Hard Rock Cafe 셔츠는 (Thrifty Store 에서 오늘을 위해 구입한) 순면이라 비나 땀에 젖으면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주는 거즈같은 , 가슴에 Easy Runners 라고 쓰인 tech 셔츠를 입었습니다. (가볍군.)
쇼츠는 뭐예요?
수영복인데요.
친절하신 김장로는 아무 내색을 안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디서 이런 촌닭이’ 그랬을 겁니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러닝 쇼츠를 입어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거나 수영복이나 다르려고?
그렇게 무식하게 달리던 시절.
회장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마치 두루미나 사슴처럼 보이는 그분은 필시 왕년에 육상선수였음이 분명했습니다.
’아틀란타에서 오신 분인데 10 k 몇 번 하고 18 마일까지는 뛰어 봤답니다. ’
회장님는 저더러 ’체중이 어떻게 돼요?’ 물어 보시고는
‘5:30 그룹으로 가세요‘ 하는 겁니다.
순간 잠시 스쳐가는 모욕감
아니 나를 뭘로 보고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길잃은 독고다이 왕초보
맨땅에 헤딩하며 혼자 배워
기본 복장도 못 갖춘 이 몸을 거둬 주시는데.
사타구니 살 접히는 부분에 바셀린을 발라두어야 하는 것도
젖꼭지에 밴드를 붙이는 것도 거기서 처음 배웠습니다. 셔츠에 쓸려 피가 날 수 있다고.
회원들은 자기 페이스에 따라 예상 시간을 정해 그룹을 지어 달리는데
다행히 제 다섯시간 삼십분(5:30) 그룹은 친절하신 김장로가 리드했습니다.
남자들 셋이 더 있었습니다. 모두 저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처음 참가한 사람은 저 뿐이었습니다.
모여서 스트레칭를 하고
출발선으로 갔는데
말이 출발선이지
군중이 꽉 메운 도로의 후미였습니다.
출발선은 보이지도 않고
스타트 총성은 들었는데
줄은 좀체로 나아가지 않는 겁니다.
까치발을 서고 보아도 앞줄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거 뭐 이래. 오늘 시작은 하는 건가?
다른 조원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느긋하게 그냥 있는데 저만 조바심
참가자가 2만 명이 넘어서 그랬습니다.
첫 주자가 출발한지 아마 20~30분은 지나서
마침내 저도 출발선을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첫 마라톤, 저의 21세기 달리기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