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가 특별히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자 귀족들은 자유스럽게 움직였다。 尹W榮이 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는 나를 전하 앞으로 가까이 데리고 가서、
『전하、德퓨宮 전하께서 보낸B師이옵니다。전하의 御容을 奉寫케 하시 라기에 오늘 이리로 데리고 왔읍니다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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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眞을 奉寫하고 있는 著者〉
純宗은 초본이 완성될 때까지 하루에 꼭꼭 한 번씩 나오셔서 20분 가량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純宗은 별말씀은 안하셨지만 가끔 『네 얼굴이 잘 생겼구나』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면서 이야기를 건넸다。어떤 때는 나이가 어린 네가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느냐고 내 손목을 잡고 어루만져 주시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임금께서 잡은 손에는 銀토시를 해 끼는 법이라고 말씀하면서 당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셨다。
초본을 위해서는 특수한 油紙유지가 사용되었다。기름종이에 생강즙을 먹이는 「薑汁布水강즙포수」의 과정을 거친 뒤 묵선으로 御容어용의 윤곽을 잡았다。구도는 대원수 군복 차림의 반신상이었다. 그때 임금 얼굴의 살색은 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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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를입은 純宗御眞〉:
〈以堂 金殷鎬 「四君子曲屛」〉
명의 油紙背面유지배면에서 묵선에 맞추어 채색되었다。
표면에서 水彩수채에 深淺심천 효과를 주기 위한 약간의 施彩시채로 그쳤다.
복장은 전부 표면채색이었다. 경험없이 그린 나의 유지초본이지만 격찬을 받았다。그대로 합격 통과되어 「서화미술회」 선생님들까지 좋아하셨다。유지초본은 繪絹회견 쟁틀밑에 붙여졌다。희고 맑은 회견 위로는 밑에서 초본의 어용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밑그림을 정확히 회견 위에 살려 그려나가기만 하면 된다。나는 선승처럼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갖고 온 정열을 어진 제작에 쏟았다。 어진의 크기는 폭이 4자、길이가 7자였다。그러던 어느날 心田선생은 『이제는 御容畵師가 되었는데 별호가 있어야지。』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春軒」이라고 하면 어떻겠나?』
하고 나의 의중을 떠보았다。나는 얼른 나와 安洞교회에 함께 다니는 春元춘원 李光洙이광수를 생각하고 발음이너무 비슷하다고 했다。
心田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以堂」이 줗겠네。周易의 24괘가 「以」자로 시작하고 詩傳시전에도 「日中聲鳥 以殷仲春일중성조 이은중춘」이란 말이 있지。아주「以堂으로 하게.』 『별호는 획이 적고 부르기가 陽明양명해야 하느니。』 나도 마음에 들었다。별안간 雅號아호를 받으니 갑자기 大家가 된 것처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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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汀 安鍾元 • 「四勿箴」 석정 안종원 사물잠〉
쁘고 흐뭇했다。
다음날부터 心田선생은 나를 당장 「以堂」이라고 불러 주셨다。
서화미술회 사랑방은 매양 손님들로 문전성시였다。당시의 세도가 선비 • 미술애호가들이 모여서 시회도 열고 바둑도 두었다。소림 • 심전선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화평회도 했다。
3.1운동매 민족대표로 활약한 權東鎭권동진、吳世昌오세창、서예가 安鍾元안종원、羅壽淵나수연、 전의 金昌有김창유、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石版석판인쇄소를 경영하던 金錫鎭김석진、朴箕陽(지금은 고인이 된 연극인 朴珍씨 엄친)씨 등은 매일 나오다시피 했다。 李完用도 심심찮게 사랑방에 나와서 놀다 갔다。사랑방 손님들은 글줄이나 하는 미술애호가들이어서 화제는 으례 시화쪽으로 기울었다。 저녁때가 되면 心田선생댁에서 술상을 차려 내왔다。술잔이 몇순배 돌아서 취흥이 도도해도 주정이라고는 없었다。술을 마셨는지 안마셨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다。이따금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부방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이태백이나 杜子美두자미의 시를 읊고 그들의 시심에 빠져 시담詩譚을 하기도 했다。
이태백의 山中問答산중문답(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을 畫題화제로 그림을 그려보자는 제안도 나오곤 했다。때로는 소동파의 적벽부 가락이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이변도 있었다。 김병연(김삿갓)이 금강산경치를 글로 쓰면서
『若此畫工 模此景약차화공 모차경、기어임하 조성하其於林下 鳥聲何』
(만약 화공을 불러다 이 경치를 그릴 양이면 수풀 사이를 오르내리는 새소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라고 걱정한 대목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누군가가 心田선생에게、
『心田은 새소리를 어떻게 그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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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田 安中植 • 금강산경〉 심전 안중식 桃源問津도원문진>
〈석파 이하응의 초상〉
하고 술이 거나한 김에 말을 꺼냈다가 실기로 해답을 들은 적도 있다。心田선생은 화필을 들고 먼저 金剛山景을 그린 다음 숲에 앉은 새를 그려 놓았다. 성급한 손님이 『그것은 새가 나무에 앉은 그림이지 우는 그림이 아니오.』 하고 넌지시 충동질을 했다。
心田은 얼굴빛 하나 변함없이
『과연 그렇군。이렇게 하면 되겠소?』
하고는 나무 아래에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 놓고 쾌재를 불렀다. 그때서야 心田의 화의를 알아차린 좌중은 무릎을 치면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술은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까지 계속되었다。2차는 야주개(夜珠峴 • 지금 唐珠洞) 에 있는 心田선생댁 耕墨堂경묵당에서 벌어졌다。
소주선생댁은 北廟북묘 근처(지금 普成中高校 옆)에 있었지만 두 분이 다 술을 좋아하는 터여서 항상 붙어 지냈다。소림선생은 심전선생보다 8세나 위인데 서로 너 나하고 벗했다。두 분은 서로 대조적이었지만 지기가 상통하는 막역지간이었다。
小珠선생은 잘 사는 촌로인처럼 수수했고、심전선생은 수염이 하얗게 난데다 용모가 단정하여 풍채가 당당했다.
누구든지 그를 대하면 압도당할 것같은 위풍을 덜치고 있었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어디서 한목에 큰돈이 생기면 우선 시장에 가서 포、생선같은 안주감을 듬뿍 사고 돈이 남아야 쌀을 사왔다。집에는 항상 가양주가 떨어지질 않았다。
서화학교 사랑방에서는 石坡(석파:대원군 이하응) 와 오원(장승업)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거론되었다。
대원군의 난초 그림은 오늘날도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도 화제가 되었다。 「서화미술회」선생으로 있는 小湖(소호 김응원)가 石坡의 그림을 대작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小湖의「叢蘭圖총란도」는 대원군이 허소치에게 그려준 「묵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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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 이하응 묵란도 대련〉 〈완당 김정희 •「偶然寫出蘭圖우연사출란도」〉
〈芸楣운미 閔泳翊민영익 묵란도〉 〈小湖소호 金應元김응원 「墨蘭圖」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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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의 仁川〉
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사랑방에서는 소호선생에게、 『자네 그림이 석파 것보다 낫네。』
하고 추겨세우는 사람도 있었다。소호는 석파의 관치는 법을 물려받았지만 묵란으로는 일가견을 이루었고 글씨도 예서 행서에 능했다。묵관으로야 완당(金正喜)의 「偶然寫出蘭圖」、芸楣의「望펴圖」를 꼽지만 석파나 소호의 작품도 한손에 들 수 있는 걸작으로 인정되었다。
오원吾園은 그 생애가 워낙 재미있는 데다가 소림、심전선생이 모두 오원 화법의 영향을 받아서 사랑방에서 단골 화제가 되다시피 했다。
그 무렵은 이미 吾園이 종적을 감춘 지 5년이 지난 후였지만 아무도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 행여나 그가 살아 있지나 않나 하는 한 가닥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을 때였다.
소림、심전의 젊었을 때 그림이 오늘날도 오원그림 행세를 하는 것은 두 분이 모두 오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못잊을 春意圖®
서화미술회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나는 생활형편이 어려워 이 일 저 일 가릴 겨를이 없었다。
17세 때 인천에 있는 사립 인흥학교에서 측량공부를 했기 때문에 한 동안 측량기사 밑에서 조수노릇을 한 적도 있다。그때가 내나이 19세 때의 일이니까 서화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인 1911년이다。
어느날 측량기사를 따라 지금 연지동에 있는 李某이모 부잣집 땅을 측량하러 갔었다。
이 집에서 며칠 동안 측량을 하다가 사랑채에 놓여 있는 큰 병풍 하나를 보았다。일지매에 까치떼가 가득히 앉아있고 혹은 나는(飛) 모습을 그린 「百鵲圖백작도」였다。
일찌기 이렇게 감동적인 큰 그림(대폭)을 보기는 처음이었다。그해 겨울을 갑부집에서 보내면서 나는 그「백작도」병풍을 모사했다。사랑방에 항상 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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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中潤福 -「蓮塘野遊圖 연당야유도」〉
筆墨이 준비되어 있어 측량하다 틈만 나면 들어가 그려보곤 했다。주인은 나보다 대여섯 위의 젊은 분이었다。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젊은 주인이、
『아니、자네 언제 그렇게 그림공부를 많이 했나? 보통 솜씨가 아닌걸…』
하면서 감탄했다。
『자네、내 청 하나 들어주지 않겠나?』
나는 젊은 주인의 요구가 무엇인지 당장 알아차릴 수 없어、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리지요。』
하고 대답했다。
주인은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자네 말야、내가 꼭 청하고 싶은 그림이 있단말야。내 보답은 후히 할테니 그려주게。』
말을 해놓곤 내 대답올 들을 것도 없이 남녀가 희롱하는 이러 저러한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내게는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어차피 이 젊은 주인의 청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그보다도 그림을 볼 줄 아는 멋쟁이 주인이 내 그림 재주를 크게 알아주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생전 이런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지만 한번 그려보죠。그 대신 내 그림이 마음에 들면 약속대로 후한 보답이 있어야 합니다。』
고 단단히 약조했다。
젊은 주인은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다。
그는 날마다 기생집을 찾아다니며 주색으로 소일하는 터였다. 며칱 후 나는 그가 부탁했던 그림 몇장을 완성시켰다。
그것을 본 주인은 무릎올 탁 치며 좋아했다. 그는 나와 약속을 지킨다면서 자기 첩인 평양기생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기생집 구경을 시켜주고 집에 올 때는 그림값까지 듬뿍 쥐어 주었다。이듬해 봄이 되어 이 집의 측량을 마친 기사는 강원도 철원 방면으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기사 일행은 살결이 희고 고운 나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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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中潤福신윤복 -「蓮塘野遊圖 연당야유도」〉
筆墨지필묵이 준비되어 있어 측량하다 틈만 나면 들어가 그려보곤 했다. 주인은 나보다 대여섯 위의 젊은 분이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젊은 주인이、
『아니、자네 언제 그렇게 그림 공부를 많이 했나? 보통 솜씨가 아닌걸…』
하면서 감탄했다.
『자네、내 청 하나 들어주지 않겠나?』
나는 젊은 주인의 요구가 무엇인지 당장 알아차릴 수 없어、
『뭔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드리지요. 』
하고 대답했다.
주인은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년지시 입을 열었다.
『자네 말야、내가 꼭 청하고 싶은 그림이 있단 말야. 내 보답은 후히 할테니 그려주게. 』
말을 해놓곤 내 대답올 들을 것도 없이 남녀가 희롱하는 이러저러한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내게는 별로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어차피 이 젊은 주인의 청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도 그림을 볼 줄 아는 멋쟁이 주인이 내 그림 재주를 크게 알아주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생전 이런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지만 한번 그려보죠. 그 대신 내 그림이 마음에 들면 약속대로 후한 보답이 있어야 합니다. 』
고 단단히 약조했다.
젊은 주인은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다.
그는 날마다 기생집을 찾아다니며 주색으로 소일하는 터였다. 며칱 후 나는 그가 부탁했던 그림 몇장을 완성시켰다.
그것을 본 주인은 무릎올 탁 치며 좋아했다. 그는 나와 약속을 지킨다면서 자기 첩인 평양기생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기생집 구경을 시켜주고 집에 올 때는 그림값까지 듬뿍 쥐어 주었다. 이듬해 봄이 되어 이 집의 측량을 마친 기사는 강원도 철원 방면으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기사 일행은 살결이 희고 고운 나를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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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后大禮服황후대례복의「모델이 된 저자의 夫人〉
그때만 해도 내 얼굴이 색시처럼 잔잔하게 생겨서 여자는 물론 같은 남성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았다. 게다가 나는 못하는 노래가 없을 정도였다. 앉아 부르건 서서 부르건 한 곡조 뽑는 날엔 좌중은 물론 기생들까지 야단법석이었다.
시조도 좋고 남도창도 좋았다. 노래만 나오면 나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루는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철원으로 야유회를 간다고 했다. 나도 따라나섰다.
산에 이르렀을 때 음식을 차리고 있는 여인을 보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다름아닌 尹모의 첩이었다.
尹모는 일본헌병의 앞잡이로 건방지게 굴면서 세도깨나 부리고 있었다. 그의 첩인 이 여인은 지난날 술집에서 내게 반해 공공연히 통정을 요구해왔던 당돌한 기생이었다. 나는 순간 이건 계획적인 유혹이구나 생각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쯤 마시고 떠들어대는 판에
『눈치들도 없으셔. 기생도 재미 좀 봅시다. 』
하고 응석을 떨었다.
같이 온 동료들이 사전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둘씩 마파람에 게눈감추듯 얼른 사라져버렸다.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려야 살지.』
마음을 가다듬고 임기응변으로 연극을 했다. 옷을 벗어놓은 채 소변 좀 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철원역까지 시오릿길을 냅다 뛰어서 도망쳤다.
시천교주侍天敎主 초상화
1912년 겨울、나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도 윤덕영 자작의 어머님(윤비의 조모)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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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나의 어진 제작은 몇 달 동안 중단되었다. 다시 서화미술회로 돌아와 그림공부에 더욱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윤상훈이란 사람이 서화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尹은 내가 재동 마루턱에서 친구 이상은李相殷에게 기식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발사였는데 동학의 거물인 의암 손병희、구암龜庵 김연국의 머리를 깎아주러 다닌다고 꽤나 뽐내고 나를 업신여기던 사람이었다. 그의 뜻밖의 방문을 받고 나는 고생하던 지난 일이 되살아나 기분이 나빴 다.
윤상은이 큰일이나 있는 것처럼 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나 오늘 은호를 시천교 교주에게 소개해 주러 왔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전부터 구암교주님의 머리를 깎으러 다녔잖은가? 며칠 전에도 갔었지. 거기서 새로 짓고 있는 시천교 교당 안에 3교주의 화상을 모신다는 거야. 그런데 그 화상을 일본사람에게 맡기겠다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자네 이야길 꺼냈지. 조선에도 김은호란 화가가 있는데 왜 하필 일본사람에게 시키려느냐고 ... 』
그는 자못 생색까지 내면서 열을 올렸다.
아뭏든 고마운 일이었다.
『자네가 창덕궁 순종 임금의 어진을 그리고 있는 중이라고 내가 말했네. 어쨌든 구암교주님께선 대찬성이니 기금 당장 가보세. 』 옛말에도 『路遙知知馬力、日久見人心』(노요지지마력、일구견인심 :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가야 사람의 마음을 안다)이라고 했지만 사람은 오래 사귀고 볼 일이었다. 그렇게 밉살스럽던 이발사에게서 이런 고마운 말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었다. 윤씨를 따라 지금은 박흥식朴興植씨집이 들어선 계동桂洞의 교주 龜庵구암댁으로 갔다. 龜庵교주는 첫눈에 봐도 성자聖者의 모습이 역연했다.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과 인자한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龜庵교주는 셋집에서 산다는 내 말을 듣고 그림을 그릴 화실을 재동齋洞에다 월세 15원으로 마련해 주었다. 이 집은 후에 유만겸兪萬兼씨(유길준兪吉濬씨 아들)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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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주 수운 최제우 초상肖像〉
산 집 사랑채다.
龜庵은 동학의 한 거물로 의암(손병희)과 함께 해월海月(최시형)의 수제자였다. 그들은 같이 천도교를 만들고 龜庵이 대도주大道主(교주)자리에 앉았었다. 그러나 의암과의 의견충돌로 그는 천도교에서 물러나와 한때 야인으로 있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교도들의 간청에 따라 龜庵은 一進會일진회의 李容九이용구와 손잡고 새로 시천교를 만들어 大禮師대례사(역시 교주)가 되었다.
천도교와는 결별했지만 수운과 해월을 1,2세 교주로 받들기로 한 시천교는 가회동에다 크게 교당을 짓는 중이었다.
龜庵은 그림도 그리기 전에 장작10평、쌀 1가마、돈 50원을 미리 보내 왔다. 나는 龜庵이 마련해준 화실에서 시천교 3교주 초상을 3개월 만에 완성해냈다. 龜庵은 내가 그린 초상에만족을 표하더니 폐백을 얼마나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교주님、제게 소원이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니면서 남의집살이를 했습니다. 삼간초옥이라도 좋으니 제 집을 한 채 갖고 싶습니다. 』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구암교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을 보러 가자고 내 손을 끌었다.
龜庵교주 일행은 나를 데리고 苑西洞원서동 일대를 돌아보고는 그날로 131번지에 있는 여덟간반 짜리 초가집 한 채를 사주었다. 龜庵은 지체없이 집값 2백36원을 치러주었다.
해가 바뀌어 나는 21세가 되었다.
그해 정월 스무닷샛날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누님이 시골에서 올라오고 온 집안이 오랜만에 생기를 띠었다.
그날 어머니는 당신에게 바치는 생일상을 나와 겸상해서 받았다. 상이 들어오자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또박또박 말했다. 『양은良殷아、이 자리에서 나와 약속을 하자. 네 평생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않겠다고 맹세해 다오. 만일 네가 그렇게 맹세해준다면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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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군선도〉
나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어머님께 약속했다. 빈말이 아니라 그때 한 어머니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이때껏 주색에 빠지지 않았다.
御前 揮擊會 어전 휘호회
1913년의 봄은 유독 빨리 찾아왔다. 나는 새집을 마련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창덕궁에서 중단되었던 순종임금의 어진을 완성시키라는 윤덕영의 전갈이 왔다. 다음 날부터 다시 인정전에 드나들었다. 점심때가 되면 찬방에서는 어용화사의 제작실로 특별 상이 차려 나왔다. 양식도 나오고 때로는 윤비가 보내는 궁중음식도 맛보았다. 민병석 이왕직장관과 민영휘가 특별음식으로 점심상을 보내왔다. 나는 젊은 화사로서 너무나 극진한 대접을 받아 황송할 정도였다. 이 많은 음식을 혼자 다 먹을 수 없어 덕분에 심부름꾼인 사정들도 잘 먹었다. 궁중음식은 돈화문 밖에 있는 집으로도 내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 진귀한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자식 자랑을 실컷 하셨다. 창덕궁에서 교자에 실려 나온 음식은 그릇까지 모두 하사품이어서 돌려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순종의 어진을 착수한 지 4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왕실에서 폐백으로 4천 원이란 돈을 받았다(이때는 쌀1가마에 4원 남짓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진을 완성하고 서화미술회의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갔다. 미술회에 나가서는 소림、심전선생의 귀여움을 독차지해 동료들의 시샘을 받기도 했다. 하루는 덕수궁에서 어전휘호를 한다고 미술회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불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고종께선 순종어진을 끝낸 나만을 은밀히 부르려다가 그보다 미술회 전체를 불러 휘호회를 베푼 것이라고 했다. 서화미술회로선 영광의 날이었다. 선생님들을 따라 우리도 줄지어 대한문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석조전(지금 현대미술관) 돌층계를 올라서서 넓은 대청으로 들어갔다.
서화학교 66
〈高宗皇帝〉
〈위사 강필주 • 「송하인물도 松下人物圖」〉
잠시후 시종장의 신호와 함께 고종이 나타났다.
미술회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종은 소림과 심전선생에게 고개를 들라고 하시면서 선생님들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발길을 옮기셨다.
가까이 오셔서 인자한 음성으로
『많이들 늙었구나. 』
고종은 옛일이 생각나시는 듯 선생님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소림선생은 고종이 왕위에 있을 때 도화서 화원이었고 1902년에는 고종의 어진을 봉사한 일도 있었다.
심전선생도 화원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궁중을 드나들어 그 이름과 얼굴을 잘 알고 계시는 터였다. 고종은 그가 왕위에 있을 때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두 화가를 무척 반갑게 대면하고 나서 선생님을 따라 들어온 우리들도 환영해주었다.
서화미술회의 선생님과 학생들은 황공한 생각으로 어전휘호회에 임했다. 우리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뒷짐 지고 걸어 다니면서 보시던 전하는 조용히 시종장을 불러 김은호란 청년이 누구냐고 물었다.
시종장은 전하가 찾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전하는 빙굿이 웃으시더니 『얼굴을 보니 재주가 있겠구나. 어떻게 그리 그림 솜씨가 좋단 말이냐?』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우리들은 고종이 특별히 내리는 맛있는 궁중음식을 대접받고 덕수궁을 물러나왔다. 우리와 함께 갔던 윤덕영은 소림、심전선생과 상의한 뒤、소호 김응원、위사 강필주선생으로 하여금 나만 데리고 다음 날 다시 덕수궁에 들어오라는 부탁의 말올 남겼다.
이튿날 나는 소호、위사 두 선생을 따라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석조전 뒤 지금의 어린이 놀이터)에 가니 웬일인지 여러 귀족 대감들이 모여 있었다. 이 자리서 나는 양화를 그리는 김관호金觀鎬라는 청년화가를 만났다. 평양平壞태생인 金觀鎬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1909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미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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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룡포를 입은 고종(左)과 순종(右)〉
의 서양화과에 다니는 양화학도였다.
그도 無佛무불이란 일인의 추천으로 고종의 어진을 유화로 그리려 왔었다. 그러나 고종이 어진문제에 일본사람들이 개입하려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그 날은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 후 덕수궁에서 다시 나만이 불려져、곤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6X4척) 봉사에 착수했다.
자상하신 高宗
나는 매일같이 덕수궁의 준명당에 들어가 고종을 뵈었다. 고종은 곤룡포를 입고 나와 10여 분씩 앉았다 들어가셨다. 먼저번에 창덕궁 순종의 어진을 모실 때처럼 소례복에 사모를 쓴 어용화사의 복장으로 덕수궁을 출입했다. 순종께서도 나를 귀여워해 주셨지만 고종은 더하셨다. 손도 만져보시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다. 『어쩌면 이렇게 살결이 고우냐 그 녀석 예쁘게도 생겼다.』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곤 했다. 한번은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계시다가 느닷없이 멀찌감치 가있는 시종장 이필균李弼均을 불러서、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화사가 편히 그림을 그리도록 방석도 준비해 주고、마실 것도 내다 주라. 』
고 일렀다.
그림 초草 잡은 것을 보시면서 무엇으로 그리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셨다. 그때는 「스케치」하는 연필이 버드나무를 구어서 숯으로 만든 柳炭유탄이어서 『버드나무로 만든 연필입니다. 』
하고 고했다.
「스케치」니 사생이니 하는 용어를 채 배우기도 전에 어진을 모셔서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어진을 모신 경험이 있는 소림、심전선생님의 따뜻한 훈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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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장기(풍속도)〉
큰 힘이 되었다
유탄으로 「스케치」를 해본 화가는 지금 몇사람 안 남아 있다. 의재가 나보다 한 살 위니까 손으로 꼽아본다면 의재、심향、심산밖에 없을 것 같다. 뒤에는 벚나무를 구워서 숯으로 만든 목탄木炭(숯)을 「스케치」연필로 썼다. 유탄으로 그린 그림을 유탄화라고 하던 일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柳炭을 가지고 고종의 모습을 그릴 때면 『나이도 어린데 어쩌면 그렇게 재주가 좋으냐.』 고 칭찬해 주시던 인자한 음성이 귓전에 맴돌아、가만히 일어나서 들어가셔도 오랫동안 그 잔영이 남아 있었다. 눈썰미 깊게 보아둔 고종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몇십 분씩 「스케치」를 계속했다. 이 일이 끝나면 사찬賜饌을 받아먹고 시종들과 함께 뒤뜰에 나가 놀았다. 시종들이 내게 고담을 해보라고 성가시게 굴어 이야기도 여러 번 해줬다. 어떤 때는 목청을 돋우어 시조도 외고 노랫가락도 흥얼거렸다. 고종은 참으로 자상하신 어른이었다. 내가 처음 어진을 모시게 결정되었을 때도 당신에게 와 있는 일본 화가를 물리치던 오히려 내게 화가 미칠까 봐 윤덕영에게 명하여 창덕궁 순종의 어진부터 그리게 하셨다. 어전휘호도 나만 부르면 친구들에게 시샘을 받을까 봐 미술회 선생님과 학생을 함께 부른 것이다.
고종앞에서 석상휘호를 할 때도 나보다 선배들은 그림을 다 완성하지 못했는데 나는 전날 진고개에서 포대화상布袋和尙을 「스케치」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 빨리 그려낼 수 있었다.
고종이 휘호하는 것을 보러 내 곁에 오시니 소림、심전선생이 안경을 벗고 그림 그리는 일을 멈췄다. 고종은 소림、심전선생에게
『어이、안경쓰고 그림들 그리게. 』 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나와 김관호가 어진御眞 일로 덕수궁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을 때 고종께서 얼굴도 내밀지 않았던 일도 알고 보니 까닭이 있었다. 김관호는 이왕직 차관으로 있던 일본인 國分象太郞(고쿠분 쇼따로)이 추천해서 들어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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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 「금강산」(비로봉)〉
람이었다. 김관호가 당시 매일신보 사장으로 있던 無佛무불의 화상을 그려준 인연으로 그가 國分象太郞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시종장이 들어가서 어진화가들이 와서 기다린다고 했다가 호통을 들었다. 노기를 띠고 안 나간다고 거절하시며、
『國分象太郞이 뭘 안다고 나선단 말이야. 내일 金殷鎬만 들어 오라고 그래.』 하셨다는 것이다. 이 일이 알려져 나는 괜히 金觀鎬김관호를 보기가 민망했다. 나와 이름이 비숫한 觀鎬의 손을 잡고 미안하게 됐다고 말하니 그는、 『以堂이 미안할 것 뭐 있소. 』
하고 혼연渾然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觀鎬와 나는 더욱 친해졌다. 그는 도량도 넓고 얌전했다. 그림 솜씨도 좋아서 당시 서양화가로는 첫째 손가락에 꼽혔다.
고종의 어진은 약 4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나의 두 번째 어진은 이미 궁중 표구사의 손으로 특별 족자로 표구되어 비단으로 싸서 오동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 어진은 창덕궁의 역대 어진 봉안소인 선원전璿源殿에 모셔졌었다. 오호라、이 어진이 6.25동란이 일어나 부산으로 소개되었다가 소실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석하石下의 관우화상
서화미술회 학생으로 일약 어용화사가 된 나는 서화계는 물론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학생이라기보다는 혜성처럼 나타난 초상화의 천재로 통했다. 각처에서 초상화 청탁이 몰려와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미술회에 나가 더욱 서화실기를 익히며 교양을 높이는 한편 집에서는 고관과 유명한 인사들의 초상화 주문에 응했다.
윤덕영、윤택영 형제가 초상을 그려갔고、이왕직장관으로 있던 민병석 등 이른바 귀족들과 일본 사람들까지 나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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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下석하 金遇範김우범 「蓮堂聽雨圖연당청우도」 〉
이런 생활을 하던 1914년의 어느날、그림을 좋아하고 사군자를 곧잘 치던 석하(石下山人) 김우범金遇範이란 친구가 찾아왔다.(석하란 호를 가진 사람은 김우범 말고도 모란과 호접도를 잘 그린 석하石下 정진철鄭鎭澈이 있다.) .
石下는 후에 산수 매화에 特長특장하다고 해서 그림도 꽤 잘 팔리고 「선전」에도 특선까지 한 사람이다. 한 선생님을 정해서 그 밑에 오래 머물러 공부하지 않고 여기저기 자주 옮겨다니는 편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여러 살 위였으나 아편중독으로 40이 조금 넘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石下의 돌연한 방문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다짜고짜로
『자네 關王관왕(관우)을 그려 본 일이 있는가?』
하고 물어왔다.
『아니、별안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 하고 쏘아붙였다. 그는
『그저 좀 알고 싶어서 ... 』
하면서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관왕을 그려본 일은 없지만… 왜 그러시오?』
『실은 내가 말일세、관왕의 화상을 그릴 일이 생겨서 어펗게 그려야 할지 물어보러 왔지. 혹시 참고할 관왕 그림이 없을까?』
『그야 삼국지만 보면 될텐데 뭐가 걱정이우. 』 하고 쉽게 말해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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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 • 「삼고초려」〉
『그러지 말고 자네、나에게 관왕의 초본을 하나 그려주게. 』 石下가 애원조로 부탁하는 바람에 관우의 초본 한 장을 그려줬다. 그가 돌아간 후에 나는 이내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저 친구가 웬일로 관왕의 화상을 그린다는 걸까? 더구나 그가 화상을 그린다는 일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는 직접 관계되는 일이 아니어서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가 그린다는 관왕화상은 사실 처음부터 내게 주문된 것이었다.
당시 서울 장안에는 관왕、즉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삼국지에 장비 유비와 형제의 의를 맺었던 관우(관운장)의 신령을 신봉하는 소위 성제교도聖帝敎徒들이 상당히 많았다.
교도들은 관운장을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불렀다. 관성제군의 혼령이 모셔진 서울의 동묘와 남묘는 그들의 정신적인 신앙처였다.
그런데 동묘와 남묘는 나라에서 지은 건물이어서 성제聖帝교도들은 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그들의 교당을 새로 하나 갖기를 원했다.
그들은 마침내 내자동에 사당을 새로 지었고、그 속에 관성제군의 화상을 모시기로 되었다.
성제교의 대표 몇이 남묘로 가서 그들의 뜻을 관성제군에게 알린 뒤 그들이 신령의 판시判示라고 믿는 산통점算筒占을 치게 되었다.
그들은 사전에 서울장안에서 유명한 조석진 안중식 지운영 그리고 나의 이름을 써넣고 누구에게 화상을 맡길 것인가를 점쳤다.
『성제가 全殷鎬에게 맡기라는군. 』
교도들은 그들의 성제신령이 판시하는 것이라고 믿는 점괘대로 나에게 화상을 부탁하기로 했다.
교동校洞 운현궁雲峴宮 앞에서 찬가게를 하는 교도 이선경李宣卿 노인이 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선경 노인은 이헌경李憲卿 판사의 집안 동생이어서 궁중에도 반찬거리를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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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찬가게의 주인을 석하가 알고 있었다. 마침 찬가게 앞을 지나던 石下가 李노인에게 關王화상 이야기를 듣고、 『金殷鎬를 제가 잘 아니 부탁해서 그려다 드리겠습니다. 』 하고 그길로 나에게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고 關王화상의 초본을 얻어가기 위해 찾아왔었다.
그의 속셈은 뻔했다. 내가 그려준 草本을 기초로 자기 손으로 正本정본을 만들어 완성된 화상을 찬가게 李노인에게 전해준 것이다.
교도들은 화상을 평가할 만한 눈을 갖고 있지 않아 석하의 그림을 聖帝성제가 지시한 나의 그림으로만 믿었던 것이다.
교도들은 李노인에게서 화상올 받아 곧 표구한 뒤 새로 지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까지 지냈다.
關羽화상 算筒占
새로 지은 신당에 화상을 걸어놓고 제사까지 기낸 교도들은 화상이 마음에 드시느냐고 算筒占산통점을 쳐봤다.
이게 웬일인가. 삼세번을 뽑아봐도 계속 대노괘大怒卦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큰일 났구나!』
교도들은 겁에 질려 허둥거렸다.
교도들은 화사가 성제화상을 그리는 동안 무슨 나쁜 짓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찬가게 李宣卿이선경노인은 더욱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괴로웠다. 속으로 실수를 뉘우친 李노인이 직접 나를 찾아왔다. 李노인은 나를 찾아와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만 있었다.
겨우 입을 열더니、
『전일 선생께서 그려주신 성제님의 화상을 사당에 모셨더니… 글쎄 어쩐 일로 산통에서 거듭 대노괘가 나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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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감적으로 찡하고 오는 게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聖帝화상이라뇨? 전 그런 화상을 그린 적이 없는데요. 』
『아니、 그럼 ... 』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라뇨? 노인장께서 언제 저에게 화상을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요?』 『원, 이런 변이 있나.』
그때서야 李노인은 성제의 대노괘가 나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김모놈이 속였구나. 이런 벌받을 일이 어디 또 있담. 성제의 벼락이 떨어지겠구나. 맙소사.)
『그러면 그렇지、대노괘가 나올 턱이 없었는데.』
나는 이노인에게만은 自初至終자초지종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사실은 석하가 내게 찾아와서 關王관왕화상 초를 하나 그려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 친구가 왜 갑자기 화상을 원하는지를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초만 잡아주었다고 일러 주었다. 결국 모든 것이 백일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李노인은
『일이 이렇게 비꾸러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聖帝님의 대노를 풀어드리려면 하루빨리 선생님의 화상을 얻는 길밖에 없겠소. 내일부터라도 우리 집에 와서 화상을 그려주시면 그 은혜는 우리 聖帝교인들이 잊지 않을 것이오.』 하고 정중히 부탁했다.
李 노인은
『聖帝님의 화상을 그리는 동안은 목욕재계하고 술.담배 여자를 멀리해주셔야 합니다. 폐백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 하고 또 대노괘가 나올까 봐 마음을 썼다.
다음날부터 나는 찬가게 李노인집 안채의 대청마루에서 聖帝교도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가운데 관왕의 화상을 그렸다.
돈많은 성제교도들, 특히 부녀자들은 파란 만수향을 들고 와서는 향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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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 「후적벽부」〉
〈관우화상〉
꽂고 그림을 그리는 대청 쪽을 향해 몇 번씩 절을 하곤 돌아갔다. 어느 여교도는 함께 놀러 가자고까지 청해온 일도 있었다. 화상은 삼국지를 참고로 하여 등신의 관왕을 가운데 잡고 좌우로 활을 든 시위장군을 거느린 구도였다.
화상은 시작한지 수 10일 만에 완성을 보았다. 초겨울 날씨가 매우 쌀쌀했다.
교도들은 화상이 생동한다고 모두들 감탄했지만 산통점이 걱정이었다. 일껏 마음먹고 성심껏 그린 것이 산통점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마저 있었다.
새로 그린 나의 관왕화상은 곧장 사당으로 옮겨져 엄숙히 봉안제가 베풀어졌다.
李노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 의식에 제자 白潤文백윤문과 함께 참석했다.
새로 지은 사당 안팎에는 손에 손에 만수향을 든 교도들로 온통 축제의 물결이었다.
한동안 의식절차가 진행되더니 이윽고 산통괘를 뽑는 시간이 돌아왔다. 뒤에 앉아있는 나는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있는데 별안간 교도들의 환성이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그들은 뒤에 앉아있는 나를 향하여 일제히 고개 숙여 합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大喜卦대희괘가나왔다고 교도들은 좋아했다. 나도 사당에서 나오면서 속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산통괘를 세 번 뽑는 법인데 첫 번에 大喜卦대희괘가 나오자 그들도 다시 흔들지 않았다.
내 그림이 봉안되자 교도들은 먼젓번에 石下가 그린 그림은 떼어서 불에 태워버렸다.
교도들은 나에게 50원의 폐백을 가져왔다. 그때 돈 50원은 그림값치고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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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 「풍속도〉
〈閔 泳 徽〉
國一館국일관 피로연
高宗、純宗의 어진작업을 완수한 후에 창덕궁에서 순종의 부름이 있었다. 예복을 갖춰 입고 들어가 보았더니 순종께서、 『예전 같으면 어진을 그리면 벼슬도 내리는 법인데 시절이 좋지 않아 예우가 소홀하다. 』 면서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특별상床을 내렸다. 창덕관에서 요샛말로「파티」를 마치고 나서 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원에서는 궁중에 출입하면서 그동안 나와 정든 사람들과 한바탕 먹고 놀았다.
시종들은 이 자리에서 나의 시조 소리가 듣고 싶다고 청했다 목청을 가다듬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하고 황진이의 시조를 한 가락 뽑았다.
이들은 이것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옛날이야기를 하라고 또 부추겼다. 창덕궁잔치가 끝난 얼마 후에 다시 국일관에서 피로연이 열렸다. 閔泳徽민영휘、尹德榮윤덕영、尹澤榮윤택영、朴箕陽박기양、宋秉晙송병준 등이 자리를 마련하고 御容畵師어용화사의 노고를 치하했다.
度支部大臣탁지부대신을 지낸 閔泳基민영기와 이왕직장관 韓昌洙한창수도 참석했다. 장안에서 말마디나 하던 대감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분위기가 엄숙했다. 기생들 손으로 술이 몇 순배씩 오간 다음 취흥이 도도해지자 화제의 과녁이 내게로 쏠렸다.
『以堂은 그림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古譚고담도 잘하고 시조도 잘한다는데 어디 이 자리서 한 번 해보게. 』
하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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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 「벚꽃」〉
물색도 모르는 기생들까지 덩달아서 박수를 치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여기가 어느 자리인데 저같은 사람이 소리를 하겠습니까?』 하고 한 번 빼보았다.
민영휘가、
『자네 先聲선성이 시중에 꽉 찼으니 그만 버티고 한번 해보라니까.』 하고 넌지시 일침을 가했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않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까짓 것, 못할 것도 없는 일이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란춘성하고、만화방창이라、 때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 구경가세 /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 들어를 가니…』
하고「遊山歌유산가」를 한 가락 뽑았다.
『제비는 무리져서 거지 중천에 두나래 훨씬펴고 펄펄 백운간에 어이 갈고 슬피운다. 泰山은 첩첩、기암은 층층 에이 구부러져 광풍에 흥이 겨워 우줄우줄 춤을 춘다. 』
고 한 바탕 잡아 제쳤더니 그렇잖아도 빨간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노래가 끝나자 좌중에서 윤덕영이
『하여간 별놈이야.』 하고 한 마디 거들었다.
기생들까지 합세해서 재창을 청했다. 이번에는 고담을 하라는 것이다. 한참 생각하다가「妓生기생 明月傳명월전」으로 정했다.
『명월은 만고절색이나 남자를 가까이 안해 지조까지 높았다. 하루는 방을 써 붙이기를 자기 이름 석자를 잘 풀면 낭군으로 삼겠다. 』 고 허두를 꺼냈다.
좌중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張孝言장효언、梁正甫양정보、趙羽貴조우귀、李明韋이명위란 이름을 가진 난봉꾼 서너 녀석이 밑져야 본전이라고 명월의 집을 찾아갔다.
『명월의 얼굴을 보니 日月角일월각(이마)이 반듯하고 눈썹은 송충이 기어가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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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코는 마늘쪽 모로 세워놓은 듯하고 입술은 선 앵도 문 듯하고 턱은 송편 빚어놓은 것 같고 좌우 뺨은 桃花도화꽃 핀 듯 발그스름하고 허리는 한줌 되는데 어깨는 집어다 놓은 듯 날씬하고 춘풍세류같이 휘청휘청 걸어가는 모습이 양귀비 뺨치더라. 』 고 한 바탕 궁굴렸다.
『梁正甫양정보가 나서서「맹자가 見견양혜왕이란 梁字양자요、周易주역에 元원코 易이코 正정코 하는 正字정자요、천하문장 杜甫두보라는 甫일세」하고 자기 이름를 소개했다. 이명위가 뒤를 이어「月中丹桂월중단계변만 똑따고 만성천자라는 子자를 받쳤다. 春風桃李춘풍도리 花開夜화개야와 칠월칠석 長生殿장생전에 夜半無人야반무인 死語時사어시에 옥같은 楊貴如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농탕치고 희롱하던 唐明王당명왕이란 明字명자 쓴다. 만리장성 은담 안에 6國제후를 무릎에 떠다 굴려놓고 이목지 소호하고 심지지 소락하던 만흥천자의 애비 양적대보 呂不韋여불위라고 한다」하고 풀어나갔다. 「그럼 우리 네 사람 중 누구를 낭군으로 골랐느냐?」하고 明月에게 물었다. 「네분 모두 좋은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세자에 모두 天子천자의 이름이 들어있는 李明韋를 낭군으로 택했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끝냈다. 이야기가 끝나자 좌중은 이구동성으로、『그 녀석 참 문자속도 기특하다. 』
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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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협회
〈서화미술회 제2회졸업장〉
서화협회
서화학교 졸업
1915년 5월 2일、나는 서화미술회에 들어간 지 4년만에 서과 3년의 전과정을 마쳤다. 『우인이 본회 서과의 규정흔 전과정을 완수하얐기 자에 차증서를 수여홈』이라고 쓴 졸업장을 서화미술회장 이완용의 이름으로 받았다.
제2회 졸업생이다.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한 1회 졸업생으로는 靜齋정재 吳一英오일영、墨鷺묵로(初號초호 春田춘전)李用雨이용우、無號무호(初號초호 壽齋수재)李漢福이한복、李容傑이용걸 등이 있다. 靜齋정재는 위창 오세창의 당질이어서 위창의 후광을 많이 받았다. 無號무호는 소림, 심전 문하에서 서화를 배우고 일본에 유학、 東京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진명고녀進明高女에서 교편도 잡았다. 글씨는 오창석체吳昌碩體를 익혀 篆書전서를 잘 썼고 그림은 화조를 잘 그렸다. 서화 鑑識감식에도 능하여 보는 눈이 밝았다.
墨鷺묵로는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어 소림, 심전 , 貫齋관재(이도영)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해 산수、화조、인물、묵란을 두루 잘했다.
春谷춘곡(고희동)과는 남달리 친해 春谷의 사랑방에서 식객노릇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6.25 사변중 전주로 피난 갔다가 돌연히 病卒병졸했다. 李容傑이용걸은 어려서부터 서화학교에 다녀 다른 동기들보다는 나이가 아래였다. 그는 서화학교가 없어질 때 (1919년) 까지 계속 서화학교에 나온 만년 학생이었다.
나는 졸업장과 함께 요새 말하는 소위 우등상장도 받았다.
『화과 학력이 우등이기 포상한다』는 褒賞狀포상장이었다 상품으로는 川連紙천연지 3軸축
서화협회 79
〈이당 김은호 「승무」〉
〈서화미술회 시절의 저자 최초의 산수화 試作시작〉
唐墨당묵 3丁정, 羊毫筆양호필 3枝지롤 받았다.
중추원참의를 하던 김교성씨의 서찰을 받아들고 기적적으로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평생 소원이던 그림을 그려보고 어진까지 모셨던 지난날 졸업장을 받아들고 백목다리(지금 조선일보 뒤)를 건너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나보다 집에서 어머니의 기쁨은 더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비해 우리집 살림 형편은 퍽 좋아졌다.
졸업하던 해 봄에 이화학당 옆의 「프랑스」공관에서 미술전람회가 열렸다.
우리 서화미술회에서도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두 작품을 냈다. 나도 승무복의 아리따운 여인의 입상을 그려냈다. 화제를 「僧舞」라고 붙였다. 하얀 고깔속으로 비치는 어여쁜 여인의 얼굴과 속살까지 훤히 비칠듯한 투명한 舞服무복의 주름이 아름다운 선을 이루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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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惺堂성당 김돈희金敦熙 「五體書屛오체서병」〉
었다.
정확하고 섬세한人物 기법에다 부드러운 색채를 써서 더욱 돋보였다. 나는 노래와 춤에도 상당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 그림을 그리면서 승무도 춰보고 콧노래도 불렀다.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시도한 것이 주효했던지 생동감있는 그림이 되었다.
난생처음 근대적인 미술전에 츨품한 「승무」는 어진과 초상화를 많이 그린 학생화가라는 명성이 더해진 때문인지 크게 인기를 모았다.
소림과 심전선생은 화과를 졸업한 나에게 서과에서 계속 3년쯤 더 공부하라고 권했다.
화만 잘해서는 품위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좆아 다시 서예공부를 시작했다.
書科에서는 又香우향 (丁大有정대유)、菁雲청운 (姜弼周강필주)、小湖소호 (金應元김응원) 선생이 지도해 주었다.
벽에다 해서 • 행서 • 초서 • 전서 • 예서의 각체를 써서 걸아놓고 학생들에게 임서하도 록 했다.
선생님들이 써놓은 글씨본은 며칠만큼씩 바뀌었다. 四君子도 서과의 중요한 과목중의 하나였다.
이때의 수업과정은 훗날 내가 화인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과에 다닐 때 서화미술회는 貫鐵洞관철동에 있었다.
백목다리에서 관철동으로 옮겨갔다. 이 집도 백목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李址鎔이지용대감의 舊家구가였다.
대청과 큰방이 많아 공부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집이었다.
내가 서과에 다닐때 화과에 재학중인 후배들로는 心汕심산 노수현(盧壽鉉) 靑田청전 이상범李象範、鼎齊정제 崔禹錫최우석、 深香심향 朴勝武박승무 등이 있었다.
내가 다시 서과에 입학한 1915년 10월, 경복궁에선 총독부의 이른바 施政시정 5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가 열렀다. 근정전 뒤의 강녕전을 중심으로 참고 미술관이 꾸며지고 그 한쪽 벽면이 조선의 서화가들에게 제공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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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곡 고희동 「자화상」〉
었다.
서화미술회에서는 소림 • 심전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생님과 학생들도 출품했다.
나는 젊은 여자가 방안에서 바느질하는 「조선의 가정」을 냈다. 이 그림은 전람회가 끝나자 일본사람이 사갔다.
서화협회 창립
1918년 5월 19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체인 「書畵協會서화협회」가 발족되었다.
東京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춘곡 고희동이 주동、13명이 발기했다.
春谷이 근대적인 미술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맨먼저 접촉한 곳이 서화미술회였다.
春谷은 心田에게 그림공부도 했지만 東京유학중에도 방학 때면 으례 서화미술회에 나와 학생들과 교유했다.
먼저 그가 자주 드나들던 서화미술회 선생님들의 찬동을 얻어 소림 조석진、심전 안중식、우향 정대유、위사 강필주、청운 강진희、소호 김응원、 관제 이도영을 발기인에 넣었다.
이밖에 당시 서화계 중진이었던 해강 김규진、수산 정학수、 성당 김돈휘、 위창 오세창、 백당 현 채의 날인을 받아 자신까지 모두 13인의 이름으로 書畫協會를 발기한 것이다.
그들은、『전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하여 신구 서화의 발전을 도모하고、동서 미술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6월 16일、사무소로 정한 長橋町장교정(지금의長橋洞) 8번지 金鎭玉김진옥의 사랑방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초대 회장에는 심전 안중식 선생이 뽑혔다. 춘곡이 총무를 맡고 金均禎김균정이 간사에 피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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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창립총회 때 정회원 10인의 명단을 상호 추천 방식으로 정했다. 그 뒤 10 월 8일에 제1회 정기총회를 열고 명예부총재에 운양 김윤식、고문에 일당 이완용一堂 李完用、석운 박기양石雲 朴箕陽、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시남 민병석詩南 閔丙奭을 추대했다. 정기총회에서는 먼젓번의 발기인 외에 정회원으로 다시 16인을 추천했다.
나와 서화미술회 동문들은 모두 이때 정회원의 자격으로 서화협회에 참가했다. 鼎齋정재 崔禹錫최우석、靜齋정재 吳一英오일영、壽齋수재(無號무호)李漢福이한복、春田춘전(墨鷺묵로)李用雨이용우、心汕심산 노수현盧壽鉉、靑田청전 李象範이상범、필자 등 우리 동문들의 이름이 정회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서화협회는 회규會規를 내걸고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약속했다.
회규會規 2조에서는 『본회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동서미술의 연구、향학 후진의 교육 및 公衆공중의 高趣雅想고취아상을 增長증장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내세웠다.
4조에서 『본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고 정하고 사업 내용을 ① 揮毫會휘호회 ② 展覽會전람회 ③ 依囑製作의촉제작 ④ 圖書印行도서인행 ⑤ 講習所강습소 등으로 열거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적인 인식이었고 미술 발전의 도약대가 되었다. 나는 아직 26세 밖에 안된 청년화가였지만 다른 회원 못지 않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화협회는 고문단 인선을 놓고 옥신 각신했던 모양이었다.
부총재에 뽑힌 雲養운양(1835〜1920년)은 문과에 급제해서 이조판서까지 지낸 분으로 韓露條約한러조약에도 공이 컸다. 金弘集김홍집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청일전쟁의 어려운 여건도 능히 감당해 냈다. 규장각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碩儒석유일 뿐 아니라 명필가로도 꼽혔었다. 일제의 작위를 받았지만 3.1만세 사건에 관련되어 작위를 빼앗겼다.
동농(1846〜1922넌)은 예조판서 金應均김응균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했다. 공조판서、농상공부대신、충청남도감사、규장각제학、대한협회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한일합방으로 작위를 받았지만 물리치고 3.1운동에 가담했다. 일본관헌의 눈을 피해 상해에 들어가 임정요인으로 활약하다가 이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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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 등반 (읜쪽부터 以堂, 두 사람 건너 의재 허백련)〉
숨을 거두었다. 어려서부터 서법을 배워 晋唐진당이후 여러 명가들의 필의를 연마하고 만년에는 동기창의 書格서격을 따랐다. 창덕궁비원 정자기둥에 붙어있는 글씨는 동농이 쓴 것이다.
石雲석운(1856~1932년)은 연전에 작고한 연극인 朴珍박진씨의 엄친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찬정、규장각제학에 이르렀다. 글씨는 행서를 잘 썼고 그림은 묵죽을 잘 했다. 金剛山의 건봉사 석가여래 靈芽塔영아탑 봉안비의 글씨는 석운의 필적이다.
이완용과 민병석을 빼자는 설도 있었지만 이들이 친일세도가였을 뿐 아니라 서화를 잘한다는 이유로 고문자리에 앉혔다. 여기에는 해강 김규진이 이끌던「서화연구회」를 의식한 벼름도 있었다. 협회를 운영하자면 다소의 자금이 필요했지만 운영비만 뜯어낼 양으로 이들을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가 이들을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藝道예도에 흠이 가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금강산여행
서화협회가 창립된 1918년 여름 어느날이다. 갑자기 이지용 대감께서 내게 기별이 왔다. 금강산으로 피서 여행을 떠나는데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가정 일로 선뜻 따라 나설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목적지가 금강산이탄 바람에 구미가 당겼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명산이었기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놓칱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 「스케치」를 하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나는 필요한 화구를 챙겨가지고 따라 나섰다. 일행은 이지용 대감과 육촌 간인 계동군 이기용、중앙학교 한문교사인 李光鍾이광종、高城고성군수를 지낸 李高城. 단소를 잘 부는 李星軒이성헌 등 모두 전주 이씨들이었고 타성바지로는 민영휘대감 아들 閔圭植민규식과 육당 최남선崔南善、그리고 나 뿐이었다. 홍일점으로 이기용의 애첩인 연향蓮香이 따라나섰다. 연향은 평양기생으로 권번에 들어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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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이기용〉
桂洞君계동군이 빼내 뒤로 살림을 차려주고 있는 터였다.
우리 일행은 기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원산으로 직행했다. 원산에 당도하니 서울 왕실 가족들의 행차를 안 當地당지 경찰이 신변을 보호해 주려고 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마중나온 원산경찰서의 책임자는 조선인 순사부장 李源雨이원우였다.
李源雨도 전주 이씨여서 왕실 가족과 같이 온 우리들을 원산 시내는 물론 금강산까기 친절히 안내했다.
원산에서는 침례교회 선교사 밑에서 일을 보는 安春男이춘남의 초대를 받아 양요리로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원산 근교에 사는 安圭承안규승이란 부자가 李대감을 초청했다. 나와 육당 최남선은 날이 덥다는 핑계로 초청에 응하지 않고 우리끼리 놀 작정으로 원산시내를 구경했다. 閔主植민규식、李星軒이성헌도 우리를 따라 나섰다. 주막 앞을 지나는데 육당이 예쁜 주모가 있다고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육당이 앞장서서 주막으로 들어갔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미인주모 바람에 몇 잔씩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 있었다. 우리는 덧옷을 벗어놓고 나온 것을 모두 잊고 있다가 술값을 치를 무렵에야 서로들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육당에게 이따 주모가 들어오면 『저 사람이 조선에서 관상을 제일 잘 보는 사람인데 이 기회에 한번 보아달라고 조르라』고 일러 놓았다. 주모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육당이 입을 열었다. 주모는 물정도 모르고 육당이 시키는 대로 내게 관상을 봐달라고 졸랐다. 『벌써 관상을 봤는데 뭘 보느냐』고 짐짓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주모는 분 냄새 나는 얼굴을 들이대고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못이긴 체하면서、
『兩手持餠양수지병괘로고만!』
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벽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느니、허공에 손짓하는 격이라느니 하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마음은 비단같이 고운데 마음을 줄 사람이 없다고 했더니 손뼉을 치고 덤볐다.
나는 이기회를 놓치지 않고 『술값을 셈하자』고 했더니 주모는 펄쩍 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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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국장행렬 (1919.3,3)〉
서 술값은 무슨 술값이냐고 또 오시라는 부탁만 연거푸 하고 있었다. 그날밤 李대감 일행이 돌아와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우리들의 이아기를 듣고 계동군은 『천하문장 六堂이 있고 조선의 부자 민규식이 있는데 술값은 以堂이 치렀다』고 가가대소했다.
원산에서 며칠 지내고 금강산에 들어가 1주일을 쉬었다. 내 앞에 전개되는 금강산의 비경과 태고의 신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眼) 속에 담아뒀다.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산수도를 구상했다. 비로봉、신만물、만폭동、옥류동 등 가는 곳마다 「스케치」를 잊지 않았다. 나는 젊어서 이후 지금까지 金剛山圖를 많이 그렸는데 六堂과 함께 갔던 탐승 인상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아 이때 보고 들은 것을 가장 많이 반영했다. 金笠김삿갓이 『一步二步三步立일보이보삼보입、山靑石白間間花산청석백간간화』라고 예찬한 금강산의 신비경은 나의 그림 공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金剛山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나를 데리고 갔던 이지용, 이기용은 금강산도의 산수병풍을 그려갔다.
춘하추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각각 3폭씩 그려서 12폭 병풍으로 꾸몄다. 내가 金剛山에 다녀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금강산도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다행히 천하 명산의 화재를 많이 얻어와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화가의 삼일운동
기미년 3월 1일、드디어 조선민족의 함성이 터졌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만세운동의 해는 밝아온 것이다. 연초부터 서울장안은 심상치않은 기운이 감돌고 민심의 동요가 엿보였다.
1월 23일 마침내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고종이 일본사람에게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경술국치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압박과 유린과 희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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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J프린트 원본〉
살아오던 우리 민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분노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기세로 번졌다. 東京에서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해서 일제에 무자비하게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도 독립의 물결이 일고 있음을 알아차린 왜경은 총검을 앞세워 더욱 탄압의 기세를 올렸다. 요원의 불길은 치솟았다. 高宗의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대한민족은 마침내 서울을 비롯한 방방곡곡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어섰다.
나도 거리로 뛰어나갔다. 다같이 목숨을 걸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만세 군중 속에 끼어들었다. 이때 마침 한 친구가 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취운정에서 천도교인 尹益善윤익선이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신문을 가져다가 함께 돌리자는 제의였다.
나는 서화학교에 다닐 때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러 취운정에는 여러번 가 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빨리 찾아갈 수가 있었다.
친구와 같이 취운정에 가서 다른 청년학생들처럼 「독립신문」 뭉치를 품속에 감추어 가지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뛰어나오면서 우선 골목집 담너머로 신문을 던졌다. 만나는 사람에겐 손에 다급히 쥐어 주었다. 큰 거리에서는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마구 뿌렸다.
이렇게 하기 보름、3월 27일 그날도 나는 취운정에서 신문을 가지고 齋洞재동 거리로 뛰어 나오고 있을 때였다.
네거리에는 어느틈에 모였는지 독립 만세를 울부짖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도 독립신문을 뿌리면서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발포 명령이 내렸다. 재동 네거리에서 총소리를 피해 안국동 쪽으로 뛰었다. 安平君안평군 집의 큰 대문이 반쯤 열려 있어 그리로 뛰어들어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좀 조용해진 듯해서 살금살금 기어나와 雲泥洞운니동 집으로 달아나려는 찰나、왜경의 방망이가 내머리를 내리쳤다. 재동 파출소로 끌려갔다가 종로경찰서
〈3.1운동(종로의 만세시위)〉
로 넘어왔다.
그때 한 순사가 나를 가리키며 형사부장에게、
『장소가 좁으니 머리가 깨진 이 사람은 유치장으로 보내버리죠. 』 하고 말했다.
형사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사는 퉁명스럽게 나에게
『이 자식아、일어섯!』
하고 명령했다.
순사의 부축을 받고 허리를 끌다시피 하며 유치장으로 가는 복도에서 순사는 나직이 말했다.
『이 사람아 어쩌다 이렇게 됐나?』
그 순사는 조선 사람이었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그가 누구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전에 계동군 이기용대감의 초상화를 그리러 다닐 때 그 집에서 만났던 순사였다. 그는 그림을 좋아해서 만나보면 반가와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에 들어간지 아흐레 되던 날 오동 마차에 실려 西大門감옥으로 왔다.
입옥 6개월만에 1년형을 언도받고 홍의의 기결수가 되었다.
서대문 감옥에서는 33인의 한 분이었던 申銀九신석구목사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33인은 모두 독방을 주었는데 어쩐 일인지 申목사는 나와 함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감방에서 申목사에게 성서와 한문을 배웠다. 바로 옆방엔 만해 韓龍雲한용운과、나와 함께 바로 전년에 금강산여행을 갔다 온 육당 최남선이 갇혀 있었다.
「독립신문」을 만들던 윤익선도 잡혀 와 있었다.
나는 옥중에서 심한 독감에 걸렸다. 제대로 약을 쓰지 못해 병은 더욱 악화、열병증세를 나타냈다. 목에선 고름이 나왔다.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졌다.
어머니와 누님이 노끈 주머니에 넣어주는 사식통은 날마다 들어왔지만、 그 밥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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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 銀 九 신석구〉
〈萬海 韓 龍 雲 만해 한용운〉
이렇게 열병 앓듯 심하게 앓고 있는데 만기 출옥 1개월을 앞둔 나에게 가출옥 허가가 내려졌다. 문밖에선 누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님은 내가 옥중에서 심심풀이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사귀었던 간수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가출옥 결정을 알고 있었다.
누님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은 나는 아들 걱정을 하느라고 초췌해진 어머님을 붙잡고『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사죄했다. 어머니는 내 손목을 잡은 채 눈물만 흘리시느라 입을 열지 못했다.
大造殿대조전 벽화
가출옥으로 나와 남의 집 셋방에 누워 있자니 마음이 괴로왔다. 살림형편도 날로 어려웠다.
내가 왜경에게 붙잡혀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2년전 구암이 시천교 3교주 초상화의 댓가로 사준 원서동 집을 팔고 좀 큰 집으로 옮겨 앉았던 16번지의 기와집을 다시 팔아서 그 돈을 「高橋」라는 일본인 변호사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던 것이다. 다만 외아들인 나를 살리려는 애절한 석방운동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병세는 더욱 악화되는 것 같았다. 가까운 한의에게 보이니 폐가 곪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함을 느꼈다. 전에 안면이 있던 전의이자 신의로 통했던 安商浩안상호를 찾아갔다. 그는 뜻밖에도 낙관적인 진단을 내렸다. 만성 기관지염이니 넉넉잡고 3주 동안만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말만 들어도 날아갈 듯이 기분이 상쾌했다. 그렇다고 그 말만 믿고 태연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세 번째로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갔다. 여기서도 절망적인 병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약 쓸 돈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관철동의 유명한 내과의원 원장 金溶採김용채를 찾아갔다. 그의 진단도 「세브란스」병원과 같았다. 여기서 사정해 볼 수밖에 이젠 딴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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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화〉
또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제게 당장은 돈이 없습니다. 엊그제 서대문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 나왔습니다. 앞으로 꼭 치료비를 갚겠습니다. 제 병을 먼저 좀 고쳐 주십시오. 』
의사는 여러가지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쾌히 응낙했다.
『고생 많이 했습니다. 어찌 당신한테 치료비를 받겠습니까? 그 대신 몸이 완쾌된 후 기분이 날 때 그림이나 한 폭 그려 주시구료. 』
의사의 말은 시원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나를 성의껏 치료해 주었다. 값진 약도 아끼지 않았다. 金의사의 성의있는 치료로 내 병은 치료되었지만 쇠약한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완순군完淳君 이재완李載完 대감의 아들 이달용李達鎔의 주선으로 전날「독립 신문」을 만들었던 취운정에 방 하나를 얻어 요양하게 되었다. 가회동 언덕의 취운정에서 약수를 마시며 정양하는 동안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다. 그 무렵 창덕궁에선 1914년에 불탄 대조전大造殿을 재건하고 그 안의 벽화를 그릴 서화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하루는 윤덕영尹德榮이 불렀다.
벽화를 그리라는 얘기였다. 지난날 순종의 어진올 봉사할 때부터 나의 화재를 높이 평가하여 여러모로 후원해 주던 尹대감은 농담처럼 말했다. 『자네가 모두 맡아 그리겠나?』
『아니 몇 폭이나 되는데요?』
『여러 폭이지.』
『그럼 여럿이 나누어 그려야죠. 친구들과 같이 그리는게 좋잖겠습니까?』 반드시 내 대답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하여간 창덕궁에선 청년화가 5명에게 대조전 내전의 벽화를 나누어 맡겼다.
나는 白鶴圖백학도를, 청전(이상범) 심산(노수현)은 산수를、靜齋정재(오일영)와 墨鷺묵로(이용우)는 합작으로 봉황도를 그리기로 했다. 우리들의 공동제작실로 덕수궁 준명당浚明堂 사용이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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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강 김주진 「김강산도」〉
그것은 창덕궁 측의 각별한 후의였다. 청년화가들은 다같이 극채의 북종화 필법으로 최초의 기념비적인 대폭 벽화를 맡아 서로 경쟁하둣 각자의 주제를 완성시켰다. 나만은 병후여서 휴양처로 정한 취운정에서 편안히 약수를 마셔가며 白鶴圖를 그렸다. 1920년 8월에 착수한 벽화는 9월 말에 가서 모두 완성을 보았다. 때를 같이하여 해강선생도 대조전 앞의 희정당熙政堂안에 역시 대폭 「금강산도」를 들여 놓았다.
산수화를 그린 심산心汕은 1917년 6월 장충단에서 六堂이 주재한 시문서화詩文書畫 四科4과의 전통적인 경성 대백일장이 열렸을 때、서화미술회 재학생으로 화과에서 1등상을 받은 일이 있다.
3 • 1운동이 일어나던 해 11월 2일에 돌아가신 心田선생은 33인의 한분이었던 오세창선생、우당 권동진선생과는 평소 막역한 사이였다. 위창葦滄과 우당愚堂은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해놓고서 3월 2일까지 心田의 사랑방인 경묵당耕墨堂에 나와서 천연스레 청담淸談을 나누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心田선생도 일경에게 잡혀가서 심한 문초를 당한 후, 그해 가을 세상을 뜨셨다.
제1회 서화협회전
1921년 2월 26일、서화협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4월 1일부터 나흘 동안 회원작품전을 열기로 결의했다.
장소는 서울 桂洞계동에 있는 中央高普중앙고보.
강당 4개교실을 빌어 「제1회 서화협회전」을 열었다. 출품된 작품은 회원들의 書 畵 四君子 외에 고서화를 합쳐 1백여 점이었다.
협회창립때부터 중요한 사업의 하나로 내세웠던 회원전이 3.1운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가 드디어 그 숙원을 푼 것이다.
이때 나는 정회원자격으로 연못가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는 수심어린 어여쁜 여인의 얼굴을 그린 「미인도」와 나비를 따라가는 「접미인도蝶美人圖」를 출품했다. 세필의 정교한 북종채색화였다.
「서화협회전」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단체전이어서 그 규모도 어마어마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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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金正喜 「함흥 진흥왕 비각 제액〉
다.
당시 신문들도 대서특필했지만 관람객들도 줄을 지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교실 넷을 빌었던 전람회장의 제1실에는 고화를 진열하고 있었다. 비해당 안평대군의 「소상팔경」 을비롯하여 겸재 정 선의 「관폭도」、僻隱벽은 秦再奚진재해의 『죽림칠현」이 눈길을 끌었다.
이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초대회장 心田선생과 2대희장 소림선생의 유작들이 특별전시 되었다.
제2실과 제3실에는 서화협회 정회원들의 작품이었다.
대부분이 극채의 인물 영모와 수묵담채의 산수화들이었다.
貫齋관재 이도영의 「앵무도」、靜齋정재 오일영의 「봉황도」、정재 최우석의 「平生圖평생도」 청전 이상범의 「산수도」、나의 「미인도」는 2、3실에 나누어 전시했다.
춘곡 고희동과 晶月정월 나혜석의 4점의 유화는 최초의 현대적인 성격을 대변해 주었다.
제4실은 書서였다. 추사 金正喜김정희의 글씨가 특별출품된 이 방에는 정회원 서화가들이 각체의 서폭을 내놓고 있었다.
우향 정대유、백당 현 채、성당 김돈희、소봉 나수연、석정 안종원 등의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 협회 고문인 一堂 이완용과 詩南 민병석도 행서를 내놓았다.
당시 신문들은 하나같이 서화협회전을 예찬했다.
『꿈속에 깃들인 조선 서화계의 깨우는 첫소리 ━━━ . 침쇠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려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는지 이 전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
『제1실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화가의 명화를 진열했는데 약 20점쯤 된다. 그중에 겸재의 작품이 가장 많아 보인다. 아직도 살아 있을 만한 연세로 최근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난 心田 • 小琳 양 화백의 작품에 대하여는 애석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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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田 安中Ifi •「擬檀垣園」筆意歸獵圖」〉
각이 새로이 간절하다. 』
『제4실은 글씨를 진열하였다. 근대의 천재 金秋史 예서의 서첩-병풍이 이 방의 주인같이 엄연히 서서 조선 근대의 筆家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며、丁又香、金惺堂、안석정 등 대표적 핕가의 글씨가 모두 모였다. 』 는 전람회 評語평어들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신문은、
『서화협회전람회는 1일 오전 10시부터 개최되었는바、정각이 되기 전부터 관객은 조수같이 밀리어 회장은 대혼잡을 이루어 회원은 관객 안내에 매우 분망한 모양이며 출품은 모두 백여 점에 달한 바 그중에는 그림이 70여 점이요、글씨가 약 30점인 바、그림 중에 나혜석、고희동、「가즈다」(和田英作) 등의 양화가 8、9점이요、그 외에는 모두 조선 고래의 채색화와 묵화인 바 이미 買約매약된 것이 수 10점에 달하였으며、매약된 것 중에 인기를 매우 얻은 것은 金殷鎬씨의 「蝶접미인도」(가격 3백원)와 이도영씨의 「壽星수성고조高照」(가격 1백원) 이었다.
그 외에 金殷鎬씨의 걸작인「애련미인도」는 그 선명한 색채와 교묘한 수법이 더욱 황홀하여 일반 관중의 안목을 놀라게 하였으며、글씨에는 민병석이 深深藏特심심장특하였던 추사 金正喜의 글씨가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전람회의 광채와 정신은 오직 추사의 글씨에 엉기어 있다 하여도 가하겠는 바, 우리 조선의 서화도 서양화에 별로 양보할 것이 없을 것을 족히 알 수 있다. 』 고 평하고 있었다.
전람회 첫날에는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다녀갔고、다음날에는 雨中우중인데도 불구하고 이왕가의 李 鍝이 우공이 참관하였다.
서화협회는 4월 30일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회장직을 사임한 정대유 선생의 후임인 4대회장에 김돈희 선생을 선출했다,
牧丹목단도둑 金東元
1923년、그해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7월 초순은 한창 장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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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堂 金殷鎬 「壯丹」〉
특히 평양은 물난리를 만나 야단법석이었다. 하루는 작고한 소림 선생의 종손으로 나의 친구인 雲田 趙廣濬운전 조관준(초명 明善명선) 이 풀이 죽은 낯빛으로 권농동의 내 집을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며칠 묵는데 몸에서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 때문에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내가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 대답없이 팔을 걷어 올렸다. 팔목은 온통 주사침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운전은 내게 돈을 달라고 해서는 아편을 맞고 오기가 일쑤였다. 이꼴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돈벌이를 겸한 여행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계동군 이기용 대감에게 찾아가서 소개 편지를 얻어다 주었다.
『이 편지를 가지고 평양에 가서 道警部도경부 보안과장 李源甫이원보를 만나보게. 서화회를 주선해 줄 터이니까.』
노자까지 마련해서 雲田운전을 평양으로 보냈다. 평양에 갔던 운전이 며칠이 안 되어 초췌한 몰골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가서 이원보에게 李대감의 편지를 주었건만 신통치가 않던데…. 아무래도 자네가 나와 함께 가 줘야 일이 되겠어. 이원보도 자네가 와야 그림이 팔린 다고 그러데. 』
이런 제안을 받고 그의 사정이 딱하기도 했지만 나도 평양에 한번 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친구도 위하고 평양 풍물도 살필 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뽕따기 여행」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마침 나의 서화학교 시절의 은사인 滑士위사 姜弼周강필주선생이、 『자네들 덕에 나도 평양구경 한번 해보세. 』 하고 동행을 희망해서 위사 선생을 모시고 나는 雲田과 함께 京義線경의선 북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서울을 빠져나오니 기분이 상쾌할 뿐 아니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장마철의 산야 풍경이 모두 수묵산수의 화첩처럼 너무나 회화적이었다. 살아있는 이 자연의 위대한 美를 어찌 한낱 붓끝의 그림으로 당할까. 결국 그림이란 단순한 자연의 외관 묘사가 아니라 그것이 갖는 생명감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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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下고하 曺晩植조만식 선생 동상〉
〈金 東 元 김 동 원〉
에 미술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평양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설비가 좋다는 西鮮서선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西鮮여관은 평양 유지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했다. 고당 曺晩植 선생이 마침 이 여관에 묵고 계셨다. 평양의 갑부이자 기독교 장로였던 金大潤김대윤의 장남으로 제헌국회 때 부의장을 역임한 金東元김동원도 이 여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 琴童금동 金東仁김동인은 바로 金東元의 아우다. 書家서가인 湖亭호정 盧元相노원상도 西鮮여관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李源甫의 뒷힘으로 이 여관 주인이 각별한 후의를 베풀어 대청마루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서울의 서화가들이 西鮮여관에 투숙중이란 말을 듣자 평양의 유지들이 찾아와 담론을 청했다.
유지들의 간청으로 여관 대청마루에서 휘호회를 가졌다. 壯丹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난데 없이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방금 그려놓은 목단꽃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순간 좌중은 이 뜻밖의 광경을 보자 솔거의 「老松圖」 얘기를 꺼내면서 신필이라고 추켜세웠다.
滑土선생、雲田、그리고 나와 3人서화회가 관민유지의 발기로 丈春館장춘관에서 열렸다.
우리 일행 셋이 그린 작품은 모두 팔렸다. 그림값은 세 사람이 똑같은 가격으로 하되 작품은 제비를 뽑기로 정했다.
현장에서 추첨을 했다. 화제가 되었던 나의 「목단도」를 뽈은 사람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작품을 넘겨주어야 하는데 「목단도」가 행방불명이었다. 도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비를 뽑은 사람은 실망과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마음을 눅이려고 여관에 돌아와 누워있었다. 그때 누군가 장지문 밖에서 느닷없이 『도둑놈 들어갑니다』하고 방안의 동정올 살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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