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산월(歲山月)
전장(戰場)은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평상심(平常心)을 잃은 인간들이 의지해야할 무엇을 찾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것은 술, 여자, 혹은 또 다른 무엇일 수 있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술에 관한 기록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술을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술자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이순신은 적어도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엄격하여, 음란한 생활을 경계했던 것을 난중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남해 현령 기효근이 위급한 때에 어린 처녀들을 배에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가관이다.(1593.5.30일: 이하 모두 음력)
- 원균, 공연수, 이극함이 좋아하는 여인들과 관계했다고 한다. (1594.1.19일)
- 음란한 계집들을 처벌했다.(1594.7.3일 및 1595.6.24일)
이와 관련하여 1596년 9월 11일자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세산월 또한 보려고 와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歲山月亦來見 酒談向野而罷)”
이순신 장군이 영광(靈光)으로 출장가서 군수를 만났는데, 세산월(歲山月)이라는 여인도 왔었다는 내용입니다. 2005년, 순천향대학의 노승석 교수는 세산월이 한양 기생 내산월(萊山月)의 잘못 알려진 이름이라면서, 그녀가 임진왜란 당시 나귀에 은궤를 싣고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전라좌수영에 내려가서 거북선 제조와 군량조달에 기여했다고 밝혔습니다.
노 교수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고증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졌으면 합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세산월(혹은 내산월)은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논개에 버금가는 의기(義妓)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세산월은 과연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그녀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얼마만한 지성의 소유자였을까요?
조선 시대의 기생
오주석(1956~2005)은 그의 저술 <한국의 미>(2003, 솔출판사)에서 논개의 공식영정을 비롯하여 20세기에 그려진 이순신 장군, 춘향 등의 초상화를 혹평하면서, 신윤복(1758~1813)의 “미인도”(첨부한 사진 1 참조)를 극찬했습니다. 세산월의 모습은 “미인도”의 인물에서 풍기는 그것과 유사하지 않았을까요? 해맑고 둥근 얼굴, 작은 입, 단아한 풍모, 큰 타래 머리와 그에 걸맞은 풍만한 통치마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후, 신윤복은 다음과 같은 자화자찬의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자그만 가슴 속에 숨겨진 여인의 따뜻한 정을 그녀의 영혼을 전하듯이 붓끝으로 능숙하게 옮겨놓았노라.”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4B035514FC88C0C)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세조 때 왕실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생 초요갱이나,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조선 기생의 대명사로 알려진 황진이는 이렇듯 아련한 아름다움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습은 그렇다 치고, 세산월을 비롯한 조선의 일류 기생의 능력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가야금, 거문고 등의 악기 연주, 창(唱)과 춤은 기본이고, 시를 짓고 읊으며, <大學>(대학)을 줄줄 외웠다고 합니다. 또한 함경도나 평안도의 기생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능숙하게 쏘기도 했다고도 하고요.
이는 바로 조선의 명기(名妓)는 기예는 물론이고 남성 못지않은 지성을 겸비한 인텔리였다는 것은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황진이에 관한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1621년에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 <於于野談>(어우야담)에는 황진이와 당대의 석학 서경덕 등과의 만남은 물론 아래와 같은 내용도 살려있답니다.
“중국 명나라 세종(1507~1567, 재위: 1521~1567)초에 명창(名娼) 진이가 개성에 살았는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남자처럼 용감했다. 진이가 술잔을 잡고 노래하면 소리가 맑아서, 음향이 수풀과 골짜기를 울렸다.”
이덕형(李德炯: 1566~1645)이 1631년에 지은 야담집 <松都記異>(송도기이)라는 책은 황진이의 노래 실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진랑(眞娘: 황진이)의 노래 소리는 가냘프게 끊어지지 않고 하늘 위에 사무쳤으며, 높은 음과 낮은 음이 모두 맑고 고와서 다른 이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사뭇 달랐다.”
황진이는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성격이 괄괄하여 남자 같았으며,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그녀가 지었다는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즉, 여권운동의 선구적인 노래로 말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를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월하(1918~1996)의 창으로 들어보기로 하지요.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우리 가락의 멋은 물론, 황진이가 읊었듯이 남성에 대적하는 여성의 자존심이 담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__Ua6p9S0o8
베로니카 프랑코
황진이가 출생한 지 반세기쯤 후, 이순신 장군이 탄생한 바로 다음해에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희대의 미인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이탈리아 최고의 명기(名妓)이자, 서양 여권운동 선구자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는 베로니카 프랑코(Veronica Franco, 1546~1591: 첨부한 사진 2 참조)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224237514FC8A033)
16세기, 베네치아에는 2종류의 매춘부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일류 기생과 같이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등 지성을 겸비한 부류이고, 둘째는 그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을 파는 비천한 부류가 그것입니다. 베로니카는 첫 번째 부류였습니다.
베로니카의 일생을 다룬 영화 “Dangerous Beauty(1998, 국내에서는 ‘베로니카―사랑의 전설’이란 제목으로 개봉)”는 그녀가 프랑스 왕과 관계를 맺고, 프랑스 함대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베네치아를 구하는데 기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이는 허구입니다. 베네치아, 스페인을 비롯한 신성로마제국 함대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한 것은 1571년이며,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헨리 3세가 잠시 만나 연분을 쌓은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574년의 일이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프랑스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남긴 시집과 서한집, 특히 그녀가 남긴 아래의 당당한 글을 보면 그녀는 여권운동에 선구적인 족적을 남긴 인물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여자들도 무기를 갖고 훈련을 받는다면,
남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
그대들과 같은 손, 발, 심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 처음으로 행동하는 여자가 되어,
수많은 여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것이다.
나를 따르라고!
첫댓글 정말 오랫만에 들어보는 청산리 벽계수야.
그리고 흥미있는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여자들에 대한 마지막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