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말기 859년에 일어난 구보(裘甫)의 난은 순수한 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 구(仇)라는 문헌도 있다. 절강 동부 출신이라고 하는데, 이해 12월에 겨우 1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상산현성을 함락했다. 필시 번진의 착취로 궁핍에 몰린 농민들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반란군은 섬현을 함락해 막대한 물자가 들어있는 부고(府庫)가 있었다. 구보는 그것으로 장정을 모집해 순식간에 병력 수천을 얻었다...
삼계의 대승으로 기세가 등등해진 구보 밑으로 천지의 도적떼와 망명한 무뢰배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병력이 3만에 이르렀다. 구보는 그들을 32대로 나누고 연호를 나평이라하고, 자신을 천하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라고 칭했다...332 - 335쪽
이야기 중국사 제4권, 진순신, 이수경 옮김,2011, (주)살림출판사
첫댓글 도병마사에 대한 자료가 많이 없네요.
일시적인 벼슬명도 수시로 생겼다가 쉽게 없어지기도 하네요.
우리 시조님 강이식 장군은 도병마사 또는 병마도원수가 아니라 연원보나 남한보등 여러기록에 병마원수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진주 봉산사 시조님 사적비에 이은상 선생께서 살수대첩 운운하시며 을지문덕과 고건무에 대한 상장으로서 병마도원수라 하셨는데 이는 승진된 근거도 없습니다
조상을 미화시키고 중히 위한답시고
족보가 발행될 때마다 한단계씩 높여나가는 잘못된 행태를
구보와 신보의 비교로 쉽게 발견할 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