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명문가에서 배우는 경영 25 - 약봉 서성 어머니 ‘결단의 리더십’
정승 9명 배출…‘인재산실’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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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삼년상 후 한양 이주 결단… 명문가 초석 다져 문과 합격자 105명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명, 대제학 6명, 당상관 28명, 정2품 이상 관리 34명, 종2품 15명. 3대
정승에 이어 3대 대제학 등 내리 6대에 걸쳐 최고위직 공무원 배출….
이른바 조선시대 ‘공무원 사관학교’를 방불케 할 정도다. 세간에서는 이를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약봉 서성(1558~1631) 가문이 배출한 인재 내력이다. 약봉 서성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고건 전 총리에 비유할 수 있다. 약봉은 6도관찰사를
두루 지냈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직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직계 후손들이 이룬 ‘업적’에 있다. 한 가문에서 정승
한 명도 나기 힘든데 무려 9명이나 배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배경과 비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450여 년 전 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의 리더십’에 있었다. 집안을 일으켜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든 이가 약봉의 어머니인 고성 이씨 부인이다.
이씨 부인은 고성 이씨 임청각의 종손인 이명의 다섯째 아들로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다. 이씨 부인은 장님이었다. 15세 때 눈병을 앓고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혼마저 자칫 파혼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던 함재 서해는 신부가
장님인 줄도 모르고 결혼 길에 나섰다 뒤늦게 이를 알았다. 그렇지만 서해는 이에 개의치 않고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인 서해가 결혼 5년만인 23세 때
요절하고 만 것이다. 당시 아들 약봉은 세 살이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일대 결단을 하게 된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사고무친이었다. 그나마 서울에 사는 약봉의 중씨(작은아버지)인 춘헌 서엄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했다. 이씨 부인은 ‘아비 없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중씨가 사는 한양으로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욱이 당시에는 잇단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안동을 떠난 이씨 부인은 처음에는 청주에 몇 달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한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선 안 되고 한양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약식과 약과, 약주를 우리나라 처음으로 만들고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약봉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약봉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약봉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약봉은 자녀들에게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게 하라”면서 ‘
물태위선(勿怠爲善)’을 가훈으로 삼게 했다. ‘착한 일을 하는 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약봉의 아들 4형제는 모두 일가를 이뤘다. 큰아들은 우의정에 오르고 그의 손자 문중은 영의정에 올랐다.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은 넷째아들 경주(선조의 딸과 결혼)의 후손에서 나왔다. 그의 후손에서만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을 배출했다. 약봉의 14세 종손인 서기원(83) 씨는 “벼슬을 했지만 약봉 후손 가운데 친일파는 없으며 서재필도
약봉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이씨 부인은 안동에서 안분지족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단행하면서 대구 서씨 가문을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450여 년 전 이씨 부인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은 오늘날 가문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기업가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