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안산의 목사님들의 목회적 책임은? (4)
2014년 5월, 내가 안면있던 여자목사님의 부탁겸 권유로 함께
세월호 희생자를 분향하기 위해서 분향소에 갔었다.
그때 보니 학생들의 위패에 십자가 표시가 된 것이 많았다.
그건 고인이 기독교를 종교로 했다는 표시인데 그러면 혼자서 교회를 다녔거나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안산시에 있는 교회 목사님들중 일부는 희생자나 그 유가족과 관련되어 있을텐데
목회자로서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궁금해진다.
내가 목회자여서인지, 목회적 책임을 느껴서인지 난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목회적 대응이 궁금해지곤 한다.
희생자가 소속된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실까?
처음에는 그들의 비극에 눈물 닦아주며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에 잠잠히 함께 견뎌주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처음에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었으니까...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한들 귓가에 들리겠는가? 처음에는 그들에게 상황을 직시하고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제사장의 직분처럼 함께 아파하고 동참하여 울어주는 것 외에 할 것이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유족들에게 진짜로 존경받고 따르고 의지할 만한 대상자가 그 교회의 목회자였다면...
그토록 단발마적인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고, 또 정부든 대통령을 향해 광분할 때에도
목회자의 권면과 조언을 듣지 않았을까?
그만큼 존경받고 어떤 상황이든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인생의 스승으로 영혼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목회자가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목회자의 직무는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이고 왕이다.
제사장은 만인의 죄를 속죄하는 대속자 역할이므로 교인들의 삶의 아픔에 동참하고 격려하고
용서하면서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교인들 모두에게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미덕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
제사장 역할은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역할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역사와 개인의 삶을 해석하고 지침을 내려주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여 가르쳐주어야 한다. 선지자는 해석하고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이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대한 교사로서 서야 한다.
목회의 현장에서 보면 목회자의 선지자적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성도들도 있고
반발하고 거절하는 성도들도 있다.
목회자에게는 지지와 찬성을 보내는 성도들은 편안하지만 거부와 비난하는 성도들은 불편하고 힘들 수 있다. 이런 게 무서워서 목사님들은 시국의 사건이나 사회의 어떤 이슈에도 무조건 침묵해버린다.
마치 깊은 산속에 은둔하여 세상은 몰라라 하고 나만 깨끗하고 거룩하면 되지 하는 수도승처럼...
선지자는 욕을 먹든지 돌을 맞든지 심지어는 죽음까지 당하면서도 사회에, 개인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외치고 전달해주었다.
다윗 왕 앞의 나단 선지자, 갓 선지자도 두려움 없이 왕에게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왕적인 책무는 무슨 일이 있든지 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다스려갈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백성을 통솔하고 인도자로서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백성 전체에게 지혜롭고 현명한 왕이 되어서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백성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찌 단순히 담임목사로서의 기능만 말함이겠는가?
기독교인의 삶은 복음의 기초위에 세워진 나무 같은 존재이다.
삶은 복음의 기초위에,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고
성경 안에는 해결 방안과 가치관과 역사관이, 하나님의 뜻이 다 들어있다.
오늘날 사랑과 복음 타령이 단상에서의 달콤한 사탕발림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 그렇게 사랑이나 복음이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만 전하고 가르치나?
삶은 그 현장에서 치열한 고백과 실천이 따라오는 십자가의 현장이고,
자기 욕망과 자기 부인의 깊은 터널을 통과하는 부활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는 안산시의 목회자들에게, 넓게는 대한민국 목사님들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특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단원고 학생의 유족들이 보이는 행태를
늘 뉴스에서 접하면서 그들이 소속한 교회 목사님들은 뭘하고 계실까였다.
어떻게 그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충고하는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고 계실까?
아무리 자식 잃은 부모 심정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면 자식 잃은 부모는 모조리 정부 탓만 하며 맹수처럼 싸워도 된다는 말인가?
유가족들의 비통함이 조금은 약해지고 그랬을 때
목사님들은 자기네 교회 성도들에게 진정어린 충고와 조언을 할 때가 아니었을까?
이제 시간이 조금 흘렀으니 목사님들은 교인들과 그 유가족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태도가 바람직한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으로 풀어주고 가르쳐주었기를 바랬다.
정부를 상대로 이렇게 집단 힘겨루기 싸움과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찬 시위로
대한민국을 흔드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하나님의 섭리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떨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자고,
피할 수 없고, 감당할 수밖에 없는 이 아픔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고,
성경에도 재난이나 사고를 통해서 한꺼번에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으니
"왜 그것이 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문은 갈지라도 원망하지는 말자고,
그 아픔을 속으로 삭히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진실한 종교인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권면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학생들의 위패에 십자가 표시가 된 유가족들만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와 국가를 향한 맹렬한 분노와 원한을 버린다면 이 사회는 훨씬 더 잠잠해지지 않을까?
교인들의 반발, 교인들의 다양한 의견이 무서워서, 교회가 말로써 말이 많아서 시끄러워질까봐
그런 민감한 사안에는 아무런 말도 않고 침묵을 지키는 목회자들도 많다.
목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민감한 이야기는 다 빼고
그저 개념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타령이나 하고 만족하는 목사님들도 많다.
비난과 욕과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고 선지자적, 왕적인 역할을 회피하는 그런 목회자들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기독교 지도자로서 큰 인물이 없는 것 같다.
바른 말 하지 못하고, 또 반발이 있으면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침묵하고 수도승처럼 “저 세상의 일은 나는 모른다. 상관하지 않으련다. 그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믿고 축복받으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비난이나 욕먹기나 고난이 싫기 때문이다. 그저 모른 채 하고 있으면 편안한데
괜히 바른 말 한다고 나섰다가 혼쭐나는 게 겁나고 싫기 때문이다. 용감성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목사님들이 어떠한 상황과 이슈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풀만한
깊은 지성과 영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안산시의 목사님들은 각 교회의 성도와 유가족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이렇게 가르쳤는데도 화산보다도 더 큰 분노에 싸여 그 말을 듣지 않는
유족들도 성도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참된 신앙이 없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집단으로 집단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떤 재난이나 어떤 사고를 당했든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느리지만 역사를 운행하시고 다스려 가신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는다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나운 맹수같은 모습으로 정부와 지도자와 맞서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
목사님들이 개인적인 견해를 설교하거나 가르치면 분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역사를 해석해서 선지자처럼 가르쳐주면 된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고 성경을 믿는 교인들이라면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목사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바른 해석을 가지고 부화뇌동하지 않고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중심을 잡고 성숙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어디 이런 사고를 만나면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거세게 횡포를 부려도 좋다고
그 유사하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라도 나온 적이 있는가?
기독교의 문제 해결 방침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각(지성)으로도,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성령)으로도,
예리한 느낌의 감성으로도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의 최종 귀결점은, 확인점은 “그러는 너는 참 평안하냐? 옆에서 보는 사람도 평안하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평안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건 옳은 행동이고 사고이다.
얼마든지 민주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억울함과 분함을 호소하고 힘으로서도 분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무력이고 폭력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원한과 분노가 되어서 자신과 이웃을 망치고 손해입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미 있는 법과 원칙과 행정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허다하게 요구하고 학교에서 시위하는 것은 모든 규정과 기존 원칙들을 다 파괴하고
자기들 뜻대로 요구대로 움직여달라는 것인데...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평이고 자유함이라는 것이다.
자유는 질서이고 화평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님들중 일부는 왜 침묵할까?
왜 가만히 있고 웅크려있고 이 바람이 어서 지나가기만 바라고 기도하시는 걸까?
또 어떤 목사님들은 정부를 규탄하고 몰아세우는 것이 약자의 편에선 정의의 투사처럼
인식하고 한 장의 성명서나 낭독하고 그러시는 걸까?
또 어떤 목사님들은 유족들 모아놓고 기도회 한다고 “위로! 위로!” 하시는데
언제까지나 위로의 타령으로 그들을 옹호하고
성질 나쁘고 거센 어린애 그냥 놔두듯이 그렇게 오냐오냐 하시는 걸까?
지금까지 용기없고 두려워서 못했다면 때늦었지만
이제라도 목사님들은 성경으로 깊이 풀고 해석해주어 그들이 분노의 불꽃에 싸여
몸과 마음이 피폐하지 않고 더 온전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하고 지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