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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기행 8 정치선동의 원조 람세스 2세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회원 문예란
이집트 기행 8 정치선동의 원조 람세스 2세와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
여행 둘째 날이 8회째이군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번엔 순서도 정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주제를 잡아 씁니다. 한국일보 친구 문창재 형이 한 잡지에 기고하는 정유재란 유적지 답사기를 보면 심히 부끄럽습니다. 문형의 글은 구체적이 내용들로 가득 차 있고 게다가 유려한 문장입니다. 사진도 좋구요. 탐방 취재의 노력이 고스란히 들어납니다. 저의 글은 그저 휙 둘러보고 뭘 하나 건졌다 싶으면 두서없이 갈겨쓴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저의 글방 방장 왈, ‘문창재 씨는 사츠마바리(경찰 사건기자) 7년이나 했어!’ 하더군요. 7년 간 사건현장을 누비고 다닌 경력이 치밀한 현장 취재의 뒷받침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득 기자와 교수와 차이가 생각 나군요. 교수는 강의를 하며 기자는 취재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둘 다 글써먹고 사는 직업입니다. 차이점을 찾는다면, 교수는 교실 안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왕 노릇을 합니다. 논문은 적당히 써도 별로 타박을 받지 않습니다. 기자는 매일 매일 자기의 기사로 평가를 받습니다. 공식적 평가가 아니라 소속부처 부장, 차장을 물론이고 원고를 찬찬히 읽는 편집부나 교정부 기자들이 ‘오늘 아무개 기사 잘 썼더라’식입니다. 이게 무섭지요. 입소문은 소리 없이 편집국과 그 너머까지 퍼집니다. 그날 저녁 술자리에 좋은 안줏감이 되지요.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차이입니다. 본질적인 차이는 글을 쓰는 자세입니다. 기자는 부지런히 현장을 다니며 취재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대화는 이해를 넓혀줍니다.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쓴 기번(Edward Gibbon)의 말입니다. 반면 교수는 혼자 있는 게 좋습니다. 세미나나 학술대회에 부지런히 다니면서 여기에서 들은 말을 다른 세미나에서 자기 것 인양 읊어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건 독창적인 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 주제를 화두삼아 혼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고독은 창조의 산실입니다. 이 역시 기번의 말입니다. 날씨가 더워 일정이 아침 일찍 시작됩니다. 첫날 8시에 아침 먹고 곧 바로 출발하더니 둘째 날은 아침부터 4시 15분에 짐을 밖에 내어두고 5시에 출발합니다. 3일 동안 배에서 잘 것이라 필요한 것만 가방 하나에 챙겨두고 나머지는 호텔이 맡겨두었지요. 아침 식사로 상자를 하나 주는데 열어보니 빵 몇 개, 각종 과일, 그리고 음료가 들어있군요. 점심은 3시가 되어야 먹을 수 있다면서 배고플 때 버스에서나 공항에서 알아서 먹으라고 합니다. 오늘 일정은 빡빡하군요. 바로 카이로 공항으로 이동하여 남쪽 아스완 댐까지 가고 여기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부심벨(Abu Shimbel)로 갑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있던 람세스 2세의 유적을 강 맞은 편 높은 지대인 아부심벨로 옮겨 놓은 곳입니다. 아스완에서 280km 더 남쪽인 아부심벨은 수단 국경에서 40km 떨어진 곳이니 총 비행거리는 900km 쯤 되는 셈이죠. 아부심벨은 람세스 2세의 유적을 옮기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살지 않던 사막이라 하군요. 아스완-아부심벨까지 사막의 연속이군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푸른 띠는 나일강이겠지요. 주변에 옛날 강물이 흘렀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더군요. 마치 화성 표면에서 볼 수 있는 수억 년 혹은 수십억 년 전 강이었던 흔적과 흡사합니다. 지금 지구도 비슷한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일까요? 공항 주변에 피라미드 같은 게 많습니다. 모래를 쌓아 둔 것이라는데 가이드 하젬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모양을 좋아한다고 하군요. 가장 안정적인 형태라는 겁니다. 동양에서는 정족(鼎足), 세발 달린 솥을 안정된 자세로 치지죠. 아부심벨 역시 오래 동안 모래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1817년 스위스 출신 한 고고학자가 한 소년의 안내로 이 유적을 발견하고 그 소년의 이름을 따서 ‘아부심벨’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저도 모르는 복잡한 이집트 역사를 간단히 읊어보면, 아부심벨은 고대 이집트 ‘19왕조’ 파라오 람세스 2세(Rameses II, 1303-1213BC)가 건설한 신전입니다. 다음 날 보게 될 룩소르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과 함께 람세스 2세의 대표적인 신전입니다. 그의 치세 동안 이집트는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벌여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으로는 누비아 북으로는 팔레스타인까지 세력을 확장하죠.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최고의 파라오라 합니다. 자기 자랑을 펼치는데도 최고인 듯합니다. 파라오와 왕이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왕은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죽는 유한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의 권력자일 뿐입니다. 파라오는 신입니다. 영생을 한다는 것이죠. 물론 현세에서도 무한한 권력을 누립니다. 왕이 권력은 잘못 행사하면 도전할 수 있겠지만 파라오는 신이라 무오류적,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권위에는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300년간 지배한 것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에서 파라오로 추대 받은 유산 덕분이라 합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로 들어와 권좌를 차지해도 이집트인들은 그를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로 쉽게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를 66년간(1279-1213BC) 통치했습니다. 중국 청의 황금기인 강희제와 건륭제가 연상됩니다. 그 중간에 있던 옹정제는 재위기간이 13년이라 짧죠.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람세스 2세 이름이 붙어 있군요. 카이로에서 우리가 묵은 호텔도 ‘힐턴 람세스 2세 호텔’입니다. 우리에겐 고구려의 장수왕(69년 재위)이 있지만 국내외의 도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진 못했습니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인물화는 모두 옆모습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왜 인간의 모습을 옆에서 본 듯이 그렸을까요? 많은 분들이 일찍부터 가졌을 법한 의문입니다. 혹자는 당시 수준이 앞모습을 그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럴 리는 없지요. 앞모습 조각상들이 수두룩한데 이 보다 쉬운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까요? 옆모습이지만 허리는 잘록하고 8등신이라 현대적 감각이 살아 있습니다. 국내에서 여러분에게 물어보았으나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가이드 하젬에게 두 번 물었습니다. 인간은 신을 바로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옆얼굴을 그린 것은 인간이 신을 옆에서 본 그림이라는 말입니다. 옆으로 마주 본 두 사람은 모두 신이랍니다. 신들 간에는 마주 보는 것이죠. 그리곤 공물이나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하젬의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가군요. ‘출애급기’에도 ‘신을 보고 살자가 없다(19:21, 33:20)’가 있다지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이집트 사람들은 신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집트인이 어느 신-나는 그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후세 연구가들이 붙인 각주에서 이들 신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주로 오시리스입니다. 파라오는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받들어졌습니다. 피카소의 그림 중 옆얼굴을 그린 게 제법 있지요. 피카소가 이집트의 고대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요? 인간세상을 떠나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바램에서 일까요? 중국이나 조선에서 왕이나 부모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그대로 쓰지 않고 칸을 비워두거나 다른 글자로 쓰는 것과 비슷하죠. 피휘(避諱) 라고 하던가요?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상용(常用)하지 않는 글자로 이름을 지어 국민들이 피휘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했다는 겁니다. 조선말의 풍운아 김홍집(金弘集)도 청 건륭제의 휘가 ‘홍력(弘歷)’이라 가운데 자 ‘홍’을 ‘굉’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김굉집(金宏集)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남의 나라 임금의 이름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던 세상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극 드라마에서 왕에게 비스듬히 옆에서 절을 하는 것도 있지요. 전문가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부심벨 신전을 볼까요. 내가 아는 유일한 신인 매의 신 호루스 등 작은 입상들이 머리 위에 줄지어 선 입구에 20m에 이르는 4명의 람세스 2세가 각각 상, 하 이집트를 의미하는 의상이 입고 버티고 있습니다. 대신전이라 부릅니다. 왼쪽 두 번째의 좌상은 부서졌지만 떨어진 몸체가 바로 아래에 보존되어 있었다 하군요. 신상을 옮길 때 부주의해서 파손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하젬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서져 내린 것이라 합니다. 아부심벨이라 하면 바로 이 좌상들을 연상하죠. 안으로 들어가면 오시리스의 모습을 한 람세스 2세의 입상 8개가 기둥으로 버티고 있는 방이 있는데 벽에는 유명한 카디쉬(Kadesh 혹은 Qadesh) 전투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방 안에는 람세스 2세의 왕비의 모습을 한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햇빛이 내부 깊숙이 들어오는 2월과 10월 21일 축제가 열린답니다. 신전에 대한 설명은 이정도로 마칩니다. (사진 1) 람세스 2세의 부인 사랑이 유별난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오면 조금 떨어진 곳에 소신전이라 부르는 왕비 네페르타리의 신전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전보다는 작지만 여기에는 람세스 2세와 왕비의 입상이 같은 크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의 지시로 이렇게 만들었겠지만 왕비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인지, 왕비가 권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던지, 이 지역이 한 여신의 영역이라 여성을 존중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람세스 2세가 늙어 힘을 못 쓰게 되자 왕비가 자의적으로 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람세스 2세는 희대의 정치 선전-선동가임이 분명합니다. 나폴레옹이나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가 그의 계보를 이었다고 하겠지요. 대신전안에 있는 카디쉬 전투의 그림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전투는 기원전 1274년경 람세스 2세가 오늘날 시리아 일대를 지배하던 히타이트제국과 시리아-레바논 국경 근처에 있는 홈스 호수(Lake Homs) 상류인 오론테스 강 일대에서 벌인 전투입니다. 당시 기록에는 오늘날 시리아의 제2도시 알레포(Aleppo)가 나오고 또 람세스 2세가 다마스쿠스 방향 남으로 퇴각했다고 합니다. 홈스 호수가 레바논의 북쪽 끝 트리폴리에서 30도 정도 동북에 있으니 전쟁터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람세스 2세가 고전하다가 반격에 성공하여 전세는 균형을 이루어 승패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이 이루어지고 양군은 철수합니다. 카디쉬 전투는 고대 두 제국이 패권을 다툰 충돌입니다. 또 전투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전투입니다. 그러나 람세스 2세의 기록과 대신전의 벽화만 보았다면 이집트의 승리를 믿었을 것입니다. 벽화나 부조에는 람세스 2세가 적의 왕 머리털을 잡고 목을 치려는 모습을 비롯하여 적을 밟고 찌르는 모습, 마차를 타고 가면서 활을 쏘는 모습, 항복한 적들이 자비를 구걸하는 모습, 또 지나치게 큰 성기를 노출하여 남성성을 과시한 것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중 가장 희한한 것은 자기가 모는 마차 옆에 강아지 크기의 사자가 뛰어가는 그림입니다. 수사자인데 말의 무릎에도 미치지 못하게 그렸네요. 사자를 마음대로 부린다는 파라오의 위용을 과시한 겁니다. 그림들만 보았다면 누가 람세스 2세의 승리를 의심하겠습니까? 다행히 히타이트 측의 점토판 기록이 남아있어 대조해본 결과 무승부라는 결론입니다.(사진 2) 람세스 2세는 이집트로 귀한하면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 제국이 남으로 내려와 이집트를 더욱 압박하여 이집트의 영역은 오늘날 가나안(Canaan) 아래로 축소되었다는 겁니다. 이집트는 히타이트의 남진을 저지하는 선에서 만족했다는 해석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되고 람세스 2세는 승리에 대한 자신이 없어지면서 더 이상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죠. 이 결과 양측은 약 15년 뒤인 기원전 1269년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조약문은 ‘이집트는 히타이트를 공격하여 그 영토를 빼앗지 않고 히타이트도 이집트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히타이트 기록의 원본은 은으로 제작되었다는데 점토판 사본이 제국의 수도였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1906년 발굴되어 오늘날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에 대한 기록이라는 상징성으로 터키 정부가 그 사본을 1970년 9월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에서 기증하여 지금 유엔본부 벽에도 걸려있다고 하네요. 이집트 기록은 파피루스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국제정치사에서 이 전투의 의의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사진 3) 람세스 2세는 이후 서로는 리비아, 남으로는 수단 누비아 방면으로 군사원정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많은 기념비를 남기죠. 남쪽 수단 국경부근인 아부심벨에 자신의 신전을 만든 것은 이 지역에 사는 누비아족에 대한 경고라는 겁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한 인물이 연상 되군요.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원정은 비문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기록한 것이라 스스로 자랑한 것은 아닙니다. 또 람세스 2세와 같이 화려한 신전을 짓고 과장된 기록을 남길 만큼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생몰년도가 374년부터 412년이니 36살에 죽었고 재위기간은 21년입니다. 90살까지 산 람세스 2세에 비하면 안타깝습니다. 이제 객관적 관점에서 그의 비문을 봅시다. 과장이 없을까요? 그는 백제를 패배하여 남은 ‘잔당’이라는 경멸적 의미인 백잔(百殘)으로 부르고 신라를 신복, 신하로 복속시켰고 신라의 국성(國城)인 수도에 가득 찬 왜적을 물리쳤다고 자랑스레 말합니다. 몽고방면으로까지 원정군을 보냅니다. 이 비석을 읽으면 속이 후련해집니다. <삼국사기> 백제나 신라 편에는 그의 원정을 추정할 수 있는 글들은 있지만 비석과 같은 완전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중국학자들은 그의 원정이 남쪽 백제로만 향했다고 말하죠. 마치 람세스 2세가 카데쉬 전투 이후 히타이트 제국에 막혀 북으로 원정에 나서지 않은 것과 유사합니다. 문무왕이 수중 능을 만들어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는 염원도 아부심벨에 세운 람세스 2세 사원이 가지는 의미와 비슷하군요.(2018.4.24) 사진 1. 아부심벨 람세스 2세 좌상 앞에서 사진 2. 카디쉬 전투에서 마차를 모는 람세스 2세. 사자를 강아지 크기로 그렸다. 사진 3. 1970년 9월 24일 터키대사가 우탄트 사무총장에게 카디쉬 평화협정 모조판을 기증한다. UN PhotoTeddy 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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