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친 나눔과 베풂, 시흥 신안 주씨 삼세적선비
공간으로 읽는 근대문화 역사유산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신안 주씨 가문의 주석범-순원-인식과 영식 형제로 이어지는 3대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까지 한 세기 이상 선행을 펼쳤다. 해마다 궁핍한 이웃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영농 자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다. 1917년 신안 주씨 일가의 나눔과 배려에 감사하는 뜻에서 시흥 주민들이 자진해서 한푼 두푼 의연금을 모아 ‘삼세적선비’를 세웠다. 주민들은 1922년 비석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번 모금을 통해 비각을 건립했다. ‘주영식 자선기념비’의 경우 주영식 역시 베풂과 나눔을 실천했으나, 적장자가 아니어서 1924년 별도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에 가면 신안 주씨(新安朱氏) 3대의 선행을 기리는 비석을 볼 수 있다. ‘신안 주씨 삼세적선비’와 ‘주영식 자선기념비’다. 삼세적선비는 1917년 세워졌고, 자선기념비는 1924년 세워졌다. 두 비석에는 비각(碑閣)까지 건립되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3대가 인근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감동한 이웃들이 자진해서 비석과 비각을 만든 사례는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두 비석과 비각은 2005년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시흥 삼세적선비
시흥 삼세적선비
삼세 적선비의 주인공은 주석범(朱錫範 · 1815~1880)과 아들 주순원(順元 · 1836~1895), 손자 주인식(寅植 · 1862~1945)이고, 자선기념비가 기리는 인물 주영식(英植 · 1867~1952) 역시 주석범의 손자다. 주씨 삼대는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인근 동리의 양식 떨어진 농가에 양곡을 대주고, 연말마다 세찬(歲饌)을 나누어주는 선행을 이어서 실천했다. 주씨네는 아침마다 뒷산에 올라 아침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집에 양곡을 보내주곤 했다고 전해진다. 영농 자금도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주었다고 한다.
주석범의 재산 형성과정이나 재산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주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토지 거래 문서[明文]가 80여 건에 이르는 점으로 미루어, 경기도 시흥시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집안으로 추정된다.
손자 대인 주인식과 주영식의 행적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주인식이 38세이던 1899년부터 일기를 써서 남겼기 때문이다. <매일록사(每日錄事)>라고 불리는 주인식의 일기에는 집안의 대소사와 사업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정세와 사회상도 드러나 있어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의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시흥 삼세적선비
주인식은 경성으로 이주해 17세 무렵부터 기름 장사로 재산을 모았다. 이재에 밝아 20대 후반에는 상당히 재산을 불렸다고 한다. 주영식도 형과 함께 사업을 했다. 주인식과 주영식 형제는 돈이 모이는 대로 농지를 사들였다고 한다. 그들은 토지 가격과 쌀 가격의 등락을 꼼꼼히 살펴 전답을 사들였는데, 매입한 농지는 날로 불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주씨네 집안 땅을 밟지 않고는 시흥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주씨네 집안 토지는 충청도 곳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주인식은 치부(致富)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1906년부터 경성 만리현[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에서 균명의숙을 운영하기도 했다. 균명의숙은 1910년 사립 균명학교가 되었고, 주인식은 균명학교의 감독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삼세적선비는 마을 주민들이 1917년부터 자발적으로 모금 운동을 벌여 세워졌다. 모금에는 모두 104명이 참여했다. 대부분 당시 돈으로 1~2엔을 냈고, 가난한 주민은 40~60전을 내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거두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삼세적 선비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기리는 삼세,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모두가 어질어서, 기쁘게 주고 베풀기를 좋아한 지 어언 팔십여 년이 되었네. 선을 쌓으면 경사가 있다는 것을 하늘은 어기지 않으리. 번성하고 번성하여 복이 영원히 이어지소서.”
자선기념비는 주영식 역시 아낌없이 선행을 베풀었으나, 직계 장자가 아니어서 7년 뒤 별도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삼세적 선비의 경우 1922년 다시 한번 모금 운동을 통해 비각이 건립되었고, 자선기념비도 후에 비각을 만들어 비석이 비바람에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비석과 비각은 건축사적 의미보다는 하층 백성들이 힘겨운 삶을 살았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나눔의 정신을 솔선수범한 삼대의 행적을 증언하는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비석 주변은 경기도 시흥시가 2004년 작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참고자료
단행본이승언, 시흥시. 시흥의 문화재와 유적. 시흥: 시흥시, 1995.
단행본이승언, 시흥시. 시흥의 인물과 행적. 시흥: 시흥시, 1995.
단행본시흥시. (고서 고문서로 보는) 조선시대 시흥. 시흥: 시흥시, 2006.
정기간행물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시사." 시흥시사 1-10 (200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