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1. 개요
3남 정몽근 (1942 ~ )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 妻 우경숙 (1951 ~ )
→ 1남 정지선 (1972 ~ ) 현대백화점그룹 대표이사 회장/ 妻 황서림 (1972 ~ )
→→ 1남 정창덕 (2004 ~ )
→→ 1녀
→ 2남 정교선 (1974 ~ ) 현대백화점그룹 대표이사 부회장 / 妻 허승원 (1975 ~ )[29]
→ 3남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백화점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명예회장.
현대백화점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3세에 가장 빠른 2006년에 승계가 이뤄지기도 했다. 정몽근의 당시 나이는 64세로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당시 장남과 차남에게 각각 유통과 비유통 부문을 나눠 승계한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공동경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2. 상세
1942년 4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의 3남이다.
현대그룹의 유통업 계열사인 금강개발산업을 맡아서 현대백화점을 키웠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현대백화점그룹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현대백화점그룹의 명예회장이다. 현재 현대백화점그룹의 회장은 장남 정지선, 부회장은 차남 정교선이 맡고 있다.
형으로는 정몽필, 정몽구, 동생으로는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일, 정몽윤이 있다.
3. 학력
한양대학교 토목공학 학사
경복고등학교(36회)
형 정몽구와 고등학교-대학교 동문이다.
4. 경력
2006.12 ~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2000.04 ~ 2006.12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1987.01 ~ 2000.03 금강개발산업 대표이사 회장
1974.01 ~ 1974.04 금강개발산업 이사
1968.03 ~ 1973.12 현대건설 근무
정주영 1녀 정경희
1녀 정경희 (1944 ~ ) / 夫 정희영 (1940 ~ ) 선진종합 회장
→ 1남 정재윤 (1969 ~ ) 선진종합 부회장[32] / 妻 김지향 (1971 ~ )
→ 1녀 정윤미 (1971 ~ ) / 夫 박승준 (1967 ~ ) 이건창호 사장
→ 2녀 정윤선 (1975 ~ ) / 夫 남석우 (1972 ~ ) 남영비비안 회장[33]
정주영 4남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1. 개요
4남 정몽우 (1945 ~ 1990) 현대알루미늄 회장 / 妻 이행자 (1945 ~ ) 前 고려산업개발 고문
→ 1남 정일선 (1970 ~ ) 현대BNG스틸 대표이사 사장 / 妻 구은희 (1976 ~ )
→→ 1남 정창현 (1998 ~ )
→→ 1녀 정진주 (1999 ~ )
→→ 2남 정창민 (2001 ~ )
→2남 정문선 (1974 ~ ) 현대BNG스틸 부사장 / 妻 김선희 (1974 ~ ) 본태박물관장
→→1녀 정진원 (2004 ~ )
→3남 정대선 (1977 ~ ) HN] 사장 / 妻 노현정 (1979 ~ ) 前 KBS 아나운서
→→ 1남 정창건 (2007 ~ )
→→ 2남 정창성 (2009 ~ )
정몽우가 일찍 작고한 이후 그 슬하의 자식들은 큰아버지 정몽구 회장이 후견하여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현대BNG스틸을 경영하고 있다.
1945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 에서 태어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4남이다.
( 정의선, 정지선, 정교선에게는 작은아버지이고 정예선에게는 큰아버지이다. KBS아나운서 노현정에게는 시아버지가 된다. 셋째아들 정대선과 결혼.)
정몽우는 고교시절에 또래 친구들과 패싸움 도중에 머리를 크게 다치고 난 후 잠깐 우울증을 앓았었는데, 일상생활이 아주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중앙대학교에도 들어가고 연애결혼으로 숙명여대 퀸카 출신인 이행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큰아들 정일선이 4살이 되던 해인 1974년부터 후유증 등이 재발하기 시작하여 이때부터 정신질환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튼 정신질환으로 작은 일도 못 맡자 아버지 정주영은 그런 정몽우를 굉장히 못마땅해 했으며 정몽우는 수많은 자신의 형제들이 너무 유능해서였는지 반대급부로 자신이 무능한 것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내 자식이라도 자리를 내 줄 수 없다고 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큰형이자 정주영의 장남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죽자 그나마 정몽우에게 내준 게 고려산업개발 사장 자리다. 1987년 현대알루미늄 회장도 맡았으나 직함만 회장이었을 뿐 실제로 경영은 처남인 부회장 이진호가 맡았고, 본인은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상 바지사장이었고, 당연히 정신적으로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1990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남서울워싱턴호텔에서 음독자살하였다.
2. 학력
중앙대학교 영문학 학사
오산고
배재중학교
3. 정신질환 증세
정몽우가 1974년 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갑자기 차도에 뛰어들어서 승용차와 부딪힐 뻔한 적이 있다.
사망 1년 전인 1989년 6월 정몽우가 정신병원에서 직원과 산책도중 또 차도에 뛰어들어 지나가던 승용차와 부딪혔다.
4. 경력
1970년 ~ 1974년 현대건설 입사
1974년 ~ 1977년 현대건설 부장
1977년 ~ 1979년 현대건설 상무
1979년 ~ 1987년 한국포장건설 사장
1987년 ~ 1990년 고려개발산업 사장
1990년 3월 ~ 1990년 4월 24일 현대알루미늄 회장
5. 사망
정몽우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고 난 뒤부터 우울증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4월 23일 오전 정몽우는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간다 하고 외출증을 끊어 병원을 나왔다고 한다. 밖으로 나와서 정몽우는 차를 몰고 처남 이진호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처남과 만나서 테니스를 2시간 정도 치고 정몽우는 서울 강남 역삼에 있는 한 호텔에 가서 호텔 직원에게 오늘 하루 투숙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금 20만 원을 맡기고 키를 받고 객실로 올라가 거기서 옷을 갈아입고 1층에 있는 호식당으로 내려와 혼자서 횟거리와 몇 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정몽우가 소주 몇 병을 먹어 치우는 것을 본 한 요리사가 정몽우에게 너무 폭음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니 정몽우는 “기분 좋을 때도 한 잔 마시고 괴로울 때도 한 잔 마시는 거 아니냐.”라고 매우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를 다 마친 정몽우는 검은 봉지를 들고 객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 다음 날 아침 한 여직원이 정몽우가 투숙해있는 객실를 청소하기 위해 문을 두들기는데 인기척이 없어 문을 따고 들어가니까 정몽우가 쥐약을 입에 문 채 응접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숨져 있었다고 한다. 여직원은 비명을 지르면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하여 수사를 했는데 타살 흔적이 없어 자살로 종결지었다. 또 정몽우 지인은 자신이 평소에 아버지 정주영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는 것을 자책하고 있던데다가 평소에 애착이 있던 현대중공업의 노사분규 부담까지 갖게 되어 정신적으로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참고로 정몽우가 사망한 지 13년 뒤인 2003년 바로 아랫 동생인 정몽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정주영 5남 정몽헌 (현대그룹)
1. 개요
5남 정몽헌 (1948 ~ 2003) 현대그룹 회장 / 妻 현정은 (1955 ~ ) 현대그룹 회장
→1녀 정지이 (1977 ~ ) 현대무벡스 전무 / 夫 신두식 (1974 ~ ) 링크자산운용 부사장
→→1녀 신혜윤 (2013 ~ )
→2녀 정영이 (1984 ~ ) / 夫
→1남 정영선 (1985 ~ )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 / 妻
현대그룹을 승계받았다. 하지만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계열분리되었고 대북 사업을 영위하던 현대아산도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 중단의 여파로 경영이 악화된데다 현대상선도 매각되면서 현대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중견기업으로 몰락하였다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그룹 제4대 회장.
1948년에 정주영의 5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졸업 당시 수석이었다)를 졸업하였다. 원래는 문학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정주영의 뜻에 따라 이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페어레이디킨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각각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현대상선 대표이사, 1992년 현대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1998년 현대그룹 회장이 되면서 대북사업을 수행하였다. 2000년 둘째 형 정몽구와의 왕자의 난 이후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2003년 불법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서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그 해 8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자살하였다.[2] 장례식 당시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서 조전을 보냈으며, 금강산 지구에서 분향소가 열리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현대그룹 회장직은 아내인 현정은이 이어받았다.
2. 이야깃거리
유난히 축빠가 많은 현대가(家)에서(아버지 정주영은 현대중공업 사내 축구대회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고, 바로 아랫동생인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낸 세계 축구계 거물이며, 사촌동생인 정몽규는 사촌형에 이어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됐을 정도로 현대가는 축구와 인연이 깊다.)
동생 정몽윤과 함께 야빠였다.(현대해상화재보험이 넥센 히어로즈의 창단 이후부터 2015년까지 꾸준히 스폰서를 맡아왔던 이유도 바로 정몽윤 덕분이기도 한데, 대한야구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4년까지는 사내 사회인 야구팀 1루수로 직접 뛰기도 했다. 한국실업야구팀이었던 현대해상야구단을 2003년 실업야구가 해체되기 전까지 운영한 것도 정몽윤의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 유니콘스도 정몽헌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덕에(인천고를 막 졸업한 대형 유격수 박진만과 해태 타이거즈 지명을 받았던 연세대학교 출신 내야수(당시 포지션) 박재홍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거액이 동원됐다. 두 사람에게 쥐어준 신인 계약금 총액만 해도 7억1000만원인데 박진만에게 지불한 신인 계약금 2억8000만원은 당시 고졸 야수 역대 최고대우 수준이었다.)
팀 성적이 매우 좋았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구단주를 잃은 현대 유니콘스는 비참한 말로를 겪고 만다. 구단의 모기업인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영난이 심해지면서 하이닉스와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의 구단 운영 지원이 끊어졌다
(적어도 2005년까지는 십시일반 형태로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조금씩 지원해줬지만, 2006년부터는 지원을 아예 끊어버렸다. 더 심각한 것은 정몽헌의 부인인 현정은이 2005년을 끝으로 아예 구단 운영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생전에 남편이 열렬한 야구팬이었고, 남편이 유니콘스 구단 운영에 열정을 바쳤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다.)
서울특별시 연고지 입성을 위해 기존 서울 연고 구단에 줬어야 할 연고지 이전 비용 54억원을 모기업 하이닉스반도체가 가로챘으며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권을 취득하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54억원을 줬고 현대는 그 54억원을 반으로 쪼개 서울 연고권 분할에 대한 권리 보상 목적으로 LG와 두산에 주기로 했으나, 하이닉스가 이 돈을 가로채면서 서울 연고권을 취득하지 못했다. 결국 이 때문에 유니콘스 구단은 2003년부터 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연고지 출신 1차 지명 신인을 뽑지 못하게 된다.)
26년간 적립해 온 KBO의 야구발전기금마저도 홀라당 써버리는 난리통 끝에 결국 해체되었다.
현대엘리베이터 이천공장 안에 있는 테스트타워인 현대아산타워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몽헌 R&D센터가 있다.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배우 김갑수가 정몽헌 회장 역을 맡았는데, 간지나는 연기로 완벽하게 배역을 소화했다는 평이다. 현대그룹측의 초청으로 정몽헌 회장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정주영 6남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1. 개요
6남 정몽준 (1951 ~ )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 / 妻 김영명 (1956 ~ )
→1남 정기선 (1982 ~ ) 현대중공업 부사장 겸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 부사장 / 妻 정현선 (1994 ~ )
→1녀 정남이 (1983 ~ ) 아산나눔재단 상임이사 / 夫 서승범 (1975 ~ )
→2녀 정선이 (1986 ~ ) / 夫 백종현 (1983 ~)
→2남 정예선 (1996 ~ )
현대중공업그룹을 물려받았다. 정주영의 정치적 야망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정몽준은 1988년 정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맡았다가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별다른 그룹 내 직함 없이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물러났다. 하지만 최측근을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장남 정기선이 아버지를 이어 그룹 전체 승계를 위한 전방위적 움직임에 나서고 있다.
정몽준은 한국의 정치인, 기업인, 축구행정가다.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6남으로, 現 현대중공업그룹의 총수.(현대중공업은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고 있다. 정계 입문 전인 1988년까지는 정몽준이 현대중공업 회장이었다. 이 당시는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되기 전이다.)
그리고 전직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던 울산 동구에서 5번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13·14·15·16·17대)됐다가, 18대와 19대 총선 땐 서울 동작 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4년 서울시장선거에 나갔다 낙선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당도 탈당하면서 사실상 정계은퇴.)
또한 축구행정가로서 한국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축구협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여담으로 과거 언론 등에서 국회의원들의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의 조 단위의 재산 때문에 평균치가 급격히 오르는 탓에 자료가 곡해될 수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정치인이 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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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초등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나름 학력 콤플렉스를 가졌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은, 정몽준이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가자 다른 재벌 총수들을 만나면 그렇게 아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정주영의 다른 자녀들도 학력이 준수한 편이다. ●한양공대: 정몽구(차남), 정몽근(3남). ●연세대학교: 정몽필(장남, 당시엔 연희대학교), 정몽헌(5남), 정몽일(8남). ●중앙대학교: 정몽우(4남). 정몽윤(7남)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나왔다. 다만 연고대를 포함한 사립대는 당시 재벌들이 운동부나 해외 거주 특례 등으로 편법적으로 입학하는 사례가 있었고, 해외 대학의 경우는 기여입학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대는 2000년대 이전에는 빼도박도 못하고 공부로 입학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벌 2세 중에서도 서울대를 나온 경우는 정말 인정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정몽준과 삼성가의 이재용. 실제로 재벌 2세, 3세들은 국내에서 대학을 나온 경우 연고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흔하지만, 반면 서울대를 나온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 덕분인지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부친인 정주영과 술집에 가서 자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은 술값을 그 천하의 정주영한테 덤태기 씌우는 용자짓도 했다고 한다.정주영 본인도 어이없어 했다고.
(다만 정몽준은 정실인 변중석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찬밥대우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정몽준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부턴 대우가 달라졌다는 카더라성 후문.)
정주영은 정몽준이 머리가 좋다보니 현대그룹을 물려줄 생각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사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정치란게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본인도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으니 아들의 꿈을 어느정도 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랬던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못 이뤘다. 대신 현대건설에 일반 사원으로 입사하여 사장까지 승진했던 샐러리맨이 대통령이 되었다.
2.1. 병역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대학 재학중 대한민국 육군 ROTC로 입단,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사실 범 현대가에는 남자는 대체로 꼼수쓰지 않고 군대는 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정주영 때문에 생겼다. 뭔 소린고 하면, 정주영은 평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대선 출마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회창의 예가 있듯이 자식들의 병역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선에 출마해서 당선되기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전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예비역 병장에 장교 및 부사관 출신이니... 때문에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서 일족들의 병역부터 제대로 관리해왔다는 후문.
(예외적 케이스로 정의선은 담낭 절제술로 면제 판정을 받우(어머니가 담낭암으로 사망하여 가족력이 있다.) 바람에 현재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앞에서는 병역 관련 얘기를 꺼내지 않는게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한다.)
정몽준의 장남(정기선)도 육군 학군사관(ROTC)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1군단 특공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전과장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특공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 & 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마 선거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3.1. 2002년 이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하고 있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전후로 해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1992년 초에 아버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당연히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재선되었고 당 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대선 직전 초원복집 사건을 기획했으나, 지역감정 역풍으로 아버지의 득표를 오히려 까먹었고 본인은 대선 후 범인도피죄로 기소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그나마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아 의원직 상실은 면했다.
통일국민당이 와해된 후로는 당적을 갖지 않고 200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무소속, 1인정당 소속으로 독고다이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1998년 정권이 교체된 후로는,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울산에서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 쪽의 손을 들어주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14대 대선 후 여당에 찍혀 현대그룹이 강도 높은 세무조사, 대출 제한 등 정치보복이라 의심할만한 사태를 겪자 현대가는 DJ에게 줄을 댔고, 실제 DJ가 대통령이 되자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정주영 회장이 북에 소떼 방문도 하는 등 제법 득을 봤다는 것이 세간의 중평이다.)
3.2. 화려했던 리즈시절 그리고...?
상기했듯 정몽준은 국회의원까진 몰라도 대통령과는 인연이 멀어보였는데,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바로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그가 큰 힘을 썼기 때문. 게다가 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축구협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를 적극 후원한 그의 입지 역시 급격히 올라가 몇개월만에 유력 대선 후보에까지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선 당시 유력대권주자였던 노무현을 제치고 이회창을 위협하기도 했을 정도.
이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처음에는 당시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자신처럼 붕 떠버린 동병상련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 했으나[17], 식사 자리에서 박근혜로부터 다짜고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 강신옥를 내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결국 측근이던 강신옥이 곁을 떠났으나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애초에 정몽준과 박근혜는 성향이나 결이 좀 달랐던 것도 있어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콜하자 다시 복당해 버린다
그 후 후단협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여론조사 방식에 따른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단일화 후 이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선거운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다.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 감정 문제 등이 거론된다.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 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이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 측근인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진다.그 후 정몽준은 즉시 지지철회 오더를 내린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두다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선거 결과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고, 이후 뒤통수 이미지까지 씌워지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다음 대선은 한나라당이 낙승하는 선거였으니 정몽준이 차기가 되었더라도 힘들었을 수 있지만, 미래야 바꾸기 나름이고 실제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며 입지를 다졌다면 차차기는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참여정부 총리를 지낸 고건 총리가 막판까지 유력 대선주자로 평가받은 것을 보면.. 어쨌든 서로 간의 감정을 정산하는 문제는 이긴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굳이 선거 전날에 판를 깨야 되겠냐는 비판이 거세지며 정몽준은 뭔가 쪼잔한(...) 인간처럼 되어버려 향후 정계 입지도 확 줄어버리고 만다. 여기엔 후술되어있듯 버스비 발언 등 본인의 실언도 한몫했다.
이렇게 월드컵으로 얻은 정치적 위상 및 입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보낸 후, 국민통합21을 이끌고 17대 총선에 나섰으나 본인 1명만 당선된다. 결국 국민통합21을 해체하고 다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7년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3.3. 한나라당 입당 이후
한나라당 입당 후엔 계파색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친이계로[분류되었고,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선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를 측근인 안효대에게 넘기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 거물이었던 정동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동작구을 지역구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보도되었으나 투표함을 까고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정몽준이 승리했다.
2008년 8월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고, 2010년 박희태 대표가 사퇴하면서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직도 승계하였다. 다만 이 시기 후술된 버스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대권 욕심도 여전히 있었는지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와 대립했는데, 박근혜가 2011년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기고문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교수가 대필한 것이다"라고 깎아내리거나, "식자층에선 박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당이 유신(독재)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등 독설에 가까운 멘트를 날려 친박 세력에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허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경선에서도 큰 바람은 일으키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다.
2012년 19대 총선에선 동작 을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상대 후보는 17대 국회 당시에 이 지역구의 의원이었던 현대자동차 사장/현대카드 회장 출신의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 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김황식, 이혜훈 후보와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시장 박원순에게 큰 표차로 참패하면서 낙선하고 만다. 당시 모든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이었고, 정몽준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정치 인생 최초의 낙선이라 더더욱 뼈 아팠을 듯 하다. 더군다나 대선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직 중 하나인 서울시장 선거였으니..
패배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 문제, 그리고 당 차원에서 너무나 어설펐던 네거티브 전략 등이 있다. 박원순이 포스터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쓴 건 떳떳하지 못해서라고 하는가 하면, 박원순 부인 잠적설을 꺼내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무리수같은 네거티브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화젯거리 문서 참조.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아래의 논란에서도 설명하는 가족들의 팀킬이었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했다.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안효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안효대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울산연합 계파인 김종훈에게 패배하여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진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개혁보수신당으로의 합류는 부인했으며,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는 상황. 이제는 나이도 70이 다 되어가는 만큼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박원순 사망 당시 조문을 하면서 오랜만에 정치뉴스에 올라오기도 했다.
4.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 싱크탱크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단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인데다가 오랜 국회의원 경력과 피파부회장 경력 때문에 글로벌인맥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헨리 키신저와 매우가깝고 마이클 블룸버그와도 교분이 있다. 조바이든, 푸틴, 시진핑을 위시해서 전세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한국사에 이 정도 인맥이 또 있을까....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쓴 책이 아니고 대담집이다. 키신저를 포함해서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도널드 럼스펠드 같은 유명 인물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했다. 헤리티지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도 있다.
국제적 활동의 베이스는 아산정책연구원이다. 매년 아산플래넘이라는 컨퍼런스를 개최하는데 거의 800명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다. 단순히 국제 인맥교류가 아니고 콘텐츠 기반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비중을 확보하는데 기여한다고 보면 된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이사장인데 자문위원단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은행 총재 폴 월포위츠, 전 브루킹스연구소 소장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있다.
5.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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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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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역 국회의원 당시, 재산 1위를 항상 고수했다. 알려진 재산 총액은 2조원대다. 대선 출마 경력까지 생각하면 사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바로 아래(?)에 있는 김세연(정치인), 안철수, 박덕흠도 어디가도 꿀리지 않을 자산가지만 정몽준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워낙 혼자서 튀는 수치라서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 정몽준을 제외한 국회의원 총 재산 평균은 대충 30억 원 정도 하는데, 정몽준을 평균에 포함시키면 거의 100억원으로 뻥튀기(!)된다. 2조 원을 국회의원 총 인원인 대략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그러니까 다른 국회의원 재산을 다 합쳐도 정몽준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재산 때문에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공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주식 및 해당 기업이 전혀 무관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주식을 비롯한 자산을 3,000만원만 남긴 채 모두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 신탁 처분해야 한다. 이를 주식백지신탁제도라고 한다. 처분이라 해서 나머지 재산을 버리라는 건 아니고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직무와 관련없는 분야의 주식으로 바꾸거나 하면 된다만, 정몽준이 가진 정도의 자산이면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과 손실을 고려했을 때 그냥 안하는 게 낫다는 것.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박사 전공 국제정치학도 살릴 수 있는 외교, 통일 분야에서나 활동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뇌물 받을 일이 없다'는 평가 내지는 농담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돌았다.
참고로 재산 꼴찌는 성완종으로 나와있는데, 성완종 게이트 당시에 그가 전달한 뇌물의 액수나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순 뻥이다.
6.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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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역사에서 정몽준의 공로는 그야말로 지대하다.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간 47~50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전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데다, 당시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는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더 나아가 2002년 자체를 생각해보면 태극전사가 이룬 “4강 신화”가 대부분 먼저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홀로 고군분투하여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 정몽준의 “원맨쇼”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월드컵의 감동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그 후의 한국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섰고, 그 결과 축구 선진국 못지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계속 조별리그 탈락만 전전하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에서는 원정 최초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룬다.
또 1994년~98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1~ 4대 총재를 맡았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도 한국 축구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몽준과 현대家의 영향력이 없다면 한국 축구계는 지금처럼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이는 정치인 정몽준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명백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 울산 현대 대주주로서 꾸준히 국가대표와 해외파를 배출하는 강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 2016년까지는 그룹 산하 현대오일뱅크가 K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연간 35억원씩 후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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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AFC 회장 선거에서 정몽준 지지파가 떨어졌을 당시 사진으로 정몽준의 침울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미소짓는 제프 블라터. 자세한 내역은 항목 참조.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선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그의 몰락은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있으나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만 신경썼다는 지적도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 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2012 런던 올림픽까진 23살 이하 선수로 3명에 한하여 축구 와일드카드가 이뤄지고 있다. 이후론 21살 이하 선수로 자격을 제한하거나 아예 21살 이하 축구 대회를 올림픽 축구로 대처하고 블라터 뜻대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부터는 와일드카드 및 올림픽 축구 제한이 바꿔질 예정이라는 루머도 있으나 아직까지 이에 관련되어 확정된 사안은 없다. 결국 2016 올림픽도 와일드 카드 제도가 유지되었고, 2020 도쿄 올림픽도 별 말이 없다.
사실 한국에선 경악할 일이겠지만, U-20 청소년 월드컵은 유럽 축구 리그에서 외면하는 게 크다. 유달리 아프리카에서 청소년 축구와 올림픽 축구 성적이 좋은 이유도 유럽에서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다. 사실 경기 수익도 월드컵에 비하면 없는 수준이며, 우승 상금도 없는 대회인지라 올림픽 축구와 병합해도 FIFA에선 별다른 피해도 없다. 그저 유망주 발굴이라는 요소로 보면 되니까. 게다가 21살 이하로 와일드 카드를 줄이자면 20살 이하 축구대회와 차이가 없고 유망주 및 선수 혹사라는 비판 및 문제도 없앤다고 여기기 때문에 90년대부터 꾸준히 FIFA에서 논의하던 사항이다.
2018 월드컵 개최지 투표에서 한국은 영국에 투표하고 영국은 2022 월드컵에서 한국에 표를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나왔다. 그리곤 영국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하자 "이것이 축구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 회장 출마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FIFA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FIFA 임원들이 블라터를 지지하며,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 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FIFA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 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을 블래터 전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FIFA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FIFA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의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사실상 FIFA 회장에 도전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실 FIFA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를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와 블래터도 정몽준과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FIFA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그리고 FIFA 회장은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정몽준은 2017년 3월 항소위원회로부터 결정 이유를 통보받고 바로 4월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FIFA를 제소했다. CAS는 2018년 2월 정몽준에 대한 FIFA의 제재를 대부분 무효로 하는 판정을 내렸다. 징계가 취소됐다. 그의 징계 취소 후 첫 행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1차전 한국-스웨덴 경기 관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FIFA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국내에서도 정치인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정몽준 본인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며, 그의 조카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사촌동생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7. 사회복지활동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이 재단은 1977년에 정주영이 현대건설 주식 50%를 내놓아 만든 것인데 세간에서는 서울아산병원재단으로 통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석유공사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기업이었다. 그 지분 50%는 거액이다. 정부 복지 예산의 3배쯤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산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미국 뉴스위크가 한국 1위로 평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수위권의 대형병원이다. 3개 과목에서는 글로벌 4~7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병원은 대학이든 재단이든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곳인데, 아산병원은 정몽준이 지원을 잘해서 의사들의 연구, 진료 환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정주영 10주기 기념으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몽준이 2천억 원을 냈고 범현대 회사들이 낸 기금을 합쳐서 2021년 현재 5,870억 원이다. 주로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이 공익재단들은 현대중공업지주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경영승계에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않다
8. 가족 관계
부인은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인 김영명이다.
장남 정기선은 1982년생으로 대일외고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 MBA를 마친 뒤 2013년부터 현대중공업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2019년 기준 현대중공업 부사장이다. 사실상 현대중공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경영 능력이나 성격은 소탈해서 평이 꽤 좋은 편이라고 한다.
9. 선거 이력
10. 소속 정당
[출처] 범현대가 가계도를 알아보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현대해상, HDC, KCC, 한라, 현대 가계도)|작성자 태욱 달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