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가 싹난 기적
본문 민 17:8-11
서 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거슬려 지도권을 빼앗으려고 비난과 선동을 하였다. (민 16:1-20) 이때에 12지파 대표자들이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두었는데 이튿날 모세가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지파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트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아론이 모든 지파중에서 피택되어 대제사장 직분을 맡은 것이 모세나 아론의 자의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무지한 군중들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는 증거궤 앞에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정을 삼고 다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살구”는 원어의 뜻이 “깨는 나무 깨는 실과”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꽃이 이른 봄에 피는 고로 이런 이름의 뜻이 붙었습니다.
(렘 1:11-12)에 보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어떠함을 보이는데 이용한 것입니다(사 4:2 11:15 13:2 렘 33:6 겔 6:12). 그리고 (히 9:4)에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삼대 성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팡이가 싹이 난데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 성서에서 지팡이의 용도는,
(1) 권위의 표시로 사용했고(출 4:20)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했습니다.
(2) 이적의 도구로 사용했고(출 7:12)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된지라”고 했고
(3) 호신용으로 사용했고(삼상 14:27)
“요나단은 그 아버지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고 했습니다.
(4) 여행의 도구(창 32:10)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떼나 이루었나이다.”
(5) 노인의 의지의 도구(슥 8:4)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6) 지휘봉으로 사용했고,
“목동들이 양을 치는데 사용했습니다. 장차 예수님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지휘대가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계 2:27)
(7) 측량대로 사용했고 (계 11:10)
“새 예루살렘을 측량하는데 사용하심”
1. 지팡이가 싹이 남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 것입니다.
“스코필드”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죽었다. 그러나 예수만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대제사장으로 높임을 받으셨도다”고 했습니다.
(마 27:53)에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자기네 교주 무덤이 있는 것을 대단히 자랑하며 숭배합니다. 유교에서는「공자」무덤이 중국에 있는 것을 자랑하며 불교의「석가묘」는 인도에 있는 것을 「모하멧트」는 멕카에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사실 교주의 무덤이 있다고 하나 평범한 인간으로 죽어 무덤을 남겼다. 고로 그 종교가 참 종교가 아니다. 철학에 불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은 영생도 생명도 미래의 소망이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교주 예수님은 빈 무덤을 남겼다는 것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살아났다는 것은 죽음을 이겼다는 뜻입니다(고전 15:55).
그러므로 영생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입니다. 이 부활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최근의 신비가 밝혀졌나니 바로 예수의 시체를 샀던 수의(세마포)가 지금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1980년 12월에 중동문화사가 발행한 예수 부활의 책). 이 세마포는 과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확대되어 예수님께서 맞은 흔적 가시관 쓴 상처 못박힌 상처가 생생하게 나타낼 뿐 아니라 빈 무덤에 세마포만 남기고 부활했다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나무가 지팡이가 싹이 나고 열매가 맺은 증거인 것입니다.
2. 이는 새 소망을 의미합니다.
8절에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첫째, 지팡이가 움이 돋았습니다.
“움이 나고” 이 움은 나무를 베어낸 둥치에서 나오는 싹을 말합니다. 옛 가지를 잘라낸 자리에 새로 돋는 생명의 표징입니다. 그 움은 봄의 소식이며 부활의 소식입니다. 움은 꿈입니다. 움은 내일입니다. 움은 아침입니다. 움은 기다림입니다. 움은 창조입니다. 움은 희망입니다. 움은 성장입니다. 움은 항상 전진하는 것입니다. 움은 미래를 내다보는 웃음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요 기쁨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둘째, 지팡이에 순이 났습니다.
“순이 나고” 순은 식물의 싹을 말합니다. 순은 종자가 땅속에서 썩은 자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생기게 됩니다. 그 순은 순수한 생명입니다. 순은 한 알의 씨가 떨어져 죽을 것의 흔적입니다. 순은 그 죽은 씨의 부활입니다.
비록 땅속에 묻혀 있을지라도 그 순은 기어이 땅을 뚫고 태양빛 앞으로 그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정녕 그 순은 우리의 생명이며 약속입니다. 보람이요 활력소입니다.
셋째, 지팡이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이 피었고” 꽃은 식물의 생식 기관입니다. 꽃은 식물의 신분입니다. 꽃은 그 식물의 생명수단입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꽃은 향기롭습니다. 꽃은 벌과 나비를 부릅니다. 꽃은 노래하게 합니다. 꽃은 만인을 춤추게 합니다. 꽃은 조화가 있습니다. 이 꽃은 바로 우리 속에서 생명으로 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꽃이 피는 마음을 가진 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 지팡이에서 살구열매가 맺었습니다.
열매는 꽃이 수정하여 그 씨방이 자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열매는 생명의 시작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합니다. 땅에 떨어져서 시작입니다. 그러나 꽃이 떨어진 후에 남은 열매는 그 식물의 결과입니다. 열매는 생명의 인자입니다.
열매는 씨입니다. 씨는 온갖 것의 총화이며 잠재력 신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종합영양입니다. 움이 나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으니 이는 참 소망이요 바람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앞날에는 이와 같은 과정들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중에 한가지만 빠지면 이는 크나큰 불행이요 실망입니다.
3. 참 제사장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6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매 그 족장들이 각기 종족대로 지팡이 하나씩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의 합이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단순히 거드름피우기 위한 겉치레가 아니라 엄연한 구별이 됨을 보이신 것입니다.
특히 모세가 각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를 별도로 두지 아니하고 함께 두었는데 유독히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난 것은 참 제사장인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옥은 땅속에서 캐는 것이요 충신은 전쟁터에서 나오는 것이요 참신자는 역경과 죄악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한데 그당시 사회는 하나님에 진노가 임함같이 죄악이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 노아는 구별된 생활을 한 것입니다.
성도여 이 시대에 참 신자의 모습을 보이며 삽시다. 즉 주님이 자랑하실 수 있도록 의인된 생활을 합시다.
4. 이는 신앙에 저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른나무 그것도 사람이 짖고 다녀서 어떤 나무보다도 나무의 진이나 껍풀이나 소생할 수 있는 기능이 전무한 나무인데 그것을 보이면서 살겠냐고 한다면 누구도 산다고 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겔37:3)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 그 마른 뼈들이 살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의도는 인간의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다만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신 32:39). 이처럼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눈앞에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모든 무릎들을 당신 앞에 꿇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마른나무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 수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을 시험해 보는 일이니 원하기는 여러 성도님들은 자문자답하여 보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주안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인고로 생명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지팡이가 새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으니 이는 나무의 부활인 것입니다. 하나 하나님은 인간들에 부활을 요구하시지 식물이 부활되기를 바라지는 아니하십니다.
(고전 15:20)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창세 이후로 사람들은 다 죽었고 단 한사람도 부활한 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유명한 종교가인 공자나 석가도 또 유명한 정치가 권력가 발명가 문학가 과학가 등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죽은 자 가운데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우주의 신기원이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증거가 있었고 (롬 1:4)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 증거가 되었습니다(행 17:31).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로써 많은 종교중에 뛰어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는 자들은 다 부활합니다. (고전 15:22)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요 우리의 달려갈 길이요 목표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난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소식이며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전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6. 이는 선택자 가운데는 이같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은 홀을, 장군들은 지휘봉을, 선지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 과시를 위해서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가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싹 말라 이미 죽은 막대기 같은 지팡이에서 싹이 난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이치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있어 싹이 트고 잎이 자라 꽃이 필 뿐 아니라 열매까지 맺었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생명의 역사임을 말해 줍니다. 분명히 죽었고 소생할 수 없는 것에서 새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 그 속에서는 어떤 절망적인 때에도 생명의 역사가 솟게 된다는 말입니다.
7. 죽음을 면하라고 베푸신 기적입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기적의 요점은 패역한 백성 원망과 불평자들까지 죽지 아니하고 살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요 3:16) 하셨고 그리고 주님은 속히 임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키 위해서라고(벧후 3:9)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역사는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의 기적이나 예수를 보내신 것이나 지금까지 재림하시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이나 모두다 인간들에 죽음을 면하고 구원을 받기 위함인 것을 보게 됩니다. 고로 성도들이 무엇을 보고 아니 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 육간의 죽음을 면하려고 생명에 주를 바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결 론
죽은 나무 아니 손 때가 묻은 나무 생명이 있을 수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마른 막대기 만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하나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신앙을 주시었으니 이는 참으로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