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필 10주년 응원가
필봉 최해량
나는 인생 2막을 ‘등자생존登者生存’으로 출발했다. 남들은 교직이 편안한 줄 알겠지만 가르쳐 봐야 사람 교육이 얼마나 힘 드는지 안다. 32년간의 이 교직을 마감하면서 육신도 영혼도 쉬고 싶었다. 그래서 산을 오르기로 했다. 김밥 하나 들고 친구도 없이 가까운 함지산을 오르며 명봉산, 가산, 유학산으로 그 지경을 넓혀 나갔다. 팔공산 수태골에서 염불암, 남문에서 가산바위까지 수도 없이 다닌 뒤에 정상은 나누어 오르기로 했다. 동봉에서 갓바위, 동봉에서 한티재, 한티재에서 가산산성까지 이렇게 하루 5시간에서 6시간씩 걸었다. 몇 달 동안 이산 저산 오르니 힐링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편해졌지만 무릎 연골이 걱정되어 이제는 ‘주자생존走者生存’으로 유턴했다. 걷기로 했다. 무작정 하루에 만 보씩 걸었다.
그즈음 골프나 파크골프를 치는 친구들이 ‘골자생존’을 추천했다. 골프는 많이 걷고, 시간 잘 가고, 풀밭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마치 골프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강권했다. 그러나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식자생존息者生存’이요 ‘적자생존’의 길을 택했다. 숨만 부지런히 쉬면 죽지 않을 터이고 글을 쓰면 마음의 정리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선택한 글쓰기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게으른 성격이 생각을 자꾸 딴 곳으로 이끌며 글쓰기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교회 일마저 내려놓았다. 이제는 뒷방 늙은이가 되는가 싶어 조금은 두려워졌다. 그래, 이제 글을 써보자. 내게는 아직도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를 꺼내어 맑은 바람과 좋은 햇볕에 쬐며 거풍을 시키자. 또 9개의 나이테를 만들며 몸집을 키워낸 상록수필의 좋은 글동무들도 있다. 이 나무가 연륜을 쌓는 일에 자그만 힘이라도 보태자.
내가 수필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수필과 지성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써 내려가는 것이라 들었는데 기, 승, 전, 결에 맞게 써야 한다고 했다. 주제와 관련 있는 소재를 모아야 제대로 된 글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합평하며 조금씩 생각을 키워 나갔다.
같은 해, 아내는 떠버리 영감이 짐이 된다고 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상록수필창작교실에 가서 공부했다. 그래도 그렇지, 부창부수가 아닌가.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은 만고의 법칙이지. ‘수지’ 문우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듬해 아내와 합류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위인들 이야기, 삶의 교훈적 내용이 글쓰기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은 됐지만 합평하지 않으니 제대로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록은 훌륭한 인재의 보고였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 공무원 출신들이 다양한 소재를 글감으로 썼다. 교사, 일반 행정, 법무부, 철도청, 경찰 심지어 전매청 출신까지 우리는 ‘멀티 팟’의 집합체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뿜어내는 포스가 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부부가 나란히 ‘수필춘추’에 등단했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일찍 작가 호칭을 얻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부담도 커졌다. 거기에다 연간지 6호부터는 편집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순항하던 상록수필의 위기가 찾아왔다. 예사롭지 않게 품어내는 문우들의 글 향기가 청량감을 자아내며 탄력을 받던 2020년, 코로나가 온 지구촌을 엄습했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질병은 우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이끌었다. 지도교수의 구수한 강의는 중단되고 카페에서 차 한잔을 나누던 훈훈한 이야기도 멈췄다. 비대면, 생활 속의 거리 두기는 우리의 삶 자체를 황폐화시켰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력 있는 우리는 힘을 모아 제7호 연간집을 발간하였고 네 명의 문우가 등단하였다.
두 세 차례의 백신을 맞으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변이를 거듭하며 더욱 기승을 부렸다. 글 웅덩이는 메워지고 사유의 나래는 멈칫했다. 그 상황에서도 두 회원이 등단하며 수필가 반열에 올랐다. 표지 화보는 산수화풍에서 서양화풍으로 바뀌며 제8호 연간집이 출간되었다. 특기할 일은 우리 수필집이 국제 표준 도서 번호 ISSN 2799-9262에 등록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해가 바뀌어 그 얄밉던 코로나도 조금씩 숙지고 일상이 차츰 회복되었다. 우리 문우들의 활동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예전의 글쓰기 공부 모임에서 탈피하여 순수 수필문학 동인지로 거듭났다. 환경을 테마로 특집을 게재하며 제9호 연간집을 출간했다.
이제 우리 상록수필은 10주년을 맞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불과 10여 명의 초보 글동무들이 출발하였는데 20여 명이나 중앙 작가로 등단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순수 문학단체로 손색이 없다. 문우들은 유서 깊은 문화 유적지를 탐방하며 양질의 글감을 얻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봄, 가을 문학기행을 다니며 선배 문인들의 창작 활동을 본받으려고 촉을 곤두세운다. 황새를 따라가려는 뱁새의 몸부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문우의 정을 나누며 글쓰기 주초를 잘 놓았다. 이제는 어떤 비바람도 이겨낼 내공을 다져왔다. 오고 오는 세대가 읽을 명작에 욕심내지 않고 거짓 없는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에 열공이다. 그렇게 쌓인 연륜에서 발췌한 글들을 꿰고 잘 다듬으며 꿋꿋하게 나아갈 희망찬 상록의 앞날을 응원한다.
첫댓글 10년세월이 인고의 날이었습니다. 이제 모두 자기 발로 갈 수 있습니다. 더욱 매진하여 훌륭한 작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등자생존에서 주자생존을 거쳐
식자생존과 적자생존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 후배들을 응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