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강화도와 관련한 삼별초 항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삼별초의 기원
고려에서는 원래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별초(別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씨 무신정권 시절에 제2대 집권자 최우[崔瑀, ?~1249, 훗날 최이(崔怡)로 개명함]는 힘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야별초라는 사병조직을 만들었지요.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최이는 야별초를 확대해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눴습니다. 여기에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도로 돌려보내진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쳐서 마침내 삼별초가 만들어졌지요. 정리하자면 이들의 시작은 무신정권의 권신이 부리던 사병조직 야별초였습니다.
삼별초의 뿌리는 당장 가동할 수 있는 정예부대였던 야별초에게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하면서 정규군화된 군대였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준동하며 몽골군까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정규군이 붕괴하자 새롭게 만들어진 군대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최씨 정권의 진짜(혹은 알짜) 사병은 내외도방이라는 조직으로 따로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고려-몽골전쟁에도 동원되지 않고 말 그대로 정권 유지만을 목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최씨무신정권이 후세의 비난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지요. 여하튼 강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의 새로운 중앙군으로 삼별초의 영향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집권한 무인을 제거하고 그 일파를 숙청하려고 삼별초가 통째로 동원되기도 했지요.
그 대표적인 예로 김준은 삼별초를 동원해 최의 세력을 모조리 무찌르고(무오정변), 60년 유지된 최씨 무인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뒤에는 임연도 삼별초를 이용해 김준 세력을 없애버렸지요(무진정변). 나중에는 고려 원종이 삼별초를 이용해 당시 실권자인 임유무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100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을 끝내버렸습니다(경오정변).
이를 보면 삼별초의 역사적 흔적이 로마 제국의 근위대, 오스만 제국 혼란기 예니체리의 행보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 자체로 국가지도자를 선택할 권리가 생긴다는 점에서요. 그렇지만 삼별초도 결국은 외부에서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고려 원종이 이번에는 몽골과 손을 잡고 삼별초를 몰아내려 했던 것이지요.
② 파워 게임이 만들어낸 삼별초 항쟁?
어떤 이유에서든 대몽항쟁 일선에서 활동하던 삼별초 처지에서는 고려 원종에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원종과 고려 조정도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지요. 원래 이런 거대한 그것도 군사 조직을 해산할 때에는 내부에 포섭자도 만들고 부대별로 쪼개 놓고 반목하게 하여 저희끼리 알아서 해체되게끔 유도하는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종과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대뜸 해산하고, 능력에 따라 재등용을 하거나 안 하겠다며 대놓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이 말은 너희 중에 못마땅한 자는 다 해고내지 숙청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지요. 이때까지 최씨무신정권의 무력 기반으로 활용되어 왕실부터 문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원한을 쌓아 온 삼별초 안의 불안과 불만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왕실과 문신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에 대한 신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서기 1270년에 고려 원종이 해산령을 내리게 되었지요. 그러자 삼별초는 당시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를 중심으로 뭉쳐 삼별초 항쟁(원종 입장에서는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마도 노영희는 명목상 지도자이고 배중손이 실권자였던 모양이고요.
이들은 1270년 여름 6월에 삼별초를 대동하고 강화도에서 승화후 왕온(자신은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만)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 후 봉기했습니다. 두 장수는 사람을 시켜 오랑캐 군사가 이르러 백성들을 살해할 것이니 나라를 돕고자 한다면 격구장으로 모이라 말했지요. 그런 후에 강화도를 지키는 삼별초 군사들이 이주하여 진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③ 삼별초 항쟁의 진행과 결과
이에 분노한 고려 원종은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장식품으로 전락한 관군은 삼별초에게 속수무책으로 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 사이 삼별초는 나주에 이르는 전라도와 남해안의 주요한 지역, 제주도를 석권하면서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 조정이라고 대내외에 선전했습니다. 성즉군왕패즉역적(成則君王敗則逆賊)이라는 말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대였지요.
성공하면 임금이요 패배하면 역적이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준엄했습니다. 결국 고려 원종은 서둘러 진압과 왕정 복위를 위해 원나라에 원병을 요청했지요. 원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서기 1271년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고려-몽골연합군을 결성하고 진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지요.
진도에 도착한 연합군은 불창화포를 쏟아부었고 삼별초는 죽을 각오로 항전했습니다. 불창화포는 서기 1232년에 등장한 무기로 비화창(날으는 불창)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을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여하튼 연합군의 공세로 인해 삼별초는 결국 패배해 진도가 함락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마저 살해당했습니다.
이때 왕온을 살해한 인물은 바로 매국노 홍다구였습니다. 삼별초의 잔존한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지요. 참고로 집현전의 학사님들은 제주도로 사전답사를 다녀온 바 있습니다. 여하튼 서기 1273년 삼별초는 연합군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고려에서 서기 1270년 5월부터 1273년 4월까지 삼별초가 벌인 항쟁은 고려-몽골전쟁의 마무리 격으로 여겨지지요.
역사에서 삼별초와 같은 항쟁이 ‘필연적’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별초와 관계없이 고려 무신정권(특히 김준)은 강화도가 몽골군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몽골군을 피해 제주도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 자체는 세우고 있었지요. 여하간 삼별초 항쟁 이후의 고려는 원 간섭기라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고 이후에 조선이 건국되지요. 다음 글에서는 조선 시대 강화도와 인접한 교동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