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누각(樓閣)속의 젊은미부 그 사람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발에도 역시 비단으로 짠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의 차림은 상당히 풍류를 알고 색을 좋아하는 그러한 무리들이 즐겨 입는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도리어 코가 납작하고 눈이 작고 눈썹이 얄팍하며 입술이 두꺼워 그보다 더 못생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주칠칠은 숨이 막힐 듯했다. 그녀는 손이 이미 상대에게 잡힌 상태여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급히 말했다. "당신. ! 당신 아예 나를 죽이세요. 나는 원래 이곳에 들어온 첩자예요. 빨리 나를 이곳 주인에게 넘기세요. 그래서 이곳 주인이 나를 처리하게 하세요." 그녀는 마음 속으로 차라리 이곳 주인에게 잡혀가 벌을 받을지언정 이 행동이 귀신과 같고 생김새가 개, 돼지만도 못한 소년의 손에 희롱당하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도리어 히히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의 주인은 내 아버지도 아니고, 내 자식도 아니오. 당신은 당신의 첩자 노릇이나 하시오.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이곳 주인에게 넘긴단 말이오?" "알고 보니 당신도 몰래 들어온 사람이군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마구간까지 왔겠소?" 주칠칠은 다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그의 무공을 보건대 그가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그러나 그녀가 그 소년을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구역질이 나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은 끝내 할 수 없었다. 이때 그 소년은 색(色)에 굶주린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 소년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거요?" "당신......! 당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이곳을 용담호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어요." 주칠칠은 비웃듯이 말했다. "제가 보건대 당신은 허풍을 떠는 것 같군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히히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충동질하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소용없을 거요. 만약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얌전히 내가 당신의 얼굴에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가만히 계시는 게 차라리 나을 거요." 주칠칠이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눈을 감고 저 녀석에게 내 얼굴에 입맞추게 하는 것이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만약 내가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심랑의 얼굴도 다시는 못보게 될 테니까 말야.) 그는 심랑을 생각하자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다시 심랑을 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심지어 개, 돼지에게 입맞춤을 한다 해도 달갑게 받아들일 그러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즉시 눈을 감고 말했다. "좋아요! 하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그 소년이 입을 맞추는 기색을 느꼈다. 주칠칠의 얼굴에 입을 맞춘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말했다. "대장부가 말을 했으면 지켜야 되겠죠? 나를 따라오시오!" 주칠칠은 어쩔 수 없이 그 소년에게 이끌려서 그 마구간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눈을 떠서 바라봤을 때, 그 소년은 그녀를 끌고 바로 그 집들이 밀집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칠칠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당신......! 당신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당신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간 이후에는 다시는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 내가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았지만 결국 당신을 이곳에 그냥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소."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은......!" "이곳의 주인은 내 아버지도 아니고, 또 내 아들도 아니오. 그렇지만 주인은 내 어머니요. 방금 당신이 나를 한 번 속였기 때문에 나도 당신을 한 번 속였던 것이오. 우리 두 사람이 서로가 한 번씩 속였기 때문에 누구도 손해본 것은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당신께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소. 여자들은 종종 남자를 속이지만, 남자들이 사람을 속이기 시작하면 여자보다 못하지 않다는 점을 말이오." 주칠칠은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너 이 돼지 같은 놈, 개 같은 자식 ! 너, 너! 너는 심지어 개, 돼지만도 못한 짐승이야. 내가 너를 갈갈이 찢어놓지 않나 봐라." 그녀의 욕설이 흉해지면 흉해질수록 그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더욱 득의에 찬 미소를 드러냈다. 그때 정원에 있던 흑의 대한, 백의 소녀들이 모두 그가 돌아온 것을 보자 멀찍이서부터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웃으며 말했다. "작은 주인께서 돌아오셨습니까?" 어떤 소녀들은 그 소년과 비교적 친한 듯 한 마디 더 보탰다. "작은 주인께서 하룻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군요? 부인께서 모르도록 조심하세요. 부인이 아시면 당신을 대문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거예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대문으로 들어온 게 아니오. 나는 그 마구간의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왔어요. 누님들! 제발 어머님이 제가 하룻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후일 누님들을 반드시 기쁘게 해드리겠어요." 그 소녀가 교태롭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누가 당신이 나를 기쁘게 해주기를 바란댔어요 ? 당신이 데리고 온 이 계집애, 생긴 게 그런 대로 괜찮네요?"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주칠칠을 끌고 대나무숲 뒤에 있는 깨끗한 집으로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답고 부드럽고 가볍고 가는 이 소리는 이 대나무숲 밖에 있는 한 채의 누각 위에서 들려왔다. 그 누각의 높이는 비록 수 장에 달했으나, 이 외침소리는 마치 주칠칠의 귀에 대고 외치는 듯 가깝게 울렸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깜짝 놀란 듯 얼굴색이 변하더니 과연 그 자리에 얌전히 서서 더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 누각 위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 녀석의 간이 크구나. 밖에서 돌아온 후에 아무도 모르게 슬쩍 네 방으로 돌아가려 했단 말이냐?"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감히 머리를 들지도 못했으나, 주칠칠은 도리어 번쩍 고개를 쳐들고 그 누각을 바라보았다. 그 화려한 누각 위의 붉은 난간쪽에는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올리고 그 틀어올린 머리에 보석을 가득 단 중년 미부가 난간에 의지하여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칠칠이 지금까지 보았던 미녀는 비록 적지 않았지만 만약 그들을 이 중년미부와 비교한다면 그 미인들은 전부 추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중년미부는 아름다왔다. 주칠칠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눈길을 그녀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여자인데도 그녀를 바라보고 이 정도이니......! 만약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겠지?) 중년미부도 주칠칠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냉랭하게 말했다. "이 여자 아이는 어디서 데려온 거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녀요? 그녀...... 그녀가 바로 제가 종종 말씀드리던 연빙문(燕氷文) 연 아가씨예요. 어머님께서 그녀를 보고 싶다 그러시길래 제가 어머님께 그녀를 보여드리려고 이번에 데리고 온 거예요." 중년미부의 눈이 다시 주칠칠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말했다. "과연, 절세미녀라고 할 만하구나? 네가 그녀에게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걸 이해할 만하다. 그녀가 연 아가씨라면 이리로 올라오도록 청......."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아무런 소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칠칠은 천성이 고집이 세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이 소년이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간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중년미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소리를 질렀다. "저는 연빙문이 아니에요. 제 성은 '주'예요. 그리고 또 그가 저를 이곳에 청해온 것도 아녜요. 저는 당신들의 마차 밑에 숨어서 몰래 이곳에 들어온 거예요. 들어온 목적은 당신들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죠. 그렇지만 그에게 사로잡혔던 거예요. 그러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세요." 그녀의 이 말이 터져나오자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의 손은 갑자기 차가워졌다.그 중년미부의 안색도 급히 변했으며 표독스럽게 그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 녀석을 이리로 데려와라." 그 누각은 겉모습만 금빛 찬란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 장식은 더 화려하여 마치 신선의 궁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중년미부는 호랑이 가죽을 깔아놓은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천상의 선녀 같았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이미 그녀의 면전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주칠칠은 이미 생사문제를 도외시한 상태여서 겁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오만한 자세로 우뚝 서 있었으며, 심지어 얼굴에는 냉소마저 띠고 있었다. 중년미부가 물었다. "너의 성은 주이고, 이름은 뭐지?" "당신에겐 상관없는 문제지만 얘기해 주죠. 주칠칠이 바로 저예요. 똑바로 들어두세요." "주칠칠! 네 담력이 적지않구나." "당신처럼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서 경탄하기도 바쁜데 무엇이 겁이 나겠어요? 그렇지만 애석한 것은 당신은 그렇게 아름다운데 당신의 아들은 너무 못생겼어요." 그 중년미부는 이처럼 담력이 하늘을 뒤엎을 듯 큰 소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아름다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얼굴에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곳에 서 있던 백의 소녀에게 소리쳤다. "그녀들을 데려와라." 한 명의 백의 소녀가 중년미부의 명령에 따라 누각을 달려 내려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네 명의 새로 빚은 듯 단단하게 보이는 장한들이 주칠칠이 수풀 속에서 보았던 그 두 명의 백운목녀를 각 하나씩 끼고 들어왔다. 이 두 명의 백운목녀는 중년미부를 보자 이미 놀라서 안색이 변했다. 그 장한들이 그녀들을 내려놓자 그녀들은 곧 중년미부 앞에 꿇어 엎드렸다. 중년미부가 천천히 물었다. "너는 이 두 사람의 마차 밑에 숨어서 들어왔던 것이냐?" "그런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아요." 중년미부의 입가에 갑자기 사람의 혼백을 뺏어갈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나타났다.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얘야, 네가 아직 어리니 너한테 한 가지 가르쳐 주마. 여자가 아름답게 생기면 생길수록 마음은 더욱 악독한 법이란다.추하게 생긴 여자는 도리어 마음이 좋을 때가 많아." 주칠칠이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믿기지 않는다면 내가 너한테 직접 보여주도록 하마. 내 밑에 있는 여자아이들 중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어떠한 벌을 받게 되는지 직접 보도록 해라." 그녀의 봄비 후에 솟아나는 죽순처럼 아름다운 섬섬옥수가 가볍게 한 번 들려졌다. 그에 따라 그 두 명의 백운목녀가 동시에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그 처참한 소리는 듣는 사람의 코허리를 시큰하게 했다. 그러나 그 새로 빚은 듯한 장한들은 그 아름다운 여자들을 조금도 아끼는 마음 없이 두 사람이 한 여자씩 상대하여 앞뒤에 섰다. 그 백운목녀들의 뒤에 선 장한들은 소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고, 앞에 선 장한들은 두 손을 벌려 그녀들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그에 따라 부드럽고 반짝이는 희고 곡선이 아름다운 소녀들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자 대한들은 각자 허리춤에서 뱀처럼 생긴 채찍을 꺼내서 비가 쏟아지듯이 이 눈처럼 하얀 소녀들의 몸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채찍소리가 '쉭쉭' 하고 일어났다.그 소리는 듣는 사람의 혼백을 뺏아갈 정도였다. 소녀들은 바닥에 쓰러져 처참한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러나 그 채찍은 무정하게도 순식간에 그녀들의 눈처럼 하얀 아름다운 동체에 수십 줄기의 빨간 채찍 자국을 남겼다. 이처럼 사람을 매혹시킬 듯한 동체에 여러 갈래로 난 빨간 채찍 자국은 더욱 그 장한들의 야성을 폭발시키는 듯했다. 그들의 눈에서는 마치 짐승과 같은 잔혹한 빛이 번득였다. 그에 따라 채찍질은 더욱 빨라졌으며 더욱 거세어졌다. 주칠칠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멈춰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들을 멈추게 해주세요." 중년미부가 미소를 짓고 가볍게 손을 흔들자 채찍질은 금방 멈췄다. 그 소녀들은 미약한 숨을 겨우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주칠칠도 얼굴 가득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중년미부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렵니?" "당신, 당신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얘야, 나는 네가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그렇지만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어려운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단다. 예를 들어 말하면......." 주칠칠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듣고 싶지 않아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너는 얌전하게 나한테 말해다오. 우리들의 비밀에 대해서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는거냐 ? 그리고 너 이외에 누가 또 알고 있는 거지?" "저는 모...... 몰라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모른다는 거냐 ? 그래." '그래' 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덟 명의 대한이 주칠칠을 에워쌌다. 주칠칠은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두려움이 솟구침을 느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심랑 ! 당신은 어디 있어요 ? 빨리 와서 저를 구해주세요." 그녀의 외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일진의 맑은 방울소리가 그 중년미부가 앉아 있는 뒷편의 자색 주렴 속에서 들려왔다. 중년미부가 두 눈을 약간 찌푸리더니 곧 일어서서 표연히 그곳에서 나가버렸다. 주칠칠은 놀라고 당황했으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려서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당신은 듣지를 않았으니...... 아이, 어떻든 당신은 오늘 운이 좋았다 그래야 될 거요. 때맞춰 우리 모친이 만나야만 하는 손님이 찾아왔으니 말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어떠했을 것인지 그는 비록 말하지 않았으나 주칠칠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한 명의 백의 소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누각으로 올라가서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인께서 이분 주 아가씨를 잠시 지하실에 보내서 대기시키도록 명령하셨어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반문했다. "나는?" 백의 소녀가 픽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요? 당신은 저를 따라오세요." 주칠칠이 사방을 힐끗 훔어보고 나서 갑자기 손을 들어 한 명의 흑의 대한을 쓰러뜨린 다음 몸을 공중으로 날려 제비처럼 창문을 빠져나와 누각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백의 소녀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보고서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주칠칠은 자신이 이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에서 기쁨이 용솟음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누각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은 그녀를 막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녀의 뒷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올 줄이야. "얘야, 네가 왔구나. 내가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부드러웠으며 목소리는 매우 예뻤다. 그것은 바로 그 중년미부의 음성이었다. 주칠칠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듯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기운이 스쳐감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갑자기 몸을 돌려 쌍장을 동시에 격출시켰다. 그녀는 이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독한 초식들을 전부 사용하여 순식간에 칠팔 초를 공격했다. 그녀의 경공은 뛰어났으며 공격도 빨랐으나, 그녀가 배웠던 것은 잡다한 초식들로써 정교한 맛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격출시켰던 칠팔 초는 비록 각 문파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나 제대로 숙달된 초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이러한 공격은 보통의 강호 무사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했으나, 중년미부의 눈에는 어린애의 장난에 불과했다. 중년미부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네가 배운 무공이 많기도 많구나." 그녀가 소매를 가볍게 휘두르자 주칠칠의 오른쪽 팔꿈치의 유지혈(油池穴)이 그 소매에 적중되어 오른쪽 팔이 천천히 밑으로 쳐졌다. 그러나 주칠칠은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다시 삼 초를 공격했다. 중년미부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단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고, 무공을 너무 많이 배우면 도리어 소용이 없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그녀는 허리를 가볍게 돌리더니 다시 소매를 휘둘렀다.주칠칠의 좌측 팔굽의 유지혈(油池穴)이 또 마비되어 좌측팔도 더이상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두 다리를 팽이처럼 돌리며 북파괴자원앙퇴(北派拐子鴛鴦腿)라는 초식을 사용하여 공격했다. 중년미부가 고개를 가로젖고 웃으며 말했다. "너같이 총명한 아이가 전심전력으로 한 문파의 무공을 배웠다면, 오늘 나와 대략 십 초 정도는 싸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는 얌전히 항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칠칠의 두 무릎의 환도혈(環跳穴)도 그녀의 소매에 격중되었다. 주칠칠은 천천히 바닥에 쓰러져 더이상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년미부는 머리카락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아름답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싸움을 함에 있어서도 아주 가볍고 우아하고 부드러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아름다운 여자가 춤을 추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그러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주칠칠이 멍청하게 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보고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저는 세상에 당신과 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더욱이 당신이 도대체 어떤 대단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는 더 모르겠구요. 제가 짐작컨대 아마 무림계에 머지않아 큰 혼란이 생길 것 같군요." 중년미부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은 본래 천하에 아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너는 지금은 나한테 항복한거니?" 주칠칠이 몸은 비록 움직일 수 없었으나 눈을 크게 뜨고 중년미부의 말에 큰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왜 당신한테 항복해야 하죠? 만약 내가 당신만큼 나이가 많았다면 당신에게 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귀여운 계집애로구나. 죽을 때까지 항복을 하지 않으려들다니. 그렇지만 너에게 하나 말해줄 게 있단다. 네 나이 때 이미 내 이름은 천하를 떨게 하여서 더이상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단다. 네가 만약 내 나이만큼 오래 산다 해도 너는 나를 쫓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손을 몇 번 휘젓고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그녀의 긴 치마가 표표히 휘날렸으며 그녀가 달고 있는 보석들이 '띵띵' 하고 울리는 가벼운 소리가 들릴 뿐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주칠칠은 그녀가 떠나면서 '애석하게도'라고 말했던 뜻과 그녀가 다시 돌아와서 자기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이곳이 아주 신비스럽고 자기가 비록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 그리고 아무도 이곳에 자기를 구하러 올 수 없으리라는 점 등을 생각했다.그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절망감에 휩싸여갔다. 이때, 두 명의 흑의 대한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는 듯 입가에 험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칠칠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비록 내가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나 자신 만큼은 도대체 내가 어디서 죽었는지 알아야 되겠지.) 다행히 그녀는 목은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다섯 가지 색깔이 있는 돌을 깐 자그마한 길이 보였으며 그 길을 돌아 흙으로 쌓아올린 산과 연꽃이 있는 못이 보였고, 그 뒤에 동백나무 수풀 위에는 또 누각이 보였으며, 흐릿하게나마 무늬를 놓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힘껏 내 빼었으나 그녀의 몸은 이미 그 두 명의 흑의 대한에게 번쩍 들렸다. 네 개의 털이 부숭부숭 난 큰 손은 고의인 듯 아닌 듯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고 있었다.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좌측에 있던 대한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더러운 년, 싫은 척 하지 마라. 어떻든 조만간 너도 또 우리의......." 갑자기 냉랭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만간 어떻게 된다는 건가?" 두 명의 대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대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했으며 머리를 숙이고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주칠칠을 바라보고 마치 무슨 말을 할 듯했으나, 그 옆에 있던 백의 소녀에 끌려서 한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명의 대한은 주칠칠을 안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문 안에는 이미 다른 한 명의 백의 소녀가 자단색 탁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 그 하얗고 보드라운 손가락으로 그 탁자 위에 있는 수선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소녀는 주칠칠이 들어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젖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들어와서도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탁자를 두 바퀴 돌렸다. 그러자 그 탁자 옆에 있던 석판이 밑으로 쑥 꺼지면서 아주 깊어 보이는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지하 통로는 상당히 밝았으며, 그 통로의 양쪽 벽에는 아주 정교하게 만든 등들이 박혀 있었다. 백의 소녀가 말했다. "화산실(華山室)은 비어 있어요.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세요." 두 대한은 이 소녀 앞에서 표정이 상당히 엄숙했으며 공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소녀의 말이 끝나자 그 두 대한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큰걸음으로 그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주칠칠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그 백의 소녀에게 말했다. "언니, 여긴 도대체 어디죠? 저한테 얘기해 주실 수 있어요?" 백의 소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 너의 그 언니라는 말이 너무 듣기가 좋구나. 그렇지만 아직은 너한테 말해줄 수 없어." 주칠칠이 즉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미친 년! 나쁜 년! 네가 얘기해 주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내가 알아낼 거야." 그러나 그 소녀는 웃으면서 주칠칠을 쳐다볼 뿐 더이상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지하 통로는 상당히 구불구불 복잡했다. 얼핏 보건대 그 고묘에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 지하 통로의 양쪽에 있는 석문들 위에는 모두 두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나부(羅浮)'였고, 어떤 것은 '청성(靑城)'이라는 글자들로 모두 중원 지방을 중심으로 한 명산의 이름들이었다. 화산실 앞에 이르러서 두 명의 흑의 대한은 기관을 움직여 석문을 열었다. 그때 갑자기 좌측편에 있던 대한이 험악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쁜 년, 내가 너한테 한 번 입맞춤을 해야겠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도 봐야겠고!" 말을 하는 순간 뾰족뾰족한 송곳처럼 생긴 수염이 난 큰 입을 주칠칠의 얼굴에 갔다댔다. 그러나 주칠칠은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고 반항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교태스러운 소리로 말했다. "나를 좋게만 대해 주신다면 그까짓 몇 번 입맞추는 게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그 대한이 대소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약간 운치가 있는 것이지. 자, 다시 한 번 더......." 이때 갑자기 처참한 부르짖음 소리가 들리며 그 대한의 얼굴에는 붉은 피가 솟아나왔다. 그의 입술을 주칠칠이 한입으로 듬뿍 물어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 대한은 화도 나고 분노도 치밀어올라 한 손으로 주칠칠의 옷깃을 부여잡고 밑으로 찢어내리려 했다. 주칠칠이 말했다. "조금만 내 옷에 더 손을 댄다면 당신의 작은 어르신이 오셨을때 틀림없이 내가 그로 하여금...... 헤헤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그 대한은 한 손으로 상처난 입술을 부여잡고 눈에서는 불을 뿜을 듯이 그녀를 노려봤다. 다른 한 대한이 말했다. "마삼(馬三)! 그만둡시다. 작은 마두의 그 성격, 잘 알지 않소?" 그는 손으로 힘껏 주칠칠을 밀어 넣은 다음 석문을 닫아버렸다. 주칠칠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 속에서 자신과 친한 사람들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그 그림자 중에 가장 큰 것은 심랑의 그림자였다. 주칠칠은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가볍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쁜 사람! 당신...... 당신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당신 어디에 있는 거예요? 왜 빨리 와서 저를 구해주지 않아요?" 자신이 심랑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여관에서 나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성대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녀는 피곤이 누적된 상태여서 울다가 지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긴 시간을 잤는지 모르나 악몽 가운데 갑자기 심랑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크게 기뻐 그를 부르려 했으나, 심랑은 도리어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 중년미부와 껴안고 뒨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자신을 껴안고 웃으면서 말 했다. "그래도 내가 좋죠?" 갑자기 그 소년은 한 마리의 산고양이 모습으로 변해서 그녀 자신에게 덤벼들었다. 주칠칠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녀 앞에서 웃음을 머금고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두 눈은 마치 산고양이처럼 날카롭고 탐욕스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다는 듯이.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등불빛이 너무 밝아 주칠칠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주칠칠은 방금 보았던 심랑의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환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며 그 땀으로 입고 있는 옷이 축축히 젖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갈라진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심랑! 심랑! 당신 어디 있어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이 누구요?" 주칠칠이 정신을 차려 바라보자 비로소 방금 악몽을 꾸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눈앞의 이 광경은 방금의 악몽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의 두 눈은 이미 탐욕스럽게 빛나고 있었으며 빙긋이 웃으면서 주칠칠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다는 거요?" 말을 마친 그는 손을 뻗어서 주칠칠의 창백하게 변해버린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주칠칠이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 당신 빨리 꺼져요." 그러나 그 소년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꺼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주칠칠의 창백하게 변했던 얼굴은 이미 파리하게 변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당신이 감히......." 그녀는 입으로는 비록 이렇게 말했으나 사실상 이미 이 소년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치울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이 소년이 자신에게 해올 행동을 생각하자 전신의 피부에 닭살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도리어 주칠칠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비록 색귀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강간을 해본 적은 없소. 당신이 얌전하게 내 뜻을 받아만 준다면 나는 당신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주칠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나는 죽어도 당신 뜻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 어떤 점이 나쁘다는 거죠? 당신이 죽어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니. 아! 알았소. 당신은 내가 못생겼다고 싫어하는 거로군." "그래요. 암돼지들이나 당신 같이 못 생긴 남자를 좋아할 거예요." 그 소년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당신은 내가 너무 못생겨서 싫어했군? 좋소."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한참이 지난 후 다시 몸을 돌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다시 나를 쳐다보도록 하시오." 주칠칠은 바라보기도 싫었으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금 전까지의 그 비할 데 없이 못생긴 소년이 아니라 여자보다 더 잘생긴 미남자였다. 등불빛 아래서 그의 입술은 붉었고 이는 희었으며, 수려한 눈썹에 맑은 눈, 그리고 그의 얼굴색은 하얀 가운데 붉은빛을 띠고 있어서 마치 양질의 뛰어난 옥과도 비교할 만했다. 무림계에서 이름난 미남자인 옥면요금 신검수 서약우도 이에 비한다면 낯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주칠칠은 멍청해져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 주칠칠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했으나 그 말은 불과 한두 마디에 불과했다. "당신, 당신......." 그 소년이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소? 당신은 내 뜻을......." 그러나 주칠칠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요귀! 이 악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래도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요? 아! 알았소. 당신은 내가 나의 이러한 모습이 남자들의 야성미가 없다고 싫어하는 거로군. 좋소." 그는 말을 하는 순간 다시 몸을 돌렸다. 그를 다시 봤을 때, 주칠칠은 거무튀튀한 얼굴에 칼날 같은 눈썹, 호랑이 눈에 미간에는 웅대한 기상이 넘쳐흐르는 장한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도 변하여 그 장한은 포권을 하고 주칠칠을 향해 말했다. "어떻소?" 그러나 주칠칠은 찬바람을 훅 들이마시고 말했다. "당신, 당신 헛된 생각을 버리세요." 그 소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래도 내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요? 아! 아가씨는 아마 성숙한 남자들을 좋아하는 모양이죠? 내가 너무 어리다고 싫어한다는 거요? 좋소. 다시 보시오." 이번에 그가 몸을 돌렸을 때는 그의 턱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미간이나 표정까지도 아주 성숙하게 변하여, 세상의 물정에 통달한 중년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년남자의 매력은 때에 따라서는 확실히 젊은 남자들보다 더욱 소녀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주칠칠은 놀람 속에서도 여전히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소년은 이번에는 다시 짙은 눈썹에 큰 눈을 가진, 송곳 같은 수염이 듬성듬성 난 거친 장한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 계집 년! 더이상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산 채로 잡아먹겠다." 이때 그는 얼굴 모습이 거친 장한의 모습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말소리도 그에 알맞게 변해 있었다. 주칠칠은 세상에 이처럼 기묘한 역용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년의 역용술은 확실히 뛰어나서 주칠칠로 하여금 멍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어떤 남자죠? 늙은 사람입니까? 젊은 사람입니까? 당신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든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요. 만약, 당신이 나에게 시집을 온다면 당신은 수십 명의 남편을 가지게 되는 셈이오. 그것이 여자로서 얼마나 큰 복이겠소? 다른 여자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얻을 수 없는 큰 복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싫단 말이오?" "당신...... 당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내가 당신과 결혼하리라는 꿈은 갖지도 마세요." 그 소년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싫단 말이오? 왜 싫죠? 왜요? 아! 그렇군요. 알았소. 당신은 총명한 여자라서 재능을 중시하지, 외모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신에게 말해 드리리다. 본인은 천재라고는 할 수 없으나 글재주로는 시(詩), 사(伺), 가(歌), 부(賦) 모두 할 수 있고, 아울러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 모두에 대해서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소. 문, 무, 두 가지를 제외하고도 천문이나 지리, 의술이나 점성술, 음악, 서예, 회화, 또 매를 사용한 사냥이나 개 길들이기, 사격,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또 뛰어나지 아니한 것이 없소. 만약 당신이 이러한 남편을 얻어들인다면, 평생 동안 절대 적적하지 않으리란 것을 내가 보장할 수 있소.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보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이미 계속하여 아홉 종류의 신법을 전개해 나갔다. 이 아홉 종류의 신법은 모두 소림사나 무당파 등, 각대 문파의 비전의 절기들이었다. 아홉 종의 신법이 끝나는 순간 그는 손을 번쩍 들어 석벽을 향해 일 장을 격출했다. 그 강철처럼 단단한 석벽에는 즉각 하나의 장인(掌印)이 나타났으며, 심지어 다섯 손가락의 모습이 돌에 조각을 한 것처럼 확연하게 찍혀나왔다. 주칠칠은 비록 무공이 뛰어나지는 못했으나, 얻어들은 것은 아주 넓었다. 그녀는 한눈에 바로 그 장법이 밀종의 대수인(大手印)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소년은 이렇게 나이가 젊은데도 몸에 각파 무공의 장점들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 절기들은 바로 강호상에 전해지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이는 확실히 보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주칠칠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의 이러한 무공은 어디서 배운 거죠?" "무공이 뭐가 그렇게 어렵단 말이오? 본인은 한가할 때는 옛사람들의 시를, 사를, 부를, 공부했소. 어느 것 하나 내가 말한 것 중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소. 이 천하에 본인처럼 뛰어난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오." 주칠칠이 눈알을 굴리고 갑자기 냉소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도 않을 걸요?" "그렇다면, 아가씨께서는 용모와 재주가 본인과 비교될 만한 인물을 알고 있다는 거요?"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글재주나 무공, 언어, 표정, 어느 것 할 것 없이 당신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나아요.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의 신발을 닦아주는 역할도 과분할 정도예요." 갑자기 그 소년의 눈빛이 번쩍 하더니 크게 웃었다. " 아가씨께서는 고의로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요?"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죠. 어떻든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없으니. 흥, 흥, 만약 그 사람이 여기에 있다면 누가 감히 나를 잡아둘 수 있단 말인가요." 그 소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눈에서 갑자기 불빛을 뿜어내며 말했다. "알았소.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심랑이죠?" "그래요. 심랑! 심랑! 당신은 지금 어디 있어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는지 알기나 하나요?" 그녀는 심랑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즉시 얼굴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 소년의 눈에서는 마치 불이 뿜어나올 듯했으며, 얼굴 근육은 죽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져갔다. 주칠칠이 약간 가련한 생각이 들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도 군계일학이라고는 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 만약 심랑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제가 당신을 좋아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 말은 세상에 심랑이 있는 이상 당신은 영원히 나를 좋아할 수 없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까?" "그 말을 제가 대답할 필요가 없겠죠? 당신은 대답을 안 해도 알고 있으니까요." "만약, 심랑이 죽는다면 당신은 어떻겠소?" 주칠칠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으나 금방 예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랑과 같은 사람은 결코 당신보다 빨리 죽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안심하세요." 그러나 그 소년이 한스러운 듯 말했다. "심랑! 심랑! 심랑!"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발을 구르더니 말했다. "좋소. 나는 심랑이라는 그 친구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소. 나는 그가 바로 내 발 아래서 죽도록 만들고야 말겠소." 주칠칠이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놓아줄 만큼의 배짱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그에게 인도하겠어요. 당신들 두 사람이 도대체 누가 더 뛰어난지 그를 한 번 보기만 한다면 즉각 당신 자신도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소년이 갑자기 미친듯이 웃어제꼈다. "본인을 충동질하는 계책이 뛰어나군요? 그렇지만 본인은 당신의 계책에 말려들고 싶소. 좋소. 내가 당신을 놓아주겠소. 가서, 심랑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나를 만나러 오시오." 주칠칠은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으나 입에서는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감히 나를 놓아줄 수 있을까요? 심랑이 당신을 죽이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나는 심랑이 겁이 나서 나를 만나러 오지 못할까봐 두렵소." 주칠칠이 냉소하면서 말했다. "비록 이곳이 용담호혈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반드시 올 거예요. 다만 걱정되는 것은 당신이......." 그 소년은 이때 더이상 그녀가 충동질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소년은 손을 뻗쳐 그녀의 양팔과 무릎의 네 곳의 혈도를 풀었다. 주칠칠은 기쁘고 놀라움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두 팔과 다리가 마비된 지 시간이 너무 지났기 때문에 비록 혈도가 풀리기는 했으나, 일순간 피가 잘 통하지 않아서 일어서자마자 다시 쓰러졌다. 그 소년은 때맞춰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당신 혼자 걸어갈 수 있겠소?" "걸어가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나갈 거예요. 당신이 부축할 필요는 없어요." 그 소년은 차갑게 웃더니 더이상 말하지 않고 두 손으로 그녀의 무릎 관절이 있는 곳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칠칠은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 소년의 두 손에서는 일종의 기이한 마력이 나오는 듯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간지럽고 짜릿하고 뼈마디가 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간지럽고 짜릿하고 뼈마디가 녹는 듯한 기분은 곧장 그녀의 뼈 속으로 파고 들어서 말할 수 없이 상쾌함을 느끼게 했다. 그 기분은 그녀가 아직까지 느껴보지 못한 것으로써 그녀는 더이상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아울러 그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버렸다. 그녀는 비록 마음으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몸은 도리어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여갔다. 등불빛 아래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아주 붉은 사과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소년의 눈에서는 다시 그 불타는 듯한 기이한 광채가 뻗쳐나오기 시작했으며, 손가락 끝은 이상하게도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주칠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멈, 멈춰요! 놔주세요. 나, 나는......." 그 소년은 입술을 그녀의 귀 밑에 갖다대고 가볍게 말했다. "당신은 진정으로 내가 손을 멈추기를 원하는 거요?" 주칠칠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며 말했다. "저, 저도 모르겠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발......."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