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6章 칠 일 동안의 밀월 ① 해안(海岸)은 그리 멀지 않다. 밤바다의 검은빛은 모든 번뇌(煩惱)를 머금은 듯 절대적이었다. 좌옥도는 천면공(千面功)으로 화신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정광(精光)만은 가히 경세적이다. 그는 저 멀리서 한 척의 배가 다가서는 것을 뱃머리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엽편주(一葉片舟), 배는 천천히 다가섰다. 배를 모는 자는 꼽추였으며, 볼품없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다분히 먼 거리지만 좌옥도는 밤의 사막에서 십칠 리 밖 낙타가 몇 마리 달리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시력의 소유자였기에, 그의 얼굴이 곰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봤다. 또한 눈빛이 지극히 어둡다는 것까지도! '저 자가 바로 죽음의 상인(商人)인가?' 좌옥도는 팔짱을 낀 채 상대가 자신의 배 가깝게 노를 저어 오는 것을 지켜봤다. "쿨룩쿨룩……!" 상대는 배를 젓는 일이 힘겨운 듯 가끔 기침 소리를 냈다. 하여간 배는 다가섰고, 좌옥도의 배에서 이십 장 떨어진 곳에 이르르며 멈추어 섰다. "왜 더 다가서지 않는가?" 좌옥도가 물을 때였다. 추레한 회삼으로 몸을 휘어 감고 있는 꼽추는 그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크…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중요한 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바꾸는 일이지. 여하튼 나는 경공을 쓰지 못하니, 귀하가 내 배로 건너와서 물건을 접수해 가기 바라오. 단 내가 바라는 다섯 가지 물건을 지니고 와야 하오." "흐음, 의심이 많은 자로군!" "상인이란 만사에 철저해져야만 생존하는 직업이외다." 회포꼽추는 히죽거리며 배 안을 덮은 거적을 제쳤다. 거적 아래 하나의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다. 슷-! 순간 좌옥도는 그보다는 작은 철괘 하나를 어깨에 멘 채 가볍게 떠올랐다. 그는 이십 장이라는 먼 거리를 단 한 번 몸을 날림으로써 사뿐히 가로질러 회포인의 작은 배 위로 날아 내렸다. 가히 가공할 경신술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가 지닌 철괘의 무게가 상당하거니와 그의 체격이 당당하기 이를 데 없으되, 무게를 거의 느끼게 하지 않는 부광약영(浮光躍影)의 신법을 시전하였기에 배의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내가 바라는 물건이 이 안에 있나 보군?" 좌옥도가 유의 깊게 나무 상자를 볼 때였다. "크크… 물건은 확실하오. 하니 귀하가 지니고 있는 물건부터 확인시켜 주시오." "좋아, 사망매자(死亡賣者)!" 좌옥도는 철괘를 가볍게 던졌다. 스르르……! 그것은 내공의 힘에 의해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느릿느릿 떨어져 내렸다. 사망매자는 히죽이며 뚜껑을 연다. 순간 일곱 가지 광채가 눈을 어른거리게 했다. "단풍혈옥적(丹楓血玉笛)에 천마사불선(天魔死佛扇), 그리고 혈룡뇌옥주(血龍雷玉珠) 한 상자, 그리고 인형설삼(人形雪蔘) 반 뿌리에다, 대막칠족(大漠七族)의 영지를 자유롭게 출입하고 하명(下命) 내릴 수 있는 신위를 지닌 대막금시령(大漠金翅令)… 프핫핫… 내가 바라는 모든 게 여기에 있군." "……." "이 중 세 가지는 천산설마(天山雪魔)가 백 개의 천년설련(千年雪蓮)과 바꾸고자 할 것이고, 한 가지는 막북금붕방(漠北金鵬 )이 세 마차의 금궤와 바꾸고자 할 것이고, 인형설삼은 천하검장(天下劍匠) 종야선생(鐘野先生)이 막내딸의 칠음절맥(七陰絶脈)을 구하고자 일백팔 자루의 파옥단금(破玉斷金) 예검(銳劍)과 바꾸고자 할 것이고… 후후……!" 사망매자는 주판알을 퉁겨 보며 더욱 짙은 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 좌옥도는 나무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했고, 회심의 미소를 애써 감추고자 노력해야만 했다. '오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물건이다. 지난 이백 년 간 강호의 모든 패웅(覇雄)이 이것을 얻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내 손에 쥐어진 이상, 나는… 전승(全勝)한다. 이제는 철붕비도 내 적이 못 된다.' 좌옥도는 칙칙한 빛깔의 쇠구슬이 가득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번쩍 쳐들었다. "어디서 이 귀한 물건을 구했는지 모르겠군." "크크… 그건 비밀이오. 그것을 만든 자는 몇 가지 비밀스러운 물건을 바랬고, 난 그것을 애써 구해 제공하고 그것을 얻은 것이오. 사망매자는 소규모 장사꾼이되, 입은 무거운 편이오." "좋아. 입이 무겁다는 것은 피차를 위해 유익한 일이지." "난 귀하가 누군지 모르오. 귀하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그 물건을 구하고자 했고, 난 그것을 갖고 있었기에 거래가 성립된 것뿐이오. 더 이상 깊은 사정은 알고 싶지도 않소." "나도 마찬가지!" 좌옥도가 다분히 만족의 동의를 할 때, 문득 사망매자의 음성이 약간 낮아졌다. "또한… 나는 귀하가 물 밑에 은잠해 있는 십여 명의 척살수(刺殺手)에게 지시를 내려 살인멸구(殺人滅口)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기 바라오. 귀하가 지니고 있는 그 물건 가운데 하나가 아직 내게 있으니까. 후후……!" 사망매자는 쇠구슬을 쳐들고 어루만졌다. '치밀한 자로군. 그러나……!' 좌옥도는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한다. "피차 피곤하지 않게 헤어지세." "내가 바라는 말이 그 말이었소!" "하하하… 거래가 끝났으니 이제 헤어지는 일만 남았겠군." 좌옥도는 웃으며 위로 떠올랐다. 휘이익-! 그는 기분이 즐거운 듯 한 줄기 맑은 휘파람 소리를 낸다. 파도 소리를 압도하는 휘파람 소리는 그가 흥취가 일어나 부는 휘파람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진 이전에 내린 살인멸구 지시에 대한 취소의 암호였다. 지금 배 바닥에는 거머리처럼 찰삭 달라붙은 열두 명의 척살수들이 숨어 있다. 그들은 거래가 끝나면 당장 사망매자를 죽이라는 명을 받은 바 있다. 하되 명령 취소의 휘파람 소리를 듣자, 즉시 배 바닥에서 떨어져 나가 해변으로 헤엄쳐 가기 시작했다. 삐이걱- 삐걱-! 사망매자는 나타날 때처럼 느릿느릿 노 저어 사라져 갔다. 밤바다 위에 안개가 짙게 깔렸기에 그의 모습은 한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좌옥도는 그가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쳐들었다. "어디… 물건을 시험해 볼까?" 그는 히죽이다가 쇠구슬 하나를 집어던졌다. 피잉-! 쇠구슬은 무서운 속도로 안개 속으로 날아들었다. 잠시 후였다. 쿠르르르릉- 콰쾅- 쾅-!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바다 속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좌옥도는 수십 장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부서진 배의 파편이 함께 치솟아 오르는 것도 함께 보았다. 그는 그 충격으로 자신을 태운 배가 전복될 듯 출렁이는 것을 막기 위해 천근추(千斤錘)라는 내공을 발휘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프핫핫… 과연 신용이 있는 장사꾼이로군. 기대 이상의 물건이다!" 그는 득의해 웃으며 내공의 힘으로 배를 이동시켰다. '후후… 생각한 이상의 위력이다. 이것은 무림인들이 금기로 여기고 있는 화기 가운데 최고라는 굉천화뢰(宏天火雷)! 이것은 강호의 역사를 새로 쓰는 대업(大業)에 쓰이리라!' 쐐애애액-! 내공으로 이동하는 배는 실로 빠른 속도로 해무(海霧)를 갈랐다. 이 밤이 지나기 전, 좌옥도는 칠백 리를 가야 한다. 그래야 집요한 순찰의 감시를 완전히 속여 넘길 수 있다. 좌옥도의 경공으로 따진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실로 오랜만에 건곤일척부에 투신한 지 삼 년 만에 그는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후후… 천하에 하찮은 두 명의 장사치들로 인해 나의 일이 한결 단축되는군. 이 모든 것은 하늘이 나를 강호의 제왕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② 일곱 번째의 밤이다. 목야성이 살화의 방 안으로 들어온 지는! 하되 그 일곱 번째 밤이 물러나기에는 아직 두 시진이 남았다. 목야성은 나뭇조각을 앞에 두고 있다. 사각- 사각-! 그는 목도(木刀)를 쥐고 나뭇조각을 정성껏 깎고 있다. "짜증나도 좀 참으라고!" "으음……!" 살화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얼굴 표정을 바꾸지 마라! 그럼 조각에 지장이 있다." 목야성은 천하태평해 하다가 가끔 호통을 쳤다. '대체 이해가 안 되는 자다. 이 아름다운 육체를 두고 조각이라니?' 살화는 목야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반했기에 밀월을 요구한 게 아니던가? 한데 나흘 전부터 밤을 세워 하는 일이 고작 조각이라니……? 조각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 살화는 세 가지 안공(眼功)을 발휘했다. 눈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질 때에는 비취망혼안공(翡翠亡魂眼功)을 시전하는 것이고, 황금색과 적광이 어우러진 빛이 뿜어진다는 것은 적금멸신안(赤金滅神眼)을 완성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가장 신비로운 오색(五色) 안광이 뿜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익히지 못한 오행환마공(五行幻魔功)마저 살화가 이미 십 성 수준으로 완벽히 터득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랴? 하되 어떠한 안공으로도 목야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아, 어쩌면 천하제일의 고수일지도……!' 살화는 목야성을 조롱하고 비웃다가 분노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러한 증오심은 묘한 존경심으로 뒤바뀌었다. 여하튼 새벽의 대기는 신선하고 청정(淸淨)하다. 목야성은 조각을 완성하며 환히 웃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해맑았기에 살화는 문득 망연해짐을 느꼈다. '순하기 짝이 없는 소년의 미소……!' 목야성의 미소는 청정무구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와서 봐라!" "호호호… 그 솜씨가 어련하려고요?" 살화는 습관적으로 비아냥거리며 일어나 다가갔다. 한순간 그녀는 혼을 상실한 듯 멍해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이 거기에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순수하고 슬픈 눈빛이다. 그 애련한 눈빛은 살화의 눈에 담기어 있는 처절과는 완전히 다른 진실한 슬픔의 눈이다. '아아, 이 얼굴은 바로 나의 얼굴이거늘… 어떻게 나의 얼굴을 조각한 나무 덩어리가 나 자신의 마음마저 울렁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살화가 당혹해 할 때였다. 슷-! 희고 차가운 손이 다가선다. 목야성의 손은 살화의 어깨를 휘어 감았다. 살화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난생 처음 닿은 남자의 손이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하되 그녀의 마음 속 교활하고 잔혹한 독아(毒牙)가 드러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 치워요!" 그녀가 저항하는 체 몸을 비틀어 빼내고자 할 때였다. "유감이구나. 내가 널 범하지 못하는 게!" 목야성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 살화가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목야성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히죽 웃었다. "젠장, 그 망할 놈의 의원으로 인해 성불능(性不能)만 되지 않았더라도 널 취할 텐데……." "……!" 살화의 얼굴이 밀랍처럼 하얘졌다. '그랬던가?' 살화의 일곱 밤 일곱 낮 내내 거듭되었던 고민은 한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이 자는 남자이되, 남자 구실을 못하는 고자였군. 그러하기에 나의 섭혼술이 신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살화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섭혼술을 익히고 있다고 한들 상대가 성불구자라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목야성은 다분히 감탄의 눈빛으로 그녀를 들여다봤다. "하여간 넌 아름답다. 다른 계집이라면 한 시진도 안 가서 권태를 느끼게 할 텐데, 그래도 칠 일 간이나 매력을 유지했으니… 여하튼 이제는 네 얼굴만 봐도 신물이 나는구나." "신… 신물……?" "빌어먹을!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바라는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권태감만 가중시키는 거야. 하여간 이 곳은 지겨워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겠다." 목야성은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살화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뭐라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입을 벌린 채 혀를 오므릴 뿐이었다. 상대가 성불구자인 바에야 유혹은 성공할 수 없다. 육천만 냥짜리 전표(錢票)는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녀는 강한 분노와 더불어 묘한 허무감에 휘감겼다. 그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의 파랑(波浪)이었다. '바보같이… 설마 내가 저 고자를 사랑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③ 목야성은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지난 칠 일(日)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칠 일이었다. 보름 내내 연극을 하고자 했다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고 피부가 주름에 뒤덮일 정도로 늙어 버렸을 것이다. '겨우… 겨우 참아 냈다.' 사실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살화를 안고 쓰러지고 싶다는 가공할 충동에 휘말렸었다. '천축불종비기(天竺佛宗秘技) 가운데 하나인 유마극정부동심법(維魔極淨不動心法)의 구결이 문득 생각나서 그것을 간혹 외워 성욕을 다스릴 수 있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난 한 마리 수캐가 되고 말았을 것!' 그는 극도의 절제력으로 성욕을 자제했을 뿐이지, 고자는 정녕 아니다. 아니, 어떤 사내보다 강인하고 불타는 정열을 지니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본다면 참지 못할지도…….' 그는 휘청거리며 무정도 끝으로 다가섰다. 그건 정녕 견디기 힘든 여체의 육향(肉香). 목야성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상대의 가슴을 쥐어뜯고자 했다. 살화! 그녀가 앞에 서 있다. 분명 조금 전 그녀의 방에서 나왔건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다. '아아, 이젠 더 이상…….' 그는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참았던 성욕(性慾)을 폭발시키고자 했다. 그 때였다.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손가락이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버린 것은! "음탕한 색마 같으니! 나만 보면 환장하는 처지에 어찌 살화라는 맛 좋은 통닭은 한입도 뜯어먹지도 않고 포기했는지 모르겠군." "으으, 넌… 쌍화?" 목야성은 중얼거리며 푹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는 순간 단숨에 혼절했다. 앞에 나타난 여인, 그녀는 살화가 아니라 옥쌍화였다. 너무 심한 살화의 심마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는 옥쌍화가 살화로 착시현상(錯視現想)을 일으켰던 것이다. 옥쌍화는 목야성을 안으며 살화의 거처 쪽을 바라봤다. 살화가 머무는 이층 누각, 그 곳에서는 가는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옥쌍화의 얼굴이 묘해졌다. '살화는 오직 한 가지 경우에만 피리를 분다. 슬퍼졌을 때에만… 하기에 지난 몇 년 간 누구도 살화의 피리를 듣지 못했다.' 삘리리리… 삘릴리……! 애수와 절망에 가득 찬 피리 소리이다. '어쩌면 살화가 이 자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옥쌍화는 목야성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는 만취한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갈수록 모를 자다. 용(龍)인지 개(犬)인지… 아아, 정말 알쏭달쏭하기 이를 데 없는 자다.' 옥쌍화는 느릿느릿 물가로 다가갔다. '이 자는 풋내기가 아니라 거성(巨星)일지도…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일지도! 또한 무공이 있으면서도 없는 체하고 있을지도! 부디 그런 자가 아니길 바란다. 그런 자라면… 내게 죽게 될 테니까!" 팟- 팟- 팟-! 옥쌍화는 등평도수를 시전하며 수면 위를 빠르게 걸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상한 망상이 맴돈다. 지금 즉시 이 곳을 탈출하여 심산유곡으로 들어간다면… 그리고 한 사내를 위해 옷을 만들고 밥을 짓고, 젖가슴을 옷 밖으로 드러내어 젖꼭지를 아기의 입에 물리고 젖을 빨린다면……. 지금 가슴에 안겨 있는 고약한 청년과 얼굴이 비슷한 귀여운 아기의 입에……. 찰나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망상이다. 패검(覇劍)을 완성코자 한다면 그러한 망상을 단말마(斷末魔)로 끊어야…….' 옥쌍화는 보다 빨리 이동했다. 그리고도 한참 동안은 더했을 게다. 삘리리… 삘리……! 살화가 부는 피리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호수 위를 휘돌았다. ④ 북창삼우(北窓三友)란 시(詩)와 금(琴)과 술(酒)이다. 과거 백거이(白居易)는 북창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칠현금을 퉁겼고, 그러다가 흥취가 나면 시를 지었다. 하기에 북창삼우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던가? 띠잉- 띵-! 목야성의 손가락 사이에서 금현(琴絃) 하나가 울려 난다. 그가 거처로 들어온 지 어언 이틀. 그는 술을 마시고 칠현금을 퉁기기도 하는 바, 만사에 제멋대로인 그의 언행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여간 그가 칠현금을 퉁기기에 열중할 때였다. 아까부터 그를 면밀히 살피고 있던 옥쌍화가 입술을 떼었다. "내일은 연무관을 견학하셔야 합니다." "무사들이 무공을 연마하는 곳에 가라고? 그렇게 지겨운 일을 왜 내가 해야 한단 말인가?" "그건… 일종의 의무입니다." "의무? 빌어먹을!" 목야성은 짜증을 부렸으며, 옥쌍화는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개구쟁이 같기는!' 그녀는 활짝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거두었다. '헤프게 웃다니… 어찌하여 이 자 앞에 서기만 하면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심마(心魔)의 바람이 흘러드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옥쌍화는 애써 이를 악물었다. 이어 그녀는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변했다. "살화는 곧 떠날 것이외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목야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심히 대꾸했다. "호호호… 하긴 그럴지도. 여하튼 남아가 되어 그러한 진정한 미인을 소유한다는 것은 대야망이 될 만한 목표지요." "난 한 여자를 오래 사귀는 성질이 못 돼. 그건 지독히 권태로운 일이지." 목야성은 다분히 지겹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마음 속을 흐르는 말은 표정과는 달리 심각한 것이다. '건곤일척부가 살화를 강호에 내보내는 이유를 안다. 이들은 살화로 하여금 강호를 동요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살화의 미모는 마력이다. 그건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이다.' 솔직히 말해, 목야성은 지난 이틀 내내 살화를 보고 싶다는 망상에 몸부림쳤다. 지금 이 순간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옥쌍화의 얼굴을 보기만 하더라도 살화의 얼굴이 겹쳐 떠오른다. 누가 감히 그 아름다운 눈빛의 저주스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대체 누가? 여하튼 옥쌍화는 목야성의 일정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살화의 환각에 젖은 목야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윽고 옥쌍화는 방 안을 나서기 시작하며 차갑게 덧붙여 말했다. "강호인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절정무공을 지닌 무사들의 진정한 존경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후후…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사람 죽이는 일밖에 없는 자들의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 "……." 옥쌍화는 문득 서서 목야성을 빤히 쏘아본다. 목야성은 실실 웃으며 그녀를 마주 봤다. 옥쌍화의 눈은 차갑고 어둡다. 반면에 목야성의 눈빛은 부드럽고 가볍다. 강호인들이 보기에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눈빛이다. 그러한 눈빛은 최하급의 눈빛이라 할 수 있다. 무사가 되어 그러한 눈빛을 흘린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인지도……! 하되 지금 이 미묘한 눈싸움의 상황에서 먼저 시선을 돌리는 쪽은 목야성이 아니라 옥쌍화였다. '저 눈빛만 보면 번뇌가 생긴다.' 옥쌍화는 이를 악물다가 훌쩍 떠올랐다. 팟-! 그녀는 탄지지간에 모습을 감췄다. 방 안에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왔음에 틀림이 없는 은근한 체향(體香)이 사과 껍질의 냄새처럼 고요히 퍼지고 있다. 목야성은 한동안 칠현금만 만졌다. '옥쌍화의 차가운 매력은 살화의 매력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심금을 울리게 하는 은근한 매혹을 품고 있다. 긴 세월을 두고 생각한다면… 살화는 잊혀져도 옥쌍화는 망각되지 않을지도!' 띵- 띠딩-! 그는 다시 금현을 뜯었다. 청아한 소리가 창(窓)을 넘어간다. 목야성은 칠현금 퉁기기를 멈추고 왼손을 쳐들었다. 그의 왼손에는 가공한 잠력(潛力)이 숨어 있다. 그 힘은 점점 더 강화되었고, 현재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목야성 자신도 측량하지 못할 지경이다. '구마륵을 죽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철붕비를 제거하는 일은 예측 불허하다. 중요한 것은,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한 가지 조건만 형성된다면 능히 성공할 수 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일(一) 장(丈) 안으로 단축이 된다면……!' 그는 천천히 술잔을 쳐들었다. 술잔은 금(金)으로 만들어졌다. 금잔 가득히 여아홍주(女兒紅酒)가 고여 있다. 그는 술을 한 모금에 비워 버린 다음에 술잔을 허공에 집어던졌다. 직후 그는 눈을 슬쩍 감았으며, 술잔은 떠올랐다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느끼어진다. 술잔의 움직임이!' 목야성은 왼손을 슬쩍 내밀었다. 찰나지간이다. 팟-! 술잔은 탁자 위에 떨어지기 직전에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져 금분(金粉)으로 화하고 말았다. 아아, 그것은 강호의 절정고수라도 흉내내지 못할 완벽한 일(一) 초(招)였다. '무공을 조롱하였으되 어쩔 수 없이 터득해야만 한다. 강호를 어지럽히고 흑도 마도를 지배하는 자, 또한 천하 상권을 장악하고 백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 인간으로 불사신을 가장하는 자… 불사신마 철붕비! 그 자를 죽이기 위해 일 초를 창안해야만 했다. 그것은 일컬어 건곤일척수(乾坤一擲手)! 그래, 건곤일척수로써 건곤일척부를 산산이 괴멸시키자.' ⑤ 거의 구천(九千)이다. 너른 연무장을 가득 메운 무사들의 수효는. 그들은 삼천 명이 하나의 군진(軍陣)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이진(二陣)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상태였다. 무사들이 소지한 병기는 목검(木劍)도 아니고 목도(木刀)도 아니다. 그것은 철검(鐵劍)이었다. "몸에 닿아도 베어지지 않게끔 날(刃)이 제거된 철검입니다. 그러나 완력이 깃들어진 철검에 맞는다면 살이 뭉그러지고 뼈가 갈라집니다. 하기에 한 달에 한 차례씩 치러지는 대연무(大練武)가 끝나고 나면 부상자가 천 명 이상 속출하며, 심지어는 죽는 자들도 있습니다." 옥쌍화는 망루(望樓)에 서서 진형을 설명했다. 지금 두 남녀는 가장 높은 망루 위에 서 있다. 그 곳에 서서 아래쪽 무사들이 연무하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옥쌍화는 목야성이 진형진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여기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야성은 세 개의 진세가 풍운뇌궁(風雲雷穹)이라는 진세와 천기돌출진(天騎突出陣), 그리고 군화난락진(群花亂落陣)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그리도 위험한 연무라면 모두들 몸을 사릴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실전처럼 열심히 합니다. 왜냐하면 강한 자만이 무사로 대접받기에, 그리고 약한 자는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기에!" "지독스러운 법이군." "강한 자가 살고, 약한 자는 죽습니다. 그 곳이 바로 무림입니다." 옥쌍화가 말하는 사이 세 개의 진세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하압-!" "타앗! 풍운만변-!" 수천 명이 일제히 부르짖는 기합 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게 한다. '철붕비… 그의 저력은 생각 이상이다. 건곤일척부는 일반 마도 집단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단련되었으며, 기강이 엄격하여 누구도 사사로이 행동하지 않는다. 강호에 대해 잘 알진 못하되, 어떠한 백도방파라 하더라도 이토록 완벽한 체제를 지니지 못한다.' 건곤일척부의 힘은 전율, 그 자체이다. 목야성이 확인한 무사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칠만(七萬)에 육박한다. 그 숫자만 따진다면 과거의 마도 거대 방파에 비해 크게 뒤진다고 할 수 있다. 하되 그들은 하나같이 정예로 단련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곤일척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이다. 철붕비의 인간 경영은 철두철미한 바, 어떠한 무사라 하더라도 그의 공평무사함에는 존경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카카카캉- 휘류류류-! 무사들이 뒤엉키며 검풍(劍風)이 충천한다. 여기저기 검에 맞아 쓰러지는 무사들이 속출한다. 하지만 비명 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무사들은 혼절할지언정 항복하지 않았고, 기절하는 그 순간까지 철검을 놓는 자도 없었다. 목야성은 내심 심각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만에 하나 철붕비가 제거된다고 가정할 때, 누가 이들을 통솔할 수 있는가?' 목야성은 투철한 목표를 지니고 이 곳에 왔다. 그러나 이 곳에서 며칠 지내는 가운데 마음에 상당한 동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얼마간 파악한 바, 철붕비는 대악인으로 여겨서만은 안 될 자이다. 그가 없다면 흑도 마도는 분열될 것이고, 무수한 혈겁이 연속되리라. 일컬어 이독제독(以毒制毒)이랄까? 철붕비로 인해 당금 강호 정세가 안정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는… 사라져야 한다!' ⑥ 목야성은 지상의 연무장 견학에 이어 지하에 건축되어 있는 구대연공관(九大練功關)을 돌아봐야만 했다. 구대연공관 안에는 숫자 미상의 무사들이 머물러 있었는 바,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건곤일척부의 진정한 힘일지도……. 지상에서 그리도 열심히 연무하는 무사들의 목표는 적어도 옥패검수(玉牌劍手)의 지위에 올라 구대연공관에 들어가 건곤구법(乾坤九法)을 전수받는 것이 아니랴? 검장권지(劍掌拳指), 경공(輕功), 암기술(暗器術), 내공(內功)과 외문병기술(外門兵器術), 그리고 마지막으로 익히게 되는 것은 전문적인 살인(殺人)이다. 목야성은 천경각(天經閣)을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또한 천경각의 절대금지(絶代禁地)이며, 천외군화전(天外群花殿)과 불사존부(不死尊府)와 더불어 삼대금지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고 있는 금서전(禁書殿)으로 접어들 수 있는 사 인(人) 가운데 하나였다. 금서전에는 심오난측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는 비급이 삼백여 권 보관되어 있다. 옥쌍화는 목야성이 따분한 눈빛을 흘리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다른 무사라면 이 곳에 와 비급을 보는 것을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여길 것이거늘, 이 자는 귀찮아하는 표정이니…….' 목야성은 서가를 쓰윽 둘러보다가 옥쌍화를 바라봤다. "여기 있는 책을 본다고 하여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누구든… 초인(超人)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내공이 없는 한, 사상누각의 초식일 것이지만……!" "살인이란 혐오스러운 일이지. 한데 무사란 족속들은 살인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으니… 쯧!" "무공은 살인 기술 이상의 것입니다." "천만에, 그것은 하찮은 것일 뿐이야." "하되 누군가를 죽이고자 한다면 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외까?" "그렇기는 하지." "호호호… 목 공자는 이 안에서 이제까지의 견해를 고치게 될 것이라고 대종사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인생 최초로 살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살인을? 어처구니없군." "여하튼 이 책만은 이 곳에서 보셔야 합니다. 이건 대종사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옥쌍화는 한 권의 책을 가리켰다. 그 책은 투명한 수정갑(水晶匣) 안에 들어 있다. <척살십팔예(刺殺十八藝)> "고금에서 하나하나의 전설을 이룩한 십팔 명 대살수(大殺手)의 독문절학을 기록한 서적입니다. 그 책은 대종사가 태상봉공 목야성 공자께 하사하는 예물입니다. 그 책을 보신다면 천하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본다면 누구라 하더라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목야성은 호기심이 동하는 듯 수정갑을 열고 척살십팔예경을 펼쳤다. 상당히 얇은 책이다. 책 속에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열여덟 가지 초식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근접한 거리에서 시전될 수 있는 초식인 바, 그리도 많은 무공비급을 암기하고 있는 목야성이었지만 그 안에서만은 알고 있는 초식을 단 일곱 개만 찾아 냈을 뿐이다. '가히 공포로군.' 목야성은 애써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는 척살십팔예경을 대충 훑어보는 척하다가 수정갑 안에 넣었다. "따분한 내용이야." "호호… 검에 대해 야망이 계신 분이라면 그 책을 보는 것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 책에 몰두하시게 되었을 텐데……!" "나의 관심은 두 가지뿐이야." "……?" "황금과… 미녀!" "흥, 치졸하기는!" "후후… 나는 철저한 속물(俗物)이다. 황금은 모든 것을 소유케 한다. 하기에 황금을 좋아하지. 그리고 미녀란… 직접적인 최고의 쾌락을 주지. 그러하기에 미녀도 좋아하고!" 그는 묘한 눈길로 옥쌍화를 바라봤다. 옥쌍화는 그의 눈빛이 묘해지는 걸 보고 그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쌍화, 너도 일종의 미인이지. 후후… 네가 바란다면 너를 나의 첩실명단(妾室名單)에 끼워 주마." "방… 방자한 소리는 그만하십시오. 감히 날 첩실로 만들려 하다니……!" 옥쌍화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얼마 전 목야성은 음험하게 그녀의 둔부를 주무르지 않았던가? 흡사 떡 주무르듯이 말이다. 다른 자라면 그러한 사실을 비밀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목야성은 아예 속물임을 자처하고 그러한 사실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살인보다야 정사(情事)가 좋지 않느냐?" 목야성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성정(性情)이 들어 있었기에 옥쌍화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이를 악물었다. "그 따위 시선은 살화에게나 던져요." 옥쌍화는 목야성을 만나면 때때로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하되 이상하게도 내심에는 늘 그러한 시선을 받고 싶다는 묘한 흥분이 일어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점점 더 내 마음이 동요되다니… 절대 안 된다.' 옥쌍화는 애써 마음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목야성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가슴에 폭넓게 자리잡았다. '저 천박한 속물의 뇌리에는 동물적 욕망만 가득 차 있다. 내가 어찌 저런 속물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가?' 옥쌍화는 애써 무정해지고자 노력하며 동시에 강한 살기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살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여하튼 신비한 자다. 전형적인 속물인 듯하지만 무서운 정신의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어리석음을 가장해 천하를 속이는 자일지도! 하여간 이 자의 마각(馬脚)은 곧 드러난다. 이 자는 살인이라는 암시(暗示)에 걸려 있다. 이 자가 정녕 나의 생각대로 복안을 여러 개 지닌 자라면… 곧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옥쌍화는 초연한 표정 가운데 입술을 떼었다. "한 가지 충고할 말이 있습니다." "또 무슨 지겨운 소리를……?" "살인무관(殺人武關)에는 가지 마십시오." "왜?" "그 곳의 관주는 총관주이기도 한 구마륵입니다." "구마륵이라? 그 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거기에 가지 말라고 하며, 그 자의 이름을 거론하느냐?" "그 자는 능히 목 공자를 죽일 자입니다." "왜 나를……?" "호호… 칠 년 전 잠룡보에 일어난 비극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옥쌍화의 말은 목야성을 흠칫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어찌 그 일을 잊으랴? 그 일은 그의 인생 궤도를 바꾸어 버린 청천벽력이 아니었던가? 구마륵이라는 천한 무사가 아버지를 시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짜 전형적인 장사꾼이 되어 강호를 종횡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무사 집단과 모든 무공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도 갖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구마륵은 그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 "구마륵은… 당시 백만 냥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상부의 계산은 그로 하여금 마도 집단 천녀옥살교(天女玉煞敎)를 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는 천녀옥살교주와 간통을 하고 있었는 바, 천녀옥살교 대신 잠룡보를 택해 혈겁을 일으킨 겁니다." "으음……!" 목야성의 눈가가 보일 듯 말 듯 떨린다. 새로운 사실이다. 이로써 칠 년 전의 일에 건곤일척부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알아 냈다. 적어도 옥쌍화의 성격으로 미루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옥쌍화의 말은 계속된다. "그 자는 그 일로 인해 칠 년 유형(流刑)의 벌을 받았고, 최근에야 복귀하였는 바… 여기 오기 전 또다시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위신을 깎이고 말았습니다. 이건 그가 거두고 있는 흑도무사들이 워낙 많고, 지지기반도 큰 데다가 수하를 철저히 아끼시는 대종사의 철학으로 인해 극형을 면제받고 총관주로… 이 일을 알려 드리는 이유는, 언제고 알게 되실 일인지라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옥쌍화는 그렇게 말하며 목야성의 표정을 살폈다. 목야성은 천천히 그녀를 쳐다봤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희디흰 치열이 드러났다. "다 지난 일이야." "복수할 생각이 없나요?" "아버님은 돌아가시지 않으셨어." "하되 폐인이 된 것으로 아는데……?" "그 덕에 내가 어린 나이에 상계(商界)의 대권을 쉽게 잡게 되었지." "아……!" "후후… 구마륵은 일종의 은인(恩人)이지. 그로 인해 나의 인생이 보다 화력하게 꽃피우게 된 셈이니까." "……." 옥쌍화는 넋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썩어도 철저히 썩은 자로군.' 옥쌍화의 가슴 속에서 자라났던 모든 환상이 한순간 뭉개졌다. '속물! 돼지만도 못한 패륜아!' 찰나 옥쌍화는 감정의 사슬이 끊어짐을 느꼈다. 그래도 눈앞의 사내, 제멋대로 냉막하고 오만히 말하는 목야성은 외모 하나만으로도 모든 여자를 흥분시킬 수 있는 그런 미남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