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6章 正과 邪의 友情 천우산(天宇山)- 하늘을 우롱하듯 우뚝 솟은 거대한 천우산은 운남성(雲南省) 곤명성(昆明城) 인근에 자리한 명산이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천우산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공할 광채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육 개월 동안 그 광채는 천하를 뒤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사자후가 터져올랐다. [크하하핫...드디어 이룩했다. 천원신경, 그리고 부족했던 무공들을 극한까지 이루었도다!] 포효는 장장 세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혁사린은 육개월 동안 모든 신공을 통합하여 완벽하게 터득한 것이다. 천하령보(天下靈寶)인 생환금령불이 혁사린의 체내에 완전히 융합되었다. 이제, 혁사린은 천하사상 가장 위대한 대초인이 된 것이다. 촤아아--- 천우산 전체가 가공할 광체에 휩싸였다. [우---우---우---우---] 동시에 천지를 떨쳐 울리는 장소성과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혁사린이었다. * * * 향도성(香道城)- 중원제일의 색향(色鄕)이었다. 대낮에도 휘영청 홍동이 밝혀져 있으며 천하 영웅호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강상화화루(江上花花樓).> 향도성에서도 가장 유명한 기루다. 그곳의 기녀들이 하나같이 절색이란 점도 그러하지만 더욱 유명한 것은 강의 중앙에 칠층(七層)으로 건립됐으며 매 층마다 칠십여 개의 기방이 있다는 것이다. 정녕 방대하기 그지없는 기루였던 것이다. 정오 무렵, 일신에 눈부신 백의를 걸친 유생이 향도성으로 들어섰다. 그는 안색은 약간 창백했으며 특징이 없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두 눈은 갈색이었다. 갈색 눈은 보는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신비감마저 들게 했다. 뿐인가? 칠흑같은 머리카락은 묶지 않아 폭포수처럼 치렁치렁 했다. 하지만 여인의 고운 결보다 더욱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두 눈동자와 더불어 묘한 매력마저 풍겨주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 이 삼 세 정도에 이르러 보였다. 백의유생은 서서히 성으로 들어선 뒤 주루를 향했다. 주루는 왁자지껄 하기 이룰 데 없었다. 그는 이층에 자리를 잡은 뒤 간단하게 술과 요리를 주문했다. 백의유생은 창밖의 푸른 강물을 응시하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지난 육개월동안 강호는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지옥갱은 아무런 행동도 없다. 대폭발로 인해 모두 죽었기 때문일까? 다만 혈무연...그들은 미친 듯이 광란하고 있으며, 백마도는 죽음의 백마령을 뿌리고 있다.) 백의유생은 천우산에서 모든 무공을 익힌 혁사린이었다. 혁사린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누가 혁사린에게 광세절학을 지녔다고 하겠는가? 문득 혁사린의 시선이 강물 중앙에 우뚝 서 있는 강상화화루에 못박혔다. (후후훗...꽃은 나비를 부르고 나비는 꽃을 꺾으려 하지.여인...인생에 있어 가장 포근한 것이야...)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한데 그때였다. 언제부터인지 한 쌍의 시선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혁사린의 예리한 직감은 그것을 간파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상대는 대략 이십 이 삼 세 정도였으며 지극히 깨끗하고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일신에 걸친 청의가 더욱 돋보였다. 특히, 그 청년의 두 손은 옥보다 희고 섬세했다. 일순 혁사린은 한 가지 생각에 떠올랐다. (전설에 의하면 남자의 손이 저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데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옥수천심경(玉手天心經) 상에 적힌 무공을 익혔을 때 저런 증상이 나온다.) 그렇다면 청의청년이 전설의 옥수천심경을 익혔단 말인가? 그때였다. 청의청년은 혁사린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이어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노형, 같이 한 잔 하는 것이 어떻겠소?] 혁사린은 미소를 지었다. [바라던 바요. 소생은 혁사린(赫獅麟)이라 하오.] 청의청년은 맞은 편에 앉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좋은 이름이오. 소제는 사공표(司空飄)라 하오.] [사공표...] 혁사린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진천옥수향(震天玉手香) 사공표(司空飄). 혜성처럼 나타나 당금 무림을 뒤흔드는 절대마인이었다. (으음...이자가 진천옥수향이라니...놀랍구나.) 혁사린은 내심 중얼거렸다. 진천옥수향 사공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소제가 마인이라 실망했소?] 혁사린은 정색을 했다. [아직은...]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사공표는 고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가 없소. 마인은 무엇이기에 항시 고독해야 하오? 마인은 진정한 친구가 있어서는 안된단 말이오?] 그의 음성은 약간 격앙된 어조였다. 그 순간 절대마인인 진천옥수향 사공표의 미간에 어리는 짙은 고독을 혁사린은 보았다. (그렇다. 마인이라고 해서 외면을 당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마인은 천하군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공표...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장부다.) 사공표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노형, 사람이란 제각기 뜻이 있소. 다만 나는 마음을 숨기는 것이 싫었을 뿐이오. 그것이 지금의 마인을 만든 것이오. 아니, 어쩌면 나는 마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혁사린은 진심으로 웃었다. [사공형! 나 혁사린은 그대가 좋아지고 있구료.] 일순 사공표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혁형.] [사공형.]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정과 사의 우정(友情)! 훗날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게될 진정한 우정은 이렇게 꽃피우고 있었다. 사공표는 격동을 누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혁형, 오늘 소제가 잔을 올리겠소.] 혁사린은 씨익 웃었다. [사공형, 우리는 이제 친구이네. 어찌 존대를 하는가?] [하하하핫...좋아,좋아!] 사공표는 하얀 옥수로 혁사린의 어깨를 내리쳤다. [어이쿠! 이사람...어깨 부러지겠네.] [하하핫!] 사공표는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호탕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진정한 친구를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공표는 이내 정색을 했다. [가세! 여기서는 마음놓고 취할 수 없네. 내가 강상화화루로 안내하겠네. 그곳에서 열흘 밤낮을 취해보세.] [하하하...좋으이!] 그들은 동시에 일어나 주루를 나섰다. * * * 강상별원(江上別院)! 강상화화루 중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여기에 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호쾌하기 이룰 데 없는 웃음이 강상별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하하핫---!] [하하하...] 띠딩---딩---! 아울러 아름다운 선율이 흥을 돋구고 있었다. 혁사린과 사공표는 술잔을 마주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장부끼리의 술잔에 향기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법! 그들은 미색이 뛰어난 기녀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혁사린의 품에 안긴 기녀는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혁사린이 누구인가? 천하요부인 요미(妖美)의 기예보다 더욱 뛰어난 이 방면의 명인(名人)이 아닌가? 영웅은 주색(酒色)을 멀리하지 않는 법! 사공표 역시 그 방면에 대단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하하핫...자네 정말 대단하군.] 혁사린은 기녀의 둔부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하핫...자네 역시 놀라워...] 일순, 혁사린의 품에 안긴 기녀가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아얏! 아이...공자님 아파요!] [오오...미안하구나, 실수다. 실수!] 혁사린은 기녀의 터질 듯한 가슴을 소중스럽게 어루만졌다. 혁사린의 품에 안긴 취월(翠月)은 색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용모 역시 지극히 빼어났다. 그녀는 혁사린의 품에 찰싹 안겨 연신 황홀한 교성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공표 옆에 앉아 있는 매향(梅香)은 남자 다루는 기술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섬섬옥수로 금(琴)을 타면서도 연신 사공표에게 추파를 건내고 있었다. 사공표는 천천히 말했다. [매향, 이제 그만 하거라.] [예...] 매향은 금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놓았다. 사공표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매향...오늘은 마음껏 취해야 할 것이다. 강상화화루의 술을 모조리 다마셔 버릴테다. 하하핫...] 매향은 곱게 눈을 흘겼다. [아이...싫어요. 공자님이 취하시면 소녀는 어떻게 해요?] [오! 그런가?] 혁사린이 빙그레 웃었다. [매향, 너는 오늘 저 친구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도록 해라. 그렇게 한다면 상으로 은자 백 냥을 주마.] [어멋---정말이예요?] 매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사공표는 취월을 향해 말을 건넸다. [취월, 너는 저 친구의 입에서 항복했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녹여버려라. 그렇게 한다면 이백 냥을 주마.] [어머!] 두 기녀는 연신 아름다운 교성을 토했다. [허허헛---어림없지. 나는 이곳을 떠날 때까지 취하지 않을 뿐더러 이방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기 싫으니 말이다.] 혁사린은 술을 쭈욱 들이키며 말했다. 혁사린 주량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주선을 능가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터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잔을 비웠다. 사공표의 주량 역시 대단했으나 서서히 취하기 시작했다. [사린...정말 기쁘네. 자네를...만났고...또...우정을...] 그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두 눈을 흐릿하게 떴다. 혁사린은 웃었다. [후후훗...자네의 주량은 보잘 것 없군. 벌써 취했으니 난 이젠 누구와 대작한단 말인가?] [무...무슨 말! 자, 자...드세...들어...] 사공표는 술잔을 들어 올리다가 이내 손을 떨구었다. [이런 빌어...먹을...안되겠군. 내일 다시 하세. 내일은 자네가 떨어질...테니...] 그는 그대로 탁자에 옆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며 매향을 응시했다. [그를 잘 모시도록 해라.] [예.] 매향은 곱게 대답한 뒤 사공표를 힘겹게 부축하며 이내 방을 나섰다. 혁사린은 이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마셨나? 전에는 아무리 마셔도 피곤한 줄을 몰랐는데...) 그는 이같이 생각하며 취월을 바라보았다. [취월, 피곤하구나.] [예!] 취월은 재빨리 일어나 혁사린을 안듯이 부축했다. 그리고 취월은 혁사린은 침상에 눕힌 후 자신은 침상에서 반 장여 물러섰다. [...] 혁사린은 기이한 눈빛으로 취월을 주시했다. 그 순간, 스르륵... 취월은 섬섬옥수를 가슴으로 가져가며 서서히 풀어헤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삽시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나신이 되었다. 취월의 몸은 여느 여인의 몸에 비해 풍만하고 성숙해 보였다. 따라서 사내라면 그 누구라도 한번쯤은 푹 빠져보고 싶은 그런 정열의 분화구와도 같이 보였다. 모든 것이 황홀하기만 했다. 그러나 취월의 그런 나신을 바라보는 혁사린의 눈빛은 너무도 무심했다. 마치 여인의 나신을 수 없이 보아 왔기에 감정이 없는 듯해 보였다. 일순 취월의 교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전혀 느낌이 없다. 감정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뜨겁다. 그런데 왜...? 저자의 정력이 이미 경지를 넘어섰단 말인가?) 경악의 눈빛이 빠르게 취월의 눈가를 스쳤다. 혁사린은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구나. 이제 그만 옷을 입도록 해라.] [...!] 취월의 나신이 또 한차례 떨렸다. (무슨 남자가! 그러나 반드시 굴복시키리라.) 취월은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붙잡으며 다가섰다. [아이...공자님, 어서 소녀를...으음...] 그녀는 혁사린의 목을 두 팔로 인어(人魚)처럼 휘어 감았다. 그러나 혁사린은 여전히 무심했다. 아니, 여체가 안겨 올수록 더욱 냉정해 지는 것 같았다. [취월...어서 옷을 입으라니까...] [아이...싫어요. 어서...소녀를...으음...] 혁사린은 쓴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그는 이미 취월의 나신에 밀려 육중한 중압감을 느껴야 했다. 뜨거워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여체의 굣격은 그 어떠한 병기보다도 무서웠다. 하지만, 혁사린에게는 그 여체가 무의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으흥...공자님...어서...] 취월은 거의 필사적으로 몸을 부벼댔다. 뿐인가? 그녀의 나긋나긋한 섬섬옥수는 혁사린의 옷을 비집고 있었다. 그 순간 혁사린은 취월의 행동을 가볍게 제지시켰다. [취월...그만 자거라.] [아이...싫다니까요.] 여인의 육체가 꿇어오르면 그 어느 것으로도 식힐 수 없는 법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작은 폭발은 남자에 의해 식혀지기 전에는 더욱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혁사린은 난처한 기색을 띄웠다. 취월은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아아...공자님!] 그녀는 나신을 저돌적으로 밀며 혁사린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한데 어느 한순간 취월의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혁사린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이었다. 취월은 돌연 침상 옆에 있는 보일듯 말듯 한 투명한 줄을 번개같이 당겼다. [아앗!] 혁사린은 깜짝 놀라는 소리를 발했다. 그러나, 침상에 묘하게 뒤집히며 혁사린은 그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호호호호!] 취월은 간드러진 교소를 토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혁사린에게 암수를 썼단 말인가? 약간 어둠이 깃들어 있는 지하실(地下室)이었다. 혁사린은 철로된 의자에 묶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발과 손목도 끊을 수 없는 한철(寒鐵)로 둘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역시 똑같이 당한 사공표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공표은 술이 깬듯 혁사린을 보며 생긋 웃었다. [사린, 옛말대로 여인은 조심해야겠군.] 혁사린 역시 싱긋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빌어먹을.] 자신들이 포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 그들은 너무도 태연했다. 혁사린은 서서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에는 휘장이 가려져 있었으며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사공표가 혁사린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여인의 뜨거운 육체가 저절로 생각나는군.] [그러게 말일세.] 그 순간이었다. [호호홋...풍류객다운 말을 하는군요. 진천옥수향, 당신은 아직까지도 그럴 여유가 있나요?] 평생을 들어도 지겹지 않을 옥음이 휘장 뒤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크!] 혁사린은 짐짓 탄성을 발했다. 이어 그는 이죽거리는 음성으로 휘장을 향해 말했다. [낭자, 혹시 우리 두 사람과 한바탕 변태적인 사랑 놀이를 하기 위해 연극(演劇)을 한 것은 아니오?] [닥치세요!] 여인의 앙칼진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사공표가 히죽 웃었다. [사린, 저 분 낭자는 자네보다는 나와 어울리는 것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군. 미안하네.] 혁사린은 맞장구를 쳤다. [웃기지 말게. 저 분 낭자는 나를 더 좋아할 것이네.] [아니야, 나는...] [허어! 이사람, 글쎄 아니라니까...] 이런 상황에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가 있단 말인가? [흥!] 휘장 안으로부터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천옥수향,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잡혀 왔는지 아나요?] 사공표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나는 매향에게 전혀 짖궂은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그의 능청에 휘장 안의 여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곧 알게 될거예요.] 그리고 다시 혁사린에게 말했다. [당신의 모습은 특이하기 이룰 데 없군요. 그것으로 보아 강호의 고수인 듯한데...아닌가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여 고개를 저었다. [고수? 당치않은 말이오. 나는 단지 사공표, 그 재수없는 친구를 알게 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이오. 그러니 저 친구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고 나를 보내주시오.] 사공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야! 이 친구야...재수는 누가 없나? 자네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마굴에 떨어지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뭐? 나는 죽던 말던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사공표는 핏대를 올렸다. 찰나 휘장안에서 옥소가 터졌다. [호호호호...과연 두 분은 침착하기 그지없군요. 때문에 당신들을 암계에 빠뜨렸는지도 몰라요.] 교소가 들리며 한 여인이 휘장을 걷으며 서서히 걸어나왔다. [꿀꺽!] 일순 혁사린과 사공표의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그녀는 일신에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한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 이십 삼세쯤 되었을까? 여인의 용모는 정녕 하늘도 감탄할 정도로 절세적이었다.특히 몸매는 천하를 통털어 가장 아름다울 것이었다. 피부는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린...너는 저렇게 뛰어난 미인을 본적이 있느냐?] [없어...정말...눈이 부시군.] 혁사린은 힐끗 사공표를 응시했다. 사공표 역시 혁사린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홍의여인은 두 사람을 응시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예요.] [선택?] [그래요. 혈무연(血霧淵)의 제자가 될테니까 말이예요.] [혈무연!] 혁사린과 사공표는 흠칫했다. [호호호...두 분은 혈무연의 칠십육혈영대(七十六血影隊)의 일원이 될 거예요.] 일순 사공표의 두 눈에서 야릇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홍의소녀는 방긋 웃었다. [내 마음대로에요.] 그 순간, 사공표는 자신의 손과 발을 묶고 있는 한철을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낭자! 이 따위 고철로 나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오.]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철이 산산조각나는 것이 아닌가? 파파팟! 사공표는 이어 서서히 일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후후훗...자네가 일어나니까 나도 일어나야겠지?] 혁사린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서서히 일어났다. 피시시... 손과 발을 묶은 한철은 마치 눈 녹듯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아!] 사공표와 홍의소녀는 이에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공표는 이내 씨익 웃었다. [자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군.] 혁사린은 손목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친구인 자네가 무공을 하는데 내가 전개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하하...맞아, 맞아.] 사공표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일순 홍의소녀가 재미있다는 듯 교소했다. [호호호...우쭐되지 말아요. 아직 이곳을 떠난 것은 아니니까...] 스스스스... 때를 같이하여 사방 벽이 열리며 수십 명의 혈의인들이 뛰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혁사린과 사공표는 묵묵히 그들을 응시했다. 혈의인들을 제각기 다른 병기를 들고 있었다. (으음...한결같이 뛰어난 고수들이로군.) 두 사람은 암중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홍의소녀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결정을 하세요. 순순히 무릎을 꿇느냐, 아니면 죽음을 당하느냐 말이예요.] 죽음이 아니면 투항, 둘 중의 하나인가? 사공표는 옆의 혁사린을 응시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죽음 보다는 사는 것이 백 번 좋지. 하나...저들을 모조리 제거하면 더욱 좋지.] 그러자 사공표가 대소를 토했다. [하하하...좋아! 그럼, 자네가 처리하게.] 혁사린은 정색을 하며 두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자네가 하게. 혹시나 내 긴 머리카락이 잘리기라도 한다면 어찌하겠나?] 사공표는 푸념을 해댔다. [빌어먹을...할 수 없군. 그럼 뒤에서 나쁜 짓을 하는 녀석을 요리해 주게.] [후후후...그 정도는 해줘야지.] 혁사린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공표의 신형이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때를 같이하여 홍의소녀의 명령이 떨어졌다. [쳐랏!] 파파파팟---! 일시에 가공할 살기가 전체를 뒤덮었다. [크---아---악!] 사공표의 눈부신 손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흰손이 한 번 허공을 그을 때마다 피와 살이 튀였다. (음...옥수천심공...역시 무섭구나.) 혁사린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홍의소녀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다. 혁사린은 묵묵히 사공표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공표는 혈의인들에 의해 엄밀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야! 이 친구야, 좀 도와주면 안돼? 우두커니 구경만 하고 있기야!] 그는 혁사린을 향해 연신 고함을 질렀다. [허어...! 그 친구, 말이 많군. 이크, 뒤를 조심하게. 도가 날고 있네.] 혁사린은 그러는 한편 슬쩍 왼쪽 소매를 휘둘렀다. 파츠츠츳--- [크아아악---!] 사공표의 뒤를 공격하던 자는 혁사린의 강기에 의해 석벽 깊숙이 박혀버리고 말았다. [으흑...] 홍의소녀는 이에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가벼운 한동작에...무공이 강한 자라고는 생각했으나 저토록 심후할 줄이야...) 혁사린은 홍의소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냈다. [크---아--악!] 비명은 쉴 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홍의소녀의 입에서 앙칼진 음성이 터져나왔다. [혈궁십이대(血弓十二隊)!] 쉬이익--- 돌연 사방에서 가공할 혈전(血箭)이 폭사되며 혁사린의 전신을 엄습해왔다. (헉...무서운 기세다. 능히 바위도 뚫을 수가 있겠구나.) 혁사린은 폭사되어 오는 혈전을 응시하며 재빨리 강기를 펼쳤다. 파파파팟--- 무시무시한 음향이 일어 혁사린의 전신에 정확하게 열 두개의 혈전이 박혔다. [호호호홋...] 홍의소녀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동시에 열 두 명의 혈의궁인들이 번개같이 나타났다. 화살 하나가 거의 칠척에 이르렀다. 강철이라 해도 여지없이 관통될 것이었다. 열 두 명의 혈의궁인이 나타나는 즉시 시위를 날렸다. 그리고는 사공표를 겨냥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하하핫...열 두 분, 혈전을 돌려주겠소.] 전신이 화살이 박혔던 혁사린의 입에서 우렁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파파팟---! [아앗--] [크아아악---!] 열 두 명의 혈의궁인들은 일제히 목에 혈전이 꽃히고 말았다. 그들은 그 여세를 못이겨 그대로 석벽에 가서 깊숙히 박힌 채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다. [네...네놈이...] 홍의소녀는 말을 하다말고 흠칫했다. 비명이 끊겨진 것이었다. [후후후후...] 사공표는 손을 툭툭 털며 다가서고 있었다. 혁사린은 강기로써 혈전을 막고 또한 혈전이 몸에 박힌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그는 홍의소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낭자,이제는 혼자가 되었구료.] 홍의소녀는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그때였다. 취월과 매향이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앗!] 그녀들은 처절한 참상에 질겁을 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홍의소녀는 가공할 장력을 쏟아낸 뒤 번개같이 휘장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혁사린은 예상이라도 한 듯 야룻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신형을 날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혈무연...그녀는 분명 혈무연으로 갈 것이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실 그는 홍의소녀를 통해 혈무연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홍의소녀를 제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휘장 뒤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은밀한 통로가 있었다. 혁사린은 가볍게 중얼거렸다. [후후훗...홍의소녀...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몹시 좋군.] 그는 폭풍야의 추적술을 익혔기에 인간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로 어디든지 쫓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전혀없는 것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홍의소녀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빠르군! 이미 백 장 밖...) 문득 혁사린은 문득 크게 경악하며 급히 신형을 날렸다. (냄새가 옅어지고 있다. 이럴 수가...그렇다면 그녀는...) 스스스슷--- [...!] 혁사린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홍의소녀는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상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공할 무학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녀의 무공으로 반항도 못했으니...) 문득, 그는 홍의소녀 바로 옆바닥에 나있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혁사린은 글을 읽어 보았다. <흐흐흐...혈무연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실수의 대가는 곧 죽음 뿐이다.> [으음...] 혁사린은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그때 사공표가 당도했다. [사린?] 혁사린은 손가락으로 글을 가리켰다. 사공표는 흠칫했다. [그렇다면...홍의소녀는 동료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이군.] [그렇네. 잔인한 위인들이지.] 혁사린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두 계집은?] [저승으로 보냈네.] [음...] 혁사린은 무거운 신음을 토한 뒤 말했다. [혈무연...그들은 은밀히 무림인을 끌어들이고 있네. 그것을 막아야하네. 또한 이 소녀의 용모로 보아 미인계(美人計)를 쓰고 있는 듯하네. 그러나 대책이 없지 않는가?] 혁사린은 깊게 생각했다. [방법을 생각해야지.] 사공표가 잠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는 서서히 마기에 젖고 있네. 그것을 지켜야 하네.] 혁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문득 사공표는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사린, 자네와 잠시 헤어져야겠네.] 혁사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공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의 옥수문(玉手門)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나?] [옥수문?] [하하하...자네에게만 말하겠네. 나는 옥수문을 창건했네.어쩌면 당금 무림을 위해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자네가 문주?] 혁사린이 크게 경악했다. 사공표는 혁사린에게 묘한 시선을 던졌다. [후후후...내가 문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옥수문을 창건할 때 이렇게 정했다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진정한 벗이 생긴다면 그에게 문주 자리를 주겠다고 말일세.] [...!] 혁사린의 안면 근육이 가볍게 떨렸다. [하하하하...이제 결정했네. 옥수문주, 그는 바로 자네일세. 자네, 하하하핫...] 스스슷... 사공표의 신형이 자세 그대로 바람에 밀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혁사린은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외쳤다. [표, 자네가 밑질텐데...왜 어렵게 세운 문파를...] 멀리서 사공표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핫...내가 멍청하기 때문이지. 이제 말할까? 자네와 천하둘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나는 자네를 택할 것이네. 그것은 자네가 나의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일세.] 진천옥수향 서공표! 그는 친구를 위해 자신이 세운 문파를 양보할 정도로 천하대장부(天下大丈夫)였다. 아니, 천하를 마다할 정도로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혁사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훗...자네가...나 제마신협을 감동시키는군. 나 혁사린을...] 진정한 우정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되어서는 안되며, 그 무엇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뜨거운 사나이들의 영원한 철혼(鐵魂)이 되어야 한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