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던 TBC 텔레비전의 한 생방송 쇼프로 시간이었다.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를 비롯한 포크 가수들의 아기자기한 무대가 있고 난 뒤 프로의 진행자는 출연 가수들과 함께 갑자기 숙연한 목소리로 다음 순서를 소개했다. "오늘 정말 중요한 한 분을 모셨습니다. 우리 음악에 새로운 획을 그은 위대한 분입니다."
나이가 37살인 그 주인공은 둘러메고 나온 일렉트릭 기타가 몸보다 더 커 보이는 왜소한 체구에 생김새도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그 이름은 신중현. 이전까지 음악계에서는 꽤나 유명했지만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그가 연주하고 노래한 곡 '미인'은 방송하는 순간 즉각 히트되었고 다음날에는 전국을 메아리치며 삽시간에 3천만의 애창곡으로 울려 퍼졌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그 여인이 누구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따라 불렀지만 며칠이 지난 후 이 곡은 대마초파동과 가요규제 조치로 금지곡의 철퇴를 맞으면서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흔한 '애창가요선집' 악보 책에도 이 곡은 물론, 그의 노래 전부가 쏙 빠져버렸다. 신중현은 졸지에 언론을 통해 '대마초 가수'로 낙인 찍혔고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들에게도 서서히 잊혀져 갔다. 1980년 활동규제가 풀리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불러 재기했지만 결코 커다란 반향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음반활동을 펼쳤지만 대다수 음악팬들은 그의 작품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신중현이 모습을 드러낸 뒤 흐른 40년의 세월을 돌아볼 때 솔직히 그를 오늘날 말하는 스타였다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팬들의 열띤 환호성도, 오빠부대도 그에겐 없었고 재미있는 얘기로 신문 잡지에 오르내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인기를 누렸던 딴 인기가수들이 세월과 함께 사라져갔어도 그는 추억으로 묻히지 않고 아직도 이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음악인이다.
아들보다 더 어린 가수들이 그를 '한국 록의 대부'라고 추앙하며 그의 이름을 단골로 언급한다. 최근 월드컵 붐을 상종가를 기록중인 윤도현도 "우리 록의 모든 시작은 신중현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1996-97년 가요계엔 갑자기 '신중현바람'이 불었다. 우리 뮤지션들, 특히 록을 하는 가수들은 그의 산을 올라가야 진지한 뮤지션이 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7년 신중현의 음악을 기리는 후배가수들이 트리뷰트 이른바 헌정앨범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23년 전 TBC 프로에서 출연가수들이 그랬듯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여기까지 끌고 오신 신중현 선생님께 이 음반을 바칩니다"라는 충심의 헌사를 전했다.
1960-70년대를 장식했던 음악을 기록하고 정리할 때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선두 자리에 선다. 지금 록 뮤지션들에게도 영향력에 관한 한 선두이다. 작은 체구이면서도 우리 대중음악의 거목 또는 거장이란 표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를 직접 만났다. 전화를 걸었을 때 "내가 그런 곳에 나올 만한 인물이 되나?"하며 겸손했지만 막상 만나자, 그는 자신의 음악과 흘러간 시절을 마치 암기해놓은 듯 막힘 없이 술술 풀어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로데오거리 소재의 그의 집무실이자 개인 스튜디오인 '우드스탁'은 16년 생길 때의 바로 그 자리에 변함없이 위치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일렉트릭 기타 수대와 더불어 드럼세트 등 악기들과 녹음장비로 가득했다. 돈이 생기면 모조리 이 곳에 쏟아 부은 걸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아마 국내에서 음악관계자 치고 이 곳을 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걸요"라며 운을 뗐다.
"이 곳을 사두셨다면 지금쯤 가격이 많이 올랐을 텐데요"하자 "월세입니다. 제가 돈 쪽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하며 그 문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했다. 이야기를 데뷔할 시점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도리어 피곤하고 시간 낭비하는 것으로 판단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불편할 질문일 것 같지만 어차피 나올 얘기라서 먼저 묻습니다. 음악인으로서 신중현은 1970년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3공화국 그리고 유신 시절과 분리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영광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통제와 억압으로 그 때를 기억하실 듯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또는 그 시대와 어떤 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까?
불편한 게 아니라 지겨울 뿐입니다. 너무나 많이 받은 질문이라서. 1972년이었어요. 당시 정치적으로는 평온하다가 갑자기 유신 독재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시절이었고 나는 1970년대 전후로 일련의 히트곡을 터뜨리면서 가요계에서 '최고'자리에 올라있을 때였죠. 어느 날 청와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누군 지도 모르고 통화는 한 5-6분 정도로 짧았어요. 내용인 즉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박정희 찬가를 불러달라는 거였죠.
난 대뜸 '난 그런 노래는 쓸 줄도 모를 뿐더러 왜 하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했어요. 그쪽이 들었을 때는 내 어투가 퉁명스러웠거나 건방졌는지는 몰라도 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부의사 자체를 아마도 그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정권 차원에서 부탁한 것인데 막상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어쩌면 영광일 수도 있고. 하지만 특정인 찬가는 내 음악과 맞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전 순수하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 특정인 누굴 찬양하고 미워하는 수단으로 곡을 만들지 않습니다. 음악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그런 노래는 해서는 안되지요.
또 솔직히 이러한 점도 있었겠지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나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내심 박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거죠. 취임 초기 한 약속인 민권이양도 지키지 않았고. 거기에 제 자부심이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이래봬도 신중현인데'하며 나름대로 목에 힘주던 시절이었죠.
-그 사건 이후 구체적으로 어떤 수난을 당하셨나요? 그에 대한 반항으로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한마디로 음악하기 힘들어졌지요. 우선 공연에 늘 경찰이 단속 나왔습니다. 이상하게 전화사건 이후 정치적 상황은 노골적인 독재로 변해갔습니다.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진 저는 도리어 독재자가 아닌 우리나라의 강산과 국민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자 생각했어요. 그게 1972년 그룹 '더 맨' 시절의 '아름다운 강산'이었고 그 때 MBC 토요일 쇼프로에서 출연해 이 곡을 불렀습니다. 출연은 오히려 제가 제의했어요.
그 방송에서 리드보컬인 박광수는 삭발을 했고 멤버들은 귀 주변에 머리핀을 꼽아 긴 머리를 걷어올려 장발을 더 부각했어요. 한마디로 강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거죠. 그게 미웠겠지요. 이걸 본 고(故) 육영수여사는 만들라는 박대통령 노래는 안 만들고 반항한다며 분을 터뜨렸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장발단속이 더 심해졌고 제 곡은 계속 금지 처분되었습니다. 결정타는 말할 것도 없이 1975년에 터진 대마초 파동과 가요규제 조치였지요.
신중현은 가요역사상 최대 사건으로 기록된 1975년 대마초 파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당대 인기 포크가수들이 줄줄이 붙잡혀간(27명 구속, 9명 입건)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바로 신중현이었다. 당시 언론이 그에게 붙인 딱지는 '대마초왕초'였다. 당시 사건이 몰고 온 충격이 워낙 컸기에 4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아직 기성세대들은 신중현으로부터 '불온과 퇴폐'의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 얘기가 나오자 흥분할 법도 했지만 신중현은 의외로 차분하게 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내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조였다.
-어떤 경위로 대마초왕초에 지목된 것입니까. 당시 선생님의 음악은 히피들의 음악인 사이키델릭이라는 것이었고 그게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관련음악이었으니까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이는데요.
제가 미8군 쇼에서 한창 날리던 때에 사이키델릭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용산 AFKN 미군방송에 출연해서였습니다. 미군들 사이에서 제가 인기가 높다보니 절 초청해 녹화를 하게 됐는데, 끝나고 나서 녹화 테입을 보았더니 화면의 디자인이 찌그러지고 마구 돌고 총천연색에 너무도 현란하더라구요. 사이키델릭 수법을 구사한 거죠. 순간 앞선 사조인 히피들의 사이키델릭 록을 알아야겠다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외국 사이키델릭 관련 곡도 연주해봤고 가요로도 만들었죠.
그랬더니 국내 미국인들한테는 더 호응을 얻었어요.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는 유난히도 미국사람, 특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히피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사랑과 평화를 주창한 그 친구들은 예상외로 온화했고 젠틀했습니다. 또 록음악을 무지 좋아했어요. 공연이 끝나면 갈 데가 없어서 제가 집으로 데려가서 잠도 재워주고 고기도 먹이고 했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감사의 선물로 준 것이 바로 대마초인 마리화나였어요. 얼마나 많이 주던지 방에 몇 봉지가 굴러다닐 정도였으니까. 이게 알려지고 난 뒤 인기가수들이 저한테 '마리화나 있어요?'하고 물으면 난 별 뜻 없이 '우리 집에 산더미같이 쌓였다'고 말하며 건네주기도 했죠. 나중 대마초 사건 때 그들이 취조 받으면서 내 이름을 언급했고 그래서 졸지에 '대마초왕초'로 둔갑한 거죠.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가뜩이나 미움을 받고있던 차에 제대로 걸린 신중현은 1974년 12월 마리화나 조달책으로 지목되어 당시 남대문시장 여성회관 지하의 마약사범 고문실로 연행된다. 거기서 그는 물고문을 당하는 등 말못할 고생을 겪었으며 4개월간 수감되었다. 이것으로 그의 음악 전성기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만다. 그것은 비단 신중현만의 고초로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대중음악 전체의 압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중음악의 밑거름이라고 할 '자유'의 싹이 잘려버린 것이다.
신중현은 "대마초사건은 그 이전까지 잘 길을 닦아온 우리 음악의 수준과 기(氣)를 단숨에 꺾어버렸다"며 아직도 분노의 심정을 거두지 않는다. 음악가의 창작적 자유와 실험정신이 척박한 이 땅에 새로운 음악문화를 축조하고 견인해온 주체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그 길을 틀어막은 유신시대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938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중퇴 후 일렉트릭 기타연습에 몰두하다 자신에게 기타를 배우려고 찾아온 미8군 쇼단의 한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입성했다. 미8군 무대는 이로써 그의 음악경력의 서막이면서 동시에 신중현이란 존재 덕분에 한국 록음악의 발상지로 남게 된다. 1960년, 나이 스물 둘에 그는 미군 정보부 소속 '시빌리언 클럽'에서 최초로 기타 독주공연을 가져 미군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마침내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그리고 뉴 밀레니엄인 지금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록밴드 결성'을 감행한다. 그것이 한국 최초의 록그룹이란 영예를 얻은 '애드포'(Add4)였다.
-애드포의 시작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누구는 1962년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1963년으로 적혀있어 자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요.
1963년이 정확할 겁니다. 제가 기타를 맡고 노래는 서정길, 베이스는 한영현, 드럼은 권순권이었는데 미8군 무대에서 연주를 했죠. 당시는 록밴드의 바람이 전세계적으로 불 때였어요. 거기에 힘입어 밴드를 만든 겁니다. 그룹의 개념으로 볼 때는 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앞선 것이었죠.
-시기적으로 영국의 비틀스와 겹치는데 그룹 결성이 비틀스의 영향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룹을 만들고 나니까 비틀스의 바람이 영국을 강타하고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때 '어? 비틀스가 우리랑 같네'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결코 비틀스 붐에 뒤늦게 편승해 뭔가 해보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뿐이죠. 물론 나중 비틀스 때문에 유니폼을 착용하기 위해 옷도 맞추고, 'I want to hold your hand' 같은 곡을 연주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빗속의 여인'이 실린 애드포의 첫 앨범을 만든 때는 1964년 가을, 그러니까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하고 난 뒤였던 것은 맞습니다. 시민회관에서 녹음할 무렵 비틀스의 미국정복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음반은 겨울에 냈는데 당연히 나오자마자 죽었지요.
-이후 덩키스, 퀘션스, 제로악단, 캄보밴드 등 일련의 록밴드를 결성하지만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요. 그런데도 밴드란 형태를 지속해나간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신기할 정도입니다. 나름의 어떤 의중, 중심적 사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밴드생활을 할 때나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써줄 때나 저는 명확한 개념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 시절은 음악취향의 갈래가 여럿으로 나뉘어있었습니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의) 트로트가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고있었고, 음악감상실에 출입한 대학생들은 팝송에 빠져있었고 어른들은 점잖은 스탠더드 팝을 듣던 시기였어요. 한마디로 그 형편에 록은 하기 어려웠지요.
하지만 전 트로트가 아니면서도 현대적인 리듬과 화음을 쓴 우리만의 대중음악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미8군 때에도 "나 혼자라도 이런 방향으로 나가면 되겠다"고 되뇌곤 했으니까요. 이를테면 '내가 한국인이니까 외국의 록을 해도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었지요.
좀 전문적으로 말하면 서양은 주로 장조, 동양은 단조가 일반적입니다. 자동차 크럭션 소리를 들어도 외국은 장3도고, 동양은 단3도예요. 전 '단조를 가지고도 장조 기분을 낸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거기에는 설령 내가 외국의 것을 하더라도 한국 땅에 태어난지라 한국적 특색과 사운드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깔려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가수들에게 준 곡은 거의 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반면 밴드는 '미인'의 '엽전들'을 빼고는 결성한 것들마다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좀 아이러니한 결과입니다. 말씀하신 음악의 방향을 달리 잡았던 건가요?
밴드는 아무래도 실험적인 측면이 보다 강했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게 반드시 실패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밴드는 공동행위라서 멤버간의 결속력이 중요해서 만들기가 힘들고 따라서 일관성이 떨어졌을 뿐입니다. 게다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시는 록 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러나 이건 있어요. 제가 '캄보밴드' 등을 통해서 재즈를 할 때 통감한 것인데 해보니까 '역시 재즈는 미국의 것이구나' 하는 생각, 즉 내 영역이 아니더라는 쪽으로 귀결됐어요. 반면에 남에게 준 곡들은 아까 말한 접점이 상대적으로 잘 만들어져 나왔어요. '미인'이나 '아름다운 강산'은 그룹 때의 곡이지만 그런 점에서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것 아닐까요.
-선생님은 이전 가요계가 작사 작곡자가 나뉘어진 풍토에서 작사 작곡을 다 하셨어요. 어쩌면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 때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더러 대중음악의 귀재 천재라고 칭하는 듯 합니다. 작곡의 지향은 알겠는데, 그럼 작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사운드의 패턴은 확립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잘 나가다 항상 작사에서 걸립디다. 외국의 멋진 록에 우리 가사를 붙여 부르면 유치한 느낌, 바로 그런 것이었죠. 그래서 2년을 작사에 대한 연구로 보냈습니다. 그 결과 '그러나' '따라서'와 같은 접속사를 안 쓴다, 받침이 없는 언어를 주로 고른다 등의 방법을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음(音)에 따라 잘 흘러가는 언어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렇기 위해선 되도록 쉬운 말, 내용은 설령 없더라도 감정이 생겨나는 말의 전개가 이뤄져야 했습니다. 가령 '빗속의 여인'의 경우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로 시작하는데 가사만 들어도 정말 그림이 떠올라야지요. 그래야 제대로 된 작사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사를 잘 소화해 표현하는 가수 개인의 역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가수의 생명은 가사를 얼마나 리얼하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역시 음악가답게 음악 얘기에는 절로 흥을 냈다. 아마도 그의 음악경력에서 가장 찬란했고 빛났던 시점은 김추자, 펄 시스터스 등에게 주요 히트곡을 써주며 당대 최고의 작곡자와 프로듀서로 풍미했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 걸치는 시기였을 것이다. 비록 밴드경력은 불우했지만 이 분야에서만큼은 그 무렵 '신중현사단'이란 말까지 낳으며 경이로운 성공행진을 거듭했다. 심지어 앨범에 대한 호응을 유발하기 위해 펄 시스터스든 박인수든 사단 소속가수들은 너도나도 '신중현 작·편곡집'이란 말을 앨범 커버에 붙여야 했다. 신중현의 맹활약으로 인해 한국의 록은 물론 전 대중음악이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이었다.
-신중현사단은 어디에서 붙여준 표현입니까. 그 사단에 소속된 주요 가수들을 소개해주시고,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떤 가수가 능력이 가장 뛰어났는지도 궁금합니다.
사단은 언론에서 띄워준 표현입니다. 제가 써준 곡을 불러 히트한 가수가 잇따라 나오니까 그런 말을 썼겠지요. 시작은 이정화였습니다. 나중 딴 가수들이 히트시킨 '꽃잎' '봄비'와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반응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월남으로 가수 활동하기 위해 떠났어요. 다음이 바로 펄 시스터스였습니다. 실은 나도 월남전 특수를 겨냥해 월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펄 자매에게 써준 '님아'가 크게 히트하면서 월남행을 포기했어요. 이어서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최고가 된 김추자가 나왔고, '봄비'의 박인수 그리고 리메이크를 많이 한 장현, 임아영 그리고 김정미 등이 이어졌죠. 김정미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노래가 많았는데 성공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가수요? 누구랄 것 없어요. 모두 저마다의 가사 전달력과 표현세계를 소유하고있던 인물들이었지요. 한마디로 '수준'이 있었어요. 요즘 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만 이 얘기는 하고싶네요. 제 경험으로 볼 때 역시 가장 노래를 잘한 것은 죄다 첫 앨범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집중력도 있고 때가 덜 묻어서 그렇다고 생각되는데, 성공해서 조금 유명해지기라도 하면 슬슬 목에 힘이 들어가요. 그러면 음악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뮤지션에게 중요한 건 역시 '순수한 자세'라는 말입니다.
-신중현사단 가수들이나 그룹 시절의 음악을 찬찬히 들어보면 '한국 록의 대부'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러 색깔의 장르들을 구사하고있는 점이 발견됩니다. '커피한잔'은 록 스타일인 반면, '봄비'는 흑인음악인 소울입니다. 더러 재즈의 냄새, 스탠더드 팝의 분위기를 지닌 노래들도 있고 컨트리풍의 노래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 음악가들에게는 발견하기 어려운 다양성입니다. 그러한 멀티 플레이는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것은 미8군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을 겁니다. 미8군 클럽무대는 하나의 음악 갖고는 활동이 불가능했어요. 출입하는 군인들의 출신성분에 따라 음악이 달랐죠. 가령 제가 출연한 '에어맨스' 같은 클럽은 하급병사들이 출입했고 '엔씨오' 같은 업소의 손님은 상사나 병장이 많았습니다. 또 '업소스클럽'은 장교들이 주로 출입하는 곳이었어요. '에어맨스'에선 주로 로큰롤, '엔씨오'는 컨트리, '업소스클럽'은 스탠더드 팝을 해야 했습니다. '에어맨스'에서 품격 있는 스탠더드 팝을 하면 야유를 받았어요.
또한 클럽이 어디에 위치했는가에 따라, 부대의 흑백 병사에 따라 항상 성격에 어울리는 음악을 미리 준비해야 됐습니다. 부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급히 편곡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지요. 음악을 많이 듣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클럽활동이 뭡니까? 요즘 말로 라이브 아닙니까? 제 경험을 두고 말하지만, 많은 곡을 듣고 연주하며 라이브를 해야 다양한 음악이 나오지요. 최근 라이브에 대한 요구가 일고있는 것으로 아는데,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음악은 '멀티 문화'가 아니면 죽습니다.
-지난 60-70년대를 석권한 선생님 음악의 정체를 한두 마디로 규정한다면 뭐가 될까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감히 말하자면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은 역시 로큰롤이고 그것이 지배한 시대가 60-70년대였습니다. 로큰롤은 젊음의 순수함 그리고 자유의 표현물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한 작업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로큰롤로 음악의 자유를 실천했다는 것이겠죠. 너무 딱딱한 말인가요? 그만하죠.
신중현의 존재는 그러나 결코 한국 록의 시조라는 과거 역사의 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남긴 곡들이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후배가수들에 의해 줄지어 재조명되면서 30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도 관통하는 강한 생명력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미인'은 봄여름가을겨울에 의해, '님아'는 신효범에 의해, 그리고 '님은 먼 곳에'는 조관우와 장사익에 의해 되살아나 가요계에 이른바 리메이크 열풍을 몰고 왔다. 지난해에는 김건모가 40여년 전에 만들어진 '빗속의 여인'을 불렀다. 이것은 비단 그가 가요사의 거목이란 이유 외에 독창적인 음악성이 가져온 소산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신중현의 음악은 '천재적인 화음 전개'라는 측면에서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도 그 비범함을 인정한다.
-일각에선 선생님의 요즘 음악은 너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과거처럼 대중적인 히트곡을 다시 쓰실 수는 없는 겁니까? '미인' 같은 곡은 지금 나와도 신세대 감각에 호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도 히트곡을 낼 수 있습니다!(크게 웃으며) 하지만 노년이 된 지금은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 마무리할 시점입니다. 수구(守舊)하는 것은 보기 안 좋아요. 죽기 전에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해놓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 음악의 결정판은 아직도 나오질 못했어요. 맘에 꼭 드는 곡, 앨범을 내지 못해 여기 이렇게 쪼그리고 있는 겁니다.
-근래 음악의 환경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뮤지션들도 선생님 때와는 스타일, 자세, 음악의 서술방식 등 모든 면에서 판이합니다. 요즘 음악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리 외국음악을 해도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필요해요.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보유한 정서, 고유의 얼, 가락, 장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한국음악을 하기 위한 '근본'이에요. 근본을 바탕으로 하고 나서 공감할 수 있는 외국의 것을 받아들여야지요. 이 점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외국의 것을 무차별로 수입해 방향감각을 완전 상실했어요.
매스컴도 전혀 분간을 못해요. 설령 그런 음악인이 있어도 미디어는 주목하지 않아요. 프로제작하기에 급급해서 우리의 창조적 문화는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문화를 메인에 놓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신중현씨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음악세계와 지향을 설명하다가도 한끝에는 어김없이 근래 우리 가요와 가수에 대한 안타까움을 달아놓으며 이 시대 음악에 대한 실망을 피력했다. "지금 진정한 음악은 죽었다"며 요즘을 '거짓말 음악이 판치는 시대'라고 격하게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손자와도 같은 후배가수들에게 당장의 인기에 대한 집착과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죽기살기로 음악 하는 고행(苦行)'의 태도를 보여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오는 가을을 기해 두 가지 회심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하나는 '미련' '떠나야 할 그 사람' '늦기 전에' '님아' 등 그간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 18곡을 새로이 연주 편곡한 모음집을 출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야외 대형무대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이다. 앨범의 의도는 "모든 장르가 다 나와 한바퀴 돌아도 천연히 가치를 발하는 음악, 그 진실한 음악만이 누리는 영생(永生)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며 공연은 '라이브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음악사의 거장이란 찬사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역사와 대중에 대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제공하려는 서비스 콘텐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침 PR비 사태로 일그러진 우리 가요계에 대한 궁극적 처방전처럼 들렸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그의 말은 뇌리에 계속 메아리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