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하다. 한국의 대표적 암산(岩山)인 주왕산, 그 산정에서 성큼성큼 걸어내려 온 '골기(骨氣)'가 계곡 인근 마을을 방음벽처럼 둘러싼다. 울림은 더욱 증폭되고.
조선조 철종 때도 그랬으리라. 고~고~고~. 청송군 진보면 부곡리의 한 지점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권세를 버리고 진보면 부곡리로 낙향한 금부도사 권성하(權成夏), 그가 그 소리를 확인하러 밖으로 나간다. 닭장에서 새어나온 소리가 아니라 암공을 통해 지하수가 용천하는 소리였다. 이 암공은 그가 며칠 전 동민들과 합세해 수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갈증을 느낀 그는 표주박으로 약수 한 모금을 받아 먹었다. 순간 그의 양미간이 일그러진다. 이런 물맛은 난생 처음이었다. 약수에 바늘이 달린 것처럼 혀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심지어 피냄새까지 났다. 그는 독물을 먹은 것 같아 뜬눈으로 보낸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의 표정은 되레 더 밝아보였다. 평소 늘 더부룩하던 속이 더없이 쾌청해진 것이다. 그는 그 물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고 다음날부터 머슴을 시켜 떠온 약수를 장복한다. 권성하가 그 약수탕을 신성시하자 주민들도 더욱 그 약수를 아끼게 된다. 닭소리를 낸 이 약수탕이 훗날 '달기'란 명칭을 갖게 된다.
조선조 한 보부상이 영덕에서 청송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헉헉거리며 달린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명문가 집안의 혼례식에 맞춰 약속한 물품을 넘겨주기 위해 마라톤 선수처럼 뛴 것이다. 영덕과 청송의 경계, 황장재 아래 첫 동네 진보면 신촌리에 도착하자 그는 더 뛰지 못하고 기진맥진해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물 먹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 암반에서 졸졸 새어 나오는 약수를 발견한다. 보부상은 그 물맛에 반해 동료들에게 알려줬고 얼마 안돼 이 사실이 전 보부상에게 퍼진다. 간고등어를 만드는 안동의 간잽이들도 황장재를 넘어와선 집에 가서 먹을 약수를 큼지막한 호리병에 담아갔다. 훗날 청송 출신의 소설가 김주영은 그런 사연을 안고 살아간 보부상들의 삶을 진보면 신촌리를 배경으로 해서 대하소설 '객주'로 엮어냈다.
이 두 토막의 구전이 오늘의 청송 달기와 신촌 약수탕 시대를 연다. # 청송약수엔 철분·칼슘·마그네슘 등 각종 미네랄 풍부
랫동안 청송 약수의 신비한 성분은 분석되지 못했다. 1999년 5월 계명문화대 식품영양학과 이성호교수가 '달기약수의 수질 특성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은다. 약수에는 철분, 칼슘, 마그네슘 등 각종 미네랄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함유돼 있었다.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돼 반향을 일으킨다. 2000년 여름, 하루 평균 2천500여 명이 몰렸다. 위장병, 빈혈증 등 성인병 치료에 효력이 있다는 소문 탓이다. 하지만 아직 이 성분들이 몸에 얼만큼 좋은지를 알려주는 정확한 임상분석 결과는 없다. 너무 많이 먹는 건 오히려 해로울 것 같다. 승용차에서 내린 아낙네들이 생수통에 물을 꼭꼭 다져 넣어 간다. 청송 약수가 너무 헤퍼진 것 같다. 그래도 약수에서 철분 냄새가 강하게 진동한다. 설탕을 첨가하면 완전 사이다 맛이다. 그래도 왠지 그 물로 끓인 닭백숙이 훨씬 웰빙스러울 것 같다.
# 위장병 걸린 남성·빈혈앓는 여성들 청송으로 청송으로…
1970년초만 해도 솔직히 청송에는 '닭백숙 특수'가 일지 않았다.
닭백숙 특수는 100여년간 지속된 소문에 힘입어 형성된 '약수 특수'와 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청송으로 몰려온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고 온 것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주왕산이 국립공원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국도망이 정비된 탓이다. 주왕산이 국립공원이 되기 전만 해도 청송은 '경상도 속 강원도 오지'로 각인됐다. 대구동부정류장에서 출발한 청송발 시외버스는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거의 종일 달리다시피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런 길도 마다 않고 청송행을 감행해야 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속앓이 환자들이었다. 특히 위장병에 걸린 남성들과 철분이 부족한 빈혈 앓는 여성이 많았다.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된
닭다리로 만든 신촌닭백숙
달기 원탕약수
신촌약수
달기약수탕 상가
신촌약수탕 상가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송으로 갔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아이들까지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함께 청송으로 와 약수탕 옆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숙식 조건이 가장 원활한 여름철 약수탕 주변은 졸지에 텐트촌으로 변했다.
"내가 없을 동안 아이들과 잘 지내시오. 이번에 청송 약수터에서 도를 닦듯 위장병을 치료하고 돌아올테니…."
아내와 자식을 두고 쌀과 식기를 챙겨 비장한 각오로 청송으로 가는 가장들도 흔치 않았다. 거의 '유배행'이나 진배없었다. 약수는 하루 이틀 먹어 효험을 못 본다. 어렵게 나선 길, 금방 돌아올 수는 없었다. 짧으면 1주일, 심지어 '유배살이'처럼 1년 넘게 그곳에서 비장하게 물을 마신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는 약수탕 주변 농민들도 외지인을 상대로 장사할 줄 몰랐다. 민박 개념조차 없는 그들이었다. 외지인들은 알아서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차츰 외지인들이 농민들의 장사욕구를 부추긴다. 하나 둘 구멍가게가 생기고, 다음엔 텐트를 밀어낸 여관, 다음엔 닭백숙집이 연이어 생겼고 급기야 달기·신촌 약수 닭백숙 상가가 형성된다.
# 발전적 경쟁관계에 놓인 선발주자 달기· 후발주자 신촌
선발주자는 달기, 후발주자는 신촌이었다.
달기에는 40여개, 신촌에는 29개 업소가 밀집돼 있다. 주왕산 관광객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은 달기다. 영덕 방면에서 올 경우에는 신촌에 먼저 도착한다.
신촌 약수는 지난해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었다. 그 해 4월 일흔을 바라보는 한국 동양화단의 기인, 야송(野松) 이원좌씨(68)가 신촌 약수탕촌 옆에 세워진 군립 야송미술관 관장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 덕분에 신촌 닭백숙이 새롭게 어필되고 있다.
달기는 청송의 대표적 약수인 반면 신촌은 '꽃돌 마을'로 수석인들로부터 인기가 좋다.
달기에서 유래깊은 식당은 대구식당. 고인이 된 함한국씨가 1950년부터 시작한 모친의 가업을 이었고, 함씨의 아들 동우씨가 3대 사장으로 하탕 주변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신촌의 경우 원탕 옆에 있는 매일식당이 50년대부터 명맥은 잇고 있지만 주인은 몇 번 바뀌었다. 토착성이 강한 식당은 신촌의 경우 매일, 신촌, 영신, 포항, 청송, 대구, 남경, 새미정, 88, 안동, 경주 등이다. 달기쪽은 약수, 서울, 대구, 부산, 청송 등이 유명하다.
식당 규모는 달기가 대형, 신촌이 중소형이다. 두 곳 모두 여관형 식당으로 출발했지만 이젠 여관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주왕산 약수가 체인점 브랜드로 떠오르자 두 곳 번영회에서는 약수 지키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두 곳 약수탕은 도로변에 있어 지나는 운전자들이 맘껏 가져갈 수 있다. 외지 닭백숙집 주인들은 청송 약수로 돈을 벌기 위해 트럭을 대놓고 한꺼번에 엄청난 물을 떠가고 있어 회원들이 불침번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닭은 상가에서 직접 잡지 못하고 외지 농장에서 대준다. # 청송 약수 닭백숙의 특징은 푸른빛 돌아
물맛이 더욱 좋아지는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오월 단오 전후 약수탕 주변 지역주민과 권성하 후손들이 모여 '영천제(靈泉祭)'를 지낸다.
이 의례에서부터 닭백숙의 유래를 찾는 게 옳은 듯 싶다.
제를 올릴 때 이곳 주민들은 양념이나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백숙을 끓여 제상에 올린다. 이 닭백숙도 안동 헛제삿밥처럼 70년대 들면서 본격 상품화된다. 초창기 약수탕 닭백숙에는 식재료로 마늘과 인삼밖에 넣지 않았다. 그런데 90년대들어 관광객들의 입맛이 다양해지자 대추, 인삼, 황기, 녹두, 당귀 등 한약재가 가미된 한방닭백숙 스타일로 특화된다.
청송닭백숙은 색깔이 푸르다는 게 특징이지만 달기와 신촌의 음식 스타일은 조금 다르다. 달기는 타지 닭백숙과 비슷한 스타일, 신촌은 닭불고기, 닭다리구이 등이 유명하다. 닭백숙만으로는 좀 느끼하다는 데 착안했다. 두 다리로는 백숙, 몸통은 갈아 김치부침개처럼 생긴 닭불고기를 구워냈다. 신촌에선 녹두가 많이 들어가고 닭에 찹쌀과 한약재 등을 한꺼번에 넣고 닭죽처럼 끓여낸 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