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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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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자료- ▒▒ 스크랩 두릉서당(杜陵書堂)
白波 김재환 추천 0 조회 87 15.04.01 21:0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 카페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언제나  편안한  쉼터 ... 이화에 월백하고를 찿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청하

 

    

 

이 글의 출처는 블로그 水山에서 가져온 글이며 글쓴이는 군계일학 님임을 밝힘니다. 

 

두릉서당(杜陵書堂)

 

 

 

 

 

 

 

 

 

 

 

 

명 칭 :  두릉서당(杜陵書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748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건 축 주 :  김융(金隆, 1549~1594)
건축시기 :  1569년 (선조 2)
소 유 자 :  김찬(관리자 : 김찬)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1991-11-23 지정, 1동

건축 구성
두릉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정면 4칸 중 오른쪽 끝 1칸은 방이다. 이 부분에서 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앞마루 없이 방의 앞 벽이 건물 끝 선까지 나가 있다.

정면 4칸 중 왼쪽 끝 1칸도 방이다. 이 부분에서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앞마루가 있고, 그 뒤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방이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서당 건물 앞쪽의 공간은 2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맨 아래는 낮은 공지이다. 아마도 주차장 영역인 것 같다. 그 위로는 1m 정도 높은 자리에 서당의 앞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앞마당은 좁다. 마당의 한쪽에 중간 크기의 둥글둥글한 돌을 3층으로 올려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올라가는 계단은 기단의 왼쪽 앞 끝부분에 있다. 건물의 앞 선을 이루는 5개의 기둥 중 왼쪽 3개는 원형이고, 오른쪽 2개는 각재이다. 앞 선의 기둥은 건물 끝 선, 또는 마루 끝 선까지 나와 서 있다. 마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오른편 방의 앞마루와 높이의 차이가 없다. 마루방 안에는 돌아가면서 현판들이 여럿 게시되어 있다. 현판은 마루 왼쪽 방의 벽 쪽으로는 게시되어 있지 않다.

서당의 왼쪽으로는 3m 정도 떨어져서 주사, 또는 관리사가 자리 잡고 있다. 관리사는 2채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앞쪽의 대문채인데 一자형 건물이다. 다른 하나는 관리사인데, ㄷ자형 건물이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허름한 건물이다. 우측 제 2칸에는 중문이 마련되어 있고, 좌·우의 나머지 4칸은 헛간이다. ㄷ자 건물의 안채는 터진 부분을 이 앞쪽 1선의 대문채를 향하고 있다. 이 대문채 건물과 안채 건물 사이는 좌우로 좁게 트인 口자형의 안마당이다.

관리사 건물은 북쪽 뒤편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 건물이 있고, 그 오른쪽 끝 1칸은 앞으로 1칸 정도 나와 있으며, 그 왼쪽 끝 1칸은 앞으로 2칸 정도 나와 있다. 그러니까 ㄷ자 모양의 중간 연결채들은 좌·우로 길이가 조금 어긋나는 것이다.

북쪽 一자 건물 뒤쪽 벽면은 전체적으로 흙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벽의 의미가 강하여 문 같은 것들도 최소한으로 달려 있다. 문은 왼쪽 끝 칸 아래편에 1쪽 나무문, 그 옆 제 2칸에 작은 방문 하나가 달려 있을 따름이다. 나머지는 다 벽인데, 조금 횡보가 가로질러져 있는 위치가 칸마다 다 다르다. 통일이 강조되는 미학이 기둥의 위치에 의해 변화의 미학으로 인해 아주 작은 변모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관리사의 벽들은 서당 건물의 벽들이 백회로 발라져 있는 것과는 달리 흙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리사 건물 왼쪽으로는 상당한 공간이 떨어져서 사당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 건물은 키 높이의 사각의 울타리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앞쪽에 반 칸 규모의 뜰이 마련되어 있는 건물이다. 앞 선으로 나와 있는 5개의 기둥은 원형이고, 나머지는 전부 각형이다.

이 사당 건물은 단정하고 반듯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처마의 끝 들림도 있는 듯 없는 듯 처리되어 있다. 일견 보아서는 직선의 처마선인데 자세히 보면 끝이 아주 미미하게 들려있는 것이다. 좌우의 풍판도 밑이 호선을 그리며 돌려져 있는데, 그 선이 너무 밋밋하여서 호선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부분에서도 멋 부림이나 파격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현판
두릉서당(杜稜書堂)
퇴계의 친필 두릉서당 현판‘두릉서당’은 정면 4칸 중 좌측으로부터 제 2칸 마루 안 뒤쪽 처마 밑에 게시되어 있는 현판이다. 두릉서당이라는 글씨는 퇴계가 손수 써 주었다고 한다.
중수기(重修記)
‘중수기’등이 마루방 안을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3중수기(三重修記)
‘3중수기’등이 마루방 안을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두릉서당중수기(杜稜書堂重修記)
‘두릉서당중수기’등이 마루방 안을 돌아가면서 걸려 있다.
차운(次韻)

마루방에 퇴계 이황의 시 차운(次韻) 시판 하나가 걸려 있다.

관련인물
- 퇴계 이황과 산법을 연구하였던 물암 김융


김융(金隆, 1549~1594)의 자는 도성(道盛)이고, 호는 물암(勿巖)이며, 본관은 함창이다. 고령 가야의 왕으로부터 세계가 시작된다. 중시조는 김균(金鈞)으로 감찰 어사를 지냈다. 정용랑장(精勇郞將) 김중서(金重瑞)의 대에 이르러 영주 동쪽, 신천리로 옮겨 살게 되었다.
학문과 행의로 이름이 높았던 호조 참판 김이음(金爾音)은 김융의 6대조이다. 김이음은 친상을 당했을 때 묘 아래 움을 짓고 살며 하루에 세 번씩 묘를 돌아보았는데, 좌·우로 지팡이 자국이 길을 이루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삼로(三路)선생이라고 불렀다. 태종 때 정려가 내려졌는데, 김융은 이 삼로공파에 속한다.
김융은 부정 김속(金續)을 낳고, 김속은 동래 현령 김한진(金漢珍)을 낳았다. 전성서 주부를 지낸 김시경(金諟敬)은 김융의 증조이고, 김구식(金龜息)은 조부인데 전주 교수를 지냈다. 김융의 부친은 김응린(金應麟)이다. 사재감 참봉을 지냈다. 배위는 현풍곽씨 참봉 곽자보(郭子保)의 딸이다.
김융은 14세에 지방의 선배인 소고(嘯皐) 박승임에게 배웠다. 종일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행동거지와 말씨가 매양 조용하고 단정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다 어른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중하게 여기며 매양 “이 아이는 끝내 큰사람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 때 퇴계 이황이 동남쪽에서 도학을 크게 일으켜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김융도 이황의 문하에 들었다. 이 때 김융의 나이 18세였다. 박승임은 김융을 보내며 시 한 수를 주었다.

열다섯 남아의 뜻
3천 제자와 나아가는 길이네
이 길을 지남으로 삼아 똑바로 달려가
자신을 채찍질 해 방황함이 없기를

김융은 퇴계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날로 공부가 성취하였다. 문하를 떠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이황은 시를 주어 물암의 공부를 독려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몸은 모습을 바꾸려는 물고기와 같으나
나의 가르침은 아직 그대 속에서 완성되지를 않았네
세월이 흘러가 이제 그대를 보내니 가서 공부에 힘쓰시라
궁벽지고 한적한 곳에서도 뜻은 크게 자라나니

이황은 또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대는 책을 볼 때 글자 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피는데 이 점에서 무리 중에서 그대와 견줄 사람은 없다. 전에 잘못 보았던 것을 그대로 인하여 새로 보게 된 부분도 많았다.”

이황은 특히 김융과 함께 산법(算法)을 궁구하지 못하게 된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김융의 공부 방법과 그 장점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김융은 잠시도 나태하지 않고 공부에 힘썼으며, 산 속에 작은 정사를 짓고 두릉정사(杜稜精舍)라고 편액을 걸었다. 특히 『중용』과 『대학』은 김융이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던 책이다. 그는 언제나 “요 순의 도리는 효제(孝悌)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황이 타계하자 김융은 심상(心喪)을 3년 하였는데, 매월 삭일마다 제물을 갖고 가서 제향을 올렸다. 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예문이 정한 대로 빈틈없이 행하여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임진왜년에 왜적이 침범하자 격문을 여러 지역에 보내 충의를 부추겼으며,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 이때는 왜적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아의 문제도 심각해서 어떤 지주가 구휼미를 내어 김융에게 구휼의 책임을 맡기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중이었으므로 사양하고 뒤에서 돕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상이 끝나자 조정에 천거되어 집경전 참봉이 되었으나 사은 하고는 돌아왔다. 1594에 타계하니 향년이 46세였다. 두릉서당 뒷산에 장례하였다.
인조 때 사림에서 그의 독행(篤行)을 추천하여 사첨봉사(司瞻奉事)에 추증되었고, 효종 때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차관이 추증되었다. 배위는 감천문씨인데, 1남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김기추(金起秋)이다.
김기추는 증직 이조 참판 풍산 김대현의 딸을 취해서 1녀 2남을 낳았으며, 문장과 행의로 이름을 얻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1576년(선조 9)에 탄생하여 28세에 타계한 것이다.
김기추의 장자는 김요필(金堯弼, 1601~1666)이다. 김요필은 처음 이름이 효회(孝會), 자가 직지(直之)로 통덕랑이다. 배위는 공인 선성김씨인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로 후사를 이었다.

봉화 > 봉화읍 > 적덕리
- 붉은 흙으로 도자기 굽던 마을, 적덕리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는 도촌과 석평 사이에 있다. 호골산의 서쪽, 호평들의 서쪽으로 물러앉아 있는 셈이다. 적덕리의 서쪽은 문단마을·도촌마을이고, 남서쪽은 영주의 이산마을이다. 봉화의 4번 군도로는 해저마을과 도촌마을 사이에서 시작하여 남동행하여 거촌마을을 향해 뻗어나간다. 이 군도로가 봉화의 서쪽 방향에서 남행하며 철길을 넘고 내성천을 건너는 지점이 바로 적덕리이다.
적덕리 앞 내성천은 적덕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적덕마을 본동으로 이끌어간다. 적덕리는 적덕(붉은댕이)·건정·동막골·두릉골·먹뱅이·분통골·서재골·소지굴·젯골 등의 자연부락을 포함하여 이루어져 있다.
적덕리는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토질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덕리에는 붉은 흙을 이용하여 도자기를 굽던 굴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내성천과 영주 봉화 사이의 국도 북쪽, 학정봉 기슭에 위치한다. 건정은 건조한 지역을 뜻하는 이름인데, 마을이 배의 형상이라서 기와집을 지어서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내성천 남쪽, 산기슭 쪽에 위치하는데 범람원의 한 끝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건조지역이라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믿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겠다.
두릉골은 두릉서당이 있는 마을이다. 적덕교를 넘어 남쪽으로 나가면 바로 오래된 소나무들이 심겨진 길이 나타나고, 그 동쪽으로는 마을이 보인다. 길은 직진하다가 동향으로 휘돌아 석평리로 나아가는데, 적덕교 너머 마을 앞에서 서쪽으로 또 작은 시멘트 다리를 넘으면 길은 논과 밭 사이를 휘돌아 서행하다가 크게 돌아들어서 남동 방향으로 파고든다.
작은 시멘트 다리에서 1km를 좀 더 나아가면, 두릉서당이 있는 마을 두릉골이다. 나지막한 언덕에 좁게 이어지는 골짝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이곳 잔솔이 우거진 산골짝에 두견새가 자주 와서 울어대었으므로 두릉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두릉골의 서쪽으로는 문단보가 있다. 먹뱅이는 매봉산 영역에 있는 마을이고, 서재골은 선성김씨들의 재사가 있는 마을이다. 잿골에도 인동장씨들의 재사가 있다.

출처 水山 글쓴이 군계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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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4.01 21:06

    첫댓글 시간을 내어서 한번 다녀와야 겠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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