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40십리길 눌제는 사라졌지만 현재도 이곳에는 많은물이 흐르는 곳으로 과거의 눌제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정읍시가 추진하고 있는 농업사 박물관 건립부지로 신태인에 위치한 도정공장이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고부 지역 고영섭 의원이 고부 관청리의 눌제유지를 농업사 박물관 건립 부지로 재검토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정읍시가 두 지역을 검토 중이며 어느 지역에 농업사 박물관이 설립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좌측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갑문이고, 우측이 해방 후 만들어진 갑문이다.> 건립예정 후보지인 신태인의 도정공장은 국내최초의 정부양곡 가공공장으로 일제시대 농경산업에 일대혁신을 가져 왔던 정미소로 도정과정을 통해서 쌀을 얻던 근대사회의 농업과 현대사회로 이어지는 농업의 발전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고부천에 흐르는 물은 영원과 백산을 지나 동진강으로 흐른다.> 이러한 도정공장이 비교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어 정읍시가 소 도읍 가꾸기 사업에 이 도정공장을 이용하여 농업사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고부 중학교 앞에 위치한 눌제유지비> 신태인에 비해 고부 눌제(訥堤)유지는 농업사 박물관 건립부지로 신태인의 도정공장에 비해 주목 할만한 상징물이 없어 농업사 박물관의 건립부지로는 미약해 보인다.
<과거 보천교 건물이 경매로 뜯겨져 영은사지이던 지금의 내장산과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 자재로 쓰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여기 눌제유지 앞에는 기록에 없는 보천교 건물 자재로 쓰여진 또하나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고부의 눌제 역시 농업사 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는 다양한 농경문화 발전의 숨은 문화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전형적인 전통한옥으로 지금은 버려져 붕괴 위기에 있다. 정읍시의 관리감독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부분이다.> 농업사 박물관 건립에 두 지역이 하나의 테마로 묶여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부지선정에 고부의 눌제유지와 신태인 도정공장 중 한쪽으로만 획일화되는 건립은 양쪽 지역 중 한곳에서는 억눌린 표현이 나타날 것으로 보여진다.
<빈집에서 1962년 통장이 발견되어 당시까지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농업사 박물관 건립후보지로 눌제유지를 주장하는 고부문화권 보존사업회 은희태 회장의 고부 눌제의 농업사박물관 건립에 따른 당위성은 쉽게 간과하기에는 이유 있는 지적들이 많다.
<빈집은 이렇게 한송이 야생화만이 남아 집을 지켜주고 있었다.> 고부면 관청리에 눌제는 과거 흥덕, 고창군 부안면을 비롯한 부안의 백산 지역과 함께 동학의 발생과 태동을 함께 했던 곳으로 역사적, 학술적인 측면에서 정부차원의 재조명이 시작되고 있는 곳이다.
<눌제유지앞에 위치한 고부중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의 수탈의 역사를 낳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창고가 있던 자리였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한복판에 위치했던 눌제는 농지가 하천보다 낮은 천정천(天井川)지역으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싸우며 척박한 환경을 슬기롭게 일구어 왔던 곳으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일제는 이곳에 우리문화 죽이기의 일환으로 눌제유지 앞에 수탈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정읍 분소를 세워 중종 초기에 폐제 된 이후 곡창지대로 변화되었던 이곳 농민들의 땅을 헐값으로 빼앗아갔던 곳이다.
<고부중은 올해로 50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이지만 가까운 관청초등학교처럼 동문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열악한 학교로 변해있다.> 동양척식회사만을 세웠던 일제는 나아가 고부관아가 있던 자리를 허물어 지금의 고부 초등학교를 짓는가 하면 당시 고부군에 속해있던 당시의 흥덕과 백산을 고창군과 부안군으로 각각 분리하여 고부군을 작은 면 단위로 전락 시켰고 인근지역으로부터 고립되게 하여 현재까지도 일제가 인위적으로 만든 고립된 면소재지로 남아 있다.
<비교적 잘 가꾸어진 화단이 학교를 찾는 학생들을 환하게 반기는듯 했다.> 소외되고 고립되었던 많은 역사만큼이나 표현되지 못한 고부의 자랑도 많다.눌제는 호남(湖南)지방의 호남이라는 지명을 유래하게 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학교에 민속자료들을 보관하는 장소는 보기에도 정겨운 옛 교정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한 축조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따르면 삼한시대, 마한(馬韓)에 축소되어 김제의 벽골제 익산의 황등제와 함께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제방을 막는 삼호(三湖)로 불리어지며 호남지방이란 지명을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학교의 현관부터 전시대에 전시된 고 문서들이 눈에 띄여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끼게 했다.> 눌제(訥堤)가 있던 곳에는 현재까지도 과거의 눌제유지를 짐작케 하는 고부천(古阜川)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은 인근의 영원면과 부안의 백산면을 지나 동진강으로 흐른다.
<무엇을 예견하여 이러한 민속자료들을 모아왔던 것일까?> 이곳에는 호남의 지명을 낳은 눌제유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유지비에는 "고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이곳 눌제의 규모는 제장(堤長)이 일천이백보(1보는 약 1.5m)이고 주위는 40리나 되었다"라고 기록해 두고 있다.
<교실 두칸을 다 차지한 민속자료들은 복도에 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이 눌제가 1420년 세종 원년에 홍수로 유실되어 600결(현재의 30만평)이 침수되자 전라감사 장윤화에게 명하여 보수토록 명하였으나 이듬해 또 다시 농경지가 침수되어 유실되자 당시의 감찰사가 근본적인 폐제를 주장하자 8천5백명만 인원을 투입하면 될텐데 폐제는 당치않다는 주장이 있어 세종은 전 현감인 곽휴를 시켜 다시금 눌제 제방을 축조케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기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와 황토 항아리가 우리를 처음 맞았다.> 이러한 빈번한 눌제 피해로 이곳 주민들의 원성이 잦아지다 중종 초기에 폐제되어 논으로 변했으며 현재는 이곳의 광활한 평야지로 변해 정읍의 특산품인 단풍미인 쌀을 생산하고 있다.
<크기별로 분류되어 전시된 옹기들이 보인다.> 고부문화 보존회 은희태 선생에 따르면 "과거의 고부 면민들은 일제수탈의 현장인 구 동양척식창고로 쓰이던 곳에 고부 중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배출하였나 고부 관아 터가 있던 고부 초등학교는 그대로 남아 눌제와 함께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역사를 전하며 역사적인 재조명이 다시금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려 왔다"라고 전했다.
<시대적 추정이 불가능했던 다지와 옷장이다.> 은희태회장은 또 눌제와 인접한 고부중학교에는 농업사 박물관 건립을 예견하여 모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농업사 박물관이 건립되면 전시할 수 있는 농업발달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들 확보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나섰다.
<농경사회를 지켜주던 생활도자기와 놋 그릇들이 보인다.> 고부중학교에 모아진 민속자료들은 고부중학교에 은희태회장이 근무하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 초반의 것으로 학교 학생들로부터 받아 모아둔 것들과 자신의 집에서 가져다 놓은 민속자료들로 1,014점이 확보되어 있다고 밝혔다.
<놋 세숫대야, 놋 국자, 놋 밥그릇...,> 은 회장이 처음 모으기 시작했던 민속자료는 농경문화에 쓰이던 자료들로 주생활용품19종 103점, 식생활81종 385점, 의생활44종 256점, 일반생활용품61종 144점 고 서류23종 23점, 생업자료14종 25점, 사진자료2종 78점, 총 244종 1,014점이다.
<북과 나무 절구는 공간 확보를 위해 한켠에 서있다.> 이렇게 모아진 중요 민속자료들은 2002년 당시 고부중의 교장으로 있던 이병태교장의 노력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현재는 동학교 사회 선생님인 김현숙 선생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상관 이상의 관직만이 입었다는 두마리 학이 수 놓인 관복이 보인다.> 중요민속 자료를 처음 모으기 시작했던 은희태선생은 이러한 중요 민속자료를 활용하여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최근 고부문화 보존회를 사단법인화 하여 활성화하려는 노력과 함께 지역 고부의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여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게 노획한 조총도 전시되어 있다.> 은 회장에 따르면 "중국의 문헌 삼국지(三國志)에는 옛날 마한의 기름진 농경지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 중엽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삼제(三堤)에 저수를 해 놓으면 흉년이 없으며 국세(國稅)의 과반이 호남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라고 전하고 "이러한 고부의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한 놀제의 가치는 이곳에서 모아진 중요 민속자료들과 함께 농도 정읍의 특성을 살리고 고부문화의 뿌리를 후대에 전하는 산 교육장으로 남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농경사회를 주도하던 농기구와 대나무 광주리가 보인다.> 정읍시가 추진하는 농경문화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농업사 박물관 건립에 이러한 민속자료가 쓰여지기를 고대하는 고부문화 보존회는 덧붙여 "기원전 2~3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볍씨 자국 토기편이 이곳과 가까운 부안군 주산면 소산 리에서 출토되었던 점"등을 설명하고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해 농업사 박물관은 이러한 이유에서 살아있는 역사의 고부 눌제에 세워져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현시대엔 사라져 버린 농경사회의 유물들이 이렇듯 전시되어 있었다.> 농업사 박물관이 고부와 줄포를 잇는 고부면 관청리에 위치한 눌제유지 앞에 지어 진다면 고부 중학교를 비롯한 고부여중 관청초등학교 고부초등학교를 잇는 지역문화의 균형발전에도 크게 기여 할 것으로 보여진다.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않은 신석기 시대의 돌도끼도 전시되어 있다.> 주목받지 못하는 눌제의 현실처럼 눌제앞에 자리한 고부중학교는 전교생이 총 20명으로 인근의 고부여중 전교생 18명과 2006년 통폐합을 앞두고 있는 열악한 환경에 있다.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부싯돌> 인근의 관청 초등학교는 2003년 전교생 16명으로 폐교위기의 학교를 특기, 적성 교육으로 올해 전교학생 수를 46명으로까지 늘리며 학교와 지역활성화를 꽤하고 있지만 이한규 교장의 노력과 특성화된 교육만으로 이 지역의 전체적인 발전을 기대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나막신으로 보여진다.> 고부중학교는 1976, ~ 1978년에는 전교생이 2,000명이 넘는 24학급의 큰 학교였으며, 1979년 3월1일 현재의 고부여중을 사립으로 전환하여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4학급을 고부여중으로 보내는 등 20학급으로 까지 학급을 단축했던 대형 학교에서 현재는 전학년 학생이 20명이 공부하는 열악한 학교로 변해있다.
<어느시대 유물일까? 나무 등잔도 전시되어 있다.> 고부 중학교는 이곳 호남평야에서 동양척식이 이루어지던 동양척식 창고를 교실로 개축하여 처음 만들어 졌던 학교로 1951년 고부 중학교 창립기성회의 결성이후 1954년 학교설립인가와 함께 수업에 들어가 현재까지 50회 졸업에 7,700명의 졸업생을 둔 학교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옷고름을 다리던 인두도 전시되어 있다.> 한때 고부 관청리는 지리적으로 부안군 줄포면과 고부를 잇는 중간 지역에 위치하여 교통의 사각지로 불려 지다가 최근에 가까운 줄포에 서해안 고속도로 나들 목이 생기며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을 잇는 도로변으로 이곳을 지나는 차량의 빈도가 많아져 교통의 요충지가 된 곳이다.
<숱을 놓아 옷을 다렸던 재래식 다리미> 이러한 고부면 관청리의 열악한 환경은 이제 수많은 역사와 민속자료들을 간직한 채로 잊혀져 있다가 최근에야 그 가치가 부각되며 고부와 함께 새롭게 어필되고 있다.
<쌀을 이곳에 담아 양으로 단위를 구분했던 되 이다.> 농업사 박물관은 건립되는 해당 지역의 농경문화와 함께 발전한 역사적 애환과 정신이 담겨져야 한다.
<이것은 쌀의 단위를 나타내던 도구중 가장큰 말 이다> 고부와 관청리 신흥리 부안의 줄포 곰소를 잇는 눌제의 제방 길 위에는 수없이 많은 소금과 쌀의 수탈과 동양척식회사의 만행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다양한 죽 제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일제의 잔재인 일본식 건축물과 고부에 있는 구 고부군 농협 자리에는 아직도 일제가 쓰던 대형 금고가 아직도 남아있으며 보천교 건물을 뜯어다 지었다는 전통 한옥이 남아있다.
<현시대에는 볼수없는 소달구지 바퀴도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지역의 소도시 가꾸기 사업에 이러한 고부의 애환의 역사는 하루속히 문화적 재조명을 통해 과거에 타올랐던 동학의 횃불처럼 살아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그것이 비록 농업사 박물관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시금 피어나는 꽃들처럼 이제는 고립된 지역이 아닌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새롭게 주목되는 지역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곳에는 전시되기를 기다리는 또다른 민속자료들이 전시대 밑에 방치되고 있다.
<중요 미속자료들을 관리하며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했던 은희태,김현숙, 정광윤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곳을 안내하고 지역사 문화를 찾아 밝은빛을 비추게 하시는 영원면의 곽상주선생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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